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번째 이야기: 황금시대
1. 황금시대의 도래
탱고는 이웃나라 우루과이와 아르헨티나에서 중심적으로 인기를 끌고 황금시대로 불리는 30년대에서 2차대전 전까지는 매일밤 살롱과 밀롱가가 춤추는 사람으로 꽉 차는 대 성황을 이루게 되죠.
이렇게 인기를 끌자 탱고는 음악가와 댄서 양쪽으로 스타들을 배출하기 시작합니다. 초기에는 많은 니그로음악가 그리고 소수의 인디오 음악가들이 존재했지만 후일 거의 사라지고, Carlos Posadas(니그로와 인디오 혼혈)같은 소수의 작곡가의 작품만 남아있죠. 그리고 거의 모든 20세기 초의 연주자들은 음반이 없어서 역시 거의 사라져 버렸죠. Maglio, Greco, Firpo, Cobian 등 작곡가들만이 30년대 이전의 음악의 향기를 그들의 작품으로 남기고 있습니다.
2. 황금시대의 음악가들
30년대 레코드가 널리 보급되면서, 유명 악단들의 음악은 현재도 접할 수 있게 되었죠. 당시 소규모 밴드를 이끌던 사람들은 연주와 작곡등으로 명성을 떨쳤는데, Canaro, Fresedo, De Caro, Di Sarli, Filiberto, D'Arienzo, Gardel 등은 탱고를 다른 경지에까지 올려 놓은 스타들이었습니다.
당시까지만 해도, 주 수입원은 카바레나 나이트 클럽 등에서의 연주였으므로 큰 밴드를 운영하는 것은 무리였고, 주로 댄스를 위한 반주가 많았죠. 하지만 가르델의 대중적 성공은 디 살리, 카나로, 프레세도, 다리엔죠등 유명 연주자들이 그들의 밴드를 이끌고 해외 공연을 할 수 있게 하고 라디오의 보급 음반의 보급이 그들을 좀더 널리 알려지게 하였죠.
이어서 등장한 두명의 밴드 리더가 Troilo 와 Pugliese 입니다. 그들은 당대의 명장들, Biagi, Calo, De Angelis나 당시 (40년대)에도 왕성한 활동을 하던 20-30년대 거장들과 구별이 되기 시작하는데 작은 탱고 오케스트라를 탱고의 주 종목으로 전환시켰다는 것이죠. 그랜드 피아노, 현악파트와 관악파트, 4-6개의 반도네온... 이제 탱고는 작은 댄스홀을 넘어서는 소리가 되어버렸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두명은 자주 재즈의 듀크 엘링턴과 비교됩니다.
3. 새로운 탱고의 창조자 또는 탱고의 암살자.
이러한 오케스트라 시절에 트로일로 밴드에서 반도네온을 시작한 젊은 이가 바로 Piazzolla입니다. 밤에 밴드에서 연주하면서 당시 남미 최고의 클래식 작곡가 히나스트라의 제자로 작곡 공부에 열중하던 피아졸라는 곧 밴드의 편곡자로 활동하다가, 독립하여 자신의 오케스트라를 결성했는데, 이때까지만 해도 아직 고전적 탱고 연주자였고 탱고를 작곡하지는 않았습니다. 대신에 음렬주의 나 무조주의의 클래식 교향곡과 협주곡을 작곡했죠 (당시 음악은 피아졸라 스스로 내놓지 않았었는데, 최근에 몇몇 클래식 연주자들이 당시 피아졸라의 클래식 음악을 발굴해서 연주하기 시작했다는군요.)
탱고에 큰 전환점이 생긴 것은 프랑스에서 저명한 작곡 선생 나디아 불랑제에게 유학을 다녀온 피아졸라가 자신의 창작력을 탱고에 돌리면서부터입니다. 피아졸라가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오케스트라, 8중주, 5중주 등 다양한 형태로 실험을 하고 Adios Nonino, Balada para un loco 등의 문제작들을 내놓고 탱고는 큰 변화를 겪게 되죠.. 하지만 댄스 플로워에서의 변화는 조금 달랐습니다.
4. 댄서들의 등장
댄서들은 음악가들보다 불리합니다. 우선 영상매체가 발달한 것이 더 뒤이기도 하지만, 가정용 비디오가 보급된 시기는 정말 한참 뒤이기 때문에, 그들의 춤을 기록해서 사람들이 감상하기는 너무도 어려웠기 때문이죠.
