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는 인간이 만들어 낸 또 하나의 다른 세상이다. 테크노 아트로 탄생한 영화는 인간의 욕망과 무의식, 꿈꾸는 세상을 생생하게 그려내는 위력을 가졌기에 오늘날 영상문화의 토대가 되어 영상시대를 구가하는 기폭제가 되었다. 그런데 이런 인간의 욕망, 꿈을 그려내는 영화세상이 곧 자본주의 돈벌이 메커니즘과 접속하면서 영화는 산업이 된다.
그리하여 영화는 욕망/꿈을 투영하는 매혹적 힘과 이윤창출 욕망 충족이라는 두 가지 욕망을 먹고 산다. 전자보다 후자가 더 강력하게 작동하는게 영화세상의 비극내지 한계이기도 하다. 그래서 영화는 탄생부터 저주받은 예술이란 고다르가 옳지만 그래도 영화를 삶의 환경으로 보기할순 없다. 영화가 만들어지고 보여지는 것, 즉 영화의 존재가치를 인정하게 되는 지점이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영화가 우리의 정신적 삶에 긍정적 자극과 기능을 하는 소중한 문화환경이기 때문에, 그 점을 잘 선용한다면 사람들의 마음에 강력한 자극과 느낌을 주는 영화 이미지의 힘이 환경친화적 관점과 자연스럽게 만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제 영화가 자연환경과 접속하는 구체적인 화면속으로 들어가보자.
고독한 양치기의 숲만들기 : <나무를 심는 사람>
<나무를 심는 사람>은 숲과 인간을 하나로 만드는 신비한 매혹을 가진 아름다운 애니메이션이다. 30분짜리 단편 애니메이션 영화인 이 작품은 프레데릭 벡이 5년 반 동안 실명을 무릅쓰고 완성한 작품이다. 영화의 이야기는 실재로 프랑스 작가 장 지오노가 프로방스 지방 고원지대를 여행하며 만난 나무 심는 양치기에 관한 놀라운 이야기를 각색한 것이다.
영화는 40여 년 전의 놀라운 만남을 기억해내며 프로방스 지방 산악지대로 여행을 떠난 모습에서 열려진다. 그곳은 야생 라벤더만 조금 남은 황무지였다. 사흘을 걸어가더라도 황폐한 벌판만이 펼쳐진 이 지역에는 버려진 마을의 잔해만 존재한다. 버려진 말벌통처럼 횡댕구래하게 폐허가 된 집들의 앙상한 잔해는 이 곳이 한 때 여러 사람들이 모여사는 마을이었음을 쓸쓸하게 증명해준다.
자연의 산물이 메말라 가면서 사람들이 떠나고 뼈대만 남은 집들 사이에는 귀를 에는 바람소리와 거친 풀들만 자라고 있다. 그렇게 폐허가 된 곳에서 며칠을 헤매던 주인공은 멀리 보이는 양치기를 만난다. 이 장면은 마치 어린왕자에서 사막 가운데 버려진 비행기 조종사가 불현듯 나타난 어린왕자를 만나는 신비한 경험처럼 다가온다. 양떼와 나타난 양치기(엘제아르 부피에)는 나그네를 고원 한 구석의 우물로 데려간다.
그는 홀로 살아가는 고독한 인간의 특성을 보여주듯이 거의 말을 하지 않는다. 돌로 지어진 그의 집은 따뜻한 스프와 정갈하고 간소한 살림도구들을 갖추고 있다. 식사 후 그는 식탁 위에 도토리 한 무더기를 쏟아놓고는 도토리 알 하나하나를 아주 세밀히 조사하여 좋은 것과 나쁜 것을 구별한다. 여러차례에 걸쳐 도토리를 점검하여 가장 알찬 100개를 모아놓고 그는 잠이 든다.
