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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훈장편할미새26
할미새의 둥지 · 그 스물여섯
김영훈
작가 · 월간아동문예(1983)등단 · 본회 명예회장
소설집 『익명의 섬에 서다』 외 · 수상<전영택문학상> <한국pen문학상>외
26. 로마 어머니의 두 번째 초대
강당에서 종업식을 마친 아이들이 우르르 교실로 들어간다. 민동규 선생도 아이들을 따라 교실로 들어선다. 그런데도 소란하다. 평소 같지 않다. 아이들은 많이 들떠 있었다. 담임이 들어왔는데도 마냥 시끄럽다. 게다가 아침에 잠깐 피웠던 난로도 이미 종업식 직전 청소를 마친지라 꺼져있어서 교실 안은 차고 썰렁하다. 동규는 얼른 아이들을 하교시켜야 하겠다고 생각하면서도 교단에 올라 교탁 앞에 선다.
그리고는 아이들이 조용해지기를 잠시 기다린다. 한참을 기다리고 나서야 교실 안이 좀 조용해진다. 그제야 동규는 아이들을 향해 천천히 입을 연다. 마음은 빨리 하교시켜야 하겠다고 생각하면서도……. 한 학년을 마감하는 제자들의 마음이 되어 그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을 해주고 싶어서이다. 민동규 선생은 자신의 중3 때를 떠올리며 입을 연다. 그에게는 중3의 의미가 유달랐었다.
“여러분, 중2를 마치며 집에 돌아가 한 학년을 마무리하는 정리를 잘 해요, 그리고 희망찬 3월에 만납시다. 여러분은 이제 새 학기부터 3학년입니다. 학년 말 휴가를 하는 동안에 여러분, 정신적으로 한 층 더 성숙해지기 바랍니다. 마지막 학년으로서 한 해를 어떻게 지낼지를 설계하고 다짐하면서 이 학년말 방학을 알차게 보내야 합니다. 여러분이 맞는 3학년 한해는 정말 중요한 시기입니다. 여러분이 고등학교 진학을 앞두고 어떤 길로 방향을 잡아 살아가야 할지를 결정해야 하는 시기이기 때문입니다. 또 사춘기를 잘 마무리해야 한다는 과제도 남아 있습니다. 선생님도 지금 돌이켜보면 그 중3 때가 아주 중요했었습니다.”
동규는 학생들 앞에서 한 학년을 마치는 훈화를 그렇게 시작한다. 말을 하다 보니 더욱 자신의 중3 시절이 회상된다. 버릇처럼……. 그의 의식 속에 그리움으로 찐득찐득하게 묻어 있는 그 시절이 그립다. 아니다. 당시 반공제일주의를 표방하던 박정권이라는 군사 정부 속에서 또 자신의 개인사 때문에 좌우 이념에 갇혀 살 수밖에 없었던 아픈 시대였지만, 선생님이 되겠다고 생각한 게 바로 그때였다. 세 권으로 되어 있는 한국 단편 문학 소설을 읽으며 소설가가 되겠다고 꿈을 꾸며 사춘기를 보내며 로마에게 마음을 설렜던 것도 그때부터였다. 중백모의 영향이 컸지만 말이다.
동규는 그 무렵에 『한국단편문학전집』이라는 세권의 문학 소설을 통해 이광수의 「소년의 비애」와 김동인의 「감자」를 만났다.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을 만났고, 김유정의 「동백꽃」도 만났다. 염상섭의 「표본실의 청개구리」도 만나고 전영택의 「화수분」도 만났다. 그런 감정으로 로마와의 첫 사귐을 정식으로 시작한 것고ㅓ 바로 중3 때였다.
1학년 입학을 하고나서 사촌 누이를 통해 로마를 만났지만 설렘이 시작한 것은 바로 중3 때였다. 지금 종업식을 끝내고 나면 내일은 그녀에게 가야 한다. 먼저 고향 마을 평촌에 들려 중백모를 뵈어야 하겠지만 마음은 이미 그녀에게 가 있는 민동규이다. 이 무렵에 읽은 김유정의 「동백꽃」 소설이야기는 평소 국어 수업시간에 아이들에게 몇 번 들려주었었을 만큼 동규에게는 가장 큰 중3의 기억이지만 늘 로마와의 추억과 함께 혼재되어 있다. 로마를 따로 두고 회상할 수는 없다.
그러나 아이들은 제 담임의 설레기만 했던 속마음을 알 리 없다. 여느 수업시간 만큼 진지하지도 않다. 집으로 가고 싶어 하는 마음으로 그저 들떠 있어 통제가 잘 죄지 않는다. 아직도 일부 학생들은 제 담임의 말에 전혀 귀를 기울이지 않고 해방감에 들떠있었다. 동규는 잠시 아이들을 바라보다가 다시 입을 연다. 하지만 여전히 들뜬 분위기가 계속되고 있다. 그래서 말을 그만 멈추고 얼른 마무리하고 하교시키기로 한다.
“자, 여러분 3월 2일에 만납시다. 이만 하교해도 좋습니다.”
담임의 그 말에 아이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와 하고 교실 밖으로 나간다. 그런 아이들의 뒤를 따라 그도 천천히 교실 밖으로 나와 교무실로 향한다. 로마를 만나러 갈 시간, 아니 중백모를 만나러 갈 시간을 좀 더 당기기 위해서이다. 로마 어머니의 두 번째 초대가 이번 학년말 방학 때로 예정되어 있어 실상은 어저께부터 조금쯤은 마음이 좀 조급한 편이다. 로마네 집의 초대는 이미 중백모에게까지 이미 통고된 상태였다. 그러면서도 설레던 마음, 장래를 향한 꿈을 다지던 그 마음을 잠시 접고는 아이들을 붙잡고 있었었다. 그러나 실상은 동규의 마음도 역시 이미 로마가 있을 역촌마음에 가 있었다. 그는 지금 로마를 그리워하는 마음으로 복도를 걷고 있다.
민동규 선생은 1층으로 내려가는 계단을 밟고 아래층으로 향한다. 하지만, 길게 이어진 복도도 평소 같지 않다. 그냥 조용하기만 했다. 아이들은 씨도 없었다. 그는 뚜벅뚜벅 걸어 교무실로 들어간다. 교무실 안도 복도처럼 썰렁했다. 선후배 교사들 역시 이미 퇴근을 했는지 보이질 않는다. 고향으로 가는 버스나 열차 시간에 맞추느라 서둘러 나갔나 보다. 교감만이 자기 자리에서 서류를 정리하고 있었다. 민동규 선생은 들고 있던 출석부와 학급경영부를 자기 책상 앞에 놓여 있는 책꽂이에 꽂으며 교감 쪽으로 시선을 돌린다.
