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걸어 온 신앙생활
오동춘:화성교회 원로장로
어린 날 내가 살던 마천 고향엔 교회가 없었다 산골 주변에 절만 있었다
지리산 공비가 군인이 주둔하던 초등학교마저 불질러버려 우리는 교실도
없이 아주 열악한 교육환경에서 마천초등학교 6년과정을 졸업했다 “자식은
쪽박을 차도 가르쳐야 한다“는 어머니의 교육신념 때문에 함양읍내로 이사를
나왔다 함양중학 3년과정을 졸업 할 때까지 누구도 내게 전도하는 사람이 없었다
초등학생, 중학생 때는 예수님을 몰랐다
내가 서울 숙부 초청을 받고 아버지의 사랑으로 부산에서 1953년 8월 13일 오후 아우와 함께 완행열차에 올랐다 한강을 건널 도강증이 없는 열차 손님들이 영등포역에서 다 내렸다 우리는 영등포역에서 밤을 새우면 다음날 택시 기사인 숙부가 데릴러 오기로 약속이 되어 있었다 일단 우리도 영등포역에 내렸다가 개찰구로 갔더니 보퉁이를 머리에 인 아주머니 하나가 부리나케 열차에 오르는 게 안닌가! “동해야 우리도 타자” 아우를 채근하며 우리 형제도 열차에 올라 갔다 갑자기 헌병 하나가 “누구야!”소리 지른다 “학생입니다”나도 외쳤다 헌병은 “학생이면 다야”다시 소리 질렀다 나는 반사적으로 “모르겠습니다” 소리 지르고 텅빈 열차칸에 가 앉아버렸다 산골 학생으로서는 제법 씩씩하고 용감했던 것이다 우리 형제는 도강증도 없이 열차로 한강을 건너 새벽 1시쯤에 서울역에 내렸다 그때 하나님을 모른 학생이었으나 하나님 은혜로 한강을 건너 왔고 서울역에 내리자마자 신사 한분이 나보고 “학생 어디까지 가느냐”고 묻길래 돈암동 숙부댁에 간다고 했더니 자기가 혜화동까지 가니까 동행하자 하여 통행금지가 된 텅빈 거리를 걸어 혜화동까지 잘 왔다 혜화동파출소 순경에게 잠자리를 부탁하여 파출소 건너편 36군병원<현 동성고교> 야전침대에서 군인들과 함께 하룻밤을 잘 잤다 곧 텐트를 나와 근처 삼선교 숙부댁을 쉽게 찾았다 8월 14일 아침이다 휴전된지 2주만이다 도강증도 없이 한강을 건너와 처음 집을 찾아온 조카 둘을 대견스럽게 바라본 숙부는 “촌학생들이 똑똑하구나”하시면서 반가워 하셨다 이튿날부터 6.25 전쟁이 지나간 초라한 서울 모습을 잘 보았다 이듬해 숙부는 우리 형제를 서울에서 공부하게 도와 주셨다 아우는 중학생 나는 고교생이 된 것이다 경축식날 시가행진도 씩씩하게 하며 공부를 열심히 하던 나는 고등학교 2학년 겨울방학을 맞이하여 부산 집에 내려 왔다 벼르던 코 축농수술을 하기로 했다 부산초량천주교병원에 가서 양쪽 코 수술을 하고 3일씩 두 번 입원하고 있을 때 수녀가 병문안을 와서 천주님을 믿으라고 전도를 하는 것이었다 태어나서 처음 받는 전도였다 큰누님스런 수녀의 신앙인품에 감화되어 안내 해 준 서울 돈암성당 신자가 되기로 약속을 했다 내게 교리를 가르칠 때 나는 삼위일체설에 대해 질문했다 수녀는 삼각형을 하나 그려놓고 학생 변이 몇 개에요? 각은 몇 개에요? 하고 묻을 때 변도 세 개 각도 세 개라 대답 했다 그럼 삼각형은 몇 개가 있느냐 했다 하나라고 대답했더니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설은 이와 같은 이치라 하면서 더 물으면 자기도 모르니 더 이상 질문을 하지 말라 했다 인상적인 수녀의 삼위일체설 강의는 지금도 내게 감화를 준 신앙강의였다
