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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관계(官界)
흔히들 타성인들이 吾金을 가르켜 조선말엽에 세도정치를 하면서 중요 관직을 일족끼리 독점하였던 대관집으로만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조선 중기부터 이미 각 분야에 뛰어난 인물이 많이 배출되었다.
우선 관계(官界)를 살펴보면 총 15명의 상신(相臣)과 50여명의 판서, 7명의 대제학(大提學), 3명의 왕비(王妃)를 배출하였으며 조선시대에 가장 출사에 기반이 되는 문과급제자가 172명, 무과급제자가 약 146명이며,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한 자가 총 385명인데 그중 진사 253명, 생원이 132명이다. 또한 선비로서 유고(遺稿)나 문집(文集)을 남긴 사람이 175명이다.
대개 순조, 헌종, 철종 3대에 걸쳐 약 60년간 왕의 외척으로서 세도를 잡고 고관대작을 얻은 것으로 여길 수 있지만 실상은 다르다. 이미 그 이전에 부자영의정(父子領議政), 형제영의정(兄弟領議政), 부자대제학(父子大提學)이 배출되었으며, 또한 당대의 화벌(華閥)들과 혼인관계를 맺고 있어서 이미 막강한 기반을 갖추고 있었다.
조선시대의 정치의 병폐이기도 하고 특징이기도한 당파도 모든 문중의 일가가 (서인)노론인 것도 아니었다. 소위 경거(京居)와 향거(鄕居)에 따라 달랐다. 즉 넓게 보아서 서인도 있고 동인도 있었다. 또 그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이들도 있었다. 따라서 일부분을 보고 모두 같이 평가해서는 안 된다.
경거의 대표적 지역은 장동(壯洞)이고 장동하면 청음(김상헌)선생부터 이야기들 한다. 그러나 경거의 시작은 이미 그 이전부터 시작되었다. 소산(素山) 입향조(入鄕祖) 비안공(比安公: 三近)은 두 아들을 두셨는데 맏아들 계권(係權: 大提學 權孟孫의 女壻-사위)은 한성부판관(漢城府判官)을 지냈고 둘째 아들 계행(係行: 定獻)은 대사헌(大司憲)과 대사성(大司成)을 지냈다. 이로써 이미 경거는 시작되었으나 정헌공은 무오사화(戊午士禍)의 부당함을 주장했다가 옥고를 치르고 소산으로 낙향했다가 다시 길안 묵계로 옮겨 살았다. 판관공은 다섯 아들을 두셨는데 맏이는 학조(學祖: 燈谷大師, 世祖時 國師), 둘째는 영전(永銓: 司憲府監察), 셋째는 영균(永勻: 進士 奉事), 넷째는 영추(永錘: 文科 水原府使), 다섯째는 영수(永銖: 永川郡守, 司憲府掌令)을 지냈으니 모두 경향을 드나들면서 살았고, 막내 영수는 아들 셋을 두었는데 맏아들 영(瑛: 司馬兩試, 文科)은 내직으로 승지(承旨)와 이조참의(吏曹參議)를 지냈고 외직으로는 밀양부사(密陽府使)와 강원관찰사(江原觀察使)를 지냈는데 중종(中宗) 3년부터 중종22년까지 20년간 줄곧 지제교(知製敎)란 직함을 겸직한 것이 특이한 사실이며, 둘째 번(璠: 文科)은 평양서윤(平壤庶尹), 공조정랑(工曹正郞), 셋째 순(珣: 司馬試)은 찰방(察訪), 경상우도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을 지냈다.
이때부터 중앙에 출사(出仕)하기 시작하였고 명문(名門)으로 발전하기 시작하는 기틀이 이루어졌다.
서울에 뿌리를 내리기 시작한 것은 계권이 경직(京職)에 있을 때부터이다. 청풍계(淸風溪)에 터전을 잡고 또 세아들(영전,영추,영수)이 등과(登科) 또는 일천(逸薦)으로 내외직을 거치면서 세거가 이어져 나갔다. 특히 영수의 아들 영과 번이 나란히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을 하면서 장동(壯洞)터전을 굳히어 나갔다. 영(瑛)은 20여년간 승지(承旨), 형조(刑曹), 이조참의(吏曹參議) 등을 거치면서 청풍계에 태고정(太古亭)을 짓고 살았다. 그 후 영의 손자 기보(箕報)에 이르러 소산으로 낙향하고 번(璠)의 후손들이 계속 이곳에 살면서 많은 명상(名相)과 학자(學者)들을 배출하여 소위 장동김씨(壯洞金氏)라는 별칭을 받을 만큼 성장·발전하였다.
