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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은석 | 전도사님! 건강하신지요. 지난 번 면회에서 편지 약속을 드려 기다리고 계셨을 텐데 많이 늦어졌습니다. 막상 편지를 쓰려니 첫 인사부터 망설여지더군요. 언제나처럼 “평화의 이름으로 인사드립니다”라고 쓰고 싶었지만 교도소 생활에 평화라니요. 쓰고 지우기를 몇 번, 결국 선택한 것이 겨우 건강을 묻는 안부 인사네요. 그래도 전도사님이라면 고통의 시간 속에서 분명 평화를 찾고 계시겠지요?
기껏 편지를 쓰는 일인데 저는 이 시간이 제주로 내려가는 길보다 훨씬 더 멀게 느껴졌습니다. 그건 아마도 기억과 책임의 무게가 주는 마음의 여백 때문이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전도사님께 편지를 쓰는 일이, 그리고 강정마을과 평화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저에게는 제 부족함과 부끄러움, 그리고 두려움을 대면하는 시간이기도 했습니다. 편지는 손이 쓰는 것이겠지만 마음이 편지를 쓰기 위해서는 조금 더 많은 시간이 걸리더군요.
전도사님, 혹시 그곳 교도소를 밖에서 본 적이 있으신가요? 담장 너머의 풍경을 말이지요. 강정마을에서 활동하다 그곳에 온 누군가를 면회하기 위해 이곳을 방문하신 적이 있겠지요. 5년간 법 없이도 살던 마을 주민 300여 명을 범법자로 만들어 버린 해군기지 건설은 이 낯선 장소를 더 이상 낯설지 않은 곳으로 만들어 버렸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제주교도소는 참 작고 아담하더군요. 제가 있던, 수천 명을 한곳에 모아 놓는 그곳과 비교하면 참 소박하고 인간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제주도에 단 한 곳뿐인 유치장도 수용 인원이 얼마 되지 않는다고 하지요. 강정마을에서 큰일이 벌어질 때마다 그곳 경찰서의 유치장이 미어터지던 걸 기억하고 있습니다. 도둑이 없는 섬, 담벼락이 허리춤에도 오지 않는 건물들, 그리고 주인이 있는지 없는지를 알려주는 정낭의 미덕까지. ‘제주도를 갈 때마다 해군기지 건설만 아니었다면 여전히 조용하고 평화로운 섬으로 남았을 텐데 ….’ 생각하곤 합니다.
몇 해 전, 제가 감옥에 들어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개척자들’ 식구들과 함께 저를 찾아온 적이 있으시지요. 그렇게 몇 번이나 찾아오셨습니다. 그때는 정말 미안하고 죄송한 마음뿐이었습니다. 왠지 저의 선택이 사람들을 고생스레 만든 것 같아서요. 그때는 제가 전도사님을 면회하러 교도소를 찾아가게 될 줄 상상도 못했지요. 우연한 기회에 개척자들을 알게 되었을 때도 그 인연이 이렇게 길게 이어질 거라고 상상하지 못했습니다. 그러고 보니 저와 전도사님이 만나는 평화의 길목은 늘 교도소 앞마당인 모양입니다.
전도사님을 면회하는 내내 전도사님이 저를 면회 오셨던 때, 파란 수형복과 수번을 달고 있던 제 모습이 머릿속에서 지워지질 않았습니다. 그래서였을까요. 면회실에서 전도사님을 뵈었을 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생각이 나지 않았습니다. 아니, 무슨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머릿속에 가득한 질문은 몽땅 제가 해야 할 대답이었는데 말입니다. 처음 구치소로 저를 찾아오셨을 때 전도사님은 저를 바라보며 어떤 생각이 드셨나요. 애써 의연한 척 했지만 감옥에서 몇 달 간은 웃는 법을 잊어 버렸던 기억이 납니다. 그래서일까요. 그때 제 표정이 기억나지 않습니다. 아니, 기억할 수가 없겠지요. 다만 진심으로 걱정해 주시던 전도사님과 개척자들 식구들의 표정은 분명하게 기억이 납니다.