다음 날 그는 도토리 자루를 들고 산등성이를 한참 올라가 메마른 강퍅한 땅에 쇠막대기를 박는다. 그 구멍 속에 도토리를 넣고 다시 구멍을 덮고... 그런 식으로 그는 간밤에 모은 도토리를 모두 심는다. 점심 식사 후 그는 도토리를 고르는 일상적 작업을 시작한다. 그 땅이 당신 땅이냐고 묻는 주인공에게 양치기는 아니라고 답한다. 그러면서 3년 전부터 매일 혼자서 나무를 심어왔다고 말한다. 아들과 아내를 모두 잃은 그는 고독 속에서 양들과 개와 더불어 자연인으로 살아가는 기쁨을 누리는 특이한 인물이다. 그는 자연 속에서 자립하는 삶의 묘미를 매일매일 실천하며, 아무리 메마른 땅이라도 지하 깊은 곳에 습기가 고여있음직한 땅에는 반드시 나무가 살아날 것이라는 확신을 갖고 도토리심기를 매일 실천한다.
도시로 돌아온 주인공은 나무 심는 양치기는 잊어버리고 다달이 들어오는 수익을 걱정하며 살아가다가 한참 후 프로방스 고원지대를 다시 찾는다. 그곳에는 기적이 벌어지고 있었다. 엘제아르 부피에가 시작한 나무심기가 죽은 숲을 살려낸 것이다. 그곳엔 다시 샘물이 흐르고 온갖 나무와 꽃들이 살아났다. 정부에서 파견한 시찰단은 이것은 천연의 숲이라고 보지만, 그 뒤에는 홀로 매일 도토리 알을 심어놓던 한 고결한 인간의 노고가 있었다. 이 신기한 자연살림을 수십년에 걸쳐 목격한 주인공은 황무지가 풍요한 땅으로 거듭나는 기적적 일을 해내 양치기의 고결한 인격과 그의 노동에 깊은 감명을 받는다.
수많은 영화제에서 대상을 수상한 이 작품은 자신의 일상적 삶과 자연살림을 하나로 돌리는 양치기의 이야기를 매우 부드럽고 소박한 파스텔톤 이미지로 표현해낸다. 프로방스 고원을 웅웅 울리고 가는 바람 소리, 침묵 속에서 도토리 알을 점검하는 양치기의 섬세하고 정성스러운 동작들, 황토색이 지배하는 메마른 황야가 연푸른빛으로 점차 변해가는 색채 변화는 보는 이의 마음을 스펀지에 스며드는 물처럼 따뜻하게 적셔준다. 프레데릭 벡이 잡아낸 훼손된 자연의 황폐함과 살아난 자연의 대비는 색채와 사운드의 차원에서 생생하게 작동한다.
인간의 시선을 넘어: <곰이 되고 싶어요>, <베어> 그리고 <바위의 시간>
동화체 애니메이션 <곰이 되고 싶어요>는 인간 중심의 드라마를 포기하고 곰의 관점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신선한 시각을 보여준다. 덴마크의 야니크 하스투룩 감독이 만든 이 작품은 같은 날 태어난 사냥꾼의 아기가 곰의 아이로 자라나는 과정을 통해 제목 그대로 곰이 되고 싶은 소년의 모습을 그려낸다.
거대한 빙하가 뒤덮힌 북극 그린랜드 섬, 엄마 곰은 출산 중 사냥꾼에게 쫓겨 갓 낳은 곰아기를 잃는다. 아기의 죽음에 포효하는 곰의 울음소리를 배경으로 빙하 저편 에스키모 부부는 막 태어난 아기를 안아 올리며 즐거워한다. 아기를 잃은 엄마곰의 낙심을 보고 아빠곰은 인간 아기를 몰래 빼내어 엄마 곰에게 선물로 들이민다. 처음에는 거부하던 엄마 곰도 인간아기를 자신의 곰아기로 받아들여 사람으로 보살핀다.
