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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비, 어떻게 실천할 것인가* | ||||||||||||||||||
-이웃종교 성직자들에게 배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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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조선일보에서 종교 분야 취재를 맡고 있는 김한수입니다. 2003년 9월 처음 종교 분야 취재 지시를 받았을 때 막막했습니다. 저는 믿고 있는 종교가 없었습니다. 지금도 없습니다. 대부분의 사람이 그렇듯이 어릴 때는 종교와 관련해 몇 장면의 기억이 있습니다. 중학생 때 부모님 따라서 보라매공원, 당시엔 공군사관학교 내 법당에서 열리는 법회에 몇 번 참석한 적은 있습니다. 그때 《반야심경》을 몇 번 외려고 시도해본 적 있습니다. 여전히 다 외지는 못하는 상태인데, 요즘은 《반야심경》이 한글로 바뀌어서 이젠 암송은 포기했습니다. 천주교는 고등학생 때 선생님 한 분이 성당에서 결혼식을 올린 것을 계기로 처음 가봤습니다. 성당 결혼식은 대단하더군요. 다른 게 대단한 게 아니라 계속 앉으라 했다가, 일어서라 했다가, 무릎 꿇으라 했다가 해서요. 시간은 또 얼마나 오래 걸리는지 그만 중간에 나왔습니다. 교회는 초등학생 때 크리스마스 무렵 가보곤 했습니다. 노래도 배우고, 과자도 얻어먹고요. 아마 이런 정도는 누구나 비슷하게 겪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좋게 말해서 종교에 관해서 평균 수준이지만, 엄밀히 말하면 종교 담당으로는 낙제 수준의 사전지식이었던 셈입니다. 이렇다 보니 종교담당으로 발령이 났을 때 막막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혼자 생각했습니다. ‘모든 종교는 자비와 사랑을 가르치지 않나? 경전이나 교리는 잘 모르고 시간도 많이 걸릴 것 같으니 우선은 상식 수준에서 세상에 사랑과 자비를 전하는 현장을 취재해서 쓰자.’ 그렇게 마음을 먹으니 편해졌습니다. 왜냐하면 수십 년 혹은 평생을 종교에 귀의해 살아온 분들이 아니라 보통 사람, 보통 독자의 눈높이에 맞추면 되는 것이니까요. 제가 겪어보니 쓰는 사람 마음이 편해야 읽는 독자도 편하게 읽으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쓰는 사람이 생각이 정리돼 한 번에 쉬지 않고 쭉 쓰면, 읽는 분들도 한 호흡으로 읽으셨습니다. 그렇게 정한 기준이 ‘세상을 돕는 종교인’이었습니다. 나중에 오현 스님 말씀을 들으니 제가 그리 잘못된 방향으로 목표를 삼은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오현 스님은 종교에 대해 ‘세상 사람들 비위 맞추는 것’이라 하셨지요. 좋은 표현이 많지만 저는 오현 스님의 이 말씀을 들으면서 ‘역시 오현 스님’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종교에 관해 이렇게 쉬운 표현은 지금까지 만나지 못했습니다.
완전연소하는 삶 ‘완전연소하는 삶’이라는 표현 자체는 박청수 원불교 교무가 한 말입니다. 박 교무는 지금 만 82세입니다. 원불교는 지금도 교세가 10만 명이 채 될까 말까 합니다. 이 정도 규모의 종교에서 그것도 여성 성직자가 30년 넘게 세계 55개국의 어려운 이웃을 도왔습니다. 돈이 생기면 돈을 주고, 돈이 없으면 입던 옷을 모았습니다. 그래서 그분 입에서 ‘완전연소’가 나왔을 때 저는 좀 놀랐습니다. 가곡 중에 “탈 대로 다 타시오. 타다 말진 부디 마소―” 하는 가사의 〈사랑〉이란 곡이 있습니다. 가사 내용은 ‘타다 남은 동강은 쓰일 곳이 없다’는 것입니다. 저는 ‘완전연소’란 단어를 처음 들었을 때 가곡 〈사랑〉을 떠올렸고, 박청수 교무도 그 생각을 했다고 했습니다. 그분은 어려운 이웃을 보면 국내외를 막론하고 일단 도울 궁리부터 했습니다. 재원(財源) 걱정은 그다음이었습니다. 