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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라미스(Salamis) 해전
페르시아 전쟁 때, 살라미스 섬과 아테네의 항구도시 피레에프스 사이에 있는 살라미스 해협에서 그리스 함대가 병력이 훨씬 우세한 페르시아 해군을 무찌른 전투(BC 480).
<백과사전>

<그리스 해군 지휘관 테미스토클레스>
살라미스(Salamis) 해전(BC 480)
1. 살라미스 해전의 배경
BC 492년부터 479년까지 4차에 걸쳐 페르시아 전쟁이 단속적으로 지속되었다. 페르시아의 2차 침공을 마라톤 전투에서 격퇴한 아테네는 숨을 돌릴 수 있었다. 페르시아의 다리우스는 다시 대규모 원정을 준비하였으나 전비 조달을 위해 이집트에 중과세를 하는 바람에 기원전 486년 반란이 일어났다. 이를 진압하던 도중에 다리우스가 사망하고 그의 아들인 크세르크세스(Xerxes)가 왕위를 이었다. 크세르크세스는 이집트의 반란을 진압하고 그리스 원정 준비를 시작하여 기원전 480년 제3차 침공을 감행하였다. 헤로도투스의 추산에 따르면 당시 페르시아군은 병력 264명이었지만, 실제는 약 35만명과 함선 1207척으로 구성되었다.
당시 아테네에서는 밀티아데스(Miltiades)가 실각하고, 테미스토텔레스(Themistocles, B.C. 527?-460?)와 아리스토티데스(Aristotides)가 집정관으로 통치하고 있었다. 그러나 아리스토티데스는 지상전 위주의 항전을 주장하였으나, 기원전 482년에 추방되어 해전 위주의 항전을 주장하던 테미스토클레스가 실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그는 480년 봄에 200여척의 함선을 건조하였고, 약 4만명의 수병을 양성하였다.
2. 제3차 페르시아전쟁의 전개
기원전 480년 봄 페르시아군이 헬레스폰트해협을 건너 침공해 들어왔다. 스파르타의 레오니다스(Leonidas)가 지휘하는 7000-8000명의 중갑보병과 경장비병으로 구성된 육군은 테르모필레에서 방어진지를 구축하였고, 아테네의 해군은 스파르타의 유리비아데스(Euribiades)를 함대 사령관으로 하는 해군은 총 330여척(이 중 아테네 함대가 180척, 스파르타 함대가 10척)으로 구성되어 바다에서 페르시아 함대를 맞았다.
크세르크세스는 폭풍으로 페르시아 함대의 도착이 늦어진 데다가 대병력을 이끌고 왔기 때문에 그리스군이 항복할 것으로 기대하여 4일 동안 군사작전을 벌이지 않고 대기하였다. 그러다가 5일 째 되는 날 공격을 감행하여 레오니다스를 비롯한 스파르타군을 전멸시켰다. 테르모필레전투에서 페르시아군도 2만명이 사망하였다.
한편 페르시아 함대는 마그네시아 반도의 동해안을 돌아 남하하는 도중에 폭풍우를 만나 함선 400척을 상실한 뒤 이틀 뒤에 아프에테에 도착하였다. 그리스측의 함대사령관인 유리비아데스는 페르시아 함대를 기습 공격하였지만, 별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3일째인 8월 30일 페르시아 함대와 그리스 함대간에 아르테미지움(Artemisium) 해전이 벌어졌지만, 서로 우열을 가리지 못했다. 그러나 전투 도중 테르모필레 패전 소식이 그리스 함대에 전해지자, 그리스 함대는 유보에아 해협 중 가장 폭이 좁은 에우포리스가 페르시아의 수중으로 넘어가 퇴로가 차단될 것을 우려하여 살라미스로 퇴각하였다.
3. 살라미스 해전
그리스 해군의 철수는 아테네군의 요청에 따라 이루어졌다. 헤로도투스는 “부녀자를 아티카에서 피신시키고 그 뒤에 취할 조치에 대한 여유를 갖기 위해서였다”고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테미스토클레스의 전략에 따라 코린트와 살라미스에서 제2방어선을 구축하기 위한 것이었다. 8월 초에 아르테미지움 해로 출전하기 전에 아테네 시민에게 모두 철수 명령을 내렸고, 모든 함대를 살라미스로 집결하도록 명령하였다. 페르시아군은 손쉽게 아테네를 점령하였고, 페르시아 함대로 9월 4일 아테네의 외항에 도착하였다. 페르시아 함대는 아르테미지움 해전에서 상당한 피해를 입었기 때문에 피해를 복구하느라 약 3주간 전투를 전개하지 않았다.
