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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 10 경, 연하반 산악회, 구례 10경,
전통음식
지리산의 10경
제 1 경 노고단의 운해
운무가 파도처럼 몰려와 주변의 산과 계곡을 휘감으면
구름바다를 이루어 마치 하계를 떠나 선계에 오른 환상
특히 5월 철쭉이 노고단을 분홍색으로 물들이는 것을 시작
한여름철과 가을에 걸쳐 피어나는 야생화군락은 천상의 화원.
제 2 경 피아골의 단풍
지리산 최대의 활엽수 지대인 피아골
10월 하순 피아골을 뒤덮는 단풍의 절정
산이 붉고 물이 붉어 사람 마음도 붉다.= 3홍.
제 3 경 반야봉의 낙조
지리산 제 2의 봉우리로 알려진 반야봉.
높이가 아닌 그 존재의 의미로서 제 2 봉.
불교적인 관점에서는 높이와 관계없이 제1봉.
황금빛 노을이 서서히 사라져가는 풍경은 장관.
제 4 경 섬진청류 (섬진강의 맑고 푸른물)
섬진강 뱃머리에 비친 지리산 자락의 그림자
남해로 흘러드는 섬진강의 푸르고 맑은 강물
백사장따라 섬진강 위로 두둥실 떠가는 돛단배
제 5 경 벽소령의 명월
벽소령 밀림과 고사목 위로 떠오르는 달빛
차갑도록 시리고 푸르다 못해 부서질듯 찬란
밤의 정막 속에서 고요히 떠오르는 벽소령 달빛.
제 6 경 불일폭포
불일폭포에서 떨어지는 오색영롱한 물줄기.
무지개가 어린 폭포수 소리는 천지를 진동.
소에 꽂힌 폭포를 거슬러 피어오르는 물안개
골짜기 밖으로 강물처럼 흐르는 듯한 구름바다.
제 7 경 세석평전의 철쭉
해발 1600m 세석고원의 수만그루 철쭉 군락.
고원을 붉게 물들여 꽃필 무렵 낭만적인 정경.
제 8 경 연하선경.
연하봉의 기암괴석 사이로 온갖 기화 요초
이곳에서 앉아 있으면 신선이 된 듯한 기분.
중산리에서 동틀 무렵 바라보이는 경관이 장관.
장터목을 사이에 둔 새벽여명의 실루엣이 환상적.
제 9 경 천왕봉의 일출
끝없이 펼쳐진 구름바다 저편 동녘의 새벽 여명.
붉은빛이 감돌다가 휘황찬란하게 솟구치는 용트림.
부채살 같이 사방으로 뻗치며 불쑥 솟아 오르는 일출
3대에 걸쳐 적선해야 볼수 있다는 전설이 있을 만큼 장엄.
제10 경 칠선계곡
지리산 최대의 계곡으로 수많은 소와 폭포가 장관
가득한 원시림 및 청정한 개울과 험한 산세가 절경
목욕하는 선녀들의 전설이 떠오를 만큼 아름다운 곳.
덧 말.
평생 한번을 접하면 여한이 없다는 지리산 10경
모두 볼 기회가 있다면 지리산 매니아라도 행운.
지리산의 10경을 찾는 종주 산행도 의미 있을 듯.
지리산 전도
구례 10경.
..심원계곡.........노고단 산장...왕시리봉.......*문수골
.....↖............성삼재 ................................*산수유마을.지리산 온천
.........←.....차일봉................화엄사.........*구례
...............
구례 10경
1. 섬진 청류
2. 피아골 단풍
3. 반야봉의 낙조(落照)
4. 노고단의 운해.
5. 산동면 '산수유꽃 군락(群落)’
6. 산동면 원촌마을 ‘수락폭포’
7. 130km ‘섬진강 벚꽃 길’
8. 문척면 ‘오산과 사성암’
9. '노고단 설경’
10. ' 천년고찰 화엄사’
.......................
구례 10경(十景) 外 널리 알려진 곳들
수락폭포. 원촌(院村) 마을. 서불 흔적.
<수락폭포>
산동면 원촌마을에서 4km 거리, 수기리에 있다.
여름이면 높이 15m 폭포 물맞이 인파로 붐비는 명소.
신경통, 근육통, 산후통에 효험이 있다고 소문난 때문.
피서철에는 전국에서 버스를 대여해 찾아올 정도.
여름에는 너무 많은 차량이 몰려와 주차장이 협소
찾아가는 길.
1. 구례 - 수기리 버스(06:00~18:50, 1시간 간격/45분 소요)
2. 서울 - 대전 - 전주 - 남원 - 동림교 - 송치리(승사교 앞)-
19번 국도 - 밤재터널 - 5.2km - 산동 교차로 진입 - 수락폭포
3. 부산 - 남해고속도로 - 120km - 하동 - 19번 국도(12km) -
하동읍 - 19번 국도(36.5km) - 구례 IC - 19번국도 남원방면(15km)
- 산동 교차로 진입 - 4.0km - 수락폭포
4. 광주 - 호남고속도로 - 곡성(9.5km) - 곡성읍 -
17번국도(15㎞) - 압록 - 17번 국도(8㎞) - 구례구역
- 18번국도 - 5.5km - 구례IC - 19번 국도 남원방면(15km)
- 산동 교차로 진입 - 4.0km - 수락폭포
<원촌(院村) 마을>.
원(院)은 이조 때 교통요지에 세운 국립여관(國立旅館)
전국도로를 <대> <중> <소>로 나눠 각 요로에 세운., 원
인가가 드물어 행인통행이 불편한 곳에 세운 원.. 두가지.
순천에서 구례, 곡성 남원, 장수, 무주, 충북 영동
원촌마을은 옛부터 2등급 19번 국도가 지나가는 곳.
하여, 옛날 남원부사가 묵어갔다는 순시비가 있고
마을뒤 논에는 옛날 원사가 있던 흔적이 출토된다.
이 원 주변에 취락을 형성한 것이 오늘날 원촌마을.
<서불 흔적.>.
지리산 동쪽 끝이 산청 함양 이면, 서쪽 끝은 구례.
구례는 지리산 종주의 들머리이자 날머리 거점이다.
구례는 지리산 북쪽 남원과 남쪽 진주를 이어주는 곳.
'진나라 서불이 500 동남동녀와 들렀던 구례.'
구례 서시천은 서불(徐市)을 잘못 읽어 유래된 지명.
남해군 이동면 양아리에 있는 큰 바위에 새겨진 글자.
'徐市題名刻字' 가로 50㎝, 세로 100㎝..크기의 문자.
진나라 서불이 이곳에 새긴 동양 최고의 화상문자.
지리산(삼신산) 불노초를 찾으러 왔던 서불의 흔적.
서불은 동자 5백명과 함께 남해를 거쳐 구례로 온듯.
해금강 거제도 우재봉 아래의 ‘서불과차(徐市過此)
진시황에게 불로초를 구할 수 있다며 이곳에 온 서불.
서불이 동남동녀 3천명과 함께 머물렀다는 전설의 고향.
'서불은 두 번에 걸쳐 우리나라를 찾아온 흔적.'
우재봉 해안 절벽에 배위에서 새겼다는 서불과차 글귀.
지금은 오랜 풍화작용으로 지워져 흔적만 남아있을 뿐.
지금은 약초가 많은 섬이라 하여 ‘약초섬’이라는 지명.