“교감 선생님, 다녀오겠습니다.”
동규의 그 인사말에 교감한테서 즉시 반응이 온다, 서류 정리에 눈독을 들이고 있는 줄만 알았는데 그는 이내 고개를 돌리며 인사를 받는다.
“그래요. 민 선생, 할머님이 세상을 떠나셔서 고향에 가도 전 같지 않겠네. 많이 외롭겠어요. 잘 다녀와요.”
대학 선배라서 사적인 모임이 자주 있는 까닭에 동규의 집안 형편, 아니 성장과정까지도 얼핏 알고 있는 교감인지라 조모에 대한 인사를 잊지 않는다. 동규는 인사를 받으며 다시 한 번 책상 위 책꽂이를 버릇처럼 가지런히 한 다음에 교무실 뒤쪽으로 걸어가 문을 살그머니 열고는 현관을 통과해 운동장으로 빠져나온다.
운동장 남쪽인 교문 쪽으로 꽤 많은 남녀 학생들이 무리지어 빠져나가고 있었다. 그뿐이다. 그 큰 운동장 가운데는 텅 비어 있었다. 보통 때는 붐비던 운동장이었다. 그동안은 방학이라 그랬었지만, 평소에 운동장은 추운 겨울에도 늘 공을 차는 아이들이 많았었다. 삼삼오오 모여서 줄넘기도 하고 또 다른 아이들은 분주히 왔다갔다 하며 자기들끼리 놀았다. 남쪽 건물 화단 앞과 플러터너스 나무 밑 벤치 위에 앉아서 따뜻한 햇살을 즐기던 아이들도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텅 비어 있다. 앞으로도 며칠간은 아이들이 보이지 않을 것이다. 긴 겨울방학을 보낸 후에 개학하고 나서 잠깐 붐비던 운동장이었는데 다시 이렇게 학년 말 방학을 맞으며 주인을 보낸 운동장은, 텅 빌 수밖에 없다. 민동규 선생은 앙상한 플러터너스 빈 가지를 바라보며 로마와 그리고 그 어머니를 생각하며 화단 앞 운동장 하교 통로를 걷는다. 어니다. 중백모도 함께 생각하면서 천천히 교문 쪽으로 향한다.
옛날에 자신이 다니던 중학교는 이렇게 큰 운동이 아니었다. 플러터나스 나무 대신에 은행나무가 유난히도 많이 서 있던 작은 운동장이었다. 친구들은 가을이면 은행잎을 주워서 모았다. 그 은행잎들을 좋아했던 당시 김학승 교장 선생님은 가을이 와 은행잎이 떨어져도 아예 청소를 못하게 하고 낙엽을 즐기게 했다, 아이들을 정서적으로 순회시키는 교육장으로 활용하는 바람에 초겨울까지도 운동장 가에는 은행나무 잎이 질펀했었다. 동규와 로마도 그 은행나무 밑에서 은행나무 잎을 주우면서 도란도란 많은 이야기를 주고받았었다. 아름답고 순수한 사랑을 나누며 사춘기를 보냈다. 사촌 누이가 다리를 놓아주는 역할을 해주었지만 둘 사이의 우정은 학년이 올라갈수록 점점 쌓여만 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서로를 좋아하는 마음으로 채색되고 있었다. 바로 그 중 3때가 바로 두 사람의 사랑의 시작된 기점이었다.
동규가 교문 밖으로 쏟아져 나가는 아이들을 바라보며 천천히 걷다보니 어느새 교문 밖으로 빠져나온다. 벌써 교문 밖 골목길로 쏟아지는 햇살은 봄기운이 느껴진다. 구정이 지났으나 철 이른 봄바람 찾아올 때이기는 했다. 담 밑에 노오란 민들레가 철 이르게 두어 포기 피어 있었다. 또 보라색 제비꽃도 몇 그루 살며시 고개를 쳐들고 있었다.
그동안 동규가 49재를 지내고 복귀해 성적 사정, 통지표 발부, 생활기록부 기록 등 학년 말 정리를 하는 동안에 겨울이 서서히 지나가고는 있었다. 그 사이 딱 하루 구정 날 동규가 고향에 들려 차례를 지내고 로마와 데이를 즐겼을 뿐이다. 조모가 하늘나라로 가신 첫 구정이었는데도 평촌에 단 하루만 머물렀었다. 그 만큼 로마와 함께해야 했고, 그 로마에게도 드러내지 않은채 백부 민명기와 남로당 당수였던 박헌영에 대한 탐색으로 바빠서 계절의 변화를 예민하게 눈치 채지 못했다. 이 겨울은 몇 번의 추위가 찾아든 적은 있었지만, 조모 황애순이 사랑하는 손자 동규와 그리고 나머지 자손들을 두고 떠난 이 겨울은, 유난히도 포근했었다. 지금 날씨로만 보아서는 여느 해보다 새봄이 빨리 찾아들 것만 같은 분위기이다.
그랬다. 뜻하지 않게 로마의 큰 형부 이성중 교감을 만나는 바람에 백부 민명기를 쫓고, 박헌영까지를 탐구했던 겨울이었다. 출생지 신양과 그리고 광시를 찾은 현장 답사는 물론 미흡한 부분은 문헌을 통해 그의 삶을 추적하면서 참으로 바쁘게 경황없이 지낸 겨울방학이었다. 그런 중에도 로마와의 사랑을 다시 확인한 이 겨울이었다, 많은 세월을 한꺼번에 겪는 듯 했던 날들의 연속이었다. 게다가 소설가의 꿈을 이루지 못한 상태에서 자신의 삶을 해체하고 고백하면서 토해낸다면 뭔가 이야기가 될 것 같은 가능성까지를 붙잡을 수 있었다. 그런 뜻에서 로마 형부 이성중 교감이 봉수산 동굴을 통해 박헌영을 만나게 해준 건 참으로 고마운 일이이었다. 자신은 논문 작성이라는 학문적 접근을 하겠다면서 말이다.
