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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꼼뽀스뗄라' 유감(有感)
2015년 6월 10일
먼동이 트는 시각에 알베르게를 나섰다.
전번과 동일한 시간대에 까떼드랄(Catedral de Santiago de Compostela) 앞 오브라도이로
광장(Praza do Obradoiro)에 섰다.(praza do는 스페인어 plaza del의 갈리씨아어)
4년 40일만이다.(2011. 5. 1~2015. 6. 10)
이즈음의 4년은 엄청난 변화를 가져올 세월인데도. 놀랍게도 전혀 변하지 않은 그 때 그 길을
같은 계절, 같은 시간대에 걷기 때문인지 느낌도 비슷했다.
그래서 이 구간은 <메뉴 까미노이야기 48번, 카미노 프랑세스(28)> 글로 대신한다.
1시간 반이면 족한 길을 두고 왜 서둘었느냐고?
옛 순례자들에게는 감격하며 까미노 최후의 밤을 보내는 기쁨의 산(Monte do Gozo)이었다.
형극의 길을 무사히 마치게 됨으로서 감사와 찬양의 밤을 보내는 알베르게였다.
그 때는 오늘날처럼 뻬레그리노스가 많지 않았으므로 이 알베르게가 북적대거나 산띠아고의
순례자 사무소(Oficina del Peregrino) 앞에 장사진을 이룰 까닭이 없었다.
'COMPOSTELA'(라틴어 Compostellae/순례자증서) 1장 받기 위해 마냥 기다리는 일도 없었
으므로 새벽같이 서두르지 않아도 되었고.
그러나 지금은, 특히 성수기에는 산띠아고 데 꼼뽀스뗄라로 몰려오는 뻬레그리노스와 관광객
의 증가가 가히 폭발적이다.
관광객이 이른 아침부터 오브라도이로 광장으로 몰려나오고 7개의 까미노 루트에서 모여드는
뻬레그리노스로 광장 인근의 순례자 사무소 일대도 매일같이 온 종일 장마당을 이루고 있다.
순례자 사무소 앞에서 장시간 기다리지 않으려면 순례자 사무소가 오픈하는 아침시간에 맞춰
당도해야 하므로 새벽길을 걸은 것이다.
순례자 사무소의 '꼼뽀스뗄라' 발급 장소가 바뀌었다.
동일 경내의 2층에서 단층 집 넓은 공간으로.
2층을 오르내릴 때 서로 부딪히기도 하고 좁은 공간에서 번거로웠던 점이 개선된 것이다.
이에 더해 공급력(꼼뽀스뗄라 발급 요원)을 대폭 확충했음에도 수요(순례자)가 워낙 폭증하기
때문인지 대기 시간이 더욱 길어가는 것 같다.
'꼼뽀스뗄라'의 효시는 9c~10c에 만들어진 가리비(concha/진주)껍질 형태의 배지(badges
/insignias)였단다.
위조, 매매가 성행함으로서 13c부터 위조가 어렵고 효과적인 소위 '까르따스 쁘로바또리아스'
(Cartas Probatorias/evidentiary letters/증거서장)가 발행되었는데 꼼뽀스뗄라의 전신이다.
'꼼뽀스뗄라'도 문양을 바꿨고 '쎄르띠피까도 데 디스딴씨아'(Certificado De Distancia/Certi
ficate of distance/장거리 순례증서)가 새로 등장했다.
4년 전에는 없었는데.
'꼼뽀스뗄라'보다 약간 크며 원하는 순례자에 한해서 걸어온 까미노의 출발지와 출발일, 산띠
아고 도착일 등을 상세히 기록, 3€를 받고 발급한다.
유료(1€를받거나 Donativo Box에 임의로넣게), 무료를 발급자 재량으로 하던 '꼼뽀스뗄라'의
발급비는 1.5€로 확정되었고.(지금-2019년-은 꼼뽀스뗄라는 무료로 발급한단다)
장장 320km ~ 1.000km의 까미노를 모두 걷고 받은 꼼뽀스뗄라와 겨우 100km 걷고 당당하게
받은 그 것 간의 불가피한 괴리감을 불식 또는 극복하기 위한 궁여지책이라 할까.
100km로는 감히 견줄 수 없는 장거리를 걸었음을 확인해 주는 '거리 인증서'로 홀대받아 상처
입은 자존심을 달래주기 위해서?
순례자 사무소 측도 이를(꼼뽀스뗄라 발급 상의 문제점) 인정하고 있는 것 아닌가.
