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회 동창회(賢志會) 1. 머리말
오현고 제14회는 1966년 2월 329명이 졸업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고교 졸업 후 동창들은 대학에 진학하고 사회로 진출하여 청운의 뜻을 펼쳐나갔다. 그리고 지금은 시대의 주역으로 도처에서 눈부신 활동을 펼치고 있다. 동창들이 모교를 향한 꿈은 늘 푸른빛이며, 학창시절의 추억은희망과 용기를 주는 자랑스러운 마음의 고향으로 오현인의 긍지를 심어왔다.
졸업 당시 많은 동창들이 대학의 문을 두드렸다. 서울대를 비롯한 연세대, 고려대 그리고 삼군(三軍) 사관학교 등 전국 유명 대학에 동창들이 대거 합격하여 그 명성을 드높였다. 지금은 오십대중반의 나이에 접어들어 고교시절을 뒤돌아보며 새로운 미래를 설계하고 있다.
제14회 동창회는 1974년 3월에 결성되었다. 초대 회장은 캐나다로 이민, 이국생활을 하고 있는 고영식, 부회장은 김창규와 김무삼, 총무 김홍추, 섭외 고충식이 앞장서 동창회의 깃발을 드높였다. 동창회 출발 이후 1977년 재경 동창회가, 1980년 서귀포지역친목회가 결성되어, 그 나름대로 활발한 활동을 벌여나갔다. 제14회를 우리는 현지회(賢志會)라고 부른다. ‘賢志’는 지사적 삶을 살았던 다섯 성현 오현(五賢)의 큰 뜻을 이어받아, 지기상합(志氣相合)하고 지사인인(志士仁人)이 되자는 뜻이 어려 있다.
어떤 고난 속에서도 신의와 지조를 지켜 한 점 부끄럼 없이 떳떳한 삶을 살았던 현인(賢人)의 얼과혼을 오늘, 우리의 생활 속에 실천해 나가자는 다짐이 그 속에 담겨있다.
특히 賢志會는 1996년 9월 22일 제7회 ‘오현의 날’ 을 주관하여 선·후배들의 열렬한 박수를 받았다. 회원들이 하나가 되어 주관 회기로서 역할을 당당히 수행하였다. 특히 재경 재일본 회원들까지 참가하여 학창시절의 우정을 다시 한번 확인하였다.
2000년 3월 1일부터 회장 안영화를 중심으로 제11대 임원이 새로 구성되어, 지금까지 전임 회장단이 이끌어온 현지회의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지금 오현의 전통과 웅지는 오현정신(五賢精神)의 반석 아래서 그 뿌리가 견고해지고 있다.
안영화 회장은 “우리 모교가 이제 한국사학의 명문고로 자리매김 한데 대해서는 동문들의 피나는 노력의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현지회 회원들의 줄기찬 활동에 경의를 표하며, 남은 반세기도 모교를 위하여 무엇인가 보람된 사업을 이루어내는 회기가 될 것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라고 말하고 있다.
2. 어떤 일을 하고 있는가?
1) 현지회보(賢志會報) 발간
1993년 3월 1일부터 회보를 발간하여 동창회 소식, 회원 동정, 동창 탐방기, 회원일지 등을 실어 동창들의 사랑을 받아왔다. 재경 현지회는 NEWS LETTERS를 발간하고 홈페이지http://ohyun.netian.com를 개설하여 다양한 소식을 전하기 시작했다. 홈페이지에서는 방명록이나 게시판을 이용하여 생활 속의 주변소식, 살아가는 이야기, 그리고 좋은 책 내용이나 재미있는 유머, 나아가 주제를 통한 토론 등을 싣고 있다.
2) 현형회(賢螢會)
주경야독으로 학업에 정진했던 야간부 출신들의 모임이다. 1977년 김재영 결혼식장에 모인 동창들이 자연스럽게 의견의 일치를 보아 그 해 12월 첫 모임을 시작으로 출발하였다. 지금까지 회원자녀를 중심으로 장학사업을 전개하여 큰 호응을 얻었으며 앞으로 새로운 사업도 구상하고 있다.
활동에 앞장서고 있는 회원은 조성민(이라신협이사장) 고한영(락천 대표) 김재영(제주시 오라정수장) 고평문(홍익문화사 대표) 현창돈(삼화여객 상무이사) 현재길(자영) 고정행(제주대 법정대학) 양영진(영진농원 대표) 박대규(자영) 현익주(한석서예학원 원장) 등이다. 회원들은 각자의 위치에서 모두 열심히 살아가고 있지만 특히 제주종교계의 지도자이면서 덕흥사 주지 스님으로 있는 상허(常虛) 조성민과 전국 서예 전에서 여러 번 입선과 최고상의 영예를 안았던 한석(漢石) 현익주를 자랑스럽게 여긴다. 그는 많은 문하생을 배출한 중견 서예인으로 활동하고 있다. 현형회 회원들은 모두 상허의 사부이신 혜암 큰스님이 내려주신 다음 말씀의 글을 소중히 간직하고 있으며 이를 생활의 지혜로 삼고 있다. “ 五賢守訓十四回奉公後私賢螢會 芝蘭芳香遍江山螢雪風光振滄海”
3) 현지골프회와 한지회
현지골프회는 정기적으로 모임을 갖고 자연과 더불어 친선도모와 건강증진에 앞장서고 있다. 단골 회원은 한승진(한승진신경외과 원장) 양용하(제일은행 제주지점장) 이원진(제주렌트카 대표이사) 이민건(녹십자의원 원장) 고성범(금성하이텍 대표) 안영화(제주대 교수) 이재춘(자영업) 김형호(자영업) 이경종(현대약국 대표)이다. 한지회는 한승진신경외과 지하에서 연습 삼아 스윙했던친구들이 첫자의 이름 따서 결성한 골프모임이다. 24시 연습장소를 제공해 준 한승진과 특히 부인 김금자 여사에 대해 동창들과 회원들은 항상 고맙게 생각하고 있으며 한승진의 열성적인 지도로 그 실력이 아마추어 경지를 넘어섰다. 현지골프회와 한지회는 상호보완적 관계에서 정기전을갖고 골프의 즐거움을 만끽하고 있다. 한지회 회원은 한승진 문순우(실버코지 대표) 변창돈(자영)오상봉(과수원 경영) 이윤희(제주여고 교사) 이한우(은한수산 대표) 조성민(이라신협이사장) 고학언(런던셀프세차장 대표) 김용민(자영) 김재영(제주시 오라정수장) 고응남(자영) 등이다.
