김백겸의 새로 쓰는 시인론
박 용 래 年 譜
1925년 음력 1월 14일, 충청남도 논산군 강경읍 본정리에서 출생.
1934년 강경읍 중앙보통학교 입학.
1939년 중앙보통학교 졸업. 강경상업학교 입학.
1940년 읍내 황산교 너머로 출가했던 누이가 초산의 산고로 사망, 이 충격으로 삶에 회 의를 품기 시작하였으며 우울한 성격으로 변함.
1943년 강경상업학교를 전교 수석으로 졸업. 조선은행 서울본점에서 처음 근무 시작.
1944년 블라디보스독행 조선은행권 현금 수송열차의 입회인을 자청하여 두만강을 건너갔 다 옴. 조선은행 대전지점 개설에 의해 대전으로 전근.
1945년 7월초, 징집영장을 받고 사직. 8월 14일 대전역을 떠나 군용열차편으로 상경, 이 튿날 용산역에 도착하여 해방을 맞이함.
1946년 일본에서 귀국, 김소운 선생을 만나 문학을 이야기 함. 계룡산의 사찰과 부여 일 대 백제
유적을 답사하면서 시를 습작. 정훈, 이재복, 박희선, 하유상, 원영한 등 과 “동백시인회”를 조직하고
동인지 『冬栢』의 간행과 함께 시를 발표함. 호서 중학교 교사로 취임하여 국어와 상업을 강의, 특히 동료
교사인 화가 白洋씨의 아뜰리에에서 미술과 음악에 심취함.
1948년 대전 보문중학교 교사로 전근.
1950년 국민학교 교사 채용시험 합격. 6·25동란 발발, 사변 중에 부모를 사별함.
1953년 상경하여 도서출판 創造社의 편집원으로 근무.
1955년 중학교 국어과 준교사 자격을 취득. 대전철도학교 교사 취임. 李台俊과 결혼.
1956년 대전철도학교 사임. 부인 간호원으로 복직. 1955년『현대문학』에「가을의 노래」로 박두진 선생의 추천을 받고 이후「黃土」길,「땅」으로 3회 추천 완료.
1957년 장녀 魯雅 출생.
1959년 차녀 燕 출생.
1960년 한밭중학교 교사 취임.
1961년 당진군 송악중학교 교사로 전근. 삼녀 水明 출생. 제 5회 충청남도 문화상 수상.
1965년 송악중학교 사임. 대전시 오류동에 정착.
1966년 사녀 眞雅 출생.
1969년 한국시인협회 주관 “오늘의 한국시인선집”으로 첫시집『싸락눈』(三愛社) 출간.
「저녁눈」으로 『현대시학』제정 제 1회 작품상 수상.
1971년 한성기, 임강빈, 최원규, 조남익, 홍희표 등 대전의 시인들과 6인 시집『靑蛙集』 출간. 장남 魯城 출생.
1973년 대전북중학교 교사 취임. 고혈압의 증세로 수개월 후 사임.
1974년 한국문인협회 충남지부장 피선.
1975년 제2시집『강아지풀』출간.
1978년 『문학사상』에 에세이「호박잎에 모이는 빗소리」연재.
1979년 제3시집「白髮의 꽃대궁」출간.
1980년 7월, 교통사고로 입원치료. 11월 21일 오후1시, 심장마비로 자택에서 별세(향년
55세). 충남문인협회장으로 영결. 12월 사후, 시「먼 바다」와 시집「白髮의 꽃 대궁」으로 『한국문학』 제정
제7회 한국문학작가상 수상.
1984년 10월 박용래 시선집「먼 바다」(창작과 비평사)출간.
10월 27일, 대전 보문산 사정공원에 박용래 시비 제막.
1999년 박용래문학상 제정 : 대전일보사
1회 《비는 수직으로 서서 죽는다》 허만하
2회 《슬픔에 손목 잡혀》 나태주
3회 《봄 파르티잔》 서정춘
4-6회 주최측 사정으로 휴지
7회 《말랑말랑한 힘》 함민복
“行間의 장미”를 추구한 눈물 시인, 박용래
1.눈물의 해석
‘열사는 슬픔이 많고 미인은 눈물이 많다’고 한다. 일제시대 독립운동을 하던 우국지사의 생애를 영화로 옮겨놓은 것 같지만
이와는 다른 눈물이 있으니 박용래 시인의 눈물이다. 나같이 눈물이 많지 않은 사람도 눈물에 젖어 바라보는 세상과 사물은 확실히
일상사의 풍경과는 다르다(어릴 때는 작품이나 사물의 감동으로 흘렸던 눈물의 의미를 알았던 적이 있었으나 성인이 되어 사물을
바라보는 눈이 强固해 지면서 눈물로 이해하는 세상의 의미는 희미해 졌다).