제주도 서귀포 정방폭포에도..徐市過此(서불과차).
2500년전부터 진나라와 교류가 있던 곳.
제주도 서귀포, 거제도 해금강 남해 일대.
서불의 발자취들은 그 사실을 뒷받침한다.
'남해 구례는 지금도 지리산으로 들어가는 관문.'
지리산 종주를 하다보면 구례구 역을 자주 찾게된다.
그러나, 그곳을 갈때마다 정작 구례는 지나치게 된다.
결국, 자주 찾아가면서도 구례에 관해 모르고 돌아온다.
'구례에 한번 관심 갖고 들러보는 것은 어떨까?'
.....................구례 지명의 유래..................................
백제 시대에 권력다툼으로 우정이 멀어졌던 두 정승
그 중 한 친구가 물러나 구례 봉성산 기슭에 살았다.
남은 한 친구인 정승도 뒤늦게 관직을 그만두고 귀향.
옛 친구와 얼싸안고 상견례 취했다 하여
예(禮)를 구(求)한 고장이라 하여., 구례.
............................................................
삼국시대부터 화엄사, 천은사, 연곡사 등 사찰이 많은 고장.
임진왜란에는 승병 본거지, 현대사에서는 이념 및 사상 전쟁.
반란의 역사에 휘말린 빨치산 역사의 증인들이 많이 살던 구례.
<토지면> 산간 주민들은 공비에 협조한 죄목으로
당시 죽임을 당했거나, 강제부역을 강요 당했거나,
또는 토벌군에 의해 강제로 고향을 떠나 떠돌이 생활
평화로운 삶을 구하려던 산간마을 주민들
전쟁과 이념은 너무도 집요한 불행의 그림자
아직도 반세기 전 그 상처는 아물지 않은 듯.
1948년 10월 여순반란사건부터 1955년 5월까지
이미 고령화 된 '토벌군과 빨치산 산증인들'
당시 여순반란사건 주력부대였던 14 연대가 빨치산이 된 이유.
동족 간 싸움을 피하려다가 빨치산으로 몰려 죄 없이 죽어갔다.
이젠 그 억울한 누명도 벗겨주고 억울한 혼들도 달래야 할 시기.
전남 북동부 끝에 있는., 구례군(求禮郡).
지리산국립공원을 낀 명승고적이 관광자원.
산지의 원예농업과 관광산업이 주된 수입원.
구례읍·간전면·광의면·마산면·문척면·산동면·
용방면·토지면 등 1개읍 7개면 69개 동리가 있다.
군청소재지는 구례읍 봉남리. 면적 441.71㎢,
인구 30,600(2003), 인구밀도 69.1명/㎢(2003).
청동기시대 이후의 유물들이 발견되는 유적지.
삼국시대에는 백제 구차례현(求次禮縣)이 설치.
757년 구례현으로 개칭후 곡성군 영현이 되었다.
고려 때 1018년 남원부에 예속되었다가
1143년(인종 21) 감무를 두어 독립되었고
이조 초에 군현제 개편에 따라 현감을 파견.
1499년(연산군 5) 주민들 역모로 남원에 합병
1507년에 복구한 적이 있고 별호는 봉성(鳳城).
1895년 지방제도 개혁으로 군이 되었으며,
1896년에 전남에 소속 1906년 행정구역 정리
고달면·중방면·외산동면·내산동면·소아면
남원 5개 면이 편입되어 행정구역이 확장되었다.
1914년 고달면을 곡성으로 ,
현내면·가사면을 구례면으로,
문척면·간전면을 간문면으로,
소의면·방광면을 광의면으로,
용강면·중방면을 용방면으로
토지면·마산면·외산면·내산면은 그대로
1932년에 내산면·외산면을 산동면으로 합하고,
1946년 간문면을 문척면과 간전면으로 나누었다.
1962년 구례면을 읍으로 승격했다.
소백산맥의 한 줄기인 지리산이 뻗어내려 험준한 산지.
구례 북동부와 남서부는 반야봉(1,732m)·노고단(1,507m)·
만복대(1,433m)·고리봉(1,248m)·따리봉(1,127m)·도솔봉(1,123m)
구례 중부와 서부는 천마산(654m)·깃대봉(691m)·요강바위산(546m)
섬진강은 구례 남부에서 지리산과 백운산을 끼고 굽이 돌아
하동군 화개를 거쳐서 남해로 흘러들며, 구례의 젖줄은 서시천
서시천(西施川)은 만복대에서 발원하여
구례분지 중앙부를 통과 섬진강으로 유입.
그밖에 북부 산지에서 발원한 연곡천·신도천,
남부 산지 효곡천·수평천이 섬진강에 흘러든다.
구례군은 큰 산과 하천, 평야를 골고루 갖춘 지형
구례군 중앙에 하천을 끼고 형성된 분지는 토양이 비옥
기후는 산간 내륙이라 한서 차가 심하고 비가 많이 온다.
구례읍 신월리에서 나는 배추는 전국적으로 유명하다.
토지면 문수리를 중심으로 하여 고랭지채소가 재배된다.
산동면 일대의 산수유 열매는 타이완으로 수출하고 있다.
한편 섬진강 황어는 구례의 명물.
구례장은 과거 목기시장으로 유명.
전라선이 구례와 순천 경계선 섬진강 따라 달리며,
순천시 구례구역에서 국도를 통해 구례 군내로 연결.
19번 국도가 남원을 거쳐 88올림픽 고속도로와 연결되고
남쪽으로는 순천과 하동을 지나 남해고속도로와 연결된다.
화엄사 관광도로가 있고 남원으로 연결되는 88올림픽 도로
구례군 내에 선사시대 유적으로 고인돌이 100 여기 이상 있으며
마산면 냉천리 돌도끼, 대산리·용두리·중방리 토기가 각각 출토
화엄사·연곡사·천은사 등 사찰 내에는 각종 유물·유적들이 보존.
유교 문화재로는 구례향교(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110호),
황현을 배향한 매천사우(梅泉祠宇:전남 문화재자료 제37호),
남악사), 임진왜란 때 전사했던 7인을 모신 석주관 7의 사묘
윤문효공신도비(尹文孝公神道碑:보물 제584호),
방호정(方壺亭: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32호),
김완장군전승유허비(전라남도 기념물 제50호)
설화로는 화엄사 각황전 복원에 얽힌 전설
사도촌전설, 온두동전설, 지리산에 얽힌 전설
민요는 노동요인 〈상사소리〉·〈상여소리〉·
<지경 다지는 소리〉〈상량소리〉와 〈육자배기〉
구례의 민요는 하나같이 애닯고 슬픈 음률.
고대사회부터 수없이 전란을 겪은 때문이다.
하여, 우리 민족 애환이 가장 깊게 담긴 민요.
