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마포구 동교동 캘리그래피 전문회사 '필묵'사무실. 필묵은 1999년 한국에서 처음으로 캘리그래피 전업을 선언하고 나선 회사다. 사무실 입구에는 '복수는 나의 것'. 참피온' '맛있는 섹스 그리고 사랑' 등 영화 타이틀이 전시돼 있다. '사표는 전략이다' '소현제자' 등 책 표지는 물론이고 '2080 도의생금' 과 같은 치약,'건면세대'와 같은 라면, '황금 참기름' 등도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필묵 김종건 대표(37)는 '99년 처음 시작했을 때만 해도 디자인 시장에 글씨를 돈을 주고 하야 한다는 개념이 없었다"며 "여기 전시된 작품들은 어려웠던 초기에 시장을 개척했던 효자상품"이라고 말했다.
2000년대에 접어들기 이전 과자류나 식음료, 주류 등 제품의 로고는 캘리그래피의 도움없이 디자이너들이 컴퓨터에 있는 폰트를 이용해 만드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지금은 캘리그래퍼들의 주활동 영역이 된 영화 제목이나 책 표지 시장도 당시에는 마찬가지였다.
캘리그래피 전문회사 '심화'의 이상현(35)대표는 "1999~2000년 시기에 처음 시장 진출을 노린 분야는 출판이었다"면서 " 책 표지는 손 글씨가 가진 장점을 잘 살릴 수 있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글씨를 맡겨달라고 출판사를 돌아다녔지만 받아주는 출판사는 없었다. 굳이 서예 글시가 왜 필요하며 대서소 가면 몇만원이면 글씨를 받을 수 있는 데 왜 '캘리그래퍼'에게서 비싼 돈을 주고 사냐는 반응만 돌아왔다고 한다.
2000년 들어 시작된 영화붐과 함께 캘리그래퍼들에게도 기회가 왔다. 자금과 관객이 몰리자 영화업계에서 영화 포스터의 새로운 얼굴로 캘리그래피를 속속 도입한 것이다.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2000년)' '복수는 나의 것(2002년)' 등 영화 제목 글자를 보는 순간 영화가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떠으로는 독특한 영화 제목은 영화의 성공화 함께 보편화 되기 시작했다. 2002년 한.일 월드컵 당시 'be the reds'라는 캘리그래피가 들어간 붉은색 티셔츠가 불티나게 팔려나간 것도 '손으로 쓴 글시'가 중요한 요소로 부각한 계기가 됐다.
장대식 '글씨디자인 어필' 대표는 "지금 산업적으로 사용되는 컴퓨터 폰트는 2000종류가 넘을 정도로 다양하지만 폰트라는 특성상 기계적이고 딱딱하다는 느낌이 날 수 밖에 없다"며 "한 외사 제품만이 가질 수 있는 독특한 느낌을 소비자들에게 감성적으로 전달하기 위한 새로운 수단으로 캘리그래피가 채택되기 시작한 것"이라고 말했다.
담배회사 KT&G는 2500원짜리가 최고가인 국내 담배 시장에 지난해 4000원짜리 '에세 골든 리프'를 출시하면서 김소월 시인의 '님과 벗'이라는 캘리그래피를 담뱃갑에 새겼다. KT&G브랜드실 이왕섭 과장은 "디자인에 통상 사용되는 글씨체를 사용하면 일반 담배와 다른 '프리미엄'이라는 느낌을 전달할 수 없다"면서 "의상 디자인에 한글 캘리그래피를 적용한 패션디자이너 이상봉씨에게 글시와 디자인을 맡김으로써 '4000원'을 내고 살 만한 가치를 부여하고자 했다"고 말했다.
캘리그래피 수요가 급증하자 전문업체들이 속속 생겼다.
1999년에 '필묵'에 이어 2002년에는 '술통'과 '캘리디자인'. 2003년에는 '심화' 등 '캘리그래피'만 전업으로 하는 업체들이 잇따라 활동을 시작했다.