동규는 하숙집으로 천천히 접어들면서 이번에는 문득 며칠 전에 콩새 아저씨가 들려주었던 이야기를 문득 떠올린다, 자연스럽게 그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49재를 지냈던 날에 나누었던 대화였다. 그 이야기들을 재구성해 자신을 옥죄고 있던 좌우 이념과 함께 조모인 할머니 둥지를 벗어나는 이야기를 소설로 만들어야 하겠다고, 그럴 수도 있겠다고 다시 다짐해본다. 물론 이제부터는 조모의 그늘에서 벗어나야 되겠지만 말이다. 점점 콩새 아저씨의 목소리가 또렷해진다.
“그려. 이제 할머니께서도 하늘나라로 가시고 더구나 앞으로는 우리가 사는 이승사람들이 가신 분과 서로 인연의 사슬을 끊어도 좋다는 49재를 올린, 이 마당에 너무 마음을 쓰지 않았으면 혀. 그건 지나친…….”
“집착이라고요? 그 집착을 버리라고요?“
”집착? 그런 유식한 말은 내가 알아들을 수 없구먼. 그러나 이제부터는 조모님 쪽으로 너무 치우치지 않는 게 좋겠구먼. 앞으로는 맘 다잡고 사랑하는 로마에게, 마음을 주고 또 민 선생의 제자들을 기르는 데 힘을 쓰는 게 좋겠구먼,“
역시 콩새 아저씨는 어린 시절부터 동구의 맨토였다. 이제부터는 정말 조모를 떠나 로마에게 가야 한다. 그렇다. 이미 동규는 이 학년말 방학에 로마 어머니에게 두 번째 초대를 받은 상태이고, 이를 받아들여 로마와 결혼하려는 마음이 정해진 상태이다, 내일 이맘때는 그녀의 집에 가 있을 것이다, 로마의 형제자매들과 어울릴 것이다. 이번 초대는 지난번 첫 번 초대에 비해 의미기 다르다. 결혼 약속이다. 동규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지만, 로마의 말에 들어 있는 의미는 더 컸다. 로마 말에 의하면 자기 집의 대를 이을 후계자인 막내둥이 동생 기광이는 물론, 딸들 일곱이 다 모인다는 것이다. 자기 어머니의 생일인 데다가 그날을 택해 동규를 함께 초대한다는 것에 로마는 아주 큰 의미를 부여하고 있었다. 그녀는 가족의 일원으로 받아들이는 계기를 마련하는 절차라고 단정 짓고 있었다. 맞다. 동규보다도 더 들떠 있었다.
그건 동규네 집에서도 이미 받아들이는 절차였다. 조모가 세상을 떠났지만, 이미 생전에 몇 차례 로마를 손자며느리 감으로 선보았고, 그보다 중백모에게도 당연하다는 허락과 함께 로마를 받아들이겠다는 언질을 여러 번 받은 터였다. 게다가 대전 숙모와는 사제 관계라는 인연이라서 더욱 돈독한 셈이다. 그러니 동규네 집안에서도 로마는 민 씨 네 며느릿감으로 이미 점찍어 놓은 셈이었다.
그 모든 것보다 우선 되는 것은 동규의 마음이었다. 일생을 함께할 아내의 반열에 올려놓은 지는 벌써 오래였다. 동규에게 로마는 유일한 여자였다. 그랬다. 로마는 선택이 아니라 운명이라고 생각하는 동구였다. 좌파의 늪에서 헤매면서도 로마를 놓지는 않았다. 로마도 동규가 유일했다. 벌써 마음은 물론 서로 몸을 나누어 한 몸이 되는 통과 의례도 마친 사이이니 문제가 될 것은 하나도 없었다. 이번에 그쪽 가족들을 만나기만 하면 로마와 결혼하는 절차가 다 완성이 된다. 그 걸 동규도 로마도 인정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아무리 로마가 보고 싶다고 오늘부터 갈 수는 없다. 로마와 그 가족들을 만나는 건 내일이니까. 2월 25일. 내일이다. 그러니 동규는 잠시 하숙집에 들러 점심을 먹고 버스에 몸을 의지한 채 우선은 고향 평촌으로 향해야 한다. 실은 로마보다 중백모를 만나야 하는 것이 우선이다. 중백모로부터의 독립이라는 수순을 밟기 위해서라도 밤을 새우며 중백모와 유소년 시절의 이야기를 시작해 로마와의 사랑도 함께 고해야 할 것 같았다. 중백모는 동규에게는 부모와 같은 분이니까.
맞다. 모친과 이별한 초등학교 3학년 이후부터 자신의 삶을 보살펴 준, 분이기 때문에 이제 그 중백모의 품을 벗어나 평생을 함께 할 한 여자를 선택해야 하는 시점에서 먼저 찾아뵙고 마지막 당부의 말씀을 듣는 건 너무나 당연했다. 더구나 조모가 세상을 떠난 후에는 중백모의 비중은 더 크다. 유년 시절이후 조모가 자기의 둥지로 그를 감싼 것은 사실이지만 스물일곱의 나이가 되도록 슬하에 두고 돌봐주고 양육시키다 이제는 떠나보내야 할 때가 되어 짝을 찾아간다는 조카를 보내는 중백모의 마음을 헤아리며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동규 역시도 지금 그 곁을 떠난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멍해진다. 하지만 로마와 결혼을 위해서는 중백부모에게서 떨어져 나와 혼자 서야 하는 거다.
그러나 막상 동구가 고향집에 도착했을 때 중백모는 다른 때와 달리 별말씀이 없었다. 뜻밖이었다. 이야기하기를 좋아하는 중백모였지만, 그러나 말씀이 없었다. 중백모의 그 침묵의 시작은 동규가 평촌에 도착한 때부터였다. 저녁을 먹을 때도 중백모는 말이 없었다. 안방에서 식사를 마치고 사랑방으로 건너왔을 때까지 그랬다. 그때도 마찬가지였다. 다만 후식으로 홍시 세 개를 담는 간식 덥시를 디밀면서 한마디를 했을 뿐이었다.
”지난 겨울방학 때는 로마와 데이트하느라 바뻤지? 고향에도 못 오고……. 그래. 드디어 내일은 로마네 집으로 초대되어 가는구먼.“
“하지만 아직 결혼식이라는 절차가 남아 있습니다.”
“그건 나도 알지. 하지만…….”
