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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구간 (고개를 넘고 넘어서)
청암골
둘레길 10구간의 양이터재에서 11구간의 존티재까지는 청암면을 가로지르는 구간으로 11구간의 대부분이 청암을 거쳐 가는 길이다.
그러나 내밀의 청암은 구경도 못하고 바깥만 거쳐 가는, 그래서 수박 겉핥기 식의 청암골을 학습하는 구간이다.
청암의 본질은 접근도 못한 채 외피의 제목만 일별하는 구간이라는 것이다.
어차피 본질을 파헤칠 능력이 되지 않는 한 그대로 넘어가는 것도 중용(中庸)의 한 방편이 되리라고 생각하면서도 고니를 그리려다 오리 정도의 그림이 된다면 성공이리라는 각곡유목(刻鵠類鶩)의 용기를 내어 개괄적 청암이라도 그려 보려는 과욕을 가져본다.
어쩌면 호랑이를 그리려다 도리어 개를 그리는 화호성구(畵虎成狗)의 우를 범할 수도 있으련만, 무식하면 용감하듯이 무모하게 접근해 보련다.
심산동(深山洞) 청암
청암은 이웃 악양과 마찬가지로 일곡일면(一谷一面)이다.
청암골은 북의 삼신봉에서 동・서로 갈라져 나온 산줄기 속에 깊숙이 들어앉은 심산유곡이다.
삼신봉에서 낙남정맥을 타고 양이터재를 거쳐 방화고지(668m)에 도착한 산줄기는 동향의 낙남정맥과 결별하고, 계속 남하하여 말티재를 거쳐 명호마을 앞의 청암천을 만나면서 청암골 동편의 산줄기를 마감한다.
그리고 삼신봉에서 서측으로 내삼신봉, 삼불재, 내원재를 거쳐 남향의 형제봉 능선과 결별하고 동남쪽으로 거사봉, 시루봉, 회남재를 거쳐 칠성봉에 이르러 구재봉으로 향하는 능선과 헤어지고 동남쪽으로 둘레길의 존티재를 거쳐 명호마을의 갈미봉에 이르면서 청암골의 서편 산줄기를 이룬다.
이렇듯 청암은 동・서가 산으로 꽉 막힌 좁고 긴 골이다.
그래서 삼신봉 남사면에서 발원한 청암천(국립지리원 발행의 1/25,000 지형도에는 횡천강으로 표기되어 있다)은 외길의 물줄기를 만들면서 청암골을 흐른다.
이 물길은 묵계리의 묵계지(黙溪池)에 산상호수를 만들었다가 다시 상이리・중이리의 하동호를 만들고는 횡천으로 흐른다.
다만 묵계지는 악양골의 농사를 위하여, 하동호는 하사지구(하동・사천의 일부 지역)의 농업용수를 공급하기 위하여 외길 청암천 물길의 예외가 되는 이타수(利他水) 샛길을 만들었다.
청암은 1703년 전국에 행정구역상 면을 둘 때에 처음으로 진주목 청암면이란 이름을 얻게 되었고 1906년 하동군 청암면으로 편입되었다.
그 이전에는 시천 또는 살천(현재의 산청군 시천면 일부지역)에 속해 있었다.
이곳은 세상에 특별히 알려진 곳도 역사적으로 존재감을 드러낸 적도 없는 조용한 은자의 은거지였다.
세상에서 깊숙이 숨어있었던 심산(深山)의 골(洞)이다.
이중환이 택리지에 “… 지리산 안에는 백리가 되는 긴 골짜기가 많은데, 바깥은 협소해도 안쪽은 넓어서 때때로 사람이 알지 못하는 곳도 있고, 나라에 세금이 바치지 않는 곳도 있다.”라는 이야기가 나온다.
나라에 세금을 바치지 않아도 모르는 곳, 존재하지만 그 존재가 드러나지 않은 깊은 곳, 이곳 청암골을 이르는 말이 아닐 런지?
(국립지리원 발행의 지형도에는 묵계에서 횡천까지의 하천을 횡천강(橫川江)으로 표기하고 있다. 그러나 청암정우회에서 발간한 ‘청암면지’등의 기록에서는 청암천으로 표기되어 있고, 현지인들 역시 청암천이라 부르고 있으며, 청암을 관통하고 흐르는 물줄기의 이름이 왜 횡천강(또는 횡천)으로 이름 지어졌는지 명확하지 않다. 그래서 나 또한 청암천이란 이름을 사용하기로 한다)
청학동 소고
청학동에 관한 최초의 문헌은 고려 후기 이인로의 ‘파한집’이다.
그는 이 책에서 “지리산 안에 청학동이 있으니 길이 매우 좁아서 사람이 겨우 통행할 만하고 엎드려 수 리(里)를 가면 곧 넓은 곳이 나타난다. 사방이 모두 옥토라 곡식을 뿌려 가꾸기에 알맞다. 청학(靑鶴)이 그곳에 서식하는 까닭에 청학동이라 부른다. 아마도 옛날 세상에서 숨은 사람이 살던 곳으로 무너진 담장이 아직도 가시덤불 속에 남아 있다”라고 하였으나 청학동을 끝내 찾지 못했다고 하였다.
청학동은 깊은 산간의 선경 및 동천복지(洞天福地)를 이상향으로 하는 도가류(道家類)의 신선사상에서 출발하였다.
태평시절과 태평한 땅에서만 나타나고 또 운다는 청학이 살고 있는 태평성대의 이상향을 옛사람들은 청학동이라 불렀으며, 조선시대에 이르러 선비들의 청학동 탐방이 유행처럼 번지기도 하였다.
그래서 조선 후기의 실학자 이규경은 “청학동은 조선조에 이르러 온 세상에 회자되어 모르는 사람이 없고 가 보지 않은 사람이 없다.”고 할 정도였다.
조선시대 김종직과 김일손, 유운룡, 남효온, 조식 등 수많은 선비들이 청학동을 찾기 위해 지리산을 탐방하여 유산기(遊山記)를 남기기도 하였다.
그들이 청학동이라고 주장하는 곳도 악양 매계, 불일폭포 주변, 세석평전, 화계 덕평 등 제각각이지만 끝내 찾지 못하였다는 솔직한 고백도 있었다.
