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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자문의 도읍화하, 동서이경은 분명 먼 이야기인데, 성주풀이를 들으면 가깝게 느껴지고, "동서양경"은 더욱 가깝게 느껴지는 불과 100년여 전의 기사입니다
**1902년은 7년전엔 을미사변(1895), 3년후엔 을사늑약의 싯점으로 역사의 격변기였음이 분명한데, 이무렵에 서경을 하나 더 설치하자는 상소는 시대를 어떻게 바라보며 나온 생각인지 의아스럽기만 하고, 거론된 서도(원문엔 서주로 나옴)의 평양은 지금 옥류관이 있는 곳은 아닌 것 같고, 따라서 당시 황제의 처소도 반도는 아닌듯 싶은데...
(뎨국신문, 승정원일기,실록순으로 올립니다.)
특진관 김규홍씨가 상소하기를 고로 뎨왕이 두셔울을 두는 것은 만셰에 장원한 생각을 위함이니 옛젹 쥬한당 삼국이 다 량경을 두엇고 지금 동셔각국이 다 량경을 두엇는데 우리 태죠고
황뎨께옵셔 한양에 도읍하시고 다시개셩부에 도읍하옵셧시니 또한 량경을 두는 뜻이라.
황상폐하께옵셔 즁흥의 업을 창긔할사 만셰의 터를 드리우시니 규모가홍원하옵신데 량경의 뎨도를 겨를치 못한지라 평양이 동방에 문명한 곳이니 셔경을 셜시하고 리궁을견츅하며 진위대를 더셜시하야 나라의 위엄을 장하게 할지라 당당한 만승지국에셔 엇지 셔경을 두지 못하리오. 함을며 셔도 백셩들이 다 원하는 바인즉 범사건을 불일셩지할 터이니 쳐분하옵소셔 하엿더니, 비지내에 쳔년 옛도읍에 사젹이 업드니 경이 옛일을 자셰이 말하는데 다 확실한 징거가 잇스니 맛당이 됴쳐가 잇슬지라 편의함을 영탐하야 쳐분을 나리이라 하옵셧더라
*특진관: 2 .대한 제국 때에, 궁내부에 속하여 왕실에 관한 일을 보좌하던 칙임(勅任) 벼슬. 고종32년(1895)에 설치하였다.
**장원:끝없이 길고 먼 , 홍원:넓고 먼, 불일성지:며칠 안걸려 이루다
승정원일기 3144책 (탈초본 140책)
고종 39년 3월 24일 [양력5월1일] 갑신 4/4 기사 1902년 光武 6년 光緖(淸/德宗) 28년
· 국역
〈○〉 宮內府特進官金奎弘疏曰, 伏以壽域治隆, 光紹三聖之休, 耆社儀擧, 快覩四有之慶, 寶牒增輝, 景籙無疆, 呼嵩之忱, 薄海同情。 仍伏念臣以材則樗散也, 以器則筲小也, 偏荷天地父母曲成之恩, 輥到崇顯之列, 而顚毛已種種矣。 夷考平素, 瘝溺焉而已, 含糊焉而已, 矧今病與年深, 衰以日進, 志思荒落, 神精銷鑠, 尤豈有出一謀發一策, 以效夫贊襄之萬一者哉? 竊伏惟念, 古之有天下者, 皆建置兩京, 所以承天地之沖和也, 所以據天下之形勝也, 所以爲萬世長遠之慮也。 周漢及唐, 罔不皆然, 而至於皇明, 建官分治, 制度尤備, 目今東西各國, 孰不有兩京之制乎? 粵我太祖高皇帝, 旣定鼎于漢陽, 間復還都開城者, 亦存兩京之意, 而松京之廢, 今已久矣。 惟我皇上陛下, 誕膺峻命, 肇建皇極, 鴻猷光前, 燕謨啓後, 創中興之業, 垂萬代之基, 宏規遠模, 允邁古昔, 而獨於兩京之制, 尙未之遑矣。 