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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국 베트남 가족모임 원문보기 글쓴이: [벌교]바람초
상기 자료는 베트남 참전용사(해병 197기) 선배님의 블러그에 올려진 내용들 입니다.
2월경 "다낭-호이안-훼" 4박 5일 관광을 하였지만 베트남 가이드의 설명을 이해 할수가 없어 눈으로만 느낀 베트남역사가 무척 답답하였는데...
우연히 블러그를 접하게 되어 한벳가정의 가장으로서 공유 하고싶어 선배님에게 요청하였더니 메일로 보내주어 아내의 나라 베트남 역사를 함께 이해 하고자 합니다.
고개및 - 마지막 응우옌왕조 후예궁궐 !!
다낭은 베트남 쾅남다낭주(州)의 주도(州都)로 베트남 쾅남의 중심지로 남중국해에 닿은 주요 항구로, 구 남베트남의 군사적 요충지였습니다. 프랑스령 시대에는 안남 왕국 내의 프랑스 직할 식민구역으로 투란이라고 하였고 1965년 3월 베트남 참전의 미국 파견군이 이 항구를 상륙지점으로 하였고 또 한국의 청룡부대가 주둔하였습니다. 부근에는 참족 왕국의 유적과 유물이 있는 베트남의 제4의 큰 도시입니다.
하이반패스로 가는 산악도로가 시작되고 오른쪽에는 베트남 참전 당시의 미군 유류 탱크가 녹슨 채 보입니다.
하이반패스의 고갯길은 험란한 전략요충지 도로로서 그 우열을 가름하기가 힘들게 무척이나 험난한 길입니다.
북위 17도선을 남하하여 후에를 지나 이 하이반패스를 점령당하면 다낭은 그야말로 지척간두에 적과 대치해야하는 전략적 요충지가 아닐 수 없으며 이 하이반 패스에 베트콩의 출몰과 게릴라전은 끊임없이 미군을 괴롭혔을 것이 분명하였습니다.
해안가를 따라 저 아래는 후에로 가는 보급품을 조달하는 철로와 터널이 있고 주위는 정글로 우거져 있으니 지금도 그시절의 적들이 일순간에 출몰할 것만 같았습니다.
한참을 꼬불거리며 길을 숨가쁘게 달려 오르니 드디어 하이반 패스 정상을 오를 수 있었습니다.
베트남전쟁 때에는 이 고개를 오르면서 사주경계와 엄호사격으로 주위가 요란하게 총성을 울렸겠지요.
참으로 무서운 하이반패스였을 거라고 생각되었습니다.
저가 관광할때는 터널이 완공되어 터널를 통과 하였습니다.
벳남은 오토바이가 대중 교통수단인데 오토바이가 통행을 할수 없어 트럭에 오토바이를 싣고 터널끝에서 오토바이를 인수를 하더군요.
물론 사람은 버스나 트럭으로 이동 하겠지요?
하이반 패스는 다낭과 후에 사이에 있는 해발 900m의 고개로 내셔널 지오그래픽 트래블러(NATIONAL GIOGRAPIC TRAVLER)가 선정한 여행자가 꼭 가봐야 할 곳 50곳 중 하나에 포함된 곳이기도 합니다.
세계 8대 비경의 하나인 ‘하이 반(Hi Van) 고개는 베트남어로 하이(Hi)는 바다를, 반(Van)은 구름(CLOUD)을 의미하여 ‘구름 낀 바다의 고개’를 뜻한다고 합니다. 해안도로를 따라 산길 정상에 오르면 고개의 남쪽으로 멀리 다낭시가지와 해변이 보이고 북으로는 후에의 랑코비치와 마을이 바라다 보입니다. 고개를 경계로 베트남의 남부와 북부로 나누어지며 베트남전쟁 당시에는 치열한 전투가 벌여졌던 곳이기도 합니다.