그분은 “노심초사하다가 ‘이번엔 어렵겠구나’ 싶은 순간에 기적적으로 해결이 되곤 했다”고 합니다. 저는 이렇게 이뤄진 일들이 기적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박 교무님의 간절한 마음이 이심전심으로 세상에 전해졌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생각합니다. 모금할 때 박 교무의 모토는 ‘뻔뻔하게, 그러나 밉지는 않게’라고 합니다. 저도 당했습니다(?). 어린이집과 병원 운영을 위해서입니다. 이분은 언젠가 만났을 때 저에게도 후원회원 가입 용지를 쓱 내미시더군요. 그 모습은 과연 ‘뻔뻔(?)했지만 밉지는 않’았습니다. 그렇게 저도 회원이 됐습니다. 박 교무님은 지금도 캄보디아에 월 600만 원 정도를 보내고 있습니다. ‘완전연소’라는 표현은 박 교무께 들었지만, 그 외에도 ‘완전연소’를 실천하는 분들을 취재 중에 여러 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영등포 요셉의원 선우경식 원장, 보문동 천주교서울대교구 노동사목위원회 지도신부였던 도요안 신부 그리고 여러분도 잘 아시는 이태석 신부님이 그런 분입니다. 선우경식 원장은 결혼하지 않고 평생 수도사처럼 살다 총각으로 돌아가신 분입니다. 1987년 서울 신림동 판자촌에 ‘무의촌 진료’하듯 요셉의원을 열었을 때 그분은 서울 시내 종합병원 내과과장이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하나둘 의사들이 빠지게 됐습니다. 행려병자, 노숙인, 판자촌 주민들을 상대로 치료비 한 푼 받지 않고 무료로 진료하는 봉사의 한계였습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원장’을 맡게 됐고, 후임이 올 때까지만 하겠다는 심정으로 한 일이 본인이 돌아가실 때까지 이어졌지요. 그분의 삶을 보면 살아 있는 성자였습니다. 번듯한 의대 나와서 잘 먹고 잘살 수 있었지만, 그분은 마지막까지 건설업 하던 부친이 지은 50년 가까이 된 집에서 살았습니다. 생활비는 미국에 사는 여자 형제들이 보내줬습니다. 생전에 여러 차례 만난 저에게도 사례비를 얼마나 받는지 절대 이야기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차비는 받고 다닌다’고 했습니다. 저는 선우 원장이 돌아가신 후 10년이 지나서야 그가 ‘차비는 받는다’고 한 ‘차비’의 액수를 알았습니다. 그것도 요셉의원에서 약국 봉사를 하신 약사 봉사자가 다른 책에서 지나가듯 쓴 구절을 보고 알았습니다. 그 액수는 월 70만 원이었다고 합니다. 요즘 사회적으로 많은 논쟁거리인 최저임금에 턱도 없는 금액입니다. 아무리 10년 전이라고 해도 70만 원은 결코 많은 금액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노숙인, 행려병자의 건강은 그렇게 걱정했지만 정작 자기 건강은 챙기지 못했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1년, 2년에 한 번씩 다 받는 건강검진을 건너뛰다가 위암이 발병한 것입니다. 발견했을 때에는 이미 때를 놓쳤지요. 수술을 받긴 했지만 다시 재발해 돌아가셨습니다. 처음 수술을 받았을 때 미아리 자택으로 찾아간 적이 있습니다. 그는 홀쭉한 얼굴로 애써 웃으면서 “이거 원 창피해서, 의사가 병에 걸리고 말이죠.”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자신 때문에 주변 사람들이 우울해하지 않도록 항상 유머를 잃지 않았습니다. 이태석 신부, 많이 들어보셨을 겁니다. ‘아프리카 남수단의 성자’로 불리는 분이지요. 저는 이태석 신부님이 건강하던 시절부터 만나서 마지막 암투병하던 때까지 몇 차례 만났습니다. 처음 만났을 때는 ‘무뚝뚝한 경상도 사나이’라는 단어가 떠올랐습니다. 질문에도 간단간단하게만 대답하고 말았습니다. 자랑을 좀 해도 될 만한데, 자기 이야기는 극도로 안 하면서 남수단의 어린이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런 가운데도 인상적인 이야기는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움막을 치고 진찰실로 삼았다고 합니다. 