眞城李氏 溫溪門中 老牧派의 由來(歷史)
▷ 늘목 ·노목(老牧)
늘목은 넓은 골짜기를 말하며, 안늘목과 바깥늘목으로 구별된다. 느릿재 밑에 있는 마을로 1700년경 진성이씨(眞城李氏) 온계(溫溪)공(公)의 후손(後孫)이 안동 도산 온혜에서 예천(醴泉)신당(新塘)(現 醴泉,虎鳴,新塘)으로 이거(移居)하였고, 예천(醴泉)신당(新塘)에서 띠실(現 聞慶,麻城,茅谷)로 이거(移居)하여 세거(世居)하다가 동쪽 10여리 떨어진 늘목(老牧)에 터(攄)를 잡고 일가를 이루었다고 전한다. 이곳에는 신라,고려시대에는 잉을항향소(仍乙項鄕所)가 있었다 한다. 사람들이 살기는 지금부터 1500여년 이전이라고 할 수 있다. 일설에는 어느날 길가에 쓰러진 노승(老僧)을 집으로 데려와 삼동(三冬)을 지나게 하였더니 고마움을 보답하는 뜻으로 양(陽)·음택(陰宅)을 잡아 주었다고 전(傳)한다.
이런 사연으로 늙은이를 먹여 살렸다고 하여 늘목(老牧)이라 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외어리(外於里) 유래
본래 조선시대 전기까지는 잉을항향소(仍乙項鄕所)가 있던 곳으로 문경현 신동면(身東面)의 지역이다. 잉을항(仍乙項), 어항(於項), 어을항(於乙項), 노목(老牧) 등으로 호칭되어 왔다. 그것은 늘목(넓은 골짜기)을 한자로 표시하려고 여러 가지로 표기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에 내어리(內於里 : 안늘목), 금곡리(金谷里), 외어리(外於里 : 밖같늘목)과 오동리(梧洞里)의 일부를 병합하여 외어리(外於里)라 하고 마성면에 편입되었다. 동쪽은 오천리, 북은 마원리, 서는 남호리에 접해있고 70~80년대 말까지 주변의 광산경기 호황으로 번창하던 마을이었으나 폐광사태로 인하여 한적한 마을이 되었다.
眞城李氏 溫溪門中 노목파(老牧派)는
(七世)仲始祖 온계(溫溪)(大憲公)할아버지의 五子인
(八世) 혜(寭)佐郞(甘泉派)派祖의 二子
(九世)미도(味道)護軍(新塘派)派祖의 二子
(十世) 구(岣)從仕郞(老牧派)派祖의 三子
(十一世)기한(紀漢)(1625~ ?) 護軍의 묘(墓)는 예천,신당,화봉,아래 유좌(醴泉,新塘,花峰 下酉坐)에 있고,
(十一世)기한(紀漢)의 一子
(十二世)재화(在華)(1652~1689)의 묘(墓)는 의성,다인,반정산 해좌(義城,多仁,半程山, 亥坐)에 있다,
(十二世)재화(在華)의 一子
(十三世)몽운(夢雲)(1677~1725)은예천,동무,가곡,임좌(醴泉,東武柯谷,壬坐)에 있다, 몽운(夢雲)의 오자(五子)
(十四世)헌국(憲國)의 손자(孫子)인
(十六世)익섭(翼燮)(1782~1837) 西記 1800년경 늘목 지금의 마성면 외어리로 이거(移居)하였으며, 이곳(늘목)에서 후손(後孫)들이 벼슬을 하고 가세(家世)가 번창(繁昌)하여 가문(家門)의 기틀(基攄)를 세우고,西記1800년 중반에 재화(在華)의 배위(配位) 거제반씨(巨濟 潘氏)의 묘(墓)를 의성 다인에서 문경시 마성면과 가은읍의 경계에 있는 新田峴壬坐(지금의섶밭재)에 이장(移葬)을 하였다 고손자(考孫子) 익섭(翼燮)의 묘(墓)도 이곳에 있다.
