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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준신이 막 그녀의 몸에 손을 대려하다가 고개를 돌려 여미아와 조영을 바라보며 능글맞게 웃었다.
“자, 이래도 자백하지 않겠는가?”
이루하가 당할 고초를 곁에서 지켜보는 조영과 여미아의 심장은 타들어가는 것 같았다. 내준신은 바로 그 점을 노리고 있음이 분명해보였다.
“누구든 어서 자백하라.”
내준신이 조용한 목소리로 세 사람에게 말했다. 셋으로부터 아무런 반응을 얻지 못하자, 그가 부하에게 눈짓을 보낸다. 부하는 알아차린 듯, 이루하의 옷을 벗기려 했다.
순간, 보다 못한 조영이 분노로 치를 떨다가 돌연 큰 소리로 실내가 진동하도록 고함을 질렀다.
“멈춰라!”
내준신이 벌겋게 충혈된 눈을 돌리며 조영을 바라보았다.
“뭐야! 이놈이 죽고 싶어 환장을 했구나!”
내준신은 이루하를 놓고 조영에게 다가가더니 손으로 조영의 턱을 들어 올리며 속삭였다.
“이봐! 죄를 자백하겠다는 건가?”
조영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다음 순간 내준신이 상체를 일으키더니 돌연 발길질로 조영의 얼굴을 사정없이 가격했다. 조영은 찰나지간 번개처럼 상체를 뒤로 젖혀 내준신의 발길을 피했다.
“어허? 이놈이 감히 피해?”
내 준신은 벽에서 몽둥이 하나를 내리더니 꿇어앉아 있는 조영의 몸을 사정없이 내리 패었다.
조영은 재차 섬광마냥 몸을 굴려 그의 몽둥이에서 벗어났다.
다음 순간.
바닥에서 튀어 일어난 조영은 나무족쇄에 낀 두 발을 공중에 띄우더니 양발로 내준신의 복부를 가격했다.
“안돼요!”
여미아가 놀라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내준신은 조영의 발길질에 복부를 얻어맞고 앞으로 고꾸라졌다. 그 때 곁에 있던 내준신의 부하가 벽에 걸린 검을 집어 들고 묶여 있는 이루하에게 신속히 다가가 이루하의 목을 겨누었다.
“꿇어 앉으라! 저항하면 이 년의 숨통을 끊어놓겠다!”
조영이 주춤거리는 사이, 그 자가 다시 소리를 질렀다.
“하나 둘 셋 셀 동안 꿇어 앉으라우! 그 안에 앉지 않으면 이 년은 즉시 황천행이다. 나는 빈말을 하는 자가 아니다!”
내준신은 기절했는지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다.
그 때였다. 갑자기 밖에서 소란스런 소리가 들려왔다. 여러 사람이 내닫는 소음이었다. 바깥에서 누군가가 외쳤다.
“대인! 내 대인! 잠깐만 멈추시오!”
여미아와 이루하, 조영, 내준신의 부하는 급작스런 사태에 모두 놀라 귀를 기울였다.
‘귀에 익은 목소린데?’
조영이 속으로 이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밖에서 문을 요란하게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내준신의 부하가 사람들을 남겨놓고 문 밖으로 나가더니 대문간까지 갔다.
“누구십니까?”
“나요, 나! 이다조요.”
“아니, 이 장군께서 웬일이십니까?”
“지금 안에 고조영이라는 고려거사 고승의 손자와 송막도독 이진충 대인의 따님 이루하가 붙잡혀 있지 않는가?”
“네, 그렇습니다.”
“큰일 났네. 폐하께서 지금 노발대발하고 계시네.”
그가 떨리는 목소리로 되물었다.
“아니 폐하께서 무슨 일로······?”
“어서 속히 문부터 열게!”
이다조가 그의 말을 자르며 재촉했다.
영문을 알 수 없는 형옥의 관리는 문지기들을 시켜 대문을 열게 하고 이다조 일행을 다소 떨떠름한 자세로 받아들였다. 그들은 모두 손에 손에 검을 꽉 움켜쥐고 있었다.