이 동안에 그리스 함대에서도 응전 방법에 대한 논란이 있었다. 만약 해전에서 패배했을 경우 살라미스 섬으로 피신하는 것이 불가능하므로 살라미스 섬에서 철수하여 코린트 지방으로 후퇴할 것인지의 여부가 가장 큰 논란거리였는데, 전체적으로는 이 방법 밖에 없다는 쪽으로 의견이 모아졌다. 그러나 테미스토클레스는 ‘살라미스에서 철수한다면 적의 진격을 쉽게 내줄 뿐만 아니라 아테네 시민과 영토를 포기하게 되며, 열세한 병력으로 좁은 해역에서 우세한 적의 함대에 대응할 수 있는 이점을 포기하는 것’이라면 반대의사를 분명히 했다. 따라서 이 문제를 두고 4회 걸쳐 회의가 계속되었는데, 4차 회의가 진행되는 동안 테미스토클레스는 첩자를 페르시아 진영으로 보내어 거짓 정보를 흘렸다. 첩자가 흘린 정보에 대해 헤로도투스는 ‘해전이 발생하면 그리스 내부에 친 페르시아파와 반 페르시아파간에 내분이 발생할 것’이었다고 적고 있고, 3대 비극시인 중 한 사람인 아이스킬로스(Aischylos)는 ‘페르시아 함대가 공격하면 그리스 함대는 살라미스 섬에서 철수할 것’이라고 적었다. 어쨌든 이 정보는 페르시아군을 살라미스 해협으로 유인하려는 목적에 따라 흘린 것이었다.
페르시아 함대는 이 첩자의 말을 믿고 야간에 기동을 시작하여 새벽녘에 살라미스 협수로로 진입하였다. 이 시간에 그리스 군은 마지막 회의를 하고 있었는데, 페르시아 함대가 협수로로 진입하고 있다고 급보가 날아 왔다. 회의는 즉각 중단되었고, 살라미스에서 일전을 불사할 수밖에 없었다. 기원전 480년 9월 28일이었다.
페르시아 함대는 선두에 페니키아와 키프로스 함대를, 중앙에는 이집트와 그리스 점령지 함대를, 그리고 왼쪽에는 이오니아와 갈리아의 함대를 배치하였는데, 모두 750척이었다. 이에 대응한 그리스 함대는 380척으로 3열로 늘어 세우되 왼쪽에 아테네와 코린트 함대를 배치하였다. 페르시아 함대의 전술은 대함대의 이점을 살리기 위해 그리스 함대를 유인하여 넓은 해역에서 싸우는 것이었다. 페르시아측에 가담한 페니키아 함대는 살라미스 협수로의 입구인 Saronic 만에 배치되었다. 이때 그리스 함선 몇 척이 페르시아 함대 정면에서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페르시아 함대가 그리스 함선을 추격하기 시작하였는데, 너무 깊숙히 추격하고 말았다. 그러나 대기하고 있던 아테네 함대와 Aegina 함대가 페르시아 함대의 진로를 가로막았다.
북쪽에서는 페니키아의 이오니아 함대와 그리스의 펠로폰네소스 함대가 충돌하였다. 이렇게 되자 길이 7km, 너비 2km 밖에 안되는 살라미스 협수로에 양측의 함대 700-800 척이 뒤엉키게 되었다. 결국 혼란에 빠진 페르시아 함대는 기동이 어렵게 되어 200척이 침몰되고, 4만명이 사망하였다. 이에 반해 그리스 함대는 46척의 함선을 상실하였다. 페르시아의 잔여 함대는 아테네의 팔레움 항으로 돌아간 뒤 다음 날 아침 사르데스 항으로 출발하였다.
해전 다음날 그리스 군은 페르시아 함대가 헬레스폰트 해협 쪽으로 퇴각하고 있으며, 페르시아 육군도 후퇴 중이라는 보고를 접했다. 그리스 군에서는 이들을 추격할 것인가에 대한 회의가 개최되었으나, 결국 페르시아군 추격전을 중지하고 에게해의 여러 섬을 진입하기로 결정하였다. 이후 그리스 군은 그리스 반도와 에게해, 소아시아의 여러 지역을 진입하여 델로스 동맹에 가입시켜 이후 아테네제국으로 발전할 수 있는 기틀을 닦았다.