인간아기는 자신이 곰인줄 알고 곰친구와 자연 속에서 뒹굴로 웃고 까불며 즐거운 생활을 한다. 그러나 아기를 유괴당한 에스키모 아버지는 발자국이 남은 곰을 수년간 추적해 결국 소년(곰)이 된 아이를 찾아온다. 그러나 이미 곰으로 사는 것이 체화된 소년은 친부모와의 생활에 적응하기 보다는 엄마곰을 그리워한다. 결국 소년-곰은 엄마곰이 알려준대로 산의 전령을 찾아 완벽한 곰이 되는 주술을 시험한다.
야생에 버려진 인간이 ‘짐승인간’으로 등장하여 모험을 벌이는 드라마는 <정글북>이나 <타잔>류의 영화에서 반복된 상투형이다. 그것은 길들여지지 않은 야성으로서의 자연-짐승을 한쪽에 놓고, 그 반대편에 문명화된 인간을 놓는다.
그리하여 도시를 만들고 자연을 정복하고 개발하여 문명을 만든 인간 속에 내재화된 야성으로서의 자연성을 추억하는 척 하면서 결국 길들여진 야성이 인간을 인간답게 만든다는 인간 중심적 자연 길들이기를 정당화한다.
이에 비해 <곰이 되고 싶어요>는 아기 유괴라는 인간사회에서 부도덕한 행위로 인정되는 행위를 접어둔다. 그 대신 ‘자연-짐승-곰’을 죽여가면서 인간들만의 종의 번식과 안락을 추구하는 환경파괴적인 모습을 비판적으로 성찰하게 만든다. 바로 그런 인간 중심적인 관점의 폐해를 전복시키는 데서 이 영화는 신선한 파격을 가한다. 곰이 되지 않는 이상 곰의 마음을 알 수는 없지만, 적어도 인간 중심적 생각이 인간외 다른 자연존재들에게 얼마나 큰 피해와 적대적인 관계를 형성하게 되는가를 겸허하게 반성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이 영화는 컴퓨터 그래픽을 통한 가장 앞서가는 영화 디지털의 산물인 3D 애니메이션 방식이 아니다. 이미 흔히 우리가 보는 애니메이션 기술, 기법, 즉 3D 애니메이션이라고 불리우는 헐리우드 공장 제품인 <슈렉>, <토이스토리>와 달리 정감있는 수작업의 터치가 드러나는 간단하고 소박한 수채화 이미지들로 정겨움을 더해주는 것이 이 영화 이미지의 매력이기도 하다.
<곰이 되고 싶어요>보다 14년 전에 만들어진 실사 영화 <베어> 역시 곰의 관점에서 영화를 찍어간 점에서 이례적이다. 장-자크 아노 감독은 8년 동안 이 영화를 찍었고, 실제로 이 영화를 만들 제작자금을 구하기 위해 수년간 세계를 여행해야 했다. 왜냐하면 곰 두 마리가 주인공이고 인간은 사냥꾼이 잠시 나오는 영화, 대사도 없고 인간의 드라마가 없는 영화가 완성될 수 있을까, 설령 완성된다고 해도 사람들의 관심을 끌어 돈벌이가 될 수 있다는 점에 확신을 갖는 제작자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장- 자크 아노는 그간 만들기 불가능하다는 이유로, 흥행 불투명이라는 이유로 제작자들이 투자를 꺼리는 영화들만 주로 만들어 뛰어난 작품을 만들어낸 이력을 가진 독특한 감독이다. <불을 찾아서>와 같은 영화에서 원시언어를 창의적으로 재현해내며 원시적 삶의 흥미로움을 끌어내어 불가능을 가능케 한 감독이라는 평가를 받은 바 있다. 움베르토 에코의 지적인 추리소설 <장미의 이름>도 많은 영화감독, 제작자들이 탐낸 작품이었지만 중세의 도서관을 재현해내고 미로를 구성해내는 방법, 까다로운 에코가 주문한 수많은 중세에 관한 지식을 감당하기 힘들어 영화화를 포기했던 작품이었다. 그러나 장-자크 아노는 한 트럭에 달하는 중세자료를 읽으며 이 소설을 자기 식으로 독해해 냈다. 그런 열정과 지성에 감복한 에코는 흔쾌히 장-자크 아노에게 판권을 넘겼고 그는 탁월한 작품을 만들어 낸바 있다. <베어>역시 그런 아노감독의 남다른 열정의 산물이다.
