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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문도에서 영국 보스턴으로 가는 길>
- 김익환
(변호사, 수필가, 대구문학 법률고문,
대구독서포럼, 대구 예술가곡회, 대구 기독문학 회장 역임)
1. 영국병사의 십자가 묘비
거문도에 가면 영국 수병 묘지가 있다. 백이십여 년 전 거문도사건의 흔적이다. 당시 세계 최강 영국해군은 러시아 극동함대의 남진을 저지하려 거문도를 무단 점령, 해밀턴 항이라 이름까지 바꾸고 10여년을 버티다 묘지만 남기도 떠났는데, 지금도 영국인들이 찾아온단다. 고종황제가 외교자문관 독일인 묄렌도르프의 조언으로 러시아와 협약을 하고, 러시아 군의 주둔을 허용하려 하자, 러시아와 각축을 벌이던 영국이 실력행사를 한 것이다.
거문도 선착장 마을 뒷산을 넘으면 바로 묘지인데, 우리 땅에 묻혀 우리 땅의 흙이 되어버린 그 병사의 고향은 어디일까. 젊은 나이에 이역만리 외딴 섬에서 마지막 숨을 거둘 때 천만리 고향의 부모 형제, 친구들이 얼마나 보고 싶었을까. 이 땅에서 최초로 새겨졌을법한 십자가 디자인의 묘비를 보노라면 녹색 초원에 양이 풀을 뜯는 그의 고향땅이 내 눈에도 아련하였다. 몸은 이교(異敎)의 나라에 묻혔지만 그가 의지하던 하나님을 믿고 안도의 눈을 감았으리라.
문득 그 병사의 고향땅을 찾아보고픈 생각이 들었는데, 내내 미루다가 마침내 결행하였다. 런던 히드로 공항에서 바로 카렌터를 하여 콘월이며 웨일즈, 스코틀랜드까지 영국 온 전역을 돌아보기로 하였다.
2. 청교도의 출발지 플리머스
옛 잉글랜드 7왕국중 하나인 웨식스 왕국 수도 윈체스터에는 영국(England)의 건설자 알프레드 대왕의 동상이 서있다. 우리 경주처럼 고대부터 런던과 더불어 정치적 중심지였던 윈체스터에는 원탁기사의 원탁이 있다고도 하는데, 윈체스터 성당 주위의 아름다운 정원이며 고풍스런 고도를 둘러보기에도 바빠 포기하고 남서쪽 땅 끝 마을 콘월까지 가보려는 계획에 따라 먼저 타이타닉호가 출발하였다는 사우스햄턴으로 향하였다.
근대의 바벨탑이라 할까, 당시 사람들에게 바다에서 도저히 침몰될 수 없을 것 같았던 그 거대한 여객선이 처녀 출항에서 처참하게 난파되고 마는 슬픈 이야기는 감동적인 영화며 주제곡으로 더욱 우리를 슬프게 하였다. 마치 유빙과 충돌, 난파하기로 작심한 듯 파도를 가르던 거대한 선박의 비감어린 엔진 기계소리며 그렇게 운명지어진 비극과는 동떨어진 배안의 인간군상들, 오직 유일하게 그런 운명을 체감한 듯한 주인공의 청아한 사랑이야기며 스토리의 전개를 보면 인간의 꾀가 얼마나 허망한 것인지 절감하게 되고, 우리 지구문명의 운명 또한 그와 같은 비극을 향하여 돌진하고 있지나 아니한지 마음이 어두워진다.
발길을 돌려 코난 도일의 셜록 홈즈 스토리, “바스커빌 가의 개”의 배경에다 여류추리작가 아가사 크리스티의 작품배경인 데본셔 무어를 찾아 나섰는데, 황량한 무어지방 물 붓듯 하는 비로 더욱 음침하다. 마음 같아선 걸어보고 싶기도 한데, 심한 빗줄기는 플리머스에 들어서니 그친다.
여기를 떠나 신대륙으로 향한 최초의 청교도들은 험난한 대서양의 겨울파도를 헤치고 첫 발을 내디딘 땅을 출발지와 같은 이름으로 명명하였다. 그들의 메이플라워호 서약은 미국건국의 이념이 되었지만, 아름다운 고향을 두고 험난한 미지의 세계로 떠난 이유가 신앙 때문이었다니, 떠난 사람들이나 남아 있는 사람들이 그때는 왜 그렇게도 신앙에 매여 있던 것일까. 도착한 곳의 삶은 처참하였다. 개척지는 신천지가 아니라 죽음의 땅이었고, 그들은 거친 개척지에서 병으로, 인디언의 공격으로 속절없이 죽어갔지만, 그들의 신앙과 용기를 잠재울 수 없었다. 청교도의 이주는 계속되었고, 15년만에 하버드 대학을 세우며 미국 건국의 길로 나아가는 놀라운 성취를 보였는데, 세계를 이끌어온 그들 후손의 나라 미국이 이제는 활력을 잃은 채 흔들리고 있으니 인류사에도 그늘이 드리워지는 것일까.