중백모는 말을 동규의 말을 꺾는다. 다른 때 같으면 밤이 이슥할 때까지 대화가 이어져야 했다. 그러나 지금은 달랐다. 그 말씀이 다였다. 광천에서부터 부지런히 버스를 타고 집에 도착해 왔을 저녁 무렵부터 중백모는 그렇게 로마만을 의식하고 있었다. 아니다. 얼마 전 로마네 집에서 정식으로 초대를 받았다고 말씀을 드렸을 때부터였다. 평소에 남자처럼 선이 굵고 대범한 중백모라고 생각했었는데 정말 의외였다. 대화할 때는 늘 화제를 이끌어가면서 한마디를 더 보태어 이야기의 주제를 확산시켜가는 화법을 구사했던 중백모였다. 그런데 지금은 숙연한 태도를 보인다. 자신의 곁을 떠나는 조카를 보내는 중백모는, 다른 때와 전혀 달랐다. 평소에도 속마음을 가볍게 드러내지 않은 채 복선을 깔을 줄도 아는 중백모였다. 그만큼 선이 굵은 줄 알았는데 이렇게 섬세한 감정으로 이별을 감안하면서 떠나보낼 수밖에 없는 감성을 여리게 노출하는 면도 있다는 걸 인식할 수밖에 없었다.
“예. 죄송합니다. 둘째 큰어머니, 제가 좀 바빴습니다. 이 겨울을 로마와 보낸 것은 아닙니다. 이 일 저 일로요.”
동규는 한참만에야 대답을 했다. 그러나 민명기 백부와 박헌영을 찾느라 바빴다는 말을 하지는 않았다,
“그랬어? 바빴어? 어떻든 민 선생, 내일 로마네 초대도 있고 하니 오늘은 일찍 쉬게나.”
그런데도 중백모의 말씀은 그게 다였다. 말을 끝내고 있다. 중백모는 ‘너’라고 호칭하지도 않고 민 선생이라 하면서 대화를 마감하려 했다. 그런 중백모에게 동규는 말을 이어 갈 수 없었다. 그동안의 많은 말씀에 비해 중백모는 다음 날 로마네 집에 가서 있을 만남을 의식하면서 동규에게 이불장 속에서 이불을 꺼내어 잠자리를 펴주었다.
그때 마침 중백부가 퇴근을 해 들어왔다. 그러자 중백모는 얼른 동규가 머무는 사랑방에서 나가 대청마루로 나간다. 동규도 급히 따라 일어서며 방을 나와 중백부를 맞았다. 그리고는 공손히 인사를 드렸다.
“둘째 큰아버님, 이제 퇴근을 하셔요? 저 왔습니다.”
“어, 그래? 동규 왔구나. 잘 있었지?”
중백부인 민상기 면장은 반색하며 동규를 맞는다. 동규도 활짝 웃는 얼굴로 중백부가 들고 있는 서류가방을 받아들며 다시 응대했다.
“예. 잘 지냈습니다.”
“그래? 무사했구먼.”
중백부는 퇴근을 하며 약주를 한잔 걸쳤는지 거나하게 취해 있었다. 그런 중백부가 방으로 들어가려다 말고 뒤돌아서며 한마디를 던진다.
“아, 참 내일은 정산, 이 규수 댁에 인사를 드리러 간다며? 우리 동규 이제 어른이 되는구먼. 할머니 생전에 이 혼인을 성사시켰어야 했었는데……. 그게 좀 아쉽구나.”
중백부는 내일 일을 이미 알고 있었다. 중백부의 그 말에 중백모가 둘 사이로 끼어든다.
“그만 말씀하시고요. 방으로 들어가세요. 참, 그런데 저녁은 드셨어요?”
“저녁? 먹었네. 회식이 있었어.”
“그래요? 그럼 민동규 선생 좀 쉬게 어서 방으로 들어가지요.”
중백모는 남편인 중백부인 민상기 면장 등을 밀어 방으로 들여보내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도 중백부를 따라 얼른 방으로 들어갔다.
중백부모 내외가 안방으로 들어가는 걸 바라보며 동규는 대청마루에 서서 잠시 처마 끝 사이로 겨울밤 하늘을 바라본다. 하늘에는 구름 한 점 없이 별빛이 초롱초롱하다. 그는 조금 더 앞으로 두어 걸음 나가 처마 끝에 걸려 있는 하늘을 바라본다. 문득 한기가 느껴진다. 동규는 사랑방으로 얼른 들어온다. 그때부터 방안은 혼자이다. 방이 갑자기 커 보인다. 동규는 텅 비어 있는 방에 앉으며 잠시 대청마루에서 바라보던 별을 떠올리면서 생각에 잠긴다. 유소년 시절 대청마루에서 바라보던 하늘에는 수없이 많은, 별들이 살고 있었다. 봄, 여름, 가을 없이 그 별들을 따고 싶어 마당에까지 내려와서 하늘을 바라보다가는 다시 대문 옆에 서 있는 감나무 밑까지 달려가서 창대를 휘둘렀다.
그 날들이 회상된다. 그 유년의 밤은 별빛이 있어 그나마 어둡지 않았다. 그에 비해 지금 이 방안은 너무 깜깜하다. 천정이 보이지 않을 만큼 어둠에 싸여있다. 유년 시절에 그랬던 것처럼 겨울밤 속으로 나가고 싶어진다. 하지만 밖에 나가보아야 그곳에 유소년 시절이 있을 리가 없다. 돌이킬 수 없다. 조모마저도 없다. 외롭다. 동규는 얼른 중백모가 펴준 이불 속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다. 이불을 끌어다 덮지만 그러나 그 이불 속에서 들어가 잠을 청해 보아도 점점 더 머리가 초롱초롱해진다. 잠이 오지 않을 것 같다.
그랬다. 다시 생각해도 옛날 같았으면 동규는 밖에서 있었던 시시콜콜한 일들을 다 중백모에게 소상히 말씀을 드렸었다. 그랬었는데 오늘밤 그는 중백모의 분위기에 눌려 입을 다물고 말을 줄인 셈이었다. 실은 방학 동안에 있었던 민명기 백부와 박헌영에 관 탐색을 이야기하고도 싶었는데, 참은 동규였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중백모는 역시 달라졌다. 좌우 이념에 대한, 이야기나 친정아버지에 김사국 애국지사에 대한, 영웅담도 줄이면서 그 사상의 늪에서 벗어나려고 하는 걸 언제부터인가부터 조금쯤 인식하고 있었던 동규였다. 그게 육영수 여사를 의식하면서부터가 아닌가 한다. 배화여고 동창회 출입을 하기 시작하며 중백부의 사회 진출까지도 염려하고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는 알고 있었다. 그건 분명 유추만은 아니었다.