많지 않은 박용래 시인의 시 전편을 읽어보면서 다시 느낀 점은 그의 눈물이 묻은 사물의 풍경은 마약이나 술에 취해 바라보는
일상의 일탈과도 유사하다는 점이었다. 고흐의 그림을 보면 화폭에 흐르는 색감이 일상과는 다른 색깔이어서 광기가 느껴진다. 생
레미 병원에서 정신분열에 의한 자살로 마친 그의 생애는 사물의 색감이 달리 보이는 병을 앓고 있었다는 연구논문이 있다. 마찬가지로
박용래시인이 눈물에 젖은 눈으로 보는 세상은 그만의 광기였다는 점을 말하고 싶다(고흐처럼 격렬한 광기가 아니라 박용래의 슬픔이
스며있는 소박한 광기이다).
박용래의 눈물에 대해서는 여러 일화와 증언이 있다. 박용래 시인이 타계한 후 창비에서 나온 시집 『먼 바다』부록인 이문구 선생의 『박용래 略傳』을 인용해 본다.
“그로 하여금 눈물을 자아내게 한 것은 삶의 부질없음, 누리는 것의 덧 없음, 헤어짐이 속절 없음 따위, 인생의 流轉에서
오는 三災八難이 아니었다. 그는 자주 울었다. 내가 울지 않던 그를 두 번밖에 못 보았을 정도로 그리 흔히 울었다. 모든 아름다운
것들은 언제나 그의 눈물을 불렀다. 갸륵한 것, 어여쁜 것, 소박한 것, 조촐한 것, 조용한 것, 알뜰한 것, 인간의 손을 안탄
것, 문명의 때가 아니 묻은 것, 임자가 없는 것, 아무렇게나 버려진 것, 갓 태어난 것, 저절로 묵은 것....그러기에 그는 한
떨기의 풀꽃, 한 그루의 다복솔, 고목의 까치둥지, 시래기 삶는 냄새, 오지굴뚝의 청솔타는 연기, 보리누름철의 밭종다리 울음,
삘기 배동 오르는 논두렁의 미류나무 호드기 소리, 뒷간 지붕위의 호박넝쿨, 심지어는 찔레덤불에 낀 진딧물까지, 그는 누리의 온갖
生靈에서 천체의 흔적에 이르도록 사랑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사랑스러운 것들을 만날 적마다 눈시울을 붉히지 않은 때가 없었다.”
유명한 시 「九節草」에는 아름다움으로 인한 눈물의 미학이 스며들어있다
九節草
누이야 가을이 오는 길목 구절초 매디매디 나부끼는 사랑아
내 고장 부소산 기슭에 지천으로 피는 사랑아
뿌리를 대려서 약으로도 먹던 기억
여학생이 부르면 마아가렛
여름모자 차양이 숨었는 꽃
단추 구멍에 달아도 머리핀 대신 꽃아도 좋을 사랑아
여우가 우는 秋分 도깨비불이 스러진 자리에 피는 사랑아
누이야 가을이 오는 길목 매디매디 눈물 비친 사랑아
짦은 단어의 詩型을 고집한 여타 시와는 달리 산문시 형태를 취했지만 운율에 스며있는 절제미는 여전하다. 내 주관이지만 이
시는 송수권 시인의 출세작 「산문에 기대어」의 原型심상으로도 보일만큼 이미지와 운율이 잘 매치된 시다. 눈물은 고통과 설움이 아닌
아름다움으로 세상을 보는 다리역할을 하고 있다. 시란 결국 사물의 표상인 단어와 단어의 관계를 드러내는 일이다. 문제는 어떤
관계를 드러내야하는가이다. 시는 주체의 정신에 관여하는 타자의 존재를 드러내는 일이라고 한다. 메를로 퐁티에 의하면 “개념
언어로는 존재의 의미를 온전하게 드러낼 수 없다”고 한다. “가시적인 세계에 속해 있으면서도 보이지 않게 은폐되어 있는 지각차원의
비가시적인 존재의미”는 “예술이 저의 가시적인 배치구조 속에서 우리에게 내보이고 있는 의미”로서 드러난다고 주장한다. 쉽게
말하면 시(예술)는 사물의 어두운 침묵 같은 의미를 행간에 포함하고 있으며 독자는 드러난 의미로서 보이지 않는 의미를 느낀다.
