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Ⅲ>은 시편 90-150편을 다루면서 각 시편의 구조를 분석하고 구절과 연에 대해 문예적 분석을 한다. 이어 각 절을 주석하며, 주석에 근거하여 명상을 하는 방식으로 쓰여졌다. <시편Ⅲ>을 읽으면서 그리고 읽고나서, 배우는 신학도의 입장에서 정리하려고 한다. 본 책은 상당한 분량의 주석이므로 과제물을 함에 있어 <시편Ⅲ>의 저자가 분석하고 주석하고 명상한 내용 중에서 신학적인 공통분모를 중심으로 정리하려고 한다. 읽으면서 종합하고 정리해 본 주제는 “하나님 나라의 신학”, “창조신학”, “언약신학”, “시온신학” 등이다.
1. 하나님 나라의 신학
1.1. 왕이신 하나님을 찬양 <시편Ⅲ>에는 “하나님 나라” 사상이 자주 강조되고 있다. <93편>에서 시인은 “여호와께서 통치하시니”(1절)라면서 우주의 대왕이신 주님을 찬양한다. 주님의 왕권은 우주 창조에도 나타난다(1b-2절). 주님의 통치는 혼돈을 잠잠하게 한다(3-4절). 주님의 거룩한 임재와 능력이 휘몰아치는 폭우와 홍수의 위협을 극복하게 한다. 하나님은 거룩하신 왕으로서 성전에 거하시므로, 성도들은 거룩해야 한다.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능력을 묵상하는 사람은 하나님으로 인해 감격하고 새 힘을 얻게 된다. <96편>에서 시인은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을 노래한다. 다윗이 법궤를 예루살렘에 가져올 때 부른 노래로 되어 있는 96편은 주님의 왕권을 노래하는 찬양시다. 시인은 주님의 영광을 열방 중에 “새 노래”로 찬양하라고 명령하며(1-3절), 열방의 신들은 헛되나 주님의 영광은 성소에 충만하다(4-6절). <97편>은 96편, 99편과 함께 “주님의 왕권”을 노래한다: “여호와께서 통치하시니…기뻐할지어다”(97:1). 시인이 노래하는 왕은 온 세상 위에 높으신 주님(1-6절), 온 신들 위에 높으신 주님(7-9절), 의인들 중에 높으신 주님이시다. 시인은 하나님의 의로운 통치가 있기 때문에 성도들은 악을 미워하며 정직한 사람이 되라고 권면한다. 시온 백성들은 여호와의 다스리심을 보고 즐거워하게 될 것이다. <97편>에서 시인은 노래한다. 하나님의 통치는 시의 목적이며 하나님의 백성에게 주어진 소망이다. <100편>에서 시인은 여호와는 우리를 왕이시요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노래한다: “우리를 지으신 자시요 우리는 그의 것이니 그의 백성이요 그의 기르시는 양이로다”(100:3). <145편>에서도 시인은 “하나님의 나라”를 노래한다: “주의 나라는 영원한 나라이니 주의 통치는 대대에 이르리이다”(145:13). 모든 성도와 만물로 하여금 주님을 찬양하게 한다. 주님의 통치는 구원의 성실성과 선하심으로 가득찼다.