동규는 어려서 잘 몰랐지만 한국 전쟁 중 북측이 남쪽을 장악했던 적 치하 몇 개월 그 시절에도 사실은 시아주버니인 백부 민명기의 행방불명에 대해 전혀 노코맨트 했던 이가 중백모였다 한다, 백모가 좌익 활동을 하는 남편을 저지하지 못해 가정이 해체된 데 비해 중백모는 부역하는 걸 금기시하며 자기 남편을 지켜냈다는 걸 안다. 동규는 그 이야기를 콩새 아저씨를 통해 들었다. 하물며 반공을 앞세우는 박정권의 서릿발 같은 치하에서 남편인 민상기 면장의 안위를 생각하며 친정 부모가 추구했던 좌로 치우치지 않으려고 한다는 것은, 동규가 생각해도 그건 상식이었다. 그런 걸 바라보면서 증백모도 나이가 들면서 사상의 늪에서 빠져나와 초연하려고 하는 것이 아닐까 하고 예측하기도 했던 동규였는데 그게 아주 드러나게 현실화 되고 있었다. 그보다 중백모는 정부로부터 자기 부모를 독립유공자로 인정을 받게 하기 위해 국가보훈처를 드나들고 있었다. 벌써 한참 전부터였다. 오히려 그쪽에 강한 집착을 본이고 있었다. 참으로 대단했다.
그래서 사실은 이번에 동규도 방학 동안 민명기 백부나 박헌영을 추적한 이야기를 아예 하지 않기로 한지도 모른다. 굳이 그 이야기를 꺼내고 싶지 않았다. 조모까지 세상을 뜬 마당에 다시 집안의 내력을 꺼내고 싶지 않아서였다. 더구나 로마와 행복한 혼사를 앞둔 마당에 그 이야기를 꺼내고 싶지도 않았다. 자금 동규는 로마에게 많이 빠져 있었다. 이미 로마네 집에[서 좌익 집안인 자신을 선택해 준 마당이니 자신도 조금쯤은 몸을 사려야 한다고 생각한다.
대신에 동규는 그 전말을 소설 속에 형상화하려고 하는 것이다. 그 소설이 완성되면 소설가의 꿈이 완성되는 것이다.
이튿날 아침 동규가 로마네로 출발할 때도 중백모는 별로 말씀이 없었다. 기분이 가라앉아 있는 사람처럼 조용하기만 했다.
”둘째 큰어머님, 저 다녀오겠습니다.“
동규가 아침 식사 후에 인사를 올렸을 때도 중백모는 정색을 하며 동구의 인사를 받을 뿐이었다. 중백부는 이미 출근을 한 뒤였고, 집에 있는 어린 사촌둘도 보이지 않는다. 중백모와 동규 둘 뿐이었다. 그런데 다시 그 자리에서 동규는 의외의 말을 중백모에게 듣는다.
”그래. 잘 다녀오게. 민 선생, 우리 여흥 민 씨는 뼈대가 있는 양반이야. 이 가문에 인사를 드리러 가 혹시라도 우리 민 씨, 가문의 품격을 떨어뜨릴 행동을 해 흠을 잡히면 안 되네. 자네 큰아버지로 인해 좌익 집안으로 몰리기는 했지만. 우리 가문은 뼈대가 있는 가문이야. 우리나라는 아직까지 두 가문이 혼인을 맺을 때는 조상님들에게 물려받은 전통이나 품위, 그렇지. 혈통을 내세우게 되는데 특히 이런 혼인 시에는 작은 실수도 하면 안 되는 거네. 큰 흠이 되니까 말이야.“
”예!? 예, 알았습니다. 걱정하지 마셔요. 잘 다녀오겠습니다.“
동규는 중백모의 그 말씀에 일단 긍정을 하며 인사를 드리고 집을 나섰지만, 하지만 그 말은 정말 뜻밖이었다. 그런 부탁을 할 줄은 몰랐다. 로마와 오랜 동안 사귀어 훌허물ㅇ리 없었고 또 사람은 누구나 평등하다는 좌익 사상을 가진 양친 부모를 둔 신여성으로서 신교육을 받은 이의 입에서 나온 말로서는 예상할 수 없는 상황이요, 발언이었다. 가문을 앞세우는 듯한 구세대적인 발언이었다. 역사 이야기를 좋아하고 양반 가문에 대한 나름의 자부심을 가진 분이라고 생각하고는 있었지만, 그 연안 김씨 김사건 중백모의 입에서 민 씨, 가문에 대한 말씀을 실조할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역시 의외였디. 그러나 겉으로 티를 내지는 않고 조용히 집을 나섰다.
동규가 미륵댕이 장터에 나와 10시에 출발하는 버스를 타고 정산에 도착한 것은 불과 30분도 지나지 않아서였다. 6km. 중학교를 다닐 때는 아침, 저녁으로 걸어 다녔던 통학 길이었다. 그는 정산에 도착해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역촌 로마네 마을을 향해 곧바로 걸었다. 정산 현감이 고을을 다스리던 조선말까지 멀리, 가까이서 정산 현을 찾아오는 손님들이 유하던 숙소가 있던 이곳이 바로 로마네 마을인 역촌이었다. 그들이 타고 온 말도 관리하면서 먹이를 먹이던 곳이라 부쳐진 마을 이름이 바로 역촌이었다.
동규는 드디어 로마네 가족의 일원이 된다는 의미로 그녀를 만난다 생각을 하며 조금쯤 설레는 마음으로 마을길로 접어든다. 중학교 때는 자주 걷던 길이었다. 걸으면서 제일 먼저 눈에 띈 조형물이 있다. 바로 논 가운데에 서 있는 9층 석탑이었다 보물 제18호로 지정된 저 9층 석탑은 동규와 로마에게 사춘기 시절에 많은 추억이 서린 곳이었다. 지금은 논 벌판 한가운데 외롭게 서 있지만, 불교가 융성하던 고려 시대 말엽까지는 웅장한 절이 있던 터로 알려지고 있는 그곳은 그 톨탑이 서 있어 유명했다. 그 9층 석탑은 이곳 정산을 찾는 이들에게 이정표가 되어주는 나침반 역할을 하고 있었다. 높이 6m로 웅장한 조형물이다. 화강암으로 이루어진 돌탑인데 보통 고려 시대의 석탑이 5층인 데 비해 이 탑은 9층이라서 학계에서 많은 주목을 받아 온 유적이었다.