이다조가 안으로 내달으며 고문실을 박차고 들어갔다. 이다조의 안전에 심문실의 광경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그가 아연실색한다.
조영이 자세히 보니, 그는 나이가 사십여 세로 보이고 머리가 벗겨진 한 건장한 장수였다. 그의 형형한 안광이 때마침 조영 쪽으로 투사되고 있었다. 일전에 조부와 함께 그의 집에서 만난 이다조 장군이었다.
이다조 장군은 본래 고구려 개모성 사람이었다<이다조묘지명>. 그는 중국사서에, 당에 투항한 말갈 족장의 후예로 기록되어 있다. 고구려 백성은 주로 다수의 부여족과 소수의 말갈족으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말갈족은 선대에 숙신이라 불렸다. 숙신은 고대중국인들이 조선을 가리킬 때 사용하던 별칭이기도 하다.
숙신이 조선의 대명사가 된 것은, 처음에 숙신계열이 단군조선의 중심세력이었기 때문이다. 단군조선은 통치구역이 삼조선 즉 진조선(진한), 번조선(번한), 막조선(마한)으로 나뉘어 있었는데, 그 중 삼조선 전체 임금이 직접 다스리던 곳을 진조선이라 한다. 바로 이 진조선 백성들의 일부가 훗날 숙신으로 불리게 된다.
말갈이 단군조선의 정통 진조선의 혈통을 받았다는 사실은 다양하게 입증된다.
단군조선의 임금은 1세 단군왕검부터 21세 소태 임금 때까지 대대로 단군왕검의 장남인 부루 계열이었다. 즉 부루 계열이 진조선을 직접 통치했다는 뜻이다.
요컨대, 장남 부루 계열 ≒ 진조선 ≒ 숙신이라는 유사등식이 성립된다.
그러나 단군조선 22세 색불루 임금은 단군왕검의 장남 부루 계열이 아니라 4남 부여의 혈통이다. 그 때부터 삼조선이 망할 때까지 삼조선 위에는 부여의 후예들이 군림한다. 부여의 후손들이 삼조선을 다스리면서부터 진조선의 통치계급들 즉 숙신계열은 점차 홀대를 당하게 된다.
더구나 진조선 숙신은 나중에 북방으로 밀려나며 북방 족과 혼혈하게 된다.
부루 계열과의 정권다툼에서 승리하고 삼조선의 패권을 장악한 색불루 임금으로부터 대부여의 해모수, 고구려의 고주몽에 이르기까지 대대로 부여의 후손들은 진조선 숙신과 갈등을 빚으며 그들을 소외시킨다.
숙신말갈의 거주지가 진眞조선의 영역 즉 백두산 이북부터 흑룡강에 걸쳐 있다는 사실만 보더라도<만주원류고>, 그들의 선조가 진조선의 백성들이었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그러므로 <규원사화>의 저자 북애자도, 말갈이 단군의 자손이라고 확언한다.
<삼국사기>에서, 저자나 당나라 고종이 말갈을 “예맥”이라 호칭했다는 점도, 말갈이 진조선임을 방증한다.
예맥이 “려신”(구려를 이어받은 신[진]조선)이라는 단재 신채호의 주장은 일리가 있다.
이다조 장군의 혈통인 숙신말갈족이 진조선 백성의 후예였다는 사실은, 당 예종의 조서에서도 입증된다. 당 예종은 그의 사후에 내린 조서에서 그의 충성심을 상찬하며 그를 가리켜 “삼한귀종三韓貴種”(삼한의 귀한 종족 혹은 귀족)이라 지칭한다<구당서/이다조열전>.
여기서 “삼한”은 동이족 즉 단군조선시대부터 삼한(삼조선)으로 존재했던 우리 민족에 대한 당대 중국인들의 일반적 칭호다. “삼한귀종”은 숙신말갈족 이다조가 진조선 계열로서 당대에 고구려인이었음을 암시한다. 말갈족은 고구려 영토 안에 있었다.