그는 그 움막에 환자가 들어오면 한 2~3분간 관찰했다고 합니다. 물론 말이 잘 안 통하는 이유도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렇게 지켜보면 환자가 이야기하지 않아도 어디가 아픈지를 저절로 짐작할 수 있었답니다. 우리 한국의 병원을 한번 생각해 보면 그 관찰 시간이 얼마나 소중한지 알 수 있습니다. 일단 의사가 환자 얼굴을 제대로 쳐다보지도 않고 차트에 고개를 박고 환자의 이야기는 건성으로 듣고는 차트에 몇 자 휘갈겨서 간호사에게 건네주고는 진찰이 끝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만약 제가 환자라면 그렇게 관찰하고 이야기 들어주는 자체로 아픈 게 상당 부분 나을 것 같습니다. 이태석 신부는 그런 마음으로 환자를 치료하고 브라스밴드를 조직하고 아이들에게 음악을 가르쳤던 것입니다. 본인 스스로 독학으로 피아노와 기타 등 악기를 익힌 경험이 있기 때문에 가능했을 겁니다. 이분이 암에 걸렸을 때 만난 적 있습니다. 저는 단순히 이 신부가 귀국해 있다고 해서 만나러 갔는데 막상 만나보니 암이 말기인 상태였습니다. 얼굴은 새카맣고 비쩍 말라서 모자를 쓰고 있었지요. 항암치료 때문에 머리카락이 다 빠져서 가발 대신 쓰고 있었습니다. 처음엔 말이 안 나오더군요. 제가 이태석 신부를 만난 날은 남수단에서 청년 2명이 한국에 와서 이 신부를 만나러 온 날이었습니다. 두 청년 역시 너무도 뜻밖의 모습에 할 말을 잃고 눈물만 흘렸습니다. 이태석 신부 역시 건강검진을 받지 않다가 대장암이 발병했습니다. 중간중간에 귀국했었지만, 모금을 위한 자선 공연만 하고 건강검진은 받지도 않고 다시 남수단으로 날아가곤 했던 겁니다. 그는 그렇게 모금한 돈으로 아이들을 위한 악기, 학용품 등을 컨테이너에 실어 보내곤 했습니다. 대장암은 아시다시피 진행속도가 느립니다. 그 대장암이 손 쓸 수 없을 지경이 돼서야 뭔가 이상을 느끼고 귀국해 검사를 받았던 겁니다. 그런 상태였는데도 대화 중 제 휴대전화 소리가 나자 그는 ‘휴대폰을 가슴주머니에 넣지 마라. 전자파 나온다’고 했습니다. 자기는 아프리카 아이들, 나환자들 돌보느라 건강검진 건너뛰다가 대장암으로 죽게 생겼으면서 저에겐 휴대전화 전자파 걱정해준 분이었습니다. 도요안 신부님은 아마 잘 모르는 분이 많으실 겁니다. 미국 출신 천주교 신부님인데 한국에서 노동사목, 다시 말해 천주교의 노동운동을 최초로 한 분입니다. 노동운동이라면 거칠고 공격적이라는 선입견을 갖기 쉽습니다만, 이분을 만나보면 ‘온유’라는 단어가 저절로 떠올랐습니다. 도요안 신부님은 척추가 좋지 않았습니다. 평생을 불편하게 살다 보니 여러 가지 병도 많았습니다. 그렇지만 항상 서울 성북구 보문동 사무실에서 이주노동자들의 어려움을 거둬주면서 성실하게 생활하셨습니다. 2010년에 돌아가셨는데, 당시 컴퓨터 책상 앞에 의자에 앉은 채 뭔가를 집필하다가 그 자세로 돌아가셨습니다. 도요안 신부님이 세상에서 마지막으로 남긴 책의 제목은 ‘가난한 이들은 항상 너희 곁에 있을 것이다’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예수님 말씀이긴 합니다. 그러나 저는 항상 그 구절을 떠올릴 때마다 도요안 신부님의 일생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문장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이분은 불교에서 말하는 좌탈입망하신 것이라 생각합니다. 좌탈입망이란 좌선하던 앉은 자세 혹은 서서 입적하는 것을 뜻하는 말입니다. 그러나 원래의 정신은 자신이 평생 해오던 일을 하던 채로 세상을 떠난다는 뜻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점에서 자신의 책상 위에서 글을 쓰다 돌아가신 도요안 신부님은 현대판, 천주교판 좌탈입망이 아닐까 생각하는 것입니다. 또한 마지막 순간까지 은퇴하지 않고, 또한 변하지 않고 어려운 이들을 돕다가 떠난 이태석 신부님, 선우경식 원장님 역시 좌탈입망이라 할 것입니다. 선우경식 원장, 이태석 신부, 도요안 신부는 제가 목격한 ‘완전연소’ 후 돌아가신 분들입니다.
