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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는 쇼지(障子, 창호지)를 가져오도록 한 뒤 물에 적셔 그의 턱에 붙여 주었다. 쇼지가 턱에서 가슴으로 수염처럼 매달리자 다케다는 봉대에게 주문했다. “요시다, 10척 거리에서 걸어 들어가면서 저걸 베도록 해라.” 거리를 조절하지 못하면 젊은이의 목이 잘릴 터. 엄청난 위험이 따르는 시범이었다. 거리는 보폭과 칼의 길이로 결정이 나는 법. 봉대는 걸어들어갈 거리와 칼의 길이를 가늠한 뒤 턱에 매달린 쇼지를 노려보았다. 젊은이의 눈가에서 미세한 경련이 일고 있었다. 봉대가 순식간에 한 걸음 내딛는가 싶더니 칼이 허공을 갈랐다. “쌩-.” 바람 가르는 소리가 금속처럼 날카로웠다. 봉대의 동작이 멈춘 순간 잘려나간 쇼지가 바람에 너풀거렸다. 봉대의 칼끝이 칼집으로 고개를 디미는 순간 요란한 박수갈채가 쏟아졌다. “이건 과정에 불과했습니다. 이번에야말로 극치를 보여 드리겠습니다.” 봉대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이게 아니었단 말인가. 사실 조금 전해 보인 기술을 극치라고 말하기에는 봉대 스스로 생각해도 쑥스러운 구석이 있었다. 다소 부담스럽긴 해도 그간 수련이나 실력으로 보아 무난히 해낼 수 있는 기술을 가리켜 다케다가 극치라는 표현을 썼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극치란 무엇인가. 다케다는 젊은이의 콧등에 너비 1센티미터, 길이 3센티미터 짜리 젖은 쇼지를 붙이도록 했다. 그러고 나서 큰 소리로 외쳤다. “요시다가 이 젊은이의 인중에 붙은 쇼지를 잘라낼 것이외다.” 봉대는 순간 눈앞이 아찔해지는 것을 느꼈다. 턱에 매달린 쇼지는 상하좌우로 10센티미터 정도의 여유가 있었다. 하지만 콧잔등에 붙은 쇼지는 상하좌우로 5밀리미터의 여유만 있을 뿐이었다. 조금만 위를 베면 코가 잘릴 것이요, 아래를 베면 입술이 잘려나갈 것이었다. 또 그걸 두려워하다가는 칼이 쇼지에 다가가지도 못한 채 허공을 벨 것이었다. 지금까지 한 번도 시도하지 않은, 매우 섬세함을 요하는 기술이었다. 단 한 번의 칼에 봉대와 스승의 체면이 좌우될 판이었다. 뒷골이 서늘해지면서 주루룩 식은땀이 흘렀다. “너라면 할 수 있을 거다. 그동안 배운 대로 정신을 집중하면 된다. 자신감을 가져라.” 머뭇거리고 있는 봉대에게 다가와 다케다가 눈을 응시하며 말했다. 아무리 자신감이라고 해도, 정신을 집중한다고 해도, 참으로 부담스러운 시범이었다. 하지만 화살은 이미 시위를 떠나 있었다. 봉대는 45센티미터 검을 들고 젊은이 앞으로 천천히 걸어 나갔다. 자신의 숨소리와 심장박동 소리가 유독 크게 들려왔다. 걸음걸이도 신경에 거슬렸고 심지어는 군중의 기침 소리까지도 귀를 자극했다. 한줄기 바람이 앞으로 늘어진 봉대의 머리칼 사이를 훑고 지나갔다. 젊은이는 조금 전보다 더욱 떨고 있었다. 찰나에 얼굴이 두 쪽 날 일이 벌어질지도 몰랐다. 공연히 재수 없이 불려 나왔다는 생각이 들 법도 했다. 봉대는 젊은이 앞에 두 다리를 벌리고 섰다. 두 눈은 콧잔등의 쇼지에 집중됐다. 침샘에서 솟아난 침을 삼켰다. 뜨거운 침이 목구멍을 타고 식도로 흘렀다. 칼을 쥔 손에 살며시 힘을 주어 보았다. 손가락 끝에 칼자루가 차가웠다. 순간 느닷없이 소피가 마려웠다. 눈을 감으니 아랫배가 긴장했다. 배에서 전쟁이라도 일었는지 꾸르륵 소리가 났다. 길게 호흡을 들이마셨다. 호흡을 가다듬으며 살며시 눈을 떴다. 또 한 차레 바람이 불어와 볼을 스치고 지나갔다. 몸이 안정되자 이번에는 머리가 혼란스러웠다. 