청학동에 관한 설화, 전설 등도 풍성하다.
옛날 하동장에 신선같은 도인이 소를 사 가는 것을 보고 이상하게 여긴 어떤 사람이 그 신선을 몰래 따라갔다.
한참을 따라 가다보니 폭포가 나오고 동굴이 나왔다.
동굴을 지나 또 한참을 가니 청학이 날아다니고 별천지 선경이 펼쳐져 있으며 신선들이 살고 있었다.
따라간 사람이 가만히 생각해 보니 자기만 살 것이 아니라 가족들을 데리고 와서 함께 살면 참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집으로 돌아와 급히 살림을 정리하여 식구들을 이끌고 다시 길을 나섰으나, 도중에 길을 잃고 어디가 어딘지 영영 찾지 못하였다고 한다.
조선 중종 때의 문인 남추가 집안의 하인에게 편지를 주면서 지리산 청학동에 가면 노인 두 분이 있을 터이니 전하고 오라 하였다.
하인이 분부대로 청학동을 찾아가 보니 도인과 노승이 함께 바둑을 두고 있었다.
도인이 “내 이미 네가 올 줄 알았다.”라며 웃더니, 바둑을 끝내고는 답장과 함께 푸른 옥돌의 바둑알을 주면서 가라고 하였다.
하인이 청학동에 들어간 때는 9월이어서 낙엽이 날리고 가는 눈이 뿌리고 있었는데, 돌아 올 때는 봄기운이 완연한 2월이었다.
그동안 배고픈 줄도 전혀 몰랐는데, 벌써 반년이 흘렀던 것이다.
사람들이 말하기를 그때 청학동에서 바둑을 두던 도인은 최치원이요, 노승은 검단선사라고 하였다.
이 이야기는 실학자 이수광의 ‘지봉유설’에 실려 있다.
최치원은 청학동 이야기의 진원지답게 수많은 설화들을 가지고 다닌다.
그 중 최치원이 말년에 가야산과 지리산 청학동에 머물다 화개 신흥리 세이암에서 세속의 비속한 말을 들은 귀를 씻고, 불일폭포 부근에 갓과 신만 남겨두고 신선이 되어 사라졌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정감록’에는 “진주 서쪽 100리, (중략) 석문을 거쳐 물 속 동굴을 십리쯤 들어가면 사람들이 먹고 살 수 있는 드넓은 평지가 나오며, 식수와 농경이 가능한 석천(石泉)이 솟는다. 전란을 피할 수 있는 피난처 10곳 중의 하나이며, 이곳에 살면 무병장수하고 죽으면 신선이 된다.”라고 하였다.
청학동은 그 위치를 정확히 알 수 없는 가상적인 상상의 장소이지만 별유천지(別有天地)의 선경이 펼쳐진 은서지라는 점에서 조선조 정치적 이상과 현실의 괴리에 힘들어 하던 지식인들에게 동경의 대상으로 자리 잡게 된 것이다.
이 모든 것을 종합해 볼 때 청학동은 특정 지명을 거론하는 고유명사가 아니라 도연명의 무릉도원이나 토머스 모어의 유토피아적 이상향을 말하는 보통명사적 의미로 풀어야 할 것이다.
따라서 청학동은 예부터 피난・피화(避禍)의 보신지지(保身之地)를 의미하는 은서지이자 세속의 때가 묻지 않은 절승지(絶勝地)인 곳을 일컫는 말이 된다.
그렇다면 이곳 청암골 역시 이러한 요인들을 두루 갖춘 곳인 은서지, 절승지 중의 하나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청암 삼은동
정감록에 지리산 남쪽 기슭에 3은3점(三隱三店)의 피난처가 있다고 한다.
삼은동(三隱洞)은 고은동(高隱洞), 심은동(深隱洞), 농은동(農隱洞)이며, 3점리는 풍점리, 먹점리, 미점리를 가리킨다고 하는데, 이 중 삼은동은 청암에 자리하고 있어 청암 삼은동이라 한다.
고은동은 현재의 산청군 시천면 반천리에 있는 고운동(孤雲洞)을 일컫는데, 최치원의 행적과 관련이 있는 곳으로 과거에는 청암의 일부로 구분되었다.
고운이란 골 이름이 말하듯 고운의 은거지였음은 물론이다.
그리고 심은동은 현재 묵계저수지 오름길의 오른쪽 골짜기를 말한다.
청암의 깊은 골짝에 꼭꼭 숨어있다 하여 숨은동이라 부르기도 하며, 실제로 그 입구를 찾기가 쉽지 않을 정도이다.
지금도 속진이 범접하지 않은 절승을 가진 곳이다.
마지막으로 농은동은 중이리의 논골을 이르는데, 깃대봉과 칠성봉이 둘러쳐진 고원의 분지로 논이 많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하며, 지난 어떤 전란이나 난리에도 화를 당한 일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예부터 “진주의 피난지는 하동의 청암이요(晉州之靑岩), 청암 가운데서도 농은동이 제일이다(靑岩之農隱洞).”라는 이야기가 전한다.
그렇다면 청암골도 악양의 매계나 청학이골, 화개의 불일폭포나 의신・덕평과 같이 청학동으로 평가받을 충분한 요건을 가진 곳이라 할 수 있으며, 동천복지의 공간과 별유천지의 절승을 가진 귀하고 보배로운 곳임에 틀림이 없다.
그래서 푸른 바위인 청암(靑岩)과 푸른 학인 청학(靑鶴)의 이름을 가지게 된 것이리라.
현재의 청학동 - 유불선갱정유도, 삼성궁
청암면의 최북단 삼신봉 아래에는 청학동이라는 마을이 있다.
청암면 묵계리에 속한 행정마을 중의 하나로 진주암, 상불지, 가는골, 미륵골 등의 작은 마을이 포함되어 있다.
학동에서 상불지, 미륵골을 지나고 청학교을 건너서 돌아 오르면 만나는 마을이 진주암인데, 이곳이 소위 도인촌이라 부르는 청학동이다.
이 도인촌이 조선시대 선비들이 애타게 찾으려 하였던 청학동인가에 대하여는 논란이 많다.