영국의 서쪽 끝 콘월까지 달려보고 싶었으나 시차에다 네비게이션이 애를 먹여 플리머스에 만족하기로 하고 브리스톨로 향하였다.
3.가장 영국적인 코츠월즈
며칠 동안 생질녀의 집에 머물면서 세익스피어의 고향이며 옥스퍼드, 처칠의 생가 블레넘 궁전, 솔즈베리 성당과 스톤헨지며 바스, 코츠월즈의 멋진 마을들을 돌아보았다. 스트레드포드 어폰 에이븐 가는 길에 영화 해리포트 촬영지라는 글로스터 성당을 찾았는데, 여기저기가 훼손되어 가고 있었다. 교인이 줄어들고 한때 거창, 화려하던 성당이 시민들의 무관심속에서 서서히 무너져 내리고 있는 현실을 보면 우리나라 교회의 미래도 이와 같지 않으리라 누가 장담할 수 있을까.
우리가 갔을 때 세익스피어의 생가 바로 앞길에서 마침 인도감독이 영화를 촬영하고 있어 우리도 기꺼이 구경꾼으로 엑스트라 역할을 하여 주었다. 허리우드 보다 더 많은 영화를 제작한다는 인도의 영화산업이 옛 종주국 영국의 정신, 이념과 얼마나 지근거리에 있을까. 코츠월즈의 여러 동화 같은 마을들, 버퍼드, 스토우 온 더 월드, 바이버리, 캐슬 쿰 등은 이미 우리나라나 일본의 방송 매체에 여러 번이나 소개되었던 터지만 현장에서의 느낌은 또 다르다. 영국인들의 여유로운 삶, 오랜 세월동안 축적된 풍요로움과 멋을 한껏 음미하게 한다.
사람이 산다는 것이 뭘까, 마음 속 깊은 데에서 흘러나온다. 제법 산다고 할 만하게 살려면 어떻게 살아야 할까. 버턴 온더 워터에서는 마침 우연히 야외음악공연을 보게 되었다. 주민들이며 여기저기에서 온 관광객 등 수많은 사람들이 맑은 시내가 숲이며 초원에 운집하여 한여름 낮 아름다운 선율에 젖어든다. 가히 낙원의 풍경이랄까. 우리도 한여름의 더위를 식히며 낙원의 향취를 만끽하였다.
가끔은 네비게이션이 엉뚱한 곳으로 안내하여 차가 간신히 통과 할 좁은 농로를 달리기도 하는데, 덕분에 패키지 여행객이면 도무지 경험할 수 없는 영국의 속살, 농촌의 정경을 마음껏 즐길 수 있었다.
솔즈베리 대성당은 여름 오후 한가로운 시간을 즐기는 사람들로 붐볐다. 마그나 카르타가 보존되어 있다는데 우리가 도착하였을 때는 관람시간을 지나서 아쉬웠다. 영국에서 시작되어 온 세상으로 퍼져나간 의회민주주의의 첫 걸음이라 할 마그나 카르타는 귀족들이 조세와 국방문제로 왕권을 제약하고자 하는 것이 골자였다. 세금을 내는 자의 동의를 구하라는 귀족들의 요구는 지금 생각으로는 지극히 당연한 듯 하지만 그렇지 않다. 동아시아처럼 모든 토지가 국왕의 것으로 간주되는 사회, 막비왕토(莫非王土)의 이념이 견고한 사회에서는 신민에게 제 것이란 존재하지 아니한다. 영국인의 마그나 카르트 정신은 고대 그리스에서도 발견되는데, 인간의 속박에서 벗어난 자유인은 오로지 노모스(法)에만 종속된다는 법치주의 가 그것이다. 그리스인들은 거대 제국 페르시아는 오로지 한사람뿐인 통치자만 자유인이고 나머지 신민은 그의 노예일 뿐이라 폄하하며 노모스의 아들답게 제국의 침략을 저지하는데, 자유 혹은 사유재산이란 개념은 이런 유럽문화의 산물이고, 그것이 오늘날 민주주의로 연결되는 것이다. 120미터가 넘는다는 하늘을 찌를 듯 거대하고 아름다운 첨탑이며 엄청난 규모의 대성당을 지은 경제력은 어디에서 나왔을까. 조선 말 경복궁 건축으로 우리는 나라가 휘청거렸다는데 말이다.