물론 작가가 먼저 느낀 것을 그가 드러낸 작품의 구조 안에서 독자는 재해석으로 느낀다.
박용래시인이 “들꽃처럼 피어나는 마음”으로서 사물 간에 다리를 놓은 무기가 눈물이다. 눈물은 생리학적으로는 눈을 보호하기
위한 기전이지만 슬플 때에 다량의 눈물이 나오는 이유는 학실히 알려져 있지 않다고 한다. 경험상 정신의 카다르시스와 관계한다는
정도만 알려져 있다. 시도 인간정신의 카다르시스작용이 있으므로 그 면에서는 시는 눈물과 상통하며 둘 다 비일상적인 의식상태와
관계한다. 사물은 그 존재의미를 일상적인 의식에서는 일상적인 모습으로 비일상적인 의식에서는 비일상적인 모습으로 드러낸다. 인간의
마음이 보고자하는 대로 구미호같은 정체를 드러내지만, 어느 모습이 사물의 참다운 모습인가는 정의 할 수 없다. 그러나 예술가는
시(poesie)의 상태가 사물의 진실한 모습을 드러낸다고 믿는 사람이고 박용래는 시/눈물로 바라본 사물이 진실이라고 믿은
시인이라고 말할 수 있다.
눈물이 많았던 시인이었으나 박재삼의 “울움이 타는 강”의 눈물처럼 시의 전면에 화려하게나서지는 않는다. 박용래의 눈물은 절제된 감정과 지적인 통제아래 드러난다.
점 하나
꿈꾸는
아가 눈 밑에 깨알
점 하나
잠자는
아빠 눈 밑에 깨알
점 하나
샘가,
확독에
백년이 흘러
섬돌에 맨드라미 피는 날
맨드라미 꽃판에
깨알 점
한 됫박
눈물받이 눈물점
아가와 아빠의 눈밑에 있는 점을 이미지로 대비시키고 “샘가,/확독에/백년이 흘러”로 긴 세월이 흐른 시간을 암시한 후
“섬돌에 맨드라미 피는 날/맨드라미 꽃판에/깨알 점/한 됫박”의 이미지를 다시 병치시키고 인간의 눈아래 점과 맨드라미의 꽃씨의
점과 관계를 아날로지(analogy)로 드러내고 있다. 박용래시인에 의한면 이 모두가 "눈물받이"로서의 “눈물점”이다. 살아있는
존재란 눈물을 흘리는 존재이며 눈물로서 정체성을 드러낸다는 암시이다.
이 시에서는 “확독에 /백년이 흘러”라는 표현이 지금과 과거의 존재 모두가 생명은 눈물을 흘려왔고 지금도 흘리고 있음을
암시한다. 시인의 무의식이 드러낸 비유이겠지만 “맨드라미 꽃판에/깨알 점/한 됫박”의 표현이 식물은 인간보다 보다 많은 눈물을
흘려야하는 존재라는 점을 강조한다.
이런 지적인 절제의 표현에도 불구하고 사생활은 눈물로 반죽을 하고 사는 시인이었다. 역시 이문구선생이 쓴 에피소드에는 이 일화가 생동감있게 그려져 있다.
.....
“차가 두만강 철교를 근너가는디....오! 두만강....오,두만강! 내 눈에는 무엇이 보였것네?
눈! 그저 눈! 쌓인 눈, 쌓이는 눈....아무것도 안 보이고 눈 천지더러. 그 눈을 쳐다보는 내 음은 워땠것네? 이 내 심정이 워땠겄어?“
“워땠는지 내라 봤으야 알지유.”
“그러냐. 야, 너두 되게 한심하구나야. 그래가지구 무슨 문학을 한다구. 나는...나는 울었다. 그냥 울었다. 두만강 눈송이를 바라보며 한 없이 그냥 울었단 말여...”
어느덧 그의 양어깨에 두만강의 물너울이 실리면서 두 볼에는 강이 흐르고 있었다. 식민지 시대의 두만강이 흐르고 있었다.
“오, 두만강....오, 두만강의 눈....오.....오....”