서울에 세거해 온 번의 후손들은 서인에 속하고 서인이 분화되면서 노론(老論)에 속하였다. 그렇차니 당(黨)의 부침(浮沈:시세가바뀜,성하고망함)에 따라 정치적인 입지도 수반되었다.
번의 후손으로 출사한 것을 살펴보면 국구(國舅) 3명, 의빈(儀賓) 2명, 영의정 8명, 좌의정 4명, 우의정 3명, 문원(文苑: 대제학 7명, 제학 15명, 부제학 16명, 직제학 14명) 52명, 관찰사(觀察使) 46명, 유수(留守) 31명이나 된다. 안동에 살아온 집들은 비록 서울만큼 화려한 출사나 명성은 갖지 못했더라도 이 고장에서는 누구집 못지않은 학문과 도의를 숭상하고 중앙관계에도 참여하는 등 가업을 잘 지켜왔다.
소산에서 터밭을 지켜 온 영의 아들 생락(生洛)은 사포별제(司圃別提), 손자 기보(箕報)는 원주목사, 증손 극(克)은 승의랑(承議郞), 고손 희맹(希孟)의 봉선전참봉(奉宣殿參奉), 현손 중익(重謚: 文科)은 홍문관부제학(弘文館副提學), 6대손 명석(命碩: 司馬兩試)은 영유현령(永柔縣令), 계상(啓祥)은 직장(直長), 계광(啓光: 文科)은 풍기군수(豊基郡守), 계창(啓昌)은 부호군(副護軍), 7대손 하명(夏明)은 부여현감(扶餘縣監), 하영(夏英)은 사복시주부(司僕寺主簿), 8대손 범갑(范甲: 文科)은 병조좌랑(兵曹佐郞), 우갑(禹甲: 文科)은 승정원정자(承政院正字), 인석(麟錫)은 부호군(副護軍), 10대손 유기(裕己: 文科)는 병조좌랑(兵曹佐郞), 우순(宇淳)은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11대손 양근(養根: 文科)은 형조참의(刑曹參議)였으며 또한 영남8대문장가로 불리었으며 시문(詩文)에 능하였다.
12대손 조연(肇演)은 적성현감(積城縣監)과 돈녕부도정(敦寧府都正), 15대손 장한(章漢: 文科)은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을 지냈다.
소산에 터전을 잡은 현감 삼근의 아우 삼우(三友)는 불정촌(佛頂村: 豊山面 下里)에서 종송촌(種松村: 豊山面 上里)으로 옮겨 정착하였는데 이곳에 옮겨 온 삼우는 선공감주부(繕工監主簿), 아들 맹구(孟龜: 生員)는 계공랑(啓功郞), 손자 용려(用礪)는 진사(進士), 증손자 시좌(時佐)는 이름난 효자로 알려져서 정려(旌閭)되었다. 고손자 즙(緝: 司馬試, 文科)은 양산(梁山)군수, 5대손 사득(士得)은 진사였다. 또 그 후손 중에는 우규(禹圭)는 진사, 해(楷)도 진사, 시우(時佑)는 생원, 사리(士利)는 효자로 정려되었다.
불정촌(佛頂村)에서 태어난 계행(係行)은 늦게(50세) 대과에 급제하여 성균관대사성(大司成)과 대사헌(大司憲)을 지냈으나 무오사화로 정관계가 어지러워지자 소산으로 낙향했다가 길안 묵계촌(默溪村)으로 옮기었다. 여기서 그 자손들이 세거하게 되었다.
계행의 후손들의 출사 또는 대소과합격자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극인(克仁)은 영릉참봉(英陵參奉), 극의(克義), 극례(克禮)는 생원(生員), 극신(克信)은 군수, 몽호(夢虎)는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使), 종윤(宗胤: 司馬試)은 봉사(奉事), 수조(壽祖: 武科)는 첨사(僉使), 중청(中淸: 文科甲科)은 승지(承旨), 주우(柱宇: 文科壯元)는 현감, 근청(謹淸)은 부사, 한운(翰運: 文科)은 목사를 지냈다.
이밖에 여러 파에서 안동을 위시한 각 지역에서 많은 인물을 배출하였으나 주로 집성촌을 소개하다보니 일일이 열거치 못하고 다만 부록에 간단히 인물소개가 되었을 뿐이다.