4) 현지테니스회
1990년 출발하여 삼호테니스장에서 한 달에 한번 모임을 시작하였다. 그 후 애향운동장, 제주대학 테니스장을 옮기며 건강증진과 우정을 통한 회원간의 친목을 다져나가고 있다. 열성을 갖고모임에 참석하는 회원은 강완호(한림고 교사) 고충식(자영업) 양지홍(자영업) 김영추(푸른약국 대표) 이재춘(자영업) 최 진(국민건강보험공단 제주지사장) 김종천(제주상고 교감) 안영화(제주대 교수) 김용민(자영업) 현병윤(제주지방법원 과장) 박청남(한림공고 교사) 등이다.
5) 재경현지산악회
‘오르막이 있으면 내리막이 있고, 내리막이 있으면 오르막이 있다.’는 정신으로 꾸준하게 서울근교의 산을 오르고 있다. 가끔 산사에서 적막을 깨고 흐르는 목탁소리를 들으며 심신을 단련한다. 2001년 9월16일에는 강원도 산촌 삼악산을 다녀왔다. 주봉 용화봉(654m) 이외에 청운봉(546m)과 등선봉(632m)이 솟아 삼악산이라 이름하였다. 인기 드라마 태조 왕건에서 태봉국의궁예와 왕건이 손을 잡기 전 한판 대결을 벌인 곳이 제2봉인 등선봉이다.
6) 현지부인회
1996년 4월‘오현의 날’을 준비하는 와중에 탄생하였다. 매월 14일에 정기모임을 갖고 있으며,주요 사업으로는 회원경조사와 친목도모 그리고 봉사활동에 주력하고 있다. 1997년에는 창립1주년을 기념하여 9월 19일부터 21일까지 40여 명이 지리산과 경주를 다녀왔으며, 2001년에는 창립5주년 기념으로 10월4일부터 6일까지 강화도 역사관, 땅굴, 백마고지, 서대문형무소, 전쟁박물관을 돌아보는 역사여행을 하였다. 백마고지에서 당시 오현고 재학생 16명이 전쟁 중에 전사한 사실을 확인하였다. 초대회장 김금자(한승진) 총무 서희숙(고성범), 2대 회장 양경순(조성민) 총무 김재인(문순우), 3대 회장 서희숙(고성범) 총무 백기순(오상봉).
3. 전·현직 임원 및 동창들의 활동상
1) 역대 회장단의 활동
모교를 졸업하여 8년이란 세월이 흘렀지만 동창회 결성이 그리 쉬운 일만은 아니었다. 모두 이구동성으로 동감하면서도 깃발을 올릴 수가 없었다. 일단 뜻을 같이한 고영식 고충식 김종천 김창규 임만옥 현진오 등 몇몇 동창들이 모여 기본회칙을 만들고 사전 정비작업을 거쳐 동창회 창립발기의 주역으로 노력했다. 당시 동창들은 어려운 시대적 상황 속에서 직장과 일터를 갖고 있었지만 상당수의 동창들은 대학 졸업 후에도 취업난으로 방황하고 있었다. 청운의 큰 뜻을 품은 상경은 좌절로 이어지기도 했고 서울을 비롯한 전국 각지에서 생존의 터를 잡기 위한 고난은 계속되었다.
이러한 암울한 시대에 서로 위로 격려하면서 상부상조하자는 취지로 동창회의 태동을 본 것이다.
회장과 총무는 바로 동창회 활동의 중심축이며 이들의 헌신적인 노력과 희생이 따르지 않으면 활성화는 기대할 수 없다. 그간 역대 회장과 총무를 중심으로 일구어냈던 대표적인 활동 몇 가지를 소개한다.
초대와 2대(1974. 3∼1984. 3) 회장을 역임한 고영식과 총무 김홍추(1대) 이재중(2대)은 우선제주에 거주하고 있는 동창들을 중심으로 조직에 착수하였고 발족에 따른 후속작업을 하는데 심혈을 기울였다. 초창기의 동창회 사업은 동창들의 명단과 주소를 파악하여 정보를 교환했던 창립기로서 그 공헌이 크다.
제3·4대(1984. 3∼1988. 3) 회장 박옥규, 총무 김수관은 창립 초창기의 사업을 이어받아 전국에 흩어진 동창들의 주소를 파악하여 명단을 재작성하고 미비했던 회칙을 보완했으며 재경동창들과의 교류를 통한 유대강화에 힘썼던 개척기였다.
제5·6대(1988. 3∼1992. 3) 회장 고진부, 총무 고충식은 동창회를 역동적으로 이끌어 반듯한 반석위에 올려놓았다. 총동창회관 건립 모금에는 할당 금액을 훨씬 초과하여 3천8백1십만 원을 모금하여 기탁함으로써 단체 공로패와 감사패를 받은 활성기였다. 또한 오현의 동문 중에는 많은 건축사가 있었지만 김유철의 실력과 능력을 인정받아 총동창회관 설계 작품으로 남는 영광을 얻기도 하였다. 졸업25주년 기념사업으로 추진한 동창회 앨범제작은 오랜 산고 끝에 1991년 제작 완료하여 많은 동창들의 관심과 참여 속에 출판기념회를 성대히 치렀다.
고진부회장은 발간사에서 동창들의 결집과 협력을 당부하면서“국적은 바꿀 수 있지만 학적은 영원하기 때문에 14회라는 긍지와 자부심을 갖고 열심히 살아가도록 우리 모두 노력합시다.”라고 말하고 있다. 회원명부 앨범에는 재학시절 고봉식 교장선생님의 격려사와 모교연혁, 그리고 추억어린 교정의 모습과 은사들의 얼굴이 수록되어 학창을 회고할 수 있는 높은 가치를 지니고 있다. 총무 고충식은 편집후기에서“위대한 작품 뒤에는 산고가 따르기 마련이지만 정말 어려움이란 겪어보지 않는 사람이야 알아질겅가? 경해도 만들어 노으난 흐뭇한 마음이야 어다 가는 거라.”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제7대(1992. 3∼1994. 3) 회장 현진오, 총무 이재춘은 활성기의 바통을 이어받아 열심히 동창들의 경조사를 찾아보고 화합과 우정이 넘치는 분위기를 만들어 나가는데 앞장섰다. 현지회라는 별칭을 회원들의 의견과 토론을 거쳐 작명했으며, 한승진의 배려로 그의 병원 건물 내에 동창회사 무실을 마련하여 현판식을 가짐으로써 명실상부한 동창회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1993년 3월 ‘현지회보’를 발행하여 배포함으로써 동문들의 관심을 끌었다. 편집에는 이경종이 맡아 수고했으 며 앞으로도 계속적인 정기 발행이 요구된다.