솔즈버리 대평원에 한가로이 서 있는 스톤헨지의 실물은 생각했던 것 보다 신비로워 보이지 않는다. 몰려 든 온 세계 인종들로 여름날 늦은 오후까지 시끌벅쩍 한데, 사방이 바위하나 보이지 않는 거대한 평원이라 그런 큰 덩치의 거석을 어디에서 가져왔는지 놀랍다.
로마시대때부터 온천도시로 유명한 바스는 산골짜기에 들어서 있는데, 반월형의 건물 크레센도를 못 찾아 헤매다 지처 쉬고 있는 우리를 보고 어떤 인자한 노인이 도와주겠다고 나선다. 설명으로도 제대로 못 찾아 갈 것 같아 난처해하는 눈치를 보고 아예 자기차로 선도해 주겠으니 따라 나서란다. 고마운 그분의 에스코트 덕에 이러 저리 돌고 돌아 크레센도를 찾았다. 작년 일본여행에서도 길을 몰라 헤맬 때 에스코트를 해 준 분이 있었는데, 그분들의 친절을 어찌 평생 잊을 수 있을까.
4. 웨일즈
브리스톨 시내를 벗어나 강폭이 대단한 세븐강을 건너면 웨일즈의 수도 카디프이다. 그곳에서 브레콘 비콘스 국립공원을 관통, 스노도니아 산쪽으로 나아갔다. 험한 산이며 맑은 호수, 아름다운 자연으로 웨일즈는 잉글랜드와 또 다른 느낌이다. 아내는 웨일즈가 너무 편해서 좋단다. 온 세계인이 애창하는 웨일즈 민요 비숍의 “즐거운 나의 집”이 정말 이곳 풍광에 잘 어울려 저절로 노래가 나온다.
남아공 줄루족과 영국군사이의 전투영화에서 줄루족을 물리치는 웨일즈 병사들의 용기와 고향땅을 찬양하는 인상적인 군가가 등장하는데, 스노도니아 산악지대를 달리면서 그들이 노래한 아름다운 자연이며 자긍심이 이해가 되어, 어쩌면 거문도에 묻힌 병사도 용맹스런 웨일즈 출신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구배며 비탈이 대단한 고개를 오르니 여기에서 웨일즈인이 영국군을 물리쳤다는 자랑스런 내용의 비석이 서 있다. 우리 문경 세제도 여기처럼 일본군을 여기에서 물리 쳤노라 자랑할 만한 요지인데, 텅텅 비워두고 탄금대에서 기마병의 자살돌격으로 나라를 망하기 직전으로까지 몰고 간 그때의 엉터리 지휘관의 사연이 문득 머리에 떠오른다. 조상대대로 뿌리를 내리고 살아 온 고토를 지킬 의지와 능력이 없는 자는 남의 종노릇을 면키 어렵지 않겠는가.
영국 왕위계승자의 웨일즈 공 즉위식이 열리는 카나번성은 해변가 요새인데, 제법 볼거리가 솔솔하다. 1622년부터 내려온다는 호텔 야외 라운지에 앉아 한가로이 지는 석양을 바라보며 영국 맥주를 들이켰다. 다음날 아일랜드로 가는 앵글시 섬 해변가의 보매리스 성, 벵거의 펜린 성을 거쳐 콘위의 고성을 둘러보았다.
에드워드 1세가 축성하였다는 콘위성을 자세히 둘러보니 동아시아의 성들과는 개념부터 다른 그야말로 난공불락의 성이다. 성안 한쪽 켠에 성당이 있는데, 지루한 공성전 내내 간절히 하나님의 도움을 청하였을 그들의 절박한 종교생활을 그대로 느낄 수 있었다.
웨일즈를 뒤로하고 로마시대 유적까지 고스란히 남아 있는 체스터를 거쳐 머시아 강 지하도를 통과, 리버풀 독을 둘러보았다. 맨체스터와 늘 앙숙이었다는 리버풀 사람들의 기발함에 놀라며 한편으론 세상의 덧없음을 절감한다. 한때 조선, 무역으로 번창하였던 항구가 이제는 비틀즈의 성지로 바뀌었고 산업은 흔적조차 없다. 울산, 거제 조선소가 언제 사라질는지, 부산항 컨테이너부두가 언제 배 한척 없는 적막감으로 짓눌릴지 누가 알랴.