2. 정계(政界)
조선시대의 정치는 黨派政治의 한계를 뛰어 넘을 수 없었다. 자의든 타의든 관계를 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특히 서울에 세거함에는 관직이 필수적이었고 官職을 얻으려면은 자격과 관계없이 당파에 관계하지 않으면 상위직으로 승차는 불가능하였던 것이다. 장동에 세거하였던 상헌은 仁祖反正후 반정에 소극적이었던 청서(淸西)의 대표적인 인물이었고 그의 손자 수증(壽增), 수흥(壽興), 수항(壽恒) 3형제는 노론의 영수로써 양송(兩宋)으로 일컬어지는 송시열(宋時烈)과 송준길(宋浚吉)과는 사우(師友)관계가 되고 3송으로 일컬어지는 송규렴(宋奎濂)은 매부였다. 이렇게 학문과 혈연으로 연결되어 호서사림과의 밀접한 관계가 형성되었다.
특히 수항은 1646년(仁祖 24) 진사시에 장원급제하고 5년만인 1651(孝宗 2)에는 문과에도 장원급제한 희세의 수재였다. 뿐만 아니라 성품이 온건하고 대인관계도 원만하고 매사에 신중하고 겸손한 자세로 임하였다고 한다.
인격과 재능을 겸비한 덕에 1655년(孝宗 6) 호당(湖堂)에 선발되어 사가독서(賜暇讀書)의 영예를 얻었고 도승지, 이조판서 등을 거쳐서 1672년(顯宗 13)에는 44세의 젊은 나이로 우의정과 좌의정을 역임하였다. 1673년 중형 수흥(壽興)이 영의정이 되자 형제가 현직 정승자리에 앉는 영예를 얻었다.
이러한 영예는 당쟁이 격화되어가는 와중에서 오래 갈 수 없었다. 1674년(顯宗 15) 갑인예송(甲寅禮訟)에 휘말리게 되었다. 그 해 효종의 비 인선왕후(仁宣王后)의 상에 조대비(趙大妃)의 복에 관해서 서인은 대공설(大功說-9個月)을 남인은 기년설(朞年說)을 주장하였다. 결국 남인의 설이 채택되어 그들이 득세하자 수흥은 춘천에 유배되고 수항은 영암(靈巖)으로 유배되었다가 1678년 철원으로 이배되었다. 그러나 1680년(肅宗 6) 경신환국(庚申換局)으로 서인이 재집권하면서 수흥·수항 형제도 유배에서 풀려나서 가까이 10년간 형제가 번갈아 영의정 자리에 있었다.
1689년(肅宗 15) 기사환국(己巳換局)이 발생하여 남인이 집권하면서 그들의 공격으로 수항은 진도에 유배되어 사사(賜死)되었고 수흥은 장기 유배지에서 사사되었다. 특히 문곡(文谷: 壽恒)은 임사(臨死)에 아들 5형제(昌集, 昌協, 昌翕, 昌業, 昌緝)에게 유계(遺戒)를 통하여 청음선생부터 내려오는 충절(忠節)과 문한(文翰)으로서의 전통을 계승하되 과거와 사환(仕宦)을 자제토록 당부하였다.
그러나 몽와(夢窩: 昌集)는 여전히 노론의 거두로 활동하였다. 1672년(顯宗 13) 진사시에 합격하고, 1684년(肅宗 10) 문과에 합격하였다. 1689년(肅宗 15) 기사환국으로 아버지(수항)가 사사되자 한동안 은거하다가 1694년(肅宗 20) 갑술환국이후 정계활동을 다시 하였다. 이후 내외 요직을 두루두루 거쳐서 1717년(肅宗 43)에는 영의정에 올라서 부자영의정이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영예도 오래가지 못했다. 1721년(景宗 元年) 경종이 보령34세인데도 아들이 없어서 후사가 우려되었기 때문에 창집을 비롯한 이이명(李命: 領中樞), 조태채(趙泰采: 判中樞), 이건명(李健命: 左議政)이 합의하여 연잉군(延君: 英祖)을 왕세제(王世弟)로 옹립하였다. 거기에 그치지 않고 그해 10월 세제의 대리청정(代理聽政)을 추진하였다. 예상대로 소론의 반발에 부딪쳐 대리청정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그해 12월 소론의 급진파 김일결(金一鏡) 등이 상소하여 세제책봉과 대리청정을 주장함은 곧 경종에 대한 불충한 행동으로 몰아 처벌을 주장하였다. 이에 경종은 노론4대신을 위리안치시키고 관계 노론 인사들을 대거 처벌하였다. 또한 1722년(景宗 2)에 성행(省行: 昌集孫)이 경종을 시해하려 했다는 목호룡(睦虎龍)의 고발에 얽히어 국문도중에 사망하고, 노론4대신도 역적으로 몰리어 사사되었으며 제겸(濟謙: 昌集子)도 부령(富寧) 적소에서 사사되었다. 훗날 영조의 즉위와 함께 복관되고 국기에서 수항, 창집, 제겸, 성행의 사대충절(四代忠節)을 인정하여 부조지전(不之典)을 내리었다.