사실 청학동을 불일폭포, 매계, 세석, 덕평 등이라 주장한 경우는 많으나, 현재의 청학동을 거론한 경우는 그리 많지 않았다.
아무튼 이곳에 사람이 살게 된 것은 불과 몇 십 년 전의 일이다.
유불선갱정유도교(儒佛仙更定儒道敎)를 신봉하는 사람들이 한국전쟁 이후 이곳으로 모여들어 마을을 이루었으며, “유불선과 동・서학을 합일하여 현대문화의 부조리한 면을 배제하고 인의예지의 인간본성을 수양하여 인간윤리를 실천한다”는 교리에 따라 외부세계와 담을 쌓고 유교적인 전통 생활방식을 고수하며 살아왔다.
이들은 머리를 땋거나 상투를 틀고 흰옷을 입고 생활하는 것을 당연시하며, 서당에서 훈장에게 가르침을 받고, 예의범절을 중요하게 여기면서 이곳을 청학동이라 불렀다.
이곳은 원래 묵계리 학동이었는데, 1980년대 행정 마을을 나누면서 학동에서 분리하여 청학동이란 정식 명칭을 얻게 되었다.
이들이 신앙하는 유불선갱정유도교의 정식 명칭은 ‘시운기화 유불선 동서학 합일 대도대명 다경대길 유도경정 교화일심(時運氣和 儒佛仙 東西學 合一 大道大明 多慶大吉 儒道更定 敎化一心)’인데, 이를 줄여 ‘갱정유도’라기도 한다.
교조 강대성(姜大成, 1890~1954)이 창시하였다.
그는 해방 전 전라도에서 교단를 창시하고 여러 가지 치병(治病)과 이적을 행하면서 교세를 확장하였다.
해방 후 점차 따르는 교인이 늘어나고 교세가 팽창하여 한때는 호남에서만 50만의 신도를 자랑할 정도였다.
그는 1954년 국가를 전복하고 대화중흥국(大和中興國)을 세우려 했다는 국가변란의 혐의로 체포되어 고문을 받고 그 후유증으로 죽게 되었다.
후에 대법원에서 무혐의를 받았으나 이미 교세는 기울어지고 교인들은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다.
이 갱정유도를 신봉하던 교인들 중 일부가 이를 지키고 수양하기 위하여 가족들을 데리고 터 잡은 곳이 이곳 청학동이었다.
그로부터 반세기의 세월이 지났다.
지금의 청학동 도인촌에 대하여 많은 이들은 그때의 순수함은 없어지고 상업적으로 영악해졌다고 비판한다.
그러나 완전한 은둔이 불가능한 현실에서 어느 정도의 변화는 불가피한 것이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이들에게 예전 그대로의 생활을 고수하라고 요구할 수도 없지만 설령 요구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너무 가혹한 처사가 될 것이다.
그래도 도인촌의 사람들의 생활영역은 관광지 민속촌의 영혼 없는 디스플레이와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나는 그들이 지향하는 유교적 전통사상의 계승을 팽개쳤다고 보지 않는다.
그 방식이 시류에 변화하였을 뿐이지 변절한 것은 아니라고 볼 것이다.
오늘도 진주암 깊숙한 곳에서는 흰옷을 입고 예의범절을 중시하면서 전통을 이어가는 사람들이 살고 있는 것이다.
한편 상불지를 지나 왼쪽으로 꺾어 들면 청학동의 또 다른 골, 가는골이다.
이곳은 삼성궁(三聖宮)이 자리 잡고 있는 곳으로 수많은 돌탑과 돌담과 연못이 어우러진 별유천지이다.
널찍하지만 거만하지 않고, 꽉 차있지만 부산하지 않으며, 인공을 가미했지만 부자연스럽지 않은 궁(宮).
이렇게 삼성궁은 엄숙하지만 친근하고, 신성하지만 푸근하며, 궁(宮)답지 않으면서도 궁일 것 같은 품위를 가진 곳이다.
이곳을 한 바퀴 돌다보면 상당한 면적의 공간과 돌탑 등 다양한 조형물의 규모, 그리고 자연 환경과의 조화에 놀라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이곳은 민족의 성조(聖祖) 환인, 환웅, 단군을 모셨다고 하여 삼성궁(三聖宮)이라 한다.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한때는 ‘삼신궁(三神宮)’, ‘삼선궁(三仙宮)’, ‘삼성궁’, 어느 것이 맞는 것인지 헛갈린 적이 있었다.
삼성궁의 정확한 명칭은 ‘지리산 청학선원 배달성전 삼성궁’이라 한다.
아무튼 이곳 삼성궁은 한풀선사가 이룩한 것이다.
그는 선도(仙道)의 중흥을 꾀하기 위해 초근목피로 연명하면서 화전민이 버리고 떠난 폐허속의 이곳에서 굴러다니는 돌을 모으고 연못을 파는 행선(行仙)을 하여 오늘의 삼성궁을 이루었다고 한다.
이곳 역시 선도의 도맥을 잇고 우리의 옛것을 찾아 계승하려는 청학동의 또 다른 도인촌이다.
진주암의 푸른 기운과 이곳 가는골의 푸른 기운이 합하여 날이 갈수록 더욱 청청(靑靑)해져 푸른 청암골을 더욱 푸르게 할 것이리라.
일청우일청(日靑又日靑).
청암사
지리산 둘레길은 명호리 명사마을을 거쳐 간다.
명사마을은 용심정, 아랫존티(하존), 웃존티(상존), 점몰(점마을), 감밭등, 절골을 합한 행정상의 명칭인데, 둘레길은 용심정과 웃존티를 거쳐 지난다.
골의 제일 안쪽에 자리하고 있는 점몰, 감밭등, 절골은 과거 청암사가 있었던 곳이다.
그래서 이 골 전체를 명사(明寺)라 이르고 그 중 청암사가 있던 자리를 사동(寺洞)이라 이른다.
그러나 청암사가 언제 창건되었고 언제 폐사되었는지 기록이 없어 알 수 없고 사찰의 존재 자체에 대한 기록 또한 변변치 않다.
