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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연합회 서장Ⅱ 특강 4강-2 (2013. 11. 11.)
答 許司理 壽源 (二)
答 劉寶學 彦修
선불교가 한국불교의 대세를 이루고 있으면서 우리가 이러한 이치를 잘 모르고 하는 경우가 많지요. 금강경도 뒤에 곧 나오지만 應無所主而生其心(응무소주이생기심). 우리 마음은 본래 머문 바가 없습니다. 머물 수가 없습니다. 한 시도 그냥 안 있잖아요. 한 시도 그냥 안 있어지지가 않는 것이 마음의 실상입니다. 마음의 실상이 그렇게 되어있습니다.
無有實體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를 들어서 이 찻잔 같이 실체가 있으면 딱 놓으면 제 자리에 있습니다. 주변에 얼씬도 못하게 이렇게 지키고 있으면 한 곳에 있지만, 마음은 이런 것이 아닙니다. 찻잔과 같이 이렇게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딱 “이 자리에 있으라.” 하면 있어 지는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擬收攝(의수섭)이나, 수섭하려고 하나,
向甚處安着(향삼처안착)고? 어느 곳을 향해서 안착하겠는가?
내가 여기에 마음을 찻잔 놓듯이 이 자리에 딱~ 놔두고 싶지만, 실체가 없는 것을 가지고 어느 곳에다 이렇게 안착할 수 있겠는가? 찻잔은 실체가 있으니까 여기에 놓으면 놓아져요. 그런데 ‘마음은 실체가 없는데, 그 실체 없는 것을 어찌 이렇게 찻잔처럼 놓아질 수 있겠는가?’ 이런 말입니다.
이런 법문에서도 우리가 마음의 실체에 대한 그런 것을 우리 정확하게 알아둘 필요가 있습니다.
旣無安着處則(기무안착처즉), 이미 간착할 곳이 없다면
無時無節(무시무절)하며, 시절이 없으며, 때도 계절도 없으며,
無古無今(무고무금)하며, 옛도 없고 지금도 없으며,
無凡無聖(무범무성)하며, 범부도 없고 성인도 없으며,
無得無失(무득무실)하며, 얻음도 없고 잃어버림도 없으며,
無靜無亂(무정무난)하며, 고요함도 없고 어지러움도 없으며,
無生無死(무생무사)하며, 생도 없고 사도 없으며,
참~ 사실 실체가 그렇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겉만 보고 겉만 쫓아가지요.
외형에 속아서 외형을 쫓아가다 보니까 이렇게 좋은 경지를, 이렇게 좋은 어떤 실상을 우리가가지고 있습니다.
無有實體라. 마음은 실체가 없다. 그런데 우리는 또 마음뿐이거든요.
우리들 자신은 마음 그 자체입니다. 그런데 마음 그 자체는 뭡니까?
無時無節하며ㆍ無古無今하며ㆍ無凡無聖하며ㆍ無得無失하며ㆍ
無靜無亂하며ㆍ無生無死해요. 이것이 우리의 본 모습인데도 불구하고, 그것을 망각 한 채 시절이 있고ㆍ고금이 있고ㆍ범부니 성인이니 하는 것이 있어서 그것을 가지고 얼마나 따지고, 큰스님 작은 스님가지고 따지고, 구참 선달 가지고 따지고, 득실을 가지고 따지고, 고요하느니 어지럽느니 하는 것을 따지고, 생이니 사니 가지고 따지고 그렇습니다.
亦無湛然之名(역무담연지명)하며,
또 엄격하게 말하자면 내가 담연이라는 도호를 줬지만, 그 자리에는 담연이라고 하는 이름도 없어요. 사실은 부득이해서 우리가 그냥 형식적으로 한번 해 본겁니다. 내가 담연이라는 호를 주고 거기다 앞에서 장황하게 설명하고 하는 것도 이것이 다 쓸데없는 짓입니다. 거기 해당되지도 않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짐짓 한번 해보는 것이지요. 그것마저도 없으면 또 너무 심심하잖아요.
亦無湛然之體(역무담연지체)하며, 담연한 체도 없어요.
亦無湛然之用(역무담연지용)하며, 담연한 작용도 없어요.