그는 그 돌탑을 멀리 바라보며 걸으면서 옛 추억에 잠긴다. 지금은 겨울철이라서 허허벌판이지만 봄부터 시작해 여름 내내 녹색 벼 잎이 융단처럼 깔린 논에 우뚝 선 돌탑은 나름 절묘했다. 더구나 누렇게 익은 가을 볏논에 선 돌탑은 지나가는 이들의 눈길을 끌기에 충분했다. 많은 이들이 그 곳을 지나며 옛 문화에 대한 자긍심을 키웠지만 동규와 로마는 은밀한 곳이었다. 중학교 시절 가을에 우북하게 자란 볏논 속의 논둑길을 거닐다가는 바로 저 돌탑 마당에 몸을 숨긴 채로 풋풋하면서도 사랑이 배여 있는 대화를 하곤 했다. 한 두 번이 아니었다. 돌탑을 돌면서 두 사람의 사랑이 영원하기를 빌기도 했었다.
9층 석탑은 그렇게 중3 시절 로마와의 추억이 찐득하게 묻혀 있는 곳이었다. 어저께 중3이 되는 제자들에게도 그는 자신의 중3 시절을 떠올리며 모처럼 진지한 훈화를 했었다. 사춘기를 보내며 마음을 앓고 있을 제자들을 향해 그는 문득 자신의 중3 시절을 떠올렸었다. 동규는 지금 다시 자기 제자들을 떠올리면서 그 아름다운 추억에 젖은 채 묵묵히 길을 걷는다. 역촌을 향해서…….
동규는 그렇게 한참을 걷다가 다시 잠시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본다. 어젯밤 그렇게도 별들이 초롱초롱했는데 이 낮에도 여전히 겨울 하늘은 구름 한 점 없다. 동규는 서둘러 그 9층 고려시대의 보물 돌탑을 지나 역촌 마을로 접어든다. 마을이 가까워질수록 마음이 급해진다. 로마도 보고 싶었고 대흥에서 이미 와 있을 로마 큰 언니 부부의 모습도 떠올랐다. 어느 새 마을 뒷쪽으로 녹색 소나무 숲이 우거진 역촌마을이 동규 앞으로 바짝 다가든다.
“어서 오게. 반갑네. 반가워. 기다렸네.”
동규가 로마네 집에 도착해 방안으로 들어가 우선 로마 어머니께 넙죽 큰절을 올렸을 때, 로마 어머니는 그의 손을 꼬옥 잡으면서 반갑게 맞아주었다. 얼굴이 이글어질 만큼 환한 미소를 지으며 동규의 손을 더욱 꼬옥 잡는다. 얼마 전, 제1차로 방문했을 때와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자른 자손들에 둘러싸인 채 막네 사윗감을 받아들이는 모습이 자애로웠다. 지난해 12월 5일, 조모를 떠내 보내드린 후에 처음 느껴지는 포근함이었다.
그러면서도 동규는 방안에 가득히 앉아 있는 여형제들의 눈길이 쏟아짐을 의식할 수밖에 없었다. 동서 감들도 방안을 꽉 채우고 있었다. 그는 정신이 번쩍 든다. 우선은 로마네 큰언니와 형부인 이성중 교감이 있어 반가웠지만 부부, 부부끼리 모여 있는 그 여섯 자매들 열두 명 속에 갑자기 갇혀 있는 느낌이 든다. 그들은 아무 말도 없이 눈으로만 한참을 응시하며 새사람을 맞이한다. 물론 처음 대하는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말로만 듣던 제부 감에 대해 쏟아 붇는 그들의 눈길이 부담스럽다. 바로 옆에 로마가 붙어 앉아 있어 다행스럽다 싶었지만 녀전히 서먹하다. 다시 청신을 차리고 둘러보니 대전에서 로마와 막내 남동생 기광이를 뒷바라지해 주던 여섯째 언니 기림 씨가 눈에 들어온다, 바로 그 옆에 남편인 듯한 남자가 붙어 있었지만 반가워 우선 눈길을 그녀에게 돌리려고 하는 순간이었다. 바로 그때였다. 우렁찬 목소리가 갑자기 방안 가득히 서려 있던 적막함을 깬다.
“아, 민 선생 환영하네. 환영해.”
역시 로마의 큰 형부 이성중 교감이었다. 그들 부부는 이미 익숙해 있어 이성중 교감의 그 말만으로도 마음이 편해진다.
“그래요. 민 선생, 마음 펀하게 해요. 처음 상견례라서 좀 어색하지요? 이제부터 우리는 같은 형제가 되는 인연으로 만나게 됩니다.”
바로 옆에 앉아 있던 로마의 큰언니도 함께 입을 열면서 동규를 반겨 주었다. 그와 동시에 여섯째 언니도 바짝 다가오며 환히 웃는다, 동규는 반가웠다. 대전에서의 자신과 로마의 데이트 역사를 세세히 알고 있는 그녀였다, 그녀는 처음부터 자기에게 긍정적이었다. 그 너므 날인가 데이트를 하느라 통금 시간을 넘겼을 때도 받아주었다. 두 사람이 그들이 세 얻어 살던 대전선화동감리교회 옆에 있던 셋집에 들어갔을 때도 나무라지 않고 받아준 그녀였다 막내 동생 기광이 옆에서 새우잠을 자고는 아침도 먹지 못하고 줄행랑을 쳤던 날의 추억이 선하게 떠오른다. 그날을 생각하니 갑자기 얼굴이 붉어지며 마음이 달아오른다. 그녀도 그날을 생각하는 것만 같아서 조금은 면구스러워진다. 그런 그에게 여섯째 기림 씨가 말을 건넨다.,
“반가워요. 민 선생, 옛날도 출중했었는데 세월이 지나니 그때보다 아주 확실한 미남이네. 의젓하기도 하고. 국어선생님이 되었다며?”
“예. 누님, 저도 반갑습니다. 오랜만에 뵈니 저도 기쁩니다. 그동안 안녕하셨지요?”
동규는 그제야 비로소 입을 연다. 여섯째 언니 기림 씨를 바라보니 서먹했던 마음이 풀어지는 듯했다.
“누님? 누님이 뭐여? 처형이지. 그래요. 우리 딸 부잣집 막네 사위가 된 걸 환영합니다.”
여섯째 언니인 기림이 너스레를 떨며 반겨주었다. 그 바람에 방안에서의 조금은 긴장되었던 분위기가 이완되고 있었다. 웃음꽃이 핀다. 곧 이어서 경직된 채 관망하던 미래의 동서들이 한꺼번에 동규에게 다가와 손을 내민다.
“반갑네. 우린 자네를 열렬히 환영하네.”
“예. 저도 형님들을 보고 싶었습니다. 앞으로 잘 돌보아 주십시오.”