다만 주변에 흩어져 있는 유물들과 전해져 내려오는 구전들을 종합해 볼 때 예사의 가람이 아닐 것이라는 추측만 할 수 있을 뿐이다.
전해오는 이야기로는 청암사에 딸려있었던 암자가 골 내에 12개나 있었고, 천여 명의 스님이 기거했으며, 절에서 쌀을 씻은 뜨물이 골 바깥쪽 청암천(명호마을 앞)까지 흘러갔다고 한다.
청암사의 유물로 짐작되는 대형 돌구유(돌구시, 가로230cm, 세로150cm, 길이100cm)와 멧돌이 주변에서 발견되었다.
그리고 감밭등에서 절터로 올라가는 길목을 돌문거리라고 하는데, 이곳에는 청암사의 정문에 있었던 터로 짐작되는 두 개의 큰 바위와 사미대(沙彌臺)라고 각자된 바위가 있다.
청암사에 대한 직접적인 기록은 아직껏 확인된 것이 없는 듯하다.
그래서 그 구체적 사적(寺跡)은 깜깜하다.
다만 간접적이고 단편적인 기록들을 더듬으면서 당시의 청암사를 어렴풋 유추할 수는 있을 것이다.
‘진양지(晉陽誌 卷2 50)’에는 청암사를 “전두리(田頭里)에 있다. 임진년에 불탔더니 뒤에 중건하였다. 뒤편에는 관의 죽전이 있고 절에서 5리 쯤의 거리에 폭포가 있다.”고 소개하면서 하수일의 폭포기(瀑布記)를 첨기하였다.
진양지는 진주 선비 부사(浮查) 성여신(成汝信)이 1622년(광해군 14)부터 1632년(인조 10)에 걸쳐 편찬한 경상도 진주목의 읍지이다.
이로 미루어 본다면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청암사의 가람을 적어도 이 책을 완간한 1632년 이전에 다시 중건 하였다는 이야기가 된다.
그리고 명암(明菴) 정식(鄭栻)이 쓴 ‘두류록(頭流錄)’에는 “청암사(靑巖寺)에서 유숙하였다. 누대 아래에서 쉬고 있는데 한 승려가 다른 지방에서 와서 나한테 절하고는 강릉 오대산에 있다가 이곳에 산수 구경 왔는데 지금 막 쌍계사로 돌아가는 중이라고 하여 그와 동행하였다.”라는 기록이 나온다.
정식이 청암사에 하룻밤 잔 것이 1724년 8월이니까 이때까지는 청암사가 존속되었음은 분명하다.
그 이후의 청암사 관련 기록은 좀처럼 찾을 수가 없다.
다만 수당(修堂) 정종엽(鄭鍾燁)의 ‘록(錄)’에서 “바람과 눈이 계속된 데다가, 습재가 갑자기 눈병으로 괴로워해서 그 집에 계속 머물렀다. 한낮에 나 혼자 동쪽 언덕에 올라갔다가 사람을 만나 자세히 알아보니, 단천, 세동, 증봉, 죽전을 모두 합쳐 학동(현재의 청암면 묵계리 일원)이라고 부르며, 그 밑으로 석문촌(石門村)에 이르기까지는 마을마다 골짜기마다 따로따로 다른 이름이 있어서 일일이 다 말할 수가 없다고 하였다.”는 기록이 보이는데, 여기에서의 석문촌은 청암사 입구의 돌문거리를 이르는 말이다.
정종엽의 ‘록’은 1909년경 습재 최제학과 은거할 만한 자리를 찾고자 지리산을 둘러보면서 쓴 기록이다.
이 기록만 가지고 당시 청암사의 존부를 확인할 수는 없으나, 절 입구에 마을(石門村)이 형성될 정도라면 상당한 규모의 사찰이라는 추정이 가능할 것이다.
아니면 석문촌이 마을 이름이라기보다 절 앞에 있는 돌문(石門)거리(村)를 표현한 것이라면 이때 이미 청암사는 이름조차 사라진 이후가 아닐까 추정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아무튼 청암사 폐사에 대한 기록은 없지만 구전으로 전해오는 전설은 있다.
그 이야기를 간추려 본다.
당시 청암사에는 모 세도가에서 욕심을 내고 있었던 명당자리가 있었다.
그 자리에 묘를 쓰면 자손이 번창하고 집안이 융성할 것이라 믿고 탐을 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세도가의 사람과 청암사의 주지 스님이 만나 이런저런 이야기 끝에 농담 삼아 청암사를 팔면 우리가 사겠다고 하였다.
주지 스님도 농담으로 천 량을 주면 팔겠다고 응수하였는데 세도가의 사람이 천량 매매는 없는 만큼(당시에는 천 량 이상의 매매는 할 수 없었다고 한다) 9백 9십 량을 주고 사겠다고 하였다.
주지 스님이 생각하기를 아무리 세도가 대단하다고 해도 설마하니 천 량에 가까운 돈이 있겠는가 하고 역시 농담으로 그렇게 하라고 하였다.
세도가에서는 이 농담을 빌미삼아 주지 스님의 덜미를 잡고 억지로 절을 팔게 하였다.
그리하여 스님들은 부득이 절을 팔고 쫓겨나게 되었고 세도가에서는 욕심을 내던 그 명당자리에 묘를 썼다고 한다.
본의 아니게 절을 빼앗기듯 팔고 쫓겨나게 된 스님들은 너무나 분하고 억울하여 절을 떠나면서 그 명당자리의 묏자리를 개무덤이라고 이름 짓고 또 이 묘를 병풍처럼 에워싸고 있는 산을 가리켜 범재라고 하였다 한다.
스님들이 ‘범재’와 ‘개무덤’이라 이름 지은 것은 호랑이가 개고기를 좋아하기 때문에 세도가들이 아무리 명당자리에 묘를 썼다고 하지만 범들이 가까이에서 덮치는 형상으로 내려다보고 있으니 크게 망하고야 말 것이라 저주한 것이었다.(1992년 발행의 청암면지에서 발췌)
습제 최제학
청암사지의 절골을 이야기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있다.
습제(習齊) 최제학(崔濟學)이다.
