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좌근(金左根)
자(字):경은(景隱)
호(號):하옥(荷屋)
시호(諡號):시호(忠翼)
출생(出生):17979정조21)
졸년(卒年):1869(고종6)(향년73)
제임기간: 제233대 영의정(5년10개월11일)
1853년 4월 3일-1859년 2월 14일(음력 철종 4년 2월 25일-철종 10년 1월 12일)
제235대영의정(7개월3일)1863년10월20일-1864년5월23일(음력철종14년9월8일-고종1년4월18일)
부(父): 영안부원군 김조순(永安府院君 金祖淳,1765~1832)
모(母): 청양부부인 청송 심씨(靑陽府夫人 靑松沈氏,1766~1828)
부인: 정실-해평윤씨 윤치승(尹致升)의 딸,
첩실-나주부인 양씨(羅州夫人 梁氏)
자녀: (양자)-김병기(金炳冀)
조선 후기의 권신이자 세도정치의 마지막 집권자로 안동 김씨가 주도하는 세도정치의 중추였던
김조순의 3남이며 순조의 비인 순원왕후 김씨의 동생이다.
신 안동 김씨의 수장으로서 헌종, 철종 시기 세도의 정점에 선 인물이었다.
아호는 하옥(荷屋).그래서 이 시대를 다룬 사극에서 '하옥대감(荷屋大監)'이라고 하면 이 사람을 일컫는다.
가족관계
5대조부 : 영의정 충헌공(忠獻公) 김창집(金昌集)
고조부 : 우부승지 증 의정부좌찬성 충민공 김제겸(金濟謙)
증조부 : 증 의정부좌찬성 김달행(金達行)
할아버지 : 서흥부사(瑞興府使) 증 영의정 김이중(金履中)
아버지 : 영안부원군(永安府院君) 김조순(金祖淳)
어머니 : 청양부부인(靑陽府夫人) 청송심씨(淸松沈氏)-심건지(沈健之)의 딸, 심풍지(沈豊之)의 조카딸
형님 : 돈령부판사(敦寧府判事) 김유근(金逌根)
조카 : 어조참판 김병주(金炳㴤) - 생부 : 김홍근(金弘根)
형님 : 증이조판서(贈吏曹判書) 김원근(金元根)
조카 : 형조판서 김병지(金炳地)
누나 : 순원왕후(純元王后) 김씨(金氏)
매형 : 순조대왕(純祖大王)
조카 : 익종대왕(翼宗大王=효명세자)
정실 : 정경부인(貞敬夫人) 윤씨(尹氏)
양자 : 좌찬성(左贊成) 광주부유수 김병기(金炳冀)-생부:김영근(金泳根)
첩실 : 나주부인(羅州夫人) 양씨(梁氏), 별칭은 나합(羅閤)
생애
1825년 순조가 김조순의 회갑을 축하하는 의미에서 6품직에 제수했는데,
자기 실력이 아니라 아버지 빽으로 벼슬을 받은 것을 본인도 부끄럽게 여겼는지
순조 시대에는 이렇다 할 벼슬살이를 하지 않았다.과거도 뒤늦게 급제했는데
이 때가 헌종 4년인 1838년으로 그의 나이 42세였다. 하지만 그 뒤부터 폭풍 승진을 했다.
벼슬길을 시작한지 4년도 되지 않는 사이에 부교리,규장각 직각,이조참의,이조참판 등을 거친 끝에
오늘날의 장관급에 해당하는 공조판서와 이조판서까지 오르게 된다.
이 무렵은 김좌근의 누나인 순원왕후가 어린 헌종을 대신하여 수렴청정을 하던 시기였는데
순원왕후는 오빠인 김유근이나 6촌 김홍근 등을 대표로 하는 친정 형제들의 자문에 의지하여
수렴청정을 펼쳤고 김좌근 역시 순원왕후의 자문역을 맡아서 중용된 것이다.
그러다가 형 김유근은 헌종 재위 중에 중풍에 걸려 2년 후 죽을 때까지 자리를 보전하게 되었고
김유근 대신 6촌형인 김홍근이 뒤를 이어 실세로 자리잡나 싶더니 김유근이 1840년에 죽고
김홍근도 2년 뒤인 1842년에 죽게 되면서 그 뒤를 이어 안동김씨 세력의 리더가 되었다.