그는 아침 아홉시 반부터 두만강을 부르며 울기 시작하여, 그날 밤 9시 반 넘어 여관방에 쓰러져 꿈결에 ‘두만강의 뱃노래’를 부를 수 있게 되기까지 쉬지 않고 울었다.
( 『박용래 略傳』에서 인용)
2.‘꿈속의 꿈’에 사는 박용래
교과서나 학습지의 참고에 나온 박용래의 시의 해설을 보면 천편일률적이다. ‘한자어를 배제한 고유어의 사용, 향토적 서정에
바탕을 둔 비유, 쉼표와 의태어의 적절한 사용, 그리고 감정이입의 방법으로 시적효과를 높이고 있다’는 해석이 그 것이다. 한
시인을 들여다보고 해석하는데 이런 식의 수박 겉 핧기는 박용래의 참 모습을 들여다 볼 수 없다. 박용래의 다음 시를 가지고 그가
사물을 바라보는 시적인 눈을 함께 공유해보기로 한다.
진눈깨비
중학교 하급반 땐 온실 당번이었어라. 질펀히 진눈깨비라고 오는 늦은 下午라치면 겨운 석탄桶 들고 비틀대던 몇 발자국 안의
설핏한 어둠. 지우고 지워진 지 오래건만 강술 한잔에 떠오누나. 바자 두른 온실 二重窓에 볼 비비며 눈 속에 벙그던 히야신스랑
福壽草랑 오랑캐 꽃 빛깔의 指紋, 또 하나의 나. 오 비틀거리며 떠오누나. 바랜 트럼펫의 흐느낌
-언뜻 어제 등에 업혀 가던 사람.
박용래에게 시란 비일상적인 의식아래 만들어지는 창작이다. 대표작인 “저녁 눈”도 눈이 내리는 마굿간을 배경으로 만들어진
것처럼 이 시도 온실당번인 중학교시절에 내린 진눈깨비의 추억아래 창작되었다. 강술(깡술인가 했더니 차조와 누룩으로 밀가루
반죽처럼 되게 오메기떡을 만들어 즉석에서 물에 타서 마시는 술이라고 한다. 한마디로 독한 술로 이해하면 되겠다)에 영화처럼 떠오른
풍경은 “히야신스랑 福壽草랑 오랑캐 꽃 빛깔의 指紋”이다. 시 속의 화자인 “또 하나의 나”는 술에 취하고 시에 취해 “오
비틀거리며 떠오누나”의 시행처럼 夢幻에 젖은 마음은 “트렘펫의 흐느낌”이라는 청각이미지로 변이된다. 마지막 행이 좀 모호하다.
“-언뜻 어제 등에 업혀 가던 사람”은 화자의 투사인데 이런 심상이 갑자기 떠올랐다는 뜻인지 꿈꾸는 화자는 현실의 등에 업혀 가는
존재라는 결론인지 작자의 해석이 좀 필요한데 돌아가시고 안계시니.
꿈속의 꿈
地上은 온통 꽃더미 沙汰인데
진달래 철쭉이 한창인데
꿈속의 꿈은
모르는 거리를 가노라
머리칼 날리며
끊어진 弦 부여안고
가도가도 보이잖는 出口
접시물에 빠진 한 마리 파리
파리 한 마리의 나래짓여라
꿈속의 꿈은
地上은 온통 꽃더미 沙汰인데
살구꽃 오얏꽃 한창인데
꽃이 핀 봄은 현실의 풍경이지만 박용래에게는 “꿈속의 꿈”의 풍경이다. 이 세계란 거대한 꿈이며 우리가 사는 현실이란
거대한 꿈속의 작은 꿈이라는 暗喩가 들어가 있다. 그 안에 갇힌 화자의 일생이란 “접시물에 빠진 한 마리 파리/파리 한 마리의
나래짓여라”라는 장자적 세계관을 보여주고 있다. ‘장자의 나비’와 모티브가 같은데 장자의 나비가 꿈과 현실(역시 꿈)을 오가는
자유로운 사물의 존재와 운동을 드러냈다면 이 시의 파리는 접시물에 빠져서 “出口”가 없는 상황을 보여준다. 박용래의 정신경지가
장자만큼 초월경지에 이르지 못한 모습이지만 꿈에 갇힌 시인의 슬픈 마음은 “地上은 온통 꽃더미 沙汰”라는 풍경/꿈의 상황과
대비되어 더 슬프게 다가온다. “장자의 나비”는 표현의 아름다움을 드러낸 詩이면서 동시에 세계와 사물의 진리를 드러낸 언술이기에
철학이된다. 시가 세계와 사물의 진리를 드러낸 언술이 아니라는 뜻은 아니다. 시는 세계와 사물의 진리인 원관념이 숨고 보조관념인
표현만 드러내는 暗喩일 때 시가 된다. 박용래의 상기 시는 소박하지만 박용래를 눈물에 젖은 감정이입의 방법으로 사물을 해석했다고
단순히 볼 수 없게 하는 시다.