亦無恁麽說湛然者(역무임마설담연자)하며,
또한 이렇게 담연에 대한 이치를 말하는 나도 없어요. 마음자리에는 대혜도 없다고요. 또 亦無恁麽受湛然說者(역무임마수담연설자)하리니,
또한 이렇게 담연을 설명하는 것을 받아들이는 사람 = 受 = 받아들이는 당신도 그 자리에는 없어요. 너니ㆍ나니 하는 것이 그 자리에는 있을 수 없습니다. 此心은 無有實體니까요. 엄격하게 우리가 따져보면 주는 나도 없고, 받는 당신도 없는 자리입니다. 참~~ 좋은 법문입니다.
若如是見得徹去(약여시견득철거)하면,
만약 이와 같이만 보아서 사무친다면, 이와 같이 이해한다면, 우리마음 우리들의 실상에 대해서 이렇게 이해한다면,
徑山(경산)도
亦不虛作此號(역불허작차호)요.
또한 헛되게 이 호를, 도호를 짓는 것이 아니고,
左右도 亦不虛受此號(역불허수차호)하리니,
그대도 또한 이 도호를 헛되게 받는 것이 아닐 것이다. 야~~ 제대로 주고, 제대로 받는 것이지요. 이렇게 알아야 제대로 주고, 제대로 받는 것이다. 如何如何(여하여하)오?
어떻게 생각하세요? 어떻다고 여기는가? 어떻다고 여기는가?
이 한편의 편지가 참~~ 명문이네요. 이것이 정말 아주 기가 막힌 그런 편지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이 분은 상당히 상당한 불교수준에 이른 분이고, 그러다 보니 짐짓 도호를 내렸고, 그 도호를 가지고 한편의 아주 일장문장을 멋지게 이렇게 참 좋은 법문으로써 아주 좋은 한편의 편지를 이렇게 썼습니다. 다른 군더더기 전혀 없네요. 그러면서 또 묵조선을 살짝 한 마디 비난도 하고요. “대혜스님은 묵조선배척하기 위해서 태어나신 분이다.” 이렇게 말해도 좋습니다. 또 서장의 대지를 斥邪解現正見(척사해현정견). 그랬으니까요. 삿된 견해라고 하는 것은 묵조 사선을 두고 이야기하는 것이고요. 여기는 어쨌든 그저 간화선, 화두를 들고 공부하는 것을 주창하는 그런 취지로 만들어진 책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간화선의 시조는 대혜스님이다.” 그렇게 말합니다.
그 전에도 물론 화두 선을 주장하고 또 권하기도 하고 하는 그런 예문들을 찾을 수는 있습니다. 많이 찾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대혜스님 같이 이렇게 강력하게 아주 드러내놓고, 아주 만 천하에 드러내놓고 이렇게 선전하고 또 간화선이 아닌 것은 배척하고, 강력하게 배척하고 하는 이런 일은 대혜스님이 처음이었습니다. 그래서 대혜스님을 “간화선의 시조다.” 그렇게 보고, “간화선은 대혜스님으로부터 출발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이 아주 정설로 되어있습니다. 우리가 여러분 포교 일선에 계시면서, 이런 것들도 근거에 의지해서 이러한 우리교과서인 서장을 근거로 해서 가르치면 그것이 아주 설득력이 있지요. 또 한편씩 이렇게 복사해서 주기도 하고요. 그 다음에
答 劉寶學 彦修
卽日烝溽호니 不審커라 燕處悠然하야 放曠自如하야
無諸魔撓否아 日用四威儀內에 與狗子無佛性話로 一如否아
於動靜二邊에 能不分別否아 夢與覺로 合否아 理與事로 會否아
心與境으로 皆如否아 老龐이 云 心如하면 境亦如하야
無實亦無虛라하니 有亦不管하며 無亦不拘하면 不是聖賢이라
了事凡夫니라 若眞箇作得箇了事凡夫인댄 釋迦達磨는 是甚麽오
泥團土塊니라 三乘十二分敎는 是甚麽오 熱盌鳴聲이니라
公이 旣於此箇門中에 自信不疑하니 不是少事라
要須生處란 放敎熟하고 熟處란 放敎生하야사 始與此事로 少分相應耳이니라
劉寶學 彦修(유보학 언수)라고 하는 사람에게 답하는 내용입니다.