하이반 패스 정상에서 옛날 영화의 성곽문과 베트남전쟁으로 어쩔 수 없이 생긴 벙크가 공존하면서 서서히 허물어지는 유물을 바라보면서 역사의 잘못된 만남의 현장을 지켜보는 우리의 마음은 착찹하기만 했습니다.
하이반패스 정상에서 북으로는 더 아름다운 비경이.....
산을 돌아 꼬불거리며 하이반패스는 이어집니다. 이 고개로 부터는 후에의 행정구역으로 이제는 전쟁의 포화는 사라졌으나 베트남을 사랑하는 노병들에게는 아직도 저 멀리 피어오르는 연기 속에서도 포성이 들리는 듯합니다.
랑꼬비치(Lang Co Beach)는 다낭공항에서 약 35㎞ 떨어진 곳에 있으며 북쪽의 후에서는 80㎞ 거리에 있습니다.
길게 튀어나온 랑꼬반도 끝 부분의 하얀 모래 위에 랑꼬마을이라고 불리는 작은 어촌이 있습니다. 예전에는 랑꼬마을은 한센병 환자들이 격리되던 곳이었으나 지금은 한센병이 완치된 평화로운 마을입니다. 랑꼬비치는 석호(lagoon)를 이루는 모래 언덕인데 길게 늘어선 반도의 모양을 하고 있습니다.
석호는 어선들이 정박할 수 있는 천혜의 항구를 이루고, 사구 바깥에는 수 킬로미터의 백사장이 이어져 있습니다.
후에에서 다낭을 올 때 왼쪽에 펼쳐진 낙원과 같은 마을이 랑코비치였습니다. 이곳은 푸른 바다와 하얀 모래가 펼쳐진 아름다운 곳으로 베트남에서도 손꼽히는 풍광을 가진 곳으로 해변에는 랑꼬리조트가 있고, 수영과 낚시, 등산 등을 즐길 수 있답니다.
후에(HUE-順化)는 17세기부터 19세기까지 베트남의 남부전역을 통치했던 봉건 왕조인 응우옌 왕조의 수도였다.
응우옌 왕조 또는 완조(Nhà Nguyễn 家阮 가완)는 베트남의 마지막 왕조였습니다.(1802년부터 1945년까지)응우옌 왕조가 멸망하는 1945년까지 후에(HUE)는 베트남의 수도였습니다.
후에 궁궐의 평면도 궁 바깥으로는 허응(香)강의 강물을 끌여들여 15km의 해자를 만들어 외부와 차단시켜 성곽 내부를 보호하였다.
후에궁을 들어가기전 넓은 광장에는 3단의 넓은 기단이 있고 그 가운데는 베트남 대형 국기가 나부끼고 있다.
1809년에 처음 세운뒤 손실된 것을 1966년 복원하여 현재에 이른다고 합니다.
3단의 첫째단은 자연, 둘째단은 인간세계, 세쨋단은 천국을 의미한다고 하나 이해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Ngọ Môn – Noon Gate(성문) 성으로 통하는 주출입문로 성문위에는 망루를 세워 외부의 동태를 볼 수 있도록 누각을 세워 놓았습니다. 성문은 정면에 3개의 문이 있어 가운데 문은 황제가 양쪽문은 신하나 외교사절이 사용하는 문이 있다. 양쪽 측면에는 각 1개씩 아치 모양의 큰 문이 문이 있는데 이곳은 코끼리가 드나드는 문이다.
관광중 두마리 코끼리가 있어 신기했는데 이글을 읽고 이해 하였습니다.
Gate(성문)을 통과한 관광객이 과거에는 황제만이 사용하던 중앙 다리인 Trung Dao Bridge(쯩다오 다리)로 성곽 안 궁전으로 들어오는 모습
Sân Đại Triều – Esplanade of Great Salutation- 왕위 즉위식 때 문무백관과 궁전을 내방하는 외교 사절이 대기하는 장소(마당) 이곳에는 정1품에서부터 품계석이 품계별로 세워져 있다. 지붕은 황제를 상징하는 황금색 기와로 치장하였다.
