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발자전거꿈 #뒷좌석꿈 #어린이꿈 #독립 #수동성
꿈소개>
내가 누군가와 어디로 이동해야 한다.
셔틀을 기다리고 있는 듯한데 사람들이 삼삼오오 무리 지어서 있었고,
나도 거기에 같이 서 있다.
셔틀버스가 올 줄 알았더니 5-6학년 정도가 타는 세발자전거가 온다.
세발자전거는 운전자, 승객 두 명이 타는 구조이다.
나는 세발자전거 제일 끝자리에 탔고 여자 운전자가 힘겹게 자전거를 운전하면서 간다.
나는 타면서도 뒤로 쿵 떨어지면 어쩌나..걱정한다.
이거 괜찮나..?하면서 타고 가는 중에 삼거리가 나온다.
몇몇 사람들은 식사를 하고 가야 한다면서 자전거에서 내려 식당으로 들어갔고
우리 자전거를 운전하던 사람은 목적지 쪽에 식당을 예약했다며 계속 가자고 했다.
그 후에 자전거를 운전하던 사람은 사라진 것 같다.
- 30대 직장인 여성 -
저의 상상으로 꿈을 펼칩니다.
성인인 내가 5-6학년 정도가 타는 세발자전거 뒷좌석에 올라타고 가는 모습이 은유하는 바는 무엇일까? 그 점을 풀어내고자 한다.
어딘가로 가야 하는데 셔틀버스를 기다리다가 세발자전거가 오자 세발자전거를 탄다. 나는 자연스럽게 세발자전거의 뒷좌석에 탄다. 나의 걱정은 '떨어지지 않을까...'하는 것인데, 그 속내는 '나의 안전이 담보되지 않으면 어쩌지..' 또는. '내게 주어진 자리를 지켜내지 못하면 어쩌나..' 로 정리될 수 있다. 자의든 타의든, 목적지로 가는 여정에서 늘상 경험하는 불안이다.
여자 운전자가 힘겹게 운전해 가는 모습을 기억하고 있다는 것이 시사하는 바는 크다. 꿈의 마지막에 이르면 여자 운전자는 사라진다. 아마도 그다음 운전자로 지목된 이는 나인 것 같다. 여자 운전자는 나를 위해 몸소 운전 시범을 해준 것 같다. 나는 그녀 뒤에서 그녀가 힘겹게 운전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자전거의 에너지원은 철저하게 운전자 자신이다. 거기엔 어떠한 꼼수도 끼어들 수가 없다.운전자가 쏟는 에너지없이 자전거는 조금도 나아가지 못하기 때문이다. 나는 그녀 뒤에 앉아서 자전거의 전진을 위해 그녀가 얼마만큼 애쓰고 노력하는지를 생생하게 지켜본 것이다. 곧 내 차례가 오기 때문이다. 그녀의 등은 땀으로 흠뻑 젖어 있는지도 모른다.
'뒷좌석에 탄 우리'는 여자 운전자가 감당하는 무게와 부담을 의미하는 동시에 목적지까지 데리고 가야 하는 구성원들을 뜻한다. 그 측면에서 바라보면 여자 운전자는 우리를 이끌어가는 리더를 상징한다. 여자 운전자는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에 충실하고자 정직한 노력을 쏟고 있다. 이제 공석이 된 운전석은 나를 새로운 운전자로 기다리고 있는 것 같다. 운전대를 잡아야 하는 이는 나다. 그 여성이 운전자의 자리에서 감당해온 무게를 감당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라고 꿈이 묻고 있다.
우리나라는 현재 대선을 앞두고 있다. 대통령이란 자리를 설명하는 한 정치인의 짤막한 표현을 가져와 보면, 대통령의 자리란 불면의 밤을 지새우는 자리라고 했다. 맡은바 소임에 최선을 다하고 싶은 리더라면 비숫한 운명에 처해 살아간다. 세발자전거의 여자 운전자가 감당하는 무게나 고충도 크게 다르지 않다. 누군가를 책임지고 있고 그들을 끌고가야 하는 리더의 모습인 것이다.
위에 풀어낸 이야기를 다르게 이야기해 보자면, 꿈속 세발자전거의 이미지는 독립 이슈에 대한 문제를 제기한다.
아이가 처음으로 세발자전거를 타는 시점은 부모의 절대적 보호로부터 서서히 벗어나게 되는 시기와 맞물린다. 세발자전거는 아이의 안전을 절대적으로 보호하는 한편, 아이로서는 자전거가 나아가는 힘이 전적으로 자신으로부터 나오는 경험을 하게 된다. 자신이 페달에 가한 힘이 원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동력이 되고 있음을 경험하는 것이다. 세발자전거에 대한 온전한 통제 권한을 행사해 본 아이는 운전에 자신감을 가지게 될 것이다. 실제로 처음으로 세발자전거를 운전하는 5-6세는 이리쿵 저리쿵하면서 수시로 부댄다. 그런 경험 속에서 운전 요령이 터득될 것이다. 운전 감각을 키우지 못하고 성장 할 경우 충돌에 대한 과도한 두려움을 안고 전전긍긍하거나 피할 수 없는 충돌 상황이 발생하면 속수무책이 된다.