여기는 이 사람하고 그 다음에 뒤에 나오는 “언충” 이라고 하는 동생하고 얽히고설킨 그런 이야기들이 상당히 복잡하게 있습니다.
卽日烝溽(즉일증욕)호니,
‘요즘 아주 찌는 듯이 무더우니,’ 그런 말입니다.
不審(불심)커라. 어떻습니까?
燕處悠然(연처유연)하야,
편안한 곳에서 유유자적해서 不審. 어떻습니까? 이 뜻입니다.
그전에 강원에서 우리가 공부할 때는 不審커라.= 알지 못 커라.
“알지 못 커라.” 라고 그렇게 늘 배워왔는데, 무슨 소리인지 제가 몰랐습니다. 그래 제가 읽고ㆍ읽고 또 읽다 보니까 아~~ ‘어떻습니까?’ 를
不審커라. 라고 ‘이렇게 한자로 쓰는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어떻습니까?’ 고요한 곳에서 유유자적하십니까? 날씨가 이렇게 더운데 어떻게 지내세요? 그런 말입니다.
放曠自如(방광자여)하야,
放曠 = 아주 어디 거칠 것 없이 자유자재해서, 그 말입니다.
無諸魔撓否(무제마요부)아? 모든 마로부터 흔들림이 없습니까? 또
日用四威儀內(일용사위의내)에
與狗子無佛性話(여구자무불성화)로, 구자무불성화두로써
一如否(일여부)아? 한결 같습니까?
그러니, 구자무불성화두는, 無자 화두는 잘되십니까? 또
於動靜二邊(어동정이변)에 能不分別否(능불분별부)아?
움직일 때나 무슨 일이 있으면 부득이 움직여야지요. 그리고 또 고요히 앉아서 공부할 경우도 있고요. 그래서 動靜二邊에 능히 분별하지 않습니까?
“거기에 나눠지지 않습니까?” 이럴 땐 그렇게 봐야 겠지요? 고요하다고 참선이 잘되고, 움직이고ㆍ사무보고ㆍ일 하고ㆍ손님맞이하고 한다고 화두가 안 되고, 그렇게 되어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나눠지지 않습니까?”
夢與覺(몽여교)로 合否(합부)아?
꿈꿀 때나 깨어있을 때나 합 합니까? 한결 같으냐? 이 말입니다.
공부하는 것으로 통일 되느냐?
理與事(이여사)로 會否(회부)아?
이적인 면이나 사적인 면이나, 이치나 아니면 사상. 밖으로 현실이나,
이치나 현실이나 그것이 會否아? 회합. 모일 會자잖아요. 같아지느냐? 이 말입니다. 心與境(심여경)으로 皆如否(개여부)아?
마음과 대상경계가 다 같습니까? 한결 같습니까?
아~ 참, 이 분은 깨달음이 워낙 투철하고 그야말로 내외가 명철하고요.
거기다가 유교ㆍ불교ㆍ도교. 당시 지식인으로서는 확실하게 모든 것을 다 갖춘 그런 분이기 때문에 편지도 참, 조금 유사한 그런 말들도 있지만 편지숫자가 워낙 많으니까, 그렇지만 그 많은 편지숫자치고는 사실은 아주 다양하게 이야기가 됐다. 그렇게 볼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열편의 편지를 쓴다. 그러면 아마 거의 판에 박은 듯이 비슷하게 쓸 겁니다.
그래가지고 옛날에 그 참, 우스운 이야기로, 우리 그 전에 봉암사에 있을 때, 거기 주지 살던, 지금 외국 가있는 스님인데요. 그 스님은 편지로 시주를 받았어요. 편지쓰기를 좋아해서 편지를 하루에도 수 10통씩 써서 보내고 받고 하는 겁니다. 그러다가 착각해서 편지를 잘못 집어넣어서 하하하하하하하 그러니까 A라는 사람에게 가야할 편지가 B라는 사람에게 간 겁니다. 그래서 재미있는 일도 생기고하는 그런 예도 있었습니다만,
아무튼 그와 같이 정신이 없는 겁니다. 하루에도 10통 이상 편지를 쓰게 되면요. 그런데 그런 것을 생각하면 여기에 간추려진 대혜스님의 65통인가 편지. 이것뿐이겠습니까? 무수한 편지가 있었지요. 그런데 거기서 다 추려내고, 아주 모범적인 편지만 뽑아서 이렇게 서장이라고 하는 책으로 묶은 것 아닙니까? 그러다 보니까 참~ 그 다양합니다.