5. 제인에어, 폭풍의 언덕
리버풀 맨체스터 지역 잘 정비되어있는 고속도로로 리즈쪽으로 가다 브론테 자매들의 흔적을 찾아 호어스에 이르렀다. 조그마한 시골동네엔 아직도 관광용 증기기관차가 달리고 있는데, 브론테 가족들이 다니던 교회며 무덤을 뒤로 하고 오솔길을 따라 폭풍의 언덕 무어쪽으로 나아갔다. 길에서 마주친 곱게 늙은 영국 할머니가 무어로 가는 길을 일본인들이 팻말 표시를 해 두었다고 귀뜸해주어 살펴보니 과연 영문표기 옆에 步道라 씌어있다.
예루살렘 주기도문 교회에는 온 세계 각국 문자로 쓰인 주기도문이 모여 있는데 한복판에 일본어가 떡 버티고 있고 한글 주기도문은 아예 본당 밖으로 멀찌감치 밀려 나 있다. 교세로 따지면 우리 근처도 못 오는 일본이 잽싸게 명당자리를 차지하였고, 도통 그런 일에 둔감한 우리 때문에 한글까지 홀대 당하는 것 같아 언짢았는데 여기서도 재바른 그들의 족적을 만나다니.
우리부부는 브론테 자매들의 작품이야기를 나누며 황량한 무어지역을 거닐었는데, 대여섯살 손자와 할아버지가 함께 정답게 걸어가고 송아지만한 개도 꼬리를 흔들며 뒤따르는 모습이 정겹다.
개장시간에 맞추어 브론테 박물관에 들어서는데 일본의 패키지 관광객들이 박물관 밖에서 사진을 찍은 후 쇼핑을 하러 가는지 우르르 마을로 내려간다. 우리 단체관광객들도 그들처럼 이렇게 먼 길을 찾아와 사진만 찍고 갈까. 박물관 안내인 말로는 일본인 관광객 외에 아직 다른 아시아인들은 많지 않다는데, 중국인들이 시끌벅쩍 밀려 올 때면 또 여기 조용한 마을은 어떻게 바뀔까.
6.호수지역, 그 천상의 아름다움
다시 길을 재촉하여 워즈워스가 시상을 펼친 호수지역으로 나아갔는데, 노르웨이를 연상케 하는 호수와 산들로 어울어져 절경이다. 근대 지질학도 영국인에 의하여 시작되었던 터라 수억 수천만년의 지질연대 명칭에 자연스레 영국지명이 등장하는데, 도버해협의 하얀 해안절벽에서 백악기가, 여기 호수지역 컴브랜드에서 컴브리아기가 유래한다.
여기까지 오며 내내 이색적인 것은 돌담이다. 마을은 물론이거니와 산허리, 어깨며 담이 없는 곳이 없는데, 그 많은 돌들은 어디서 가져와 누가 언제 모두 쌓은 것이며 투입된 노동력은 얼마나 될까. 책에서 배운 인클로우즈의 흔적인가, 아니면 개인의 소유관계를 무엇보다 중시하는 이 나라 사람들의 강렬한 삶의 표상인가. 심지어 호수가도 담으로 구획되어 있어 우리처럼 자유롭게 한바퀴 돈다거나 낚시나 물놀이도 할 수가 없다. 하지만 이런 철저한 소유개념, 법으로 보호되는 소유권은 국왕이라도 어떻게 할 수 없다는 법치의식, 소유권을 지키기 위해 대표를 선정하는 민주주의를 낳게 되는 것이다. 이 나라 사람들의 이런 의식이 없었다면 의회제도가 등장할 수 없고, 그저 사해가 군왕의 덕으로 가득 차기만 바랄 뿐 달리 방법이 없지 않겠는가.
그러나 호수지역 하면 시인 워즈워스다.
무지개 MY HEART LEAPS UP
하늘의 무지개를 볼때마다My heart leaps up when I behold
내 가슴 설레느니,A rainbow in the sky
나 어린 시절에 그러했고So was it when my life began
다 자란 오늘에도 매한가지,So is it now I am man
노년이 되어서도 그러하리So be it when I shall grow old
아니면 차라리 죽음으로. Or let me die
어린이는 어른의 아버지The Child is father of the man
바라노니 나의 하루하루가And I could wish my days to be
자연의 믿음에 매어지고자.Bound each to each by natural piety
케즈윅 호수가를 거닐고, 나무 하나 없는 초원의 무어 산들을 오르거나 조용히 앉아 버터미어 호수위의 무지개를 바라보고, 그래스 미어에 남아 있는 생가며 교회묘지를 둘러보며 자연의 선지자였던 위대한 시인을 느껴보았다.
