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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산 속에 뿌려진 피
일연이 대웅선사 밑에서 공부한 지도 어느덧 3년이 흘렀다. 그 동안 일연은 스승 대웅선사로부터 비구승에게 주는 250가지의 계를 받을 만큼 성실한 승려가 되었다. 이것은 '구족계'라는 것이었다. 이 계율은 죄가 없고, 몸이 튼튼하여 부처님의 말씀을 따르는데 걸리는 게 없고, 불심이 깊은 젊은이만이 받을 수 있는 것이었다.
화창한 봄 날, 햇살이 따사롭게 비추고 있는 오후였다. 그 날도 일연은 대웅선사 앞에 앉아 부처님 말씀을 듣고 있었다. 그 때 갑자기 밖이 소란해졌다.
"스님! 대웅선사님!"
밖에서 숨이 넘어갈 듯이 대웅선사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일연은 깜짝 놀라 방 문을 열었다. 그런데 절 마당에는 피투성이가 된 스님 한 분이 쓰러져 있었다. 일연과 대웅선사는 맨발로 뛰어나갔다. 자세히 보니 가까운 암자에 머무르고 있는 경월스님이었다.
"경월스님. 이게 어찌된 일이오?"
대웅선사가 쓰러진 경월스님을 끌어안으며 물었다. 경월스님의 얼굴과 승복은 온통 피로 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정신도 희미하게 꺼져 가고 있었다. 안타까운 마음에 일연도 연달아 경월스님을 불렀다.
"경월스님, 경월스님..."
그제서야 경월스님은 희미하게 눈을 떴다. 그리고 잘 움직여지지 않는 입을 겨우 열어 말을 했다.
"말 탄 무인 놈들이..."
경월스님은 멀리 숲길을 손으로 가리켰다. 일연과 대웅선사는 경월스님이 가리킨 숲길을 바라보았다. 잠시 뒤 요란한 말발굽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그 소리는 이내 가까워졌다. 숲속에서 새들이 날개를 치며 날아올랐다. 곧 말 탄 장수 세 명이 나타났다. 그들은 어깨에 활통을 메고 있었다. 맨 뒤쪽에 있는 장수는 큰 사슴 한 마리와 꿩 두어 마리를 말잔등에 싣고 있었다.
세 장수는 경월스님을 부둥켜 안은 일연과 대웅선사 앞에 이르자 말을 멈춰 세웠다.
"음, 저 중놈이 여기에 있었구만. 저 중놈을 당장..."
맨 앞에 오던 장수가 음흉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게 무슨 짓이오. 여기는 성스런 법당이오. 썩들 물러가시오!"
대웅선사는 세 장수를 향해 버럭 고함을 질렀다. 하지만 세 장수는 오히려 기세당당하게 말했다.
"오, 스님. 나는 도병마사요. 날씨가 맑아 설악산에 사냥을 나왔는데 하룻밤 마땅히 묵을 곳이 없소."
맨 앞에 서 있던 장수가 그렇게 말하자, 맨 뒤쪽에 있는 장수가 사냥해온 짐승을 절 마당에 내던졌다. 사슴은 이미 화살을 맞고 죽어 있었다. 이내 사슴이 흘린 피가 절 마당에 번졌다.
"이게 무슨 짓이오! 하늘이 무섭지 않소! 부처님이 내려다보고 계시오."
대웅선사는 몸을 파르르 떨며 외쳤다. 여전히 웃던 장수가 입을 열었다.
"하하하, 오, 그래요? 저기 누워 있는 중놈도 스님 같은 말씀을 하시더군."
장수들이 껄껄 웃기 시작했다.
"이런 무엄한 놈! 여기가 어딘 줄 알고 감히 입을 함부로 놀리느냐!"
대웅선사는 고함을 치며 벌떡 일어섰다. 그러자 가운데 서 있는 장수가 칼을 빼들었다. 일연은 황급히 대웅선사 앞을 가로막았다.
"여보시오. 말씀을 삼가하시오. 이 분이 누군줄 아시오. 이 분은 대웅선사님이시오. 썩 물러나도록 하시오."
일연은 두 눈을 부릅뜬 채 또박또박 말을 이어가고 있었다. 도병마사쯤 되는 장수라면 대웅선사를 알고 있을 터였다. 그는 일찍이 임금이 궁궐로 들라고 했을 때 그것을 거절했다. 그만큼 자기주장이 강하고 불심이 도독한 스님이었던 것이다.