<상사소리>
메: 어어이 여어허 여허어 여루우 사아앙 사아아 뒤이여
받: 여어이 여어허 여허어 여루우 사아앙 사아아 뒤이여
메: 여보시오 농부님네 요 내 한 말 들 어보소 아나 농부야 말 좀 듣소
한 일 자로 쭉 늘어서서 입구 자로만 모를 심세
받: 어어이 여어허 여허어 여루우 사아앙 사아아 뒤이여
메: 남훈전 달 밝은디 순임금의 놀음이요
학창의 푸른 도솔이 산신님의 놀음이요
오뉴월이 당도허니 우리 농군 시절이로다
패랭이 꼭지에다 계화를 꼽고서
매화라기 춤이나 추어보세
받: 어어이 여어허 여허어 여루우 사아앙 사아아 뒤이여
<자진 상사소리>
메: 어이 여 여허 여허루 사 앙사 뒤여
받: 여이 여 여어 여허루 사 앙사 뒤여
메: 나렸단다 나렸단다 암행어사가 나렸단다
받: 여이 여 여어 여허루 사 앙사 뒤여
메: 충청도 중복장은 요지가지가 열려 있고 적벽강 추야월은 아그데 다그네 열렸네
받: 여이 여 여어 여허루 사 앙사 뒤여
<육자배기>
민요 판소리에는 무속적인 요소도 들어있고
충·효·열녀 같은 유교적인 관념도 있으며,
신선 사상이나 불교적 관념도 깊이 배여있다.
판소리 음률에는 육자배기 토리만 있는게 아니고,
'추천목'이나 '경드름'과 같은 경기도 민요의 선율,
'메나리조'와 같은 경상도 민요의 선율도 들어 있으며,
심지어는 한시의 시창이나 시조·
가곡성(시조창 같은 사대부 성악)
염불과 같은 불교 음악도 들어 있다
“저 건너 갈미봉에 비가 몰려 들어온다.
우장을 두르고 지심 매러 갈거나,
진국명산 만장봉에 바람이 분다고 쓰러지며
송죽 같은 굳은 절개 매맞는다고 훼절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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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례구역은 노고단을 찾는 등산객들로 붐비는 곳,
그곳에서 화엄사 입구나 성삼재로 올라 산행을 시작.
하여, 구례 관광명소를 지나치게 되는 경우가 대부분.
'노고단 하산길에도 구례구역에서 곧 귀가.'
그러나, 한번 쯤 시간적 여유를 갖고 구례를 찾아도 좋을 듯.
2003년 가을에 구례 군청 앞 '풍년식당'에 들른 적이 있었다.
점심 시간에는 앉을 자리가 없다고 하여 늦게 갔는데도 만원.
'지리산 종주 전 밥 한끼 잘 먹고 산행할 생각.'
소문대로 30~40가지 나오는 밑반찬은 우리나라 전통 음식.
일인당 7천원이지만 4명이 먹으면 일인당 6천원씩 받았다.
4명이면, 반찬이 절약되기에 돈을 덜 받아야 한다는 생각.
저렴한 가격에 비해 진수성찬인데 놀랐고
맛갈스러운 음식 맛에 한번 더 놀란 기억.
식당 주인 동의를 얻어 남는 밑반찬 싸갖고 지리산 종주.
님은 반찬 버려진다면 아까워 차라리 싸갖고 가겠다고 제의.
주인 역시 기꺼이 반찬을 종류 별로 비닐 팩에 싸줘 고마웠다.
'음식을 소중하게 여기는 마음이 서로 통했던 탓.'
구례는 우리나라 고유의 전통음식이 가장 잘 보존된 고장.
전통음식 수준에 비해 밥 값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저렴.
구례의 음식점 명소는 탐방 후에도 좋은 추억으로 남는다.
지리산 자락을 한바퀴 둘러보면 곳곳마다 음식 맛이 다르다.
지리산을 가운데 두고 문화 풍습 전통 역사가 전혀 다른 탓.
지리산 자락 둘레에는 한반도의 전통음식이 모두 모여 있다.
'도대체 한반도 전통음식 뿌리는 어디에 있을까?'
단군신화를 보면,우리나라 민족의 대표적인 음식은 쑥과 마늘.
쑥은 봄처녀들이 산과 들에 나아가 나들이 겸 즐겨캐는 산나물.
마늘은 백합과에 속하며 고추가 대중화되기 전까지 대표적 채소.
마늘은 중앙아시아 및 지중해 연안에 널리 분포.
기원전 4,000년경 고대 이집트, 그리스 로마 시대부터 마늘이 재배
피라밋의 벽화, 성서(민수기)를 보면 병사들의 힘을 돋우는 강장제.
마늘은 파속이고 산달래와도 맛과 향이 비슷해 먹으면 힘이 솟는다.
하여, 사찰 음식은 마늘 파 고추가루 등 양념 재료를 넣지 않는다.
강장제 효과가 있는 양념재료가 성욕을 자극해 수도에 방해되는 탓.
장기간 해외 여행을 하다보면, 가장 고통을 겪는 것이 입맛.
고향 떠나 살다보면, 어머니 손맛이 담긴 고향음식이 그립다.
다른 불편함은 참을 만 해도, 가장 견디기 어려운 것은., 입맛.
입맛은 고향마다 나라마다 다른 독특하고 고유한 것.
음식맛은 민족의 풍습과 전통, 체질과 사상을 빚는 듯.
전통음식.
일본을 영국에 비유한다면 우리나라는 이탈리아에 비유.
국민성, 역사, 문화, 풍습, 지리적인 여건 등의 공통점.
영국을 보면 일본이 보이듯 이탈리아는 우리나라의 거울.
세계에서 가장 풍부한 문화유산을 가진 나라, 이탈리아.
세계에서 가장 많은 방송국과 정기 간행물을 갖는 나라.
국민 98%가 카톨릭 신자, 자유분방함과 다양성, 보수성.
우리나라처럼 봄, 여름, 가을, 겨울이 뚜렷한 반도국가.
마늘요리, 스파게티(국수), 피자(빈대떡). 맵고 짠 요리.
만두와 비슷한 라비올리, 수제비처럼 생긴 뇨키. 술, 춤.
우리나라 민족은 가정마다 고유한 전통음식 맛을 갖고 있다.
그것은 보이지 않게 가정과 고향과 국가를 지켜주는 원동력.
외국여행을 하다 보면 가장 먼저 부딪쳐오는 장벽이 음식이다.
우리나라 사람은 전통 음식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아내 음식에 길들여진 남편은 가정에서 벗어나지 못하듯.
20년 조강지처를 괄시하다가 혼난 '고개 숙인 남자' 사례.
.........고개 숙인 남자.............
"아내는 밥상 위의 신 김치와 같아서
있어도 있은 둥 만 동.. 없으면 아쉽다“
사회적으로 명사로 알려졌기에
평소 위풍당당한 가부장적 태도로
펑퍼짐한 아내 몸매까지도 흉보던 남자.
나는 그가 이 시대에 보기 드문 영웅 같았다.
악 바친 아내에게 이혼 당하기 전까지는 그랬다.
아니, 이혼 후에도 한동안 내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아내와 헤어지면 일주일도 버틸 자신이 없는 나.
그의 위풍당당해 보이는 행동이 부럽기까지 했다.
그는 누구 눈치 볼 것도 없는 자유인이 되자
한 것 바람 피웠고 끼니마다 맛있는 외식도 했다.
그 자리에 가끔 심심풀이로 불려 나간 적이 있었다.
아니, 차라리 내가 원해 나갔던 것이 맞는 듯.
내가 살아온 세상과 너무 딴판인 그는 호기심의 대상.
중년의 자유분방함 탓에 얼마 못가 몸이 허약해졌던 그.
아무리 젊은 미녀가 유혹을 해도 그에게는., 한 폭의 그림.
'그러면 그렇지 제까지 것이
잘난 척을 해 봤자 별 수 있어.'
평소 유난히 잘난 척 하던 그는 너무 풀이 죽어 있었다.