7. 아, 스코트랜드
우리는 다시 길을 떠나 칼라일에서 하드리아누스 성벽을 보았다. 고대의 성벽은 일부 흔적만 남아 있는데, 성벽이 만리장성처럼 능선을 따라 나 있지 않아 흥미롭다. 성벽 바깥쪽이 안쪽보다 지대가 약간 더 높은데다 상당한 평지가 그대로 펼쳐져 있어 방어전을 치를 때 성벽의 효과가 어떨지 애매하였다.
돌아오는 길 석양에 무너져 내린 거대한 교회를 보고 들어가 살펴보았다. 붉은 사암석의 웅장한 교회가 문 쪽만 조금 남은 채 예배대 부분이며 대부분이 무너져 내려앉은 것을 직접 보니 슬픔이 몰려든다. 교회 문을 오간 수많은 사람들의 목소리가 귀에 쟁쟁하는데 이렇게 속절없이 무너지는구나. 창조주 신이 임재 하는 것으로 여긴 예루살렘 성전도 무너져 사라지고 모퉁이 작은 벽만 겨우 조금 남아 통곡의 벽으로 불려지고 있지 않던가. 인간의 손으로 만들어진 어떤 것인들 영원하랴.
다음날 스코틀랜드로 접어들어 글래스고우, 스털링을 거쳐 하이랜드로 나아갔다. 영화 브레이브 하트로 우리에게 익숙한, 그 척박한 하이랜드가 눈앞에 펼쳐진다. 우리가 늘 즐겨 부르는 주옥같은 “애니로리”, “올드 랭샤인”, “푸른 옷소매”가 모두 이곳에서 탄생하였으니 스코트랜드인들은 자연과 노래를 하나로 만드는 천부적 심성을 지녔다 할까. 찬송가545장 “하늘가는 밝은 길이”가 애니로리 곡이고, 338장“천부여 의지 없어서”가 올드 랭샤인 곡인데, 545장은 위대한 순교자 손양원 목사님께서 생전에 늘 부르셨다 하고, 338장은 안익태 선생의 작곡 전에 애국가로 불러졌던 곡이니 이 땅, 이곳 사람들과 우리 한국인은 노래로 서로 연결되어 하나가 되었던 같아 스코틀랜드가 우리와 더욱 가깝게 느껴진다.
잉글랜드 호수지역에 비하면 더욱 황량하고 남성적인 풍광의 글랜코를 지나면 인간의 목격과 착각사이에서 존재감을 유지하는 괴물 네스의 터전 네스호 턱 밑 포트윌리엄이다. 우리나라에선 네스가 웅크리고 산다는 네스호만 해도 참으로 멀고 먼 곳으로 느껴졌는데, 그보다 한참 더 북쪽으로 나아가니 이제 괴물들이 사는 곳을 넘어서 아주 신화의 땅으로 들어서는 느낌이다.
글랜코를 지나는 길가에 온통 무덤으로 에워싸인 교회당이 눈에 띄었다. 교회가 산자와 더불어 살아 삶을 이끌어가지 못하고 죽은 자의 안식처로만 안주한다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일까. 영국 땅 곳곳의 거대한 성당에 죽은 자의 흔적이 넘쳐나고 있는 듯하여 마음이 편치 않다. 우리도 청정 사찰 곳곳에 더 크고 화려한 사리탑이 속속 들어서고 있으니 동서가 한마음인가.
말리그에서 스카이섬으로 가는 페리에서 교회경치는 노르웨이의 피요르드나 뉴질랜드 남섬의 밀포드 사운드를 연상케 한다. 절경의 스카이섬을 한바퀴 돌아 수많은 호수와 언덕, 황량한 들판을 달려 울라풀에 도착하였다.
찬 비바람의 을씨년스런 날씨에 그 흔하게 보이는 양한마리 보이지 않고, 사람흔적은 도로뿐인 길을 따라 우리는 북쪽 길로 나아갔다. 100여 킬로를 달려야 주유소가 등장할 정도인 황량한 하이랜드 광야를 달리다 난생처음 토탄을 보고 호기심이 발동, 한웅큼 봉지를 만들어 주머니에 넣었다. 듀런을 지나면 영국의 최북단 더네스이다. 콘월 가는 길 남쪽바다와 웨일즈 리버풀의 서쪽바다를 거쳐 이제 맑고 차가운 북쪽바다를 보니 감개가 무량하다. 언제 우리는 두만강 하구 우리 땅 북쪽에서 동해를 바라보며 목놓아 노래할 수 있을까.