제8·9대(1994. 3∼1998. 3) 회장 한승진, 총무 최진(8대) 한재운(9대)은 제7회 ‘오현의 날’행사 주관회기라는 막중한 책임과 부담을 안고 출발하였다. 한승진 회장은 취임 초부터 성공적인행사를 치르기 위하여 동분서주하면서 동창들의 단합과 기금조성에 열정을 다 바쳤다. 별도의 행사준비기획단을 구성하여 운영하였고 모든 임원진과 동창들이 한마음이 되어 추진한 결과 기금 6천5백만 원을 마련할 수 있었다. 이 기금은 오늘날 동창회운영의 기본재산이 되었다. 1996년 9월22일 모교 운동장에서 개최한 제7회‘오현인의 날’행사 개막식에서 집행위원장으로써 한승진 회장은“오현인의 기상을 세계로 미래로 펼쳐 나가자”고 외쳤다. 한승진은 동창회사무실을 제공하여 귀향 동창들의 연락과 모임의 장소로 밤낮 이용하도록 하는 따뜻한 마음을 가진 우리들의 친구이다. 그의 동창들에 대한 관심과 애정은 오래 기억될 것이다.
제10대(1998. 3∼2000. 3) 회장 조성민, 총무 문순우는 제7회‘오현인의 날’행사를 성공적으로 치른 회기의 자부심을 안고 동창회의 지속적인 발전을 도모하면서 안정의 견고한 기반을 닦았다. 회장 조성민은 넉넉한 품성과 폭넓은 인간관계로 회원의 진솔한 우정과 결속을 가져왔고 특히불우한 이웃과 병석에 있는 동창 이준열을 여러 번 위로방문하면서 개인적 호주머니를 털어 불자로서‘보시’를 실천하였다. 총무 문순우는 부지런함과 친화력으로 소외되었던 동창들이 모임에 참여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드는데 앞장섰다.
제11대(2000. 3∼2002. 3) 회장 안영화, 총무 김용민은 안정기의 동창회를 재도약의 기회로 삼고 재경동창회원과, 서귀포친목동창회원들과의 인간적 유대를 통해 수시 연락하면서 경조사찾아보기, 오현을 빛낸 동창 발굴 사업 등 인화 단결하는 동창회를 만들어 나갔다. 특히 고진부의 국회진출에는 동창들의 남모른 정신적 물질적 지원의 숨은 공로와 현지 부인회의 열성적인 응원의 힘이 컸다. 바쁜 중에 수차례 서귀포, 남군 여러 지역의 유세장을 찾았던 일들은 회장 총무를 비롯 한 임원과 동창들의 결집된 정성으로 뭉친 결실이었다.
2) 전·현직 임원 소개
제14회 동창회는 1974년 3월에 조직되었으며 1977년 서울에 재경 제14회 동창회, 그리고 1980년 서귀포 지역 친목회가 조직되어 활동하고 있다.
(1) 전·현직 임원 초대 임원(1974년 3월∼1982년 3월) 회장 고영식 부회장 김창규 김무삼 총무 김홍추 섭외 고충식.
제2대 임원(1982년 3월∼1984년 3월) 회장 고영식 부회장 김창규 강종필 감사 현진오 임만옥 총무 이재중 변용관. 제3대 임원(1984년 3월 15일∼1986년 3월 16일) 회장 박옥규 부회장 고진부 임만옥 이민건 감사 김종천 고순홍 총무 김수관 재무 양지홍 문화 좌승원 섭외 조성민 홍성민 문수우. 제4대 임원(1986년 3월 17일∼1988년 4월 16일) 회장 박옥규 부회장 고진부 임만옥 우경 감사 김종천 고순홍 총무 김수관 재무 김용범 문화 좌승원 섭외 조성민 최 진 이창근. 제5대 임원(1988년 4월 17일∼1990년 3월 24일) 회장 고진부 부회장 현진오 김장호 정태옥 감사 안 영화 현병윤 총무 고충식 재무 최 진 섭외 이경종 이재춘 현재길 이근칠. 제6대 임원(1990년 3월25일∼1992년 3월 28일) 회장 고진부 부회장 현진오 김장호 현동호 김유철 감사 안영화 현병윤 총무 고충식 재무 최진 섭외 이경종 이재춘 현재길 문화 고상배. 제7대 임원(1992년 3월 28일∼1994년 4월 2일) 회장 현진오 부회장 한승진 이경종 오해룡 이재병 감사 김수관 고성칠 총무 이재춘 재무 고상배 섭외 이원진 이윤희 송달선 문화 현익주. 제8대 임원(1994년 3월 31일∼1996년 2월 28일) 회장 한승진 부회장 이원진 전동문 김영록 이재병 감사 이재춘 김상식 총무이사 최진 재무이사 이윤희 문화이사 양지홍 체육이사 김형호 섭외이사 한재운 오상봉 박대규 운영위원 강공수 고순홍 김종천 김홍수 이경종 현익주 현태송. 제9대 임원(1996년 3월 1일∼1998년 3월 1일) 회장 한승진 부회장 이원진 안영화 장수천 조성민 권상수 김익태 감사 강완호 고성범 총무이사 한재운 재무이사 이윤희 문화이사 현익주 체육이사 현태송 섭외이사 김진회 신진영 이한우 운 영위원 김종천 김창규 김형호 부태완 양지홍 오상봉 이재춘 임현순 최 진 현재길 홍성민. 제10대임원(1998년 3월 1일∼2000년 3월 1일) 자문위원 고영식 박옥규 고진부 현진오 한승진 회장 조성민 부회장 김수관 김형호 양길대 김호건 양용하 감사 이윤희 한재운 총무이사 문순우 재무이사 오상봉 섭외이사 고성범 김영록 체육이사 김상식 문화이사 김용민 이사 고응남 고문봉 김용주 김영추 김평수 김종천 양석주 안정해 이한우 이재춘 양영진 신진영 고영훈 김재영 김용찬 성영승 최진 현익주 현태송 현재길. 제11대 임원(2000년 3월 1일∼2002년 2월) 자문위원 고영식 박옥규고진부 현진오 한승진 조성민 회장 안영화 부회장 김종천 이한우 김승문 강익중 현경언 감사 문순우 오상봉 총무 김용민 재무 신진영 섭외 변창돈 고한영 강중화 체육 고학언 문화 현익주 이사 송중보 현태송 김진회 고문봉 권상수 김성우 고상배 현병윤 최 진 이재춘 김동일 강영희 이윤희 현천민 성영승 고영훈 양영진 김용주 임철호 문수병. 제12대 임원(2002년 2월~2004년 2월) 자문위원 고영식 박옥규 고진부 현진오 한승진 조성민안영화 회장 김종천 부회장 이윤희 김상식 현천민 강익중 강공수 현경언 감사 김용민 신진영 총무 고한영 문화 김관후 체육 문순우 조직 고문봉 재무 한재운 섭외 강영희 이재춘 최 진.