그는 1959년 9월 이곳 절골에서 78세의 파란만장했던 생을 마감하였고 이곳에서 묻혔다.(그의 사망일이 1961년 6월이라는 기록도 보인다. 그리고 절골에 안장되었던 그의 무덤은 후일 묵계리로 이장하였다)
그의 생애에서 스승인 면암 최익현과 함께하였던 의병활동과 이후 지리산 청암골에서의 은둔생활을 빼놓고는 이야기할 수 없을 정도인데, 그 근저를 관통하는 것은 항일구국의 일념이었다.
그는 1882년 전라북도 진안군에서 태어났다.
1894년, 그의 부친 최성호가 동학의 김계남 부대에 의해 피살되었고, 그는 3년 상을 치른 후인 1896년 면암 최익현의 문하에 들게 된다.
1905년 12월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1906년 정월 그는 고석진과 함께 스승 최익현에게 의병을 일으킬 것을 건의하고 최익현의 명에 의해 전라도 태인(현 정읍)에 있던 전 낙안군수 임병찬을 만나 의병거의(義兵擧義)를 함께 하기로 하였다.
이때 모여든 동지들이 정시해, 조규하, 박봉양, 조우식, 문달환, 임현주, 조영선, 고제만, 유종규, 이용길 등이었다.
이때부터 그는 최익현의 막중한 참모가 되어 모병과 군량을 책임지게 되었다.
그 해 윤 4월 13일 최익현은 이들과 함께 태인 부성서원에서 거병하여 다음날 정읍 내장사에서 하루 밤을 보냈다.
이때 의병의 수가 3백이 넘었다.
의병은 15일 순창 구암사에 주둔했다가 17일 곡성을 거쳐 19일 다시 순창으로 돌아왔다.
20일 일본군과 연합한 관군의 공격이 시작되었으나 공격군이 왜군이 아닌 전주·남원의 진위대(鎭衛隊)로 구성된 관군임을 확인한 최익현은 관군인 진위대와 접전할 수 없다며 그들에게 물러날 것을 권고하였다.
그러나 진위대는 물러나지 않고 오히려 먼저 의병을 습격하였고 이 틈에 정시해가 전사하였다.
의병들도 무너져 모두 흩어지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그와 임병찬, 고석진 등 12명은 최익현의 곁을 떠나지 않고 끝까지 지켰다.
22일, 결국 최익현과 이들 모두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었는데, 후일 이들을 순창 12의사라 하였다.
아무튼 이로써 최익현의 의병항전은 거병 10일 만에 허무하게 끝이 났고, 그해 6월 26일 최익현 감금(징역) 3년, 임병찬 2년, 그리고 그와 고석진은 4월의 형을 받게 되었다.
나머지 김기술을 위시한 9인은 태 100장으로 석방되었다.
그리하여 최익현과 임병찬은 대마도 감옥으로 이송되고 그는 서울의 일본군 사령부에서 복역하다 10월 25일 석방되었다.
(최익현의 의병대가 크게 싸워보지도 못하고 단기간에 해산된 것에 대하여 황현의 매천야록(梅泉野錄)에는 “…21일 전주대(全州隊)는 최익현과 12명이 북상하는 것을 뒤좇아 사령부에 수금하였다. 최익현은 평소 중망이 있었고 충의가 일세에 뛰어났다. 그러나 군대를 부리는데 익숙하지 못하고 나이 또한 늙어서 일찍이 기모(奇謨)가 있어서 승산을 계획했던 것이 아니며 수백 명의 오합지졸은 모두 기율이 없었고 유생종군자(儒生從軍者)는 큰 관을 쓰고 넓은 옷소매의 의복을 입어 과거장에 나가는 것 같았으며 총탄이 어떠한 물건인지도 알지 못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는 출옥 직후인 11월 5일, 대마도에 수감 중인 스승 최익현을 만나러 갔다.
하지만 최익현은 단식 등으로 인하여 이미 위독한 상태였고, 결국 11월 17일(양력으로는 1907년 1월 1일), 대마도 감옥에서 순절하였다.
그는 스승 최익현의 시신을 부산에서 맞아 들여 본가인 충청도 정산까지 모셔다가 정성스럽게 치상하였다.
그는 최익현의 12의사 중에서 나이가 가장 적었지만 천 여석에 가까운 가산을 의연(義捐)하면서 최익현의 의병거의에 가장 큰 역할을 하였던 든든한 동지였었다.
무엇보다도 그는 최익현의 구국충정의 뜻을 끝까지 놓치지 않았던 충직한 제자였었다.
그래서 당시에 ‘면암이 없으면 습제도 없고 습제가 없었다면 면암 또한 없었다’라는 이야기가 나돌 정도였다고 한다.
이후 그는 몇 차례의 거의(擧義) 시도를 하였으나 실패를 하였고 그러면서 일본의 요시찰 인물로 분류되어 감시대상이 되었다.
그가 지리산 청암골을 은거지로 삼기까지의 과정과 정확한 시기는 엇갈린다.
다만 당시 그의 심정과 행적을 추론할 수 있는 기록이 있는데, 그것은 앞의 ‘청암사’편에서 잠깐 언급한 정종엽의 ‘록(錄)’이다.
기유(己酉)년, 정 월 어느 날 최습재(崔習齋)형과 함께 용성의 호동에 머무르며 세상의 도가 점점 땅에 떨어져 가는 것을 한탄하고 시대적인 양상이 크게 변하는 것을 안타까워 하다가, 앞으로 맞이하게 될 일들을 근심하고 분해하면서 자취를 감추고 숨을 만한 땅을 찾고자 하였다.
내가 “방장산은 단지 신선들이 그 안에 있는 굴에서 살고 있을 뿐만 아니라, 청학동은 깊숙하면서도 넓어 예로부터 세상을 피할 수 있는 땅으로 전해져 왔으니, 한번 진짜인지 찾아보아서 오랜 빚을 갚는 것(여기서는 오래도록 생각해왔던 일을 실행하는 것을 말한다.)이 어떠한가?”라고 말하여, 같이 갈 것을 약속하였다.
(중략)…노인은 도(都)씨였다. 땅과 사람들, 하는 일, 떠받드는 것 등을 차례로 물으니 이렇게 말하였다.
