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사가 시작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많은 예술가들이 정부에 탄원서를 제출하였다. 탑에 대해 풍자적인 비판과 모욕도 쏟아졌다. 소설가 레옹 블루아는 에펠탑을 ‘진실로 비극적인 가로등’이라 칭했고, 시인 프랑수아 코페는 ‘불완전하고 혼란스러우며 일그러진 체육관 장비 같은 철기둥’이라 했고, 소설가 조리 카를 위스망스는 ‘세우다 만 공장 파이프, 암석이나 벽돌로 채워지길 기다리고 있는 뼈대, 깔때기 모양의 그릴’ 등으로 비꼬았고, 기 드 모파상은 ‘높고 깡마른 철사다리로 된 피라미드, 퀴클롭스의 거대한 기념물이 올려질 것처럼 세워진 기반 위에 공장 굴뚝처럼 서 있는 우스울 정도로 가는 뼈대’라고 비난했다. 그러나 공사가 끝나자 모파상을 비롯한 극소수를 빼고는 그 동안 반대의 목소리를 높였던 예술가들도 세기의 기념탑에 아낌없는 찬사를 보냈다.
1886년 5월 프랑스 정부는 1889년 만국박람회의 볼거리로 300미터 철탑 설계안을 공모했다. 16일밖에 안 되는 짧은 공모 기간이었지만, 놀랍게도 백 개가 넘는 지원서가 접수되었다. 6월 12일 심사위원장 에두아르 로크루아는 만장일치로 에펠탑을 선택했다고 발표했다. 에펠에게는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조직위원회가 지원할 수 있는 공사비는 150만 프랑밖에 안 되었던 것이다. 에펠이 계산한 예산은 650만 프랑이었다(실제로는 약 800만 프랑이 들었다). 이때 에펠의 모험 정신이 발휘되었다. 그는 공사비를 스스로 부담하기로 하고, 향후 20년 동안 입장료나 임대료 등 탑을 이용한 모든 수익금은 자신의 회사에서 받는 것으로 계약했다. 10월까지 7개월 동안 계속된 박람회는 놀라운 성공을 거두었다. 참가 인원은 총 3,200만 명이었고, 800만 프랑의 이익금을 거두었다. 에펠탑 자체만으로는 하루에 1만2천 명에 가까운 인원이 방문하였다. 수익금은 650만 프랑, 그것으로 에펠은 자신이 부담한 모든 비용을 되찾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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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선생님도 올라갔었는데 정말 감동 그 자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