第以國中之形勝觀之, 平壤爲我東首開人文之地, 而三聖繼都, 享國俱千餘年, 至于今人物繁衍, 邑居壯麗, 壤接燕·薊, 風氣勁質, 港交登·萊, 物貨輻湊, 高麗太祖嘗曰, 西京水德, 調我國脈, 所謂長樂宮·大和宮, 皆前朝時行宮也, 永崇殿, 卽我太祖高皇帝之行朝也。 在宣廟時, 華人李文通, 謂平壤有萬年王氣, 此雖形家之言, 而邑誌所傳, 亦非誣也。 且是邦人士, 素尙義氣, 緩急可用, 故相臣權近, 擬之岐·豊之地, 豈不信哉? 今若建置西京, 營繕離宮, 增設隊伍, 爲之守衛, 以壯國威, 以鞏基圖, 則地愈增重, 人思效忠, 非直爲觀瞻之美也, 遠溯周漢唐明, 旣有是矣。 近稽麗代及東西各國, 又如彼矣。 今以堂堂萬乘之國, 獨不可以建兩京之制乎? 況是擧也, 尤西州士民之所樂而趨之者, 則凡百經紀, 將見不日其成矣。 朝家何所持難, 而不爲之處分乎? 伏願皇上, 淵然深省, 下臣此章于政府, 廣詢而裁處焉, 臣無任云云。 奉旨, 省疏具悉。 千年古都, 事蹟䵝昧, 今卿詳陳古事, 皆有的據, 宜其有措處, 另探便宜, 當下處分矣。
고종 39년 임인(1902) 3월 24일(갑신, 양력 5월 1일) 비
39-03-24[10] 서경에 이궁을 세우자는 의견을 진달하는 궁내부 특진관 김규홍의 상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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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궁내부 특진관 김규홍(金奎弘)이 상소하기를,
“삼가 아룁니다. 우리나라에 태평한
정치가 융성하여 훌륭하신 세 분 선왕의 아름다운 사적을 빛나게 이으시고 기로소에 들어가는 의식을 거행하여 건국 이래 네 번째의 경사를 기쁜 마음으로
보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황실의 어첩(御牒)이 더욱 빛나고 나라의 복록이 무궁하게 되었으니, 온 나라 백성이 한마음으로 황상(皇上)의 만수무강을 기원하고 있습니다.
삼가 생각건대, 신은 재목으로 말하면 쓸모가 없고 기국으로 말하면 규모가 작디작은
사람으로, 천지와 부모 같으신 황상의 곡진히 이루어 주시는 은혜를 한 몸에 받아 급속히 높은 반열에 오르게
되었으나, 이미 머리털이 짧아질 만큼 노쇠한 나머지 평소의 행적을 살펴볼 때 직무가 방치되고 일 처리가 모호할
뿐이었습니다. 게다가 지금은 깊은 병과 많은 나이로 인해 나날이 기력이 쇠해진 결과 뜻이 쇠퇴하고 정신력이
소진되어 버렸으니, 어찌 한 가지라도 구상을 내고 계책을 세워 만의 하나라도 황상의 덕화를 도울 수 있겠습니까.
삼가 생각건대, 옛날에 천하를 다스렸던 이들은 모두 두 개의 수도를 세웠으니,
그것은 하늘과 땅의 조화를 받들고 천하의 요충지를 확보함으로써 자손만대에 국운을 장구히 이어갈 수 있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주(周) 나라와 한(漢) 나라, 당(唐) 나라가 모두 그러했고, 명(明) 나라에 이르러서는 관직을 설치하고 나누어 다스려 그 제도가 더욱 완비되었습니다.