단군조선의 삼조선 즉 진조선, 번조선, 막조선은 원래 진한, 번한, 마한으로 불렸었다. 단군왕검은 국토 전체를 삼등분해서 이를 각각, 진, 번, 마한으로 호칭했다.
“삼한”三韓이라 부르던 것을 “삼조선”으로 고친 이는 단군조선 22세 색불루 임금이다<태백일사/삼한관경본기>.
단군조선이 와해된 이후 우리나라 열국시대에 성립된 마한 진한 변한도 역시 이 삼조선 백성의 유민이 세운 나라들이다.
단재 신채호는 처음의 삼한을 “전삼한”이라 하고, 후대의 삼한을 “후삼한”이라 칭한다.
“삼한”이, 우리나라 전체를 지칭하는 대명사가 된 이유는 거기에 있다.
결론을 말하자면, 숙신말갈은 단군조선의 진한(진조선)이 그 뿌리였고 이다조는 “삼한귀종” 즉 진한(숙신말갈) 게열의 고구려인이었다.
아니면, 당시는 고구려, 백제, 신라도 삼한으로 지칭되었는 바, 이다조가 고구려인이었으므로, 그를 “삼한귀종”이라 불렀을 것이다.
이다조 장군은 우리나라 전라남도 장흥이씨의 시조이기도 하다<장흥이씨세보>.
이다조 장군의 성이 이씨인 것은, 아마, 당나라의 통치자인 이씨가 자신의 성을 그 아니면 그의 선조에게 하사했기 때문일 것이다. 당나라는 이민족의 왕들 가운데 당에 귀순한 자들에게 흔히 이씨 성을 하사했다. 예컨대 거란인 송막도독 이진영의 조부가 그런 경우다.
조영이 허리를 깊이 숙여 이다조에게 절했다.
이다조가 바닥에 쓰러진 내준신을 가리키며 형옥관리에게 물었다.
“이 분은 내준신 대인이 아닌가? 어찌 된 건가?”
그가 조영을 지적하며 사건의 경위를 설명했다.
“쯧쯧, 돌이킬 수 없는 큰 실수를 범했군. 조금만 참았더라면 좋았을 터인데.”
이다조가 내준신의 부하에게 말했다.
“지금 폐하께서 내준신 대인에게 속히 자신전紫宸殿으로 들어오라 하셨네.”
“어떻게······?”
“자세한 상황은 나도 모르네. 폐하께서 이 일을 전해 듣고 노발대발하시며 내준신에게 지금 당장 세 사람을 데려와 자기 앞에서 일의 자초지종을 설명하라 하셨네.”
내준신은 아직 깨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이다조가 주변을 둘러보며 형옥 관리에게 말했다.
“이 세 사람의 형구부터 풀어주게.”
그가 머뭇거리다가 조영과 여미아의 수갑과 족쇄를 풀고, 이루하의 손과 발을 형구에서 벗겨내었다.
조영이 내준신에게 다가가서 손으로 몇 군데를 누르니 그가 의식을 되찾았다.
이다조는 내준신과 그의 부하, 조영, 이루하, 여미아 및 두 증인을 데리고 자신전으로 직행했다.
안으로 들어가니,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엷은 자줏빛 휘장 뒤에, 무태후가 앉아있었다. 여러 사람이 태후에게 인사한 후 태후가 이다조에게 물었다.
“내 딸 태평공주와 이 젊은이들의 신변이 염려되어, 내가 어제 그들의 귀환로를 보호하라고 이기원 장군과 우림군을 보내었는데, 그들이 돌아와 복명하기를, 숭산 지경까지 갔으나 도중에 태평공주를 만난 외에 세 사람의 종적을 찾지 못했다 했소. 새벽에 도착한 공주가 나에게 말하기를, 귀로에 무후군을 만나 도적으로 오인 받고 연행되어 오던 중, 흑룡방이라는 도적들과 조우해서 자신을 제외한 세 사람이 그들에게 납치되어 갔다고 하더군요. 그런데 이들이 갑자기 살인자가 되어 나타나다니, 어떻게 된 일이오?”