1.2. 하나님의 통치 성격 시인이 왕이신 하나님을 노래하는 이유는 “통치의 성격” 때문이다. <94편>에서 시인은 “이 세상의 재판장이신 주님”을 노래한다. 시인은 고통의 원인이 재판장의 불의에 있다는 것을 알고, 공의의 재판장이신 하나님께 나아가 하나님의 공의가 이 땅에 이루어지길 기도한다. <96편>에서 시인은 모든 족속이 주님을 경배해야 하는 그 이유는 만왕이 왕이신 하나님은 참된 재판장이시기 때문이라고 한다: “저가 의로 세계를 판단하시며 그의 진실하심으로 백성을 판단하시리로다”(13절). 공평은 공정함이다(98:9; 99:4). 재판장이신 왕께서 오시면 세상 신들의 헛됨이 드러난다. <98편>은 “여호와의 왕권”을 노래하는 시인데, 왕이신 주님을 찬양하며(4-6절), 온 세상의 재판장이신 주님에 대해 찬양한다(7-9절). 시인은 왕이신 여호와를 찬양하면서 온 세상의 재판장이신 주님을 찬양한다. 왕으로 오실 주님께서 재판의 공의를 회복하시는 것이다: “저가 의로 세계를 판단하시며 공평으로 그 백성을 판단하시리로다”(98:9) <99편>에서 시인이 노래하는 왕은 공의를 사랑하시는 데 능력을 쓰시며 공평을 견고하게 세우시고 야곱 중에서 공의 의를 행하신다(4절). 왕이신 하나님의 속성은 “거룩”에 있다. 따라서 거룩하신 왕께서 통치하시고 공의를 위해 능력을 쓰심으로, 백성들이 회개하고 주님의 품에 오도록 부르신다. <101편>에서 시인은 하나님은 왕국을 인자와 공의로 다스리신다고 고백한다(101:1). 시인은 왕이신 여호와의 “인자와 공의를 찬송”하겠다고 결심한다(101:1). 하늘 대왕이신 하나님의 이런 성품 때문에, 지상의 왕은 완전한 마음으로 행하며(2절), 가치없는 것을 눈 앞에 두지 않으며(3절), 악한 일을 멀리 하며(4절), 충성된 사람과 함께 거하겠다고(6절) 다짐한다. 101편은 이처럼 왕으로 오셔서 충성스럽게 일하시고(히 4:15; 5:17) 공의로 심판하신(행 17:31) 메시야를 보여주므로 메시야의 시편이 된다.
1.2. 왕이신 메시야를 기다리며 시편에서 노래하는 ‘왕’은 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다. 이스라엘은 항상 열국에 싸여 많은 전쟁을 치러야 했다. 다윗의 언약이 있었지만 역사적 현실 속에서 새 왕은 이 시련이 주는 불안과 두려움을 여호와의 권능을 기대하면서 이겨내야 했다. 이런 상황을 알고 있는 시인은 <110편>에서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은 메시야 왕”을 노래한다. <110편>의 일차적인 주인공은 다윗 왕이다. 다윗은 시편 2편에서처럼 여러 원수들에게 둘러 싸여 있다. 그는 열왕들을 파하고 나라를 세우는 사명을 맡았다. “여호와께서 시온에서부터 당신의 권능의 홀을 내어 보내시리니 당신은 원수 중에서 다시리소서”(110:2)에서 왕의 능력과 권능은 여호와께서 보내주시는 것임을 말해 주고 있다. <110편>은 다윗 왕가의 왕들에게서 이루어졌지만 그것은 “부분적”이다. 이 시의 장엄함으로 볼 때, 궁극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시라고 해야 한다. 히브리서 기자는 110:4을 인용하면서 예수님은 완전한 대제사장이요 영원한 왕이심을 노래했다. <118편>은 신약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성취된다.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교회라는 하나님 나라의 머릿돌이 되셨다(118:22)
2. 언약 신학