익섭(翼燮)의 一子인
(十七世)노은(老隱)도행(道行)(1819~1874)은 문집(文集)이 나고,묘(墓)는문경,호계,뒤산기슭 임좌(聞慶,虎溪,後麓 壬坐)에 있고,비문(碑文)은 성재(性齋)허전(許傳)이 찬(撰)을 하였다.
도행(道行)의 一子인
(十八世)석남(石南)명호(明浩)(1834~1893)진사(進士)하여,도사(都事)를 하고 문집(文集)이 났으며 묘(墓)는 상주,노음산,백전,정좌(尙州,露陰山,栢田,丁坐)에 있다.
명호(明浩)의 一子인
(十九世)목초(牧樵)건화(建和)(1851~1939)이다. 묘(墓)는 문경영산동록유좌(聞慶靈山東麓酉坐)에 있다. 건화(建和)의 一子
(二十世)병식(炳植)(1872~1938)은 음사(蔭仕)로 참봉(參奉)하고 묘(墓)는 문경,호계 선영아래 임좌(聞慶,虎溪,先塋下壬坐)에 있다.
명호(明浩)의 二子
(十九世)창강(滄江)정화(廷和)(1851~1939)는 문집(文集)이 나고 묘(墓)는 오천뒤산기슭 자좌(梧泉後麓子坐)에 있다.
정화(廷和)의 一子
(二十世)하정(荷汀)병주(炳柱)(1897~1955)는 계후(系后)이고,생부(生父)는 건화(建和)의 二子이며, 음사(蔭仕)로 주사(主事)하고, 묘(墓)는 오천동생정선비묘남록계좌(梧泉洞生庭先妣墓南麓癸坐)에 있다. 재화(在華)의 二子인
(十三世)몽규(夢奎)(1679~1746)가
西紀1700년 초(初)에 몽규(夢奎)의 一子인
(十四世)영국(榮國)(1720~1756)과동생(弟)들(夢井,夢心)조카(姪)(柱國,昌國,蓍國,元國,憲國)들과 예천(醴泉)신당(新塘)(現 醴泉,虎鳴,新塘)에서 띠실(現 聞慶,麻城,茅谷)로 이거(移居)를 하였다고 전(傳)한다,묘(墓)는 어항동막자좌(墓於項洞幕子坐)(안늘목동막골)에 있었는데 현재는 실전(失傳)되었다.
(十三世)몽규(夢奎) 이분이 노목파(老牧派)의 입향조(入鄕祖)다.
재화(在華)의 三子
(十三世)몽정(夢井)(1681~1756)은
묘(墓)가 대방동자좌(大方洞子坐)에 있고, 몽정(夢井)의 一子인
(十四世)승국(昇國)(1707~1742)과 승국(昇國)의 一子인
(十五世)사관(師寬)(1741~1776)도 같은산(山)에 묘(墓)가있고
사관(師寬)의一子인
(十六世)희섭(希燮)(1761~1810)은봉명산(鳳鳴山)에묘(墓)가있다.
재화(在華)의 四子
(十三世)몽심(夢心)(1689~1761)의 묘(墓)는 줄전동유좌(茁田洞酉坐)에 있고, 몽심(夢心)의 一子인
(十四世)언국(彦國)(1723~1797)의 묘(墓)도 선구묘동원(先舅墓同原)에 있는걸로 보아 문경 마성 늘목에 세거(世居) 하다가 西記 1800년 중반에 경기도 양주(楊州)로 세거지(世居地)를 옮긴것이 아닌가 생각 한다. 몽심(夢心)의 손자(孫子)
(十五世)사로(師魯)(1755~1821)의 묘(墓)가 양주,대각산,사골,갑좌(楊州,大角山,寺谷,甲坐)에 있는 것으로 보아 양주(楊州)에서 터(攄)를 잡고 세거(世居)한 것으로 보인다.
