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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밀레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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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깨비 이야기 스크랩 후백제 견훤은 김씨 신라국을 구했다
흥풀이(유종회) 추천 0 조회 76 18.11.12 11:34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후백제 견훤은 김씨 신라국을 구했다

 

박씨임금  효공왕- 경애왕 구테타를 반대하는 김씨 왕족..

마의태자는 후백제 변산으로 망명

                       

 마의태자 후손 김준이 세운 청나라는 고구려 꾀꼬리 복장과 소리로

 개골산은 개암사 갯벌골산  부안변산의 이름 

신라는 박혁거세  박씨신라로 건국하였으나  석씨 석탈해왕에게 넘어가고 김알지 경주김씨 미추왕의 구테타로 넘어갔다 그래서 진성여왕 시대까지 경주김씨 신라왕국으로 긴 정권을  계승하였다

그러나  중국 당나라가 갑자기  757 안록산의 반란으로 전국시대가 되어 당나라 현종황제는  장사성 산골로 피신하고 안록산이 황제가 되어 중국영토를  장악했다

누구도 당현종을 구출하는 세력이 없는 풍전등화 신세 였다

이런시기에 757년에 신라국의 허기,  그리고 후에 장보고, 정화부인, 그리고 전주도독 김원웅,  당나라에 지원군으로 참전하고 당나라를 회복하였으나 내란이 겹처서 당나라는  힘이 없어 망하고 후당으로 된다

당나라가 힘이없어지자  신라국으로 돌아온 박씨 정화부인과 남편인 각간  박예철이 강한세력이되어 위협하자  청해진에 웅거하는 장보고의 당나라 파견군사 세력을 이용하여 지키려 했다

그러나  장보고 장군이 암살 되어  김씨신라 진성여왕 시대는  박씨의 세력이 진입하여 시들어가고 있엇다

이 시기에 최치원이 875년부터  황소의 난을  최치원이 884에 까지  평정하였으나 당나라가 망하여  886년  귀국하였 다

이시기에 당나라가 망하여 최치원이 당에서 귀국하였어도 박씨세력이 추진하려는 김씨 신라왕권 쟁탈이  불리하기에  배척하여 멀리  정읍 태인 태산태수로 887년에 부임하였다

부안변산의 현존 민속 훈련 줄굿

그런데 888년에 장보고의 후손 장원이  5살 아들 장원을 888년 데리고 와서 살았다

최치원은 882년까지 당나라 군사로  황소의난을 진압했으나 884황소의부장 주전충이  구테타로 당을 멸망시켜 서 당나라의  군부세력과 같이  신라에 망명해 온 것으로 보인다 

가야 망국으로  망명한  태인허씨  (허기)가 757년 안록산의 난에 참전한  세력이 있는 태산태수로 부임하여  당나라에 망명한 장보고 후손이 돌아온다 

장보고 후손인 이들이 부안장씨이다 

어린 장원은 후에 장정필로바꾸어 안동전투에서 견훤격퇴 전공으로 후에 안동장씨 시조가된다

장정필의 의형제인 안동권씨시조  권행의 아들 권인행이  정읍 호족 허사문(태인사람)의 조카 사위가 된다

장보고를 숙청한  후에 들어선 박씨 신라국에서 장정필이 살수가 없었고 부안에서 장씨가 견훤의 부장으로 참전하여  견훤과 신검태자의 분쟁에서  작전 용검의 위치 정보유출로 대공을 세운 듯하다  

여기서 최치원과 장정필 권행 허사문이 묘한 의문의 관계를 느끼게 한다

여기서 보면 최치원은  당나라 파견군 세력 허이기와  장보고의 후계자 세력이 당나라 패망으로 정읍근처에서 계승하여 살았다

이리하여   진성여왕으로 세력이 김씨 신라왕 계승 망하자  김알지 후손인  김씨왕족이였던  궁예가  박씨왕권에 반대하는 북부지역 반란으로 북부 김씨호족 세력이 합세하였다

 백제지역 군장 견훤이 옛 장보고 세력지역인  남해안에서 민심을 부축여 후백제를 세웠다 

 

견훤은 본래 성은 이씨였으나 뒤에 견씨라 하였다.  어머니의 성씨는 확실하지 않으나, 가문은 광주(光州) 지역의 호족으로 추측되고 있다. 아버지 아자개는 지금의 문경시 가은의 농민 출신으로 뒤에 장군이 되었다.

