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생초 편지의 저자 황대권(47)씨
내가 그를 안것은 한 10여년 되는듯하다
양심수 석방 서명일을 도와 주다
그의 이야기를 알게 되었다
황대권 그는 대학 시절 내내(서울대 농대 74학번) 반 독재 투쟁에 가담했으며 졸업 후에는 미국에 유학해 정치학을 공부했다.
그는 민주화를 위해 노력을 다했다
사회과학의 시대에 그는 자신의 눈과 세계에 대한 양심의 눈으로 세상을 보았다
그것은 너무나 어려운 시대에 그가 맞설수있는 유일한 양심의 길이었다
그의 믿음은 그를 언제나 어렵게 만든다
85년 6월, 구미유학생 간첩단 사건.
당시 유학파들 중에는 답답했던 국내 현실의 도피처로 유학을 택한 사람들이 많았고 황씨는 자연스럽게 그들과 어울렸다.
그러다 친구중 한 명이 귀국 길에 평양에 들렀다 온 것이 발각돼면서 황씨의 삶은 13년 2개월의 수형생활이라는 예기치 않은 상황으로 치닫는다.
그는 옛 안기부 지하실에 끌려 가 60여일 동안 온갖 고문을 받았다.
통닭구이, 물고문의 기억은 지금도 온 몸을 전율케 한다.
그는 그때 정신적 육체적 진공상태를 경험했다고 한다.
실험실의 개처럼 조건반사만 하는 식물인간이 되었다.
'북한 갔다 왔지' '너 간첩이지'하는 수사관의 물음에 무조건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양심과 믿음을 배반해야 했는가?
최근에 우리나라 사회면을 장식하는 송두율교수의 문제도
이런 면이 있다
남한에 대한 배신감에서 시작된 좌파운동의 희망은
북한이란 사회의 이상화 였다
객관적 모순보다는 상대적 사실의 문제에대한 긍정성은 꼭 부정적으로 단죄할수없는 절박한 믿음의 문제였다
그것은 그 시대의 나약함이었으며
그러한 광란의 시대에 선택은
늘 믿음을 배반하는 것이다
양심과 믿음은 철장과 징역이고
배신은 비겁한 삶의 길이다
무기징역 선고는 날벼락 같은 것이었다.
그는 이제까지 살아온 길과 믿어왔던 세상의 이치 모두를 의심할수 밖에 없었다
독방에 갇혀 그는 매일 밤낮을 울부 짖었다.
어느 날, 우연히 감방 벽에 도배된 '가톨릭 신문'이 눈에 들어왔다.
기사 중에는 '천주교 순교사(殉敎史)'라는 것이 있었는데 열 세살 어린 나이에 순교한 유대철 소년의 이야기가 특히 그의 가슴에 박혔다.
'하나님 안 믿는다' 한 마디만 하면 풀려 나는데 그 한 마디를 안 하고 모진 고문을 받다 숨진 순교자들.
'그래, 나도 어쩌면 분단 국가의 순교자 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고문에 내 양심을 팔았다.'
철저한 무신론자였던 그는 이렇게 가톨릭에 귀의한다.
그는 절망과 분노와 억울함을 달래기 위해 신(神)에게 매달렸다.
감옥의 규율을 어겨서라도 법정에 서서 억울함을 해명해야겠다고 생각했던 그는 어느날, 교도소에서 난동을 부렸다.
돌아온 것은 지옥같은 징벌방 생활.
온 몸이 포승으로 묶이는 짐승같은 생활을 하면서 그는 '주(主)'를 목놓아 찾았다.
왜 나를 버리시느냐고 원망도 하고 제발 모습을 보여 달라고 억지를 부렸다.
그러나…, 신은 대답이 없었다.
기적은 없었다
기적은 우리가 필요할때는 존재 하지 않는다
그냥 삶이 있을 뿐이다
대부분의 기적은 우연일뿐이다
기적의 가슴아픔은 늘 필연의 순간에 다가와 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신과 인간의 영원히 가까이 할수없는
일종에 숙명이듯..
두 달간의 징벌방 생활을 나오면서 그는 이렇게 결론지었다.
'신은 없다.' '신은 침묵이다.'
몸과 정신이 만신창이가 된 상황에서 그는 만성 기관지염을 고치기 위해 교도소 담장밑 풀을 뜯어 먹다가 효과를 보게 되면서 풀에 관심을 갖게 됐다.
오랜 독방생활의 지루함이 그를 엄습할 때 찾아 오는 파리, 거미, 쥐들과 친구가 되었다.
풀 한포기, 벌레 한 마리와의 대화는 그렇게 이뤄졌다.
그러면서 그의 생각이 차츰 변하기 시작했다.
김지하가 그러듯이 작은 것에 신을 느끼게 된것이다
위대한 신을 그리는 마음이 아닌
작은 신을 아는 마음으로 그는 돌아 간다
그동안 그는 인간만이 만물을 지배한다고 생각했다.
신도 인간을 위해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먼저 있고 남은 그 다음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이 아니었다.
이 땅에 살아 있는 모든 생명도 다 나와 같았다.
모두 다 이 우주와 자연의 일부였다.
성경 경전을 밀어 놓고 노자와 장자 경전에 몰두하기 시작한 것이 그즈음이었다.