그는 젊은 미녀보다는 아내의 음식 맛이 귀하다고 토로.
그는 뒤늦게 조강지처였던 아내의 소중함을 느꼈다고 했다.
그의 입맛이 20년 넘게 아내의 음식에 길들여졌던듯
아내와 헤어지기 전까지 전혀 못 느꼈던 사실이었다.
못견디게 그리운., 아내의 된장찌개와 속풀이 해장국.
'아!~~ 아내의 손맛이 담긴 된장찌계..된장찌계.'
잠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잠꼬대할 지경이었다.
결국, 이혼한 아내를 찾아가 옛 잘못을 빌었다.
그 된장찌계는 어딜 가도 사먹을 곳이 없는 음식.
'식은 된장찌계라도 먹게 해달라고 통사정.'
아내는 옛정을 감안해 그의 문간방 하숙만 허락했다.
위자료로 이미 아내 소유인 옛 집에 사는 것만도 다행.
아직은 아내의 식은 된장찌개도 감지덕지하는 찬밥 신세.
아내의 마음 돌리려고 월수입 모두 내밀고
배보다 배꼽이 큰 전세 계약으로 얹혀 살며
아내에게 용서받을 날을 손꼽아 기다리는 그.
아직, 안방의 문턱조차 밟지 못하는 처지.
문간방 신세에서 벗어나는 것이 그의 소원.
.............................................
우리나라 전통음식은 발효식품이며
그것들은 장맛에 뿌리를 갖고 있다.
고추장 된장 간장 김치 두부는 우리나라 전통음식의 원료.
고추장 원료는 메주, 쌀, 전분질 원료, 엿기름, 고춧가루.
이것들이 발효식품으로 대중화된 때는 16세기 말~ 17세기.
임진왜란 전후 맥시코 고추가 일본을 거쳐 한반도에 도입.
이조 후기 '농가월령가'를 보면, 고추장 담는 절기는 삼월.
일본에서 고추가 전래되기 전까지는
산초 천초 호초 등을 이용한 매운 맛.
우리나라에서는 초장(椒醬)이라고 했다.
고추가 도입되면서 고추장으로 명명.
1613년 지봉유설(芝峰類設)에 의하면
고추는 일본에서 온 겨자라는 뜻이다.
'왜겨자(倭芥子)'는 임진왜란 때 일본에서 유입.
우리 민족을 독살하려 가져왔다는 설도 분분했다.
그러나, 우리민족 입맛에 맞아 즐겨 먹었다는 기록.
............................................................
-'고추'의 유래. -
훈몽자회(訓蒙字會)에 의하면
고(苦)가 쓴 맛을 가리키지만
여기에 불에서 탄다는 뜻이 더해,
초(椒)에 고(苦)를 붙여.,고초(苦椒).
임진왜란 전후 식생활 양식에 큰 변화를 가져온 고추장.
우리 민족의 터질듯한 울분을 화끈하게 달래준 고추장 맛.
16세기에 술안주로 고추 또는 그 씨앗 자체를 즐겨 먹었다.
고추장은 임진왜란 이후 정착된 우리나라 전통음식.
17세기에는 고추가루에 천초를 섞어 담근 장을 '초시(川椒醬)'
점차 된장 간장 겸용장에 매운 맛을 첨가시킨 고추장으로 발전.
오늘날 고추장은 우리나라의 가장 대표적인 전통음식이 되었다.
우리나라 고추는 가지과 일년생 초본식물.
붉은 색이 태양이나 불을 상징하며 잡귀를 쫓는 색.
한반도 민족이 고추에 관해 갖고 있는 토속신앙이다.
하여, 아들을 낳으면 금줄에 고추를 꿰어 대문에 건다.
잡귀를 막으려고 장담은 뒤에 새끼줄에 빨간고추와 숯.
그것을 장독에 두르거나 독속에 집어 넣어 장을 담궜다.
이렇게 우리조상들은 고추를 일상생활에 많이 이용하였고,
괴산 청결고추는 조선초기부터 괴산읍 제월리에서 처음 재배
고추의 원종인 쇠뿔고추가 오늘날 괴산 청결고추의 원조이다.
쇠뿔고추 원산지는 괴산군 괴산읍 제월리, 정용리
소뿔 모양 고추라 토속적인 이름으로 부른 쇠뿔고추.
쇠뿔도 단김에 빼는 우리 민족 정서에 잘 맞는.,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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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민족의 특성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매운 고추맛'.
매운 고추 맛의 특성이 가장 잘 담겨있는 음식이 고추장.
무학대사가 기거하던 순창군 만일사를 찾아가던 이성계.
어느 농가에서 고추장을 곁들인 점심을 먹고 환궁한 후
순창 고추장 맛을 못잊어 진상해 유명해진 순천 고추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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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에서도 기후가 따뜻한 곤명 지방에 있는 고추나무.
한반도의 된장은 고구려 시대부터의 식품으로 알려졌다.
삼국시대에 와서 메주에서 된장과 간장을 분리하기 시작.
즉, 고구려 시대의 된장은 요즘 고추장과 된장 맛의 중간.
하여, 고추장, 된장은 고구려 시대로부터 비롯된 것 같다.
콩은 단백질이 풍부한 두부의 원료이자 메주의 원재료이다.
우리나라 옛 조상은 중앙아시아 초원을 누빈 민족.
고대사회에서는 사냥한 야생동물의 고기가 주 식량
인구가 늘고 사냥이 어려워지자 가축을 키웠던 유목민.
소와 양의 젖과 가축의 고기를 섭취해 단백질 보충.
가축 사육 또는 사냥이 어려우면 콩으로 단백질 섭취.
사냥한 고기가 주식이던 유목민에겐 꼭 필요한 단백질.
유목민은 단백질을 섭취 못하면, 힘 쓸 수가 없기 때문.
아시아 초원에서는 사냥감이 많아 고기를 충분히 먹었다.
그러나, 한반도의 좁은 영토에서는 생활양식이 뒤바뀐다.
'유목생활 관습이 차츰 농어민 생활 위주로 전환.'
사냥 및 목축업에서 농본사회로 바뀐 후부터 단백질 부족.
그 부족한 단백질을 보충할 만한 음식은 야생콩 뿐이었다.
현재 학계 조사 자료에 의하면 한반도는 야생콩의 원산지.
'한반도의 조상들은 부족한 단백질을 야생콩에서 보충.'
야생콩은 겨울에도 저장 방법에 따라 단백질 공급원이었다.
결국 농본사회로 바뀌자 야생콩이 풍부한 한반도로 민족 이동.
콩으로 만든 발효 음식과 김치는 겨우내 저장해 먹을 수 있는 음식.
하여, 우리나라에서 콩을 원료로 한 발효음식은 세계 최고 수준.
아울러 야채가 귀한 겨울에 김치는 야채를 대신한 비타민 공급원.
콩 발효음식과 김치는 한반도 민족에겐 한겨울을 넘기는 생존 수단
사냥을 못하고, 채소가 귀한 겨울에도, 단백질과 비타민의 공급원.
콩으로 만든 두부 된장과 김치는 오늘날까지 우리나라의 전통 음식.
한반도 민족의 생존수단인 전통음식 유래를 하나씩 알아보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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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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콩은 우리민족 조상 뿌리가 유목민 임을 알게 해준다.
우리나라 민족은 콩이나 두부를 좋아하는 사람이 많다.