젊은 시절이야 어쨌든 꽤 운이 좋은 남자. 아버지 김조순이 전면에서는 겸손하게 처신했으면서도
막후에서 정치적 영향력을 발휘하며 정국을 움직였다면 형 김유근도 그랬지만 김좌근 역시 전면에 나서서
정국에 영향력을 행사했으며 반대파들을 숙청하면서 입지를 다졌다.
그러다가 순원왕후가 수렴청정에서 물러나고 헌종이 장성하면서
외척들인 안동김씨나 풍양조씨 세력이 아닌 사람들을 5군영 대장에서 배제하는 것부터 시작해서
요직의 인사에도 안동김씨나 풍양조씨 세력을 배제하는 움직임을 보였고
김흥근을 탄핵하는 신하에게 힘을 실어주며 안동 김씨에게 쫓겨난 이들을 재등용하는 등
안동김씨를 제어하려는 움직임을 보이면서 위기를 맞는 듯 했으나 헌종이 일찍 죽는 바람에 위기를 넘겼다.
헌종이 후사 없이 죽고 철종이 즉위하면서 순원왕후가 다시 수렴청정을 하게 되자 김좌근의 입지는 더욱 강화되었다.
철종의 왕비인 철인왕후도 안동김씨에서 나오게 되면서 김좌근은 가문에 반대하는 신하들을 철저히 숙청하고
영의정을 3회나 역임하여 권력을 독식했다.
이어서 조정의 요직까지 안동 김씨 일문들이 거의 독식하게 되면서 조선의 정치판은 완전히 막장이 되고 만다.
이 때가 그의 전성기로 김좌근의 집은 눈도장을 찍으려고 벼슬 청탁을 꾀하는 사람들로 문전성시를 이루었으며
매관매직까지 공공연히 행해지고는 했다.
그의 세도기에는 국가 경제와 민생이 파탄나 삼정의 문란으로 각지에서 민란이 많이 일어났고
조선은 국가 막장 테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하지만 김좌근은 민생에는 그리 관심이 없고 권력의 유지에만 집착했으며 삼정의 문란을 개정하기 위해 설치된
기구인 삼정이정청(三政釐整廳)의 총재관이 되기도 했으나 사실 삼정의 문란 최대 수혜자가 바로 자신의 가문
이었던만큼 김좌근이나 그 세력이 이를 개혁하지 않는 것은 당연지사.야사에 의하면 김좌근에게는 나주 출신의
기생 첩인 양씨가 있었다.
김좌근이 이 첩을 총애했던 나머지 당시 벼슬을 원한 사람들은 김좌근을 만나지 못하더라도 양씨에게 청탁하기도 했고
양씨의 마음에 들면 그녀가 김좌근에게 잘 말해줘서 벼슬을 할 확률이 높았다고 한다.
그래서 그녀의 별명은 '나주 출신 정승'이라는 의미의 '나합(羅閤)'이었다.
당시 세도가나 정승들을 부를 때 그 사람의 성이나 사는 곳에 ~합(閤)이라는 호칭 을 붙여 부르기도 했다.
나합은 배짱도 대단했는지 김좌근이 나합에게 "세상 사람들이 왜 그대를 나합이라 부르는지 아는가?"라고 묻자
나합은 "나주 조개(蛤, 조개 합)라는 뜻이지요"라고 받아쳤다고 한다.
무슨 의미인지는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야사 중에는 훗날 권력을 장악한 흥선대원군이 괘씸죄로 양씨에게
"감히 기생 출신인 주제에 정승이나 쓰는 나합 호칭을 사용해?"라고 꾸짖자 저 대답을 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70세가 다 되어서 다음 세대인 김병학, 김병국, 김병기 등이 새로운 권력의 핵심으로 슬슬 떠오르는 상황에서
고종이 즉위하고 흥선대원군이 집권하게 된다.
흥선대원군은 그와 안동 김씨의 절대 권력은 뺏었지만 명예는 빼앗지 않았는데 심지어 신하로서 최고의 영예인 안석과
궤장을 하사받기도 했다. 말년에 명예직만 맡으면서 권세는 많이 꺾이기는 했지만 조정 원로로 대접은 다 받은 셈.
신정왕후 조씨의 명으로 고종을 모시러 온 신하이기도 했으니 권력에서는 물리더라도 명예는 챙겨줬어야 할 것이다.
김좌근은 영의정에서 물러난 후에도 <철종실록>의 총재관을 맡았고 말년에는 기로소에 들어갔으며,
영삼군부사, 영돈녕부사를 맡았으며 영돈녕부사인 상태에서 죽었다.
