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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미예수님 “나주집단이 증오하는 장용주 알베르토신부님!!”에 대한 소견(所見)
나주의 가축집단이 가장 싫어하고 증오하는 사제 중에 으뜸이 아마 장용주 알베르토 신부님만큼 강도가 센 사제도 없을 것입니다. 그 주된 이유는 다음에 정리해보기로 하고 장신부님은 “진실을 전하고 정의를 위해서는 당신의 목숨 따위도 아랑곳하지 않으시는 올곧음”으로 “대한민국의 역사를 바로세우시고 권력의 폭압(暴壓)으로부터 무너진 광주, 전남민의 자존심을 반석(盤石)위에 온전히 놓이게 하신 그분만의 용기와 저력에 실로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다” 하겠습니다. 군사정권에 의해 폭도로 내몰린 1980년의 광주, 정치군인들에 의한 무차별적인 살육의 현장, 살점이 짓이겨 뜯기고 진압군,경의 곤봉에 두개골은 깨지고 대검의 서슬 퍼런 칼날로 마치 도살장의 가축보다 못한 도륙(屠戮)을 당하는 1980년의 광주. 그러나 광주, 전남도민은 폭력 앞에서 추호도 비굴하지 않았습니다. 위대한 광주, 전남도민은 결코 무릎 꿇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지금의 이 나라 대한민국의 민주주의가 정립되고 발전하는 전기를 마련한 장본인중 한분이 바로 장용주 알베르토 신부님이시라 감히 주장해 봅니다. 혹자는 그러시더군요. 얼빠진 전직 사제 “장홍빈이와 장용주 알베르토 신부님께선 친인척간”이고 “종종 전직 장홍빈이와 장용주 신부님을 혼동(混同)하시 분들이 계시는데 절대 혼동하지 마십시오. 정의롭고 진실을 전하는 일에 목숨까지 내던져 맞선 분 또한 맞설 분이 바로 장용주 신부님”이십니다. 그분의 역사적인 행적(行績)을 되짚어 왜 나주가축들이 장용주 신부님을 증오하는지 그들의 기인적인 만행도 간략하게 기술해 보고자 합니다. “장용주 알베르토 신부님”께서는 머나먼 이국땅 독일유학중 늦은 연세에 사제서품을 받으시고 1987년 계림동 본당 보좌신부님으로 한국에서 사제로서 첫발을 내딛게 됩니다. 1986년 6월 독일에서 귀국하시던 장용주 신부님께서는 독일 외무성에 부탁해 파우치(외교행랑)와 미군우편을 통해 광주에서 벌어진 5.18참상이 담긴 영상물을 국내로 반입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무장 경찰과 계엄군인 공수부대원들이 80년 5월 광주에서 저지른 만행을 낱낱이 고발한 충격적인 비디오테이프는 누가 언제 만들어서 배포한 것일까? 서슬 퍼런 군부독재 세력 하에서 계엄군이 잔혹하게 시민들을 학살하는 모습을 담은 비디오의 제작이 과연 가능했을까?" 80년 5월 광주항쟁의 진실과 그 처참함을 세상에 알렸던 '오월 그날이 오면'의 비디오테이프는 그렇게 해서 세상에 태어나게 됩니다. “객관성을 담보하기 위해 신문자료로 대체 합니다.” (아래는 뉴시스 보도내용 ‘07년 5월 16일 원문 그대로 게재함) 독일에서 사제서품을 받은 후 독일 본당에서 근무하고 있던 장 신부는 80년 5월에 충격적인 뉴스를 접했다. 한국 광주에서 군인들이 시민들에게 총을 쏘고 몽둥이를 휘두르는 모습이 독일 공영방송의 전파를 탄 것이다. 방금 전 본 뉴스였는데도 도대체 믿을 수가 없었던 “장 신부는 급히 전화를 들었다. 하지만 광주와의 국제선 통화는 이미 두절된 뒤였다.” 다시 서울로 다이얼을 돌린 장 신부는 또 한 번 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서울에 있던 지인들이 광주의 실상을 전혀 알지 못하거나 알더라도 폭동으로 오해하고 있었던 것이다. 심지어 독일 교포사회에서도 광주항쟁을 놓고 의견이 엇갈리기 시작했다. “광주시민들이 군부세력의 희생양이 되고 있다”와 “시민들 속에 친북세력이 있으며 이번 기회에 광주 놈들 씨를 말려야 한다.”라는 등의 거친 표현까지 난무한 것이다. 반면 독일의 방송은 "전두환 세력이 군권을 동원해 정권을 찬탈하고 있으며 광주시민들이 그 희생양이 되고 있다"며 일관된 논조의 뉴스를 내보내고 있었다. 