북해 절벽 위 캠프촌 찬 바람을 맞으며 한참이나 북쪽 바다를 바라보았다. 수평선 저 너머 신화의 땅 아이슬랜드, 그리고 북극의 얼음덩어리가 버티고 있을 터, 영국인들은 이런 환경에서 반지의 제왕과 같은 스토리텔링을 하였겠지.
사네아이 몇 놈이 바닷바람을 헤치며 신나게 자전거를 달린다. 필씨 강인하게 자라나 다음 세대를 이끌 늠늠한 청년이 되겠지. 바람과 바다가 키워주는 아이들이 어찌 학원주위만 맴도는 처량한 아이들과 같으랴.
다시 차를 몰아 텅을 지나 북풍이 몰아치는 리에서 바람을 가르며 여유로이 골프를 즐기는 사람들을 구경하다가 써소우에서 남쪽으로 90도 회전하여 끝없는 들판을 달리니 이번에서 동쪽바다가 나타난다. 유럽쪽이라 제법 평야도 있고 사람들 내왕이 빈번하다. 바다를 끼고 남쪽으로 달려 디즈니랜드 같은 멋진 성이 있는 던로빈에 들려 우리부부는 아들 내외와 손자 선물을 고르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다시 동쪽 바다를 끼고 한참을 내려 와 인버네스, 던디를 거쳐 세인트 앤드듀스에 들렸다. 지금은 골프의 성지, 브리티시 오픈으로 우리에게 익숙하지만, 여기서 한국장로교회의 어머니 스코틀랜드 장로교회가 출현하였다. 존 녹스에 의해 창시된 스코틀랜드 장로교회는 제네바의 깔벵에 뿌리를 두고 미국 캐나다 오스트렐리아 등 영국인들의 온 세계 이주지로 번져 나아갔는데, 1866. 9. 마침내 우리나라에까지 그 씨가 심어졌다. 제네럴 셔먼호를 타고 평양에 도착, 순교한 런던 장로교회 소속 선교사 토머스 목사며, 그 무렵 만주지방에서 한글 성서번역 작업을 진행하던 스코틀랜드 장로교 선교사 로스 등의 노력이 마침내 결실을 맺아 1883. 서상륜이 한글 복음서를 들고 돌아 와 고향 황해도에서 솔내(松川)교회를 세운 것이다. 그 다음 해 미북장로교회 선교사 알렌이, 또 그 다음해 4월에 언더우드 목사가 감리교 아펜셀러 선교사와 입국하였는데, 언더우드 목사가 1887. 7.22. 개종자 1명과 자기 집에서 예배를 드리게 된 것이 새문안교회의 시작이라 하고, 그 다음 해 캐나다 장로교회 게일선교사의 부산지방에서 선교를 비롯하여 아담스 선교사의 대구지역 선교가 영남지방 장로교회 선교의 시작이라 하니 우리나라의 장로교회나 대구 계성학교 등 미션계 학교의 모든 것이 여기 스코틀랜드의 세인트 앤드류스의 거친 모래바람에 근원을 두고 있다 할까.
스털링 성이나 에딘버러 성은 모두 그야말로 난공불락의 대단한 요새이다. 대포가 등장하기 전에는 내부 반역자가 생기지 않는 한 고사작전 말고는 함락시킬 방법이 없는 것 같다. 묵고 있던 호텔 창문에서 보이는 야경도 근사하고, 그 유명한 에딘버러 타투 행사장에서 들려오는 행진연습이며 청아한 백파이프 소리도 즐겁다.
스코틀랜드가 아직 독립국가일 때 늘 잉글랜드에 위축되어 있었는데, 인구며 국토 산물이 비교가 안될 정도로 약소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스코틀랜드계몽주의로 알려진 정신적 영역, 종교, 사상, 학문의 세계에서는 조금도 뒤지지 않는 업적을 남겼다. 글래스고우, 에딘버러, 세인트 앤드류스 등 세계적인 대학이 배출한, 아담 스미스, 데이비드 흄, 찰스 다윈, 월터 스코트, 리빙스턴, 존 녹스 등 수많은 인재들이 인류사에 큰 족적을 남겼고, 미국 건국에도 크게 영향을 주었다 하니, 경북을 뺀 남한 면적 정도에 인구는 대구, 경북을 합친 500만 정도의 스코틀랜드가 더없이 큰 나라로 느껴지고 한국은행처럼 화폐 주조권을 지닌 스코틀랜드 은행의 존재 의미가 새삼 무겁게 다가온다.