지금 동서양의 여러 나라들 중에 그 어느 나라가 두 개의 수도를 두지 않고 있습니까. 우리 태조 고황제(太祖高皇帝)께서 한양(漢陽)에 수도를 세운 뒤에 간혹 다시 개성(開城)으로 돌아가 머물렀던 것도 두 개의 수도를 두고자 했던 것인데, 송경(松京)이 폐지된 지 이미 오래되었습니다.
우리 황제 폐하께서는 하늘의 명에 응하여 비로소 황제로서의 왕업을 세우셨습니다. 그리하여 위대한 사업으로 선대를 빛내고 훌륭한 모책(謨策)으로 후대에 혜택을 끼치시어, 중흥(中興)의 업을 세우고 만대의 터전을 물려 주셨습니다. 그 크고 원대한 계책은 실로 훌륭한 옛 임금들보다도
뛰어나건만 유독 두 개의 수도를 두는 제도만은 아직 미처 시행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나라 안의 지세(地勢)를 보자면 평양(平壤)은 우리나라에서 맨 먼저 문화(文化)를 꽃피웠던 곳으로, 세 성왕(聖王)인 고조선의 단군(檀君), 고구려의 장수왕(長壽王), 고려의 태조(太祖)가 연이어 그곳에 도읍을 정하여 모두 천여 년 동안 나라를 소유하였으며, 지금까지도 인구와
물산이 풍성하고 취락이 웅장하고 화려합니다. 그리고 땅이 연경(燕京),
계주(薊州)와 맞닿아 풍속과 기질이 굳세고
질박하며, 뱃길이 등주(登州), 내주(萊州)와 통하여 물품과 재화가 한껏 모여듭니다.
고려 태조는 일찍이 말하기를, ‘서경(西京)의 수덕(水德)이 우리나라의 명맥을 조화롭게 한다.’ 하였습니다.
이른바 장락궁(長樂宮), 대화궁(大和宮)이라는 것은 모두 전 왕조 때의 행궁(行宮)이고, 영숭전(永崇殿)은 우리 태조 고황제의 임시 처소였습니다. 선묘(宣廟)
때에 명 나라 사람 이문통(李文通)은 ‘평양은
만년 동안 왕업을 이룰 수 있는 기운을 가지고 있다.’ 하였습니다. 이것이 비록 감여가(堪輿家)의 말이기는 하지만 읍지(邑誌)에 전해지고 있으니, 또한 거짓은 아닐 것입니다.
또 이 고장의 사람들은 평소 의기(義氣)를
숭상하여 위급한 때에 쓸 만하기 때문에 정승 권근(權近)은 주 나라의
기(岐)와 풍(豐)에 견주었는데,
그 어찌 맞는 말이 아니겠습니까.
이제 서경을 세워 이궁(離宮)을 짓고 군대를
더 두어 수비하게 함으로써 나라의 위엄을 세우고 황실의 기초를 굳건히 한다면 지리적인 중요성이 더욱 커지고 백성들이 충성을 바치려 할 것이니,
그렇게 되면 비단 보기에 아름다울 뿐만이 아닐 것입니다. 멀리 주 나라,
한 나라, 당 나라, 명 나라를 살펴보아도
이러한 제도가 있었고 가까이는 고려와 동서양의 각국을 살펴보아도 또한 저와 같은데, 지금 당당한 황제의 나라로서
어찌 두 개의 수도를 두지 못하란 법이 있겠습니까. 더구나 이러한 조치는 평양의 관리와 백성들이 기꺼이 따르는
것인 만큼 도읍 건설과 관련한 모든 일이 장차 얼마 안 가서 완성될 것인데, 조정은 무엇을 망설여 처분을
내리지 않는 것입니까. 삼가 바라건대, 폐하께서는 깊이 통찰하시어 신의
이 글을 의정부에 내려 보내고 널리 하문하여 처리하소서. ……”
하였는데, 받든 칙지에,
“상소를 보고 잘 알았다. 천 년 된 옛 도읍의 사적은 파묻혀 알 수가 없었는데 이제 경이 옛 사적을 자세히 진술한 데에는 모두 확실한 근거가 있으니, 조처가 있어야 하겠다. 각별히 편의 여부를 물어서 처분을 내리겠다.”