현재진행형인 완전연소 전연소를 향해 전력을 다하는 분들은 지금도 많습니다. 경기도 성남엔 김하종 신부라는 분이 계십니다. 이 분은 이탈리아 출신 천주교 사제입니다. 이 분은 성남동성당이란 성당 옆에서 ‘안나의 집’이란 노숙인, 독거노인 돌봄 시설을 운영합니다. 이 분은 개인적인 아픔도 있습니다. 난독증이란 장애가 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난독증을 가진 분은 이분이 처음이었습니다. 책을 읽어도 줄이 꺾여서 넘어가면 갑자기 읽기 어려워합니다. 그런 장애를 가진 이분이 얼마 전 한국 시민이 됐습니다. 청와대에서 대통령도 만났습니다. IMF 이후 20년간 어려운 이웃을 도와온 데 대한 공로입니다. 김 신부님은 이탈리아에서 신부가 되기 전부터 어려운 나라에서 어려운 이웃을 돕겠다고 서원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어려운 이웃을 돕는 활동을 하는 오블라티수도회에 가입했지요. 한국에 와서 처음 서강대에서 어학연수하던 시절부터 그는 어려운 이웃을 찾아다녔습니다. 그러다가 주변에서 성남 지역을 추천받았습니다. IMF 이전부터 성남 지역에서 독거노인들에게 도시락을 배달하는 봉사를 했습니다. 그러던 중 IMF 사태가 발발하자 거리에 노숙인들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자연스럽게 봉사할 대상이 확대됐지요. 처음엔 성남동성당 마당 구석의 가건물에서 시작했습니다. 어느 때부터 그는 청소년 문제에도 관심을 가졌습니다. 그 이유가 의미 있습니다. 그가 노숙인들을 상대로 면담과 조사를 해 본 결과, 노숙의 뿌리가 청소년기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답니다. 즉 청소년 시절, 부모의 이혼과 가출 등으로 가정이라는 뿌리가 뽑힌 사람들이 장년이 돼서도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고 노숙 생활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흔히 경제 위기 때문에 멀쩡하던 가장이 노숙 생활을 한다고 생각했던 것과는 달랐습니다. 노숙의 뿌리는 IMF 이전부터 있었다는 이야기였습니다. 확실히 서양사람들이 합리적, 논리적으로 사고한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그는 장래의 노숙인을 예방하는 차원에서 가출청소년 문제에 관심을 갖고 쉼터를 만들고, 오라면 오지 않는 아이들을 찾아서 거리에 나가서 청소년들을 만나고 있습니다. 그는 20년 셋방살이를 끝내고 작년엔 그 앞 공터에 번듯한 건물을 지어 이사했습니다. 저는 가건물 시절부터 김하종 신부님을 만났는데, 만날 때마다 한 번도 정해진 시간에 인터뷰할 수 없었습니다. 가보면 항상 뭔가를 나르고 있거나 누구를 만나고 있었습니다. 쌀이 떨어졌는데 갑자기 누가 쌀을 보내왔다면서 말입니다. 그래서 이분을 만나러 가면 저도 함께 일을 거들곤 합니다. 어차피 일이 끝나야 인터뷰를 할 수 있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시간을 당기기 위해서는 일손을 거들어야 하는 것이지요. 김 신부님이 한국 이름을 정한 사연도 재미있습니다. 김은 김대건 신부님에서 땄고, 하종은 ‘하느님의 종’이란 뜻으로 지었답니다. 그뿐 아니라 이 신부님은 장기기증, 시신기증 서약까지 했습니다. 뼈까지 한국에 묻겠다는 각오인 셈입니다. 한국 국적을 받을 만한 분이지요. 광주엔 천노엘 신부라는 노신부님이 계십니다. 이분은 아일랜드 출신으로, 발달장애인 돌봄에 관해선 한국에서 가장 선구자입니다. 발달장애인은 흔히 정신지체자라고 하지요. 더 옛날엔 정신박약아라고 불렀습니다. 발달장애인과의 인연은 광주의 무등갱생원이란 곳에서 시작됐습니다. 갱생원이란 이름에서 보듯이 이곳은 부랑아부터 노숙인, 알코올중독자 등이 수용된 시설이었습니다. 말은 ‘갱생’이지만 사회로부터 ‘격리’가 목적인 곳이지요. 그런데 광주 지역의 성당 주임신부로서 신자들과 함께 봉사를 위해 이곳을 드나들던 천노엘 신부는 특이한 사람들을 발견했습니다. 알코올 중독자들은 고함을 지르고, 다른 사람들도 다 자기 의사를 표현하는데 어떤 사람들은 아무런 의사 표현을 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알고 보니 이들이 발달장애인들이었습니다. 최소한의 자기 권리조차 찾지 못하는 이들을 보면서 돕기를 결심했습니다. 그러던 중 1979년 한 여성 청소년의 죽음이 결심을 확고하게 했습니다. 무등갱생원에 수용된 여성 청소년인데 이름도 ‘김여아’였답니다. 아마도 어떤 공무원이 ‘여자 아이’이니까 그냥 ‘여아’로 지어줬는지도 모릅니다. 이 청소년이 사망했는데 이름도, 나이도, 출생지도 아무 것도 아는 게 없었답니다. 