“이 곳의 본래 이름은 ‘학동(鶴洞)’인데, 중고(中古)시기에 ‘불지(佛地)’로 바꾸어 부르다가, 우리 광무(光武)시대에 토지를 측량할 때에 기술자가 ‘이 골짜기는 산세가 학의 몸이 아닌 것이 없다’고 말하고, 그대로 ‘학동(鶴洞)’이라고 이름 붙였습니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청암(靑巖 :푸른 바위)이 학동을 마주보고 있다 하여 ‘청학동(靑鶴洞)’이라고 부릅니다. 여기에 사는 사람들은 저마다 멀리서 와서 무리를 이루었습니다. 풍년에는 먹고 살 다섯 가지 곡식이 충분히 다 갖추어지고, 쑥과 도토리는 흉년을 구제하여 주린 배를 채우기에 충분합니다. 다만 문물이 아직 열리지 못하여 교양을 갖출 방법이 없으니, 거의 오랑캐를 피하려다가 도리어 오랑캐가 되어버린 셈입니다.”
이날 밤에 눈이 내렸다.
2월1일 경오(庚午), 바람과 눈이 계속된 데다가, 습재가 갑자기 눈병으로 괴로워해서 그 집에 계속 머물렀다.
한낮에 나 혼자 동쪽 언덕에 올라갔다가 사람을 만나 자세히 알아보니, 단천(檀川), 세동(細洞), 증봉(甑峰), 죽전(竹田)을 모두 합쳐 학동이라고 부르며, 그 밑으로 석문촌(石門村)에 이르기까지는 마을마다 골짜기마다 따로따로 다른 이름이 있어서 일일이 다 말할 수가 없다고 하였다.
(위 기록에서 ‘단천’은 현재의 청학동 박단골(청학동에서 상불재 등산로 우측 골짝)을 일컫는 지명이고, ‘세동’은 현 내원재에서 청학동방향의 골짜기의 ‘가는골’을, 증봉은 현 청학동 시루봉골을, ‘죽전’은 현 하동군 횡천면 전대리 죽전마을을, 석문촌은 앞에서 거론한 바와 같이 현재의 청암면 명호리 명사마을 절골의 돌문거리를 일컫는 것으로 해석된다)
정종엽이 쓴 ‘록’의 일부이다.
‘록’은 정종엽이 최제학과 은거지를 찾기 위해 지리산 일대를 돌아보았던 기록이다.
여기에 인용한 부분은 화개의 쌍계사, 불일폭포를 거쳐 내원재를 넘어서 묵계리 학동에서 이틀 밤을 보냈던 대목으로 1909년 1월 30일에서 2월 1일까지의 행적이었다.
다음날은 회남재를 넘어 악양으로 향하였다,
아마도 이 시기, 최제학은 스승 최익현을 보낸 상실감과 의병거의 재기의 실패로 인한 무력감에 빠져 있었을 것이다.
현실의 암울한 상황에 비관하고 있던 그에게 숨을 곳을 찾아보자는 정종엽의 제의에 흔쾌히 동조하게 된 것도 이런 현실에서 벗어나고픈 몸부림이었을지도 모른다.
아무튼 최재학은 당시 정종엽과 함께 찾았던 청암골을 잊지 않았던 것 같다.
그 몇 년이 지난 후(1912년 전후로 추정), 청암골을 다시 찾게 된 그는 아예 가족들을 데리고 들어왔었다.
숨을 곳을 찾고자 거쳤던 골이 실제의 은거지가 된 것이었다.
그가 자리 잡았던 곳은 옛 청암사의 절터였던 절골이었고, ‘록’에서 석문촌으로 기록되어 있는 곳이다.
그는 30대 초반에 이곳에 들어와 약 40여 년간 은둔의 중·장·노년을 보낸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은둔 생활 중에서도 항일구국의 일념에는 변함이 없었다.
사라호 태풍이 몰아쳤을 때, 그는 죽음을 목전에 앞 둔 절박한 상황에서도 주변 사람들에게 “일본이 물에 잠겼느냐?”고 물었다고 한다.
그러면서 “내가 죽거든 결코 머리를 동으로 두지 말라” 고 일렀다고도 한다.(1992년 발행의 청암면지에서 발췌)
고개의 의미
존티재를 넘으면서 지리산 둘레길은 청암면과 작별하여야 한다.
청암골은 좁고 긴 골을 이루고 있기 때문에 물길로 트인 남쪽의 횡천 방향을 제외하고는 외부와 소통하기 위하여 산을 넘지 않으면 아니 된다.
동쪽으로는 낙남대간을 넘어 산청 시천과 소통하기 위한 묵계재, 고운재, 그리고 옥종으로 연결되는 질매재, 양이터재, 말티재가 있다.
서쪽으로는 화개를 넘는 상불재, 내원재, 악양을 향하는 회남재, 배티재, 그리고 적량과 연결되는 동점재, 존티재 등 이루 헤아리기도 어려울 정도로 많은 고개가 있다.
둘레길 또한 양이터재를 넘어 청암골을 가로지르다 존티재에서 청암과 이별하면서 적량을 만나는 고갯길의 연속이다.
사실 우리가 걷고 있는 둘레길 자체가 고개와 고개로 이어진 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무수한 고갯길로 연결된다.
재, 고개는 산으로 가로막힌 고을과 고을을 이어주는 산길로써 영(嶺), 현(峴), 치(峙) 등의 한자어로 부르기도 한다.
일반적으로 고개는 산의 능선부를 가로지르기 때문에 분수계(分水界)를 이루는 곳이 많으며, 지역 간의 자연적 경계를 이룬다.
양이터재가 낙동강과 섬진강의 수계로 갈리면서 옥종면・청암면의 경계를 이루듯, 존티재는 청암천과 남산천의 물길을 가르며 청암면・적량면의 경계를 이루는 것이다.
그러나 갈라지는 물길이 종래에는 바다나 강에서 만나듯이 지역을 경계 짓는 고개 역시 마을과 마을을 만나고 연결해 주는 고리가 된다.
고갯마루에는 오름길의 고단함과 내림길의 편안함이 교차하는, 그래서 오르막이 있으면 내리막이 있다는 진리가 작용하는 공간이 된다.
