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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정(鄭)씨 유래
중국 주나라 려왕(厲王)이 소자우(小子友)를 정(鄭)나라에 봉했는데 이분이 환공(桓公)이며 후세에 나라 이름으로 성씨를 삼았다. 정씨는 영양정환공(榮陽鄭桓公)의 자손으로 진나라를 선(選)하여 동방으로 와서 6부중 하나가 된 것인데 玄葂郡으로 왔다가 우리나라 진한으로 옮겼다. BC 117 진한시대에 알천양산촌 알평(이씨)과 돌산고허촌장 소벌도리(최씨), 자산진지촌장 지백호(정씨), 무산대수촌장 구례마(손씨), 금산가리촌장 지타(배씨), 명활산고야촌장 호진(설씨) 등 6촌 지역 촌장이 지역을 다스리며 세거하고 있었다. BC 69년 3월 초하루에 알천지역에서 촌장회의를 하고 있는데 갑자기 양산 기슭에 서리가 내려 그 지역을 확인하여 보니 검붉은 알 속에 동자가 누워 있었다. 돌산고허 촌장은 동자를 자택에 모셔다 잘 보살펴주고 키워주니 기량이 대범하고 용모가 단정하여 왕재로서 빈틈이 없었다. 그리하여 BC 57년 그를 국왕으로 추대하니 박혁거세이다. AD 32년 신라 4대 유리왕 9년 임진 봄에 진한의 6촌을 6부로 고처 각각 사성(賜姓)하였으니 이(李)최(崔)손(孫)정(鄭)배(裵)설(薛) 諸씨이다. 진한의 넷째가 자산진지촌을 본피부로 개명하고 지백호공을 낙랑후로 책봉하여 성까지 정(鄭)씨로 하사하였다. 이시기가 지백호의 손 동충(5세)때의 일이었다. AD 56년 신라 법흥왕 3년에 6부장에 시호를 증하였고 AD 655년 태종무열왕 3년에 6부왕으로 추봉하였다.
※ 정씨 원류상계도
영일현(迎日縣)
동쪽으로 해안까지 14리이고, 장기현(長鬐縣) 경계까지 22리이고, 남쪽으로 경주부(慶州府) 경계까지 10리이며, 서쪽으로 경주부 경계까지 13리이고, 북으로 흥해군(興海郡) 경계까지 25리이며, 서울까지의 거리는 8백 6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신라의 근오지현(斤烏支縣)으로 일명 오량우현(烏良友縣)이라고도 했다. 경덕왕(景德王) 때 임정현(臨汀縣)이라 개칭하여 의창군(義昌郡)의 속현으로 하였고, 고려 때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으며, 현종(顯宗) 때는 경주에 속했다. 공양왕(恭讓王)이 감무를 두어 군을 관장한 만호가 겸하게 했고, 본조 태종 때, 진을 두어 병마사가 지현사(知縣事)를 겸하게 했으며, 세종(世宗) 때, 병마첨절제사로 개칭했다가 후에 현감으로 고쳤다.
【관원】 현감ㆍ훈도 각 1인.
【군명】 근오지현(斤烏支縣)ㆍ임정현(臨汀縣)ㆍ오천현(烏川縣)ㆍ오량우현(烏良友縣).
【성씨】 본현 정(鄭)ㆍ성(成)ㆍ주(周), 주(朱)ㆍ김(金)ㆍ최(崔) 모두 내성(來姓)이다.
【형승】 해적들이 내왕하는 요충지이다 이숭인(李崇仁)의 〈신성기(新城記)〉에 있다.
【산천】 운제산(雲梯山) 현의 남쪽 12리에 있으며, 진산(鎭山)이다. 진전산(陳田山) 현의 동남쪽 30리에 있다. 대흥산(大興山) 현의 북쪽 23리에 있다. 사화랑산(沙火郞山) 현의 동쪽 15리에 있다. 사현(沙峴) 현의 동쪽 17리에 있다. 동을배곶(冬乙背串) 현의 동쪽 73리에 있다. 장기현(長鬐縣) 조에도 있다. 향점(杏岾) 현의 서쪽 10리에 있다. 바다 현의 동쪽 14리에 있다. 주진(注津) 현의 북쪽 15리, 즉 경주 안강현(安康縣) 형산포(兄山浦) 하류에 있으며, 동쪽은 바다로 흘러 들어간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매년 겨울이면 청어가 반드시 맨 먼저 여기에서 잡힌다 하는데, 먼저 나라에 진헌한 다음에야 모든 읍에서 그것을 잡았다. 잡히는 것의 많고 적음으로 그 해의 풍흉을 짐작했다 한다. 임곡포(林谷浦) 현의 동쪽 27리에 있다. 통양포(通洋浦) 현의 북쪽 22리에 있으며 옛날에는 만호영(萬戶營)이 있었으나 지금은 흥해군(興海郡) 칠포(漆浦)로 옮겼다. 벌지(伐池) 현의 동쪽 3리에 있다. 죽도(竹島) 현의 북쪽 16리에 있으며 대밭이 있다.
【토산】 꿀[蜂蜜], 죽전(竹箭) 대흥산(大興山)에서 난다. 송이[松蕈]ㆍ해달ㆍ방어(魴魚)ㆍ연어(鰱魚)ㆍ전복[鰒]ㆍ방풍(防風)ㆍ넙치[廣魚]ㆍ대구(大口)ㆍ홍합(紅蛤)ㆍ은어[銀口魚]ㆍ청어(靑魚)ㆍ김[海衣]ㆍ미역[藿], 벼룻돌[礪石] 운제산(雲梯山)에서 나는데 그 품질이 아주 좋다. 황어(黃魚)ㆍ전어(錢魚)ㆍ상어[鯊魚]ㆍ송어(松魚)ㆍ홍어(洪魚)ㆍ고등어[古刀魚].
【성곽】 읍성 돌로 쌓았으며, 둘레는 2천 9백 40자, 높이는 12자이고 안에 3개의 우물이 있다. ○ 이숭인(李崇仁)의 기문에, “일찍이 《맹자》를 읽은 적이 있었는데, 지리(地利)가 인화(人和)만 못하단 대목이 있었다. 그렇다면 성곽(城廓)이나 성지(城池)가 다스리는데 있어서는 말단적인 것이란 말이다. 그러나 《춘추》의, ‘호뢰(虎牢)에 성을 쌓다.’란 대문[策]을 읽음에 이르러서 그 서법(書法)을 보면 옳게 여기지 않은 것이 없었다. 아, 성현의 말씀들은 본말과 선후의 순서가 있으니, 어느 것이고 세도를 위해 마련되지 않은 것이 없다. 내가 중원(中原)에 봉사(奉使)한 적이 두 번이었는데, 지나는 길에 비록 몇 집 안 되는 고을이라도 역시 모두 보장하는 것이 있음을 보았다. 지형을 점거하고 성을 쌓는 일을 어찌 적게 여길 수 있겠는가. 우리 동방에도 국가제도가 있고 중국을 배울 줄 알았지만, 소박 간략하고 문채가 적어, 선조(先祖) 이래로 백성을 휴양하고 생식함에 있어서 백성들이 태평한 그 속에 살고 죽고 한 지 4백 년이 되었다. 그러나 결국 문(文)으로 다스림을 제어할 수 없었고, 무(武)로는 난을 평정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바다 섬의 고약한 것들이 감히 연변에 침입하였으니. 경인년에 침입한 왜적이 바로 그것이다. 짓밟혀서 경신ㆍ신유년 두 해 동안에 병화는 이루 말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아, 치안이 극진하게 되면 사세가 어지러워지지 않을 수 없으니, 또한 적을 막고 방비하는데 있어 그 제도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영일(迎日)은 계림(鷄林)의 속현으로, 동쪽 해안에 위치해 있고, 그 치역(治域)은 또 통진포(通津浦)에 임하고 있으니, 실로 해적들이 내왕하는 요충이다. 경인년에 병들기 시작함으로부터 30년이 지났으니 생산하고 모은 것이 쓰러버린 듯하였다. 기사년에 삼도 도체찰사가 현의 옛 치역을 지나다가 두루두루 살펴보고 위연(喟然)히 탄식하며, ‘이것을 어찌 왜적에게 주어서 그들의 좋은 일이 되게 할 수가 있겠느냐.’ 하고는 축성(築城)에 관한 일을 논의하였으나 얼마 후엔 지반이 좁은 것같다 하며 구촌(丘村)에 장소를 옮겨 흙으로 쌓기에 힘썼지만 비가 오면 무너졌다.