3 환상으로 덧칠해서 보는 이상향
박용래의 시는 주로 자연에서 본(어린 날의 시골에서 자란 체험이 녹아있다) 사물과 풍경을
간결한 이미지의 수법으로 그려내는 데 있다. 그 풍경들은 현실에서 멀어져 있는 유토피아의 풍경이기에 동경과 願望이 스며있는
이미지이다. 유토피아의 사전적 정의는 ‘현실에서는 존재하는 않는 理想鄕’이지만 인간이 유토피아를 꿈꿀 때는 현세와의 시간적,
공간적 연속선상에서 꿈꾼다. 불교의 극락과 기독교의 천국은 영혼이 가는 곳인데도 인간의 육체가 거주하는 것처럼 상상이 이루어지는
것을 보면 이상향이란 지금 여기의 현실과 관계가 있다. 육체(혹은 영혼)가 긴 시간을 걸어가면(시간을 역으로 돌려 어머니의
자궁으로 돌아가도 마찬가지이다) 언제인가는 그 장소에 도달할 수 있다는 믿음이 깔려있다. 박용래의 무의식에는 미래의 행복과 비전이
보이지 않는다. 그의 유토피아는 지금현실에서는 사라져버린 과거의 어린시절에 있다.
울타리 밖
머리가 마늘쪽같이 생긴 고향의 少女와
한여름을 알몸으로 사는 고향의 少年과
같이 낯이 설어도 사랑스러운 들길이 있다
그길에 아지랑이가 피듯 태양이 타듯
제비가 날듯 길을 따라 물이 흐르듯 그렇게
그렇게
天然히
울타리 밖에도 화초를 심는 마을이 있다
오래오래 殘光이 부신 마을이 있다
밤이면 더 많이 별이 뜨는 마을이 있다.
박용래의 시의식은 지금 여기의 현실이 있는 웉타리 안에서는 미학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가 아름다움을 느끼는 장소는 현실
밖(시 제목이 암시하듯 「울타리 밖」)이다. 위 시에서 화자가 바라보는 시점은 어린 날이다. “밤이면 더 많이 별이 뜨는 마을”은
지금 현실에서도 별은 뜨지만 과거에는 인간의 이상과 아름다움을 상징하는 별이 더 많이 떠서 황홀한 세계였다 라는 말을 하고
있다. 도연명의 『도화원기(桃花原記)』에 나오는 스토리와 비슷하지 않은가? 도화원기를 인용해 보면 “어느 날 어부가 고기를
잡기위해 강을 거슬러 올라갔다. 한 참을 가다보니 물위로 복숭아 꽃잎이 떠내려 오는데 향기롭기 그지 없었다. 향기에 취해 꽃잎을
따라가다 보니 문득 앞에 커다란 산이 가로막고 있는데 양쪽으로 복숭아 꽃이 만발하였다. 계곡 밑의 동굴을 지나가니 그 곳에는 너른
땅과 기름진 논밭, 풍요로운 마을과 뽕나무, 대나무 밭등 이 세상 어느 곳에서도 볼 수 없는 아름다운 풍경이 펼쳐있었다”는
내용이다.
도화원기에서 강이란 시간의 상징이고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황금시대의 이상향을 만나는 폴롯이 주제다. 박용래에게도 시인의
황금시절은 “머리가 마늘쪽같이 생긴 고향의 少女와/한여름을 알몸으로 사는 고향의 少年”이 사는 과거의 고향이다. 다음 시
「월훈」에도 첩첩산중에 사는 노인의 삶이 그려져 있다. 月暈은 달무리인데 사물을 신비롭게 하는 後光과 심상이 닿아있다.
노인(박용래 자신의 투사)이 사람의 인적이 없는 산중에서 달무리의 아름다움이 깃든 사물을 보면서 사는 청빈생활을 이상향으로
묘사하고 있어 같은 주제를 말한다.