3. 교육(敎育)과 학문(學問)
학맥(學脈)을 살펴보면 서울지역은 율곡(栗谷) 이이(李珥)문하에 몽담(夢曇), 우계(牛溪)성혼(成渾) 문하에 상용(尙容),덕겸(德謙), 원운곡(元耘谷)문하에 길수(吉修), 월정(月汀)윤근수(尹根壽)문하에 상헌(尙憲), 우암(尤庵)송시열(宋時烈)문하에 창협(昌協), 정관재(靜觀齋) 이단상(李端相)문하에 창협, 창흡(昌翕), 도암(陶庵)이재(李縡)문하에 용겸(用謙),문행(文行),면행(勉行), 여호(黎湖)박필주(朴弼周)문하에 용겸(用謙), 남당(南塘)한원진(韓元震)문하에 교행(敎行),약행(若行), 병계(屛溪)윤봉구(尹鳳九) 문하에 지행(砥行), 근재(近齋)박윤원(朴胤源)문하에 이행(行), 전재(全齋)임헌회(任憲晦)문하에 병창(炳昌), 전간재(田艮齋)문하에 창현(昌顯), 이운산(李雲山)문하의 중순(仲淳), 이룡산(李龍山)문하의 호근(浩根), 이운포(李雲浦)문하의 병현(炳玹), 김서어(金鋤漁)문하에 구한(龜漢), 이용재(李庸齋)문하의 성동(聖東)이 수업하였다.
반면에 타성(他姓)들이 오김의 문에 들어와 수업을 받기도 하였다. 특히 그 중심 講學地는 석실서원(石室書院)이였다. 청음(淸陰) 상헌(尙憲)문하에는 송시열(宋時烈), 송준길(宋浚吉), 박세채(朴世采), 홍명하(洪命夏), 신익전(申翊全), 윤순거(尹舜擧), 류시정(柳時定), 이정악(李挺岳) 등 후일 저명인사가 된 사람도 많았으며 오금으로는 진원(震遠), 희진(希振), 계광(啓光)이 있다.
농암(農巖) 창협(昌協) 문하에는 어유봉(魚有鳳), 이현익(李顯益), 조겸빈(趙謙彬), 조문명(趙文命) 등이 있었고, 선생의 처남 이하조(李賀朝), 선생의 척질(戚姪) 이의현(李宜顯), 사위 오진주(吳晉周), 유수기(兪受基)도 문하였으며, 또 선생의 동생 창즙(昌緝), 창립(昌立), 족인(族人)으로 시보(時保: 水北의 손자), 시좌(時佐) 등이 있다.
삼연(三淵) 창흡(昌翕) 문하에는 박필주(朴弼周), 안중겸(安重謙), 송요좌(宋堯佐), 유척기(兪拓基), 민형수(閔亨洙) 등 수많은 재사들이 있고, 선생의 사위 이덕재(李德載)와 선생의 조카 제겸(濟謙), 용겸(用謙), 언겸(彦謙), 신겸(信謙)과 선생의 손자 문행(文行), 원행(元行)이 있고 집안의 명행(明行), 순행(純行), 춘행(春行), 시민(時敏), 시정(時淨), 영행(令行)이 있으며, 홍유인(洪有人)은 곡운(谷雲)의 외손자였다.
증소(巢) 신겸(信謙) 문하에는 아들 양행(亮行)과 처조카 이봉상(李鳳祥)이 있다.
미호(渼湖) 원행(元行) 문하에는 서형수(徐逈修), 심정진(沈定鎭), 박달원(朴達源), 홍대용(洪大容), 홍락현(洪樂顯) 외에 많은 재사들이 배출되었고, 선생 조카 리장(履長)과 집안의 이안(履安), 택행(宅行), 목순(睦淳), 직행(直行)도 있다.