전도사님께 이런 이야기를 한 기억이 나네요. 병역거부를 하고서 미처 알지 못했던 것을 깨달았다고. 병역거부, 특히 감옥살이는 혼자서 하는 게 아님을 알게 되었다고 말입니다. 혼자 선택할 수 있는 일이 아니지요. 혼자 그 고통의 시간을 보내는 것이 아니라 응원해 주시는 분들, 그리고 진심으로 걱정해 주시는 분들이 있기 때문에 견딜 수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감옥에서 쓰신 전도사님의 옥중일기를 훔쳐 읽었습니다. TV에서 흘러 나온 안치환의 노래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의 ‘지독한 외로움에 쩔쩔 매 본 사람은’이란 소절을 들으며, 전도사님도 ‘홀로 가고 있다는, 함께 갈 수 있는 사람이 없을지도 모른다’는 지독한 외로움을 느꼈다고 하셨지요. 좁은 문으로 걸어가는 길은 늘 외로움을 동반하는가 봅니다. 동행자가 없는 외로움…. 그제야 전도사님께서 응원의 목소리보다는 동행의 발걸음 소리를 듣고 싶으셨다는 걸 알았습니다. 아마 전도사님을 뵈러 교도소로 향하는 발걸음보다 강정마을의 구럼비로 향하는 발걸음을 보고 싶으셨던 것이겠지요?
조금 다른 이야기를 해 볼게요. 제가 개척자들과 교제하며 인상 깊게 본 사진이 한 장 있습니다. 전도사님이 개척자들을 시작할 무렵의 사진이었습니다. 커다란 텐트 사진이었지요. 지금의 양평 샘터 어딘가에 집도 아닌 커다란 텐트를 쳐 놓고 청년들과 살던 때 찍은 것 말이에요. 개척자들 공동체를 방문하면서 종종 그때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제 기억이 맞는지는 모르겠네요. 지금처럼 집을 지을 수도, 지을 수 있는 사람도 없던 시절에 청년들과 무작정 텐트를 치고 공동체 생활을 시작하셨다고 하셨지요. 멀리서 물을 길어 오고 겨울에는 얼음을 깨 가며 생활했던 고된 시간이었을 테지요. 어떤 구체적인 계획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단지 기도 모임을 통해 가졌던 평화의 비전을 품고 그 일을 시작하셨다고 들었습니다. 그때 시작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다는 말도 하셨지요. 저는 개척자들 하면 자꾸 그 텐트 사진이 떠오르곤 합니다. 그 텐트 사진 한 장이 개척자들 사역의 많은 부분을 설명하는 것 같아서요. 혹시 그때의 이야기를 들려주실 수 있으신지요. 제대로 된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던 그때에 전도사님을 움직이게 한 건 무엇이었는지, 전도사님이 꿈꾸었던 건 무엇이었는지요.
무모함. 사실 제가 처음 개척자들과 전도사님을 만나면서 들었던 생각입니다. 정말 무모하리만치 용감한 이야기를 아무렇지 않게 하시는 전도사님을 보며 이것은 어떤 힘일까 생각했던 적이 많습니다. 저도 제 주변에서는 제법 별종으로 불립니다만 도무지 들어본 적도 없는 이야기들이 많았으니까요. 참 이상하게 그 무모함이 부럽기도 했지만, 사실 고마웠습니다. 그 무모함을 머리로는 이해하기 힘들었지만 가슴으로는 깊게 공감할 수 있었으니까요. 아마 저처럼 두근거렸을 청년들이 많았을 테지요. 불가능한 것들 앞에서도 묵묵히 발걸음을 내딛는 사람들이 만들어 내는 신뢰. 저는 그 단단함이 지난 10여 년간 개척자들이 만들어 낸 평화의 씨앗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리고 저는 그런 신뢰를 지금의 강정마을에서, 그리고 강정마을 해상 팀(SOS, Save Our Sea)의 활동에서도 마주하게 됩니다. 지난해 1월이었지요. 지난 수년간 방문했던 강정마을의 주민과 활동가 수십 명이 연행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전도사님과 긴급하게 제주에 내려가며 제 머릿속은 많이 복잡했습니다.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저는 머리가 앞서는 사람인가 봅니다. 그렇게 답답한 가슴을 안은 채 제주 강정을 돌아다니면서도 정작 머리로는 무엇을 할 수 있을지만 생각하고 있었으니 말입니다. 지금 생각해 보니 그때 이미 전도사님은 ‘강정에 내려오겠다’고 결심하시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또 마음속에 커다란 평화의 텐트를 하나 그려 놓으셨겠지요.