콩으로 만든 음식이 우리 입맛에 맞는 이유는 무엇일까?
신구석기 시대에는 사냥한 고기로 주식이었던 민족.
자연에서 사냥할 동물이 줄자 농경사회로 바뀐 민족.
콩은 사냥한 동물 고기를 대신할 수 있는 단백질이다.
따라서, 우리민족은 야생콩 섭취로 단백질을 보충.
우리민족의 이동경로를 보면 야생콩 분포지역이다.
한반도에서 사냥할 동물이 줄어들자 야생콩을 섭취.
하여, 우리 민족은 고기 대신 콩에서 단백질 보충.
그러나, 고기는 없어서 못먹을 만큼 좋아하는 음식.
하여, 고기와 두부를 좋아하는 입맛은 조상이 유목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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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맛은 수천년 뿌리를 갖고 있는 유전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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콩은 야생의 들콩(덩굴콩)으로부터 재배 작물로 발달했다.
중국의 동북지방 및 한반도에 분포되어 있는 야생콩이 재배.
중국에서는 5곡의 하나로 4,000년 전부터 재배되었다는 기록.
우리나라에서는 삼국시대 초기(BC 1세기 초)부터 재배되었다.
콩으로 만든 음식은 우리의 삶을 지탱해 주는 대표적인 먹거리.
콩은 단백질 함유량이 많아 곡류보다 육류에 가깝다고 알려졌다.
콩의 주성분은 단백질(40%)과 탄수화물(30%), 그리고 지질(20%).
이외에 각종 비타민과 칼슘, 인, 철, 칼륨 등의 무기성분이 있다.
콩에 깃든 이들 영양 성분들은 쇠고기 등심 그것보다 월등히 높다.
콩의 영양소는 생리작용을 활성화시키고 성인병 예방에 도움 준다.
콩 깻묵은 사료·비료로 쓰고, 또 콩은 콩나물로 길러 먹는 원료이다.
콩의 효능은 ① 항암 효과. ② 비만,골다공증 각종 성인병 예방.
③ 당뇨 억제 효과, 고혈압 예방 효과, 콜레스테롤 감소, 심장에 좋다.
④ 레시틴, 뇌에 건강과 활력을 준다. ⑤ 풍부한 비타민 E로 노화방지.
⑥ 사포닌, 비만해결 ⑦ 변비 예방 ⑧ 비타민 B1, B2, E, 리놀산 영양분.
⑨ 자연계의 에스트로겐(여성호르몬) 등등이 풍부하다고 알려져 있다.
한반도 우리민족의 음식에서 주종을 이루는 원재료는 콩이었다.
콩은 우리가 즐겨먹는 두부 콩나물 이외에 어떤 용도로 쓰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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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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콩은 몇 년동안 보존할 수 없어도
장은 몇 년도 보존할 수 있는 음식.
제4 빙하기 후 인간이 살아남은 비결
겨울철에는 장으로 단백질 요소를 보충
김치와 아울러 각종 영양소를 섭취한 듯.
콩나물 재배로 겨울철에 야채를 섭취하듯.
'장(醬)'이라는 개념은 중국에서 온 것으로 간장을 뜻한다.
된장, 고추장, 청국장, 즙장, 막장, 담북장, 춘장까지 포함.
'장(醬)'은 중국기술이 한반도 통해 콩으로 만들어져 왜에 전파.
기원전 2세기경의 문헌에 시는 본래 중국에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고,
외국에서 들어온 것이라 했고, '시'를 '고려취'라고 언급한 것으로 보아,
장(醬)의 시초인 '시'는 우리나라 조상이 중국에 전한 것으로도 여겨진다.
일본의 장(醬)은 고려의 장인 말장이 일본에 들어가 '미소'라고 불렀다.
즉 일본의 장 '미소'도 한반도에서 건너간 장(醬)이란 사실을 알 수 있다.
'삼국지 위지동이전' 기록에 의하면 고구려 사람이 만든 '선장양(善藏釀)'
어떤 발효식품인지 몰라도 술 빚기, 장 담그기 등의 기술이 좋았다는 내용.
구체적 문헌자료는 '삼국사기' 신문왕의 '폐백품목'에서 '장(裝), 시'라는 용어
[신당서]에는 고구려 유민이 세운 발해의 명산물로 '시'가 언급되고 있다.
이러한 장(醬)은 시초에는 육장(肉醬) 즉 '해'와 '혜'라는 것은 동물성인 것.
그 후 나온 '곡장'은 '시'로 고구려에서 시작된 콩으로 만든 발효식품.
삼국시대에서 통일 신라시대에 이르면서 장(醬)의 역사가 좀 달라진다.
'시'라는 것이 본격화되는 것을 [제민요술]에서 볼 수 있는데 '시'는 메주.
메주를 소금물에 담가 숙성시킨 것이 오늘날끼지 이어진 된장, 간장이다.
고려시대에 내려오면 조미품으로 '장(醬)'과 '시'가 중요한 역할
그 후 이조시대에는 장(醬)이 정착되며 음식 맛을 주도하게 된다.
된장은 칼날 강도를 높이는 용도로도 쓰인다.
담금질 전 칼날에 바르면 쇠가 더욱 강해진다.
하여, 칼을 만드는 옛 장인들은 된장을 써왔다.
'된장은 옛부터 칼을 잘 쓰는 민족의 식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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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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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국장은 전쟁 때 단시일 내 만들어 먹을 수 있는 장.
청나라에서 전해온 것이라 청국장(淸國醬)이라 부른다.
청국장은 청나라 군대의 전투식량에서 유래되었다 한다
'1당 100'일 만큼 싸움을 잘하는 징기스칸의 몽골군.'
징기즈칸의 몽골군이 아시아와 유럽을 단기간에 휩쓴 비결.
양고기 쇠고기 육포로 식사를 해결할 수 있어 기동력을 발휘
이조시대 군사 편제를 보면 전투병력 : 수송병력 = 100 : 30
병자호란 때 청나라 군사는 청국장을 전대에 갖고다니며
끼니 대용으로 꺼내 먹음으로써 기동력을 높였다고 한다.
만주 지역에서 벼농사가 시작된 것이 19세기 중반 이후.
만주가 콩의 원산지인 것을 떠올린다면 그럴듯한 이야기.
청국장은 고구려 기마 민족 음식에서 유래되었다고도 한다.
김치.
예전에 처가집 장맛과 김치 맛은 혼인 조건 중 중요한 척도.
고향 사람끼리 사둔을 맺으려 하던 풍습도 전통음식 맛 때문.
우리나라 민족의 삶 중에서 가장 큰 행복조건은 건강과 입맛.
제 아무리 진수성찬 밥상이라도 김치 없으면 밥 먹은 둥 만 둥.
잘 익은 김치 한가지가 열가지 진귀한 음식보다도 입맛을 돋군다.
여자의 미모는 남자를 사로잡지만
남자를 굴복시키는 것은 음식의 맛.
특히, 잘익은 김치와 장맛이 그렇다.
'우리 민족의 김치에 대한 생각.'
여자의 미모는 한때에 불과하지만,
김치 맛은 죽을 때까지 영원한 매력.
김치는 동물성을 가미한 동식물성 음식.
........................김장 김치의 유래...........................................
이조 중종 22년 '저(菹)'를 '딤채 조'라 했다.
채소를 소금에 절여 두면 수분이 빠져 침채(沈菜).