세발자전거 운전은 자신의 힘을 자각하고 신뢰하는 시작을 뜻하며, 그 힘을 끌어올려 앞으로 나아가는 동력으로 사용하는 능력을 뜻한다. 성인인 나는 세발자전거 뒷좌석에 탄다. 뒷좌석에 탄 나의 모습이 의미하는 바의 핵심은 결국 수동성과 의존 심리이다. 발달 단계별로 그에 걸맞는 과제 수행을 논할 때 , 나는 세발자전거 운전을 익히지 못한 채 그 시기를 보낸 것 같다.
꿈속 세발자전거는 5-6학년 정도가 타는 자전거로 보였다. 이제 곧 초등학교를 졸업할 테고 그리되면 세발자전거에서 두발자전거로 옮겨가야 한다. 그전에 세발자전거 운전자로 살아보는 경험을 충분히 해봐야 한다. 세발자전거는 뒤에 나란히 자리한 두 개의 바퀴 덕으로 넘어질지 모른다는 두려움은 몰아낼 수 있다. 그 걱정은 접고서 자전거의 핸들을 잡아야 한다. 자전거 운전 연습이란 결국 자신의 힘을 자각하고 거기에 신뢰를 보내는 연습인 것이다.
한국의 지형은 자전거 운전에 적합하지 않다. 자전거는 평지에서 유용한 탈 것인데, 한국의 길은 오르막과 내리막이 수시로 반복된다. 완만한 오르막길조차 자전거는 버거워한다. 더군다나 뒤에 사람을 태운 상태에서는 힘겨움은 가중될 터, 젖 먹던 힘까지 짜내며 낑낑거릴 수밖에 없다. 자전거 타는 법을 배우지 않은 채 늘상 뒷자리에 앉는 이는 운전자의 고충을 이해하기도 어렵다. 운전자가 왜 이렇게 낑낑대며 자전거는 왜 이렇게 비틀거리고 더디게 나아가는지, 알 길이 없기 때문이다. 또, 뒷좌석에 앉아서 경험하는 오르막은 “에이 이 까짓꺼가지고..” 정도로 만만해 보이기 때문이다. 겨우 그 정도 어려움 앞에서 땀을 비 오듯 쏟아야 하고 기진맥진하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면, 운전석에 대한 매력은 더 떨어질 것이다. 하여, 자전거 운전자로 살아가라는 요구를 받고 있음에도 덜 수고롭고 더 매력적인 이동 수단만을 바라게 되는 것이다. 뒷좌석을 떠나지 못하는 이유이다. 그러나 운전자는 사라졌고, 세발자전거의 새로운 운전자로 낙점받은 이는 '내'가 틀림없다.
모든 꿈은 깨어있는 삶의 현실을 반영한다. 이는 꿈꾼이의 불안과 두려움, 깨어있는 삶에서 갈등하는 양상을 담아낸다는 의미이다. 세발자전거가 집 주변을 벗어나는 일은 드물다. 세발자전거는 앞마당이나 집주변의 공터 정도로 한정되기 때문이다. 세발자전거는 목적지를 염두하고 고르는 이동 수단이 아니라는 뜻이다. 그럼에도 나는 망설임없이 세발자전거에 오른다. 이를 내 오랜 습성으로 읽어본다면 익숙한 집 주변을 떠나지 못하고 그 주위를 맴도는 습으로 해석되어도 무방하다. 세발자전거를 타는 아이가 집 주변을 벗어나지 않는 이치와 같다. 이제껏 집 주변을 벗어나지 않았고 벗어날 엄두도 내지 못하고 지내왔음을 고백하는 것이다. 너무도 자연스럽게 세발자전거 뒷좌석에 올라타는 내 모습이 알려오는 진실의 한 측면은 그렇다. 이때 '집 주변'의 상징적 의미는 자아가 안전기지로 삼아온 것들을 의미하는 바, 자아의 신념을 가리킨다. 따라서 질문의 초점은, 앞으로도 죽 안전기지로 삼고 지낼 것인지 아니면 변화가 절실한 시점에 있는지, 하는 것이다. 분명한 것은, 성인 단계에 맞는 모험이 있고 이동 수단 역시 마찬가지이다.