"새 문서(Certificado De Distancia)는 수년에 걸쳐서 자신의 순례에 대해 더 상세하게 기록한
공식문서를 원하는 많은 순례자의 요구에 대한 응답" 이라고 설명하고 있으니까.
(nuevo documento responde al deseo que muchos peregrinos expresaron desde ha
ce varios años para que quedasen registrados mas datos de su peregrinacion./
new document reflects the desire that many pilgrims have expressed for several years
to have an official record of more details of their pilgrimage)
오픈 시간(8시 30분) 전에 순례자 사무소에 도착하여 맨 먼저 발급장에 들어선 늙은이.
830여km를 걸어온 최고령자에 대한 경의의 표현인가.
아무런 의사표시(원하는)를 하지 않았는데도 '꼼뽀스뗄라'와 '쎄르띠피까도 데 디스딴씨아' 를
만들어 증서통(桶)에 넣어주며 돈 받기를 사양한 발급 직원.
1.5€인 꼼뽀스뗄라와 3€의 거리인증서에 증서통 값까지(2€) 전액을 받지 않았다.
중세때부터 시행해 온다는 '꼼뽀스뗄라'라는 이름의 순례자증서.
이 증서가 순례의 목적이 아니며 비록 28.5cm * 20cm의 약간 두꺼운 종이 1장에 불과하지만
그 안에는 그 까미노를 걷는 동안에 겪은 희비애락을 비롯해 역정의 모든 것이 함축되어 있다.
그럼에도 도보100km, 자전거 승마 200km 등 편법 '꼼뽀스뗄라' 수령의 횡행을 조장하는 듯한
까미노 당국자들로 인해 마침내 '거리인증서'까지 등장했다.
다음에는 어떤 류의 증서가 나올까.
전혀 대기하지 않았고 6.5€로 평가될 수 없는 공대도 받았는데 순례자 사무소를 나왔을 때 왜
상쾌한 기분이 아니었을까.
옛 순례자들은 이 문서 자체에 어떤 신력(神力)이 있다고 믿었다지만 이즈음의 뻬레그리노스
에게 꼼'뽀스뗄라'는 어떤 의미인가.
앞의 언급을 다른 말로 바꾸면 마치 남이 가진 보물(귀중품)이 자신에게 없는 것이 참지 못할
굴욕인 듯 애오라지 그 것만을 위해 올인하고 당국자들은 이에 적극 호응하고 있는 형국같다.
남발하는 '꼼뽀스뗄라'에 대한 비판이 평가 절하를 넘어 자칫 무용론으로 번지지 않을련지.
그렇다 해도, 이 시대라 해서 예전 못지 않게 진지한 순례자가 없는 것은 아니다.
가시적인 길에서 보이지 않는 자기의 길을 찾아가는 구도자들.
20c말(1900년대 말) 이후에 초라하나마 꽂혀 있는 사망 비석 또는 비목이 그 증표다.
뻬레그리노스의 기하급수적 폭증에 반비례하듯 희소해 가고 있지만.
유일한 평생 계획이 까미노 7개 메인 루트의 완주라는 뻬레그리노도 있다.
노르떼 길에서 몇 시간 동행한 그는 매년 한 루트씩 걸으려 하는데, 80대 노인이 단 2회, 불과
7개월여 만에 다 이룬다는 것이 도저히 믿기지 않는다는 중년 알레만이다.(본 메뉴 -續까미노
이야기 22번글 참조)
공산권에서 벗어나기는 했으나 경제적 어려움을 겪고 있는 일부 유럽인들이 묵는 알베르게는
대부분이 부상병동(負傷病棟)에 다름 아니다.
빠듯한 비용과 시간 때문에 만신창이인 부위들을 자가치료해야 하고(싸매고), 걷기를 멈출 수
없는 그들에게 까미노는 고난과 형극의 길이지만 오로지 신앙심으로 극복하고 있다.
'꼼뽀스뗄라'가 천금 보다 더 귀한 은사(恩賜)가 아닐 수 없는 그들에게는 대단히 미안한 언급
임을 밝혀 둔다.
행운을 가져온 알베르게 소동
순례자 사무소 경내에는, 전에는 없던 장거리 버스(ALSA/스페인 국내도시는 물론 유럽 전역)
안내소와 뜨렌(tren/train) 매표소가 설치되어 있다.
귀국을 서두르느라 장마당을 이루고 있는 순례자들을 선망(?)의 곁눈질을 하며 2밤을 보낼 곳
(Albergue Seminario Menor/Av.de Quiroga Palacios, 2).)으로 향하고 있는 늙은이.