무 태후가 묻고 있을 때 몇 사람이 그 현장에 속속 도착했다. 우림군 장수 이기원, 고려여관의 사환들, 태평공주가 차례로 들어오고 마지막으로 한 훤칠한 미남아가 들어왔다.
그 미남아는 무 태후에게 절한 후 조영과 이루하, 여미아를 슬쩍 훑어보았다. 무태후는 먼저 온 사람들에게 몇 가지 사실들을 확인한 후, 맨 나중에 온 그 미남청년을 바라보고 물었다.
“그대가 이다조 장군 집안의 삼랑三郞 이기창李奇昌이 맞는가?”
“그렇사옵니다.”
“듣던 대로 헌헌장부로구먼. 내 그대에게 묻겠네. 그대는 고조영, 이루하, 여미아 세 남녀가 살인죄를 저질렀음을 어떻게 알았는가?”
“마마, 그 일은 소인이 경영하는 고려여관에서 오늘 새벽에 발생한 일이옵니다. 죽은 사람은 저희 여관의 사환이옵고, 목격자는 여기 있는 두 사환입니다. 이들에게 전해 들었사옵니다.”
이기창은 내준신 앞에 증인으로 나섰던 두 장정을 가리켰다.
“그런데, 그대 목소리가 왜 그런가? 얼굴은 미남인데, 목소리는 마치 늙은이의 쉰 소리 같아 듣기 거북하구려.”
“마마, 송구하옵니다. 제가 심한 감기에 걸려 목소리가 바뀌었사옵니다.”
무태후가 사환들에게 사건을 캐묻자 앞서 내준신 앞에서 발언한 대로 내막을 토로했다.
그 때 고려여관의 주인 이기창이 부연 설명했다.
“처음에는 몇 사람이 다 죽은 줄 알았사오나, 기절해 있다가 깨어난 이들이 몇 명 되고, 죽은 사람은 한 명이옵니다. 그는 누군가의 칼에 상처를 입고 사망했습니다.”
“그 누군가가 누구인가?”
“그것은 저희 여관 사환이 증언할 것입니다.”
“사환은 증언하라.”
무 태후의 명에 두 증인 가운데 한 사환이 대답했다.
“검으로 우리 사환을 죽인 이는, 바로 저 여인입니다.”
그가 이루하를 가리켰다.
“직접 목격했는가?”
“죽은 사환이 상처를 입고 온몸이 피투성이가 된 채 뛰어왔는데, 누구에게 상처를 입었느냐고 물어보니, 단도를 든 여인이라고 말하고 그는 곧 숨이 끊어졌습니다. 단도를 휘두른 여인은 저 여인임이 분명합니다. 소인은, 단도를 든 저 여인과 죽은 사환이 상호 싸우는 것을 직접 목격하고 동료들을 부르러 갔었는데, 바로 그 때 저 여인과 싸우던 죽은 사환이 도망쳐 왔으므로 그에게 물어보았던 것입니다.”
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조영이 입을 열었다.
“마마, 제가 한 말씀 여쭈어도 가할는지요?”
“말하게.”
조영은 이틀 전 오후 태평공주, 이루하, 여미아와 함께 숭산에 다녀오던 길에서 벌어진 사건부터 고려여관에서 있었던 일을 죽 털어놓았다.
“그렇다면, 누군가가 그대들을 죽이려 했다는 뜻이군.”
잠자코 듣고 있던 무 태후가 말하며 내준신에게 물었다.
“이들은 살인을 저지르지 않았다는데, 그대 생각은 어떤가?”
“죽은 사람이 어떻게 죽은 것인지 이루하에게 다시 물어보십시오.”
이루하가 입을 열었다.
“뱀들이 나타남과 동시 세 명의 괴한이 단검을 들고 방안으로 침입해 들어와 소녀도 마침 단도를 휴대하고 있었는지라, 단도를 빼어 그들과 대결했는데, 두 사람은 발로 급소를 차서 기절시켰고, 나머지 한 사람은 너 죽고 나 죽자는 태도로 덤벼들기에 그의 팔에 단도로 상처를 입혀 검을 빼앗고 복면을 벗겼사옵니다. 그러자 그는 두려웠는지 즉시 도망가고 말았습니다.”