<침재- 팀채- 딤채>로 말이 바뀌어 <짐채-김채- 김치>
이 이론에 근거하여., 침장(沈藏)이 곧 김장.
김장은 겨울동안 먹을 채소를 늦가을에 담궈 저장.
배추 무에 미나리 갓 마늘 파 생강 부재료를 사용.
소금 젓갈 고춧가루로 간을 맞추고 시지 않게 보관
대체로 입동 전후 5℃ 전후에 저장하면 제 맛이 유지.
김칫독을 땅에 묻고 짚방석을 덮어 알맞는 온도 유지.
짚방석은 방한 뿐만 아니라, 미성물을 숙성하는 효과.
김장김치는 지방 별로 종류와 특성이 각각 다르다.
북쪽은 기온이 낮아 간을 싱겁게 하고, 양념도 담백
채소의 신선함을 살리고, 남쪽은 대부분 짜게 담군다.
짜면 맛이 없어 젓국을 많이 쓰고 고기 국물도 섞는다.
젓국을 많이 쓰면, 마늘 생강 고춧가루도 많이 넣는다.
김치가 시고 삭는 것을 막으려면 찹쌀풀을 넣어 발효 맛.
고추가루는 김치의 젓산을 배양하는 요소
김치 맛을 상하지 않게 하는 작용을 한다.
오늘날 인스턴트 식품 대중화로 인해 전통음식은 쇠퇴.
구례 지역에는 아직도 우리나라의 전통음식이 살아있다.
구례 음식값이 싼 이유는 수산물과 농산물이 풍부한 때문.
지리산, 섬진강, 곡창지대 남해가 가까운 구례.
우리 조상의 전통음식이 유래된 곳을 알려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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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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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부터 우리 민족은 흰옷을 즐겨 입었던 백의민족.
백의민족 줄임말 백민(白民)이 곧 백성(百姓)이었다.
하얀 옷을 즐겨입는 일백 성씨가 모인 우리나라 민족.
언제부터 흰옷을 즐겨 입었는지 확실히 알 수 없지만,
부여로부터 삼한, 삼국, 고려, 이조 시대에 이르기까지
상당히 오랫동안 흰색을 신성시하고 흰옷을 즐겨 입었다.
흰색은 순색(純色)이라 하여 청정 순결 광명 도덕의 상징.
백의민족은 우리나라 민족정신을 뜻할 만큼 사랑을 받았다.
그러나, 5행사상에서 흰색이 서쪽이라 금지해야 한다는 이론
1357년 고려 공민왕은 흰색 모시옷을 입는 것을 금지
이조 때 조식은 흰옷은 소복이므로 금해야 하다고 상소
1398년(태조 7) 이조시대에는 남녀 흰옷 착용을 금지령.
1401년(태종 1), 1425년(세종 7) 궁궐 안 흰옷 금지령.
1505년(연산군 11) 도성 안 여자들의 흰색 치마 금지령.
1738년(영조 14) 흰옷 착용을 엄히 금해 차츰 사라졌다.
그러나, 아직도 우리나라 민족이 선호하는 흰옷.
하얀 속옷, 하얀 와이셔츠, 하얀 브라우스, 등등.
우리나라 전통 음식에서도 흰색은 무척 사랑받는다.
시베리아 벌판 바이칼 호수에서부터 이동한 민족.
백색 설원에서 태어나 백색 설원으로 돌아가는 삶.
떡국은 마치 우리 민족 근원을 알려주는 듯한 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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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전통적 설날 음식은 떡국이다.
떡국은 나이를 한살 더 먹는 것을 상징하는 세찬 음식.
설날에 흰떡을 끓여 먹는 것은 태양 숭배 신앙에서 유래
새해의 첫날이 밝아오므로 밝은 흰색의 떡을 사용한 것
떡국을 둥글 둥굴 써는 이유는 둥근 태양을 상징하는 것.
설날에 찬 술을 마시는 이유는 봄을 맞이하는 뜻이 있다.
<설날음식>
쌀밥, 오곡밥 사골된장국, 사골우거지국, 떡국,
떡, 떡 만두국, 흰떡, 주악, 인절미, 수수 전병,
떡찜, 떡볶기, 약식, 꽃약과, 다식, 유과, 조과,
편육, 갈비, 족편, 전, 버섯전, 녹두빈대떡, 나물,
삼색나물, 볶음, 떡잡채, 사태떡찜, 쇠고기 찹쌀구이,
생치구이, 전복초, 밤초, 대추초, 김치, 동김치, 장김치,
수정과, 식혜, 사과, 배, 귤, 기타 제수용 음식.
구례는 옛날부터 예의범절을 중요하게 여기는 고장.
우리나라 4대 명절의 으뜸인 설날에 관해 알아보자.
..................설날의 유래.........................
설날은 한해가 시작되는 첫날 음력 1월1일.
설은 '설다, 낯설다. 사린다 삼가한다'는 뜻.
또 섧다는 말로 '슬프다'라는 뜻도 담겨 있다.
선조 때 학자 이수광 `여지승람'에 설날은 '달도일(怛忉日)
칼로 자르듯 마음 아프고 근심에 차 있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한 해가 지나 점차 늙어가는 처지를 서글퍼하는 의미로 보인다.
'한해를 새로이 세운다는 뜻 "서다"에서 유래.'
한해의 첫발을 조심스럽게 내딛는 뜻 깊은 명절.
설날을 '삼가하는 날'이라 하여 집안에서 지낸다.
일년동안 탈 없이 지낼 수 있기를 신에게 기원한다.
설날 아침에는 일찍 일어나 새 옷인 설빔을 입고
돌아가신 조상들에게 절을 드리는 차례를 지낸다.
그런 다음에 웃어른들을 찾아 뵙고 세배를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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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배할 때 서로 행복을 빌고 덕담을 주고 받는다.
각종 세시기(歲時記)에는 설을 신일(愼日)이라 하여
'삼가고 조심하는 날' 새해를 시작하라는 뜻깊은 설날.
..................설날의 민속놀이 및 풍습....................
<윷놀이>는 정월 초하루 부터 보름 사이에 명절놀이.
인도에서 시작, 실크로드 따라 중국을 거쳐 들어왔다.
윷놀이로 흉년이나 풍년 또는 전쟁의 승패를 점도 쳤다.
<고누놀이> 할아버지는 바둑,아버지는 장기,아이는 고누.
오목처럼 제 말이 나란히 셋 되면 상대말을 하나씩 떼내기.
<제기 차기>는 남녀노소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는 놀이.
발을 한번씩 딛고 차는 `맨제기' 그리고 '양발차기'.
제기차는 발을 땅에 딛지 않고 계속 차는 `헐렁이'
<널뛰기> 큰 명절에 성숙한 여자들의 대표적인 놀이이다.
정초에 널을 뛰어야 발에 가시가 밖히지 않는다고 여겼다.
하여, 외출이 자유롭지 못해 운동부족인 여성을 위한 놀이
<팽이치기>는 겨울에 사내 아이들이 얼음판에서 많이 했다.
당나라에서 삼국시대에 한반도로 들어와 일본에 건너가 '고마'.
<세배 돈> 안방마님이 몸종을 친척, 지인에게 보내 새해 문안인사
문안 받는 집에서는 세배상을 한 상 차려주며, 세뱃돈을 주던 관례.
오늘날은 자녀들이 일가친척, 지인에게 부모 대신 문안인사를 한다.