2.1. 언약의 하나님 <시편Ⅲ>에 나타난 시들을 보면, 여호와 하나님과 이스라엘이 맺은 언약 관계를 반복하여 고백한다. 이 언약 관계에 기초하여 신뢰하기도 하고 회개하기도 한다. <91편>은 언약신학적으로 접근하고 있는데, 시인은 여호와의 신실하심을 노래한다. 언약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대한 확신은 모든 위험을 이기는 신앙이 되어, 시편 91편은 신약에도 신뢰와 관련하여 인용된다(마 4:6; 눅 4:10,11). <105편>은 성실하게 자신의 약속을 지키시는 언약의 하나님에 대한 찬양이다. 시인은 아브라함에서 시작하여 가나안 땅에 정착할 때까지의 구원사를 노래한다. 시인은 시내산 언약이 아브라함 언약(족장과의 언약)과 이어지며 아브라함 언약의 성취로 본다. 언약의 말씀을 기억하시고 언약적 사랑을 베풀어주시는 하나님을 찬양한다: “그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이시라 그의 판단이 온 땅에 있도다 그는 그 언약 곧 천대에 명하신 말씀을 영원히 기억하셨으니”(105:7,8). <107편>에 나타난 언약의 하나님은 “인자하심”으로 이스라엘을 시온으로 귀환시키신다. 여호와께서 “동서남북 각 지방에서부터 보으셨도다”라면서 역사적인 관점에서 볼 때 그들을 시온으로 귀환시켜 주시고 오는 광야길에서 보호하신 여호와의 인자하심을 노래한다. 시인은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1절)로 시작하여 “지혜있는 자들은 이 일에 주의하고 여호와의 인자하심을 깨달으리로다”(43절)로 끝을 맺는다. 이스라엘을 회복시키신 하나님은 “역전의 주님”이시다: “궁핍한 자는 곤란에서 높이 드시고 그 가족을 양무리 같게 하신다.”(107:41) 그러므로 107편에서 시인이 노래한 “여호와의 인자하심”이란 이스라엘의 운명을 “역전시키신 여호와의 역사”에 근거한다. 언약의 하나님을 신뢰하는 이유는 “여호와의 신실하심”에 있다: <시편 91편>에서 시인은 “너를 붙들어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하리로다”고 고백한다. 시인은 여호와의 성전에서 보호받고자 하는 자의 믿음은 결코 헛되지 않을 것이라고 한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는 어떤 어려움이 와도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방어하는 무기로 시인을 보호하신다. 하나님의 능력과 심판이 악인에게는 심판으로, 의인에게는 구원으로 나타날 것이다. 하나님을 믿는 성도는 젊은 사자와 뱀도 물리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는다. 이처럼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대한 확신은 모든 위험을 이기는 신앙이 되어, 시편 91편은 신약에도 신뢰와 관련하여 인용된다(마 4:6; 눅 4:10,11).
2.2. “왕과 백성”의 언약관계 시편에 나타난 왕은 언약과 연결되어 있다. 왕은 언약 관계 속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이끈다. 왕이신 하나님은 이스라엘과의 언약을 잊지 않으시고 인도하신다. 왕으로 오신 예수님은 자기의 제자들과 새 언약 관계를 맺으시고 하나님 나라의 새 백성을 그의 피로 만드신다. <94편>에서 시인은 택하신 백성을 버리지 않으시는 왕 하나님을 노래한다: 시인은 “여호와께서는 그 백성을 버리지 아니하시며 그 기업을 떠나지 아니하시리로다”(94:14). <95편>는 ①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찬양(1-5절), ② 목자되신 하나님에 대한 경배 요청(6-7c절), ③ 광야시대에 대한 반추와 순종 요청(7d-11절)과 같이 3연으로 나눈다. 시인은 주님을 경배해야 하는 이유(2연)는 여호와께서는 “구원의 반석”이신 주님께서는 창조주이시시라고(1연) 노래한다. <101편>은 제왕시로 불린다. 브루거만은 왕과 신하 사이의 언약이 공의와 성실에 대한 서약이 시편의 밑바탕을 이룬다고 본다. 시인은 왕이신 여호와의 “인자와 공의를 찬송”하겠다고 결심한다(101:1). 왕은 언약 당사자요 특별한 은총을 받은 자로서, 많은 백성을 돌봐야 하고 좋은 신하를 키워야 한다. <102편>은 “병상에서 근심을 토하는 기도”인데, 시인은 개인 애가 부분에서 자신의 덧없는 인생과 영원한 하나님의 통치를 대비하고 있다. 