하였다.
고종실록 42권, 고종 39년 5월 1일 양력 1번째기사 1902년 대한 광무(光武) 6년
김규홍이 두 개의 수도에 대하여 건의하다
【음력 임인년(壬寅年) 3월 24일】
특진관(特進官) 김규홍(金奎弘)이 올린 상소의 대략에,
"삼가 생각건대 옛날에 세상을 다스리는 이들은 모두 두 개의 수도를 세웠으니 그것은 하늘과 땅에 충만된 화기(和氣)를 받들고 천하의 명승지를 타고 앉으며 만대의 장구한 계책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주(周) 나라와 한(漢) 나라, 당(唐) 나라가 모두 그러했고 명(明) 나라에 이르러서는 관청을 세우고 나누어 다스려 그 제도가 더욱 완비되었습니다. 지금 동서양의 여러 나라들 중에 두 수도를 두는 제도를 시행하지 않는 데가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 태조 고황제(太祖高皇帝)가 한양(漢陽)에 수도를 세웠는데도 중간에 다시 개성(開城)으로 수도를 옮겼던 일은 두 개의 수도를 두자는 뜻이었지만 송경(松京)을 폐지한 지 이제는 이미 오래되었습니다.
우리 황제 폐하는 하늘의 명에 크게 응하여 황극(皇極)을 세우시고 크나큰 계책으로 전대의 업적을 빛내고 후손들을 위한 모책(謨策)을 열었으며 중흥(中興)의 업을 세워 만대의 터전을 닦으셨습니다. 크고 원대한 규모는 옛날보다 뛰어나건만 유독 두 개의 수도를 두는 제도만은 아직까지도 시행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런데 나라 안의 형세를 보자면 평양(平壤)은 우리나라에서 맨 먼저 인문(人文)이 열린 고장으로서 세 성인(聖人)이 연이어 도읍을 정하고 나라를 다스린 지가 모두 천여 년이며 지금도 인물(人物)이 번성하고 고을이 웅장하고 화려합니다. 그리고 땅이 연경(燕京), 계주(薊州)와 이어져서 풍속과 기질이 굳세고 질박하며 뱃길로 등주(登州), 내주(萊州)와 교류하므로 물화(物貨)가 폭주합니다. 고려(高麗)의 태조(太祖)는 일찍이 말하기를, ‘서경(西京)은 수덕(水德)으로 우리나라의 명맥을 절한다.’고 하였습니다.
이른바 장락궁(長樂宮), 대화궁(大和宮)이라는 것은 모두 전 왕조 때의 행궁(行宮)이고 영숭전(永崇殿)은 우리 태조 고황제(太祖高皇帝)의 행궁이었습니다. 선조(宣祖) 때에 명(明) 나라 사람 이문통(李文通)은 이르기를, ‘평양(平壤)은 만년 왕기(王氣)를 가지고 있다.’고 하였는데 이것이 풍수 보는 사람의 말이기는 하지만 읍지(邑誌)에 전해지고 있으니 역시 거짓은 아닙니다. 또한 이 고장의 사람들은 평소 의기(義氣)를 숭상하며 위급한 시기에 쓸 만하기 때문에 중신(重臣) 권근(權近)은 주(周) 나라의 기(岐) 땅과 풍(豐)땅에 견주었으니 어찌 믿지 않겠습니까? 이제 서경(西京)을 두고 이궁(離宮)을 새로 짓고 군사를 증설하여 지키게 함으로써 나라의 위엄을 장엄하게 만들고 터전을 공고하게 한다면 그 고장이 더욱 중해지고 백성은 충성을 다하려고 생각할 것이니 단지 보기에만 아름다운 것이 아닙니다.