지암(止庵) 양행(亮行)의 문하에는 이직보(李直輔), 송후연(宋厚淵), 윤취동(尹聚東) 등이 있었고 선생의 사위 민이현(閔彛顯)과 집안의 직순(直淳)이 있었다.
대산(臺山) 매순(邁淳) 문하에는 김상현(金尙鉉), 유신환(兪莘煥), 지운호(池運浩)가 있었고 집안의 수근(洙根: 渼湖曾孫)도 있었다.
안동 등지에서는 상당히 다양한 학맥을 계승하였다.
이퇴계(李退溪) 문하에서 기보(箕報), 계생(繼生), 생명(生溟), 응생(應生)이 수업하였으며 정한강(鄭寒岡) 문하에서 자() 중청(中淸)이 수학하였고, 이농은(李農隱) 문하에서는 병문(炳文), 김구와(金龜窩) 문하에서는 이선(履善), 신천재(申泉齎) 문하에서는 병형(炳衡), 박소고(朴嘯皐), 조원철(趙月川) 문하에서는 중청(中淸), 류정재(柳定齋) 문하에서는 기하(基夏), 김서산(金西山) 문하에서는 헌진(憲鎭), 유하(遊霞) 문하에서는 만규(萬圭), 류가은(柳可隱) 문하에서는 병규(炳規), 류서애(柳西崖) 문하에서는 병호(炳昊)가 수학하였다.
또 보백당(寶白堂) 계행(係行)은 종손 영(瑛)을 가르쳤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학문의 계통은 남북노소와 관계없이 골고루 전수받아 이어 나갔으며 따라서 통혼이나 제례 등도 그 학문 계통에 따라 차이가 많다.
특히 농암(農巖)과 삼연(三淵) 형제는 문장가로, 교육자로, 성리학자로도 유명하여 두 형제가 다 율곡 이후의 대학자로 덕업(德業)과 명성이 높았다. 정진(井鎭) 1920년대 대표적 극작가 작품으로 「기적」「15분간」등 작품이 있다.
4.서화(書畵)
서화(書)에 있어서도 대를 이어가면서 일가를 이룬 이가 많다.
영수(永銖)는 사어위기읍률(射御圍棋音律)을 잘하고 글씨를 잘썼다. 주우(柱宇)서예에 명망이 있어 13세에 진주 촉석루의 현액을 썼으며 동궁의 병풍에 사잠(四箴)을 쓰기도 하였다.
상용(尙容: 仙源)은 독서와 글쓰기를 좋아하였으며 서법(書法)은 왕희지(王羲之), 왕헌지(王獻之)를 본받았고 전서(篆書)는 모든 체를 다 잘 썼다. 숭인전비(崇仁殿碑) 전액(평양)과 군수(郡守) 장기정(張麒禎)의 비 전액(풍덕) 등이 남아 있다.
상헌(尙憲: 淸陰)은 문장과 절의로 세상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고 글씨는 명나라의 동기창체(董其昌體)을 잘 썼다. 남은 글씨로는 수천군정은묘갈(秀泉君貞恩墓碣)이 있다.
상준(尙寯: 休庵)은 명필로 당대에 이름이 높았다.
광욱(光煜: 竹所) 천성이 단아하고 곧아서 남과 사귀기를 좋아하지 않았다. 문예와 글씨에 뛰어 났으며 도갑사도선국사수미대선사비명(道岬寺道詵國師守眉大禪師碑銘) 전제(篆題)(靈巖), 형조참판김상준묘비(刑曹參判金尙寯墓碑) 제액(題額) 등이 있다.
광현(光炫: 水北) 전서와 해서를 잘 썼다. 유작으로 민기신도비(閔箕神道碑), (通津), 영의정이탁기비(領議政李鐸基碑) 등이 있다.
수인(壽仁: 元甫) 가법을 이어서 전서, 예서와 팔분체(八分體)를 잘 썼다.
수민(壽民: 沙浦) 가법을 이어 대전(大篆)을 잘 썼으며 당시의 편액은 대부분 썼다. 효종도 그 기예를 가상히 여기어 각 체의 글씨를 써서 바치게 하였다.
수증(壽增: 谷雲) 춘천 곡운(谷雲)에 은거하여 10여 년 동안 세상을 등지고 시와 글씨만을 즐겼다. 전서·예서·팔분체에 뛰어나 비문을 많이 썼다. 그림도 잘 그려서 섬세한 필치로 산수를 잘 그렸다. 유작으로는 김문곡수항묘표(金文谷壽恒墓表), 포은정몽주묘비(圃隱鄭夢周墓碑) 등 10여점이 있고, 그림은 고산구곡도(高山九曲圖), 방화계도(傍花溪圖) 등이 있다.