<복조리> 정월 초하룻날 아침이나 섣달 그믐날 밤 자정(子正)이 지나,
대로 엮은 조리를 사서 벽에 걸어 두는데, 이 조리를 <복조리>라고 한다.
<복(福)을 쌀을 이는 조리와 같이 일어 얻는다>는 의미에서 비롯된 풍속
<야광귀(夜光鬼) 쫓기> 설날 밤에 신을 잃어버리면 그해 운수 흉(凶)
귀신이 자기 발에 맞는 신을 신고 갈까 봐 신을 방안에 들여 놓는다.
밤에는 불을 모두 끄고 일찍 자며, 대문 위에다 체를 걸어 귀신 쫓기.
귀신이 체의 구멍을 세어 보다가 새벽닭이 울면 물러가게 하기 위함.
<연날리기> 정월 초하루부터 보름까지가 본격적인 시기.
그해의 재앙이나 못된 액을 연에 실어 날려보낸다는 풍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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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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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월 대보름.....................................
옛부터 한 해의 첫 만월을 매우 중요하게 여겼던 우리나라.
보름달은 여성의 성욕이 가장 극에 달하는 시기 라는 믿음.
대보름은 여성의 사랑 고백이 허락되는 일년 중 유일한 하루.
설날부터 대보름날까지는 세시 풍속도 다양하고 먹거리도 풍성하다.
대보름을 상징하는 음식은 약밥이고 쥐불놀이가 인기 있는 전통놀이
아이들이 나이 만큼 볏단 끈을 풀어 태우며 달님에게 소원을 빌었다.
밤 깊어지면 아이들은 밥과 나물을 훔쳐 비벼 먹는 풍습이 있었다.
훔쳐갈 밥을 장만해 두어도 아이들은 닭서리까지 하다가 경을 쳤다.
보름에는 오곡밥, 두부, 취나물, 콩나물 등등을 먹었고 아침에는 찰밥
<귀밝기 술> 대보름날 새벽에 청주 한 잔을 데우지 않고 마시기.
<부럼깨기> 호두 은행 잣을 깨물며 피부병 나지 않게 해달라 빌기.
<달집 태우기> 낮에는 윷놀이 판, 저녁이면 마을 동산에 올라 달맞이
동쪽 하늘에 뜨는 달을 맞이하여 "달 봤다." 외치고 절하며 소원 빌기.
그런 다음 장작, 볏짚, 대, 솔가지로 높이 쌓아 만든 달집에 불사르기
<액연(厄鳶) 태우기> 겨우내 날리며 놀던 연을 줄끊어 날려보내기.
연에다 '액(厄)'자를 써서 띄우다가 해질 무렵 그 연줄을 끊어버린다.
액운을 멀리하고 태우기 위함. 이날 이후 연을 날리면 상놈이라 호통.
<남녀 줄다리기> 여인들이 이겨야 풍년이 든다 하여 남정네들이 져주기.
대보름달과 대지는 여성의 상징이기에 풍년을 기원하는 뜻에서 양보했다.
<다리 밟기> 다리에 병이 생기지 않기를 바라면 수표교 같은 다리를 밟기
<쥐불놀이> 남자들이 논두렁에 불을 질러 쥐를 없애 그해 풍년을 바라기.
이때 여자들은 손으로 빈 방아를 찧으며 쥐가 없어지라고 소리를 지른다.
<먹거리>부럼, 약밥,차조인절미,·나박김치,·고사리,·시래기,·호박·가지·취나물
쌀에 콩,·팥, 등을 섞은 오곡밥은 3 집 밥을 먹어야 좋다고 하여 이웃과 나눴다.
<개 굶기기> 보름달을 보고 밤새 짖을 개를 미리 굶겨서 허기져 못짖게 하기.
여름철 개밥에 파리 끼는 것을 막고 그 해가 개가 병 걸리지 않게 하려는 의도.
"개가 보름 쇠 듯 한다"는 말은 즐거워야 할 명절에도 굶어야 하는 신세란 의미.
<탑돌이> 대보름날은 '발렌타인 데이' 같은 연인의 날.
남녀가 탑을 돌다가 마음 통하면 사랑을 나누던 축제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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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리밟기 풍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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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력 정월 보름에 행하는 세시풍습 중 하나.
자기 나이 만큼 다리를 왕래하는., 답교놀이.
사람의 다리(脚)와 물위 다리(橋)는 같은 음.
자신의 나이 만큼 다리를 밟으면 한해 동안 무병.
다리의 병을 피할 수 있다는 속설 때문에 크게 성행.
남녀노소 모두 나와 정월 보름달을 즐기며 어우러졌다.
풍물패도 동원되어 신명을 돋구었고, 행사가 매우 풍성.
서울의 수표교나 광교의 다리밟기, 송파 다리밟기,
함흥 만세교 답교놀이 등 전국 어디에서나 행해졌다.
정월 보름달 다리밟기는 원래 그해 풍년을 기원한 놀이
고려시대 남녀가 다리 위에 모여 밤새도록 다리밟기.
심지어는 법관이 그것을 금지하고 체포하기까지 했다
정종실록에는 "정월 보름경 13일부터 3일 동안
야간통행금지를 해제해 숭례문과 흥인문을 열고
시민들이 성 밖으로 나가 다리밟기하는 것을 허락"
일제강점기까지도 전국에서 행해지다가
1945년 8·15해방 이후 거의 소멸되었다.
다리밟기는 이조시대 <동국세세기>에 상세히 기록.
'…장안 남녀들이 온통 저녁 종소리를 들으려고
열운가(지금의 종로네거리)로 몰려든다. 종소리를
다 들은 다음 흩어져서 여러 곳의 다리로 가서 산책
밤을 새워 행렬이 끊이지 않는 답교놀이.
이러한 다리밟기 풍습은 임진왜란 당시 사라졌다가
서울 광교와 수표교에서 다시 성행했다는 최남선 기록.
'…장안의 남녀들이 종가로 모여들어
보신각의 저녁 종소리를 듣고나서
각곳에 있는 다리로 흩어져 가서
밤새도록 다리 위를 왔다갔다 하였다.
서로를 어깨와 다리가 부딪힐 정도로 붐비면서
날나리와 장고를 울리고 시를 읊기도 하며
물에 비친 달을 보며 1년 동안에
좋은 일이 있길 빌었다.'
당시 보쌈이 성행했던
청계천 광통교와 수표교
먹고 살기 어려운 과부를 자루 속에 넣어 약탈
역시 홀몸인 홀아비와 동침을 시키는 과부 약탈
일부종사(一夫從事)로 개가(改嫁)가 불가능하고
재력없는 과부와 홀아비를 구제한 초도덕적인 풍습.
총각을 커다란 가죽 자루에 담아 약탈,
신원을 숨긴 채 여인과 합방시키는 풍습.
청계천 광통교나 수표교에서의 납치 사건
....광해군 때 유몽인의 어우야담(於于野談)....
정덕년이라는 유생이 과거를 치루러 한양에 올라와
친구를 만나고 올 때 광통교에서 나타난 장사 네 명
유생은 가죽주머니에 보쌈당한채 어디론가 끌려갔다.
유생이 보쌈에서 풀려나왔을 때는 어느 규방.
예쁜 규수가 다소곳 유생을 반기며 맞이했다.
그날밤 유생은 규수와 한 이불 속에서 하룻밤.