본 시는 고통당하는 자를 위한 공식적인 기도문이었다. 고난 당하는 자들에게 그들이 언약 백성임을 상기시켜 주며, 하나님의 치료의 손길을 바라보게 하고 임하게 한다. 치료 받을 백성은 “창조함을 받을 백성”(사 43:15), 곧 언약백성인 이스라엘 백성을 가리킨다. 여호와께서는 왕으로서 그 높은 성소에서 하감하시며 하늘에서 땅을 감찰하신다(19절). 이는 갇힌 자의 탄식을 들으시며 죽이기로 정한 자를 해방하사(20절) 여호와의 이름을 시온에서 선포하게 하려하심이다(21절). 갇힌 자의 탄식을 들으시고 해방시켜 주시는 분은 신약의 예수 그리스도시다. <111편>에서 시인은 언약갱신과 관련하여 주님께서 가나안 땅을 주신 약속을 언급한다: “저가 자기 백성에게 열방을 기업으로 주사 그 행사의 능을 저희에게 보이셨도다”(111:6; 출 34:10-11). 시인은 “여호와께서 그 백성에게 구속을 베푸시며 그 언약을 영원히 세우셨으니 그 이름이 거룩하고 지존하시다”(111:9)라고 하면서 주님과 언약을 맺은 것이 확고하고 얼마나 신뢰할만 것인가를 노래한다. 구원의 역사와 예배가 연결되고 있다. <117편>에서 시인은 바울 신학에서 말하는 것처럼 언약 백성의 보편성 개념을 던져 준다. 시인은 모든 나라와 백성들에게 주님을 찬양하라고 한다: “너희 모든 나라들아 여호와를 찬양하며…우리에게 향하신 여호와의 인자하심이 크고 진실하심이 영원함이로다 할렐루야”(117:1,2). 117편에서는 여호와의 인자하심을 이스라엘에만 국한시키지 않는다. 그래서 바울은 시편 117편을 로마서 15:11에서 인용하면서 이방인을 긍휼히 여기시고 그들에게 인자하심을 보여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증거한다. 여호와의 인자하심은 이스라엘의 배타적 선민의식을 넘어서 주님의 인자하심으로 “모든 나라”(이방인)가 언약 백성 안에 들어올 수 있음을 보여준다.
2.3. “목자와 양”: <95편>에서 시인은 이스라엘이 찬양해야 하는 이유는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목자”시기 때문이라고 한다. 시인은 “창조주 하나님”을 노래하면서 이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안식의 땅으로 인도하는 목자라고 고백한다. 이스라엘은 “그의 기르시는 백성이며 그 손의 양”이요(7절) 여호와는 이스라엘의 구속주, 목자가 되신다. <100편>에는 “목자와 양”의 관계로 언약신학을 전개한다. “그의 기르시는 양이다”에서 언약관계를 볼 수 있으며, 목자와 양의 메타포가 나타난다. 이스라엘을 양으로 이끄시는 여호와는 선하시고 인자하시며 그 성실하심이 영원하다(5절).
3. 창조 신학
90-150편의 시편에서 시인은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노래한다. <95편>에서 시인은 창조신학을 언급하면서 종말의 안식을 함께 다룬다. 그는 새 창조를 노래한다. “안식일의 찬송시”인 <92편>에서 시인은 안식일에 여호와께 감사하고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하고 주님의 성실하심을 전하는 예배자의 기쁨을 노래한다. 안식일은 첫 창조 때 하나님께서 기뻐하신 날을 모방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 악인은 하나님을 기뻐하지 못하고 노래하지 못하지만 흥왕해 보인다. 그러나 그들은 영원하신 여호와를 알지 못하기에 어리석다. 시인은 눌리기도 하지만 결국에는 버팔로처럼 힘을 주셔서 구원을 베푸신다. 이처럼 안식일은 “창조”와 “구원”을 노래하는 날이다. 주님께서 통치하시는 것을 묵상할수록 찬송과 용기는 더욱 강렬해진다. <105편>에서 출애굽을 이루신 하나님, 광야에서 은총으로 이끄신 하나님을 노래하면서, 시인은 창세기 1장을 염두하여 노래한다. 그래서 이 시와 창세기 1장은 구조에 있어서 유사성을 띈다.