천 신부는 김여아의 시신을 거둬 천주교 묘원이 묻어주고 이때부터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안식년을 얻어 선진국들도 돌아다니면서 발달장애인 시설들도 견학했습니다. 결론은 ‘격리시켜 모아두면 안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발달장애인들도 잘 교육해서 일반인들과 어울려 살게 하면 증상도 개선될 수 있다는 확신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전국에서 처음으로 광주에 ‘그룹홈’을 시작했습니다. 난관은 한둘이 아니었습니다. 그래도 그는 꾸준히 아이들을 데리고 시장에 가서 물건을 사고 셈을 치르게 하고, 공장에 쉬운 일이라도 할 수 있도록 취업을 도왔습니다. 지금은 광주의 공단에 공장을 차려서 간단한 작업을 하면서 자립할 수 있도록 돕고 있습니다. 그는 2015년 만해대상을 받았는데, 그 이전에는 웬만한 상을 다 사양했습니다. “내가 상을 받는다는 것은 그 자체로 나와 장애인을 나누고 차별하는 것”이라는 이유였다고 합니다. 경기도 마석에 가면 가구공단이 있습니다. ‘전국 최대 가구공단’이란 간판도 붙어 있죠. 여기가 원래는 한센인들, 옛날 표현으론 나환자촌이었답니다. 수도권에 가구공단이 여러 곳 있는데 다들 과거엔 한센인 마을이었답니다. 그리고 과거엔 모두 양계장을 하던 곳이라고 합니다. 한센인들이 닭을 쳐서 계란을 팔아 생계를 유지하던 곳이지요. 그러던 곳들이 1990년대 이후로 하나둘 가구공단으로 바뀌었습니다. 가구공장은 저임금이고 위험한 화공약품을 쓰는 공장들이 많다 보니 외국인 노동자들이 늘게 됐습니다. 마석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곳 마석에 20년 넘게 외국인노동자들의 이익을 대변하는 대부(代父)가 있습니다. 성공회 이정호 신부입니다. 이 분이 처음 이곳에 발령받았을 때는 한센인촌이었다고 합니다. 언젠가부터 늘기 시작한 외국인 노동자들이 하나둘 부탁을 해오기 시작했습니다. 주로 필리핀, 네팔, 방글라데시 3개국에서 온 노동자들은 각기 천주교, 불교, 이슬람 신자들이 많았습니다. 이들을 상대로 ‘교회 나오라’고 할 수는 없었답니다. 대신 이들이 떼인 월급, 사고로 다친 병원 치료비 등을 대신 받으러 뛰었습니다. 남는 건 하나도 없는 일이지요. 오히려 원망만 듣는 일인데도 이 신부는 자기 일처럼 나섰습니다. 요즘은 성당 옆 농구장에서 1년 내내 필리핀 노동자들의 농구 리그가 열린답니다. 몇 년 전부터 이 신부는 새로운 도전을 시작했습니다. 귀국한 방글라데시 사람들을 찾아가서 돕는 것입니다. 세상살이는 어디나 비슷한 것인지 방글라데시 노동자들도 한국에서 번 돈을 알뜰히 모아서 귀국 후에 번듯한 사업가가 된 사람도 있지만, 한국에서 다친 상처 때문에 경제적으로 어려운 사람들도 많다고 합니다. 이 신부는 1년 혹은 2년에 한 번씩 한국에서 의사, 간호사 그리고 청소년들과 함께 현지를 방문해 건강검진도 해주고, 방학 학교도 열어줍니다. 이슬람 국가인데도 그가 방문할 때면 거리에 그의 사진을 넣은 플래카드가 걸리고 한글로 ‘환영’ 같은 글씨가 등장한다고 합니다. 이 신부는 “한국에서 고생하고 차별당했던 아픈 상처를 조금이나마 씻어주려는 노력”이라고 말합니다. 서울 중계동엔 서울광염교회라는 교회가 있습니다. 이 교회는 봉사활동으로 유명합니다. 이 교회엔 몇 가지 원칙이 있는데 그중 하나가 ‘교회 통장엔 가능한 한 잔액을 남기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다 봉사활동에 소진하자는 취지입니다. 이 교회는 ‘교계의 119’입니다. 국내외를 막론하고 재난이 발생하면 바로 달려갑니다. 북한 용천역에서 폭발사고가 났을 때는 단둥으로, 이란에서 대지진이 일어나면 바로 이란으로 달려갑니다. 아이티에 지진이 났을 때도 포항에서 지진이 났을 때도 바로 달려갔습니다. 뉴스를 보다가 재난 소식을 듣고 혹시나 해 전화를 걸어보면 이미 현장에 가 있거나 공항에서 비행기를 타기 직전입니다. 현지에 도착해서는 식수와 식량은 물론 모포 등 필수품을 무료로 제공합니다. 현지에서 구입할 수 있는 것은 현지에서 구하고, 구하기 어려운 것은 한국에서 공수해가기도 합니다. 이 교회 담임목사는 조현삼 목사님입니다. 봉사의 시작은 1995년 삼풍백화점 붕괴사고였습니다. 당시 학교 운동장에 솥을 걸고 자원봉사자들에게 음식을 나눠준 것이 시작이었습니다. 이 교회는 자신들이 모든 봉사를 하면서도 이름은 ‘한국기독교연합봉사단’이라고 씁니다. 봉사를 시작할 당시만 해도 기독교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좋지 않았습니다. 자신들의 봉사로 한국 개신교에 대한 인식 개선에 도움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우러난 행동입니다. 요즘도 저는 세계적으로 큰 재난이 발생하면 조현삼 목사님과 이 교회를 떠올립니다.