月 暈
첩첩 山中에도 없는 마을이 여긴 있읍니다. 잎 진 사잇길 저 모래뚝, 그 너머 江기슭에서도 보이진 않습니다. 허방다리 들어내면 보이는 마을.
坑 속 같은 마을. 꼴깍, 해가, 노루꼬리 해가 지면 집집마다 봉당에 불을 켜지요. 콩깍지, 콩깍지처럼 후미진 외딴집, 외딴집에도 불빛은 앉아 이슥토록 창문은 木瓜빛입니다.
기인 밤입니다. 외딴집 老人은 홀로 잠이 깨어 출출한 나머지 무우를 깎기도 하고 고구마를 깎다, 문득 바람도 없는데
시나브로 풀려 풀려내리는 짚단, 짚오라기의 설레임을 듣습니다. 귀를 모으고 듣지요. 후루룩 후루룩 처마깃에 나래 묻는 이름 모를
새, 새들의 溫氣를 생각합니다. 숨을 죽이고 생각하지요.
참 오래오래, 老人의 자리맡에 밭은 기침소리도 없을 양이면 벽 속에서 겨울 귀뚜라미는 울지요. 떼를 지어 웁니다, 벽이 무너지라고 웁니다.
어느덧 밖에는 눈발이라도 치는지, 펄펄 함박눈이라도 흩날리는지, 창호지 문살에 돋는 月暈
4.현실과 일상의 틈으로 스며나오는 무의식/미의식
일상인은 과거의 희로애락을 무의식로 보내고 현재의 상황에 주의집중하는 삶을 살도록 되어있다(가혹한 현실상황아래서는 더욱
그렇다). 그러나 박용래의 시적인 눈은 현실과는 거리가 있는 사소한 상황이나 사물에 미학을 느낀다. 라깡은 사물을 욕망하는 주체의
‘주이상스’를 말하였다. 삶의 목표나 욕망대상으로서의 타자는 상상계와 상징계에서 각각 다른 모습의 가면을 쓰고 나타나지만
박용래에게는 사회가 인정하는 대타자로서의 ‘지위와 인격과 부’같은 목표나 야심이 보이지 않는다. 그가 추구하는 대상은 너와 나의
구분이 없는 황홀경으로서의 꿈, 환상같은 상상계의 이미지이다. 그가 현실의 상황을 리얼하게 그린 다음 시에도 그의 마음은 상징계의
현실이 아닌 상상계의 이미지에 마음을 빼앗기고 있다
제비꽃2
수숫대 앙상한 육·이오의 하늘. 어쩌다 襤褸를 걸치고 내 먹이를 위해, 半裸의 거리 변두리에 주둔한 미군부대의 차단한
病棟, 한낱 사역부로 있을 때. 하루는 저물녘 동부전선에선가 후송해온 나어린 異國兵士. 그의 얄팍한 수첩 갈피에서 본, 접힌 나비
모양의 꽃이파리 한 잎. 수줍은 듯 살포시 펼쳐보이던 떨리던 손의 꽃이파리 한 잎. 어쩌면 따를 가르는 포화 속에서도 그가 그린
건 한 점 풀꽃였던가. 어쩌면 자욱히 화약냄새 걷히는 황토밭에서 문득 누이를 보았는가. 한 포기 제비꽃에 어린 날의 추억도.
흡사 하늘이 하나이듯. 그날의 차단한 病棟, 흐릿한 야전침대 머리의 한 줄기 불빛, 연보라의 미소.
육이오라는 전쟁상황에서 화자는 남루한 옷을 걸치고 미군부대의 병동에서 사역을 하고 있다. 화자는 부상을 입은 미군병사의
“얄팍한 수첩 갈피에서” “접힌 나비 모양의 꽃이파리 한 잎”을 보고 있다. 화자는 꽃이파리에서 “풀꽃”을 “황토밭에서 문득
누이”를 본다. 박용래는 현실(상징계)을 뚫고 들어오는 꿈(상상계)으로서의 사물에 마음을 빼앗기고 있다. 극한 현실에서 권력이나
부로 몸을 보호하고자 하는 현실가의 눈으로는 이해가 어려운 상황이다. 그 에게 사람이 죽어가는 전쟁병동에서 “제비꽃”의 “연보라의
미소”를 바라보고 있는 시인의 눈이란 덜 된 상상계 아이의 눈일 것이다. 그러나 시는 라깡의 해석대로하면 꿈(상상)으로서
현실(상징)을 전복하고자 하는 실재계의 욕망이다. 죽음이라는 유일한 실재가 인간의 무의식에서 거주하면서 상상과 상징계를 전복하고
결국은 무로 돌아가는 순환이 인간의 가엾은 삶이다. 시인은 가상으로서의 삶(전쟁상황)을 순간적으로 뚫고 들어오는 무의식의
정체(제비꽃)를 흘낏보고 영원한 현실인 죽음의 다른 모습에 매혹된다.