전도사님! 왜 이 나라는 평화를 바라는 이들을 감옥으로 보내는 걸까요. 그들을 모두 감옥에 넣어 버린다면 과연 이 나라는 평화로워질까요? 이 나라의 정치인들이 갈등의 현장에서 내놓을 수 있는 해답이 교도소의 차가운 콘크리트 담벼락 밖에는 없다는 사실이 너무 안타깝습니다. 매년 총을 들지 않겠다는, 사람을 죽이는 연습을 할 수 없다는 수백 명의 청년들을 감옥에 보내는 것도 모자라 이제는 평범하게 살아가던 주민들마저 범법자를 만들고 있습니다. 이 나라에서 평화를 염원하는 것이 그렇게 위험한 일일까요.
지난해 제주에서 전도사님이 제게 그런 이야기를 하신 적이 있지요. “제주 강정마을을 보고 청년들이 군대에 가지 않겠다고 이야기하게 되면 좋겠다. 강정마을을 찾아온 청년들이 병역을 거부하는 평화활동가가 되었으면 좋겠다.” 전도사님, 저는 그동안 저의 양심을, 저의 입장을 변호하기 위해 소극적으로 병역거부를 이야기해 온 것 같습니다. 저는 병역을 고민하며 저를 찾아온 청년들에게 그것은 당신의 선택이라고만 이야기했습니다. “책임질 수 있는 만큼 행동해라. 힘든 길, 철저하게 당신이 감당해야 하는 길이다.” 저를 찾아왔던 몇 명의 사람들 중에 아직 감옥에 간 사람이 없는 걸 보면 저의 대답이 제법 효과적이었던 모양입니다. 아니면 저의 용기 없는 태도에 그들이 병역거부를 공감하지 못했기 때문일 수도 있고요. 지금 생각해 보니 어쩌면 그들이 듣고 싶었던 말은 함께 걸어갈 수 있다는, 함께 걸어가겠다는 응원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혼자서 걸어갈 수 없는 그 길을 철저하게 그들의 길이라고 대답했던 게 미안해집니다.
하지만 이제는 바꾸어 보려고 합니다. 적극적으로 평화의 길을 모색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지 말입니다. 전도사님과 개척자들 활동가들이 강정마을에 내려간 초기 제가 처음 들었던 말은 ‘갈등과 화해’였습니다. 해군기지 건설로 갈등의 현장이 되어 버린 강정마을 주민들에게 도움이 되고 싶다고, 그들과 아이들의 마음을 채워 주고 치유해 주고 싶다고 이야기하셨지요. 하지만 한 달도 채 되지 않아 제가 들었던 소식은 전도사님이 갈등의 한가운데로 들어가셨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전도사님은 강정마을에 갈등 해결과 평화를 위한 학교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강정마을이 평화의 학교가 되어야 한다고 이야기하셨지요. 주민들 뒤에 서는 게 아니라 적극적인 평화를 위해 그들 옆에서 해군기지 공사장으로 들어가는 트럭과 거대한 중장비 앞을 가로막으셨지요. 저는 그 처음 한 달 동안 전도사님이 무엇을 보셨는지 많이 궁금합니다. 전 세계 갈등 현장에서 화해와 평화를 위한 학교를 만들어 온 개척자들이 주민들의 입장에서 적극적인 반대 활동을 시작한 것은 무엇보다 큰 변화로 보였으니까요. 저는 그 지점에 평화학교와 적극적 평화의 해법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청년들이 더 많이 강정마을에 가면 좋겠습니다. 그냥 강정마을에 갔다 오는 것이 아니라 더 많은 것을 느끼고 자신의 역할을 찾아 가면 좋겠습니다. 전도사님처럼 진실한 눈으로 갈등의 현장을 바라본다면, 어느 누구도 가만히 지켜보기만 할 수는 없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어떤 일들이 벌어지는지 알아야지요. 이 나라의 군대와 이 나라의 경찰이 주민들과 대결하는 곳에서 이제는 한낱 구호뿐인 평화를 다시 생각해 보았으면 합니다. 청년들이 내면의 평화를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더 많은 사람들과 함께 평화로운 길을 찾아가게 되면 좋겠습니다.