남은 길이 아득한데도, 단지 알랭 팀과의 재회만을 위해 천금 같은 이틀을 보내는 것이야 말로
어이없는 낭비지만 약속은 이행을 전제로 하는 것.
프랑스 길을 마친 날 밤(2011년 5월 1일/Finisterre로 떠나기 전날)에 산띠아고 데 꼼뽀스뗄라
최초의 밤을 보냈으며, 뽀르뚜 길을 마치고 솜뽀르뜨(Somport/Camino Aragones 출발지)로
출발하기 전 2밤에도 묵었던(2번,3번째) 집이다.
오브라도이로 광장에서 지름길로 가면 1km 미만인 동남쪽 고지대에 우뚝한 대형 건물.
4년 전과 달라진 것이 있다면 2€ 인상(12€/비수기는 10€)과 접수실 분위기의 변화가 몬떼 도
고소와 한판 같다는 것이라 할까.
과묵하나 속정이 있는 젊은 오스삐딸레로(hospitalero)에서 바뀐 오스삐딸레라(ospitalera)
가 매정스럽게 사무적이라는 것이.
프랑스 길과 뽀르뚜 길을 마치고 묵은 편안한 세 밤은 전적으로 그 젊은이가 만들어 준 것인데
오로지 룰(rule) 밖에 없는 이 젊은 여인에게서 뭘 기대할 수 있겠는가.
관리인인 듯 한 초로남이 아부엘로에게 한적하고 편한 위치의 베드가 배정되도록 애쓰는데도
'차례대로'라는 이유로 차갑게 뭉개버리는 새파란 여인.
내일 알랭 팀과 합칠 요량으로 1박 입실료(12€)만 지불했는데 희한한 일이 벌어졌다.
도움을 주지 못해서 미안한 생각이 들었는지 내 무거운 백팩을 메고 앞서 간 이 초로남.
3층(4층?)의 대형 강의실처럼 넓고 긴 홀 중앙에 위치한 베드 옆에 백팩을 내려놓고 내 표정을
살피던 그가 불쑥 꺼낸 말은
"띠에네스 인떼르넷?"(Tienes internet?/인터넷 할 줄 압니까)
높은 위치인 알베르게에서 아래쪽 공원을 가리키며 "그 곳에 가면 위피(WiFi/와이파이의 스페
인어 발음)가 가능하지만 위피시설이 있는 알베르게로 아예 옮기는 것이 낫지 않습니까."
이 곳(세미나리오 메노르)은 초대형 알베르게지만 위피가 설치되어 있지 않다는 말도 된다.
알랭과 재회할 장소와 시간 논의는 시각을 다투는 일이다.
파띠마~리스보아의 뽀르뚜 길 출발권역인 뽄떼베드라의 이사벨, 뽀르뚜의 로저 교수, 루쎄나
등에게 방문 일정 통보도 빨리 해야 한다.
대학인순례자협회, 나바라대학교의 레르가(Dr. Jesus Tango Lerga) 교수 등과의 약속 이행,
기타 인터넷 작업이 필요한 일이 많은데 199명 수용의 거대 알베르게에 위피 시설이 없다니.
4년 전에는 핸드본을 휴대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시설 유무에 무관심했으며 로저 교수가 내민
(집에 전화하라고) 핸드폰도 사양함으로서 홈리스(homeless)로 오해받기도 했지만.
홈리스 아님을 확인시켜 주기 위해 아내와 3남매의 신상을 털어놓기도 했으니까.
(이 해프닝이 15세 연하인 그와 나 사이가 교우관계로 발전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당장의 내게 위피는 알베르게 선택의 조건으로 절대 불가결인데 왜 전혀 무관심했을까.
초대형 알베르게라는 규모에 압도되어 의심의 여지가 없었는가.
침대까지 배정받았기 때문에, 밤 늦게도 공원까지 오르내려야 하는 불편이 여간 아니겠지만
감수하려 한 내게 이보다 더 고마운 제의가 있는가.
어떤 이유로 알베르게를 옮긴 적이 있기는 하나 무수한 밤 중에서 단지 한 밤을 보낼 뿐인 집
(알베르게)이기 때문에 시설의 호불호가 이유인 적이 없는데 행운의 이동 소동이 될 줄이야.
리펀드(refund)처리가 끝난 후 초로남이 소개해 준 몇개의 알베르게 중에서 택한 곳은 오스딸
룻스 앤 붓스(Hostal Roots & Boots).