Điện Thái Hoà – Place of Supreme Harmony(태화전-太和殿)-왕위즉위식과 외교사절을 접견하던 궁전
태화전의 내부 모습 용좌가 있고 송나라시대 중국으로부터 전수된 도자기 기술로 빚은 대형 도자기 비치되어 있다.
태화궁전 화재를 대비한 청동으로 만든 대형 수전이 2개 놓여 있어 목재 궁전의 화재를 대비하였고 황제를 상징하는 용상을 세워놓았는데 용의 발톱은 5개로 황제를 상징하는 권위를 세웠습니다. 응우옌 왕조는 중국만 사용하는 황제 칭호와 황제를 상징하는 용상을 사용함으로써 베트남의 자존심을 지킨 왕조였음을 알 수 있다.
Tả vu, Hữu vu - Left House, Right House 태화전을 지나고 나면 300평 가량의 넓은 마당이 펼쳐지고 마당 양편에 두 건물이 있습니다. 비슷한 모양의 두 건축물은 태화전의 행사나 관리들이 행사를 준비하던 곳으로 보이나 오늘날에는 격에 맞지 않는 민예품 판매나 기념사진 촬영 장소로 전락하여 상업화로 퇴색되어 운영되고 있습니다. 공산주의 사회의 자본주의 잠식화를 엿볼 수 있습니다.
태화전 마당에서 내전을 통하는 길목에는 그옛날 은은한 베트남의 궁중음악이 울려퍼지고
민속 무용단이 우화한 춤사위로 천년 사직을 비는 무용단의 나래짓이 풍기던 그 무대에는
비트음악에 익숙한 젊은이들의 현란한 몸부림이 난무하고 있었습니다.
베트남왕조에서는 가림 문화가 분명하였습니다. 현세와 내세간에 가림이 있고 남녀에 가림이 존재하고 평민과 황제간에도 가림이 분명했습니다. 역시 태화전과 황실 내전과도 가림막이 가리워져 있으면서 거기에는 일부 권력자에게만 통용되는 문이 있었습니다. 내전을 통하는 이문을 지나면 우리 일행은 그야말로 아연실색 할 수 밖에 없습니다.
동그마니 홀로 남은 청동 수정(전)은 쇠붙이이니까 차마 불에 탈 수 없어 지금도 그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일 까요?
황제의 집무실과 사저와 침전은 모두 사라지고 황성의 옛터만 남았으니 안타깝기 한량 없습니다.
역사적 고찰에 의하면 베트남 전쟁 당시, 후에는 북베트남과 남베트남의 경계에 매우 가까운 곳에 위치하였고 매우 중요한 요새 역할을 하였습니다. 후에는 그경계의 남쪽 즉 남베트남에 속해 있었는데, 후에 전투(Battle of Hue)에 속하는 1968년 뗏(Tết) 공세 때, 이 도시는 물리적으로도 심각하게 피해를 입었을 뿐만 아니라, 그 명성도 손상되었습니다.
역사적으로 유서 깊은 건물에 미군이 폭격을 가하여 역사적인 유물과 유적이 송두리째 파괴되었다고 하나 오히려 문화유적을 이용한 피신시설로 악용하여 이곳에 주둔한 공산세력이 궤멸됨과 동시에 문화재를 스스로 훼손하고는 이민족(미군)의 침략으로 훼손되었다고 위장하여 선전함으로써 민족 감정을 자극하는 도구로 이용되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실제 미군이 후에 왕궁에 주둔한 적군을 토벌하면서 중화학무기 사용을 자제함과 동시에 개별 병사 들을 투입하여 오히려 많은 희생자를 내었다고도 합니다.
무엇이 옳고 그러고 간에 전쟁은 엄청난 잘못이라는 것을 우리에게 선연히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전쟁이 없었다면 자주국으로서 베트남의 자존심의 상징이 살아 있을 것이고,전쟁이 없었다면 누구의 자잘못을 따질 필요도 없었을 텐데.... 내실에 부속되어 동서에 하나씩 있던 황실의 두 정자만이 남아 찾아오는 관람객이 잠시 쉬어가는 쉼터가 되었단 말인가?