견훤은 처음에 종군하여 경주로 갔다가 서남 해안의 변방 비장이 되었다. 876년에 정화부인의 남편 박예겸이 시중으로 진성 여왕 대 이후 권신들의 횡포로 정치 기강이 문란해지고 기근이 심하여 백성들의 유망과 초적의 봉기가 잇달았다. 이 때 견훤은 경주의 서남 주현을 공격하여 많은 사람들의 호응을 얻었고, 마침내 진성 여왕 6년(892)에 무진주(광주)를 점령하고 스스로 왕위에 올랐다.

 

궁예와 견훤이 강성하게 된  이유는 876년에 정화부인의 남편 박예겸이 시중으로 궁중세력을 장악하엿고 887년 진성여왕이 최치원의 세력을 들이려  하였으나  태산태수로 밀려났다   그리고 박씨임금으로  911년에  신덕왕이들어섰다 (신덕-경명- 경애왕)

박씨  구테타를 반대하는 신라김씨 호족이 당나라  참전하다 귀국한  허이기 최치원 장보고 김원웅 계통 후손 등 이 결집한  규합세력 이씨 견훤에 호응한 것으로 본다   

견훤은 이씨 성으로 보아   태인허씨 (인천이씨)로서 아자개의 양자로 들어가서 상수리 벼슬을 경주에서 하면서     서라벌과 당나라 해양 외교가 넓게 활동하였다

궁예는 김씨 왕족으로  견훤은 당나라 참전군사의 세력으로 이씨 성을 하사 받은 허이기의 후손일 가능성이 많다

 

후삼국 처음에는 신라국은  박씨 세력이 강했으나 후삼국 전투에서 약해진 박씨임금 경애왕 시기에 대구, 거창등 경주김씨 통치 호족들이 견훤의 백제군을 인도하여 단번에 서라벌을  함락해버렸다

 견훤이 박씨 구테타 정권 경애왕를 페하고 경주김씨  경순왕에게 신라왕권을  찾아 주었으나   경순왕을  지켜주는 군사를 주둔하지 못하여 다시 박씨 세력으로 포위되어 버렸다

김씨 왕족은 후백제 세력으로  의지하고 있엇고  밀려난 박씨왕족은  고려를 의지하여 항복히기를 바랬다

 

 

변산의 개골산 이름 개암사 개발은  개벌골현 절의 이름

 

그리고 박술희등 세력자가 고려에 중신으로 통합 강요하였고  오로지 왕자 마의태자가 부안 개골산으로  망명하여 살았다

삼국사기에 개골산은  금강산이라고 했으나 고려를 반대하는 마의태자가 생명을 보존시키려면  후백제 지역으로 부안 변산의 마의태자 후손 부안김씨로 보아야 한다

부안변산은 개불, 기뿔, 개화, 희안현, 부안현으로 되었다 

'개벌현'은   준말로 “갯고을” 이름이였다

김부식이 쓴'개골산'이라는  지명은 중국, 삼국 어디에도 없는  지명이다

삼국유사’에 기록된 마의태자 가계를 보면 마의태자의 조부 효종랑(孝宗郞)은 1000명이나 되는 화랑도(花郞徒)의 우두머리였다고 한다. 후백제의 견훤이 신라의 서울(경주)을 점령하여 경애왕(景哀王)을 폐위하고 경순왕을 새 임금으로 옹립한 것도 경순왕이 바로 김씨 세력가 효종랑의 아들이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즉 견훤은 신라의 민심을 바로잡기 위해 당시 가장 존경을 받고 왕족 혈통이 있는 효종랑의 아들을 새 왕으로 삼은 것이다. 이렇듯 마의태자는 친 후백제,인물   할아버지  화랑 효종랑 밑에서 자랐기 때문에 아버지 경순왕는 고구려에 항복하고 자기는 백제땅 부안변산 갯벌골현  개골산으로 떠나서  신라부흥 꿈의  망명지가  된  것이다.