오른손이 하는 일, 왼손이 모르게 종교계 취재는 취재원과 지속적으로 꾸준히 관계를 이어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서울 공덕동의 산마루교회도 제가 10년 이상 인연을 맺어온 경우입니다. 이 교회는 이주연 담임목사의 주도로 2006년부터 서울역 노숙인들을 돌봐왔습니다. 전체 교인 200명 중 노숙인이 절반쯤 되는 이 교회는 일요일 주일 예배를 노숙인이 1부, 일반인이 2부에 드립니다. 노숙인 사역을 시작한 사연도 재미있습니다. 교회를 열었더니 소문을 듣고 서울역에서 효창동 언덕을 넘어 찾아온 노숙인들이 하나둘 늘어나자 주일에는 예배를 드리고 평일에는 서울 북악산 기슭 부암동에 농장을 마련해 함께 농사를 지었습니다. 노숙인들의 자활을 돕기 위해서였습니다. 노숙인들과 함께 일을 하면서 이주연 목사의 꿈은 ‘목욕시설’과 ‘세탁시설’을 마련하는 것이었습니다. 곁에서 지켜보니 노숙인들에게 가장 큰 문제 혹은 어려움은 부족한 자존감이었습니다. 인문학 강좌도 열어 공부도 시켰지만 자존감은 쉽게 회복되지 못했습니다. 중요한 이유는 냄새였습니다. 빨래를 못하고 씻지 못하니 몸에서 나는 냄새는 스스로를 남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들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비용 마련은 요원했습니다. 그래도 이 목사는 ‘자조(自助)’의 길을 택했습니다. 한 푼이라도 노숙인 스스로 모아보도록 독려했습니다. 2013년부터는 노숙인들이 특별헌금으로 500원, 1000원씩 모았습니다. 매년 연말 합창대회를 열게 된 것도 이들 시설비용을 마련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신자들, 지인들에게 그냥 헌금을 부탁하는 대신 몇 개월씩 노숙인들 스스로 연습한 노래를 들려드리고 후원금을 받자는 뜻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이렇게 모은 티끌로는 태산이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이 꿈은 뜻밖에도 기적처럼 이뤄졌습니다. 지난 2016년의 일입니다. 서울 서빙고동의 대형교회인 온누리교회가 갑자기 산마루교회를 돕겠다고 나선 것입니다. 두 차례에 걸쳐 3억2천만 원이 넘는 헌금을 모아서 보내줬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익명의 기부자들까지 나서서 모금액은 4억 원이 금방 넘어버렸습니다. 이주연 목사와 산마루교회로서는 기적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사연은 이랬습니다. 온누리교회는 평소에도 소외된 이웃을 위한 일을 많이 해오던 교회입니다. 온누리교회도 서울역 인근에 노숙인을 위한 목욕시설을 마련하기로 의견을 모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실태조사를 하던 중에 산마루교회가 이미 같은 일을 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그러자 온누리교회는 자신들의 계획을 접고 이미 잘하고 있는 다른 교회를 돕겠다고 나선 것입니다. 저는 이주연 목사께 이 소식을 듣고 귀를 의심했습니다. 우리는 흔히 개신교는 ‘개교회주의’가 강하다는 선입견을 가지고 있습니다. ‘개교회주의’란 ‘우리는 다른 교회는 몰라. 우리 교회끼리만 잘 하면 돼’라는 식으로 각각의 교회가 모래알처럼 뿔뿔이 흩어져 뭉쳐지지 않는다는 뜻으로 쓰이지요. 개신교인 스스로도 개신교의 고질적 병폐로 여기는 부분입니다. 게다가 산마루교회는 감리교, 온누리교회는 장로교로 교파도 다릅니다. 산마루교회가 교인 200명이라면, 온누리교회는 교인 수만 명으로 규모도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온누리교회는 이주연 목사를 초청해 주일예배 시간에 설교까지 하도록 해줬다고 했습니다. 왜 목욕시설, 세탁시설이 필요한지 직접 설명하면 교인들의 이해가 빠를 것이라고 하면서 말입니다. 이주연 목사님은 너무도 감격한 목소리로 저에게 이 모든 이야기를 해주었습니다. 