서쪽으로 가는 피니스떼레 길가로 산티아고 까떼드랄과의 상거가 지호지간의 위치에 있다.
(무작위로 택하였을 뿐인데 향후 까미노 따라 도착한 3회에 도둑맞은 후 방문이 불가피해진
경우를 포함해 4개월 사이에 4번에 6박7일을 묵으며 Familia에 다름아닌 관계가 되었으니까)
세미나리오 메노르 보다 3€가 비싸고 2층 벙크(세미나리오는 단층 침대)에 비좁기는 하지만
위피를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으므로 편리하고 안정감을 갖게 되었다.
내가 보내는 것보다 저쪽에서 보내오는 소식을 제 때에 바로 받을 수 있으니까.
당장에 이사벨의 메시지를 받았다.
대 환영이라며(muchos saludos y esperando tu visita) 상호와 새 주소(CASA PEPE DO
MARCO, NUMERO CUATRO EN EL MARCO TOMEZA), 위치(500ms antes del Albergue
de Pontevedra)와 전화번호(MI NUMERO DE TELEFONO ES 606 30 84 54) 등을 알려온 것.
폐지하느니만 못한 전통이라는 이름의 무료식사
급한 일들을 처리한 후 느지막한 오후에 오브라도이로 광장으로 나갔다.
광장 옆(북쪽) 호텔(Parador Hostal dos Reis Catolicos)이 제공하는 저녁식사를 하려고.
1954년에 국영 관광호텔(Parador de Turismo)로 변신하였으나 16c에 왕립병원으로 출발한
후 까미노를 마친 순례자들이 3일간 숙식을 할 수 있는 곳이었단다.
지금은 고급(Lujo/Luxuary) 관광호텔이 되어 예전 같은 숙박은 불가하나 오랜 전통을 잇는다
는 뜻으로 뻬레그리노스에게 식사 제공 프로그램을 시행하고 있다.
아침(desayuno), 점심(comida), 저녁(cena) 등.
단지 10명('꼼뽀스뗄라'원본 또는 사본을 가진 뻬레그리노스 중 선착순)에게 제공하기 때문에
명맥만 유지하는 형식적인 행사지만 아무튼. . . . .
무료의 매력보다 전통을 맛보는(행사참여) 의미쪽에 무게가 실리는 식사지만 그나마도 1시간
반 이상 바쳐야 안정권에 들 수 있디.
저녁식사 시간은 19시로 되어 있으나 17시경부터 열이 만들어지며 대개 18시 이전에 10명을
초과하기 때문이다.(아침은 09시, 점심은 12시로 되어 있는데 저녁식사 희망자가 가장 많다)
저녁식사는 4년 전에 체험한 내게 매력있는 행사가 되지 못하나 어차피 무료한 시간이라 대기
열에 가담했는데 1시간 전(18시 이전)에 10명을 초과했다.
안내문을 읽은 지참자(遲參者)들은 모두 돌아갈 수 밖에.
최장 2시간~1시간 반을 기다린 10명 뒤에 겨우 20~30분쯤 전에 온 3명.
그들은 어떤 요행을 바랐을까.
십시일반의 상조정신으로 보면 1~2명쯤은 양해하고 포함시킬 법 하나 냉혹하게 자르는 것을
전번에 목도했는데 호텔 담당자가 3명이나 더 달고 가겠는가.
어물쩍 끼어가려다가 가차 없이 잘렸고, 10명이 안내된 골방은 전번(4년 전) 그 곳이며 식탁도
그 때 그 식탁이지만 그 위에 놓인 음식은 서민에서 빈민으로 추락했다.
풍전등화처럼 위기에 직면해 있는 스페인의 경제 탓일까.
호텔 로비는 전보다 더 북적대는데도 밑지는 장사를 하고 있는 것인가.
이 전통을 계속해서 이어간다면 4년 후에는 어떤 음식이 나올까.
식사 중에도 범 지구촌행사 답게 각기 다른 식사문화를 엿볼 수 있는데 그 수준도 4년 전에 비
해서 음식의 질에 비례 다운된 듯한 느낌이었다.
순례자사무소 앞은 이전(2011년)과 달리 순례증서를 받으려는 사람들로 장사진이지만 1장의
종이에 불과한 '꼼뽀스뗄라'를 받아들고 즉석에서 기도하거나 감격하는 표정의 뻬레그리노스
보기가 용이하지 않을 정도로 변질되거나 탈 순례화 되어가기 때문이 아닐까.