4. 시온신학
시편의 시인은 “예루살렘”을 향해 노래하며 “시온”으로의 회복을 꿈꾸며, 회복된 것을 감사하며 노래한다. 시온을 향한 노래는 시온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향하고 있다. <99편>의 하나님은 “시온의 왕”이시다. 시온의 왕이신 하나님께서 통치하실 것이므로 만백성을 떨어야 한다. 시인이 노래하는 왕은 공의를 사랑하시는 데 능력을 쓰시며 공평을 견고하게 세우시고 야곱 중에서 공의 의를 행하신다(4절). 왕이신 하나님의 속성은 “거룩”에 있다. 따라서 거룩하신 왕께서 통치하시고 공의를 위해 능력을 쓰심으로, 백성들이 회개하고 주님의 품에 오도록 부르신다. <122편>에서는 언약과 시온이 연결되어 나온다. 시온에서는 공의가 집행되는 곳이다. 왕은 하나님의 대리자며 다윗 집을 통해서 공의가 실행된다: “거기 판단의 보좌를 두셨으니 곧 다윗 집의 보좌로다”(122:5). 예루살렘은 거룩한 도성이며 왕의 도성이다. 예루살렘은 신약에서 교회로 넘어가 교회는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이는 새 언약 안에 있게 된다. <125편>에서 “시인은 시온산이 요동치 않는 것”처럼 여호와를 의뢰하는 자의 흔들리지 않음을 노래한다. 시온에 모인 하나님의 백성들은 힘차고 안정된 시온의 영상 속에서 주님을 의지하는 자의 변함없는 모습을 마음에 다진다. <132편>에서 시인은 “여호와께서 시온을 택하시고 자기 거처를 삼고자 하여…내가 거기서 다윗에게 뿔이 나게 할 것이라”(132:13,17)라면서 다윗의 선택과 시온의 선택은 같은 뿌리를 갖고 있다고 본다. 그는 이 선택의 배후에는 하나님의 강한 사랑과 염원이 있으므로 승리를 확신한다. 시편 132편에 나오는 다윗은 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37편>에서 시인은 바벨론 여러 강가에 앉아 버드나무에 수금을 걸고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다. 시인은 영원한 하나님의 처소인 시온을 기억하며 충성을 다짐한다. <147편>에서 시인은 “시온아 네 하나님을 찬양할지어다”(147:12)라고 명령한다. 시온의 하나님은 창조주이시면서 상처를 싸매 주시는 자비의 주님이시다: “상심한 자를 고치시며 저희 상처를 싸매시는도다”(147:2). 시인은 하나님의 구원과 창조활동을 연결시킨다.