경오년 오월에, 익양(益陽) 최후(崔侯)가 만부장(萬夫長)으로 여기에 오게 되어 현의 일을 겸하여 맡게 되자, 정령(政令)이 크게 실행되어 백성들이 그의 밑에서 일하기를 즐겼다. 최후가 이에 도관찰사에게, ‘우리 고을이 힘입어 존재하는 바는 성인데, 성이 이미 무너졌으니, 이는 우리 고을이 없는 거나 마찬가집니다.’ 라고 말했다. 관찰사도 최후의 말을 옳게 여기고, 옆 고을에 명령을 내려 천여 명의 인부를 동원하고, 인해서 전 선공령(繕工令) 정인생(鄭麟生)을 시켜 최후와 함께 일을 감독하게 했다. 최후는, 생각하기를, ‘공은 오래가는 것을 귀하게 여기는 것이니, 그러기엔 돌로 쌓는 것이 낫다.’ 하고 이에 선부(船夫)를 보내어 형산(兄山)의 돌을 떠서 날라다가 성을 쌓으니, 두 길 남짓하고 둘레는 모두 몇 리나 되었다. 남북에 두개의 문을 두었는데, 문에는 각각 문루(門樓)를 세웠으니, 남쪽의 것은 대개 손님과 나그네를 맞이하고 갈고 심는 것을 시찰하는 것이요, 북쪽은 바다를 내다보고 간악한 도적을 살피자는 것이었다. 7월에 착공하여 9월에 준공하니, 이때부터 읍성에는 전에 떠났던 사람들이 모두 돌아오고, 새로 오는 자도 연이어서 성 둘레에는 황폐한 전답이 없어졌다.
금년 가을, 최후가 나에게 편지를 보내어 말하기를, ‘기문을 써주오.’ 하고 또 말하기를, ‘두 문루를 이름지으라.’ 하였다. 내가 생각건대, 최후가 바야흐로 성군(聖君)과 현상(賢相)이 새로운 정치를 시도하고 있는 때를 만나서, 조정에서 뽑혀 이 먼 곳 백성을 맡아서 위문하고 보호하는 방법과 막고 보위하는 제도가 모두 칭찬하여 말할 만하니, 모든 역사에 실려 있는 바에 비교해 보면 그의 발길이 미친 바는 하나도 부끄러울 것 없는 것이다. 나는 병들었고, 게을러졌다. 비록 그러나 남의 잘한 일을 말하기 좋아함은 본시 나의 뜻이다. 뿐만 아니라, 최후의 선친 시어(侍御)는 내가 제생(諸生)으로 있을 제 모시었으니, 그러므로 최후의 청함에 사양하지 못하겠노라. 문루(門樓)의 이름을 지으라는 일은, 내 병이 조금 낳으면 말을 타고 놀러 가서 최후를 따라 누 위에 올라가서 지도를 살펴 보고, 또 지형을 파악한 다음, 그때 가서 마땅히 붓에 먹물 찍어서 쓰려 한다. 최후의 이름은 자원(自源)이요, 벼슬 품계는 봉순대부(奉順大夫)이다. 훤출한 마음으로 공을 세우고 이름내기를 좋아한다. 도관찰사는 낙안 김씨(樂安金氏)로 이름은 주(湊)이고, 도체찰사(都體察使)는 종실(宗室)로 이름은 강(康)이다.” 하였다.
【봉수】 동을배곶(冬乙背串) 봉수 동쪽으로 장기현(長鬐縣) 장곡(獐谷)에 응하고, 북쪽으로는 흥해군(興海郡) 지을산(知乙山)에 응한다. 사화랑산(沙火郞山) 봉수 서쪽으로 경주 형산(兄山)에 응하고, 동쪽으론 장기현 뇌성산(磊城山)에 응한다.
【누정】 의운정(倚雲亭) 객관의 북쪽에 있다.
인빈당(寅賓堂) 의운정의 서쪽에 있다. 성화(成化) 경자년에 현감 어득호(魚得湖)가 세웠다. 『신증』 김종직(金宗直)의 기문에, “동녘 바닷가에 고을이 있으니, 그 이름은 영일(迎日), 혹은 임정(臨汀)이라 하는데, 대개 신라 동편 가에 위치한다. 신라 초기엔 혼돈(渾沌)이 개착(開鑿)되지 않은지라. 제도가 들을 만한 것이 없더니, 그 중엽에 이르러 현군(賢君)이 잇달아 일어나서 처음으로 중국과 통하여 상고하고 연구해서 날로 문화가 발전하여 아침 해와 같은 것은 《국어(國語)》에 실린 것과 같고, 춘분(春分)에 아침 해를 맞고[賓出], 추분(秋分)에 저녁 해를 보내던[餞納] 일들은 〈요전(堯典)〉에 적혀 있다. 이는 옛 제왕들이 하늘을 공경하고 사람에게 때를 정하여 주었던[授入時] 일인 줄로 여겨지는 바, 그 정치라는 것은 이것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비록 조종(祖宗)에는 이런 일이 없었어도 또한 옳은 것을 따라서 하는 것이다. 관제에는 태사(太史 천문(天文)과 역사를 맡은 벼슬)를 두어 대(臺)를 높이고, 별을 관측[瞻星]하여 역상(曆象)과 규측(圭測)의 제도가 따라서 점점 갖추어졌으니, 그때에 있어서는 이 현(縣)이 그 양곡(暘谷)의 차례에 당해 있으므로, 이름을 영일(迎日)이라고 한 것은 이 까닭이었다. 그런데 고려 태조(太祖)는 국가가 교체되는 즈음에 있어서 임정(臨汀)이란 이름을 버리고 지금의 이름으로 복귀시켰으니, 어찌 까닭 없는 일이라 하겠는가.