8. 요크 민스터와 링컨 보스턴
스코트랜드를 떠나 잉글랜드로 내려오니 사뭇 풍광이 다르다. 거대한 더럼성당은 영화 ‘엘리자베스 1세’에 왕궁으로 등장하는 그 건물이다. 사이몬과 가펑클이 불러 온 세계인의 가슴에 감동을 준 노래 “스카브로의 추억”의 그 스카브로는 브론테 자매가 살기도 하였다는데, 온 세상 바다를 누빈 쿡선장의 흔적을 경험하고 싶어 포기하고 쿡선장의 흔적을 찾았다. 평민의 아들로 태어나 당대 세계최고의 항해가, 탐험가이자 뉴질랜드, 오스트리아의 발견자 쿡 선장의 고향 핫비의 생가를 거쳐 요크에 도착, 곧바로 민스터를 찾았다. 캔터베리와 더불어 영국교회 2대 주교좌인 요크 민스터에는 마침 합창단이 파이프 오르간에 맞추어 합창연습을 하고 있었는데, 그 장엄함이란!
종교음악은 역시 거대한 성당에서 들어야 제 맛이 나는가 보다. 성당 내부를 구경하다 말고 한참동안이나 감상하며 즐겼다. 연습장면이며 장중한 음향은 VTR 고장으로 녹화를 못하여 못내 아쉬웠고 그래서 대신 CD 몇 개를 샀다. 요크 민스터는 규모며 웅장함, 건물의 완성도가 더럼성당이나 켄터베리, 웨스트민스터를 능가하는 것 같다. 현재에도 잘 관리되며 사용되고 있는 것 같아 고색창연한 유적이 되어 관광객이나 끌어들이는 성당들과는 차별되어 더욱 좋았다. 무너져 내리고 있는 영국교회에서 요크민스터가 잠깐 동안 보여 준 활력은 정말 인상적이었다.
요크성이며 로마시대 유물을 소장하고 있는 박물관, 철도박물관을 둘러본 후 리즈의 무기 박물관에 들렸다. 온 세상 근세이전의 무기, 갑주가 진열되어 있는데, 중국 것 옆 일본 것은 차고 넘치는데 우리 것은 전혀 눈에 띄지 아니한다. 무기가 국력이었던 시대에 서구인들의 눈에 뛸만한 아무것도 우리에게 없는 것일까. 스미소니언이나 뉴욕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에서도 대동소이한 느낌을 받는데, 우리 육사 박물관의 빈약한 무기 소장품이 어쩌면 답하고 있지 않은가. 언짢은 기분을 떨치고 온통 사방이 누렇게 익은 밀밭이며 감자밭등 경작지로 지평선을 이루고 있는 평원을 달려 링컨으로 갔다. 여기 링컨은 미국 대통령과 어떤 관련이 있는지 평소에 늘 궁금하였는데, 몇 번이나 무너지기도 하고 화재로 소실되기도 하였다는 링컨 대성당의 엄청난 첨탑은 경이롭다.
다시 길을 재촉하여 보스턴으로 향하였다. 여행을 떠나기 험난한 역사를 지닌 링컨 대성당만 들려볼 생각이었는데 인근에 보스턴이란 도시가 있어 미국 보스턴과는 어떤 인연이 있는지 궁금하여 니친 김에 그기까지 찾아 간 것이었다.
교구 성당 뜰에 있는 안내문에 의하면 여기 보스턴 주민 중 플리머스를 출발한 최초의 청교도는 없으나 실제로 미국으로 이주한 청교도의 주력이 여기 출신이라 하고, 그들의 후원자가 링컨의 백작이었단다. 지위 높은 백작의 후원으로 링컨셔 보스턴 주민 2500명중 10%가 뉴잉글랜드로 떠나가 터를 잡고 보스턴이란 지명을 붙인 후 미국이란 나라의 건국을 주도하였다 하고, 건국의 아버지로 미국 2대 대통령을 지낸 존 아담스의 증조부도 그중 한분이었다 하니 여기가 미국탄생의 씨가 움튼 곳이다. 유럽쪽과 가까운 광대한 농업지역 영국 보스턴 주민들이 북독일이나 스위스, 네델란드에서 불타듯 일어나던 종교개혁에 한 발 앞서 관심을 가지게 되었음 직 하고 그들의 열정어린 신앙이 세계사를 바꾸어 간 계기가 된 것이리라.