수항(壽恒: 文谷) 대전을 잘 썼다. 유작으로 김광욱묘표(金光煜墓表) 등이 남아있다.
창협(昌協: 農巖) 유학의 대가일 뿐 아니라 글씨도 잘 썼다. 유작으로 문정공이단상비(文貞公李端相碑), 김명원신도비(金命元神道碑) 등이 있다.
창숙(昌肅: 三古齋) 가학을 이어받아 전서·예서를 잘 썼으며 시도 능했다.
윤겸(允謙: 眞宰) 정선이 이룬 진경산수화풍을 이어받아 겸재파를 형성하였다. 금강산, 서울근교, 단양, 영남지방 등의 명승지를 찾아 여행하면서 진경산수 제작에 몰두하였다. 결국 겸제파의 경향에서 벗어나 자신의 화풍을 갖추었다. 실경을 대답하게 생략한 근대적 화면구성이 특징적이다. 세칭 시서화(詩書畵 ) 삼절(三絶)이라 하였다. 유작으로 동산계정도(東山溪亭圖) 금강산화첩(金剛山畵帖), 진경산수첩(眞景山水帖) 영남명승기행사경첩(嶺南名勝紀行寫景帖) 등이 있다.
창흡(昌翕: 三淵) 성리학의 대학자이며 문하에 많은 학자를 길러내었고 예서에 아주 능했다.
창업(昌業: 老稼齋) 도학과 문장으로 당대에 이름을 떨치었다. 그림에 능하여 산수화를 잘 그렸으며 화격이 고결했으나 만년에는 그림을 그리지 않았다. 유작으로 산수도(山水圖),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상이 있다.
원행(元行: 渼湖) 성리학에 일가를 이루며 문하에 많은 학자를 배출하였다. 행서에 능하였다.
용행(龍行: 石坡) 어려서 그림을 잘 그려서 아버지인 선비화가 윤겸(允謙)이 직접 지도하였다. 시와 서화를 즐기고 퉁소도 잘 부렸다. 26세에 요절했으나 노송궁천도(老松窮泉圖) 등의 유작이 남아있다.
조순(祖淳: 楓皐) 문장에 능하고 특히 묵죽을 잘 그렸다. 유작으로 묵죽도(墨竹圖), 설야사죽도(雪夜寫竹圖) 등이 있다.
난순(蘭淳)은 문장과 글씨에 뛰어나서 효연왕후(孝顯王后)식책문 등을 짓고 썻다.
유근(逌根: 黃山) 글과 그림을 즐기었으며 돌을 잘 그리기로 유명하다. 유작으로 그림은 오주고목도(五株枯木圖), 소림단학도(疏林短壑圖), 묵죽도(墨竹圖)가 있고 글씨는 청성묘중수비(淸聖廟重修碑)가 전한다.
성근(聲根: 海士) 필법이 웅건했는데 북송의 미불(米) 서체와 같았다. 그림도 잘 그렸다.
가진(嘉鎭: 東農) 어려서 경사자집(經史子集)에 통달했을 뿐 아니라 서법에도 뛰어났다. 이광사(李匡師)의 체를 썼으나 만년에는 미불(米불)과 동기창(董其昌) 서체를 즐겨썼다.
용진(容鎭: 潁雲) 선전(鮮展)에 입선을 시작 많은 활동을 하였으며 오창석(吳昌碩) 화법의 문인화풍을 이어받아 사군자와 기명절지에 능하였다. 유작으로 석매도(石梅圖)외 다수가 있다.
복진(復鎭: 井觀 1901~1941) 동경미술학교 졸업. 1924년 동경제전(東京帝展)에 나상(裸傷)이 입선 김은호등과 조선미술원을 창립. 유작으로 금산사(金山寺)의 미륵불상이 있다.
충현(忠顯: 一中 1921-2006) 1938년 17세때 동아일보주체 조선남녀학생 작품전에 최고상수상. 21세때 우리글씨 쓰는 법 출간하고 계속 한글고체를 연구하여 궁체라는 한글필체를 완성하였다. 유작으로 이승만 박정희대통령 묘비문을 비롯하여 700여점의 비문을 남기었다. 대한민국 문화예술상, 예술원상, 은관문화훈장 등을 수상하였다.
최근세에도 글씨에 뛰어난 작가들이 많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