현재는 약 10개의 캘리그래피 전문회사가 활동 중이고, 프리랜서 등을 포함해 약 30여 명의 캘리그래퍼가 활동 중인 것으로 캘리그래퍼협회 측은 추산했다. 물론 디자인을 전문으로 하면서 캘리그래피도 하는 사람까지 포함하면 그 숫자는 훨씬 늘어난다.
'필묵' 김종건 대표는 초등학교 4학년 무렵 서예학원에 다니기 시작했다. '글씨 잘 쓴다'는 칭찬을 받으며 그는 원광대 서예학과에 입학했고, 군대에 가 '필사병'으로 이름을 날렸다. 부대의 각종 시상에 사용할 상장을 썼고, 이름이 알려지면서 사단장이 대통령에게 보내는 편지도 썼다. 손가락이 부르터라 연하장 1000장을 쓴 후 특별휴가를 받는 등 그의 붓글시 솜씨는 사격이나 축구를 잘하는 것 이상의 융숭한 대접을 받았다.
복학 후 대학 졸업을 앞두자 상황은 달라졌다. 좋아서 시작한 서예였지만 먹과 붓이 빵을 구워줄 가능성은 희박했기 때문이다. 졸업을 앞두고 우선 돈을 벌기위해 서예 전문 잡지사에서 기자생활을 했다. 이어 컴퓨터에 쓰이는 글골을 만드는 폰트회사에 취직했다.
어느 날 야근을 하다 일본 사이트인 '쇼도'를 방문하게 됐다. '쇼도'에서 본 붓글씨는 화선지에 써서 액자로 포장해 집안 거실이나 사무실에 걸어두는 용도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김 대표는 "서예가 대중과 소통할 수 있는 길이 보였다" 고 했다. 바로 서예에 디자인을 입히는 것이었다. 그는 디자인 대학원에 등록해 공부를 시작했고, 1999년 11월 '필묵'을 열었다. 한국 최초의 캘리그래피 업체였다.
캘리그래피 회사 '심화' 이상현 대표도 서예학과 출신이다. '서예대가'를 꿈꾸며 대학에 들어갔지만 이미 서예는 사회에서 설 자리를 잃어가고 있었다. 1999년에는 국정 미술 교과서 뒤쪽에 그나마 겨우 몇 페이지 남아있어 명맥을 유지하던 어셰 부문이 교과서에서 사라질 위기에 처했다. 국정교과서 6개 가운데 4개에서 서예가 아예 빠져버린 것이다.
이 대표는 '서예'가 다시 교과서에 실리게 하기 위해 100만인 서명운동을 벌이는 등 '투쟁'을 시작했다. 그러나 곧 일반인들의 무관심에 큰 충격을 받았다. 이 대표는 " 그 무렵 서예의 대가가 된다는 꿈을 접고 우리 서예 대중화에 앞장서는 서예계의 홍보부장이 되겠다고 다짐했다"면서 "대중화의 수단이 바로 서예와 디자인을 결합한 캘리그래피였다"고 말했다.
'술통' 강병인 대표는 붓글시에 빠져 중학교 때 영원히 묵만 갈겠다는 뜻으로 '영묵'이라는 호를 지었다. 그러나 디자인 회사에 취직해서 10년 이상 세월을 보낸 후 2002년 '술통'을 차려 비로소 글씨 쓰는 일을 전업으로 할 수 있게 됐다.
캘리그래퍼들이 한번에 쓰는 글자 수는 대부분 10자 미만이다. 책 표지, '참 이슬'과 같은 상품로고, 영화제목, 드라마 제목 등 분야에 따라 가격대가 있을까? 캘리그래퍼들은 대부분 "영업 비밀"이라며 구체적인 액수를 밝히지 않았다.
'필묵' 김종건 대표는 "책 표지 디자인의 경우 적게는 50만원부터 시작하는 경우가 있다."면서 상품 로고를 쓰는 것은 300만~500만원, 영화 포스터의 경우는 200만~300만원 정도이지만 다르는 종류가 '글씨'여서 실제 계약할 때마다 가격은 천차만별"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