<베어>의 주인공은 아기곰 ‘두스(Douce-불어로 ‘부드럽다’)’이다. 영화에 도입부는 두스가 엄마 옆에서 재롱을 떨며 즐거운 숲 속 생활을 하는 장면에서 펼쳐진다. 거기에 사냥꾼이 숲속으로 들어가는 장면들이 크로스 컷팅(같은 시간 대에 이야기를 다른 공간에서 보여지는 것을 편집해 이어붙이는 기법)된다. 어미곰은 사냥꾼에 대항하다 총을 맞고 아기곰 두스는 혼자 남겨진다. 이제부터 엄마 잃은 두스의 외로운 생활이 화면을 장악한다. 독이 든 버섯을 먹은 두스는 몽롱한 상태에서 환상을 보고 순간순간 따뜻한 엄마의 모습을 그리워한다. 보기엔 귀여워도 그 자태속에는 사냥꾼의 욕심으로 날아가 버린 엄마곰의 부재가 아기 곰 두스의 허전한 마음만큼이나 관객의 마음에 연민을 불러일으킨다.
홀로 떠돌던 두스는 어른 곰 바르를 만나고 둘 사이에는 우정이 싹트면서 두스만큼이나 관객도 안도한다. 홀로 떠돌던 바르 역시 작은 곰 두스를 만나 숲에서 둘이 평화롭게 살아간다. 그러나 누가 알랴. 또 다른 사냥꾼이 언제 이 숲 속에 들어와 그들의 평화로운 삶을 해칠지... 그래서 이 영화를 보노라면 곰을 잡아 웅담을 빼내고 그 털과 고기로 장사를 해서 돈을 버는 인간 사냥꾼의 마음이 아니라 자연 속에서 자연스러운 삶을 살아가는 곰의 마음에 조금씩 동화된다.
인간의 시선을 벗어난 자연의 시선은 <시간의 바퀴>(독일, 크리스 슈테너, 하이드 비트링거, 아비드 우이벨)라는 영화에서 좀더 전복적으로 등장한다. 2002년 부천영화제에서 보여졌던 이 단편영화는 언덕 위에 있는 돌무더기들의 시점에서 영화를 풀어간다. 이들이 대화를 나누는 시간은 영화 러닝타임인 8분정도에 불과하지만, 그것은 바위의 아주 오랜 시간이란 영화적 시간으로 보여진다. 이 돌무더기들 앞에 인간들이 등장하여 문명을 만들어내고 마침내 그 문명은 사라져간다. 오랜 세월 인간 수십세기의 변화를 넘어 그 자리에 있는 돌이라는 자연 존재, 그 앞에서 문명을 만들며 돌 앞에로 다가가고 결국엔 자멸해가는 자연을 먹어 들어가는 인간의 문명이란 얼마나 덧없는 것인가!
이런 무한한 시간속의 자연 앞에 선 인간의 속절없는 개발욕망을 바위의 시선과 대화로 풀어가는 영화의 시선은 인간 삶의 빠름과 자연의 느림이라는 속도감을 대비시키며 영화를 보는 인간, 우리들에게 인간문명의 자연파괴성을 성찰하게 만든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신화적 자연: <바람계곡의 나우시카>와 <원령공주>
일본영화의 대표적 장르가 애니메이션이 되고, 그걸 ‘저페니매이션’이라고 부르기까지에는 미야자키 하야오같은 전설적인 영화작가의 독특하고 의미심장한 자연주의 애니메이션의 성과가 바탕이 됬다. <이웃의 토토로>에서 보여준 귀여운 여자아이와 거대한 토토로의 우정은 동양화풍의 담백한 수채화풍에 담겨 진하고 입체적인 디즈니 애니메이션과 다른 차원의 이미지를 보여준다. 하야오의 애니메이션을 보고나면 상대적으로 디즈니나 드림웍스등 첨단기술로 만든 입체 애니메이션이 느끼하게 여겨질 정도로 그의 그림들은 손내음이 느껴지면서 마음을 부드럽게 만든다.