후에의 역사를 되돌아보는 사색의 쉼터란 말인가?
이곳은 태화전의 정반대 방향에 있으면서 12. Lầu Kiến Trung -NGUYEN TRUNG KIEN
왕의 Pavillion(사저)로 사용했던 장소로 건물은 허물어져 사라지고 지반만 남은채 폐허였습니다.
이 황량한 황성 옛터는 관리자가 눈에 띄지 않고 유물은 관람객이 데리고 온 아이들의 장난감으로 그 누구도 이런 행위에 대하여 제지가 없습니다. 한마디로 방치한 상태입니다.
베트남을 방문한 사람은 누구나 느끼는 바이지만 관공서 특히 금색 별의 휘장이 붙은 관공서는 현대식 건물에 통제도 엄격합니다.
일반인이나 외국관광객은 절대 출입금지하면서 으리으리하게 꾸며 놓고는 그들의 정신적 전통문화시설에는 너무도 소흘한 것이 공산주의의 전통을 이어간다고 정의내렸기 때문일까요?
봉건주의 타파를 아직도 끝내지 못해서일까요?
공산주의 통일후 공산주의 세력에 의하여 악명높은 후에학살(massacre at Huế)이 자행되었습니다.
전쟁이 끝나고 난 뒤에도 "봉건 시대의 유산"이라는 이유로, 역사 유적 복원과 봉건 유적에 대한 관심이 미비하여 방치되었을 뿐 아니라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가난한 나라의 문화재 복원은 드디고 황폐화된 유적은 겨우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전쟁은 베트남의 역사적, 문화적 유물이자 그민족의 정신적 자취도 황폐화시키는 현장을 보는 우리 일행에게는 그렇게 명쾌한 기분은 아니었습니다.
허응강을 사이에 두고 남쪽은 신시가지가 형성되어 있고 북쪽은 강 건너 붉은 깃발이 보이는 저곳은 베트남의 마지막 왕조였던 응우옌 왕조 후에 황궁이 어렴풋이 보입니다.
후에 황궁의 측간에는 태왕태후와 황태후를 위한 별관이 있었습니다.
황궁이 황량하게 파손된 것과는 달리 이곳은 목조 기와로 지으진 단아한 가옥으로
빛은 다소 바랬지만 집 주위는 정원과 연못으로 잘 꾸며져 있었습니다.
황태후가 내방객을 맞이한 접견장소도 공개되어 있었습니다.
그 부속 건물 중에는 아직도 파손된채 복원하지 않고 고스란히 방치하고는 이는 베트남 전쟁과 뒤이어 온 태풍으로 궁전의 일부가 파손되었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이들이 거처하던 곳에는 당시에 그들이 숭상했다는 조상신과 신에 대한 종교 시설이 아직도 남아 있었습니다.
이곳은 황실의 질병을 관리하던 곳입니다. 황실 크리닉센터라고 해야 할까요?
아마도 프랑스의 신식병원이 처음 황실을 통하여 전래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내부는 공개되어 있지 않아 볼 수는 없었다.
황실 측근의 태왕태후와 태황후의 처소의 벽에는 그들을 상징하는 그림과 문양이 아직도 전수되고 있었습니다.
한 때 황실의 칭호를 걸고 열강의 틈바구니 속에서 종묘사직을 붙들고 힘겨워했을 베트남의 마지막 황실은 그나마 곳곳이 전쟁으로 허물어져 복원되지 못한 채 역사의 한 편으로 점점 멀어져가는 것이 못내 아쉬움으로.....