(2) 재경 현지회 임원 및 활동
1977년 2월 28일 창립하여 지난 30여 년 동안 발전을 위한 시행착오의 벽을 넘어 지금은 안정기에 돌입 하였다. 정기적으로 발행되는‘在京賢志’는 편집주간인 홍승훈의 멋진 글 솜씨와 동창들의 동정, 그리고 다양한 정보의 제공 등으로 모든 동문들의 찬사를 받고 있다. 회보의 발행뿐만 아니라 정기적인 부부동반의 산행과 영화·음악 감상회의 모임을 통한 각종 회합으로 단단한 결속과 친선을 다지고 있다. 재경총동창회의 부회장(김익태)을 비롯한 상당수가 임원으로써 구심점 역할을 다하고 있으며 재경오현회관 건립에 앞장서고 있다. 재경 제14회동창회 역대 임원은 다음과 같다.
제1대 회장 김수종 총무 이창근 재무 이재병.
제2대 회장 이창근 총무 강정립 재무 김재훈. 제3대 회장 강정립 부회장 강창일 총무 허장호. 제4대 회장 강정립 총무 허장호. 제5대 회장 이수열총무 김용민 감사 이재병. 제6대 회장 강창일 부회장 김유철 총무 조봉삼 재무 송상훈 감사 강만수. 제7대 회장 김유철 부회장 조봉삼 총무 오충일 감사 허장호. 제8대 회장 김유철 부회장 문경용 총무 오충일 감사 허장호. 제9대 회장 이재병 부회장 김익태 총무 허장호 감사 김호건. 제10대 회장 김익태 부회장 허정호 총무 조영중. 제11대 회장 김익태 부회장 허장호 총무 조영중. 제12대 회장 김호건 부회장 조영중 총무 홍승훈 섭외 고현우 감사 강정립. 제13대 회장 강익중 부회장 조영중 총무간사 이창근 섭외간사 김태주 감사 강정립 편집주간 홍승훈 (3) 서귀포지역 친목회 임원
1980년 4월 26일 창립총회를 갖고 지금까지 두 달에 한 번씩 모임을 갖고 있다. 역대 친목회임원은 다음과 같다.
제1대 회장 고영식 총무 김영록 재무 서승범. 제2대 회장 서승범 총무 김영록 재무 정태옥. 제3대 회장 강종필 총무 김영록 재무 정태옥. 제4대 회장 이민건 총무 정태옥 재무 김용철. 제5대 회장 고우경 총무 현수원 재무 오해룡. 제6대 회장 고우경 총무 오영호 재무 오해룡. 제7대 회장 정태옥 총무 오영호 재무 권상수. 제8대 회장 현동호 총무 김용찬 재무 김승문.제9대 회장 오해룡 총무 양길대 재무 김덕범. 제10대 회장 김영록 총무 강공수 재무 김정민. 제11대 회장 권상수 총무 윤여은 재무 김용범. 제12대 회장 양길대 총무 서대웅 재무 이창엽. 제13대회장 김승문 총무 오승용 재무 김홍주. 3) 동우회 소개
행정공무원동우회와 교직동우회가 조직되어 활동을 하고 있으나 여기에서는 제주와 서울을 망라하여 직업별로 동창들을 분류해 본다.
(1) 교육계 ○ 대학교수 고강옥(부경대) 김정림(한양대) 김호건(한양대) 안영화(제주대) 양일우(육군사관학교) 현진오(제주대)
○ 중등학교 교원
김용남(진주금남고 교장) 김승문(남주중 교장) 김종천(제주상고 교감) 서종필 (제주사대부설고교감) 양석주(탐라교육원 연구사) 강영진(함덕정보산업고 교사) 강완호(한림고 교사) 고영훈(제주동중 교사) 김덕훈(제주관광산업고 교사) 김상우(아라중 교사) 김여택(마산고 교사) 김영국(인천해양과학고 교사) 김용규(오현고 교사) 김용호(제주해양관광고 교사) 김정민(대기고 교사) 김창성(제주관광산업고 교사) 김평수(고산중 교사) 김호구(서귀포산업과학고 교사) 문수병(제주여고 교사) 문영호(제주동중 교사) 서대웅(서귀여고 교사) 신동금(부산초읍중 교사) 이근칠(제주중 교사) 이윤희(제주여고 교사) 이인희(대구청구고 교사) 이창엽(한림공고 교사) 장갑천(인천청학공고 교사) 정린(부산중앙여고 교사) 조철수(제주중앙여고 교사) 한용규(오현중 교사) 현수원(제주중앙여고 교사) 홍승훈(은광여고 교사) 홍인철(함덕중 교사)
○ 초등학교 교원
좌승원(봉개교 교장) 고문봉(구엄교 교감) 문종원(신제주교 교감) 박두윤(함덕교 교감) 신진영(동광교 교감) 오승용(서귀북교 교감) 현태송(세화교 교감) 최원종(대정교 교감) 김경옥(광령교 교감) 강위원(동복교 교사) 김덕범(새서귀교 교사) 김용범(신례교 교사) 황행문(외도교 교사)
(2) 공무원 강성호(한수풀도서관 관장) 고순홍(제주경찰서 정보과장) 고정행(제주대 행정실) 고태은(국방부) 김상식(제주지방검찰청 과장) 김영대(제주지방경찰청 수사1계) 김영록(아라파출소) 김재영(제주시 오라정수장) 김진회(축산진흥원 과장) 김창규(광역수자원관리본부상수도 관리부장) 김홍수(제주도지역계획담당) 박경섭(제주대 인문대 행정실장) 박성순(도봉구보건소 과장) 변용관(제주도자치지원담당) 변태경(제주도농업기술원) 송성호(제주도공무원교육원 교무담당) 신인섭(제주대해양과학대학) 신현철(북제주군 의회사무과) 양영대(김녕우체국 국장) 유춘기(삼척대학교 사무처장) 윤여은(서귀포시사회복지과 과장) 이영식(제주도 기업지원담당) 임철호(한림읍 건설계) 정성용(제주도소방방제본부 상황담당) 한석주(제주도교육위원회 의사담당관실) 허장호(국회총무과장)현병윤(제주지방법원 과장) 홍문삼(제주도 농업정책담당) 홍승기(애월읍 수도담당)
(3) 의사·약사
고양명(한독약품 전무이사) 고우경(서귀포의료원 원장) 고진부(고신경과의원 원장) 김병윤(한일약국 대표) 김영추(푸른약국 대표) 김용범(김안과의원 원장) 오동준(재미·마취과 의사) 이민건(녹십자의원 원장) 전동문(치과의사) 전수경(김정현외과의원 물리치료실장) 정수만(재미·내과의사) 조영중(서울 조일약국 대표) 한승진(한승진신경외과의원 원장) 황공용(중궁한약방)
(4) 군인 강만수(국방부 공군대령) 강익중(해양연구소 해군대령) 양일우(육사교수 육군대령). 고남익(공군 준위)