일찍이 듣건대, 현의 동쪽으로 20리 떨어진 곳에 도기야(都祈野)가 있고 일월지(日月池)가 있어서 지금까지 사람들은 신라 때 제천(祭天)하던 곳이라 하니, 이것이 그 명확한 증거인데, 속설에 전하는 바 영오(迎烏)와 세오(細烏) 부부의 이야기는 어쩌면 그렇게 적당하지 아니한가. 신라 사람들의 괴상한 일 좋아함이 이와 같아 증빙할 만한 것이 못 된다. 성화(成化) 13년 중원(中原) 출신 어득호(魚得湖) 후(侯)는 무예와 관리의 재능으로 이곳에 인을 맡아 가지고 와서 덕망이 두터우니, 사람들이 믿으며 바다는 편안하고 농사도 풍년이 들었다. 늘 의운정을 배회하면서 훌륭한 경개를 구경하더니, 또 빈객으로 놀러 오는 이들을 이곳에서 따뜻하게 하고 시원하게 해주기 위해 다시 정자 오른편에 당(堂)을 지어 냉방과 난방을 갖추기도 했다. 바르고 꾸미는 것이 끝나자 나한테 기문을 써 달라는 편지를 보내왔다. 내 일찍이 울산(蔚山)에 부임하여 군사를 사열한 적이 있었다. 그때 그 현에 이르러서 소위 의운정에 올랐는데, 고을 사람들 말에, 이것은 옛날 이사군(李使君) 지명(知命)이 세운 것이라 한다. 내 멀리 바라보니, 남쪽으로 5리쯤 떨어진 곳에 산이 있었는데, 운제산(雲梯山)이라 한다. 높이 솟아 있고 나무가 울창하였으며, 구름을 뿜고 안개를 빨아들이는데 산중에는 소성거사(小性居士)의 유적이 있다 한다. 동북쪽으로 7리를 가면 큰 바다가 있는데, 거센 파도가 하늘에 맞닿았고, 신기루가 저자를 이루었으니, 곧 일본의 서녘 바다이다. 산과 바다의 사이에는 전원이 넓고 크고, 내와 못이 있으며, 겹겹이 쌓인 곳에 언덕이 있어 그 이름 피막(皮幕)이요, 정자 있어 그 이름 대송(大松)이다. 모래톱은 흰빛을 발하고, 송죽(松竹)은 푸른빛을 보내며, 뽕나무와 삼으로 울타리하여 멀고 가까운 것 비추고 둘려서 한데 어울리고 서로 도와서 이 성문 밖에 재주를 펼쳐 놓았다. 저물어 자고 다음날 이른 새벽, 정자 위에 기대서서 고개 들고 동녘을 바라보니 구름과 물이 한 빛이라, 날이 샐락말락할 무렵이었다. 금시에 분홍빛이 수십장 치솟더니, 태양이 용솟음치며 하늘에 떠오른다. 나는 깜짝 놀라, ‘오늘의 장관이야 말로 정말 고을의 이름과 부합되는도다.’ 라고 탄식했다.
이후는 선배이며 또 호걸스러운 선비이다. 그래서 그의 규획한 바가 이와 같이 천기의 깊은 데까지 볼 줄 알았다 하겠다. 지금의 어후는 이후보다 약 40년 뒤에 왔지만, 이후가 미처 못한 것을 윤색(潤色)하였으니, 이 당(堂)의 이름을 굳이 누정(樓亭)의 이름과 같게 할 필요는 없고 인빈당(寅賓堂)이라고 편액을 써서 현의 이름에 짝지어 본다. 아, 천하에 해변이 한 군데가 아니건만 등주(登州)와 내주(萊州)의 우이[嵎夷]를 측후소(測候所)로 하였고, 우리나라에서도 해변이 한 군데가 아니지만 계림(鷄林)의 임정(臨汀)을 해 맞는 곳으로 삼았으며, 어후가 비록 희씨(羲氏), 화씨(和氏) 같은 측후관도 아니지만 6년 동안을 어느 하루도 부상에서 돋는 해를 맞이하지 않은 날이 없었으니, 내가 한 말이 적중했다고 하지 않겠는가. 어후께서 만약 마음에 드신다면 이 기문을 전해도 좋고, 아니면 다시 당세의 훌륭한 문장가를 구하여 기록함이 좋을까 한다.” 하였다.
대송정(大松亭) 현의 동쪽으로 7리 떨어진 곳에 있다. 동쪽으로 큰 바다를 베개 삼아 백사장이 있는데 푸른 소나무 수백 그루가 그 사장을 덮고 있다.
【학교】 향교 현의 북쪽으로 5리에 있다.
【역원】 대송역(大松驛) 현 동쪽으로 10리에 있다. 혜제원(惠濟院) 현의 동쪽으로 20리 떨어진 곳에 있다. 아미라원(阿彌羅院) 현의 북쪽으로 12리에 있다. 주진원(注津院) 주진(注津)의 북녘 기슭에 있다.
【불우】 원효사(元孝寺)ㆍ오어사(吾魚寺) 모두 운제산(雲梯山)의 동쪽 항사동(恒沙洞)에 있다. ○ 세상에 전하는 말로는, “신라 때, 중 원효(元曉)가 혜공(惠公)과 함께 물고기를 잡아서 먹다가 물 속에 똥을 누었더니 그 물고기가 문득 살아났다. 그래서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내고기(吾魚)’라고 말하고, 절을 짓고 인해서 그렇게 이름 지었다.” 한다. 자장사(慈藏寺) 운제산(雲梯山)에 있다.
【사묘】 사직단 현의 서쪽에 있다. 문묘 향교에 있다. 성황사 현의 동쪽으로 8리 떨어진 곳에 있다. 여단 현의 북쪽에 있다.
【고적】 대왕암(大王巖) 운제산 산마루에 있으며, 현에서 남쪽으로 10리 떨어진 곳에 있다. 바위 틈에서 샘물이 솟아 나는데, 가뭄에 비를 빌면 곧 비가 내렸다 한다.
일월지(日月池) 현의 동쪽으로 10리 떨어진 도기야(都祈野)에 있다. ○ 신라 아달라왕(阿達羅王) 때에 동해 가에 사는 사람이 있었는데, 남편은 영오랑(迎烏郞)이라 했고, 아내는 세오녀(細烏女)라 했다. 하루는 영오가 바닷가에서 해조(海藻)를 뜯다가 갑자기 표류하여 일본의 작은 섬에 이르러서 왕이 되었고, 아내는 그 남편을 찾아 일본에 가서 왕비가 되었다. 그런데 이때 신라에서는 해와 달이 빛을 잃게 되자, 태양을 관측하는 자가 왕에게, “영오와 세오는 해와 달의 정기를 탄 사람들인데, 이번에 일본에 갔기 때문에 이런 괴변이 있는 것입니다.” 라고 아뢰니, 왕이 사자(使者)를 보내어 두 사람을 데려오라 했다. 그랬더니 영오는 말하기를, “내가 하늘에 이르러 곧 세오가 짠 비단을 부칠 것이니, 이것을 가지고 하늘에 제사하오.” 하여 사자가 돌아와 그 말대로 아뢰어 못[池]에서 제사하니 해와 달이 다시 빛을 내었다. 드디어 그 비단을 어고(御庫)에 두고는 따라서 그 못을 이름 지어 일월지(日月池)라 했고, 현의 이름을 영일(迎日)이라 했다 한다. ○ 이제 상고해 보면 고려 초에 임정현(臨汀縣)의 이름을 고쳐 영일현(迎日縣)이라 했으니, 신라 아달라왕 때에 비롯된 것은 아닌 것 같다. 영오의 이야기는 김부식(金富軾)이 지은 《삼국사기》와 권근(權近)의 《동국사략(東國史略)》에는 보이지 않고 다만 《삼국유사》에만 수록돼 있으니 믿을 만한 것이 못 된다.
고읍성(古邑城) 현의 북쪽 7리 떨어진 곳에 있다. 흙으로 쌓았으며, 둘레는 9백 자이나 지금은 없어졌다. 도지부곡(都只部曲) 현의 북쪽 8리에 있다. 고현성(古縣城) 현의 동쪽 15리에 있는데, 흙으로 쌓았다. 둘레가 1천 척인데, 지금은 없어졌다.