동규는 정중하게 예를 갖추어 인사를 올렸다. 그 순식간부터 방안이 붐비기 시작한다. 그렇게 한동안 시끌법석한 인사가 끝날 무렵에 조용히 어필하며 나타난 온 이가 이 이 씨 문중의 막내이자 장남인 기광이었다. 동규는 기광이를 바리보자 이번에는 금방 기분이 업 된다. 그동안도 로마를 통해 종종 소식을 듣기는 했지만 생각보다 훨씬 준수했다. 기광이야말로 여섯째 언니인 기림 씨가 동규에게 미님이라 칭찬했지만 이 집의 장남 기광이야말로 확실한 종재였다. 돌림자 이름 말고 로마라는 이름을 짓고 나서 남동생을 보았다고 덩달아 자신도 남종생 만큼 귀여움을 받았었다는 로마였었다.
그 기광이가 동규에게 다가와 먼저 인사를 건넨다.
“형, 오랜만입니다.”
그의 모습을 바라보자 동규는 다시 청소년 시절로 돌아가는 기분이다. 그의 몸에서 풍겨나오는 풋풋한 모습에서 문득 향긋한 비누 향이 풍기는 듯 했다.
“그래. 우리가 이게 얼마 만에 만나는 건가? 반갑네. 많이 보고 싶었어.”
동규는 막내 기광이의 손을 꼭 잡아주었다. 실제로도 대전에 학생 시절에 몇 번 만난 게 다였다. 그 동안 그는 대학교를 졸업하고 ROTC 장교로 임관을 했다는 소식을 들었지만 이렇게 잘 생긴 모습일 줄은 몰랐다. 자기 어마니 생일에 맞추어 귀가한 것이 확실했다. 너무나 반가웠다.
방 뒤편에 앉아 있다가 이집 장남이 어필하자 모든 이들이 짐짓 조용히 물러나 둘에게 눈길을 쏟는다. 그만큼 기광이는 장한 아들로써 이 이 씨네 집에서의 존재는 귀했고, 관심의 대상이라는 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아린 시절부터 그는 부모와 향제들에게 꼭 쥐면 터질라 불면 날아갈라 하는 대우를 받으며 집안 모든 이들에게 보호를 받으며 성장했음을 알 수 있었다,
새신랑 감 동규와 독신 아들 기광이가 둘러앉은 이들에게 그렇게 관심의 대상이 되어 어필하고 있는 바로 그때였다. 지금까지 가만히 앉아 건네다 보며 침묵을 지키던 로마의 어머니가 아들 기광이가 나타나자 눈빛이 갑자기 빛난다. 딸 일곱을 낳고나서 귀하게 얻은 아들에 대한 기대가 아직도 살아 있는 모습이었다.
로마 어머니가 앞으로 나선다. 연로한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아들 사랑이 뚝뚝 떨어지는 표정이 역력했다. 동규는 그걸 바로 인식할 수 있었다.
“우리 집 대를 이어갈 장남일세. 서로들 이미 아는 사이인가?”
로마 어머니의 그 말씀에 얼른 동규가 기광이보다 먼저 앞서서 말을 받는다.
“예. 알고말고요. 옛날 학교를 다닐 때 서로 얼굴을 익혔습니다.”
“그려? 그렇구먼. 이한님을 시조로 하는 우리 전주이씨의 24대손인 효령대군을 중시조로 해서 다시 17대손인 우리 집의 장손 이기광일세. 이기광은 원시조로부터 시작하면 41대손인 셈이지.”
로마 어머니는 다시 한 번 기광이가 이 집안의 장손임을 강조했다.
“예. 잘 알고 있습니다. 로마에게 들어서 알고도 있었는데 어머님의 말씀을 들으며 이제 확실히 알았습니다, 전주이씨 왕손의 피를 이어받은 효령대군 가문에서 국가의 간성이 될 훌륭한 장교가 된 기광 군의 모습이 참으로 대견하고 자랑스럽습니다.”
동규는 진심으로 기광이를 칭찬해주고 싶어 또박또박 말을 이어갔다. 로마 어머니는 사윗감인 동규가 자기 집안과 함께 아들을 칭찬해주자 아주 흡족한 얼굴이 되어 아주 만족해하고 있었다.
“그렇지. 자네 집안도 훌륭하고 그보다 자네는 그저 우리 집안에 고마운 사람이지. 우리 로마를 데려가 주니 말여. 원래 두 집안의 혼사는 서로 깊은 인연이 맞닿아야 되는 건데 이게 다 하늘의 뜻이네.” “아닙니다. 평소에 제가 더 로마를 더 좋아합니다만, 저는 여흥 민 씨 시조 할아버님의 제 32대 자손입니다만……. 저의 집안도…….”
“그려? 자네네 여흥 민 씨네 집안도 훌륭한 걸 내가 잘 알지. 그런데 말여. 자네 로마의 본 이름이 원지는 아는가? 그게 그 전부터 궁금했네.”
동규는 로마 어머니가 생각지도 않은 가문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가는 갑자기 로마 이름에 대한 말씀까지를 꺼낸다. 그런 말씀능 할 줄을 예상하지 못한 동규였다. 로마도 그 말을 듣고는 조금쯤 엉뚱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자기 어머니를 바라보았다. 로마뿐만이 아니다. 그 방에 모여 있는 이들 모두가 의외롭게 생각한다는 듯이 멍한 표정이다. 그러나 동규는 문득 아침에 집을 떠날 때 중백모가 당부하던 말씀을 떠올리며 대답을 한다.
“예? 예. 알지요. 중백모님께서도 오늘 아침에 두 가문이 맺게 되는 혼인에 대해 말씀 하셨어요. 그리고요. 로마 이름은 기옥이, 이기옥인 걸 제가 왜 모르겠어요.”
“그려? 잘 알고 있구먼. 민적 이름은 이기옥일세. 이름을 바꾸어 불러야 사내 동생을 본다고 헤서 우리 집의 대주이셨던 로마 아버지가 작명가를 찾아가 지은 이름이라내. 먼저 하늘나라로 가신 게 원망스럽지만 말이야. 그런데 자네 로마 부친의 성함은 아는가?”
다시 로마 어머니는 정색을 하면서 이번에도 또 정말 생각하지도 못한 이야기를 꺼낸다.
“예?! 예?”