자아는 안전기지 주변만 맴돌고 있다. 자아가 안전기지로 삼아온 것들을 찾아내야 한다.세발자전거의 운전자는 내가 아니었다는 점을 근거로 삼아 연상을 이어가 보자. 세발자전거를 탄 아이는 이리쿵 저리쿵 할 권리를 얻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대개는 안전을 보장받는다. 경험의 축적은 요령의 터득과 요령의 체화로 이어진다. 파괴적인 충돌을 피하는 요령 역시 안전한 가운데 가벼운 충돌을 무수하게 경험함으로써 득해질 것이다. 내게 결핍된 것은 외부 환경과 충돌을 빚어도 안전할 수 있구나...하는 경험일지 모른다. 따라서 자아가 안전기지로 삼았던 것들 중 하나는 ‘절대로 외부와 충돌을 빚어선 안된다.’ 일 수 있다. 이리쿵 저리쿵의 경험은 가벼운 충돌을 삶의 자연스러운 일부로 받아들일 수 있도록 만들어준다. 막무가내로 달려가 쿵해도 내가 안전할 수 있다는 경험이 턱없이 부족했던 나는 충돌 공포를 가진 채 성장한 것도 같다. ‘충돌 없는 상태’가 자아의 안전기지인 것이다.
다시 말하면, 나는 내 의지대로 이리저리 막 가보는 경험 자체가 대단히 적었을지 모른다. 이리저리 부대며 막 가봄으로써 부모가 정해둔 경계에 서보기도 하고, 더 나아갈 것인지 아니면 자전거를 되돌려 돌아갈 것인지 갈등하는 경험도 하면서 자신에게 이로운 최선의 선택을 고민하게 되는 것이다. '이번에는 돌아서지만 다음 번에는 더 가보고 싶다..'하는 바램을 가져볼 수도 있다. 방향 감각을 키운다는 것은 그런 것이다. 세발자전거 위에서 맘껏 자유롭게 운전대를 이리저리로 틀어 본 경험을 가진 아이는 그런 자신감을 장착하게 되는 것이다. 이쪽으로도 가보고 저쪽으로도 가보고 벽과 장애를 만나 돌아서는 경험도 하고, 그렇지만 포기하지 않고 다시 다른 길을 찾아보는 과정은 길에 대한 두려움과 불안을 덜어내는데 기여한다.
성인으로서 세발자전거의 운전자로 살아본다는 것은 한 차원, 의식의 진화를 막는 고약한 신념으로 달려가 쿵하고 부딪쳐 보자는 것이다. 그 신념이란 대개 낡고 고루한 전제들로 이루어져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핸들의 주체로 살아가는 경험 즉 독립된 존재로 살아가는데 장애를 유발하는 전제들이다. 세발자전거로 하는 충돌 경험은 또 물러설 때와 나아갈 때를 깨치게 해준다.
세발자전거의 운전자로 살아보는 경험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 세발자전거를 타고 목적지까지 가자면 부지런히 페달을 굴려야 한다. 고된 여정이 될 것은 뻔한 이치, 자주 지치고 온몸은 땀범벅이 될 것이다. 그래도 이제 내 차례가 되었다. 내가 거부하면 세발자전거는 그대로 멈춰있거나, 혹은 영원히 핸들을 잡지 못하는 신세로 전락할 수도 있다.
세발자전거 운전자로 살아야 한다는 것은 한 차원 리더 이슈와 관계가 있다고 위에서 언급했다. 아주 작은 인원이라해도 무리를 이끌고 앞으로 나아가야 하는 입장에 있다면, 그에 따른 스트레스와 말 못 할 고충으로 괴로울 것은 뻔하다. 뒷좌석에 두 명을 태운 세발자전거 이미지 그리고 힘겨워하는 여자 운전자의 이미지는 리더의 고충을 설명하는 최적의 이미지라 하겠다. 백마디 천마디 말보다 더 강력한 전달 효과를 발생시킨다. 나는 운전자가 얼마나 고생하는지를 목도했다. 내가 감당하고 싶지 않은 괴로움이 거기에 있다. 나의 차례가 되었다는 신호에도 세발자전거의 운전석으로 옮겨가지 못하고 있는데, 세발자전거를 운전해 목적지에 당도할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꿈이 여성 운전자를 내세운 이유는 나의 자각과 통찰에 기여하기 위함이다. 운전자가 여성이었기 때문에 힘겨워하는 모습이 나의 눈길을 끌었는지도 모른다. 그 모습이 운전석에 앉기를 주저하는 이유로 작용하고 있는 것도 같다. 뒷좌석에 둘을 태운 채 모든 에너지를 끌어모아야 겨우 나아갈 수 있는 자전거와 그 자전거를 운전해야 하는 여성, 내 시선이 포착해낸 여성의 현실인 것이다. 그 언저리에 나의 두려움과 공포가 있음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자아가 인식하는 사회 속 여성의 현실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꿈속 세발자전거 운전자처럼 자신이 만든 동력으로 자신이 목표로 삼은 목적지까지 애쓰며 나아가는 여성들도 많다. 그런 여성들을 바라보는 자신의 복잡한 심경과 편견에 대해 성찰적 정리가 필요해 보인다. 그 정리가 나의 독립 이슈를 풀어냄에 있어서 중요한 열쇠로 작용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