【명환】 고려 이인부(李仁夫) 통양포(通洋浦)의 만호로서 현의 감무를 지냈다. 군사에 정숙(整肅)히 했고, 정치를 공평히 하고, 송사(訟事)를 이치에 합하게 하니, 비록 우부(愚婦)라 해도 그의 덕망에 감복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인부의 아버지가 군사에 죄를 지어 사형을 당하게 되었는데, 아버지를 대신하여 죽기를 간청하고 옷을 벗고 형을 받으려 하니 그것으로 석방될 수 있었다.
【인물】 고려 정습명(鄭襲明) 성격이 대범하고 기이하며 위대하였고, 힘써 배워 글을 잘하고 향공(鄕貢)에 급제하였다. 인종(仁宗)조에 여러 번 벼슬하여 예부 시랑(禮部侍郞)에 이르렀고, 의종(毅宗)이 즉위하자 추밀원 지주사에 올랐다. 선조(先朝)의 부탁이 있다고 하여 아는 것은 말하지 않는 것이 없었으므로, 왕이 그를 꺼리는 데다가 김존중(金存中)과 정함(鄭諴)이 밤낮으로 그를 헐뜯었다. 마침 습명이 병을 고하자, 김존중에게 임시로 그 직을 대신하게 하니, 습명이 왕의 뜻을 알아차려 독약을 먹고 죽었다. 정몽주(鄭夢周) 습명(襲明)의 후예이다. 사람됨이 매우 호방하고 뛰어나며, 충효(忠孝)의 대절(大節)이 있었다. 어려서 학문을 좋아하여 게으르지 않았는데, 성리학(性理學)을 정밀하게 연구하여 깊이 얻은 바가 있었다. 공민왕(恭愍王) 9년에 과거에 응시하여 잇따라 삼장(三場)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드디어 제1인자로 발탁되었다. 예문관 검열에 뽑혀 보임되었으며, 여러 번 승진하여 삼한 삼중대광 수문하시중 판도평의사(三韓三重大匡守門下侍中判都評議使司)에 이르렀고, 익양군 충의백(益陽郡忠義伯)에 봉해졌다. 그때엔 국가에 변고가 많았고, 기무(機務)가 번다하였으나, 큰 일을 처리하고 큰 의혹을 처결하는데 말소리와 얼굴빛을 동요하지 아니하고, 왼편과 말하고 오른편에 대답하는데 모두가 합당하게 처사하였다. 많이 갱신하고 시설하였는데 당시에 왕좌(王佐)의 재주가 있다고 칭찬하였다. 뒤에 우리 태조(太祖)를 방해하고자 꾀하다가 조영규(趙英珪)에게 피살되었다. 본조에서는 그 충절을 가상하게 여겨, 대광보국 숭록대부 영의정부사 익양부원군(大匡輔國崇祿大夫領議政府事益陽府院君)을 내리고, 시호를 문충(文忠)이라 하였으며, 그의 자손을 등용하게 하였다. 아들 종성(宗誠)은 벼슬이 이조 참의에 이르렀고, 종본(宗本)은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성균관 사예(成均館司藝)에 이르렀다. 정사도(鄭思道) 나이 19세에 과거 급제하여 감찰규정(監察糾正)과 성균관 사예를 역임했고, 대언(代言)에 발탁되어 지신사(知申事)에 올랐으며, 일성군(日城君)에 봉해졌다. 어머니를 지극한 효성으로 섬겼다. 공민왕(恭愍王) 때에, 모든 천신(天神)에게 빌어 청하는 일이 있는 경우엔, 왕은 반드시 정사도를 임명하였으니, 그 정직함을 취택함이었다.
『신증』 【효자】 본조 전희(田禧) 부모가 죽자 3년 동안 묘 옆에 여막을 짓고 살았고, 뒤에는 그대로 무덤 곁에 살면서 조석으로 곡을 하며 제사하기를 오랜 뒤에도 처음과 같았다. 일이 알려지자 정려하였다.
【제영】 일금상기재초루(一襟爽氣在譙樓) 설장수(偰長壽)의 시에, “산나물, 물고기로 진수성찬을 벌여 놓고, 들바가지에 촌막걸리로 오래 못 돌아간 정 위로하네. 한밤에 깊은 시름 나그네 꿈을 쫓으니, 한소매 시원한 바람 문루에 감도누나. 흥이 나면 붓을 들어 시편을 거듭읊고, 늙어가며 정에 겨워 눈물 자주 흘리네. 이 설음 씻을 길 종당엔 희망 있으련만, 하늘이 기꺼이 이 몸을 구제해 줄 것인지.” 하였다.
일성장적석양루(一聲長笛夕陽樓) 정흥(鄭興)의 시에, “고향이 황폐한 것을 노인들은 부끄럽다지만, 나는 기이한 경관을 사랑해서 또 좀 머물겠네. 두어 폭의 외로운 범선 남포 언덕이요, 한 가락 긴 피리 석양의 다락일세. 부생(浮生)이란 뒤숭숭한 것, 나그네도 다감하고, 지난 일은 유유한 것, 강만이 흐르누나. 흥폐가 본시 오가는 것이라면, 이번엔 백성에게 부요하기 기대하네.” 하였다.
거해만만제천원(巨海漫漫際天遠) 유관(柳觀)의 시에, “앉아서 청산을 마주하면, 다시 부끄러워지네. 하는 일없이 녹만 축내며 오래도 머물러 있네. 시를 지으려다 못 이루고 되려 붓을 던지고, 경개 즐겨 구경하다가 돌아갈 것 잊고 홀로 누대에 기대본다. 큰 바다는 넓고 넓어 하늘에 닿은듯 멀고, 장강(長江)은 출렁출렁 성을 끼고 흘러가네. 야인(野人)의 정회로 푸른 물결 달빛 아래에 오래 앉았으니, 파도 위의 백구야 너는 나를 이해하려느냐.” 하였다.
야활천수벽(野闊天垂碧) 정예(鄭枻)의 시에, “넓은 바다 고현(古縣)에 이어 있으니, 연기와 물결 먼 하늘에 닿았도다. 들이 넓으니 하늘은 푸른 들과 맞닿았고, 파도가 맑으니 해가 붉은 빛을 물들였네. 섬의 왜적들 모두 자취를 감추어서, 마을 풍속 다 농사 일로 돌아갔네. 성지(城池)의 견고함이 무엇에 필요하랴. 인화(人和)만이 성화(聖化)에 통하는 길인 것을.” 하였다.
강원수탄공(江遠水呑空) 강진덕(姜進德)의 시에, “땅이 외지니 연기가 바다에 닿았고, 강이 멀리 흘러 물이 하늘을 삼킨 듯하이. 들이 넓어서 봄바람 담담하고, 처마가 비었으니 아침 햇살 붉게 비친다. 옛날에 일찍이 백전(百戰)을 겪었더니, 이제는 삼농(三農 평지ㆍ산ㆍ못에서 경영하는 농업의 총칭)으로 돌아갔네. 성군의 은택은 동으로 바다에까지 이르러서, 변방의 구석까지 대도가 절로 통하였구나.” 하였다.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방면】 현내(縣內) 끝이 5리이다. 서면 처음은 7리, 끝은 15리이다. 남면 처음은 7리, 끝은 15리이다. 고현(古縣) 동남쪽으로 처음은 7리, 끝은 20리이다. 역면(驛面) 동쪽으로 처음은 7리, 끝은 15리이다. 고읍(古邑) 북쪽으로 처음은 7리, 끝은 15리이다. 부산(夫山) 동북쪽으로 처음은 20리, 끝은 70리인데, 장기현 북쪽 경계를 넘어서 동을배곶의 바닷가에 있다. ○ 도지(都只)부곡은 북쪽으로 8리에 있다.