(十五世)사로(師魯)의 손자(孫子)인
(十七世)돈행(敦行)(1830~1891)은문과(文科)급제(及第)하였 고, 돈행(敦行)의 一子
(十八世)규호(揆浩)(1853~?)도
진사(進士)하고 遺稿(문집)를 냈고, 돈행(敦行)의 三子인
(十八世)강호(康浩)(1870~1944)는교관(敎官)하고,
상해임정독립운동북경공원장(上海臨政獨立運動北京公園長)과
대동협회장(大同協會長)을 역임(歷任)하였고,
묘(墓)는 충남,계룡산,국사봉,아래유좌(忠南,鷄龍山,國師峰,下酉 坐)에 있으며 비명(碑銘)은 소제암(笑啼巖)인데
중국강남성(中國江南省),강소성(江蘇省),산동성(山東省)에 있다.
강호(康浩)의 一子인
(十九世)일화(一和)(1904~ ?)는
중화민국재정부행정관,대한민국건국초대홍콩대리영사(中華民國財 政部行政官,大韓民國建國初代香港領事館代理領事,
재홍콩한국교민회초대회장,동회영구고문(在香港韓國僑民會初代會 長,同會永久顧問)을 역임(歷任)했다.
기한(紀漢) 호군(護軍)의 二子인
(十二世)재번(在蕃)(1657~1737)은 묘(墓)가 의성,다인,부곡(義城,多仁,釜谷)에 있고, 재번(在蕃)의 一子
(十三世) 적(摘)(1680~1742)도 선고묘동원(先考墓同原)에 있다.
적(摘)의 一子인
(十四世)관국(觀國)(1699~1758)의 묘(墓)는 예천,유천(醴泉,柳川)
에 있고, 관국(觀國)의 一子
(十五世)사중(師中)(1749~1827)도 선비묘동원(先妣墓同原)에있다.
1800년 중,후(中,後)반에 사중(師中)의 손자(孫子)인
(十七世)주행(朱行)(1817~ ?)이 문경,가은(聞慶,加恩)으로 이거(移居)하여 묘(墓)도 가은현,추곡,면등 경좌(加恩縣,秋谷,免嶝,庚坐)에 있다. 오대(五代)가 세거(世居)하였으나 일가(一家)들이 객지(客地)로 나가 살고 지금 현재(現在)는 묘(墓)와 위토(位土)만 남아 있다.
노목가문(老牧家門) 섶밭재에서
매년 음(陰)9월28일(九月二十八日)에 시제(侍祭)를 모신다.
노목가문(老牧家門)을 빛내신 분들 입니다.
1.이태행(李泰行)(1809~1879) 生員 遺集
2.이도행(李道行)(1819~1874) 文集
3.이돈행(李敦行)(1830~1891) 進士 文集
4.이명호(李明浩)(1834~1893) 文集 進士,都士
5.이원호(李元浩)(1843~1893) 持平
6.이규호(李揆浩)(1853~0000) 進士 遺集
7.이정화(李廷和)(1857~1917) 文集
8.이돈화(李敦和)(1869~1948) 通德郞
9.이운호(李雲浩)(1859~1905) 博士
10.이강호(李康浩)(1870~1944) 敎官,上海臨政獨立運動北京公園長
11.이창화(李昌和)(1883~1942) 通德郞
12.이일화(李一和)(1904~ ?) 中華民國財政部行政官,大韓民國建國 初代香港領事館代理領事
13.이병하(李炳夏)(1913~1998)高等考試合格,檢事,判事,辯護士,
國會議員,法務部長官
眞城李氏 溫溪門中 老牧派
二十一世 明基 謹書
첫댓글 저도 덕분에 귀한 노목파 유래를 알게 되었습니다 감사드립니다
형님!! 귀한 자료를찾아서. 알기쉽게 정리해 주시고. 정말 수고많으셨읍니다... 잊지않고 기억. 할수있도록 노력하겠읍니다..
나의 선조고 이시며, 위 5번에 휘를 원자호자분의 2남(차남)이신 경자화자를 쓰시는 분께서는 , 관립 한성중학교(현재의 경기고등학교 전신) 1회를 졸업하시고, 교관(종9품)으로서 갑오경장 이 후 주사교관( 종오품)을 끝으로 한일 합병 이후 고향인 늘목으로 은거를 하셨으며, 이분의 장남이신 나의 선고 께서는 75세 까지 시립고등학교 교장을 34년간을 역임 하셨으며, 대구광역시 초대 교육위원을 역임 하신 병자재자도 계시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