(5) 금융인 고길수(한진투자증권지점 실장) 고성칠(제주시수협 지점장) 김동일(제주은행이도지점) 김인성(제일은행 지점장) 송상훈(주택은행중부지역본부) 양용하(제일은행 지점장) 오헌영(동양증권지점) 이서욱(서울신탁은행 차장) 이홍식(서귀포수협 지점장) 조봉삼(대한투자신탁 상무) 최양호(기업은행 지점장)
(6) 종교인 강승훈(지장사 초연스님) 조성민(덕흥사 주지) 김종삼(일본지정사 주지) 한창립(장로·예수교장로회 사무국장) 김성주(수운교 전교)
(7) 문화·예술인 김관후(작가·제주도지편찬위원회 연구관) 김규인(작곡가) 김병흠(건축사·현신건축사무소 상무) 김성주(시인) 김유철(신도시건축 대표) 송태원(건축사·송태원건축사대표) 현익주(서예가·한석서예학원 원장)
(8) 언론인 김수종(한국일보 논설위원) 박옥규(제주MBC 고문) 양영하(아세아방송 부장)
(9) 학원장 김익태(성남대성학원 원장) 오용성(아카데미압구정학원 원장) 현천민(ETN어학원 원장)
(10) 농·수·축산인 강영오(농업자영) 강영훈(농업자영) 강우찬(농업자영) 강종필(과수원 경영) 강태민(신촌농원 대표) 고중훈(과수원 경영) 고희석(농업자영) 권상수(농업자영) 김병근(과수원 경영) 김붕희(농업자영) 김세홍(축산업) 김용찬(과수원 경영) 김홍주(과수원 경영) 양길대(과수원 경영) 양영진(영진농원 대표) 오상봉(과수원 경영) 오영호(과수원 경영) 오평주(과수원 경영) 오해룡(과수원 경영) 이광철(과수원 경영) 이종택(과수원 경영) 이한우(은한수산 대표) 임만옥(백록농원 대표) 정태옥(태흥1리장) 진길부(개척농장 대표) 한재운(과수원 경영) 현동호(과수원 경영) 황해수(과수원 경영)
(11) 기업체 대표 및 임직원
강창일(한남산업 대표이사) 고석준(주식회사 성일 대표) 고성범(금성하이텍 대표) 김수관(건설공제조합 부산지점장) 김원학(송우섬유 대표) 김유철(신도시건축 대표) 김종언(세제엔지니어링 대표) 문경용(세일물산 대표) 오충일(일양무역상사 대표) 오해룡(상효새마을금고 이사장) 이예진(선진정밀 대표) 이원진(제주렌트카 대표이사) 이창근(이창근세무사무소 대표) 장금두(대신공업중개사 대표) 조성민(이라신협 이사장) 최성근(우진교역 대표) 최 진(국민건강보험공단 제주지사장) 한문호(영보섬유 대표) 한석조(금호무역상사 대표) 홍기찬(진일전기 대표) 홍성민(한라창호개발 대표) 홍영표(영동공업사 대표) 강신평(상기통상) 강영희(대한항공 과장) 고성언(현대중공업 조선장비관리부) 고양명(한독약품 전문이사) 고현우(한국관광공사 과장) 권유균(동성 총무부장) 김동익(서울시시설관리공단 부장) 김두행(한국항공 차장) 김만흥(대한항공 동경공항지점) 김영철(유공부산운영사업소) 김용철(선비치호텔 상무) 김재훈(한국네슬레 부장) 김창석(신흥기계 부장) 김태균(대우중공업 외자관리부장) 김태주(제일제당 이사) 김희철(현대산업개발 상무이사) 문영주(대한지적공사 북제주출장소) 부정택(현대자동차울산공장 총무부장) 부태완(중소기업진흥공단 교수) 서승범(삼영교통서귀포영업소 소장) 서창석(유정상사 부장) 성영승(주식회사 송촌) 송건호(성진기업 관리과장) 양상진(대동광고 네온사) 양순조(우신흥산 상무이사) 임종표(한국항공 차장) 한승용(한라호텔 차장) 한재식(남영개발) 현창돈(삼화여객 상무이사) 홍영식(부산한전산업개발) 홍현표(삼성전자 관리과장)
(12) 자영업
강공수(아티스 왕자고무상사 대표) 강중화(영덕화물 대표) 고관희(동성상회 대표) 고충식(RAPIDO 대표) 고평문(홍익문화사 대표) 고학언(런던셀프세차장 대표) 고한영(락천 대표) 김명헌(SK백록주유소 대표) 김용주(파스텔 대표) 문명수(남양우유대리점 대표) 문순우(실버코지 대표) 문시영(보경상사 대표) 성정연(뉴인천카바레 대표) 송용철(신라가든) 송중보(송중보법무사) 양명호(도레미노래연습실) 양상진(대동광고네온사 대표) 오만춘(금맥단란주점 대표) 이경종(현대약국 대표) 이재병(비전철학 관장) 이재중(대진상사 대표)
4) 해외거주 동문
초대 동창회장을 역임한 고영식은 캐나다로 이민을 떠났고, 서울대 물리학과를 수석 졸업한김승태는 NASA에 근무하고 있으며 서울의대를 졸업하여 도미한 정수만은 현지에서 내과전문의 로서 활발한 의료활동을 하고 있다. 일본에 거주하는 현경언은 고향을 오가면서 정기적으로 동창골프 모임을 주선하고 있으며 동창회 사업에 물심양면으로 도움을 주고 있다. 그 외 많은 동창들이 해외에서 기반을 닦고 제각기 생활에 매진하고 있는데 현재 외국에 거주하고 있는 동창은 다음과 같다. 고기진(일본) 고석호(일본) 고양진(재일거류민단 총무부장) 고영식(캐나다) 고영훈(일본) 김만철(미국) 김승태(미국) 김유봉(미국) 김종삼(일본) 오동준(미국·의사) 정수만(미국) 조재환(미국) 좌성근(일본) 현경언(일본).
5) 작고 동창
일찍이 세상을 하직한 동문들도 있다. 제주도문화상을 수상하고 제주시립교향악단을 창단하여 제주 음악계를 선도하던 제주대교수 이선문과 제주축구계를 이끌던 오현고 교사 이현조, 그리고 제주시의회 의원을 지낸 장수천이 먼저 우리 곁을 떠났다. 그리고 박봉언은 멀리 일본에서 세상을 떠났으며, 미국에서 생활하다가 잠시 고향에 들렀던 양근호도 운명하였다. 그외 강안수 고광식 고대수 고 원 고재언 전대효 고충희 김동우 김무삼 김수웅 김홍추 강성익 박용우 박용찬 신관섭 양권균 임석배 이경하 우동범 유동협 윤봉오 이동호 이유진 임종헌 고형배 등이 세상을 떠나 동창들을 슬프게 했다.