한편 살라미스 해전 직후 마르도니우스가 지휘하는 페르시아 육군이 기원전 479년 6월 보에오티아로 진격하자 아테네는 시민을 살라미스로 철수시켰다. 이에 아테네는 스파르타에 지원군을 요청하여 페르시아 육군에 맞서서 플라타에아전투에서 마르도니우스가 전사하자 페르시아군은 퇴각하였다.
4. 살라미스 해전의 교훈
1) 살라미스 협수로는 협소하기 때문에 대규모 함대의 기동성을 제한한다. 이 점에서 그리스 측이 지리적인 이점을 잘 활용했다고 할 수 있다.
2) 첩보전을 효과적으로 이용했다. 테미스토클레스는 페르시아에 첩자로 시킨노스라는 자를 파견했는데, 이 자는 테미스토클레스의 아들을 가르쳤던 자였다. 이 첩자의 밀서를 보고 크세르크세스는 공격명령을 내렸던 것이다.
3) 반페르시아노선을 표방하여 민중의 지지를 얻어 집정관이 된 테미스토클레스는 기원전 482년 육군주의를 표방하던 아리스테데스를 추방한 뒤 시의적절하게 함대를 건조하였다.
4) 기동성이 떨어지는 좁은 해역에서 효과적인 충각전술을 적절히 활용하였다.
5) 테미스토클레스라는 유능한 지휘관을 선출하고 따를 줄 아는 아테네 시민의 현명함을 들 수 있다. 마라톤 전투 이후 종전 분위기가 팽배하던 당시에 테미스토클레스는 대규모 전투가 시작될 것으로 예견하고 함대를 건조하였다. 아테네 시민들도 정치 지도자들간에 이견이 발생했고, 당시의 육군 중심이던 분위기와는 달리 해군을 중시하던 테미스토클레스를 지도자로 선출할 수 있는 현명한 정치감각을 갖고 있었다.
<출전 : 김주식, <서구해전사>, 연경출판사, 1997>

<살라미스해전>, 배리 스트라우스, 갈라파고스, 2006

< 살라미스 해전이 벌어진 해협의 현재 모습. 왼쪽이 살라미스 섬, 오른쪽이 아테네. / 구글. >
기원전 490년부터 479년까지 (종전은 443년에 이뤄졌지만 실제 플라타이아 전투로 끝난거나 다름없으니) 벌어졌던 그리스와 페르시아 사이의 전쟁은 전제주의 vs 민주주의, 폭정 vs 자유, 동양 vs 서양의 대결 등으로 의미지어지면서 많은 관심의 대상이 돼 왔죠. 트로이 전쟁과 함께 우리들에게 잘 알려진 고대 그리스의 역사적 사건들 중 하나입니다.
10여 년에 걸친 전쟁 중 가장 결정적인 사건은 기원전 480년에 벌어진 살라미스 해전입니다. BC 490년의 마라톤 전투는 페르시아의 침략 의지를 최종적으로 꺾어놓는데 실패했고 BC 479년의 플라타이아 전투는 전쟁을 마무리하는 의미였을 뿐, 실제적인 전쟁의 승패는 바로 살라미스 해전에서 페르시아 해군이 패배하면서 결정됐습니다. 페르시아 전쟁의 명량해전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배리 스트라우스의 "살라미스 해전"은 어떻게 페르시아 해군과 그리스 해군이 살라미스 해협에서 그리스의 운명을 걸고 격돌을 벌이는지 기원전 480년 8월 말부터 9월 24일까지의 한 달 가량의 과정을 그리고 있습니다.
사 실, 제목은 "살라미스 해전"이지만 거의 "테미스토클레스의 해전"이라고 봐도 될 정도로 그의 비중이 높게 다뤄지고 있습니다. 그리스 함대 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 아테네의 지휘관으로서-하지만 총사령관은 스파르타의 에우리비아데스- 그는 사실상 그리스 해군의 전략과 전술을 총지휘합니다. 스파르타군의 테르모필라이 전투에 발맞춰 아르테미시움에서 무려 3배에 달하는 페르시아 해군의 발을 묶어놓고 전술적인 승리를 거둘 때부터 그의 역량은 단연 빛이 나지요.

< 페르시아 해군과 그리스 해군이 처음으로 맞붙은 아르테미시온.
여기서 그리스 해군 300여척은 900여 척의 페르시아 해군과 대결합니다. >
사실 페르시아 해군은 시작부터 불운했습니다. 무려 1,307척의 대함대를 보유하고 있었지만, 에게해의 폭풍을 만나 그리스 해군과 만나기도 전에 400여 척의 함정을 상실하죠. 아르테미시움 해전 과정에서도 200여 척의 별동대를 폭풍으로 상실합니다. 해전 과정에서도 70여 척을 잃어, 개전 초 4:1이었던 전력비는 2:1로 축소됩니다. 하지만 여전히 살라미스 해전 당시에도 360여 척 vs 700여 척으로 페르시아 해군의 전력이 압도적으로 강한 건 분명했죠.