그제서야 맨 앞에 서 있던 장수가 흠짓 놀라는 것이었다.
"칼을 거두어라."
그렇게 말하고 그 즉시 장수는 말에서 뛰어 내려와 무릎을 꿇었다.
"선사, 몰라뵈어서 죄송하오."
장수는 경월스님을 가리키며 변명을 하듯 말을 이었다.
"저 스님이 막무가내로 우리 앞을 가로막는 바람에 이런 일이 생겼습니다. 죄송합니다."
장수는 대웅선사에게 계속 머리를 조아렸다. 그리고 다른 장수들에게 말했다.
"여봐라. 이 사슴을 들어라. 그만 돌아가자."
이유를 몰라 장수들은 멍하니 서로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고 있었다. 그러자 장수는 곧바로 뭣들하느냐! 그만 돌아가자니까 하고 소리를 냅다 질러댔다. 나머지 두 장수가 서둘러 사슴을 말에다 실었다. 그리고 세 장수는 말 고삐를 돌려 절 문을 황급히 빠져나갔다. 사슴의 피가 길 위에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나무관세음보살."
일연과 대웅선사는 두 손을 모아 합장을 하였다. 경월스님은 생각보다 상처가 깊은 데다 워낙 나이가 들어서인지 좀처럼 몸이 좋아지지 않았다. 그렇게 한 달여 동안 의식을 찾지 못하던 경월스님은 마침내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
설악산에 있는 백여 명의 스님들과 마을의 신도들이 모인 가운데 다비식(시체를 불에 태우는 의식, 곧 승려의 장례식)이 거행되었다. 경월스님의 시체가 불에 활활 타고 있었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승려들과 신도들은 불길 주위를 돌며 경월스님이 극락왕생하기를 간절히 빌었다. 그 사람들 속에 일연도 섞여 있었다. 불은 다음날 날이 밝을 때까지 계속 탔다. 불길을 감싸고 도는 행렬도 마찬가지였다. 어느덧 불길이 잦아들고 빨간 불씨마저 사그러들었다. 마침내 재만 남았다. 그 잿더미 속에서 스님들이 사리(도를 많이 닦은 스님이 죽으면 남는 것)를 골라냈다. 그리고 그 사리를 경월스님이 있던 암자의 양지바른 곳에 묻고 탑을 세웠다.
탑을 세우고 돌아와 앉은 스님들은 무신들의 횡포에 대해 분노의 목소리를 높였다.
"허허. 날이 갈수록 무인들의 횡포가 극심해지니 이 일을 어찌할고."
"무신들 손에 아무 죄없이 죽은 백성과 승려가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습니다."
"어허 오랑캐나 왜놈뿐만 아니라 제 나라 장수에게까지 죽어가니 고려 백성이 씨가 마를까 걱정이오."
늙은 스님들은 저마다 걱정과 분노의 소리를 높였다. 아직도 나이 어린 일연은 그런 스님들의 이야기에 끼여 들 수도, 그렇다고 그 말들을 알아들을 수도 없었다. 그렇지만 경월스님의 죽음에 대한 비통함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컸다. 또 그 만큼 무신들에 대한 분노가 가슴에서 끓어올랐다.
"경월스님이 수선사 쪽 스님이었다면 그렇게 돌아가시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젊은 스님 한 사람이 성질을 이기지 못하고 터뜨린 말이었다. 그러자 다른 스님들의 얼굴이 굳었다. 더이상 어느 누구도 수선사에 대해서 말하지 않았다.
'수선사?'
일연은 '수선사'라는 이름을 입에 굴려보았다. 일연으로서는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었던 것이다. 도대체 수선사란 무엇일까? 그러나 그 자리에 있던 스님들이 모두 입을 굳게 다물고 있었던 터라 일연은 선뜻 물어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며칠 동안 그 말이 일연의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이 세상에 부처를 좇는 승려라면 다 같아야 하지 않은가. 생각하면 할수록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수선사에 대한 의문이 깊어갈수록 일연은 불경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대웅선사가 조용히 일연을 불렀다.
"요즘에 무슨 걱정거리가 있느냐? 얼굴빛이 좋지 않구나."