사실상 세탁, 목욕시설 마련에 필요한 금액은 온누리교회가 모두 헌금한 셈입니다. 그럼에도 온누리교회는 그 영광을 교인 200명에 불과한 산마루교회에 다 넘겨준 것입니다. 저는 이 사연을 모두 기사로 썼습니다. 기사가 나간 후 또다시 놀랐습니다. 온누리교회에서 발행하는 교인 대상 신문인 〈온누리신문〉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조선일보〉 기사를 그대로 〈온누리신문〉에 실어도 되겠냐는 것이었습니다. 일간지에 기사가 날 때까지도 교회 내의 신문에는 홍보를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사실 온누리교회 이재훈 담임목사는 그 전에도 몇 차례 인터뷰를 한 적이 있습니다. 그것도 제가 다른 취재원을 통해서 좋은 일을 많이 하신다고 듣고 부탁해서 만날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훌륭한 일을 하면서도 그는 저에게 일언반구 언급이 없었습니다. 마침내 모금과 공사가 다 끝난 2017년 11월. 산마루교회에서 ‘목욕빨래방’ 준공 및 개소식이 열렸습니다. 그날 감사예배에는 이재훈 목사도 참석했습니다. 그 자리에 저를 만난 이재훈 목사는 깜짝 놀라면서 “별일 아닌데 이렇게 취재를 왔느냐”며 몹시 쑥스러워했습니다. 그런데 그게 끝이 아니었습니다. 온누리교회는 노숙인 돕기에 본격적으로 나설 교인들을 조사해서 아예 산마루교회로 교적(敎籍)을 옮기도록까지 했습니다. 장로교 교회가 자기 교인들을 감리교 교회로 옮기도록 허용하고 권하기까지 했다는 것은 상당히 충격적이었습니다. 보수적인 개신교인들은 노골적으로 싫어하기도 했습니다. “교인이 목사 부하냐. 이리로 가라, 저리로 가라 할 수 있느냐”면서 말입니다. 그게 일반적인 정서입니다. 이 일을 겪으면서 저는 ‘오른손이 한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는 말씀을 다시 생각했습니다. 온누리교회가 도와준 일을 산마루교회가 이야기해주지 않았다면 모르고 지나칠 뻔한 일이었습니다. 지금까지도 온누리교회는 저에게 무엇을 홍보해달라고 부탁한 적이 없습니다.
소박한 삶
앞에서 소개한 분들의 삶은 공통으로 지극히 소박합니다. 선우경식 원장은 지하철과 버스로 미아리 자택에서 영등포역 요셉의원까지 출퇴근했습니다. 말씀드렸듯이 자택은 그의 부친이 50년 전에 지은 집이었습니다. 집은 인테리어도 새로 한 적이 없는 듯 낡은 상태였습니다. 자신을 위해선 최소한만 지출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월 70만 원 받아서 차비를 빼고 나면 자신을 위해서 쓸 수 있는 액수가 얼마나 남았을까요? 이태석 신부, 도요안 신부님도 지극히 청빈하게 살다가 돌아가셨습니다. 천노엘 신부는 프라이드 승용차를 직접 운전합니다. 김하종 신부는 평소엔 자전거를 타고 다니고 공짜로 빵을 얻으러 갈 때 등에는 다마스 승합차를 타고 다녔습니다. 물론 손수 운전해서요. 이정호 신부도 개인 승용차는 없습니다. 외국인복지센터의 승합차를 타고 다니지요. 자동차가 대단한 것은 아니지만 사실 종교인들 가운데에도 고급 승용차를 타는 분들이 꽤 있습니다. 일부이기는 하더라도 일반인들 눈에는 그리 곱게 보이지는 않지요. 여담입니다만 저는 10여 년 전에 ‘자동차와 종교인’을 주제로 기사 취재를 하다가 포기한 적이 있습니다. 조사를 해보니 당시 천주교 교구장 주교들은 ‘에스페로’ ‘구형 소나타’ 등 낡은 중형차를 타는 경우가 태반이었습니다. 고속도로에서 퍼지는 경우도 꽤 있었답니다. 그나마 연세가 많은 분들은 서울까지는 고속버스나 기차로, 서울에 도착해서는 ‘공짜 지하철’을 탄다고 했습니다. 반면 다른 종교인들은 대형차를 타는 경우가 너무 많았습니다. 불교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자칫 이 기사를 썼다가는 천주교만 칭찬하고 다른 종교는 척을 지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포기했습니다. 제가 아는 어떤 수녀회는 얼마 전까지 개인 휴대전화가 없었습니다. 홍보를 할 일이 많은 곳인데도 홍보담당 수녀용 휴대전화 한 대를 돌려가며 쓰고 있었습니다. 