우리가 보스턴 교구교회에 도착하였을 땐 저녁 여섯시가 넘었다. 가게는 문을 닫고 사람 통행이 한가로워 시가지가 조용한데, 성당 골목 한켠에서는 남녀 청소년들이 술이 취하여 떠들어대고 있어 눈살이 찌푸려진다.
미국의 뿌리라 할 보스턴여행이란 기대조차 않은 멋진 추억을 안고 다음날 우리부부는 로빈훗의 배경 노팅엄 셔우드 숲을 거닐었다. 숲은 빽빽하나 밥 해먹고 빨래도 할 만한 개울하나 없는 숲, 관군이 들이닥치면 내쳐 도망질 칠 야산이나 후배지 조차 없어 도둑의 소굴로는 도무지 미흡하다. 훗날 통일이 되면 임꺽정의 근거지였다는 황해도 멸악산을 보고 싶은데, 수호지 산적들의 소굴 중국 산동의 양산박은 또 어떨지 모르겠으나 로빈 훗 이야기는 영국인들의 뛰어난 상상력이 빚어 낸 의적 스토리가 아닌가 한다. 셔우드 숲으로 가는 길목에서 본 로빈 훗 레스토랑은 떠올리고 그가 귀순하여 양순한 요식업자로 여생을 보내는가 보다며 즐거워하였다.
9. 켄터베리 이야기
로마의 식민통치 네로 황제 때 브리튼 부디카 여왕의 반란이 일어난 곳이라는 이스트 앵글리아 지역 노리치를 거처 로마 식민지 수도 콜체스터까지 들리려하였다.
남편인 브리튼 부족왕이 죽고 계승할 아들이 없자, 로마가 여왕의 승계를 부정하며 매질하고 딸들을 강간하는 치욕을 주자 “나는 자유를 위해 싸운다. 남자들은 원하면 노예로 살라, 그러나 여자인 나는 그렇게 하지 않겠다”며 분연히 일어난 부디카 여왕에 켈트족 브리튼사람 수십만이 호응, 콜체스터를 함락시키고 런던까지 진군하였으나 로마의 정예군단에 패배, 자살로 생을 마감하였는데, 시간이 없어 아쉽게 포기하고 바로 케임브리지로 가 대학가를 돌아보고 케임강에서 펀트를 타고 석양을 보며 뱃놀이도 즐겼다.
다음날 켄터베리 성당에 들렸는데, 신앙을 지키려다 왕의 노여움을 받아 희생당한 순교자를 추모하는 불이 아직도 타고 있어 인상적이었다.
우리사회에 탁월한 영적 지도자의 전형을 보여주신 고 하영조 목사님께서도 영국 성공회로부터 신선한 충격과 영향을 받았다는데, 그런 영국 교회가 노쇠하여 사회와 크게 유리되고 있는 듯 하다. 옥스퍼드에 들렸을 때 큼지막한 성공회 교회에서 백인노인 몇몇과 유색인 가족 몇과 함께 주일예배를 드렸다. 예배를 마치고 밖으로 나오니 온 거리가 젊은 남녀로 꽉 차 있었다. 그들에게 교회는 마치 우리나라의 늘 텅 비어 있는 옛 서원 건물처럼 생활과 아무런 관계가 없는 대상으로 느껴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아직 우리가 서원이 가르친 유교적 윤리에 영향을 받듯이 기독교적 가치만 유럽 현대인에게 영향을 남기고 종교는 형해(形骸)화 되어버린 것은 아닌지.
아름다운 리즈성을 거쳐 남쪽 해변가를 따라 도버, 헤이스팅스, 브라이튼을 돌아 런던으로 향하여 귀국길로 접어들었는데, 런던의 약탈폭동 뉴스를 듣고 보스턴의 청소년들을 떠올렸다.
다른 나라가 감히 흉내도 못 낼 정도로 앞서 나가던 나라, 스스로 유일한 예외임에 대단한 자부심을 가지던 사람들의 나라에서 어찌 그런 폭동이 일어나는 것일까. 충격적이긴 하나 그 또한 현대사회의 하나의 현상이 아닌지 모르겠다.
하물며 부패하고 포퓰리즘에 사이비 진보주의, 천민자본주의가 판을 치고 사회가 갈기갈기 갈라질 대로 갈라져 있는 우리나라, 갈등의 치유가 본업인 종교와 정치가 오히려 갈등을 심화시키는 나라, 미래를 향한 교육이며 사상에 과학정신과 건강한 합리주의가 결여된 우리의 미래에 얼마나 더 험악한 충격이 기다리고 있을까.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