6) 특별 분야에 종사하는 개성 있는 동문 소개
(1) 이웃과 함께 하는 좋은 친구 - 국회의원 고진부
그는 만날수록 좋은 친구이며 너그러운 마음을 안고 따뜻한 세상을 만들어 가는 의사이며 정치인이다. 어렵고 정치가 불안정한 시기에 국민만을 바라보며 국민의 건강과 복지향상을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는 고진부를 동창들은 자랑스럽게 여긴다.
그는 여타의 정치인들처럼 화려한 미사여구를 늘어놓기보다도 발로 확인하고 마음으로 공감하며 할말은 하고 약속은 지키는 신의와 소신을 갖춘 사람이다. 늘 이웃과 주변을 생각하며 보이지 않는 곳에 더 많은 관심과 노력을 기울이는 친구, 바로 그 사람이 고진부이다.
그는 화합과 조화를 중시하는 리더십으로 한국정치의 희망과 비전을 제시하며 묵묵히 실천하고 있으며, 어렵고 힘든 정치 현실 속에서도 국민의 복되고 질 높은 삶을 위해서라면 소신과 원칙을 굽히지 않는 정치인이다. 그의 인생은 도전의 연속이었다. 어려운 가정형편임에도 불구하고 애써 의대를 진학할 때나, 당시에는 생소한 분야였던‘신경정신과’를 전공으로 선택한 것은 의외였다.
졸업 후 신경정신과를 개원할 때만 하더라도 주변에 친구들은‘잘 될 것’이라는 기대보다도‘잘될까’라는 우려가 많았던 게 사실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기우였다. 그가 펼치는 의술은 세간에 화제가 되었고, 후배들을 위한 각종 지원사업 역시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으며 노인복지분야에 대한 관심과 실천은 주변을 감동시키고도 남음이었다.
그런 그가 정치를 시작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이 사회의 구조적 모순 때문에 병자가 되어버린 수많은 사람들을 치료하면서 사회적 병리현상의 근원이 삐뚤어진 정치에서 기인한 것임을 알게 되었고 그것을 바로잡기 위해 정치를 시작한 것이다.
그는 준비된 국회의원이었다. 정치 초년생임에도 불구하고 고진부 의원은 16대 국회 첫 국정감사에서 61개 시민단체 연합회가 뽑은 국정감사우수위원으로 선정돼 각종 매체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정계에‘신성’으로 당당히 급부상했다. 국회 보건복지위원회에 전문화 바람을 몰고 온 선두주자일 뿐만 아니라 예결산위원회, 월드컵지원특별위원회, 국제자유도시추진위원회 등에서 활동하면서 21세기 복지사회가 요구하는 각종정책과 제주지역의 발전을 위한 정책 대안 제시로 여 의도 정가에 신선한 충격을 주고 있다.
고진부 의원이 지난 일년간 추진위원으로 활동하면서 성안해 온 제주국제자유도시특별법이 최근 국회를 통과 하였다. 전 세계 도시와 경쟁해서 이길 곳은 오직 하나, 제주라는 신념을 갖고 국제자유도시를 추진해 온 그는 특별법 통과를 지켜보며 각오를 새롭게 다지고 있다. 제주도를 세계 어느 도시와도 견줄 수 없는 압도적인 경쟁력을 갖춘 도시로 만들기 위해 혼신의 노력을 다하겠다는 각오가 그것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그는 제주도를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해 의정활동을 수행하고 있다. 틈나는 대로 지역구민의 어려움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제주사랑을 몸소 실천하고‘깨끗한 정치’구현을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 고진부 의원이 내일을 향한 의지와 포부를 안고 일할 수 있는 힘을 모아주고 그의 역량을 기대해 본다. (2) 국내 최고의 양돈전문가 - (주) 도드람 양돈조합 조합장 진길부
이천에서 국도를 따라 장호원 방면으로 가다보면 우측에 예술적 감각으로 지어진 월 커튼 현대적 건물이 있다. 건물 위에 보면 국내 최고의 돼지고기 브랜드인‘도드람 포크’의 귀여운 돼지고기 그림이 있는데, 바로 이곳이 KBS MBC 등 지상파 방송을 통하여 수차례 방영된 바 있는 도드람 양돈협동조합의 본거지이다. ‘도드람’이란‘돋울음’이라는 순우리말이며 이천에는 돼지에 관한 전설로 유명한 도드람산이 있다고 한다. ‘도드람 양돈협동조합’은 6백여 양돈 농가들이 모여 사료를 공동구매하고, 선진 양돈기술 보급과 돼지를 공동판매하며 약 100만두의 돼지를 사육하고 있는 국내 최대의 돼지생산자단체이다.
진길부 동문은 지난 1990년부터 도드람 협동조합을 이끌고 있는 국내 최고의 양돈전문가이다.
그는 대정읍 신도 출신으로 60년대 절대빈곤시대에 농업을 육성하는 것이 나라를 살리는 길이라는 청운의 뜻을 품고 서울대 농과대학으로 진로를 정한다. 졸업 후 대기업에 취업하여 편안한 삶을 살아가기 보다는 농업현장에 투신키로 결심, 이천에 임야 5만 평을 임대하여 텐트 생활을 하며 농장을 개척하기 시작했다. 반찬이라고는 돼지족을 삶은 국과 간장이 전부일 만큼 험난함 생활 속에 낙농, 비육우, 양어, 양돈 등 작목을 전환해가며 수많은 시행착오와 실패를 겪어야 했다. 힘든 생활 속에서도 그를 포기할 수 없게 한 것은 농업에 대한 깊은 애정과 미래에 대한 꿈이었다.
그는 혼자 잘 먹고 잘 살기 위한 삶보다도 더불어 사는 삶을 살아오고 있다. 80년대에는 농어민후계자로서 농민후계자연합회 결성에 앞장서 경기도 농어민후계자연합회장을 역임하였고 서울대 등에 농업최고경영자 과정을 개설하는 등 농민교육에 많은 노력을 기울이기도 하였다. 우루과이라운드의 높은 파고가 농업현장을 암울하게 만들던 그 즈음에, 개별양돈농가들을 규합해 ‘도드람’ 이라는 양돈생산자조합을 만들게 된다. 양돈장의 생산관리를 전산화하여 그 동안 주먹구구식으로 경영하던 양돈장을 과학적으로 관리하고, 사람에게 사용하던 임신진단기를 돼지에 적용하여 생산성을 획기적으로 향상시키는 등 첨단양돈기술을 개발 보급하였다. 또한 통된 종돈, 통일된 사료, 통일된 사양관리와 통일된 가공을 통하여 균일한 품질과 맛을 갖는‘도드람 포크’라는 국내 최고 브랜드의 돼지고기를 생산하여, 연간 1천만 불의 돼지고기를 까다롭기로 유명한 일본에 수출하기도 한다.