"아니옵니다. 아무 일도..."
일연은 아무 것도 아니라고 얼버무리려다 기어이 입을 열고 말았다. 궁금증을 풀지 못했다가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을 만큼 마음이 어지러웠던 것이다.
"그런데 스승님, 수선사라는 게 무엇이옵니까?"
뜻밖에도 대웅선사는 민감한 반응을 보였다.
"허허 세상에 이런 일을 보았나. 누가 그런 말을 하더냐. 그 말을 어디에서 들었느냐?"
대웅선사는 다그쳐 묻더니 이내 땅이 꺼질 듯이 한숨을 쉬면서 일연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일연은 분명 자신이 알지 못하는 어떤 것이 있음을 직감했다. 일연은 찬찬히 입을 열었다.
"경월스님 다비식(시체를 불에 태우는 의식, 곧 승려의 장례식) 때 어떤 스님이 하시는 말씀을 얼핏 들었습니다."
"허허, 그것 참으로 낭패로구나."
대웅선사는 혼잣말처럼 허공을 바라본 채 중얼거렸다. 일연은 아무 말도 못하고 스승을 물끄러미 올려다 보았다.
"앞으로 함부로 그 말을 입에 담아서는 안 될 것이니라. 장차 때가 오면 스스로 깨닫게 될 터이니 서둘러 알려고 하지 말아라. 그저 지금은 열심히 부처님 말씀에 귀를 기울이면서 공부하는 것이 중요하니라. 내 말 잘 알아듣겠느냐?"
"예, 가슴 속에 깊이 새기겠습니다."
대웅 선사가 걱정하는 것이 염려되어 그렇게 대답을 하기는 했지만, 일연 가슴속에 숨어 있던 의혹 자체가 없어진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일연은 더이상 묻지도,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다만 예전처럼 불경을 열심히 읽고 참선을 하면서 부처님의 법을 깨우치는 데 노력을 기울였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일연은 수선사에 관한 궁금증을 풀게 되었다. 선배 스님에게 수선사에 관한 이야기를 들을 기회가 생겼던 것이다. 수선사는 여러 분파로 나뉘어져서 싸움을 일삼는 불교의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지눌스님이 세운 절이었다.
지눌스님은 '수선사'를 세워 스스로 불교계의 모범을 보였다. 그런데 최씨무신 정권이 수선사로 손을 뻗혔다. 권력을 잡기 위해서는 백성들에게 존경받는 절을 그들의 편으로 만들어야 했던 것이다. 최씨무신 정권은 수선사에 막대한 재산을 보냈으며 수선사의 스님들을 크게 대우해주었다. 그러다보니 수선사 계통의 스님이 되기 위해 돈을 거래하는 일까지 생겨났다. 이렇게 되자 지눌스님이 절을 세운 뜻이 상하고 만 것이었다.
이 때문에 뜻있는 스님들간에는 수선사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높았다. 일연은 이 일을 알고 난 뒤, 커다란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자신은 결코 그런 스님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결심을 했다. 경월스님의 죽음으로 한 번 풍긴 피비린내는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다.
일연은 자신의 몸이 피로 얼룩지는 꿈을 자주 꾸었다. 또 어떤 때에는 식사를 할 때도 밥에 피 냄새가 배 있는 듯하였다. 온갖 무서운 꿈에 시달리던 일연은 밥조차 제대로 먹지 못하여 하루가 다르게 몸에 축이 났다. 한번 풍겨오기 시작한 피냄새는 불경을 읽고 참선을 해도 도저히 잊을 수가 없었다. 일연은 답답하기만 하였다. 어디론가 훌쩍 떠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였다.
'아하 괴롭다, 어디를 찾아가야만 완전한 부처님의 세계에 들어갈 수 있단 말인가?'
일연은 몇날 며칠 동안 먹는 것은 물론이고 마시는 것조차 잊어버리고 오로지 이런 생각에 몰두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새벽, 일연은 대청봉 가까이에 있는 작은 암자로 올라갔다. 그 곳은 일연이 스님이 되기 위하여 머리를 처음 깎은 곳이기도 했다. 일연은 암자 옆 바위 벽에 새겨진 불상 앞에 서서 멀리 동해 바다에 펼쳐진 푸른 물결을 한없이 바라보았다.