2013년에 7개의 까미노 루트를 통해서 산띠아고 데 꼼뽀스뗄라에 도착한(순례자 사무소를 거
쳐간) 뻬레그리노스는 215.800명을 상회했다.
월 평균은 17.990명, 하루에는 591명이 도착했으므로 식사 제공 전통의 수혜자는 59분의 1에
불과했다.(평균치라 성, 비수기의 큰 차는 고려되지 않았다)
이 수치로 보면 전통행사 참여자 수를 늘이거나 음식의 질적 향상을 도모해도 되련만...
폐지하느니만 못한, 전통이라는 이름의 공짜밥 먹고 떨떠름한 뒷말하는 것이야 말로 바람직
하지 않은 짓일까.
거져 먹었기 때문에 해야 할 말을 못한다면 그 것이야 말로 타기의 대상일 것이다.
하긴, 년간 총액을 계산해 보면 무시할 수 없는 금액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상업 식당들의 메뉴에는 없는 음식이기 때문에 값을 메길 수는 없으나 석식은 5€미만, 조식과
중식은 각각 2€, 3€ 이내에서 만들어질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므로, 하루에 1인당 10€면 만들어질 것이며 매끼 비노(vino/wine)와 음료수값 5€를 포함
하면 지출 총액이 매일 115€가 된다.
전통의 맥을 유지하는 비용이 매년 41.975€. 원화로는 54,567,500원(환율1.300 :1)이 되므로.
전통의 무료식사 외에도 오브라도이로 광장으로 나간 이유가 있다.
횟수로는 어느덧 4번째가 되기 때문인지 딱히 들르고 싶은 데는 없으나 노르떼 길에서 익혀진
얼굴들을 다시 보는 최선의 장소가 바로 광장(Obradoiro)이라는 것.
정상적이라면, 앞서거니 뒤따르거니 했던 뻬레그리노스가 예외 없이 이 광장을 거쳐 가므로
절로 대면하게 되는 것이다.
시력이 노후된 늙은이는 늘 피동적이지만 지구촌의 모두가 마치 오래된 지기(知己)와의 해후
인 듯 반갑고 언어의 장벽을 뛰어넘는 이야기꽃이 피고 함께 촬영도 하고.
새옹지마(塞翁之馬)로 일희일비를 힐책
아직 남아있는 해와 좀 더 함께 하기 위해 멀리 남쪽의 알라메다공원(Parque da Alameda)을
지나서 숙소로 가는 우회로를 택했다.
광장에 들어서는데 30m가 넘을 만큼의 앞에서 한 여인이 반기며 다가왔다.
나 아닌 누구를 상대로 오겠거니 했는데 내 면전에서 멎는 그녀.
곤딴과 빌랄바에서 볼프강과 셋이 합숙은 물론 저녁식사도 함께 했던 알레만녀 니콜(Nicole).
빌랄바 이후, 볼프강 처럼 그녀와도 헤어졌는데 내 뒤를 바짝 따라왔는가.
조금 전 석양에 도착했단다.
볼프강이 내일 오후에 도착할 것이라는 반가운 소식도 그녀로부터 들었다.
그렇다면, 내일 오후에는 알랭 팀까지 어울리게 됨으로서 노르떼길 피날레(finale)가 거나하게
될 수 있겠다는 기대로 들떠가는 기분이었다.
알레마네스(Alemanes/독일인) 대부분이 날카로운 인상인데, 니콜도 그런데다 깡마른 신경질
형이라 친근미는 떨어지지만 기억력이 비상하고 외모와 달리 정이 많은 여인이다.
초면에 주고 받은 말들을 마치 녹음해서 암기한 듯 다 기억하는 특별한 재능으로 대강 이야기
한 내 향후 일정을 모조리 알고 있는 여인.
한더위에 파띠마, 리스보아 등 무더운 남쪽으로 내려가고(뽀르뚜 길) 쁠라따 길을 걷기 위해
폭서의 세비야로 가려 하는 나를 많이 걱정하고 격려해 주었다.
산띠아고에서 헤어진 후에는 e-메일로.
나는 내일(6월11일) 오후에 이 자리(Hostal dos Reis Católicos 앞, 오브라도이로 광장 북단)
에서 모두 함께 만나게 될 것을 기대하며 오스딸(Roots & Boots)로 돌아왔다.
'부엔 디아?'(buen dia/좋은 일 있었습니까)
들어오는 내 밝은 표정을 보고 오스딸 주인 펠리뻬(Felipe)가 물었을 정도였다.