그가 창조한 애니세상은 신비한 숲의 세계와 그걸 파괴하고 개발하려는 인간의 오만하고 난폭함을 대비시키며, 인간이 자연의 일부로 치유되는 과정을 펼쳐보인다. 그의 그림과 서사는 신화적 신비감과 동화적 상상력이 결합하여 어린이부터 어른까지 모두의 마음에 공명을 불러 일으키는 매력을 보여준다.
하야오의 극장용 애니메이션 첫 작품인<바람계곡의 나우시카>는 지구의 환경이 인간의 산업문명으로 파괴된 미래를 시공간으로 한다. 벌레와 노는데 빠진 공주가 자신의 결혼식도 잊어버린다는 내용을 근간으로 한 ‘벌레를 사랑한 공주’라는 일본의 전래동화에서 영감을 받은 이 작품은 서양의 영웅서사와 결합하여 독특한 아시아적 자연관과 여성영웅의 탄생을 보여준다.
황폐한 대지와 썩은 바다, 산소 없는 공기로 변한 지구에는 유독가스를 내뿜는 ‘부해’라는 곰팡이 숲이 갈수록 번져가면서 인류의 말살을 재촉하고 있다. 여기서 살아남은 것은 소수의 부족과 기이하게 커져버린 ‘오무’란 곤충들 뿐이다.
군사부족 ‘토르메키아’는 이런 자연재앙을 과거 7일간 지구를 태워버린 ‘거신병’의 회복과 활약으로 해결하려는 자가당착적 무모한 계획을 세운다. 토르메키아는 막대한 군력으로 평화로운 마지막 안전지대 바람계곡을 점령하여 곰팡이들과 곤충을 다 태워버리려 한다.
그러나 어려서부터 오무란 벌레를 애완동물처럼 몰래 기르며 자란 나우시카공주는 부해나 곰팡이가 자연의 생명체임을 동물적 감각으로 알기에, 다른 인간들처럼 그에 대한 공포를 버리고 거신병의 공격을 막아내는데 온몸을 던진다.
특히 나우시카의 현명한 사고와 행동, 그녀의 지도력에 감하된 바람계곡 사람들이 사랑에 질투를 느낀 토르메키아의 크사나공주는 지구정복의 야욕을 더욱 키운다. 작고 가벼운 일인용 비행선에 몸을 실은 나우시카공주는 분노와 복수에 젖은 거대한 오무 무리 한가운데 오무 새끼와 함께 착륙한다. 그건 목숨을 담보로 한 헌신이지만 그녀의 사랑과 화해의 정신은 성난 오무의 분노를 잠재우고 바람계곡을 구한다.
나우시카는 부해가 지구를 망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지구가 죽어가는 악한 환경 속에서 자연이 스스로를 방어하는 지구를 이루는 유기체 시스템의 일부임을 깨닫는다. 그러나 정복의 혈안이 된 토르메키아의 크사나 공주나 다른 이들은 나우시카의 현명한 깨달음을 헛소리로 치부한다.
바람계곡의 나우시카공주가 평화로운 여신의 이미지라면, <원령공주>(<모모노케 히메> 혹은 <도깨비 공주>로 불리워지기도 한다)에서 들개공주 ‘산’은 야성적이고 공격적인 이미지로 등장한다. <원령공주>의 시대적 배경은 일본의 원시림이 베어지면서 인간의 도시문명이 산으로 들어오기 시작한 무로마치시대. 자연과 숲의 신을 섬기며 사는 평화로운 에미시족의 소년 아시타카가 재앙신(맷돼지)으로부터 마을 소녀를 구하려고 제앙신을 죽이면서 자연의 저주가 시작된다.