【진보】 혁폐 통양포진(通洋浦鎭) 북쪽으로 22리에 있으며 수군만호를 두었다가, 뒤에 흥해군(興海郡) 칠포에 옮겼다.
【창고】 읍창(邑倉)ㆍ포항창(浦項倉) 북쪽으로 20리, 통양포 주진(注津) 하류에 있다. 영종(英宗) 8년에 백성을 구제하기 위하여 북관(北關)의 자본으로 창(倉)을 설치하였으며, 별장을 두어서 관리하게 하였는데, 이것은 본도 감사 조현명(趙顯命)의 청에 따른 것이었다.
【진도】 주진(注津) 북쪽으로 15리, 경주 형산포(兄山浦) 하류이며 흥해로 통한다.
【사원】 오천서원(烏川書院) 선조 무자년에 세웠으며 광해주 임자년에 사액하였다. 정습명(鄭襲明) 영일 사람이다. 고려 의종(毅宗) 신묘년에 약을 마시고 죽었으며, 벼슬은 추밀원 지주사였다. 정몽주 습명의 후손이다. 문묘 편을 보라. 정사도(鄭思道) 고려 때 사람이며, 벼슬은 정당문학(政堂文學)이고, 오천군(烏天君)이며,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정철(鄭澈) 자는 계함(季涵)이고, 호는 송강(松江)이며, 본관은 영일이다. 벼슬은 좌의정이고, 인성부원군(寅城府院君)이며, 시호는 문청(文淸)이다. ○ 위 두 사람은 영조 경신년에 별사(別祠)를 세워 그들을 배향하였다.
迎日縣
東至海岸十四里,至長鬐縣界二十二里。南至慶州府界十里。西至同府界十三里。北至興海郡界二十五里。距京都八百六里。
建置沿革
本新羅斤烏支縣。一作烏良友。景德王改臨汀,爲義昌郡領縣。高麗改今名,顯宗屬慶州。恭讓王置監務,以管軍萬戶兼之。本朝太宗時,置鎭,以兵馬使兼知縣事。世宗朝改稱兵馬僉節制使,後改縣監。
官
員 縣監,訓導。各一人。
郡名
斤烏支,臨汀,烏川,烏良友。
姓氏
本縣 鄭,成,周。朱,金,崔。竝來。
形勝
海寇往來之衝。李崇仁《新城記》。
山川
雲梯山。在縣南十二里。鎭山。
陳田山。在縣東南三十里。
大興山。在縣北二十三里。
沙火郞山。在縣東十五里。
沙峴。在縣東十七里。
冬乙背串。在縣東七十三里。又見長鬐縣。
杏岾。在縣西十里。
海。在縣東十四里。
注津。在縣北十五里。卽慶州安康縣兄山浦下流,東流入于海。俗傳每歲冬靑魚必
先産于此,進獻然後諸邑始捕之,以産之多少,占來歲豐歉。
林谷浦。在縣東二十七里。
通洋浦。在縣北二十二里。舊有萬戶營,今移于興海郡漆浦。
伐池。在縣東三里。
竹島。在縣北十六里。有竹林。
土産
蜂蜜,竹箭,出大興山。松蕈,海獺,魴魚,鰱魚,鰒,防風,廣魚,大口魚,紅蛤,銀口魚,靑魚,海衣,藿,礪石,出雲梯山。其品佳。黃魚,錢魚,鯊魚,松魚,洪魚,古刀魚。
城郭
邑城。石築。周二千九百四十尺,高十二尺。內有三井。○李崇仁記:“嘗讀孟氏書有曰‘地利不如人和’,則夫城郭、溝池之於爲治末矣。及讀《春秋》‘城虎牢’之策,求諸書法,蓋未嘗不致意焉。嗚呼!聖賢之論有本末先後之序,何莫非爲世道計也?余之奉使中原也再,道塗所經雖十室之邑,亦皆堡障之有焉。據地設險,寧可少之哉?吾東方有國制度知慕華夏,然朴略少文。自祖宗以來休養生息,民之生且死於大平者,殆將四百餘祀。卒之文不能制治,武不能戡亂,海島之小醜乃敢窺邊,庚寅之寇是已,陵夷至庚申、辛酉,數年間兵禍,有不可勝言者矣。嗚呼!治安之極,勢不能不亂,亦有備禦之無其具耳。迎日,鷄林之屬縣也。介在東表,其治又臨通洋浦,實海寇往來之衝也。自庚寅始告病焉,歷三十年,生聚掃地盡矣。歲己巳,三道都體察使過縣古治周章瞻眺,喟然嘆曰:‘此豈可以遺賊爲資乎?’ 乃議板築之事。旣而
地苦湫隘,移於丘村,築土爲功,雨輒崩壞。歲庚午二月,益陽崔侯以萬夫長來莅于此,職兼縣寄,政令大行,人樂爲用。侯於是報都觀察使曰:‘吾邑之所恃以存焉者城也。城旣壞,是無吾邑也。吾欲修之。’ 觀察使義侯所報,符下旁郡,役千餘夫,仍差前繕工令鄭麟生與侯董事焉。侯以爲功貴經久,宜莫如石。乃遣船夫截流,取兄山之石壘之,可二丈餘,周圍凡幾里。南北二門,門各起樓,南蓋候賓旅、觀稼穡,北,望海洋、察姦寇。以七月肇役而九月斷手焉。自是民舊去者皆復,新至者相繼,環城無廢田矣。今年秋,侯走書於予曰:‘愿有記。’ 且曰:‘名吾二樓。’ 余惟侯方當聖君賢相相與圖新政治之時,出膺廟選,莅玆遐萌,撫字之方,扞衛之具,俱可稱述。揆諸簡策所載,足跡所及蓋無愧也已。余病矣懶矣。雖然,樂道人之善,余志也。且侯之先侍御,余以諸生逮事,故於侯之請,不獲辭。若夫樓之名,則余病間,一馬往游,從侯於樓上,按圖籍而窮
形勝,便當泚筆以書。侯名自源,階奉順大夫,落落以功名自喜。都觀察使,樂安金氏,名湊;都體察使,宗室,名康。”
烽燧
冬乙背串烽燧。東應長鬐縣獐谷,北應興海郡知乙山。
沙火郞山烽燧。西應慶州兄山,東應長鬐縣磊城山。
樓亭
倚雲亭。在客館北。
寅賓堂。在倚雲亭西。成化庚子縣監魚得湖建。〔新增〕 金宗直記:“東海之濱有縣曰迎日,或稱臨汀,蓋新羅東表之地。新羅初,渾沌未鑿,制度無聞,及其中葉,賢君繼作,始通中國,稽考彌文。朝日夕月,載諸《國語》,賓出餞納,紀於《堯典》,以爲古昔帝王欽昊天、授人時,其政不過如斯而已。雖無祖宗之故,亦可義起,官置太史,臺崇瞻星,而曆象圭測之制,隨以寢備。于其時