아리따운 첫사랑 후유코의 얼굴이 나타났다가 아득히 멀어졌다. 아버지와 형의 얼굴이 불현 듯 떠올랐다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야하타 주지 야마모토의 인자한 얼굴도 스쳐갔다. 미즈카키산이 떠올랐다. 마음의 법에 대해 고민하고 힘을 빼기 위해 전력을 기울였던 장면이 스크린처럼 지나갔다. 몸이 마음의 지배를 받아야 한다는 다케다의 호령이 귓가에 쟁쟁거렸다. 봉대는 눈을 부릅떴다. 칼끝을 상대의 얼굴에 겨눴다. 미간이 가늘게 떨렸다. 오른쪽 무릎이 솟구치듯 한 걸음 성큼 내딛는 순간 상대를 향하고 있던 칼끝이 방향을 틀었다. 찰나에 칼끝이 허공을 갈랐다. “악-.” 젊은이가 비명을 지르며 뒤로 주춤주춤 서너 발자국 물러섰다. 바로 그때 봉대의 머릿속을 하나 가득히 채운 얼굴이 있었다. 신라대명신이었다. 사나운 눈길로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다. 앞이 캄캄했다. 실패의 쓴맛을 보고 있다고 느꼈다. 이제 다케다의 얼굴에 먹칠을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봉대는 한쪽 무릎을 꿇고 고개를숙였다. 바로 그때, 조금 전 비명을 질렀던 젊은이가 콧잔등에 붙은 종이를 떼어 냈다. 그때 인중을 덮고 있던 쇼지가 둘로 나뉘었다. 고개 숙인 봉대는 그 모습을 보지 못하고 있었다. 쇼지 한쪽은 입술에 붙어 있고 나머지 한쪽은 젊은이의 손에 들려졌다. 종이는 예리한 칼날에 잘려 있었다. 숨죽이고 있던 군중의 요란한 함성과 함께 박수갈채가 쏟아졌다. 젊은이는 자신의 콧잔등에서 두 쪽으로 분리된 종이를 이리저리 살펴보더니 입술에 붙은 종이를 마저 떼어 냈다. 손바닥으로 콧잔등와 입술을 한 번 쓸어내린 다음 손바닥을 들여다보았다. 이마는 상처 하나 없이 깨끗했다. 젊은이가 두 눈을 끔벅거렸다. “고생했다. 네가 할 수 있으리라고 느꼈다.” 다케다가 봉대를 일으켜 세웠다. 단상에서 지켜보던 태자가 박수를 보내며 엄지손가락을 세워 보였다. “기미와 조센진다케도 니폰 이치방데스(그대는 조선인이지만 일본 최고요).” 군중이 일제히 박수갈채를 보냈다. 훗날 봉대는 이 사건을 자랑삼아 제자들에게 이야기하곤 했다. 무예를 배우고 나서 스승의 동문인 우메무라를 제압한 일과 더불어 두 가지 가장 기뻤던 일 중 하나라고 강조하면서. “내사 말아다, 천황 앞에서 시범을 보인 기라. 천황이 말했구마, 니는 조선인이지만도 일본 이치방(一番)이라꼬. 조선 사람 중에 말이다, 일본 천황한테 이리 칭찬받은 사람 있으마 나와 보라 캐라, 잉? 내가 일본 자슥들 콧대를 칵 꺾어뿐 기라. 니들 아나? 그 기분 말이다. 헤헤헤…….” 태자는 4년 뒤 쇼와(昭和) 천황이 됐다. 봉대가 ‘일본 이치방’이 될 때만 해도 그는 태자의 신분이었지만 훗날 천황이 됐으니 봉대의 이 자랑이 그리 틀린 것은 아니었다.
빠른 것은 느린 데서
대구, 고바우와 관련된 녹음테이프를 듣고 난 다음날 우리는 밝터에서 다시 만났다. 다들 불안한 나날을 보내는데 이승희 사범이 만남을 제안했다. 그는 김정의 자취를 찾고, 강도를 검거하는 일이 하루아침에 결론 날 일이 아니라며 얼굴이나 보자고 했다. 오후 9시쯤 퇴근하다 밝터로 갔더니 이승희 사범과 이영철 형사가 때꾼한 눈으로 기다리고 있었다.
도쿄 결투 덕암의 장례식장에 다녀온 뒤 나는 곧바로 석재회사를 그만두었다. ‘젊음을 더 이상 허비해서는 안 된다’며 곧바로 서울역 근처의 입시학원에 등록을 했고 1년 뒤 마침내 스물여섯 살의 나이에 K대학에 합격했다. |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