동규는 당황했다. 그러면서도 로마 어머니가 하는 말씀에 이끌려가면서 점점 몰입되는 느낌을 받는다. 어려서부터 말씀이라면 변호사 소리를 듣던 중백모의 입담에 취했었는데 로마 어머니의 말솜씨 역시 그에 못지않았다. 예측할 수가 없었다. 로마 어머니는 잠시 기다리다가는 동규가 당황하며 대답을 하지 못하자 말을 다시 이어나간다.
“그려. 알 리가 없지. 내가 너무 갑작스러웠나? 준(俊) 자 의(儀) 자 준의(俊儀) 씨라네. 사위가 장인의 함자는 알아야지. 돌아가신 장인이지만……. 그래서 그때는 영감임이 살아계실 때지만 전에 자네 동서들도 그때마다 다 내가 이렇게 일러주었네.”
역시 로마 어머니였다. 사위 감을 대하는 태도나 그 대화 내용이 아주 빈틈이 없었고 대단했다.
“아. 예. 알았습니다. 어머님.”
동규는 공손한 표정으로 고개를 정중히 숙이며 대답을 했다. 로마가 서전에 이런 말씀을 라실 거라는 걸 귓뜸해 준 적이 없었던 내용이었다. 그러나 뒤에 앉아 있는 장래의 동서 감들은 예비 사위를 맞이하고 있는 장모님께 대해 아주 허용적인 모습을 보이며 조용히 앉아 관망을 한다. 그러나 딸들은 달랐다. 모두들 우르르 나선다. 먼저 큰 언니가 립ㅈ을 엶녀 한마디를 한다.
“어머니는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전에도 하시던 면접시험을 되풀이 하시네. 민 선 생 시장할 텐데 점심을 먹게 하시지. 그 가문에 대한 말씀은 그만 두셔요.”
그러자 이번에는 부여에서 산다는 셋째 딸인 기순 씨가 한마다를 보탠다.
“그러게요. 사위 감을 앉혀 놀고 면접시험을 보시는 버릇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여전하시네.”
그 말에 이어 이번에는 옆에서 여섯 째 딸인 기림 씨도 앞으로 나서며 아예 어머니 말씀을 가로막는다, 그러나 연로하신 로마 어머니는 딸들의 말에도 끄떡하지 않고 말을 이어나간다.
“아니다. 아녀. 우리 전주 이 씨와 여흥 민 씨가 귀한 인연을 맺는 지금 저 민 서방을 우리 사람으로 맞이하는 마당에 나눌 이야기는 해야 하지.”
로마 어머니는 딸들의 말림에도 끄덕하지 않고 있었다.
“생신 상차림이 다 되었습니다, 다들 나오셔서 드시지요.”
바로 그때 밖에서 아주머니 한분이 방문을 열면서 삐죽이 고개를 내밀고는 큰 소리로 외친다. 그 분은 낯이 익었다. 전에도 여러 번 뵈었던 로마의 당숙모였다. 로마네 바로 옆에 살면서 로마 어머니와 친 동서처럼 지내는 사촌 동서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그러니까 로마 아버지와는 사촌인 셈이다. 그러나 사실은 로마의 당숙모롸는 그런 말을 듣기 전부터 동규와는 잘 아는 분이었다. 기중이 어머니였기 때문이다. 기중이는 함께 중학교를 다닌 친구였다. 그래서 매우 반가웠다. 동규는 얼른 방에서 나와 인사를 드렸다. 전에도 그랬었지만 로마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고부터 기중이 부모인 두 내외분이 함께 어울리면서 한 식구처럼 지내고 있다는 말이 문득 기억이 났다.
“당숙모님, 안녕하세요? 기중이는 잘 있지요?”
동규는 아예 기중이 어머니에게 당숙모라는 호칭을 붙이는 넉살을 부리며 인사를 한다. 그만큼 전부터도 무관한 사이였다.
“그래. 반갑네. 이제부토 동규가 우리 집안 사위가 되는 구먼. 환영하네. 그리고 기중이 안부가 궁금한감? 기중이는 서울에서 직장에 잘 다니고 있구먼. 어서 건너 방으로 들어가 식사하게 시장하겠네.”
로마 당숙모는 그 어느 때보다 동규를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동규도 더욱 반가웠다. 중학교 시절에 로마가 둥규네 평촌 마을에 와서 우선은 사촌 누이네 집에서 머물었듯이 동규도 그 무렵 고려 시대 9층 석탑을 지나서 역촌에 오면 기중이네부터 들렸었다, 그 바람에 그 무렵부터 아주 가까운 로마의 당숙모였고 기중이 어머니였다. 이제부터는 동규에게도 처당숙모가 될 분이다. 기중이와는 6촌 처남이 되는 것이고…….
동구가 기중이 어머니와 말을 나누고 있는 사이에 방안에 있던 이들이 모두 로마 어머니를 모시고 방에서 나와 점심상이 차려져 있는 건너 방으로 다들 들어갔다. 동규도 기중이 어머니와의 대화를 마치고 뒤따라 방으로 들어간다. 방안에는 진수성찬이 차려져 있었다.
동규가 자리를 잡고 앉자 이내 로마가 옆으로 와 앉는다.
“어서 먹어. 시장하지? 어머니 말씀이 너무 길었어.”
“아니야. 하시고 싶은 말씀을 하신 거지.”
“그래도 길었어.”
로마는 여전히 불만스런 표정을 짓는다.
“아니라니까. 어머님이 하시고 싶은 말씀을 하신 거야. 게다가 속으로는 돌아가신 아버님도 추억하고 싶으셨고…….”
“그래? 우리 민 선생이 그렇다면 그런 거지.”
로마는 그제야 조금 누그러지고 있었다.
“우리 얼른 점심식사를 마치고 9층 석탑 쪽으로 나가자.”
로마는 동규의 말에 어리둥절 한다.
“뭐? 9층 석탑? 그게 오늘과 같은 의미 있는 날의 데이트 장소야?”
로마는 다시 심드렁한 모습으로 말을 뱉는다.
“그러엄. 9층 석탑은 중학교 시절에 우리의 사랑이 시작된 곳이잖아. 그러니까 공주든 대전이든 어느 쪽으로 데이트 코스를 잡아도 좋지만 우선 9층 석탑에 들리는 거야. 거기서 다시 그 돌탑을 돌면서 영원한 사랑을 약속하는 거야.”
“검은 머리 파 뿌리가 될 때까지?”
로마는 동규의 말에 그제에 피씩 웃는다.
“그렇지. 그래.”
동규는 말은 마치고는 수저를 들고는 부지런히 점심을 먹기 시작한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