行間의 장미
하루에 몇 번 무릎 세우겠구나, 머언 기적 소리에. 네가 띄운 사연, 行間의 장미 웃고 있다만. 그리던 방학에도 내려오지
못하는 燕아. 너는 일하는 베짱이 화가 지망의 겨울 베짱이. 오 이건 쫌쫌 네가 가을볕에 짜준 쥐색帽. ─室內帽로 감싸는 아빠의
치통. 오 이건 닿을데 없는 애틋한 아빠의 자정의 독백. 燕아, 네가 띄운 사연, 行間의 장미 웃고 있다만.
‘시란 드러난 표현이 아니라 행간의 표현을 보는 것이다’라는 명제가 있기에 이시를 골랐다
제목인 “行間의 장미”가 암시하듯 박용래가 드러내고자 하는 주제는 行間의 장미이다. 현실에서 없는 장미이므로 추상과
관념인데 이 시는 드러난 의미로서의 표현 “방학에도 내려오지 못하는 燕”(미술공부를 하던 딸의 이름이다), 딸이 짜준 “쥐색帽”,
“室內帽로 감싸는 아빠의 치통”, “자정의 독백”같은 이미지들이 전부 “行間의 장미”를 드러내기 위해 동원되었다. 이런 구체적인
상황 때문에 독자는 행간의 장미라는 추상이자 꿈이 현실에서는 무수한 타자의 가면을 쓰고 있다는 시인의 암시를 읽는다. 이 시처럼
박용래에게는 사물이란 플라톤의 ‘이데아’처럼 드러나지 않는 실재의 그림자이다. 박용래가 생각하는 드러나지 않은 실재의 모습?
나는 사물사이에 있는 夢幻으로서의 눈물이나 꿈의 옷을 입고 박용래에게 현시되었다고 생각한다.
5.시의 바다 밑 어둠과 깊이의 풍경
박용래는 일상인으로서의 현실에서 비껴 살았다. 강경상고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취직한 조선은행(한국은행 전신)을 집어치우고
1946년에 취직한 鷄龍學塾도 얼마못가 사직하고 전원생활을 동경해서 시작한 ‘농장 더부살이’도 50일만에 그쳤다. 다시 분필을
잡은 대전의 불교재단인 보문중학교의 교편도 잠시동안 이었다. 상경해서 창조사라는 출판업체에 교정원노릇도 하고 다시 내려와
대전철도학교에 일자리를 얻었으나 도립병원 간호원으로 일하던 부인과 결혼즈음에 『현대문학』에 박두진선생 추천으로 등단하자
전업시인이고자 이마저 사퇴했다. 별수 없이 부인 이태준여사가 부업으로 조산소까지 열어 가계를 꾸려나갔다고 한다. 현실인으로서는
낙제였으나 그는 시인의 자부심이 대단했다. 이문구 선생이 언제인가 “박 선생은 湖西의 대표적인 시인이시니까”로 무심히 말문을
열었다가 다음과 같은 호통을 들었다고 한다. “야 임마! 한국의 대표시인도 션찮은디 호섯지방? 이런 싸가지 웂는 놈 보게. 야,
니가 원제버텀 이문구간디 그렇게 변했네? 워느 결에 벌써 그리 변현 겨? 세월 참 이르다 일러....”(이문구의『박용래
略傳』인용). 이런 일화도 있다. 이문구선생이 옥천이 고향인 시인과 유람하다가 대전역에서 막차를 놓쳐 박용래 시인을 목척교 옆의
탁배기집에서 불러모셨다. 소개한 시인이 옥천의 풍경자랑을 하자 박용래는 “산 좋고 물 좋은 것은 어느 두메나 일반인데 시인이
고향을 쳐들면서 어떻게 物景風致만을 떠들 수 있는가. 그런 것은 괸광객에게 맡기고 시인이라면 모름지기 자기 고을이 배출한 시인부터
기리는 것이 마땅하지 않은가. 내가 옥천을 기억하는 건 오로지 시인 정지용을 낳은 땅이기 때문이요.“라고 바로잡았다. 이 때
문제의 시인이 ”그런가요? 나는 정지용이가 우리게 사람인지도 몰랐네...“라고 말하자 박용래가 술잔을 벽에다 던져버렸다. ”야,
이문구 너 정말 한심하구나. 너는 이런 것 밖에 친구가 웂네? 정지용이 제 고형 선배인 줄도 모르는 이런 무녀리두 시인 명색이라고
하냥 댕기는 겨? 이런 것도 사람이라고 마주 앉어 술 마시네?“일갈하고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 이문구선생은 다른 술집으로 모시고
공자왈 맹자왈 앞뒤를 변명했지만 박용래는 저녁 내내 옹이진 마음을 풀지 않았다.(이문구의『박용래 略傳』인용)
문단에 떠도는 박용래의 여러 일화와 기행이 많다. 그가 현실인이 아닌 꿈의 인간임을 증거하는 대목들인데 출처가 반듯하지 않은 일화를 일일이 소개하는 일을 피하고 다시 작품으로
돌아가보자.