테르모필레의 협로가 뚫려 아테네가 페르시아 군 앞에 개방되자- 당시 아테네 북부 보이오티아의 테베 등의 국가는 페르시아의 동맹이었습니다. - 아테네는 대략 15만에 이르는 아테네 시민들을 타 지역으로 소개시키고 페르시아 해군과 근방 살라미스 해협에서 결전을 벌이기로 합니다. 이 과정에서 더 할 나위없이 찬란하게 빛을 보는 인물이 바로 테미스토클레스입니다.
그는 델포이의 신탁을 이용해-일종의 정보조작이죠.- 아테네 시민들의 소개 결정을 이끌어내고, 당시 스파르타군이 방벽을 쌓고 있던 코린트 지협으로 철수해 그 곳에서 전투를 벌이자는 다른 도시 해군 장교들의 주장을 갖가지 책략을 사용해 저지합니다. 그가 그리스인들뿐만이 아니라 페르시아인들까지 모략과 책략의 대상으로 삼는 모습을 보면 정말 감탄하기만 할 뿐입니다.
결국 살라미스 해전은 아테네 해군 제독 테미스토클레스에 의해 선택된 전장에서 그가 원하는 시간과 기후조건 하에서 페르시아 해군을 반간계를 사용해 속여넘긴 상태에서 벌어졌던 것입니다. 전력비는 비록 2:1에 달했지만, 그리스 해군의 승리는 예약돼 있었던거죠.

< 현재 터키의 보드룸 시가 된 할리카르나소스. 이 곳의 여왕이 살라미스 해전에 함장으로 참전했었습니다. >
테미스토클레스 말고도 흥미있는 인물이 있습니다. 아마 세계 최초로 해전에 참가한 여성 제독이자 함장, 여왕이 아닐까 하는데, 할리카르나소스의 여왕 아르테미시아입니다.
당 시 크세르크세스의 참모들 중 유일하게 살라미스 해전의 패배를 예측했으며, 전투중에 아테네 군함에게 공격받을 위험에 처하자 바로 옆에 있는 평소 앙숙이었던 동맹국의 왕이 탄 배를 공격해 침몰시켜 위기를 탈출한 여걸입니다. 결국 아테네 군함은 이 배를 변절자의 배로 판단하고 공격하지 않았고, 멀리 떨어진 곳에서 관전하던 크세르크세스는 적국의 배를 공격한 것으로 오인해 전공이 하나 더 올라갔더군요. OTL... (읽어보시면 아시겠지만, 신하들의 의도적인 거짓 보고일 수도 있습니다.)
하여튼 페르시아 전쟁의 향방을 가른 살라미스 해전은 이렇게 그리스 해군의 승리로 끝나고, 그리스는 페르시아의 침략에 맞서 그들의 도시국가들을 지켜내는 데 성공합니다.
그렇다면 전제와 폭압에 맞선 자유민들의 승리의 상징이 살라미스 해전이었던 것일까요? 저자는 그러한 이분법적인 평가를 내리지 않습니다. 그가 바라본 살라미스 해전의 의미는 오히려 아테네가 이 해전으로 말미암아 사상 최초의 제국적 민주주의 국가로 변했다는데 있습니다.
살라미스 해전과 뒤이은 델로스 동맹의 결성으로 동지중해의 해상 패권을 장악한 아테네는 그 이후 급속히 제국주의 국가로 변해갑니다. 그 모습은 나중에 리뷰할 도널드 케이건의 "펠로폰네소스 전쟁사"에 잘 나와있죠. 살라미스 덕에 아테네는 자유를 얻었고, 그리스는 노예가 됐습니다. 살라미스 해전의 패배로 그리스가 잃을 뻔한 것은 그리스의 영광이 아니라 그리스의 교활함과 탐욕이었습니다.
이처럼 아테네는 자유의 이상을 지키지 못했고, 이는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와 같은 민주주의의 비판자들을 출현시켰죠. 민주주의와 민주주의의 오점에 대한 끝없는 논쟁, 이것이 바로 살라미스 해전이 가진 진정한 의미라고 저자는 평가합니다.
저자인 배리 스트라우스는 코넬대 역사학 교수입니다.
<출처: welcome aboar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