곧 전도사님의 재판이 열리겠지요. 자신을 무죄로 만들기 위한 재판이 아니라, 법정 투쟁을 통해 해군기지의 문제점을 명백히 증명하겠다는 전도사님의 말을 기억하겠습니다. 5월이 가기 전에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2012년 5월 19일 박정경수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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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은석 |
송강호 전도사의 옥중 일기
2상 9 611번, 두 번째 들어온 제주교도소에서 받은 새 번호다. 작년 7월 15일 바로 옆의 2상 11호에서 보름을 보냈다. 그때는 지금보다도 더 답답했었는데 이제는 그리 답답하지도 않고 갑갑하지도 않다. (중략) TV에서 안치환의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라는 노래를 젊은 후배 가수가 불렀다. ‘지독한 외로움을 경험한 사람은 알게 되지’라는 가사에서 눈물이 글썽거렸다. 그래 내가 바로 그런 사람 같다. 오늘 성희는 와서 나보고 혼자가 아니라고 위로해 주고 갔지만 나는 내가 홀로 가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지독한 외로움을 느낀다. 나를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다. 설령 나를 사랑한다 하더라도 나와 함께 갈 수 있는 사람은 없을지도 모른다. 사람은 누구나 외로운 존재인지도 모른다. 누군가 함께 공감할 수 없는 가치를 추구하는 사람은 외롭다. _ 2012. 4. 7
우리나라 민주주의의 초석을 깔아 놓은 날을 누가 기억이나 할지 모르겠다. 대한민국의 민주주의의 앞날이 오늘 날씨처럼 암울한 것 같아 보인다. 강정 마을에서 많은 사람들이 끊임없이 투쟁하고 또 체포, 연행된다는 소식이 들리지만 제주도청이나 대한민국 정부의 조치는 여전히 해군 감싸기로 일관하고 있는 것이 안타깝다. 오늘 오전에 문정현 신부님과 송영섭 목사님, 실버와 해마 그리고 아내가 접견을 왔다. 문 신부님은 오른 손에 깁스를 하고 오셨다. 신부님께 절을 올렸다. 한평생 고단한 길을 걸어오신 노 신부님이 죽을 위기를 넘어서 지금까지 살아오신 것이 너무 감사하다. 제주대학병원에서 나오셔서 처음으로 이곳을 찾아 주셨다고 신부님의 마음을 전해 주셨다. 신부님을 뵈면서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구사일생으로 살아나신 신부님의 그 아픈 상처가 느껴지는 것 같다. 단지 신체적인 아픔만 아니라 가슴 속에 날마다 찢어질 그 상처를 어찌 모를까?
(중략) 오늘 백신옥 변호사님이 찾아왔다. 내 재판을 강기탁 변호사가 맡은 사건과 병합하는 것이 어떠냐고 물었다. 그것이 형을 줄일 수 있는 길이라고 했다. 나는 형의 길고 짧음에 관심이 없고 이 해군기지 건설사업의 부당성과 불법성을 증거하며 나를 무죄로 판결하도록 변호할 변호사를 찾는다고 했다. 물론 판사는 그렇게 판결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법정 투쟁을 통해 해군기지의 문제점을 명명백백히 증명하여 이 불법을 저지르는 해군과 그를 동조하는 법관들을 정의의 심판대에 세우기를 바란다. 지금까지 법을 빙자하여 정의와 평화, 민주주의와 자유를 억압해 온 제주 법정과 그 판사들을 심판할 변호사들이 아니라면 나는 재판을 분리하여 내 형을 더 길게 늘일 이유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나를 변론하겠다는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협회가 해군기지 건설사업에 대항해서 투쟁할 의지가 있다면 내 재판이 그 장이 되기를 원한다. 역사는 훗날 부당하고 불의한 법관들을 심판할 것이다. 그러나 정의로운 변호사와 판사들은 그 역사를 단축한다. 그 긴 역사 속에서 희생당할 사람들과 파괴될 자연과 문화유산을 구원할 변호사들이 법정에 설 수만 있다면 천일이라도 이 감옥을 지킬 의향이 있다. _ 2012. 4. 19 | |
박정경수 편집위원, 평화 활동가 peacebaro@gmail.com
송강호 전도사가 편지를 받아 볼 수 있는 주소는 다음과 같다.
제주도 제주시 제주우체국 사서함 161호 제주교도소 611번 송강호 (우 : 690-600) 법무부 홈페이지(www.moj.go.kr) 전자민원서비스로도 편지를 전달할 수 있다. |
첫댓글 무엇이 옳고 그른가 보다 어떤 방향으로 가고 있는가를 생각하고 빠른 결단과 행동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