Si si si si . . . . (Yea yea yea yea)
그러나, 오래 가지 못했다.
그 새에 온 알랭의 메시지가 들떠가던 내 기분을 여지없이 잡쳐놓았기 때문이다.
내일(목요일) 도착 예정은 착각이었고 금요일에나 도착할 것이라니(I made a mistake yester
day, we will only Friday in Santiago. I am really sorry.)
꼭 재회하고 싶다(Hope tout see you again before Finistèrre)는 말을 다시 할 염치가 없는지
가는 길이나 알려달라(Let me know your route)니 맥빠질 일 아닌가.
밤 11시가 다가오는 시각, 하루 일을 끝내고 정리할 무렵에 응접실에 나타난 펠리뻬는 갑자기
침울한 모습으로 변한 내게 다가와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내가 다 알아듣지는 못했지만 내 기분을 풀어주려고 애쓰는 것 만은 분명했다.
내일 내 친구 여렷이 이집에 묵게 될 것이라고 호언했던 그들을 만나지 못하고 떠날 수 밖에
없는 것이 이유지만 그처럼 단순한 것이 아니다.
재회를 위해 천금 같은 하루를 바치는 나와 달리 대수롭잖게 응하는 그들 같기 때문이었다.
그(Felipe)의 부인(Cristina)까지 합세한 이 시간의 대화가 그들의 말대로 우리를 한 파밀리아
(familia)로 묶는데 결정적인 공헌을 했다.
쁠라따 길에서 돌아온 2개월 후와 잉글레스 길이 끝난 후, 쁘리미띠보 길을 마친 9월 중순 등
산띠아고 데 꼼뽀스뗄라에 도착할 때마다 내 발길이 절로 가는 유일한 집이 되었으니까.
특히 남쪽 지중해변, 알마리아에서 배낭을 도둑맞고 산띠아고 데 꼼뽀스뗄라의 순례자사무소
를 다시 방문했을 때 그들 부부는 숙박료 받기를 완강히 거부했다.
빰쁠로나의 나바라대학교를 거쳐 마드리드 공항으로 가는데 일정 조정으로 2밤을 잤지만.
뿐만 아니라 배낭과 침낭을 비롯해 나그네 생활에 필요될 일습을 챙겨주었다.
비록 자기 집에 있으며 한 두번 사용한 것들이기는 해도.
산띠아고 데 꼼뽀스뗄라의 구 시가지, 까떼드랄에서 350m남짓 되며 보통걸음으로 5분쯤 소요
되는 지점에 자리한 19c 건물, 4층 저택 내부를 개조하여 운영하는 오스딸이다.
비탈진 도로변(C./Campo Cruceiro do Gaio)의 낡은 건물이지만 건물 안쪽에는 600m2(180
평)의 정원이 있고 도로쪽은 까떼드랄과 시가지를 한눈에 담게 하는 일품 전망지다.
묵고 간 이들의 댓글을 요약하면 양극 현상이다.
여유롭지 못한 공간의 삐걱거리는 계단과 문, 낡은 시설에 비해 비싼 숙박료라며 불평하는가
하면 마음 편히 즐길 수 있는 정원과 주방, 무엇보다 주인 부부의 후한 인심을 높이 평가한다.
부정적인 쪽과 긍정적인 쪽 모두가 사실이라 해도 오래 머물 집이 아니므로 관점에 따라 다른
호불호가 불가피할 것이나 나의 까미노에는 결코 빠질 수 없는 집이다.
이딸리아인이 많이 이용하는 것으로 미루어 이딸리아계 에스빠뇰로 짐작되는 이 부부(펠리뻬
와 끄리스띠나)는 극동의 늙은 나그네에게 외국인으로는 유일한 파밀리아가 되었으니까.
이 파밀리아의 탄생을 위해 알베르게 소동이 있었고
이 파밀리아를 만들어 주려고 알랭 네는 실수를 했던가.
알랭 네와의 재회를 위해서 2박을 하는데 천금에 다름 아닌 하루가 무위로 끝나게 되었다.
하루 뿐 아니라 하루에 끝낼 수 있는 구간을 그들과의 재회를 위해서 2일로 나누기를 2번이나
했으므로 3일을 무의미하게 낭비한 것이지만.
그럼에도 이 일련의 사태에 경솔하게 반응하였기에 작은 일에 일희일비하지 말라는 새옹지마
(塞翁之馬)로 힐책하는 밤이었다. <계 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