나는 상경하여 고3 졸업반이 되면서 수녀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돈암성당에 가서
미사에 참여했다 두 달을 출석해도 어디서 온 성도냐? 묻는 사람도 없고 모두 무관심
했다 대입시공부를 해야 하므로 붙잡지 않는 편이 오히려 내겐 좋았다 그런 중에 숙부댁이 용산으로 이사를 가면서 용산 근처 성당을 찾지 못하여 나는 성당에
나가지 못하였다 그해 가을 숙부댁 이웃 제재소에 불이 나서 숙부댁도 다 타버렸다
나의 책도 일기장도 몽땅 재가되어 버렸다 더 이상 숙부댁 신세를 질 수 없어
3의 2반 같은 반 친구와 아현동에서 자취를 하기로 했다 함께 자취를 하던 어느 날 밤 친구가 교회를 나가자고 전도했다 나는 망서렸다 수녀와의 약속 때문이다 그러나
나갈 성당은 찾을 수도 없고 천주교와 기독교는 성경중심의 종교이니 내가 기독교 신자가 되어도 수녀와의 약속 위반이리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친구 따라 판자교회인
산칠교회에 갔다 성경도 찾을 줄 모르고 찬송가도 몰랐다 완전히 이단자처럼 보였다
그런데 목사님 기도나 성도의 기도 소릴 들어 보니 저 기도는 나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최명환 목사님이 시무하는 기독교장로교회였다 나는 대학 3학년 때 만난 안송희 청년과 5년 교제 끝에 해병대 군복무를 마치고 고교 교사가 되면서 1965년 6월 24일 대학생들 한일비준 반대가 심하던 더운 여름에 시민회관 소강당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결혼식날 신혼여행비를 소매치기 당해 보은 문장대쪽에 못 가고 대전
유성 군인호텔에서 별들과 개구리 합창단 축하를 받으며 주님 잘 섬기는 부부, 첫아들 낳는 부부가 되게 해 달라는 기도를 하고 첫날밤을 잔 것이다
이튿날 우리 부부는 서울로 올라와 2만원 짜리 전세로 염리동 한서초등학교 근처에서
살림을 시작했다 아내는 산칠교회 유치원 교사로 나가고 나는 여자고등학교 교사로 근무하며 교회 중.고등부를 잘 섬겼다 전세로 살다가 화곡동으로 조그만 집을 사서
이사 오면서 오안열 오혜림 남매를 먼저 화성교회 유초등부에 보내고 나와 아내는
산칠교회를 2년 더 섬기다가 1975년 여름 화성교회에 등록했다 몸소 겪은 체험에서
솟아나는 간증적인 장경재 목사님 설교가 크게 감동이 되었다 나와 아내는 중.고등부 반사로 열심히 교회일에 충성 봉사했다 나와 아내는 그때 고등부 교육전도사인 김기영 목사님과 함께 고등부 부흥에 온 힘을 쏟았다 나는 장목사님 말씀을 받들어 남전도회를 세우고 이어 부부찬양대<현 아삽찬양대>도 만들었다 그리고 장목사님께 건의하여 교회요람도 만들기 시작하여 5호까지 내가 편집했다 나의 선임 장로로 신면식.허운철,김익성,장기철,안만수,신언복,방세호 장로가 계셨다 내가 장로 안수를 받고 얼마 되지 않아서 우리 교단이 합신교단으로 신앙노선을 바꿀 때 교회가 좀 시끄러웠다