5. 찬양과 감사의 특징
찬양과 감사에는 그 근거와 이유가 있다. <106편>은 찬양인데 찬양이 죄와 심판과 함께 나타나는 것이 독특하다. 이전에는 출애굽과 광야생활과 약속의 땅을 정복하는 주제를 놓고 일방적으로 찬양했다. 그러나 이제 이스라엘은 역사를 돌아보면서 탐욕과 불순종과 반역으로 점철된 자아상을 인정한다. 그들은 출애굽의 영광을 맛보았으나 새 삶으로의 출발이 아니라 죄악을 향한 출발처럼 살았다. 시내산 언약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범죄한 조상들의 모습뿐만 아니라 지금 자신들의 모습에서도 죄를 본다. 그들의 범죄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인자하심이 이스라엘의 범죄를 넘어 은총을 베풀어 주시기 때문에 이스라엘은 주님을 찬양한다. 우리는 106편의 시를 통해, 찬양은 자신의 모습을 제대로 인식할 때 깊은 곳에서부터 터져 나오는 것임을 알 수 있다. 특히 106편은 언약갱신 축제 때 부른 것으로 보고 있는데, 여기서 “언약”이란 이스라엘의 범죄에도 불구하고 언약관계를 놓지 않으시는 주님의 언약적 사랑이 나타난다. 바울의 표현대로 하자면,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넘치는” 상태를 시인은 찬양하고 있다. <113편>에서는 “역전”이 감사의 이유로 제시된다. 이 “역전”의 사상은 구약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과 연결되는 주제이기도 하다: “스스로 낮추사 천지를 살피시고 가난한 자를 진토에서 일으키시며 궁핍한 자를 거름 무더기에서 드셔서…또 잉태하지 못하던 여자로 집에 거하게 하사 자녀의 즐거운 어미가 되게 하시는도다”(113:6,7,9). 113편은 “한나의 노래”, “마리아의 송가”(눅 1:46-55)에 나타난다.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속에 나타난 하나님은 세상의 가난하고 궁핍한 자를 돌보셨음을 확신하게 해 주며 성육신으로 역전을 보여주셨다. <126편>에서도 시인은 씨 뿌리는 자의 모티프로 포로에서 돌이키신 여호와의 기적을 돌아보면서 어려운 순간에서 역전을 이루어 주실 하나님을 노래한다. <130편>은 시편 32편처럼 초대교회로부터 참회시로 꼽힌다. 시인은 자기의 죄와 나아가 이스라엘 민족의 죄로 인해 죽음 같은 고통 속에서 참회한다. 절망감을 하나님 앞에서 표현하는 것은 정상적이다. 그는 고통 가운데서 있지만 여호와께서 참회한 자와 참회한 이스라엘을 구속하실 것을 믿으며 간구하는 노래를 한다.
나오며: “시편의 시인과 오늘의 예배자”
김정우 교수는 <시편Ⅲ>에서 “마음이 정직한 자”가 시편이 추구하는 인간상이요(7:10; 11:2; 32:11; 36:10; 64:10; 94:15) 이 인간상은 “하나님 앞에서 시편이 추구하는 인간상과 신약의 인간상”이 연결된다고 본다. 하나님의 공의로운 통치를 믿기에 인간은 정직해야 하는 것이다. <90편>에서 나타난 인간은 짧고 티끌 같은 인생이다. 반면 하나님의 시간은 ‘영원’이다. 인생이 긴 것처럼 보여도 주님의 시간에 비하면 한 순간이다. 아침에 핀 꽃이 저녁에 잘려나가는 것처럼 말이다. 인간은 자신의 실존을 제대로 인식하고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게 꿇어 주님의 은총을 노래해야 한다. 김정우 교수님은 “시편에 나타난 의인”이란 예배자로서, “하나님과 바른 언약관계에 있는 자”라고 말한다(62쪽). 시편에는 언약과 예배와의 관계를 다루고 있는데, 예배자들은 자신이 누구인지 알아야 하며 하나님이 누구인지 알아야 한다. 언약 관계를 깨달아야 하나님이 누구신지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 수 있고 노래할 수 있다. 그런데, 요즘 한국교회가 예배하는 모습에서 자신의 참회없이 경배와 찬양을 하는 경향이 발견된다. 나는 청년-대학부를 10년 동안 맡아오면서 “죄인으로서” 주님 앞에서 서지 않고 노래하는 이 시대의 모습, 때로는 나의 모습을 보게 된다. <시편Ⅲ>에서 분석한 시인은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다. 눈물로 자신의 죄를 깨닫고 참회한다. 자신이 누구인지 제대로 알고 예배하는 사람을 주님께서 이 시대에도 찾으신다. 노래의 이유와 근거를 묵상하는 연습을 할 때, 자신의 실존을 제대로 인식한 예배자요 죄인으로 주님 앞에 나가 감사하는 예배자가 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