또한 그는 1996년도에 개인적으로 수상한 대산농촌문화대상 상금을 포함하여 수억 원의 사재를 기부하여, 양돈후계인력을 양성하기 위한 양돈연수원을 설립 운영하고 있다. 이 같이 숨가쁘게 살아온 그의 뒤에는 부인 황인숙 여사의 헌신적인 내조가 큰 힘이 되었고, 다른 부모처럼 뒷바라지 못해주었음에도 잘 자라준 1남2녀의 착한 자녀에게 항상 미안하고 고마운 생각을 갖고 있다고한다. 그는 개인적으로 1만 두 정도의 ’개척농장‘이라는 양돈농장을 운영하며 연간 20여 억원의 매출을 올리고 있다.
그는 마지막으로 우리 제주의 슬픈 과거인 4·3과 관련된 비화를 털어놓았다. 당시 2살로 부모의 품에 안겨 피난을 가던 중 공비의 습격을 받고 혼자 살아남아 울고 있을 때, 청년조직 대원이었던 오현고의 이기형 선생님이 구출해주셨고, 그 일을 졸업 후에야 이 선생님으로부터 전해 들었다고 한다. 따라서 그는 현재의 삶을 덤으로 산다는 생각으로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한다. 불꽃같은 정열로 개척사적인 삶을 살고 있는 그는, 분명 우리 오현고 14회가 배출한 걸물임에 틀림없다.
(3) 입학은 항상 2등 졸업은 항상 수석인 공학박사 - 김승태
우리 동창 중에 ‘멍태’ 라는 친구가 있다. 짐작하겠지만 물론 ‘멍태’ 는 별명이다. 이 친구가 요즘 시체말로 약간은 사이코 기질이 있어서 붙은 이름이다. 그런데 이 친구의 약간 사이코 기질은 정말로 사이코 기질이 있다, 아니다 일부러 그렇게 행동하는 것뿐이다 하고 얘기가 분하였는데 지금까지도 그 의문은 풀리지 않고 있다. 아마도 본인만 알 수 있는 일일 것이다. 이 친구는 가끔엉뚱한 행동을 하기도 했는데 그냥 그런 놈이니 괜찮다고 다들 용인하고 넘어가는 게 보통이었다.
이런 친구가 공부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게 잘했다. 어느 정도냐 하면 고교시절 전국에서 난다 긴다 하는 수학 천재가 다 모이는 서울대 주최 수학경시대회에서 전국 2등을 차지하였고 수재가 다 모인다는 서울 문리대에 차석 합격하였으니 짐작이 갈 것이다.
이 친구에게는 묘한 2등 징크스가 있었는데, 오현중학교에 2등으로 입학하였으나 입학하자마자 3년 동안 한번도 1등을 놓치지 않고 졸업을 했고, 오현고등학교에 2등으로 입학하였으나 이번에도 3년 동안 한번도 1등을 놓치지 않았다. 게다가 전국수학 경시대회에서 2등을 하였고 서울대물리학과에는 수석 합격했으나 화학과 친구에 뒤져 문리대에는 차석 합격하였다.
그러나 서울대를 졸업할 때는 문리대 수석으로 졸업하였다. 입학은 항상 2등으로 하고 졸업은 항상 수석으로 하니 묘한 징크스가 아닐 수 없다. 이것도 사이코 기질과 무슨 연관이 있는지 모르겠다. 이 친구가 대학갈 때 집에서는 법대를 가서 판검사를 하였으면 하였다. 그러나 이 친구는 내가어떻게 죄인에게‘너 죽어라!’하고 사형구형이나 언도를 할 수 있느냐고 펄쩍 뛰면서 결국은 물리학과를 택했다고 한다. 아마 부모님은 좀 섭섭하게 생각하지나 않으셨는지 모르겠다.
고등학교 때 이 친구가 사이코 같은 행동을 하면 다른 사람은 다 용인하고 넘어가는 게 보통이다. 36년도 더 지난 얘기를 지금 하고 있으나 이 친구가 이 글을 읽는다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사뭇 궁금해진다. 학창시절 수학과 과학의 왕답게 학문적 업적을 남기고 이제는 2등의 징크스를 깨고 1등으로 살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7) 모교를 빛낸 회원들
총동창회는 매년 모교를 빛낸 회원들을 선정하여 기념패와 공로패를 증정하고 있는데, 여기에 많은 현지회 회원들이 포함되어 있다. 총동창회관 건립 시에는 가장 많은 기금을 납부한 회기로 선정되어 단체 감사패를 받았으며 특히 김유철은 총동창회관을 설계하여 공로패를 받기도 하였다. 회관건립에 감사패와 공로패를 받은 회원들은 강종필 고우경 고진부 김용범 김용찬 김익태 박옥규 송달선 양용하 이창근 임만옥 조성민 진길부 한승진 홍성민이다.
개인으로 기념패를 받은 모교를 빛낸 동문은 철학박사 고강옥, 의학박사 고우경, 의학박사 고진부, 공학박사 김승태, 이학박사 김정림, 수산학박사 안영화, 이학박사 양일우, 치의학박사 전동문, 이학박사 현진오, 문단데뷔 김관후 김성주, 전국과학전람회 특상입선 김영국, 교장승진 김용남 김승문, 신경외과전문의 한승진, 정형외과 전문의 이민건, 안과전문의 김용범, 부이사관승진유춘기, 동경장학회 발전에 노력한 김종삼, 북제주 부군수 취임 김창규, 중소기업진흥공단 제주도본부장 취임 부태완, 제주도문화상 이선문, 축구발전에 공헌한 이현조, 독지부문 임만옥, 제주시의회 의원 장수천, 전국아동음악창작대회 최고상 수상의 좌승원 등이다.
4. 후일담 - 재학시절 이야기
1) 그 때 그 은사
대학입시 준비가 한창이던 고3 시절 상당한 긍지심을 갖고 꿈을 심어주셨던 많은 선생님들이대학으로 옮겨가시자 우리들은 큰 충격을 받았고 어려움을 겪기도 하였다. 제주교육대학 총장을 지내신 오윤겸 선생님, 화학방정식을 쉽고 재미있게 가르치셨던 김영호 선생님, 국어선생님 답게 ‘가시논 돗 다시 오소서’라는 송별사진을 남기신 임홍선 선생님, 멋과 여유의 송상순 선생님, 열정적인 강상배 선생님은 모두가 우리가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스승이자 오현고의 선배이셨다. 그러나 그 분들이 모두 대학으로 옮기셨다.
3학년 담임을 맡아 주야로 지도해 주신 A반의 이기형 선생님, B반 현병준 선생님, C반 박인호 선생님, D반 양남부 선생님, 그리고 E반 현영립 선생님은 너무나 수고를 아끼지 않으신 잊지못할 우리들의 스승이시다. 엄격하셨던 국어의 김원형 선생님, 영원한‘흐랭이’란 별명을 갖고 계신 김진흡 선생님, 칠성통 극장가를 활보하며 생활지도에 열성을 보이셨던 한재학 선생님, 막히지 않는 언변으로 시사해설의 수업을 해주셨던 김선택 선생님, 특유한 목소리의 양필선 선생님, 그리고 코끝의 안경을 연신 올리시며 열정을 쏟았던 황인형선생님, 까다로웠지만 열심히 지도해 주신 김성주 선생님들은 잊을 수 없는 영원한 은사이시다.