고개는 일상의 중요한 고비나 절정을 비유적으로 표현하기도 하고, 희망과 좌절이 교차하는 곳으로 설명되기도 한다.
그래서 아리랑고개를 일컬어 고통의 정점이라 이르기도 하고, 쾌락의 절정으로 은유하기도 한다.
고개는 숱한 세월 속 영욕의 역사를 교차케 하고, 숱한 사람들의 희노애락이 묻어있는 사연들을 녹여서 골골을 이어주는 시간과 공간의 영역이 된다.
새악시의 신행길이 되기도 하고, 망자의 저승길이 되기도 하여 설래임과 슬픔을 가마와 상여에 실어서 넘기도 하는 길이다.
김종길 시인의 ‘고갯길’이다.
시골 옛집 앞을 지나,
뒷산 등성이를,
오늘은 상여(喪輿)로 넘으시는 아버지.
낯익은 고갯길엔
마른풀 희게 우거졌고
이른봄 찬 날씨에
허허로운 솔바람 소리.
--아버지,
생전(生前)에 이 고갯길을 몇 번이나
숨차시게, 숨차시게 넘으셨던가요?
후기 (전구간 : 9.4km) 2019. 7. 6 (토)
(하동호 ⇨ 평촌 : 2km)
몇 년 전 이 구간의 순례 때 하동호에서 평촌까지의 구간을 생략하였던 적이 있었다.
당시 하동호-평촌 구간을 생략하였던 변명 같은 이유를 그대로 인용해본다.
“내 개인적인 의견으로는 평촌을 10구간의 종점, 11구간의 시작점으로 하는 것이 어떨까 한다.
그 이유로는 구간의 시작점이나 종점은 대중교통의 접근성을 우선으로 하여 선정된다는 측면에서 보면 하동호 휴게주차장보다는 청암면의 소재지인 평촌이 되는 것이 좋을 것이란 생각이다.
또 하나는 구간별 거리・난이도의 종합적인 안분을 검토해 보자는 것이다.
10구간을 평촌까지 연장을 하면 11.9km에서 2km가 추가되어 13.9km가 되는 반면에 9.4km의 11구간이 2km가 줄어들어 7.4km가 되면서 오히려 불균형이 가중되지 않느냐는 반문이 있을 수 있을 것이다.
한편으로 다음 구간인 12구간을 보자면 버디재-신촌재-먹점재를 넘어야하는 난이도와 16.9km의 장거리는 10・11구간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11구간의 종점을 삼화실로 잡을 것이 아니라 12구간의 우계리의 서당마을로 연장을 한다면 11구간이 7.4km에서 3.5km가 늘어난 10.9km가 되고 힘든 12구간이 3.5km가 줄어들어 13.4km가 되면서 거리상 균형이 어느 정도 조정이 되지 않을까 한다.“
그때의 생각은 오늘도 여전히 유효한 논리가 되어 우리는 평촌을 들머리로 하고 날머리를 적량면 우계리 서당마을로 잡았다.
하동호-평촌 구간을 10구간의 연장으로 하여 당연한 것처럼 11구간에서 빼기로 한 것이다.
뻔뻔함이다.
사실을 고백하건대 하동호-평촌 구간을 걷지도 않고 날로 빼먹은 것이다.
(평촌 ⇨ 관점마을 : 1.2km)
평촌리는 두 개의 행정마을인 평촌마을과 화월마을로 이루어져 있는데 둘레길은 이 두 마을을 다 거친다.
평촌마을을 이곳 사람들은 당산몰(마을)이라고도 하는데 마을 뒤편에 당산(堂山)이 있었다 해서 붙은 이름이라하며 현재의 청암면 소재지 마을이다.
한편 마을 안쪽에는 하동호 수몰지에서 이건(移建)한 경순왕의 경천묘와 목은 이색 등의 금남사가 있다.
둘레길은 평촌에서 함박골까지 1003번 지방도를 따른다.
그리고 오른쪽의 들길로 꺾어 들었다가 곧이어 청암천을 가로지르는 징검다리를 만나게 되는데, 이곳에서의 그림은 노스텔지어(nostalgia)의 아련함을 담았다.
청암천을 건너서 만나는 둑방길과 둑방길에서 내려다 본 청암천의 풍경 역시 오래된 사진 속의 정겨운 그림이 되어 유년시절을 떠오르게 한다.
이곳의 청암천에는 멱감기에 좋을 듯한 보(洑)가 있다.
이곳 사람들은 이를 큰들보라고 부르는데, ‘큰들’에 물을 대기 위하여 만든 보라는 의미이다.
지금은 콘크리트로 설치되어 있지만 옛날에는 나무로 막았다고 하며, 큰들보의 건너편 산을 큰들보산이라 불렀다고 한다.
이 산은 ‘큰들’에 논을 가진 사람들이 공동으로 소유하여 이 산의 나무를 베어 큰들보의 물을 막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현재의 콘크리트 보가 되면서 나무가 필요 없게 되었고, 그리하여 산의 소유권은 개인으로 이전되었으며 큰들보산이라는 이름 역시 잊힌 지 오래되었다고 한다.
둘레길은 큰들보의 아래쪽에서 다시 청암천을 건너 화월마을 앞의 1003번 지방도를 만난다.
도로변에는 마을의 당산나무가 있는데 특이하게도 벚나무이다.
이곳에서부터 둘레길은 1003번과 나란히 하는 시멘트 농로를 따른다.
오른쪽 산자락에 걸쳐진 대밭을 보면서 우측으로 꺾어들면 청암천을 가로지르는 관점교를 만나게 되고 다리를 건너서 오른쪽으로 휘어진 비스듬한 오름길을 오르면 이내 관점마을이다.
(관점마을 ⇨ 상존티마을 : 3.2km)
관점마을은 옥녀봉 아래의 아담한 산자락에 파묻힌 평화스러운 마을이다.
아마도 예전에 갓을 만든 곳이라 추정되는데 이곳 사람들은 갓점이라 부르기도 한다.
관점(冠店)이란 마을명은 이를 훈차(訓借)한 것으로 생각된다.