나와 안만수 장로<후에 화평교회 목사 시무> 신언복 장로가 함께 반대파 성도들 설득에 최선을 다했다 장목사님의 너그러운 신덕과 우리 장로들과 여러 권사 집사님들의 기도로 화성교회는 주님이 살아 계시는 화평한 교회가 된 것이다 내가 장로 장립이 되면서 기도했던 대로 장경재 목사님 만주 봉천 설교 중심의 설교집과 문집을 살아 계실 때 출판하게 되어 하나님께 감사했다 김기형 목사님 시무 때 화성교회 40년사도 출판 되어 나는 참 기쁘게 생각한다 아내 안송희 권사가 한결같이 새벽기도 열심히 하며 하나님이 주신 3남매 중에 맏아들 오안열이 목사가 되고 딸 로혜림이 이남행 목사와 함께 부부선교사가 되어 주님 일꾼이 된 것도 하나님께 감사하며 장목사의 기도의 힘이 컸던 것으로 생각된다 고등부 회장을 지낸 오세혁 막내아들도 믿음이 날로 더 독실해지고 있다 뼈 있게 살라 하시던 우리 하석임 어머니도 화성교회 집사님으로 날마다 성경을 읽으셨다 아우 오동해 명예 집사 가정도 믿음 가정이 되고 여동생 셋도 잘 믿는 성도들이 되었다 생질 정동혁 집사는 의사로 의료 봉사를 많이 하고 있다
내가 우리집 한알의 밀알이 되고 전도 잘 하는 아내의 기도를 하나님이 응답하신 것이다
내가 신앙의 아버지로 모시는 장목사님은 화성교회 온 가정을 기도하시며 우리 가정도 늘 뜨겁게 기도해 주셨다 1990년대 초에 장목사님과 미국시카고에서 열린 제2차세계한인선교대회에 참석하며 모신 일과 안철수 이이형 정상규 장로와 함께 중국 선교지 방문한 일도 잊을 수가 없다 합신 재단 이사로 안만수 목사와 함께 합신재단이사장이신 장경재 목사님을 받들어 모신 일도 은혜로운 추억으로 남아 있다
장목사님과 강정채 사모님 슬하에 아들만 다섯이다 모두 부모님 기도 대로 목사 장로 안수집사로 주님께 충성하고 있다 안송희 권사와 함께 화성교회 고등부를 잘 섬겨 가르친 김재능 선교사,장완식 장로,정연희 권사,이은경 귄사,정진관 집사 등의 제자를 보는 기쁨은 크다 장경재 목사님이 개척한 화성교회는 희년을 맞았고 장목사님이 하늘 나라 가신지도 17년이 된다 김기영 목사님도 이제 원로목사가 되시고 이은수 목사님이 뒤를 이어 교회가 잘 부흥하고 있다 고 박윤선 목사님의 수제자 장경제 목사님 주무시는 보령 모란공원 산소 방문하는 일이 나는 참 기쁘다 우리 장목사님의 그 눈물의 기도와 성도 사랑의 은혜를 우리 잊지 말고 살아가자 40여년을 안송희 권사와 함께 화성교회를 섬기며 살아가는 오늘이 기쁘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릴뿐이다 교회 뜰에 1979년 무렵 화곡이비인후과 원장인 안영찬 안수집사 부인 오윤실 집사가 임마뉴엘 찬양대에 대장으로 봉사하면서 구 예배당 뜰에 상록수를 몇 그루 가지런히 심었다 그 상록수는 오늘도 푸른데 장경재 목사님을 비롯하여 선임장로들이 방세호 장로 하나 두고 다 하늘 나라로 훌훌 낙엽처럼 떠나가셨다 후배 장로님들 그리고 권사님들 집사님들 정든 성도들이 많이 장수 상록수를 닮지 못하고 부활 소망을 두고 떠나셨다 부활하는 날 교회 상록수처럼 푸른 얼굴로 다시 만나길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2018.8.23.
화성교회:서울강서구 까치산로 66길 <화곡본동>소재 교회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