담당자가 바뀌면 번호는 그대로이고 사용자만 바뀌는 식이었지요. 그런 모습이 하나도 누추해 보이지 않았습니다. 더 고귀해 보이지요. 노숙인을 돕는 이주연 목사님은 서울 부암동 단독주택에서 20년 가까이 전세로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난겨울엔 드디어 보일러가 고장이 났다고 합니다. 이 목사는 노숙인들과 농장을 하면서 주소를 농장으로 옮겨놓아서 현주소에는 아내분 혼자 서류상 남아있다고 합니다. 어느 날 동사무소에서 독거노인 지원사업 차 찾아왔더랍니다. 그날 아내분은 이 목사에게 “노숙인만 챙기지 말고 나도 좀 챙겨달라”며 농담 아닌 농담을 했답니다. 앞에 말씀드린 종교인들은 한 명도 돈을 쌓아놓고 남을 돕는 분들은 없습니다. 원불교 박청수 교무는 “애간장이 다 녹을 지경에 이르러서야 돈 문제가 해결되곤 했다”고 합니다.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눈에 띄면 이들은 바로 움직입니다. 일단 시작하면서 돈 문제를 해결합니다. 결코 불가능해 보였던 일이 결국엔 이뤄집니다. 이분들의 간절한 마음이 세상에 전해지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마음속에 따뜻함을 간직하고 있는데, 이분들은 그 마음에 불을 지피는 것이지요. 또 한 가지 이런 종교인들을 취재하면서 느낀 것은 시스템보다는 개인의 힘입니다. 이분들은 자신들 종교의 조직과 시스템을 이용해서 활동하지 않습니다. 다들 불교식으론 어떤 목표를 이루겠다고 발원한 후 이를 위해 완전연소함으로써 주변에서 오히려 시스템을 만들어준 경우가 많았습니다. 선우경식 원장님의 요셉의원도 서울가톨릭사회복지회에 소속돼 있지만, 지원을 받는 것은 거의 없습니다. 천주교 교회 내의 조직으로 신앙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는 표지 정도일 뿐입니다. 이태석 신부님이 남수단에서 단기필마로 완전연소한 사실은 모두 아실 겁니다. 천노엘 신부님도 처음 발달장애인을 돕기 위해서는 광주대교구의 특별 허가를 얻어야 했습니다. 일선 성당에서 사목할 사제 한 명이 빠지게 되는 것이었으니까요. 이정호 신부님 역시 외국인노동자를 돕기 위해서는 혼자 뛰었습니다. 어차피 성공회 신자를 늘리는 일도 아니었습니다. 이주연 목사님의 경우도 교회를 크게 키워서 노숙인을 도왔다면 더 쉬운 길이 됐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는 일반 교인들과 함께 노숙인 교인들을 챙겼습니다. 단지 도와줄 대상이 아니라 함께 예배드릴 형제로 그들을 맞았기에 오늘의 산마루교회가 있었습니다. 흔히 사회적 문제에 대해 시스템을 개혁해야 한다는 말을 많이 듣습니다. 꼭 필요한 일입니다. 그러나 시간도 많이 걸리고 이해 당사자 간의 충돌도 많습니다. 제가 취재한 분들의 경우를 보면 몸이 먼저 반응합니다. 원불교 박청수 교무님은 그래서 남을 돕는 일에는 회의를 열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회의 열어서 결정하는 시간에 정말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은 때를 놓친다는 이유에서입니다. 아마도 종교인이어서 가능한 일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런 이유에서 우리 일반인들은 종교인들을 존경하는 것 아닐까요. 좀 더 돈 많이 벌어서, 좀 더 안락하게 살고, 문제가 생기면 여러 사람 의견 모아서 좌고우면하면서 결론은 미적거린다면 그건 일반인의 삶이지 종교인다운 삶은 아닐 것입니다. 앞으로도 이런 따뜻한 종교인들을 많이 발굴해서 소개하는 것이 제 꿈입니다. 감사합니다. ■
김한수 / 조선일보 종교전문기자. 고려대 불문과를 졸업하고 조선일보에 입사했다. 편집부를 거쳐 1993년부터 문화부에서만 근무하고 있다. 학술 출판 미술 담당 기자를 거쳐 2003년부터 2010년까지 종교를 담당했고 3년간 ‘외도’를 거쳐 2014년부터 다시 종교전문기자로 돌아왔다. 《우리 곁의 성자들》 《종교 아 그래?》 등의 책을 썼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