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가 설날, 어제의 과음으로 오늘 아침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기가 쉽지
않군요. 그래도 고향의 아침을 달려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여 이불속의
유혹을 떨쳐버리고 달리기 복장을 갖추기 시작합니다.
아직은 아침 기온이 상당히 차군요.
오늘은 어느 방향으로 달리면서 고향의 정취를 만끽 해 볼까,
잠시 생각을 가다듬습니다. 월성 병곡 방향은 벌써 수 차레 달려보았고
이번엔 소정 송계사 방향으로 달려볼까 생각하다가, 아! 그렇지, 중학교적
나의 통학 길, 위천중학교까지 갔다 오는 거야.
까까머리 학창시절인 28 여년 전의 아련한 기억을 더듬으며,
추억 여행을 떠납니다. 오늘 아침 나의 달리기 주제는 뛰면서
지난 날 따뜻했던 봄날의 추억을 회상하는 것 입니다.
...... ...... ...... ...... ......
나는 중학교를 다닐 때 먼지 폴폴 나는 신작로 자갈길을 걸어서
다녔습니다. 믿기지 않겠지만 우리 집이 가난해서 3년 내내 걸어
다녔습니다. 그 때 그 까까머리 소년이 이제 불혹의 나이를 지나
지천명을 바라보고 있으니 참 세월이 빠르네요. 아 세월이여! 세월이여!
누렁이 개도 낮잠 자다 지쳐 머리를 두 다리 위에 걸치고 두 눈만 껌벅이는
한적한 덕유산 자락 산골마을의 봄 날 오후, 학교를 파하고 봄 아지랑이
피어나는 들녘을 바라보며 자갈길을 걸어갑니다. 제법 더워진 날씨에 까만 교복 후크와
윗 단추 하나는 풀어 헤치고 가방을 옆구리에 끼고 자갈길을 걸어갑니다.
짙은 곤 색 투피스 교복에 눈이 부시게 하얀 칼라를 한 옆 동네 여학생 한 명이 가만히
서 너 발자국 간격을 두고 나의 뒤를 졸졸 따라옵니다.
십리가 조금 못 되는 우리 동네 북상면 농산리를 가자면, 음산한 썩수고개(측수대)길도
지나야 되고, 텃새가 심한 상기친구네 동네 황산 어나리도 지나야 되고,
수시로 귀신이 출몰하는 S자모티도 지나야 되기 때문에 그 여학생은 대낮인대도
무서워 혼자서 갈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같은 방향 남학생 뒤를 따라 다소곳이 두 눈을 밑으로 내리깔고서 서 너 걸음
뒤에 처져 나를 따라오고 있습니다. 여학생 걸음으로 나를 따라 걸어오려면 조금은
버거울 것 같기도 한데 잘도 따라옵니다. 어쩌다 눈앞을 나풀거리며 지나가는
노랑나비 한 마리에 눈길을 주어 잠시 멈춰 서 있으면 덩달아서 그 여학생도 무료하게
가방 든 오른 손에 왼손도 포개고서 앞으로 두 손 가지런히 모아 그 자리에 서 있습니다.
그러다가 내가 다시 걸으면 또 다시 따라오고....
그러면 따뜻한 봄날의 햇살은 아름다운 그 여학생의 봉긋한 가슴위에
살짝 앉아 부드러운 그림자, 음영을 만들며 이 소년의 가슴을 콩당거리게 만들었지요.
그렇게 시골길을 자로 잰 듯한 거리를 두고 걷는 두 이성, 대한민국 덕유산자락 한 구석,
천진 무궁 시골 남학생과 여학생. 초록 독새풀이 논배미를 온통 다 뒤덮고 있어
얼마 후 모내기 쟁기질을 기다리는, 아지랑이 솔솔 봄기운에 취해 하늘 올려다 보면
종달새 지지배배 푸른 창공 어디 메인지 도통 찾을 수 없어 머리 빙빙 돌리며
숨바꼭질 하게 하던 봄 날.
이윽고 마을 어귀 농산리 갈계리 갈림길 북상지서 앞에 다다르면
그 여학생은 금방 내 앞을 지나 뒤도 안돌아보고 가버리는 인정머리
하나도 없는 눈부시게 하얀 교복 칼라의 얄미웠던 그 여학생,
...........
아, 이제 오늘 나의 통학길 고향 뜀질을 거의 다 마치며 내 고향 농산리
고향집 앞에 다 와 갑니다. 우리 집 앞 골목과 마당엔 아침 햇살이
가득합니다. 아침 찬 기운에 손은 비록 곱았지만, 추억을 되새기며
아주 기분 좋게 달린 오늘 새벽 뜀질이었습니다.
그렇지요. 고향의 봄은 언제 생각해도 포근하고 따뜻합니다.
그리고 곧 다가올 고향의 봄을 떠올리며 달려보는 설 다음날 오늘 아침
뜀질은 더 더욱 포근합니다.
나의 사춘기적 그 여학생 봉긋한 가슴 위에 내려와 자리하던 그 햇살을
생각하면, 나는 어쩌다 부엌 찬장 속의 꿀단지 본 가슴처럼 벌써부터
가슴이 벌렁 벌렁해 집니다.
(2007년 2월 21일 고향의 봄을 생각하며 천안에서 조상수)
첫댓글 하얗고 맑은 귀한추억하나를 가슴에 품고 사는 님의 마음이 이렇게 귀한글을 쓸수 있는 어떤 구심점이 되었나봅니다.봉긋한 가슴위로 내려앉는 햇살은 어떤 색일까요?...표현이 참 아름다워서 제맘도 설레이네요
선배님, 미천한 잡글을 이렇게 과찬해 주시니 부끄러움이 앞섭니다. 그래도 진짜 칭찬으로 알고 계속해서 용기를 내보려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