“그 단도는 어디에 있는가?”
“여기에 있사옵니다.”
내준신이 증거물로 그것을 내놓았다.
“마마, 저 여인의 말은 거짓이옵니다.”
그 때 앞서 증언한 사환이 엎드려 말했다.
“팔에 상처를 입은 것도 사실이오나, 그는 가슴부분에 치명적인 자상刺傷을 입고 죽었습니다.”
무태후가 이기창을 바라보며 물었다.
“그렇다면 고려여관의 사환이 복면을 하고 들어가 이루하를 노렸다는 얘기가 아닌가?”
“소인은 그들 서로에게 무슨 원한관계가 있는지 알지 못하옵니다. 단지 아는 것은, 죽은 사환의 여성교제가 평소 좋지 않았고, 그가 강호의 무뢰배들과 자주 어울렸다는 사실뿐이옵니다.”
무 태후가 잠시 생각하더니, 결론을 내렸다.
“어의들과 관련자들을 시켜 시신을 검안하게 하고 이루하는 죄가 없다 하나, 무죄가 입증되지 않았으니 혐의를 벗을 때까지 일단 감옥에 가두라.”
“마마, 여기 조영도 대당의 관리를 능욕하고, 흉악한 짓을 저질렀습니다.”
내준신의 부하가 나서서 조영이 발길질로 내준신을 기절시킨 사건에 대해 자세히 고했다.
무 태후가 말없이 조영을 쳐다보자 조영이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사실이옵니다.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상상할 수도 없는 천인공노할 만행 앞에서 소인이 그만 참지 못하고 크나큰 잘못을 저질렀사옵니다. 그에 대한 형벌은 달게 받겠사옵니다.”
“천인공노할 만행이라니?”
조영은 내준신이 이루하에게 어떤 형벌을 가하려 했는지를 담담하게 진술했다.
내준신이 변명했다.
“마마, 통촉하소서. 그건 죄수들에게 겁을 주어 죄를 자백하도록 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단지 흉내에 불과하며, 실제로 그런 일을 행하지는 않사옵니다. 제게도 어린 딸들이 있사온데, 어찌 제가 그런 짐승만도 못한 짓을 저지르리이까? 만일 그렇게 한다면, 하늘이 저를 용서하지 않을 것이옵니다.”
무 태후가 얼굴을 찡그리고 있다가 명을 내렸다.
“조영은 앞으로 한 달 간 우림군 감옥의 독방에서 근신하라. 한 달 후에는, 별도의 내 하명을 기다리라.”
이튿날 고려여관의 죽은 사환에 대한 시체 검증이 끝나고, 그를 사망에 이르게 한 가슴의 자상은 이루하의 단도가 아닌 양날 선 검에 의한 상처로 판명되었다. 한 날 가진 도刀에 입은 상흔과 양날 가진 검에 찔린 상처는 세밀한 면에서 좀 다르다. 이루하는 하루도 못되어 석방되고, 위증자에게는 응분의 처벌이 내려졌지만, 그의 사망 사건은 유야무야로 끝나고 말았다.
이루하가 감옥에서 나올 때, 이다조와 그의 막내 아우 이기창이 직접 영접을 나왔다. 그들은 이루하와 이진영에게 백배 사죄하고, 집에까지 찾아와, 고려여관에서 불미스런 사건이 일어난 경위에 관해 자초지종 해명하며 간곡하게 용서를 구했다.
“아가씨 부디, 이 불민한 놈의 사죄를 받아주십시오.”
이기창이 이루하 앞에 무릎을 꿇고 엎드렸다.
“저는 우리 집에서 일어난 살인 사건이 아가씨와 연루된 줄로 착각했었습니다. 그건 천년을 지나도 다 씻을 수 없는 크나큰 과오였습니다. 부디 용서해 주시기를 빕니다.”
“······.”