특히 교감의 직책을 맡으시면서 대수(代數)를 가르치셨던 김동연 선생님과 기하(幾何) 시간에 잣대 없이도 반듯하게 원을 그리셨던 현병준 선생님, 손수 교재를 만드시고 멋지게 영어를 가르치셨던 양코의 양남부 선생님, 그리고 익살의 강순학 선생님은 그저 그리워질 뿐이다. 음악뿐만 아니라 다양한 이야기를 통해 예술의 맛과 인생의 멋을 배워주신 김승택 선생님, 온갖 해학을 동원하여 우리를 즐겁게 가르쳐 주셨던 이기형 선생님 모두는 우리 인생에 큰 희망과 배움을 주신 큰 스승이시다.
2) 학생회장 학창회고 (김종천)
- 우리는 질풍노도의 기상으로 대망을 품었다 - ‘오현! 그 이름만 들어도 내 가슴은 뛰노라’. 질풍노도의 기상으로 꿈을 펼쳤던 오현은 나의 청소년기의 전부였다. 중고시절을 한 울타리에서 보냈고 더구나 일찍 출타한 둘째 형님을 제외하고 맏형(4회김종원)과 셋째형(11회김종승), 두동생(16회김종은 18회김종주)까지 모두 오고를 졸업했으니 저절로 오현의 문 화속에 자랄 수밖에 없었다.
당시 점심은 대부분 집에 가서 먹고 왔는데 종소리와 함께 책보를 들고 우르르 교문 밖으로 밀려나갔다. 집이 먼 친구는 학교주변 자취생 방으로 몰려가거나 아니면 근처 풀떡 집에 가서 허기를 채우곤 했다. 여럿이 모이면 으레 정학감에 해당하는 일들이 벌어지곤 했는데 누군가 구해온 잡지사진(?)을 끽끽거리며 돌려보거나 아니면 골초 친구의 권유로 콜록거린 기침을 한두 번 경험하게 된다. 그러나 물들지 않는 동심으로 한데 어울려 우정을 키워 나갔다.
방과 후‘먹을낙’시합은 반드시 저당 잡힐 시계찬 친구가 있어야 했던 가난한 시절이었다. ‘학원’과‘다이제스트’를 읽고 더러는‘사상계’와‘현대문학’을 읽으면서 진학만이 아닌 민족과 국가를 생각하는 정치적 열병이 한때 있었다. 정견발표와 개표장소로 많이 이용되었던 북교 교정에서 선후배와의 자연스러운 만남은 항상 즐겁기도 했다.
1965년 신학기 봄, 우리는 전국적으로 몰아친 한일회담 반대 데모 분위기와 최고학년이라는 의무감에서 저절로 그 대열에 진입하게 되었다. D데이를 잡고 궐기사와 구호내용, 시위용 플래카드를 제작까지 다 완료한 상태에서 새벽녘에 급습한 형사대에 적발되었고 모두 관덕정 앞 경찰서로 잡혀갔다. 당시 삼십대 초반의 경무관으로서 이름을 날렸던 P경찰국장의 설득에 마음이 흔들렸지만 포기할 수는 없었다. 각서의 내용을 위반하고 우리는 곧 72시간의 단식농성에 들어갔다.
제주앞 바다 우리 눈앞에 일장기를 달고 나타난 어선을 보면서 그냥 침묵할 수는 없었다. 3일째 우리는 탈진한 상태에서 선생님들의 눈물어린 호소와 우리에게 마지막 졸업장을 주시고 떠나셨던 고봉식(高奉湜) 교장선생님의 간곡한 당부로 단식의 막을 내렸지만 우리는 오현마크가 새겨진 유서깊은 돌담집에서 순수한 애국을 노래했던 과거를 안고 있다. 한 권의 책을 끼고 서부두 별도봉을 찾았던 고상함은 야망의 설계이기도 했다. 공식적인 학교서클 이외에 학구파를 자처한 미네르바의 모임, 여명회, 돌무리 등 지도교사를 모신 각종 STUDY GROUP들이 경쟁하듯 등장하여 자웅을 겨루기도 하였다. 학교신문의 제작과 당시 우도까지 다니면서 봉사활동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청소년적십자 지도를 맡으셨던 김승택(金升澤)선생님의 열성과 헌신의 결과였다. ‘룸비니’불교학생 모임을 통한 전 명문고 학생과의 교류 그리고동아리 모임을 통해서 얻어진 문화 예술적 감성은 조숙한 연심의 발로이기도 했다. 당시 화북 원명사(圓明寺)에 잠시 기거 중인 시인 고은(高銀)을 모신 문학 강좌, 담임이셨던 이기형(李琪亨) 선생님의‘제주의 문학적 자원’이란 주제의 강연과 토론, 해외여행 선생님의 여행기 발표회, 칠성통청탑다방에서의 고전음악감상회 등은 공부보다 서클활동에 몸을 맡긴 열정의 순간이었다.
목표와 부산행의 정기선은 꿈의 연락선이었다. 입시준비 차 일찍 상경하는 친구의 동부두 전송은 육지에 대한 동경이기도 했다. 선창가의 질퍽한 풍경 속에 멀리 수평선 넘어 흔들던 손수건의 이별은 한 폭의 아름다운 파노라마였다.
오현만이 할 수 있었던 기수단의 창설과 밴드를 앞세운 멋진 시가행진은 제주에서뿐만 아니라 개천예술제가 열리던 진주하늘 아래서도 이루어졌다. 모의고사 석차가 돌담 벽에 붙여지면 와하고 몰렸던 시절, 우리는 훌륭하신 선생님 밑에서 참으로 행복했다. 교가, 응원가가 귓전에 들리면어느새 찡하게 젖어드는 눈 이슬은 혼자만의 가슴이 아닐 것이다. 지성과 야성의 전당으로 세계를 향해 욱일승천(旭日昇天)하는 오현이기를 염원한다.
5. 맺음말
이제 賢志會는 오현의 기상 아래 드넓은 세상을 향하여 그 깃발을 펼쳐나갈 것이다. 고교시절 끝없는 정열로 우리를 가르치셨던 선생님의 뜻을 받들어 자신에게 부여된 멍에를 걸머지고 한 걸음 한 걸음 걸어 나가야 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영원한 고향 오현을 세계에 심을 것이다.
(14회 원고정리 김종천, 김관후, 홍승훈)
[출처: 오현고50년사 (2), 1951-20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