뒷세대인 김병학,김병기,김병국도 조정의 요직을 맡아 흥선대원군의 개혁을 뒷받침했고
흥선대원군 역시 김좌근을 나쁘지 않게 대접했으며 김좌근이 죽자 그 묘비명을 직접 써 주기도 했다.
결국 전체적으로 평가하면 나라를 제대로 망치고 누릴 것은 다 누리고 간 간신.
정말 평생에 걸쳐 운이 좋은 인물이었다고 할 수 있다.
행장이나 묘비명 등에는 "공명정대했다", "도량이 넓었다" 등의 찬평을 받고 있고
<고종실록>의 김좌근 졸기에서 고종은 교지에서 '바른 몸가짐과 공평한 지조를 갖추었다'고 평했는데,
이런거야 원래 립서비스로 해 주는 표현이고 실제로는 김좌근의 행위가 조선에 결과적으로 악영향만 끼쳤다.
특히 이런 립서비스들과는 달리 정작 누나인 순원왕후는 김좌근에 대해,
"남의 말을 잘 안 듣는 흠이 있다"고 꼬집은 바 있다.
자기 누나에게도 "남 말 안듣는다"고 까인 사람을 공명정대했다고 찬평해 준 것을 보면 위화감이 심하다.
립서비스를 해 준 사람 중 1명이 바로 흥선대원군이라는게 아이러니다.
그의 묘는 경기도 이천에 있었으며 김좌근의 묘에도 사연이 있는데 이천에 김좌근 고택이라는 유적이 있다.
이 고택 뒷산이 바로 안동김씨 일문의 선산으로 양자인 김병기도 죽은 뒤 김좌근의 묘 근처에 묻혔었다.
그런데 그 묘가 쥐도 새도 모르게 이장이 되었는지 원래 묘가 있던 자리에는 묘가 없어지고,
묘에 세워져 있던 묘비나 석물만이 김좌근 고택 마당에 세워져 있었다고 한다.
그 후 2009년에 김좌근 고택과 그 주변 땅들을 안동 김씨 문중이 서울대학교에 기증했고 서울대학교에 의해
안동 김씨 일문의 묘역 복원을 마쳐서 김좌근 묘는 김좌근 고택 뒷산에 있다.
그래서 오늘날 김좌근 고택은 서울대학교가 관리하고 있고,
김좌근 묘역에서 발견된 석물들은 서울대학교 박물관의 주변에 세워져 있다.
여담
야사나 사극 등에서는 주로 상갓집 개 시절의 대원군에게 굴욕을 주다가
대원군이 집권하자 데꿀멍하고 복수를 당하는 인물로 나온다.
유명한 일화 중 하나는 김좌근이 교자를 타고 가다가 흥선군이 술값을 달라고 구걸을 하자 엽전을 땅바닥에
던져주고 제 갈 길을 갔다는 일화가 있다. 이 때 흥선군 뿐만 아니라 김좌근 주변에 있던 종자들까지 그 엽전을
주우려고 실랑이를 벌였다고 한다.
흥선군이 김좌근을 찾아갔을 때 이러한 일화가 있다.
김좌근이 애첩인 나합 양씨와 함께 있었는데, 본래 그녀가 기생인지라 당시 양반들이 아무리 청탁을 하더라도
나합에게는 절을 올리지 않았다.
그런데도 흥선군은 스스럼없이 나합에게 큰절을 하며 "형수님"이라고 부르며 존대를 했다고 한다.
그래서 나합도 흥선군을 좋게 보았고 김좌근도 조카인 김병국, 김문근에게 흥선군을 후히 대하도록 했고
이들도 시키는대로 했는데 김좌근의 양자 김병기만이 흥선군을 경솔한 사람으로 보고 흥선군을 예의를 갖추어
대우하지 않았다고 한다.
나합 양씨의 경우 극도의 사치스러운 행적을 묘사한 야사들이 몇 개 존재한다.
강의 물고기들에게 적선을 한다며 쌀밥을 몇 가마니나 해서 강에 뿌린다거나 하는 식이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고향으로 전해진 나주에서는 평가가 썩 나쁘지는 않다.
야사에 따르면 나주에 기근이 들자 양씨가 김좌근에게 요청해서 구휼미를 풀어 나주 사람들을 구했다는
이야기도 있을 정도. 그 때문인지 나주에는 유일하게 김좌근을 기리는 비석이 있다.
김좌근의 아들 김병기는 사실 먼 친척 김영근의 아들로 김좌근이 후사를 잇기 위해 김병기를 양자로 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