새벽을 알리는 파루(罷漏)의 북소리가 들려오자
규수는 일어나 사라지고 유생은 다시 보쌈 신세.
보쌈에서 풀려나니 전날 밤에 납치되었던 그 곳.
이조시대 정월 대보름은 여성에게 성이 개방된 밤.
여성이 밤새 다닐 수 있는 일년 중 유일한 하룻밤
이날은 밤늦게 광통교 수표교에서 총각 약탈이 성행.
여성의 사주팔자에 살이나 액운(厄運)이 끼었을 때
단명 운이 있을 때 외간남자와 합방하면 액막이 설.
총각 또는 유생을 강제로 보쌈해 살풀이 하던 풍습.
혼자 살기 어려운 과부를 위해
총각을 보쌈 하는 풍습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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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한가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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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은 음력 8월 15일이고 우리말로는 '한가위'.
한 = 正, 가위 = 中心(가운데) 즉, 정 가운데란 뜻
추석의 유래는 약 2천년 전 신라 유리왕때 부터이다.
'가위' 란 신라 유리왕 때 길쌈 놀이인 '가배'.
'길쌈'이란 신라시대 실 짜기 시합을 의미한다.
한가위 한달 전 6부 신하의 부인들이 궁궐에 모여
두 편으로 나누어 한 달 동안 베를 짜는 경연대회
한가윗날 진 편이 이긴 편에게 잔치와 춤으로 갚음.
그 갚음을 '가배'라 했고 훗날 '가위'란 말로 변했다.
유리왕은 백성들이 기쁜 마음으로 즐겁게 살기를 바래
'도솔가'를 지어 부르게 했고,여러 일거리를 만들었다.
그가 일으킨 산업의 한가지로 유명한 것이 길쌈이었다.
유리왕은 길쌈을 장려하려 6부의 부녀자들에게 내기.
왕이 지어준 도솔가를 부르며 밤을 낮삼아 열심히 일.
왕비 및 궁중 관리들이 참석한 가운데 유리왕이 판결
이긴 편에서는 환성을 지르며 덩실덩실 춤을 추었고,
진 편은 그동안에 별미 음식을 마련해 이긴 편을 대접.
송편, 기름에 지진 고기, 전 등 갖가지 별식과 밤, 대추,
머루, 다래, 배 등이 마련되면 모두 둘러앉아 함께 즐겼다.
둥근달이 떠오르면 갖가지 놀이를 즐기며 밤을 보냈다.
서라벌에서는 이 날을 가배라 일컬었고 신라의 큰 명절
달의 고마움에 감사하고 달을 위해 만든 반달 형태 달떡.
한가위 올게심니는 풍년에 감사하고 명년 풍작을 비는 놀이.
밭고랑을 기는 행위도 소박한 다음해 풍년을 기원하는 행위.
소놀이, 거북놀이,농악, 씨름, 강강술래, 원놀이, 가마싸움
추석에 조상무덤에 가서 무성한 잡초 베어주기가 벌초.
추석 새벽에 사당을 모신 종가집에 모여 고조까지 차례
강강수월래는 서로 손과 손을 맞잡고 뛰어놀던 단순한 춤
고대 원시사회 부족 구성원들 간에 단합을 위한 공동 축제.
강강수월래 놀이는 임진왜란 때 충무공 학익진 전술로 발전.
명량해전 때 충무공이 거느린 전선(戰船)은 불과 12척
이에 비해 왜선(倭船)은 3백 50여 척이나 되었다고 한다.
중과부적이라 충무공은 아낙네들을 모아서 군복을 입히고
수십 명씩 무리를 지어 산봉우리를 돌게하는 위장술을 사용.
이때 아낙네들이 산봉우리를 돌며 불렀던 노래가 강강수월래
군사들도 뒤섞여 불렀던 계기로 임진왜란 후 전국적으로 발전.
추석날 차례를 마치고 난 뒤 알맞은 시간에 소놀이.
먼저 마을 사람들로 구성된 농악대가 풍악을 울린다.
상쇠의 선도에 따라 한바탕 풍악과 함께 소놀이 시작.
두 사람이 허리를 굽히고 그 위에 멍석을 뒤집어 씌우며
뒷사람은 새끼줄 꼬리를 달고, 앞사람은 막대기 두 개 뿔
소 흉내를 내며 농악대와 마을 사람들은 부자집을 방문한다.
"소가 배가 고프고 구정물을 먹고 싶어 왔으니 달라"
그 대문 앞에서 외치면 주인이 나와 일행을 맞이한다.
소를 앞세우고 앞마당에 들어가 풍악 울리고 노래와 춤
주인집에서는 술과 떡과 찬을 차려 모두에게 대접한다.
마을 사람들은 한참 놀다가 다시 다른 부자집으로 간다.
이렇게 여러 집을 찾아다니며 해가 질 때까지 어울려 논다.
소놀이를 할 때는 농사를 가장 잘 지은 상머슴으로 뽑아
소등에 태우고 마을을 돌며 시위하며 다음해 풍년을 기원.
선머슴 노고를 치하하고 포상하는 뜻에서 소에 태우는 영광
올게심니란 벼, 수수, 조 등을 기둥 대문 위에 걸어두기.
올게심니 곡식은 다음해 씨앗 또는 떡을 해서 사당에 천신
올게심니란 다음 해에 풍년이 들게 해달라는 기원의 뜻이다.
밭고랑 기기는 전라남도 진도에서는 8월 14일 저녁 놀이.
아이들이 밭에서 발가벗고 자기 나이 만큼 밭고랑을 긴다.
이 때 어른이 밭둑에 놓고 간 음식은 몸에 부스럼 방지 목적.
이날은 설날, 단오와 함께 우리나라의 3대 명절.
추석이 오면 여름 더위도 물러가고 서늘한 가을철.
추석 무렵엔 오곡이 무르익고 온갖 과일이 풍성하다.
추석이 오면 농사일도 거의 끝나 갈 무렵이고
남쪽에서는 햇곡식이 나오고 풍년을 즐길 시기.
객지에 나돌아 다니던 식구도 다 고향에 모인다.
오려송편·박나물·토란국 송이국·고지국이 추석음식.
추석은 옛부터 조상 대대로 지켜 온 우리나라의 큰 명절
햇곡식과 햇과일로 조상들에게 차례 지내고 ,이웃과 나눔.
아무리 가난한 사람도 떡을 빚어 나눠 먹었다는 명절.
"일 년 열두달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
추석에는 아침을 먹은 후 조상 산소에 성묘를 하러간다.
'추석은 즐겁운 날인 동시에 감사를 잊지 않은 날.'
햅쌀밥 짖고 송편 빚고, 술도 빚어 신도주(新稻酒).
조상께 수확의 기쁨을 알리는 행사가 추석 차례이다.
새옷 차림으로 차례를 지내고 음복하고,
음식을 이웃과 나누어 먹은 다음에 성묘.
추석날 남자들은 씨름판에서 힘 겨루고,
여자들은 널뛰기를 하고 저녁에는 달맞이.
식구들은 평상에 앉아 둥근 달을 보며 담소
남쪽 지방에서는 강강술래를 부르며 춤 춘다.
주, 과, 포, 탕, 적, 혜, 나물, 침채(김치), 청장.
정해진 굽이 있는 제기에 담아서 제사 상을 차린다.
제기 위치는 가풍 지방에 따라 조금씩 다르게 차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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