이루하는 묵묵부답이었다. 사실 그 일을 생각하면 화가 치밀었지만, 진심으로 용서를 구하는 듯한 이기창의 간곡한 태도에 그녀의 얼어붙었던 마음은 한결 부드러워졌다.
“그거야, 하인이 거짓으로 증언한 건데요, 공자님의 잘못은 아닙니다.”
그녀의 목소리는, 그래도 다소 쌀쌀했다.
“그 거짓을 분별하지 못한 제가 참으로 우준한 놈입니다.”
“어서 일어나세요. 이러시면 제가 민망합니다.”
잠시 후 이기창이 바닥에서 무릎을 일으켰다.
분위기가 좀 어색했다. 이다조 형제는 거듭 이진영과 이루하에게 사과한 후 집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그 일이 있고 수 일이 지난 후, 이루하에게 느닷없는 청혼이 들어왔다. 이다조 장군이 이진영에게, 중매쟁이를 통해 자신의 막내아우 이기창과 이루하의 혼사를 타진해온 것이다. 조영이 감옥에 갇히고 보름 정도 지난 후다.
사석에서 이진영은 딸 이루하에게 물었다.
“너의 생각은 어떠냐? 이다조 장군은 고려출신으로 폐하의 각별한 신임을 얻고 있고, 무예와 학식이 공히 탁월하신 분이다.”
“하지만 제가 그분과 결혼하는 게 아니잖아요?”
“너는 싫다는 뜻이냐?”
“소녀가 듣기로, 그 이기창이란 사람은 얼굴만 뻔지르르하게 잘 생겼을 뿐, 하는 일이 없는 건달이라 하옵니다.”
“하는 일이 없다니? 그는 고려여관을 훌륭하게 경영하고 있다지 않느냐?”
이진영은 잠시 뜸을 들이다가 다시 은근히 물었다.
“이해고와 고조영이 네 곁에 있는 것을 나도 안다. 이해고나 고조영도 훌륭하지만, 그들은 이 나라 안에서 아직 견고한 터전을 얻지 못했다. 네가 만일 이기창과 맺어진다면, 내가 이 나라에서 운신의 폭이 넓어지고 우리 가문의 지위도 더욱 공고해질 것이다.”
한참 후 이루하가 대답했다.
“제게 심사숙고할 기한을 주세요. 하지만 고려여관을 생각하면 지금도 울화가 치밀어요.”
“그건 잊어라. 그분들은 자기 잘못이 아닌데도, 자기 여관에서 일어난 일이라 진심으로 사과하지 않았느냐?”
“하지만, 뭔가 석연찮은 게 많아요.”
“뭐가 석연찮다는 거냐?”
“의문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에요. 그 난리가 일어났는데도 여관이 조용했던 점, 나에게 덤비던 사환의 의문사, 독연기와 독사들의 출현, 여러 사람이 우리에게 덤빈 것······.”
“그건 죽은 사환이 너에게 흑심을 품고 몇몇 동료들과 일으킨 사건이라고 이다조 장군이 친히 설명하지 않았느냐? 그리고 여관 내의 가담자들과 거짓 증언자들에게는 태후마마께서 응분의 처벌을 내리시지 않았느냐?”
“우리가 여관에서 나온 후, 자기들끼리 다투다가 우발적 살인이 일어나고 살인자가 도망갔다는 이야기는 너무 어설퍼요.”
“그건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하지만 사람의 말을 지나치게 의심해도 안 된다. 세상에는 참 어이없는 일들, 도저히 일어날 것 같지 않은 일들이 자주 벌어지는 법이니라. 게다가 사건의 주동자들은 고려여관에 사환으로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은 화하華夏인들이라고 하지 않았느냐?”
이루하는 말없이 깊은 생각에 잠겼다. 한참 후에 입을 열었다.
“지금은 머리가 복잡하니 그 얘긴 나중에 하기로 해요.”
그러나 그들은 꿈에도 모르고 있었다. 그 모든 일의 배후에 처음부터 끝까지 무 태후의 치밀한 계산이 존재했다는 사실을.
(다음 장으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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샬롬.
2024. 1. 5. 겨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