是縣當其暘谷之次,故得號以是焉。高麗太祖於代德沿革之際,捨臨汀而復今名,豈無謂歟?嘗聞縣之東十里有都祈野,有日月池,至今人稱新羅祭天之地,此其明驗也。諺所傳迎烏、細烏夫婦之說,何其不經之甚耶?羅人之好怪類是,不足徵也。成化十三年,中原魚侯得湖以武藝吏能,剖竹于玆,德孚而人信,海晏而歲穰。每徘徊倚雲亭,以寄勝槪,又欲使賓客之來遊者,寒於斯暑於斯,故更構堂于亭之右,而涼房燠室具焉。塗墍旣,以書抵余請記。余嘗泛蓮于蔚城,因蒐兵至其縣,而登所謂倚雲亭者,縣人曰:‘此舊李使君知命所作也。’ 余縱目觀之,南五里許有山曰雲梯,巑屹紆鬱,噴雲吸霧,山中有小性居士之遺蹟焉。東北七里有大海,鯨濤接天,蜃樓成市,卽日本之西涯也。山若海之間,田原廣膴,川澤相重,有丘曰皮幕,有亭曰大松,沙洲逗白,松竹送靑,籬落桑麻,映帶遠邇,合形輔勢,以效技於譙門之外。暮而宿焉,明
日昧爽徙倚亭上,翹首以望東方,雲水一色,乍明乍暗,須臾紅光騰起數十丈,而日輪躍出,升于天矣。余駭而嘆曰:‘今日之瑰觀,眞符於縣名矣。’ 李侯,前輩豪傑之士也。故其所規制能覰天之奧若此。今侯後李侯幾四十年,而能補李侯之未及而潤色之,斯堂之名,不可苟同於亭也。別以寅賓爲扁,以配夫縣名。噫!海內濱海之地非一,而登、萊之嵎夷爲測影之所;海東濱海之地亦非一,而鷄林之臨汀爲朝日之地。侯雖非羲、和之官,而六載之間,無一日不賓于扶桑之杲日,則吾所云不其中的矣乎?侯苟以爲可,則斯記可傳;否,則更求之當世之能文者而發揮焉可也。”
大松亭。在縣東七里。東枕大海有白沙汀,蒼松數百株蔭其汀。
學校
鄕校。在縣北五里。
驛院
大松驛。在縣東十里。
惠濟院。在縣東二十里。
阿彌羅院。在縣北十二里。
注津院。在注津北岸。
佛宇
元曉寺,吾魚寺。俱在雲梯山東恒沙洞。○世傳新羅釋元曉與惠空,捕魚而食,遺矢水中,魚輒活指之曰“吾魚”。構寺,因名。
慈藏寺。在雲梯山。
祠廟
社稷壇。在縣西。
文廟。在鄕校。
城隍祠。在縣東八里。
厲壇。在縣北。
古跡
大王巖。在雲梯山頂。距縣南十里。巖泐間有泉沸出。歲旱禱雨,輒應。
日月池。在縣東十里都祈野。○新羅阿達羅王時,東海濱有人,夫曰迎烏郞,妻曰細烏女。一日迎烏採
藻海濱,忽漂至日本國小島爲王,女尋其夫至其國爲妃。是時新羅日月無光,日者奏云:“迎烏、細烏,日月之精。今去日本,故有斯怪。” 王遣使求二人焉,迎烏曰:“我到此,天也。乃以細烏所織綃付之,令用此祭天。” 使者來奏如其言,而祭之於池上,日月復光。遂藏綃於御庫,因名其池曰日月池,縣名曰迎日。○今按:高麗初改臨汀爲迎日,則非始於新羅阿達羅王時矣。迎烏之說不見於金富軾《三國史》、權近《東國史略》,而獨於《遺事》載之,無足取信。
古邑城。在縣北七里。土築。周九百尺。今廢。
都只部曲。在縣北八里。
古縣城。在縣東十五里。土築。周一千尺。今廢。
名宦
高麗 李仁夫。以通洋浦萬戶監縣務。軍事整肅,政平訟理,雖愚婦,莫不感其德。仁夫之父嘗坐軍事臨刑,請代父死,解衣受刑,乃得釋。
人物
高麗 鄭襲明。倜儻奇偉,力學能文。以鄕貢登第,仁宗朝累官至禮部侍郞,毅宗卽位進樞密院知奏事。自以先朝顧托,知無不言,王憚之,金存中、鄭諴日夜短之。會襲明告病,以存中權代其職,襲明揣知王意,仰藥而死。
鄭夢周。襲明之後。爲人豪邁絶倫,有忠孝大節。少好學不倦,精硏性理之學,深有所得。恭愍王九年應擧,連魁三場,遂擢第一人。選補藝文檢閱,累官至三韓三重大匡、守門下侍中、判都評議使司,封益陽郡忠義伯。時國家多故,機務浩繁,處大事、決大疑,不動聲色,而左酬右答,咸適其當。多所張設,時稱王佐之才。後謀危我太祖,爲趙英珪所殺。本朝嘉其忠節,贈大匡輔國崇祿大夫、領議政府事、益陽府院君,諡文忠,錄其子孫。子宗誠,官至吏曹參議;宗本,登第,官至成均司藝。
鄭思道。年十九登第,歷監察糾正、成均司藝,擢代言,進知申事,封日城君。事
母至孝。恭愍朝,凡有禱于上下,必命思道,取其正直也。
〔新增〕 孝子
本朝 田禧。父母歿,皆廬墓三年。後仍居墓側,朝夕哭奠,久而如初。事聞旌閭。
題詠
一襟爽氣在譙樓。偰長壽詩:“山肴海錯托珍羞,野榼村醪慰久留。半夜窮愁侵客夢,云云。興來落筆詩篇重,老去傷情涕泗流。昭雪此冤終有望,皇天還肯濟吾不?”
一聲長笛夕陽樓。鄭興詩:“故鄕凋弊老人羞,我愛奇觀又小留。數幅孤帆南浦岸,云云。浮生擾擾客多感,往事悠悠江自流。興廢由來相往復,民今富庶可期不?”
巨海漫漫際天遠。柳觀詩:“坐對靑山更起羞,却將尸素久淹留。尋詩未得還投筆,愛景忘歸獨倚樓。云云,長江衮衮抱城流。野情偏坐滄波月,波上白鷗容我不?”
野闊天垂碧。
鄭枻詩:“滄溟連古縣,煙浪接遙空。云云,波明日浸紅。島倭皆屛跡,村俗盡歸農。何用城池固?人和聖化通。”
江遠水呑空。姜進德詩:“地偏煙接海,云云。野闊春風淡,簷虛旭日紅。昔曾經百戰,今得就三農。聖澤東漸海,邊陲道自通。”
[주-D001] 有 : 《東文選ㆍ迎日縣新城記》 및 《陶隱集ㆍ迎日縣新城記》에는 “由”로 되어 있다. 文脈에 根據할 때 “由”가 더 妥當한 듯하다.[주-D002] 洋 : 底本에는 “津”으로 되어 있다. 本縣 山川,《東文選ㆍ迎日縣新城記》,《陶隱集ㆍ迎日縣新城記》에 根據하여 修正하였다.[주-D003] 苦 : 底本에는 “若”으로 되어 있다. 初刊本,《東國輿地勝覽》,《東文選ㆍ迎日縣新城記》,《陶隱集ㆍ迎日縣新城記》에 根據하여 修正하였다.[주-D004] 村 : 《陶隱集ㆍ迎日縣新城記》에는 “北”으로 되어 있다.[주-D005] 可 : 《東文選ㆍ迎日縣新城記》 및 《陶隱集ㆍ迎日縣新城記》에는 앞에 “高”가 더 있다.[주-D006] 十 : 底本에는 앞에 “二”가 더 있다. 本縣 古跡,《續東文選ㆍ迎日縣寅賓堂記》,《佔畢齋集ㆍ迎日縣寅賓堂記》에 根據하여 削除하였다.[주-D007] 有 : 《續東文選ㆍ迎日縣寅賓堂記》 및 《佔畢齋集ㆍ迎日縣寅賓堂記》에는 앞에 “野”가 더 있다.[주-D008] 下 : 底本에는 “上”으로 되어 있다. 初刊本 및 《東國輿地勝覽》에 根據하여 修正하였다.
