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랍을 정리하다 오래 된 물건 하나를 발견했다. 라식수술을 하기 전, 내가 사용하던 안경이었다. 안경은 가장자리는 두껍고 가운데 갈수록 오목한 근시용이었다.
아들아이가 어릴 때, 한번은 돋보기를 가지고 놀다가 급히 달려왔다. 엄마 안경은 오목한데 왜 돋보기는 볼록하냐는 거였다. 그때 나는, 근시는 물체의 상이 망막 앞에 맺혀서 빛을 퍼지게 하는 오목렌즈를, 원시는 뒤쪽에 맺히므로 빛을 모으게 하는 볼록렌즈를 사용한다며, 오목과 볼록이 합하여 평면을 이루듯 눈도 그렇게 교정한다고 말한 기억이 난다. 그런데 눈만 그런 게 아니다. 우리의 마음도, 살아가는 모습도 이와 다르지 않다.
작년연말, 막내 언니와 우리 부부가 단출하게 망년회를 한 적이 있다. 식사를 마치고 돌아서는 나를, 언니가 붙잡고 들어간 곳은 인근의 한 클럽이었다. 지독한 몸치인 나에게, 노래와 술과 춤이 어우러지는 그곳은 부담스러웠다. 나는 슬그머니 테이블로 들어와 무대가 있는 앞쪽을 바라보았다.
40대로 보이는 중년여자가 긴 줄을 이리저리 끌며 간드러지게 노래를 부르고, 언니와 형부는 마주보며 간당간당 춤을 추다가 뱅그르르 돌기도 했다. 언니 왼쪽에는 남편과 줄무늬 여인이 오색 불빛 사이로 언뜻 나타났다 사라지곤 했다. 남편의 어깨에 한 손을 올리고 낭창낭창 허리를 돌리던 줄무늬 티셔츠가 물러가자, 어느새 빨간 원피스가 다가왔다. 호리한 몸매에 킬힐을 신고 갈색 파마머리가 어깨에서 찰랑이는 젊은 여인이었다.
음악이 브루스 곡으로 바뀌자, 빨간 원피스는 남편의 목에 두 팔을 두르고 무대 중앙으로 미끄러져 나갔다. 자연스레 남편의 손이 빨간 원피스의 허리를 감았다. 빨간 원피스가 뭔가 소곤거렸다. 남편의 환한 웃음이 빙글빙글 돌아가는 붉은 조명을 타고 또르르 굴렀다. 이번에는 남편이, 다시 빨간 원피스⋯ 이렇게 몇 차례 밀담이 오고갔다.
남편은 언제나 과묵했고, 정적인 편이었다. 그런 사람이 이곳이 즐거운 듯 자연스러웠다. 30년 가까이 함께 살았는데 내가 몰랐던 부분도 있었나 싶어 놀랍고 흥미로우면서, 한편 나를 한 번도 돌아보지 않는 남편이 얄밉기도 했다.
그 마음은 결국 말다툼으로 이어졌다. 잉꼬부부라는 단어에 흠집을 내가며, 나는 자리로 들어오는 남편을 향해 빈정거리듯 말하였고, 남편 역시 타인의 시선은 아랑곳없이 화를 내는 오류를 범하였다.
‘두 손바닥이 마주쳐야 소리가 난다.’는 말이 생각난다. 작은 언니와 형부를 보면 더욱 절실하게 느끼는 대목이다.
여고 때 학생회장을 하였던 언니는 일흔을 바라보는 지금도 열정적이며 적극적인 반면, 형부는 곁에서도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를 정도로 내성적인 성격이다. 경상도와 전라도라는 지역은 제쳐두고라도, 판이하게 다른 두 분이 결혼하겠다고 하였을 때, 우리는 적잖게 걱정했다. 그러나 결혼 40년 동안, 두 분은 한 차례의 잡음도 허용하지 않은 채 우리의 어설픈 우려를 늘씬하게 잠재웠다.
형부가 멀리 보지 못하고 허둥거릴 때, 언니는 오목렌즈가 되어 뚜렷한 목표를 향해 과감히 이끌었고, 언니가 눈앞의 현실을 파악하지 못할 때면, 형부는 볼록렌즈가 되어 재치와 지혜를 모으도록 배려했다.
그날 클럽에서도 그렇다. 내가 좀 더 멀리 보았으면, 남편 역시 아내의 투정을 사랑스럽게 바라보았으면 어땠을까.
세상이란, 알록달록한 사람들이 올록볼록한 요철을 하나하나씩 맞추며 함께 살아가는 것이다. 그것이 사랑이며 세상이치다. 저 들판에 피어있는 잡초도 그렇다고 손짓하지 않는가.
첫댓글 평생 충돌 없이 사는 금슬 좋은 부부도 있다는 말을 들은 적은 있지만 그래도 티격태격 사는 재미도 있을 듯합니다. 저의 부부도 자기 주장이 강해 자주 부딪치지요. 일방으로 치우치지 아니하고 오목과 볼록이 만나 평면을 이룰 수 있다면 그게 이상적인 음양의 조화가 아닌가 합니다. 참 좋은 부부이야기 잘 읽고 갑니다.
못난 글에 흔적을 남겨주시니 고맙습니다. 흔한 말로 하나의 비등점을 향해 달려가는 게 부부라 하더군요. 부부 뿐 아니라 세상에서 만나는 모든 사람들이 서로의 못난 부분은 채워가며 살아가는 지혜를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선생님, 연휴로 이어지는 금요일입니다. 즐거움 가득하시기 바랍니다.
그것도 다 사랑이 넘치니 싸우는 겁니다우리 자주 싸웁시다요
부산이라는 글자를 보는 순간, 정겨움이 가득 묻어납니다. 저 역시 부산에 살고 있습니다. 기회가 되면 언젠가 뵐 날도 있겠지요. 즐거운 주말, 행복한 주말이 되시기 바랍니다.
막힘 없이 읽히는 글입니다. 결미를 좀 첨가해 보면 어떨까 합니다. 주제에 무게를 더하는 방향으로. 참, '막내 언니'란 말이 좀 이상합니다. 큰 언니 , 둘째 언니...... 이런 식의 호칭은 자연스러운데 막내와 언니는 자연스레 융합이 안 됩니다.
선생님 오랜만에 인사드립니다. 그간 아들이 입대하는 바람에...막내 언니는 네째 언니로 고치고, 결미 부분은 다시 한번 살펴보겠습니다. 못난 글을 살펴주셔서 고맙습니다. 늘 이렇게 은혜만 입습니다. 항상 건강하세요.
상호 보완적인 부부의 삶은 성공적이리라 여겨집니다. 오목과 볼록의 지혜를 배웠습니다.
말씀 감사드립니다. 초면에 인사를 이렇게 드려 송구스럽습니다. 기회가 되면 정식으로 인사드리겠습니다.
좋은 밤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