결국 “장 신부는 역사적 진실을 알리는 데는 기록물만큼 효과적인 수단이 없다고 판단했고 평소 안면이 있던 독일 공영방송 프리랜서 여기자를 통해 영상물을 복사하는데 성공했다. 또 기회가 되는 데로 일본의 NHK와 미국의 CNN에서 흘러나오는 5.18영상물을 수집했다.” 하지만 문제는 이 기록물을 어떻게 국내로 반입하느냐는 것. 장 신부는 81년 한국에 귀국하는 인편을 통해 국내에 반입하려 했으나 그만 실패하고 말았다. 이후 6년이 흐른 87년에 귀국한 장 신부는 비디오테이프 2개를 반입하는데 성공했다. 하나는 독일 정부의 도움을 받아 파우치(외교행랑)를, 다른 하나는 미군우편을 이용한 것이다. 한국에 온 기록물들은 “당시 김양래 정의평화위원회 간사와 화가 홍성담씨에게 소개 됐고 장 신부를 포한한 이들은 광주 가톨릭센터에서 이틀에 걸친 작업 끝에 63분짜리 비디오테이프를 만들어 냈다.” 제목은 “오월 그날이 오면.” 비디오테이프의 영향력은 폭발적이었다. 이때까지도 국내에서는 5.18과 관련된 영상물을 전혀 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장 신부는 비디오 20대를 구입해 비밀리에 테이프 복사를 시작했다. “복사된 테이프는 전국 성당에 보내졌고 결국 얼마 지나지 않아 테이프의 존재를 확인하려는 인파로 광주가톨릭센터는 장사진”을 이뤘다. “이후 군부독재의 성명이 나왔다.” “유통되고 있는 비디오테이프가 북괴의 사주를 받은 불온 집단이 만들었다는 것이었다.” “이에 장 신부는 독일의 공영방송 기자가 촬영했으며 종교단체인 정의평화위원회에서 제작했다며 곧바로 반박 성명을 냈다.” 영상물이 어느 정도 알려지자 장 신부는 5.18 사진전과 길거리 음악회를 개최했다. 가슴속 응어리를 않고 사는 광주시민들의 반응은 이번에도 뜨거웠다. 특히 “영상물과 사진을 본 타 지역 신도들은 군부독재의 만행에 경악했고 이를 계기로 5.18 진상규명에 대한 국민들의 목소리가 들불처럼 번져나갔다.” ====================== 이하생략 ========================= 위에 인용한 신문자료에서 보듯이 과연 누가 목숨을 담보하는 일에 앞장서려 했을까요? 그 일이 발각되면 목숨을 부지할 수 없는 당시 상황에서도 양심을 속이지 않으셨고 구차한 목숨도 연명하는데 연연하지 않으신 배포와 담대함, 살아있는 정의가 온 누리에 퍼지도록 자신을 불사르신 세분의 사력(死力)에 저절로 고개가 숙여짐이 불초소생만의 외람된 현상일까요? 자랑스러운 그분들의 존함(尊銜)은 다음과 같습니다. “장용주 알베르토신부님, 5.18당시 전남대 학생회장이자 현 광주인권평화재단 사무국장 김양래님, 일명 해운대 화가이신 판화가 홍성담님” “장용주 신부님은 또 다른 사건의 이슈 정점에 섭니다.” 1987년 7월 26일 정의구현사제단의 문규현 외 3분의 신부님(박병준, 남국현, 구일모 등)의 북한 파견사실을 공표하게 됩니다. 시대적인 상황을 볼 때 군부가 정권을 장악하고 있었던 시절이고 공안정국(公安政局)의 서슬처럼 권력이 인권도 정의도 드러나는 싹조차도 싹둑싹둑 잘라내던 시절, 그 저변에는 한줄기 서광이자 양심과 정의를 대변하고 숨통을 트여주는 “정의구현사제단(약칭 정구사, 74년 태동)”이 있어서 그나마 암흑에서도 희망과 빛을 누릴 수 있었다 자부합니다. 당시 언론자료를 살펴보니 정권과 신앙이 결탁된 정황들을 발견할 수 있어 일면 쓴 웃음이 저절로 나오지만 본질이 장용주 알베르토 신부님에 관한 내용이기에 인용을 삼가고자 합니다. 그러나 장용주 신부님과 나주집단이 그렇게도 추앙하고 우군이자 절대 권력의 상징이었던 “이반 디아스 추기경”과 “장용주 신부님과의 격돌”은 반드시 되짚어야 할 부분이라 사료되어 적시(摘示)하고자 합니다. 1987년 9월 중순 “교황대사 이반 디아스가 중앙일보, 조선일보와 인터뷰”를 하면서(한계레신문 보도) “한국의 민주주의는 맹아기(萌芽期 )다. 다시 말해서 유치원생 정도로 볼 수 있다. 한국에서는 데모크라시(democracy)가 데모크레지(Democrazy)로 바뀐 것 같다. 