『현대 시학』제정 제 1회 작품상 수상작인 「저녁 눈」은 그의 대표작으로 알려져 있고 박용래가 술에 의한 지병으로 사망한 후 대전시 보문산 사정공원에 세운 詩碑에도 이작품이
새겨 졌다.
저녁 눈
늦은 저녁 때 오는 눈발은 말집 호롱불 밑에 붐비다.
늦은 저녁 때 오는 눈발은 조랑말 발굽 밑에 붐비다
늦은 저녁 때 오는 눈발은 여물 써는 소리에 붐비다.
늦은 저녁 때 오는 눈발은 변두리 빈터만 다니며 붐비다
나는 이 작품을 고등학교 때 문학선배들이 박시인의 수상소식에 흥분해서 소개하기에 옆 눈으로 훔쳐보아 처음 대했다 견습
시인지망생의 눈에도 이 작품은 구도와 주제가 선명해서 선배들의 관념적인 신춘문예용 습작시와는 달리 이해가 빨리 되었다. 그 때
철없는 생각으로 이런 정도는 나도 쓸 수 있을 텐데 치기만만하게 내려다 보고 “조금만 기다려라 내가 박용래 이상으로
유명해지리라”혼자 생각했다. 그 때부터 40년이 지났다(40대에 詩作을 쉰 10년을 제해도 문학에 입문한지 30년이다). 박용래는
만 55세가 되어 죽었고 나는 방금 만 55세를 통과했다. 나는 아직도 박용래만큼 유명하지 않으니 이 작품을 능가한 작품을 쓰지
못한 것이 분명하다.
무엇이 이 소품이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평생을 고투한 박용래 시의 높이뛰기에서 기록된 작품으로 인정해 주는가를
생각해본다. 이미지는 “늦은 저녁 때 오는 눈발”과 “말집 호롱불” “조랑말 발굽” 여물써는 소리“ ”변두리 빈터“의 다섯 개에
”붐비다“는 반복서술어가 전부다. 시의 이미지로는 자화자찬이겠지만 내가 훨씬 화려하고 무거운 이미지를 쓰고 있다. ”시는 운율에
이미지를 얹은 것이다“라는 옥타비아 빠스의 정의에 충실한 이 시는 아름답지만 여전히 소박하다. 그러나 나는 박용래가 꿈의 인간임을
이미 얘기했고 무의식인 꿈의 세계를 현실처럼 산 그의 삶과 눈이 이 시의 행간에 "行間의 장미”처럼 들어가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긴 서사를 많은 이미지를 동원해 쓰고 있으니 할 말을 다 늘어놓는 시인이고 박용래는 긴 서사를 모두 생략하고 바다위의
빙산처럼 짧은 표현으로 바다 밑의 세계를 암시하고 있다. 이 시의 바다 밑 어둠과 깊이의 풍경을 고등학교 때는 잘 몰랐으나 눈이
침침해진 지금의 나이에는 어렴풋이 보인다. 시의 운율과 운율사이 이미지와 이미지 사이에 들어가 있는 보이지 않는 풍경을 마음으로
들여다보는 법을 배웠기에.
(시로 여는 세상 2009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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