그 세력이 고려 현종 시대부터 무신정권과 항몽전투, 일본정벌의 군부세력이 왕성하였다

                       

 원효대사가 백제시대 와서 거주하던 원효방은 마의태자의 세력을 보호했다

 

 무신정권 경대승 시대에 금나라에 망명한 금나라 시조 김행 즉 부안김씨 본명 김준으로  청나라를 세웠다

필자는 1972년에 부안 변산중학교에서  근무하며 들어본 '갯고을' 이름이다

그래서 '기쁠희' 자를 써서 기쁠은 '갯벌안쪽현'이란  뜻으로 희안현(喜安縣 )으로 후에는  보안현, 부안현이 되었다

변산은 곁산을 한문으로 곁변자 변산(邊山)으로 '곁산' '갯산' '갯골산'이름이였다

변산 이름 역시 가야국이 신라에게 망하자 가야인들이 망명하여 살아서 '변한'이름의 변산이 되었고 태인허씨 후손이 장악한 고려청자기 도요지가  이곳 부안과 전남 강진이 모두 태인허씨 동족 이자겸 소유로 보인다

변산의 이름을 상징하는 개암사( 開岩寺 )는  갯바위 갯발 갯벌의 이름으로 그곳을 '감교'라고 부른다

'개골산이 금강산'이라는 말은 모두가 김부식의 '삼국사기 기록'을 인용하고 있다

  백제를 추악하게 인식하고 신라인을 우월하게 보이려는 김부식의 변경된   기록일 뿐이다

 고려의 본거지 금강산에 살었다면 고려와 박씨 신라계 세력에서  마의태자는 암살을 면치 못했다

후백제의 궁중제사 터 전주의 고려 성황사에는 경주김씨 중심인맥으로 행하여 지금에 이른다

전북에는 산골 곳곳에 경주김씨 부족마을이 많다

장보고의 후손 역시 부안장씨로 장보고가 마의태자 망명세력의 후손으로도 생각 된다

견훤은 박씨 신라정권의 반정부 민심에서 일어난  경주김씨 신라와는 도와주는 역사의 계승이였다

                                       

마의태자 후손 부안김씨는 고려무신 정권시대 이의방, 두경승, 경주사람 이의민의 세력으로 이의방이 정중부에게 피살되자  여진과 금나라 망명하여  살았고 그 후손이 청나라 태조 누루하치로 중국을 통치했다

후백제 지역 갯고을 부안에서 길러낸 동양의 황제를 배출한 신라와 백제의 우정에서

후백제시대는 허사문이 태산태수로 호족이 되어  견훤의 군사정보를  장정필에게 주어서

안동전투에서 견훤이 대패하였다

그러나 견훤이 태자 신검에게 왕위를 찬탈되고 구속되어 금산사에 있을 때에   정읍 호족 유금필과 허사문이 견훤왕을 고려로  탈출하는데 도와 주었다

 

 조선후기의 실학자이며 역사가인 순암 안정복은 동사강목에서 김준의 형제가 삼형제였다고 하면서, 김준이 여진으로 망명할 때 두 형제를 두고 혼자서 갔다는 사실을 밝히고 있다.


그리고 현재 마의태자 후손은 부안 김씨이다. 부안 김씨는 경주 김씨를 조상으로 하고 고려 때 갈라져 나온 성씨이다. 현재 마의태자의 후손이라 주장하고 있는 부안 김씨 족보에 따르면 금나라 시조 김행 즉 김준 이 마의태자 김일의 아들이고, 김행은 여진으로 갔지만 나머지 두 형제는 고려에 남아 부안김씨의 조상이 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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