티엔무 사원(The Thien Mu Pagoda)은 후에에서 5km떨어진 흐옹 롱(Huong Long)마을 허응강(Perfume River- 香江)가에 있는 사원으로 1601년에 건축되었고 그 후 몇 차례의 재건축을 거쳐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사원의 이름은 전설에서 유래 되었는데, 오래전 신성한 여인(heavenly lady)이 현재 사원이 있는 언덕에 나타나서 주민들에게 말하길 "왕이 나라의 번영을 위해 이곳에 불교사원을 지을 것이다"라고 예언하였다고 합니다. 그것을 전해들은 응우엔 호앙(Nguyen Hoang)왕은 “신성한 여인(heavenly lady)”의 사원을 건축하라고 명령하여 지금의 자리에 사원이 세워졌다고 합니다. 법당에는 3부처를 모셔놓았는데 그 부처는 과거, 현재, 미래의 부처를 의미한다고 하나 속인에게는 구별이 가지 않았습니다.
사원에 있는 푸옥 유엔탑(Phuoc Duyen Tower)-처음에는 뜨 년(Tu Nhan)탑이라고 불렸습니다- 은 1884년에 티유 찌왕(King Thieu Tri)에 의해 건축되었으며 이 팔각 탑은 7층으로 높이가 21m에 이르릅니다.
1963년 6월 11일 사이공에 있던 미국 대사관 앞에서 티엔무 사원(The Thien Mu Pagoda)의 주지였던 대승려 틱꽝득(Thick Quang Duc)이 미국으로부터의 베트남 전쟁과 월남 독재정권의 반불교 정책에 항거하는 소신 공양으로 자신을 불사를 때 타고 갔던 차량이 보관되어 있었습니다.
탑의 양옆에는 정자가 두 개씩 있는데 오른쪽 정자에는 대리석으로 된 거북과 비석이 안치되어 있고, 왼쪽 정자에는 비석과 소리가10km 멀리까지 이른다는 범종이 안치되어 있습니다.
유유히 흐르는 허응강(Perfume River-香江)을 내려다보는 티엔무 사원(The Thien Mu Pagoda)은 가히 후에(HUE)의 공식적인 심볼이라 할 수 있습니다
카이딘 황제의 능(Tomb of Khai Dinh)
카이딘(Khải Định 啓定 계정, 1885년 10월 8일 ~ 1925년 11월 6일)은 베트남 응우옌 왕조의
제12대 황제(재위:1916년~1925년)이자 안남 왕조의 초대왕(재위:1923년~1925년)이었습니다.
카이딘의 후대 황제는 베트남의 마지막 황제로 1955년 프랑스에 망명하여 생을 마감하게 되는 바오다이 왕의 선대입니다.
Khai Dinh 황제는 1916년에서 1925년에 걸쳐 통치한 황제인데 이 능은 1920년에 건축을
시작하여 1931년까지 약 11년이 걸렸습니다. 이 능은 다른 능과는 달리 유럽식이 많이
가미되었는데 현란하고 섬세한 고딕 양식의 석조건물과 첨탑들이 특이합니다.
묘지를 지키는 석상들에서도 유럽인의 모습을 찾아볼 수 있어 프랑스의 식민통치가
매우 심화되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중앙에는 다른 능과 마찬가지로 바오다이 황제가 그의 아버지 카이딘 황제를 위해
세운 공덕비가 위용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능 내부에는 카이딘황제의 용좌에 앉은 모습의 황금상을 배치하여 놓았으며 용좌 뒤에는
향과 제물을 바치는 제단을 만들고 그뒤에는 시신을 안치한 것으로 보입니다.
본관 내의 도자기 모자이크는 현란함의 극치이다. 또한 카이딘 황제의 사진, 동상,
무덤이 독특한 양식으로 황홀할 정도로 아름답습니다.
능내부에는 카이딘 황제의 실제 크기의 동상과 당시에 활동한 모습을 담은 사진자료,
가구 집기들이 전시되어 있었습니다.