지옥같았던 일상의 모든 것이 새롭게 보이기 시작했다.
남을 인정하고 받아 들이니 감옥 생활이 즐거워졌다.
억울함을 밝힐 것도 포기해 버리니 자연스럽게 바깥에서 구명운동이 펼쳐졌다.
모든 일이 술술 잘 풀려 나가는 것이었다.
감옥에서 100여종의 잡초를 직접 키우고 한평의 감방에서 궁상맞게 특미 야생초 요리와 차를 개발한 ‘잡초 인생’.
세계 감옥사에 새 이정표(?)를 마련하기까지 그는 교도소에서 풀이라는 풀은 죄다 뜯어먹어 ‘토끼’라 불린 괴상한 양심수였다.
노르웨이 국영방송(NIR)은 98년 출소한 뒤 전남 영광에서 생태공동체를 가꾸는 농사꾼이 된 ‘잡초박사’의 삶을 다큐멘터리를 제작, 노르웨이 전역에 방영했다.
'내가 야생초를 좋아하는 이유는 내 속의 교만을 다스리고자 함이다.
화려한 꽃을 피우는 야생초라도 가만히 들여다 보면 그렇게 소박할 수가 없다.
자연 속에는 생존을 위한 몸부림은 있을지언정 남을 우습게 보는 교만은 없다.
우리 인간만이 생존 경쟁을 넘어서 남을 무시하고 제 잘난 맛에 빠져 자연의 향기를 잃고 있다.
남과 나를 비교해 나만이 옳고 잘났다며 뻐기는 인간들은 크건 작건, 못 생겼건 잘 생겼건 타고 난 제 모습의 꽃만 피워내는 야생초로부터 배워야 할 것이 많다.'
'평화란 절대적 평온, 정지, 무사, 고요의 상태가 아니라 내부적으로 부단히 움직이고 사고하는 동적평형(動的平衡) 상태다.
사회가 평화롭다, 두 사람 사이가 평화롭다라고 할 적에는 내부적으로 부단히 교류가 이뤄지고 대화가 진행되어 신진대사가 잘 되고 있다는 뜻이 된다.
화단 구석에 수줍은 듯 얌전히 피어 있는 주름잎 꽃을 보면서 아무도 보아 주지 않는 저 작은 꽃을 피워 내기 위하여, 화단 구석의 내밀한 공간 속에 의젓하게 자리하기 위해 쉼없이 움직이고 있는 주름 잎의 내면을 그려본다.'
"자연의 흐름을 따라 사는 것이지요. 어떤 일이 이뤄질 때 인간의 의지가 기여하는 부분은 작고 미약합니다. 산다는 것은 결국 '흐름'을 읽는 것이고 그것은 나를 버릴 때 가능합니다. 청춘을 보낸 감옥에서 이걸 깨달았습니다. 얼마나 감사한 지 모릅니다."
'쓸모가 없고 제초제에 내성이 강한' 풀들을 뜻하는 '잡초'의 사전적 정의는 다분히 인간 중심적인 생각이 개입한 결과다. 때문에 잡초라는 이름보다 야초(野草), 야생초로 불러야 맞다는게 황씨의 생각이다.
황씨의 생각은 "파멸의 길로 향하고 있는 도시 문명.자본주의를 청산하고 수많은 지역 생태 공동체들의 연합으로 국가를 재편해야 한다"는 데까지 나간다.
"수많은 동.식물의 멸종이라는 생태 위기를 몰고 온 기업형 농업 시스템, 소비자들의 선택과 배제를 통해 인기 없는 농산물 생산을 중단하는 결과를 가져오는 '수퍼마켓 시스템'의 폐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일정 규모의 지역 생태 공동체들이 야생초를 절멸시키지 않고 야생초와 더불어 농사를 짓는 방법밖에 없다"는 것이다.
황씨는 지난해부터 생체공동체 연구모임(www.commune.or.kr)을 이끌며 지역 공동체들을 현실화하기 위한 방법들을 모색하고 있다.
그의 사이트에 많이 가입하여
좋은 뜻을 공유했으면 좋겠다
그리고 힘이 있는 권력자 분들,송두율교수의 선처를 바란다
물론 그의 이적행위는 반드시 단죄 받아야 마땅하다
나는 그의 탄원서에 서명할만큼
그의 진실성을 믿었다 그리고 배신감도 많이 느낀다
그러나 누가 감히 시대의 나약함을 함부로 단죄 할수있는가
그의 잘못을 면피 할수없다
그러나 그를 비판하는
몇몇 보수 신문들은 자신들의 친일행위나 독재정권시대의 행위를
시대의 나약함으로 이야기를 하면서 무수히 둘러 대면서
유독 빨갱이 사회학자한테는
정확하고 논리적인 잣대를 댄다...그렇다 예수님시대 부터 지금까지 사람들은 돌을 던지기 바쁘다.나는 보수신문의 선의를 일방적으로 왜곡된 눈으로 보지는 않는다 일정 부분 보수신문의 필요성에 대한 의견을 존중한다
그러니, 힘있고 돈있고 공부많이 한 분들이여
성숙한 시대의 관용을 베푸소서,
아님 힘없는 자들은 기적을 만들어야 하는데..우리는 꿈을 꿀 시간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