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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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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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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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자 |
智伯虎 |
井同 |
可都 |
彬 |
東沖 |
南火 |
北星 |
익언 |
基完 |
嘉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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柄吉 |
淳朴 |
德보, 德建 |
忠國 |
護峰 |
海活 |
完琡 |
君紅 |
汲先 |
枝明 |
季敏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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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昌 |
文琓, 文琡 |
臨水 |
强 |
玻東 |
裕 |
輯, 年 |
穆, 文 |
豊國, 遜國 |
필良, 宗殷 |
友聖, 佶模(迎日人) 僑林(東來人)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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師孟, 師仲,師叔 師季 |
遊天, 普天(溫陽人) 宣卿(迎日戶長) |
玄成,玄敏 克儒(1세조) 襲明(포은파) |
審. 傑, 僖(초계인) |
達康 |
景文 |
性之 |
遜卿,遜位(하동인) |
克中,克溫(광성인) |
珍厚(경주인) |
2. 연일정씨 세계표
연일정씨의 원류는 지백호로 하나, 연대 확인이 어려워 지백호의 원손인 종은(宗殷)을 도시조로 하고 후손인 의경(宣卿)이 영일호장을 역임하였다. 그리고 영일현백으로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은 본관을 영일이라 하였다. 그러나 연일, 영일, 오천을 본관으로 쓰고 있으나 근래에는 영일을 통일해 사용하고 있다. 영일정씨 시조는 고려시대 추밀원 지주사를 지낸 정습명(襲明: 1096~1151)이다. 포항시 대동면 남성리 제단을 만들어 매년 4월 첫째일요일에 향사를 지내고 있다.
시조의 고향을 관향(貫響) 또는 본관(本貫)‧ 본(本)‧선향(先鄕)이라고 하는데 영일현(迎日縣)임을 나타내는 것이며 이때 영일(迎日)을 시조의 고향으로 삼아 영일정씨라 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영일현은 후세의 명칭이며 신라시대는 근오지현(斤烏支縣)‧ 오량우현(烏良友縣)‧ 임정현(臨汀縣)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선조의 사적은 고려 때부터 점차 명확하게 사용하였다. 고려사 지리지에 신라때의 임정현은 연일현(延日縣)이라하였고, 조선에서도 역시 연일현이라 하였다. 청구씨보(청구씨보)‧만성대동보(萬性大同譜)‧조선씨족동보(朝鮮氏族統譜) 등에 연일정씨(延日鄭氏)라고 하였다.
정종은(鄭宗殷: AD 654~ 시조, 신라 태종 무열왕시 언사적, 20세 실전, 연의공)→의경(宜卿: 호장공)→극유(克儒: 1세조, 고려, 호장공의 21세손, 감무공)→창우(昌祐: 2세, 진사)→균지(均之: 3세, 군기감, 평장사)→윤(潤: 4세, 지제교)→유(侑: 5세, 종부서령, 의곽공)→사도(思道: 6세, 문정공)→홍(洪: 7세, 공간공)→연(淵: 8세, 정숙공, 병조판서)→ 자원(自源: 9세, 판결사공: 장예원판결사)→함(涵: 10세, 장악원, 첨정공)→ 난연(鸞年: 11세, 성균관진사공)→공(珙: 12세, 양지현감공)→충방(忠邦: 13세, 진사)→낙(洛: 14세, 집의공)→석기(碩基: 15세, 승지공, 통덕랑)→ 무(堥:16세, 공주목사, 공주공)→정하언(鄭夏彦: 17세, 대사간)→ 정 樹(18세 杆)→ 정조영(19세,鄭祖榮)
→鄭埴(20세堉)→정필현(21세, 鄭泌鉉)→鄭洵(22세,鄭奧)→정 달원(23세, 達源)→정운석(24세 雲錫)→정우택(25세 鄭禹澤)→정태식(26세鄭泰植)→정선용(27세,鄭秀溶)→정하늘(28세 정하늘)
3. 본관지 연혁
연일(延日 또는 迎日)은 본래 신라의 근오지현(斤烏支縣)이다. 경덕왕때 임정현(臨汀縣)이라고 개칭 의창군을 령현(領縣)으로 만들었고 고려조에 영일로 고쳐 현종때 경주로 소속시켰다.
조선조 태종때 진(鎭)을 두어 병마사가 지현사를 겸하게 하였으나 세종때 병마첨절제사로 고쳤다가 후에 현감을 두었다.
1895년 군이 되었고 1914년 청하, 장울, 해남의 3군을 합하여 1955년 영일군과 포항시로 유지하였으나 1999년 영일군을 흡수하여 포항시로 승격한 후 오늘에 이르렀다.
4. 공주 국동에 연일정씨 입향 유래
1) 국동마을
마치 귓속마을 같다는 산골마을 국동리는 산간마을로서 전기와 전화가 다른 곳보다 매우 늦게 설치되었으며 버스길도 2000년부터 만들어진 오지의 마을이다. 동쪽으로 이인면 달산리와 서쪽으로 탄천면 송학리, 남쪽으로 견동리, 대학리, 운곡리와 접하고 있다.
인구와 가구수를 보면 국동 25호 신전25호 오용골과 성머리 8호 도합 58가구로 인구수도 158명으로 그것도 평균 70세 고령의 인구로 현존하고 있다.
마을 변천사를 보면 백제건립시 國社於俊峯(국사어준봉) 즉 국사봉 내에 있는 마을이라고 명명하고 동국산총록에 전해오는 신라국사 도선편에 역산천 매유봉밀특수자필등람이라 칭하였다. 조선의 숙종 시에는 강(康氏)씨가 거주하여 마을이름도 강국동(康菊洞)이라 하였다. 공주목사 정무공이 입향후 동명을 보면 國師洞(자고전래지명), 菊洞(증고왕고대련공), 菊潭(대령공이전), 국당(菊塘), 국당(菊堂), 국사당(菊士堂)이라 칭하여 내려오고 있다.
2) 연일정씨 입향유래
공주시 탄천면 국동리는 연일정씨의 오래 된 터전이다. 연일정씨 공주 세거는 공주목사를 역임한 정무(鄭堥, 1641-1705)공이 낙향을 고려하여 마련한 당대 지역 최고의 풍수명당이라 전래되고 있으며 후손들은 조선조 후기까지 관직을 화려하게 이어옴으로서 정무 목사의 혜안을 짐작할 수 있게 하였다 지금까지 350여년 간 연일정씨(국동정씨)의 향리로 지켜오면서 화려했던 지난날들을 역사의 한 장으로 장식 하면서 국동리 국사봉의 중후한 자태아래 목사공의 품(品)자형 묘역이 과연 명당이라는 탄성을 삼키며 주변 하늘을 우러러 연일정씨가 먼 훗날 융성의 미래로 웅비될 수 있기를 염원하고 있다.
국동 연일정씨의 세계(世系)는 정무의 셋째 아들 정하언(鄭夏彦)공의 후손으로 이어졌다. 이는 첫째아들과 둘째아들이 일찍 요절하였기 때문이다. 속칭 ‘국동정씨’로 널리 알려질 만큼 입향조 이후에도 꾸준하게 과거에 합격하여 관직에 진출한 인물을 다수 배출함으로서 향촌사회에서 씨족의 입지를 확고히 하였다.