응우웬왕조의 마지막 황제로서 프랑스의 식민지 말기의 왕릉에 대하여 최대한 지원하고
옹립하는데 최선을 다한 것이 일제시대의 한민족 말살정책과는 다소는 다르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이곳은 투덕황제가 살아서는 궁궐이요 사후에는 무덤이 된 곳이기도 한 투덕 황제의 능 입구... 투덕은 3대왕 민망 황제의 뒤를 이은 응우웬왕조의 4대왕으로 1848년부터 1883년까지 재임기간이 가장 긴 약 35년 동안 통치한 왕입니다. 이 투덕 황제의 궁궐이자 능인 이곳은 그의 호사스런 생활에 걸맞게 재임 기간 중에 3,000여 명의 병사가 약 3년에 걸친 공사 끝에 1867년에 완성하였답니다.
궁의 입구를 지나 오른 쪽에는 큰 인공호수인 루 키엠(Luu Kiem) 연못을 만나게 됩니다.
여름이면 이 호수에 연꽃이 만발하고 연꽃잎에 맺힌 이슬을 받아 차를 달여 마셨다는 투덕황제 저 정자에서 시경에 잠기고 104명의 후궁을 거늘이고 노닐었다는 투덕 황제 끝내 후손이 없었답니다.
루 키엠(Luu Kiem) 연못의 정자에서 바라보면 오른쪽으로 겸궁문(謙宮門)을
지나면 노란색 지붕의 웅장한 황궁이 나타납니다.
이 시기는 프랑스에 식민지화되어 가는 어려운 시기였음에도 투덕 황제는 정세에는 어두웠으며 타고난 왕권이었지만 물려줄 후대가 없음을 안타까워하며 자신의 호사스러운 생활에 탐닉하지 않았나 생각이 들기도 하였습니다.
3,000여명의 군사를 동원하여 연못을 파고 궁을 세우는 역사를 서두르다보니 반역이 일어나 반역군을 제압하고도 끝내 3년만에 궁궐을 완성하였다고 하니 당시로서의 군주의 절대권력이 대단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 겸궁문(謙宮門) -
ㅡ 겸궁문(謙宮門)에서 바라본 루 키엠(Luu Kiem) 연못 ㅡ
겸궁의 안뜰을 지나면 투덕 황제를 추모하는 Hoa Khiem 사당이 있는데 투덕 황제가 기거하기도 하였던 곳입니다. 이 사원에는 황제와 황후가 쓰던 몇 가지 유품들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한 때는 이곳이 황제가 기거했던 궁궐이지만 이제는 황제를 모시는 Hoa Khiem이라고 불리는 사당으로서 황제와 부인의 위패가 모셔져 있습니다.
ㅡ 투덕황제 사당 내부 ㅡ
겸궁(Khiem Cung)을 끼고 오른쪽으로 돌면 황제의 묘지가 나오는데 거대한 업적비가 위용을 자랑하고 업적을 새기기 위한 비석은 이곳에서 상당히 떨어진 곳에서 5년여동안 운반하여 왔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이 석조 정자안에는 당시에 살아있던 투덕황제가 직접 지은 자신의 업적을 기리는 글을 새기도록 했다는데 자식이 없음으로 해서 후대에 자신의 업적에 대한 불안에서 서둘렀지 않았나 생각되어지고 자신의 잘못된 치적도 언급했다는데 그 내용을 모르는 우리는 그저 그렇구나하고 고개만 끄덕일 뿐입니다.
ㅡ 투덕 황제의 업적비 ㅡ
그러나 실제로 투덕 황제는 여기에 있는 능 안에 묻히지 않았다고 합니다. 도굴을 방지하기 위해 아무도 모르는 곳에 엄청난 보물과 함께 안장되었으며 이 때 참여하였던 200여 명의 일꾼들은 비밀유지를 위해 참수되었다고 합니다.
ㅡ투덕황제의 능 ㅡ
104명의 후궁은 저 굳게닫힌 왕궁의 후원에갖혀 바깥 세상과는 단절된채 역사속에 갖혀있는것 같았습니다.
- 3대 민망황제의 능 -
ㅡ투덕황제능 주변 정원의 소나무 숲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