한결같이 斥邪解現正見입니다. 주장하는 바는 그것뿐입니다.
그것뿐임에도 불구하고 사실은 이렇게 다양한 내용으로써 편지를 썼다고 하는 것은 대혜스님의 지식이 그만치 아주 남다르게 뛰어나다고 하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老龐(노방)이 云, 방거사가 말하는 것입니다.
心如(심여)하면 境亦如(경역여)하야,
마음이 여여하면 경계도 또한 여여해서
無實亦無虛(무실역무허)라하니,
실도 없고 또한 헛된 것도 없을 것이다. 라고 했으니,
有亦不管(유역불관)하며, 있음도 또한 관계치 아니하고,
無亦不拘(무역불구)하면, 없음도 또한 구속되지 아니하며,
있다ㆍ없다에 끄달리지 않는다. 하는 것입니다. 있기도 하고ㆍ없기도 하는 것이니까요. 그래서 중도라고 하는 말이 필요한 것 아닙니까? 中道.
있음도 수용하고ㆍ없음도 수용해요. “있다.” 해도 있는 면이 있지요.
“없다.” 해도 역시 없는 면이 있지요. 그러니까 모든 존재는 있는 면도 있고 없는 면도 있으니까요. 그러니까 이런 말이 나오는 것입니다.
有亦不管하며 無亦不拘하면
不是聖賢(불시성현)이라 了事凡夫(요사범부)니라.
그 정도 되면 이것은 성현이라고 굳이 이름 붙일 것이 아니고 了事凡夫라.
일 마친 범부다. 그 사람은 일 다 끝났습니다. 공부 다 끝난 범부다. 말입니다. 참 좋은 표현이지요?
若眞箇作得箇了事凡夫(약진개작득개요사범부)인댄 → 범분댄,
만약 참으로 了事凡夫를 짓고자 할진댄, 了事凡夫 = 일 마친 범부가 되려고 한다면, 된다면 釋迦達磨(석가달마)는 是甚麽(시삼마)오?
그 쯤 되면, 일 마친 사람이라면 석가달마는 뭐겠습니까? 是甚麽오?
泥團土塊(니단토괴)니라. 진흙덩어리ㆍ흙덩어리니라. 석가상이나 달마상이나 전부 흙덩어리로 빚어놨으니까요. 주로 흙덩어리로 빚었으니까요.
특히 중국은요? 불상이 큽니다. 불상이 커서 전부 흙으로 하고, 다른 돌로는 하기가 어렵습니다. 대개 흙으로, 옛날 큰 불상은 대개 흙으로 했습니다. “대장정” 이라고 하는 책이 있었지요? 모택동하고 등소평이 국민당 장개석한테 한때 쫓겨서 북쪽으로ㆍ북쪽으로 끊임없이 도망다니는 세월이 있었잖아요. 그러다가 나중에 그 사람들이 공산당이 득세해서 장개석이 대만으로 도망가고 중국천하를 공산당이 통일하게 되는 그런 과정을 전부 글로 쓴 “대장정”이라고 하는 책이 있습니다. 그것을 제가 읽다보니까 어느 페이지에 가면, 이 사람들이 도망가고 도망가다가 먹을 것이 없어서, 양식이 없어가지고는 그 사람들이 어떻게 알았는지 불상 속에다 오곡을 집어넣는다. 하는 사실을 어떻게 아는 사람이 있었어요. 간혹 불자가 있었는지 유식한 사람이 있었는지...