그리고 국동에 입향한 이래 인근 명가 간에 교류도 많았다. 그 주요내용을 보면 첫째, 인근의 명가 (풍양조씨, 해주오씨, 파평윤씨 등)와의 결혼으로 사둔관계를 맺었다. 둘째, 학문을 논하며 유학을 탐구하였다. 셋째, 타고난 재질을 인근 인재들에게 전수하였다. 교류사례를 보면 첫째, 신풍면 풍양조씨를 정하언 공은 조석명의 딸과 정윤원(鄭崙源 1909~?)공, 주사 정오(鄭墺, 1859-1941)공, 정동원(鄭東源, 1916~?)공도 풍양조씨와 결혼(1721년)하여 사위가 되었다. 정로현 공은 1864년(고종1년) 풍양조씨 조탁영 등 6인이 결성한 과계서에 서명한 일인으로 전하여지고 있다.
둘째, 해주오씨와 교류는 형조판서 정조영(鄭祖榮, 1763-1827) 공과 정집(鄭潗, 1688~1891)공, 양양도후부사 정필현(鄭泌鉉, 1820-1899) 공, 서화가 정술원(斗山 鄭述源, 1885-1959)공은 해주오씨 부인과 결혼하여 사둔관계를 맺었다.
셋째, 파평윤씨와 교류는 생원 정제현(鄭濟鉉, 1822~1868)공, 정위(鄭湋, 1843~1889)공, 진사정순(鄭洵,1855-?)공과 정일원(鄭逸源, 1880~1945)공, 정술원(斗山 鄭述源)공, 정운소(鄭雲沼)공, 정운만(鄭雲萬)공, 무첨지 정완(鄭浣)공, 무사과 정호(鄭豪)공은 파평윤씨와 부인과 결혼하여 사둔관계를 맺었다. 넷째, 정술원(斗山 鄭述源, 1885-1959)공은 산수화의 ‘미점법(米點法)의 화법을 유구에 사는 서세원(서울대교수)까지 가르치며 후진 양성을 하였다. 그 외 공주 명가들과의 여러 가지 풍류에 대하여 교류가 많았다.
3) 배출인물(AD 1700~1900)
국동리에서는 공주목사 정무의 입향에 이어 의주부윤 대사간 을 역임한 정하언(1702-1769)과 형조판서 정조영(鄭祖榮, 1763-1827)이 있으며, 조단문예 증이조판서 정수(鄭樹, 1727-1757), 해남군수 정간(鄭杆, 1733-1813), 연일군수 정주(鄭柱, 1740-1799), 통덕랑 정능(鄭㘄, 1740~1744), 통덕랑 정우영(鄭祐榮, 1769~1797), 아산군수 정지영(鄭祉榮, 1742-?), 천안군수 정식(鄭埴, 1780-1856), 목천현감 정육(鄭堉,1795-1863), 경상중군 정숙(鄭塾, 1819~1863), 양양도호부사 정필현(鄭泌鉉, 1820-1899), 생원 정제현(鄭濟鉉, 1822~1868), 생원 정협(鄭埉, 1826-1868), 첨사 정유현(鄭遊鉉, 1838-1914), 진사 정순(鄭洵, 1855-?), 주사 정오(鄭墺, 1859-1941), 첨사 정은(鄭溵, 1862-1926), 주사 정박현(鄭博鉉, 1852-1920)이 배출되었다.
연일정씨의 국동리 정착과 관련하여 가장 중요한 인물은 역시 공주목사 정무이다. 그는 승지 정석기(鄭碩基, 1607-1647)와 남원양씨의 셋째 아들로 1689년(헌종 10)에 29세의 나이로 생원진사시에 합격하였다. 이후 운봉과 화순현감, 함양군수, 남원부사, 강화군수 등을 두루 거쳐 공주목사가 되었으며 국동에 정착하였다. 특히 정무가 화순현감 재직(1681-1686)시 공적을 기리기 위해 새겨 놓은 마애비가 전남 화순군 동면 운동리 신운동 마을에 있다. 함양군수 재임시절(1692년)에는 왜구의 침입으로 소실 된 학사루를 중수하였다. 가선대부로 이조참판에 추증되었으며, 6명의 아들을 두었는데 이 중 셋째 아들 정하언의 후손들이 공주 국동리에 일가를 이루었다.
정무 공의 입향에 이어 국동리 연일정씨의 후계를 이어간 정하언의 행적에 대해서는 외손 임천상(任商天)의 행장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정하언(鄭夏彦, 1702-1769)의 자는 미중(美仲), 호는 지당(止堂)‧옥호자(玉壺子)로 공주목사 정무와 대사헌 노숙동(盧叔仝)의 후손 풍천노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일찍이 조실부모하고 두 형마저 일찍 세상을 떠나자 인근 부여군 빙고치에 살던 형 정하성(鄭夏盛)의 집에서 자랐다.
그는 어려서부터 영특하고 학업에 출중하였으며 1735년(영조 11) 문과에 급제하였다. 이후 의주부윤 삼척부사 병조참의 여주목사 등 여러 관직을 근무하였다. 영조와 함께『속대전(續大典)』 편찬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였고, 내직으로 좌부승지와 대사간을 역임하고 특히 문장과 서예가 뛰어나 각종 어제(御製)의 편제는 물론 홍화문(弘化門)의 편액을 쓰기도 하였다. 동해시 두타산 밑 무릉계곡에 ‘무릉선원 중대천석 두타동천(武陵仙源 中臺泉石 頭陀洞天)’이라 새겨진 글씨와, 유실된 서울 수락산 밑 명덕동 ‘수옥대(漱玉臺)’ 와 부여 ‘청풍정(淸風亭)’이 그의 작품이다. 그리고 이괄 난세를 피해 공주에서 은신한 인조 임금이 피신 시에 쌍수성 공복루를 중수한 것에 대하여 중수사유 및 중수과정에 소요된 인역과 경비를 기록한 중수기가 공산성 만하루(挽河樓)에 있다. 유고로『지당집(止堂集)』6권이 있으며, 국동에 부인 조석명(趙錫命, 1674-1753)의 딸 풍양조씨(1707-1756)와 합폄한 묘소가 있다
정조영(鄭祖榮, 1763-1847) 자는 자승(子承), 호를 국사(菊士)로 정간(鄭杆)의 장남이나 정수(鄭樹)의 양자로 입적하였다. 문과에 장원급제하여 형조판서에 이르렀으며, 묘소는 역시 국동에 있다. 문집 5권이 전해지고 있다. 이 외에도 아산군수 정지영(鄭祉榮) 등 생원‧진사시 급제자 수도 17명에 이른다.
한편 국동에서는 두 명의 걸출한 서화가가 배출되기도 하였는데 정조영의 현손들로 두산 정술원(斗山 鄭述源, 1885-1959)과 현암 정성원(玄菴 鄭成源, 1881-1962)이 있다. 이들은 재종간으로 두 화가 모두 향사에 묻혀 작품 활동을 계속해왔는데 정술원은 명절을 빼놓고는 거의 집을 비울 정도로 방랑이 심했다고 한다. 정술원은 절지(折枝), 영모(翎毛), 인물(人物)에 이르기까지 많은 작품을 남겼으나 그 중에서도 산수화(山水畵)에 가장 능하였다. 특히 그의 산수화는 ‘미점법(米點法)을 사용하되 능히 고인의 필의(筆意)도 살려 냈다’고 높이 평가되고 있다. 정성원 역시 서예와 그림 모두에 뛰어났으며 행서(行書)와 산수화로 유명했다. 유작으로 부여팔경도(夫餘八景圖) 등이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