이 저주를 풀기위해 아시타카는 자연신 시시가미를 찾아 먼 여행에 나선다. 이 과정에서 아시타카는 자연을 파괴하는 인간들과의 싸움에서 재앙신이 생겨난 것을 깨닫게 된다. 아시타카가 찾아간 에보시의 마을은 문명을 발달시키며 시시가미를 정복하려는 욕망에 도취되있다.
한편 숲에서는 들개에게 길러진 원령공주가 에보시에게 대항하며 싸움을 벌인다. 아시타카는 에보시와 원령공주를 중재하려 하지만 이 노력은 더 큰 싸움으로 퍼지고 시시가미는 목이 잘려진다. 그러나 원령공주와 아시타카의 헌신적 노력으로 시시가미에게 용서를 구하며, 그의 목을 되찾아주는 화해의 결말이 이어진다.
이 영화에서 사슴 모양을 한 시시가미의 이미지, 그가 등장하는 신비한 아우라가 드리워진 숲의 모습은 원시림의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특히 시시가미의 우아한 자태와 위엄있는 뿔은 성스러움을 보여주며 그가 내딛는 발자국마다 꽃과 풀이 돋아나는 생명의 경이로움이 눈길을 끈다. 그 숲에는 귀여운 정령 고다마가 살고 있다. 그러나 어려서부터 인간에게 버려져 인간에 대한 적대감을 가지며 스스로를 들개와 동일시하며 살아온 원령공주는 자신의 부모인 들개를 사냥의 대상으로 삼고 숲의 나무를 베는 인간에 대한 적대감을 가진 들개-인간으로 치열한 싸움을 벌인다. 영화는 원령공주 대 에보시, 자연 대 인간문명이라는 대칭축을 설정하면서 원시림을 제철공장으로 바꾸려는 자연파괴적 인간 문명에 야만성을 비판한다.
<바람계곡의 나우시카>와 <원령공주>에서 보듯이 미야자키 하야오는 산업화가 파괴한 자연의 훼손된 모습을 묘사하면서 인간이 자연의 일부임을 망각한 오만한 문명의 모습을 비판한다. 그 비판은 가장 자연 친화적인 존재, 자신을 자연의 일부로 동일시하는 여성영웅의 헌신적인 분투로 이어진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인간중심적 자연계발을 내세우며 산업문명을 이루어 온 현상태를 그 중심세력이 아닌 여성, 어린이를 통해 전복시키는 의도를 보여주는 것일지도 모른다. 좀 더 연장해서 생각해보면 대지의 여신 가이아처럼 그녀들은 생태적으로 인간인 자신이 지구를 구성하는 유기체 중의 하나임을 누구보다 현명하게 깊이 깨닫고 그것을 실천하는 ‘자연의 여신’같은 존재들로 설정된다.
일본은 토목공사에 선도적 국가이며 섬을 둘러싼 해안선을 간척, 매립하는데 성공하여 오늘날과 같은 근대적인 산업국가에 모범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하여 일본은 아시아에서 유일하게 서양국가들과 같은 수준의 산업문명을 이룩하여 소위 말하는 잘사는 선진국이 되었지만 그 이면에는 최악의 공해병을 발생시킨 국가라는 오명을 갖고 있다. 다이옥신에 의한 가네미유증, 미나마타 수은 중독 등이 그런 예이다. 이런 이중성이 전공투 경험을 거치며 일본 사회의 혁신 문제를 고민해온 미야자키 하야오의 생태주의적 자연주의사상과 일본의 전통적인 애니미즘적 신화사상과 결합하여 독창적인 애니메이션들로 만들어지고 있다.