길은 마을 고샅길을 거쳐 경노당 앞에서 산모롱이를 따르는 임도로 이어진다.
그리고 야트막한 고개를 넘어 들길로 내려서면 청암천과 청암천을 가로지르는 명호교와 명호마을이 눈앞에 들어온다.
둘레길은 곧바로 만나는 아스콘 포장로에서 우측으로 꺾어 명호천을 거슬러 오른다.
여기서 좌측으로 꺾으면 명호천이 청암천과 합수되는 골의 바깥을 향하게 되고 청암천변에 있는 명호마을과도 연결된다.
이곳에서부터 골 안쪽까지를 행정구역상 청암면 명호리라 하는데 명호리에는 명호마을과 명사마을, 두 개의 행정마을로 이루어져있다.
골의 바깥에 자리한 명호마을에는 관점과 명호, 두 개의 자연부락으로 이루어져 있고, 골의 안쪽에는 명사마을이 자리 잡고 있다.
여기서부터 둘레길은 골의 안쪽을 향하는 아스콘포장로를 따르는데, 산촌 특유의 고즈넉함이 포장로의 딱딱함과 따분함을 상쇄시키기에 충분하였다.
외딴집 한 채가 개울 건너에 있을 뿐 마을이라고는 보이지 않는 도로변에는 자연석에 각자한 명사리 표지석이 뜬금없이 나그네를 맞는다.
아마도 여기서부터 명사리라는 영역의 경계 표시인 듯하다.
명사리(明寺里)는 과거 12암자를 거느린 청암사라는 거찰이 있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인데, 여기에는 용심정, 존티, 점말, 감밭등, 절터의 작은 자연부락들로 이루어져 있다.
둘레길은 용심정, 상존티를 거치고 골 안의 깊숙한 곳, 청암사의 흔적이 남아있는 점말, 감밭등, 절터는 미답처로 남겨둔다.
명사교 건너 우측 마을이 용심정이다.
용심정의 띄엄띄엄한 농가들은 산기슭에 걸터앉아 소박하게 졸고, 그 흔한 개소리도 없이 적요(寂寥)한 산골의 평화는 서정성 짙은 시가 되고 그림이 되어 둘레길 나그네에게 은은한 감동을 전하고 있었다.
우리는 하존티 마을 입구의 정자 쉼터에서 맥주 한 잔씩 마시면서 갈증과 피로를 풀었다.
둘레길은 상존티 마을 입구에서 점터, 감밭등, 절골로 향하는 직진의 아스콘포장로를 버리고 왼쪽의 마을길로 들어서는데 곧이어 명사마을회관이다.
그리고 산모롱이를 돌면 상존티이다.
(상존티 ⇨ 존티재 ⇨ 삼화에코하우스 : 1.9km)
칠성봉에서 남서향으로 이어진 구재봉 능선은 적량면과 악양면의 면계를 이루고, 남동향의 갈미봉(갈마봉)으로 이어진 능선은 청암면과 적량면의 면계를 이룬다.
이 갈미봉 능선상에 청암과 적량을 넘나드는 여러 개의 고개 중의 한 곳이 존티재인데, 우리는 이 고개를 넘는다.
상존티는 존티재의 바특한 곳에 자리 잡고 있는 마을이다.
전형적인 산촌 마을이지만 산자락에 펼쳐진 계단식 논밭이 제법 너르게(?) 펼쳐져 있어 산골 특유의 꽉 막힌 느낌이 들지 않고 여유롭다.
존티는 재의 이름이기도 하고 마을이름이기도 하다.
상존티는 웃존티 또는 상존, 하존티는 아랫존티 또는 하존이라고도 부른다.
둘레길은 상존티 마을을 관통하여 돌아 오르는데, 마을 후면의 청량한 대숲길이 상큼하다.
그리고 산길의 눅진한 흙 내음과 숲길의 푸근함이 존티재까지 이어진다.
존티재는 존치(尊峙)에서 고개를 의미하는 ‘치(峙)’가 경상도식 발음인 ‘티’로 변형되었다가 여기에 또다시 고개를 의미하는 ‘재’가 접미어로 붙어진 이름이다.
고갯마루에서 내림길은 동촌(상중삼)마을의 고샅길로 이어진다.
그리고 삼화에코하우스다.
삼화에코하우스는 폐교된 삼화초등학교를 리모델링하여 체험학습 및 방문자 쉼터로 활용하고 있는 공간으로 둘레길 11구간의 날머리가 된다.
(이정마을, 버디재, 서당마을까지 연장 : 3.5km)
애초 계획했던 대로 우리는 11구간의 날머리를 삼화에코하우스가 아닌 12구간의 서당마을로 잡고 둘레길을 이어가기로 하였다.
둘레길은 이정마을을 거친다.
마을 어귀에는 두 그루의 커다란 당산나무가 있는데, 팽나무와 느티나무이다.
종이 다른 나무가 나란히 서 있는 모습이 특이하면서도 정겹다.
마을 앞에 마주보이는 봉긋한 산봉우리가 이름도 특이한 밥봉이다.
그릇에 밥을 고봉으로 담은 듯한 봉긋한 모양이 귀엽고 앙증맞은데, 아마도 그 모양에서 붙여진 이름이 아닐까 한다.
둘레길은 밥봉의 옆의 시멘트임도를 따라 밤나무 과수원이 끝나는 지점까지 이어진다.
그다음은 잡목의 시원한 숲길이다.
그리고 너덜길이다.
이 너덜길은 버디재 고갯마루까지 이어지는데, 누군가가 너덜겅이의 울퉁불퉁함을 돌로 채워 편편하게 다듬어 놓았다.
고마움을 느끼게 하는 길이다.
버디재의 내림길은 한적한 소나무숲길로 시작한다.
곧이어 임도를 만나고 뒷골의 내림길로 이어지는데, 길가의 묵정밭에는 개망초가 흐드러지게 피었다.
내림길이 끝나는 서당마을회관에서 오늘의 둘레길을 마감한다.
우리가 빼먹었던 하동호에서 평촌까지의 2km를 빼고 삼화실에서 서당마을까지의 3.5km를 더해서 오늘 우리가 걸었던 실제의 거리는 10.9km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