그래서 큰 불상을 헐어서 그 안에 있는 오곡을 꺼내서 식사를 해서 그래서 연명하면서 북진, 북쪽으로ㆍ북쪽으로 도망을 갔었다 하는 그런 내용이 어느 페이지에 있습니다. 야~~ 참, 부처님복장에다가, 우리가 복장을 할 때 다음에 또 부처님 조성하라고 금ㆍ은ㆍ보화 같은 것 넣어놓잖아요.
그런데 그것 때문에 도난사고도 많이 일어나고 하긴 하는데요. 중국에, 그 속에다가 오곡을 가득히 채워놓고 했는데 그 사람들을 살렸어요.
‘그런 사실이 있구나.’ 하고, 제가 그 대목을 읽다가 책을 덮고는 불상을 조성하면서 그 속에다가...
옛날에는 농경사회니까 그것은 씨앗으로, 만약에 문제가 있을 때, 세상이 어지럽고 문제가 있을 때, 불상 속에 있는 오곡을 꺼내서 밭에다 뿌려서 그것으로써 다시, 말하자면 곡식을 심고해서 그것이 사람들을 살리기 위한 그런 방법이었습니다. 뭐 불상 속에 오곡이 중요하다고 그렇게 넣었겠습니까? 사실 사람 살리려고 오곡씨앗을 거기다 넣은 겁니다. 제일 좋은 오곡씨앗을 복장에다 넣었던 것인데, 실지로 중공군이 그 오곡을 꺼내서 먹고 연명해간 그런 사실이 있었습니다.
釋迦達磨는 是甚麽오? 泥團土塊니라.
이런 구절을 보니까 진흙덩어리다. 그럼
三乘十二分敎(삼승십이분교)는 是甚麽오? 삼승십이분교 뭐냐?
熱盌鳴聲(열완명성)이니라. 그랬습니다.
熱盌鳴聲. 이것이 어떤 경우인지 사실은 믿음이 확실하게 가지진 않는데요. 뜨거운 사발에다 물을 부으면 “지지직” 하고 소리가 나잖아요.
그런 소리에 불과하다. 삼승12분교ㆍ8만 대장경이 그런 소리에 불과하다. 라고 했는데요. 마음에 썩 와 닿진 않는데 아무튼 그렇게 전해져 내려오고 있습니다.
76쪽 주해 16번 보면
熱盌鳴聲은 言其無實也(언기무실야). 그 실다움이 없음을 말한 것이다.
주해는 그렇게 해놨습니다. 또 이런 해석도 합니다.
물을 덥히려고 불 위에 얹어놓으면 물이 다 증발되고, 뜨거운 사발이 나중에는 “찡” 하고 깨지는 소리가 난다. 그런 소리다. 이렇게도 해석합니다.
두 가지로 해석 하더라고요. “지지직” 하는 소리로 해석하는 경우하고, 또 깨지는 소리, “찡” 하고 깨지는 소리로도 해석하는 경우가 있고 그렇습니다. 그래도 아무튼 ‘이 모든 것은 실다움이 없다고 하는 것을 표현한 말이다.’ 그런 뜻입니다.
公이 旣於此箇門中(기어차개문중)에,
그대가 이미 이 문중에, 이 선불교문중에서
自信不疑(자신불의)하니, 스스로 믿어서 의심하지 아니하니,
不是少事(불시소사)라. 이것은 작은 일이 아니다.
要須生處(요수생처)란 放敎熟(방교숙)하고,
요컨대 모름지기 선 곳은, 우리가 서툴지요. 익숙하지 않은 곳, 선 곳은 놓아서 하여금 익게 하고,
熟處(숙처)란, 익은 곳은, 세속 일이지요.
放敎生(방교생)하야사, 세속 일에 대해선 놓아서 하여금 설게 하여야
始與此事(시여차사)로, 이 공부하는 일로 더불어
少分相應耳(소분상응이)이니라.
조금 상응할 것이다. 조금 맞아 들어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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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은 無有實體라. 찻잔과 같이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딱 “이 자리에 있으라.” 하면 있어 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無時無節, 無古無今, 無凡無聖, 無得無失, 無靜無亂, 無生無死라. 나무 아미타불
要須生處란 放敎熟하고 熟處란 放敎生하야사 始與此事로 少分相應耳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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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나무 아미타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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