멀리 주(周) 나라, 한(漢) 나라, 당(唐) 나라, 명(明) 나라를 거슬러 올라가 보아도 이런 것이 있었으며 가까이로 고려와 동서양의 여러 나라들을 상고해 보아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당당한 황제의 나라로서 어찌 유독 두 개의 수도를 두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더구나 이 조치는 평양(平壤) 관리들과 백성들이 기꺼이 따르는 일이니 모든 기강(紀綱)이 장차 얼마 안가서 이루어지는 것을 보게 될 터인데 조정에서 무엇을 망설이고 처분을 내리지 않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폐하께서는 깊이 생각하고 신의 이 글을 의정부(議政府)에 내려 보내어 널리 물어보고 재결하기 바랍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천년 고도(古都)의 사적(事跡)이 묘연한데 이제 경(卿)이 옛 사적을 자세히 진술한 것이 모두 확실한 근거가 있으니 마땅히 조처해야 할 것이다. 별도로 편의 여부를 물어서 처분을 내리겠다."하였다.
一日。 【陰曆壬寅三月二十四日】 特進官金奎弘疏略: "竊伏念, 古之有天下者, 皆建置兩京, 所以承天地之沖和也, 所以據天下之形勝也, 所以爲萬世長遠之慮也。 周、漢及唐, 罔不皆然, 而至於皇明, 建官分治, 制度尤備。 目今東西各國, 孰不有兩京之制乎? 粤我太祖高皇帝, 旣定鼎于漢陽, 間復還都開城者, 亦存兩京之意, 而松京之廢, 今已久矣。 惟我皇上陛下, 誕膺峻命, 肇建皇極, 鴻猷光前, 燕謨啓後, 創中興之業, 垂萬代之基。 宏規遠模, 允邁古昔, 而獨於兩京之制, 尙未之遑矣。 第以國中之形勝觀之, 平壤爲我東首開人文之地, 而三聖繼都, 享國, 俱千餘年, 至于今人物繁衍、邑居壯麗。 壤接燕、薊, 風氣勁質, 港交登、萊, 物貨輻湊。 高麗太祖嘗曰: ‘西京水德, 調我國脈。’ 所謂長樂宮、大和宮, 皆前朝時行宮也, 永崇殿, 卽我太祖高皇帝之行朝也。 在宣廟時, 華人李文通, 謂: ‘平壤有萬年王氣’。 此雖形家之言, 而邑誌所傳, 亦非誣也。 且是邦人士, 素尙義氣, 緩急可用, 故重臣權近, 擬之岐、豐之地, 豈不信哉? 今若建置西京, 營繕離宮, 增設隊伍, 爲之守衛, 以壯國威, 以鞏基圖, 則地愈增重, 人思效忠, 非直爲觀瞻之美也。 遠溯周、漢、唐、明, 旣有是矣。 近稽麗代及東西各國, 又如彼矣。 今以堂堂萬乘之國, 獨不可以建兩京之制乎? 況是擧也, 尤西州士民之所樂而趨之者, 則凡百經紀, 將見不日其成矣。 朝家何所持難, 而不爲之處分乎? 伏願皇上淵然深省, 下臣此章于政府, 廣詢而裁處焉。" 批曰: "千年古都, 事蹟䵝昧, 今卿詳陳古事, 皆有的據, 宜其有措處。 另探便宜, 當下處分矣。"
첫댓글 당당한 만승지국에서 라는 말이 눈에 확 들어옵니다..정약용선생의 경세유표에도 당당한 만승의 나라에서 라는 글귀가 나옵니다..좋은 자료 감사합니다.
1902년이면 중차대한의 시기인대 세상물정모르듯이 한가롭게 양경타령이나하고있는 광경을 보소 ! 원래 동서이경인대 웬 서도를 두느냐로 볼멘소리를 하는걸까 ? 상식적인 역사로 볼때도 뭔가 잘못된것임이 틀림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