문규현 신부의 방북은 우리교회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으며 교회의 정치참여는 바람직하지 않다.” 고 말했다. 위의 내용에 앞서 고찰 해볼 내용은 문규현 신부님과 그 일행의 방북사건과 관련, 주교회의 담화문이 발표되는데 내용을 살펴보면 “천주교 안의 합법적인 통일 논의의 필요성과 합당성을 주장하고 사제단의 파북 결정은 천주교 결정과 무관하다.” 특히 주교회의는 “사제가 방북하게 된 것은 임수경을 보호하려는 목적 하나 뿐이었다.고 강조” 당시 김남수 주교회의 의장(수원교구장)인 “법질서를 확립해야한다. ”정구사“ 소속 젊은 신부들의 철없는 행동으로 실정법상 책임을 물어야 한다.” 주장하여 당시 검찰 쪽에서는 원군을 얻은 셈이라 표현하고 있다. 하지만 그 후 문규현 신부님을 뺀 나머지 세분의 신부님은 집행유예로 석방이 된다. 당시 내용을 살펴보면 주교회의 담화문 내용과 이반디아스 교황대사의 주장은 다분히 정치적인 성향에 본질을 두고 있다 판단되며, 시대적인 상황에 가톨릭도 정치색으로 도배된 시절이었다고 필자는 감히 주장해 봅니다. 여러 신문을 종합하여 당시의 정황을 살펴보니 정말 웃지 못 할 해프닝의 역사를 살아온 것이 아닌가 생각되며, “그 속에는 정말 애민(愛民, 哀愍)의 삶과 정의와 인권, 분단에 아픔을 녹아내려는 정구사의 눈물겨운 고뇌도 엿 볼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장용주 알베르토 신부님의 활약상에 저절로 고개가 숙여”지며, “나주집단의 우군이자 천군만마인 이반 디아스 전 추기경의 비겁함과 타성, 복지부동은 지탄의 대상일 수밖에 없는 그런 분의 사임은 사실 늦은 감이 없지 않지만 그나마 천만 다행이라 감히 주장”해봅니다. 이반 디아스 추기경이 비유한 데모크레지(Democrazy)를 직역하면 “미친 민주주의 내지는 민주주의가 미쳤다“가 아닐까요? 그렇다면 당시 대한민국 국민이 미쳐 날뛰었다 하겠으며, ”정의구현사제단(정구사)은 미친 집단의 우두머리 쯤 된다는 것인데 어째 사제의 입에서 저러한 단어를 쓸 수가 있을까 하는 의문부호를 저절로 달수 밖에 없고 이는 약소국가의 서러움이자 인권이 말살되고, 권력의 시녀(侍女)로 종교지도자들이 앞장선 아픈 과거의 한 단면이며, 그러한 바탕에는 나주가 철석같이 믿고 의지한 당시 교황대사 이반 디아스추기경에 자리했다 하니 또 한 번조소를 금치 못할 일이 아닌가 사료“됩니다. 그러나 역사는 증명합니다. 장용주 신부님께서 행하신 정의로움과 민주주의를 위해 뿌리신 열정은 늘 기억하고 되새겨 우리나라가 지켜 나가야할 유무형의 유산이고 자산이라 감히 주장해 봅니다. 나주집단은 존경하옵는 장용주 신부님을 악의 축이나 마귀, 사탄으로 표현합니다. 왜일까요? 그 해답은 독자 여러분들께서 익히 잘 알고 계시니 중언부언(重言復言)하지 않겠습니다. 그러한 악다구니를 퍼 붓는 인간들이 정상적인 사고를 가진 인간들이라 평할 수 없으므로 잘못하면 장용주 신부님께서 신앙인으로서 쌓으신 수많은 업적에 누가 될 것 같아 더 이상의 논거를 삼가도록 하겠습니다. 장용주 알베르토 신부님과 연관된 내용을 비록 일부만을 인용 게재하지만 한국천주교는 물론 광주, 전남도민에게 5.18의 역사는 아픔이고 슬픔입니다. 만일 장용주 신부님께서 의지(意志)와 기개(氣槪), 지혜(智慧)와 담대함을 버리고 비굴하셨다면 지금의 광주, 전남도민들의 어떠한 처지에 놓여있을까요? 정말 아찔함과 천 길 낭떠러지로 곤두박질치는 아득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장용주 알베르토 신부님 그리고 김양래님, 홍성담님 진심으로 감사드리며, 여러분들은 민주주의가 존재하는 한 영원히 기억될 것”입니다. 정의라는 어휘(語彙)에는 반드시 님들의 이름 석 자가 늘 회자되리라 사료되며 이만 졸필을 매듭짓고자 합니다. 감사합니다. 불초소생 등대지기 올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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