할리우드 자연 재난 영화들
블록버스터 영화로 지구촌 관객을 끌어들이는 헐리우드 영화는 환경파괴로 인한 재난 드라마를 장르화하고 있다. 최근 개봉한 <투모로우>를 비롯하여 <워터월드> 등은 인간 문명이 파괴한 자연환경이 결국 인류 종말로까지 이어지는 재앙을 드라마화한다. 이런 영화들은 전세계를 강타하는 대자연의 변화를 상정한다면, 다른 한편에서는 핵발전소 문제나 폐수방출 오염과 같은 국지적인 환경파괴 문제를 다루기도 한다. 전자에 해당하는 영화들은 판타지적 허구가 바탕이 된다면, 후자에 해당하는 영화들은 블록버스터형으로 제작, 배급되기 보다는 실제 사건에 근거한 리얼리즘 드라마로 진행된다.
최근 개봉한 <투모로우>는 지구온난화 현상으로 인한 해류변화가 빙하로 뒤덮힌 세상의 위험을 다룬다. 미국 LA지역을 강타한 토네이도, 일본의 우박피해를 비롯해 지구촌 곳곳에 동시적으로 발생한 이상기후로 인한 재난은 실감나는 특수효과로 공포-볼거리를 선사한다. 할리우드영화답게 가족이데올로기에 기댄 해법, 즉 부성애 승리담으로 거대한 재난을 단순해결하는 인간본위적 관점이 껄끄럽지만 이미 예고되고 있는 지구온난화로 인한 아이스/워터월드라는 다가올 미래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판타지로서의 공포라기보다는 현실가능태로서의 공포로 경각심을 불러 일으키는 효과를 보여준다.
<투모로우>보다 약 10년 전에 만들어진 <워터월드>는 흥미롭게도 거꾸로 마치 그 후편처럼 보인다. 이미 빙하가 녹아 지구가 물에 잠긴 물세상이 된 먼 미래를 배경으로 삼는다. 지구전체는 물로 뒤덮혀 있지만 모순되게도 마실물의 고갈로 살아남은 소수 인간은 생존의 악전고투를 벌인다. 인공섬을 만들어 근근히 살아가는 이들에게 해적질을 하는 스모커들의 위협은 또 다른 고통이다. 자신의 오줌으로 생수로 변환하는 신기한 기계장치를 단 자금자족 배에 의존해 떠도는 외톨이 어족인간 케빈 코스트너는 이기적이고 위험한 인간혐오가로 한줌의 흙을 의망의 정표로 삼아 미지의 자연섬을 찾아나서는 재앙시대의 노아가 된다.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흙의 땅인 신비의 섬을 찾아나서는 지도나 그것을 지시하는 지표들이 한자로 묘사된다는 점이다. 그건 산업화의 주도세력이 서양이었다면 그로 인한 폐해를 극복한 대안은 그 반대편인 중국/동양으로 설정되는 의미작용을 보여준다. 자연의 회복이 반문명적인 것, 자연으로서의 인간이해와 인간적 삶을 존중해온 동양적 가치가 자연재난영화에서 이런 식으로 드러나는 셈이다.
<실크 우드>와 <에린 브로코비치>는 모두 실화에 기초한 오염사건을 다루는데, 두 편 모두 사건을 폭로한 여주인공의 이름을 제목으로 삼고 있다. 1974년 의문의 변사체로 차안에서 발견된 핵발전소 노동자 실크 우드의 죽음을 추적하는 <실크 우드>는 핵발전소 노동자의 오염사건을 심도깊게 그려낸다. 실크 우드역의 메릴 스트립이 보여주는 평범한 노동자역은 매우 절실하고 진실해서 지금 보더라도 감화력이 있다. 그에 비해 최신작인 <에린 브로코비치>는 어린 아이들을 여럿 키우는 절망에 빠진 하류층 여성 에린이 각성해가며 한 마을을 각성시키는 경이로운 변화를 보여준다. 억지로 취직한 법률사무소에서 서류정리하는 허드렛일을 하던 에린은 서류에서 발견한 단순한 의혹을 풀어가다 결국 대기업이 유출한 크롬성분으로 인한 마을 사람들의 병의 원인을 규명하면서 대기업이 권력과 술수로 자행해온 환경 오염을 폭로하는 성과를 달성한다.