일연은 그 푸른 물결을 바라보며 참선에 들었다. 드넓은 바다를 바라보아서인지 오랫만에 머리가 맑았다. 일연은 참선을 마치고 동해를 다시 바라보았다. 머리를 깎을 때처럼 붉은 태양이 물 위로 솟아오르고 있었다. 햇빛에 물든 바닷물결이 출렁대는 광경을 바라보면서 일연은 자기 가슴속에서도 뭔가 꿈틀거리는 것을 느꼈다.
'서쪽은 극락 세계요, 동쪽은 인간 세상을 뜻하는 것이니라.'
스승 대웅선사의 가르침을 떠올리며 일연은 문득 새로운 것을 깨달았다.
'해는 동쪽에서 떠서 서쪽으로 진다. 부처님의 이치도 마찬가지다. 참된 부처의 세계는 인간 세계에서 시작된다. 그렇다. 인간 세상으로 떠나자. 거기서 부처님의 세계를 바라보자.'
일연은 가슴이 벅차오르기 시작했다. 자신이 무엇을 하면 좋을지가 눈앞에 뚜렷하게 떠오르는 것 같았다. 설악산 진전사로 오기 전에 보았던 백성들의 어렵고 고단한 삶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이제는 단지 바라보지만 말고 그들에게 좀더 다가가 그들과 함께 하고 싶었다. 그러는 것이 부처님을 따르는 승려로서 옳은 일일 것 같았다. 또한 고려땅 곳곳을 밟으며 고려인의 삶에 귀를 기울이고 싶었다. 그런 일연에게 부처의 세계는 인간이 세계에서부터 시작된다는 말이 힘이 되었다.
일연은 자신의 결심을 스승인 대웅선사에게 알려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스승의 곁을 떠나기는 아무래도 아쉬웠다. 불가에서 떠나는 일이 바람과 같은 일이라고 해도 그동안 대웅선사에게 정이 들었던 것이다. 일연은 이제나 저제나 스승에게 자신의 생각을 말할 날을 기다렸다. 그러나 그런 시간은 쉽게 오지 않았다.
그런 일연을 대웅선사가 불렀다. 무엇인가 짐작한 바가 있는 듯, 대웅선사의 부드러운 얼굴에는 전에 없는 진지함이 서려 있었다.
"너의 마음을 괴롭히는 것이 무엇이냐?"
기왕에 스승이 꺼낸 말이었다. 일연은 자신의 생각을 말하리라고 마음을 굳게 먹었다.
"이제 저는 이곳을 떠날까 합니다."
조용하지만 결심이 굳은 목소리로 일연이 말했다. 스승은 미리 헤아리고 있었다는 듯 한동안 일연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갈 곳은 정해두었느냐?"
"특별히 정해둔 곳은 없습니다. 발길 닿는 대로 떠날까 합니다."
대웅선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눈을 감고 있을 뿐, 눈썹 하나 까닥하지 않았다. 일연은 말을 이었다.
"우선 남원 지리산에 있는 실상사로 찾아갈까 합니다. 그리고 강릉의 굴산사, 해주의 광조사, 장흥의 보림사도 갈까 합니다. 또..."
"그만 됐다. 부처님의 뜻을 저버리지 않도록 하여라."
대웅선사는 그렇게 말한 뒤 입을 다물었다. 그런 스승의 얼굴을 보자 일연은 목이 메었다. 막상 대웅선사 곁을 떠난다고 생각하니 옛날 부모님 곁을 떠나던 때의 서운함이 되살아났던 것이다. 대웅선사 앞에서 눈물을 보이지 않기 위해 일연은 억지로 울음을 삼켰다. 그리고 목소리에 힘을 실어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스님, 저는 이 땅 곳곳에 살아 있는 백성들과 만나고 싶습니다. 또한 고려 땅 곳곳에서 숨쉬고 있는 부처님의 자취와 민족의 역사를 직접 눈으로 보고 싶습니다."
대웅선사는 눈을 감은 채 일연의 말을 들었다. 손으로는 계속 염주알을 굴리면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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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믿음에 실망을 한 일연의 괴로운 심경이 그려지네요.......ㄳ
"그만 됐다. 부처님의 뜻을 저버리지 않도록 하여라." 니 뜻 뜻 뜻. 내 뜻 뜻 뜻. 눈을 감으면 보이는것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