하지만 탱고 음악가들이 인기를 끌기 시작한 20세기 초에 유명한 탱고 댄서들이 등장하기 시작하죠. 나중에는 이들은 밴드나 클럽과 결합해서 일종의 탱고 쇼를 결성하게 되지만 (현재와 같은) 초기에는 일종의 건달들이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클럽이나 아카데미, 나중에는 밀롱가에서 자신의 춤을 과시하고 일종의 추종자들을 거느린.. 그러나 더 잘하는 사람이 나타나면 그 클럽을 내주고 사라져야 하는..
이들은 보통 이름보다는 별명으로 알려져 있는데, El Negro, El Indio, El Morocho같은 별명을 여러 사람이 쓰는 경우가 많아 누군지 모르는 사람이 많죠. 초기 유명한 탱고 음악가 Filiberto의 아버지 "Mascarilla" Filiberti. 20세기 초반 댄스 무대를 휘어잡던 El Rengo Cotongo 등...
5. 카차파스와 카르멘시타
1910년대 20세기 중반을 휘어잡을 젊은이가 등장하는데 그 이름은 "El Cachafaz" Jose Bianquet. 1915년 그는 El Rengo Cotongo에 도전을 해서 댄스홀의 대결에서 승리를 거두고 탱고계의 맹주의 자리를 차지하고 오랜 세월 탱고의 왕으로 군림하게되죠.
그런데 그들의 파트너들은? 거의 완전히 무시되었고.. 별명들도 시원치 않아서 그대로 사라져 버리기 일쑤였다는군요. 처음으로 존경을 받기 시작한 여자 댄서는 (또 멋진 별명을 가지게 된) "Carmencita" Calderon 이었으며, 30년대 Cachafaz와 짝이되어 그 명성을 떨쳤답니다. 이들의 춤추는 모습은 영화에도 등장해서 기록에 남아있고, 1942년 "El Cachafaz"는 'Don Juan'을 Carmencita와 추고나서 그녀의 품안에서 숨을 거두었다는군요. 모든 댄서가 꿈꾸는 최고의 죽음을 한것이죠.
최근에 찍은 도큐멘터리 "Tango: The Obsession"에 보면 카르멘시타는 아직도 살아있고 90이 넘었는데 지금도 춤을 춘답니다.
30년대 이름을 떨친 댄서들은 El Vasco, Jose Mendez, "El Mocho" (Bernardo Undarz), "El Petroleo" (Carlos Estevez) 등등으로, 카차파즈의 뒤를 바스코가 바스코 뒤를 멘데스가 이어나갔다고 하더군요.
6. 코페스와 니에베스
그 무렵, 야망을 가진 한 젊은이가 있었는데, 그는 Juan Calros Copes였습니다. 밀롱가에서 탱고 갱들과 어울리며 다른 모든 사람들 처럼 (예를 들어 "Tete"나 다른 늙은 댄서들) 선배들에게 맞아가며 여자 역부터 시작해서 탱고를 배운 그는 새로운 형태의 탱고를 만들 생각을 했죠. 그가 그의 계획을 끌고 나갈 무렵 그의 파트너가 결혼을 하고 그를 떠났습니다. 코페스는 자신의 파트너의 동생 마리아에게 파트너가 되줄 것을 부탁했는데. 어린 나이에 소녀들의 탱고 갱 (Bara)에 속해서 바리오의 클럽에서 젊거나 늙었거나, 잘생겼던 못생겼던, 백인이던 흑인이던 가리지 않고 탱고를 즐기던 Maria Nieves는 그의 가장 이상적인 파트너가 되었습니다. 문제는 그녀가 너무 어려서 클럽에 갈때 항상 코페스가 뒷문으로 들여보내야 한다는 것이죠.
그렇게 둘은 당시 탱고의 최고수들과의 대결하여 하나씩 물리치며 명성을 쌓아가죠. 코페스는 50년대가 접어들고 게엄정권의 영향으로 댄스홀들이 문을 닫자, 새로운 형태 즉 무대에서 뮤지칼 형식의 탱고 쇼를 생각해냅니다. 콤파르디토의 남자끼리의 칼을 든 무술 탱고, 탱고의 역사를 재현해내는 매음굴의 창녀들의 탱고, 술취한 콤파드리토들의 취무, 귀족들의 살롱 탱고.. 또한 그들은 당시 파리에서 귀국한 피아졸라와 손을 잡고, 피아졸라의 음악에 안무한 탱고를 추는 새로운 형식의 무대 탱고도 만들었죠. 이것은 당시로 보면 충격적인 상황이지만 현재는 널리 사용되는 형태이죠.
이들이 70년대에 만든 쇼 "탕고 아르헨티노"는 뛰어난 댄서들과 음악가들로 브로드웨이와 동경등 전세계를 강타하고 탱고를 시대에 뒤떨어진 것으로 생각하던 아르헨티나의 젊은이들에게도 큰 영향을 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