흥미로운 것은 이 두 사건을 해결하는 주도적 역할을 하는 이들이 전문지식도 없고 힘도 없고 권력도 당연히 없는 평범한 여성이란 점이다. 이 둘은 모두 시키는 일이나 하는 비서나 하급 일을 하는 별볼일 없는 여성이다. 그러나 그들은 주변의 피해와 수상한 내음을 맡고 그걸 마침내 밝혀내는 탐정같은 기질로 처음에는 단순해 보였던 인간파괴와 연관되는 환경파괴에 대한 비판적 의식을 터득해간다. 말하자면 문제의식이 그녀들을 기업의 이익을 위한 거대한 비리에 맞서 싸우는 용기와 지혜로 이어지는 점이다.
이렇게 자연파괴로 인한 거대한 재앙을 다룬 영화들은 지속적으로 제작되고 있다. 이 영화들은 인간의 상상력과 노동력, 영화기계장치, 그걸 돌리는 동력이 되는 자본흐름의 메커니즘이 함께 작용하여 나온 결과물이다. 영화 산업을 굴뚝 없는 무공해 문화산업이라고 하지만 실제로 영화 생산은 반환경적인 요소를 상당부분 갖고 있다. 이를테면 영화 제작의 마지막 단계인 포스트 프로덕션 과정에서 현상을 하는데, 그에 필요한 화학약품이 수질오염을 일으키기도 한다. 그래서 영화 필름 현상소는 환경보호 지역에는 들어설 수 없다. <투모로우>나 <워터 월드>처럼 자연파괴적 문명의 댓가를 재앙으로 다룬 영화들도 당연히 특수효과작업과 거대한 세트제작으로 반자연적인 작업을 하게 마련이다.
지독한 예는 <비치>란 영화 제작과정에서 증명된다. 대도시생활의 삭막한 서양인들에게 휴식의 이상향은 비성양의 미지의 섬으로 표상되곤 하는 전통이 있다. 고갱의 전설적인 타이티경험 이전, 디드로가 부갱빌섬을 찬양한 데서도 그런 서양인의 이국취향 판타지가 드러난다. <비치>란 영화는 그런 전통에서 태국 인근 바다 어딘가, 한점 흠없는 모든게 완벽한 자연자체로서의 해변을 가진 섬을 이상향으로 제시한다. 그 섬을 자신들이 원하는 이상향으로 재현하기 위해 제작진은 푸켓부근 작은 섬 피피레에 야자수를 심고 사구를 낮추는 공사를 했다. 이것은 곧 사건이 되어 태국 환경단체가 소송을 하게 되어 폭스사는 벌금을 내야했다. 덧붙여 이 환경단체는 <비치>안티 싸이트를 열고 영화 보이코트운동을 벌였고 그 여파인지 영화가 황당해선지 흥행은 실패했다. 주연으로 나온 디카프리오까지 인기가 떨어지는 부과효과도 있었다. 자연의 이상향을 보여주기위해 덜 이상적인 현실적 자연을 변형, 파괴하는 일이 영화작업을 위해 용인되어서는 안된다는 교훈을 준셈이다.
첫댓글 <환경과 생명>잡지에 얼마전 보낸 원고죠. 재밌게는 못썼지만 자연친화적 영화이야기 첨으로 쓴게 의미있죠.
우와! 글이 무척 길군요. 읽기 쉽게끔 단락마다 띄어주시면 보기에 편할텐데...
넵~ 정말 그러네요. 단락마다 스페이스 만들었죠. ^^
네 굿입니다. ㅋㅋ
정말 재밌게 읽었습니다. 감사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