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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행정구역상으로 가음치를 지나 활성산 직전 백룡지맥분기봉인 428m봉에서 금정면과 영암읍의 면계에 닿고 이 면계를 따라 활성산까지 진행한다. 가음치에서 도로를 따르고 기찬랜드 이정표 삼거리에서 시멘트도로를 따라 송장고개를 넘어 금오마을을 지나 활성산 아래 옛 서광목장까지 계속 도로를 따라 기맥을 우회하는 경우가 많다.
송장고개입니다. 송장은 없고 송장등(무덤)은 보입니다. ㅋ
금오마을회관 직전에 있는 당산나무입니다. 호랑이가 이 나무 아래서 살았다고 호랑이나무라고 한다는데 가음치의 그 호랑이가 여기 호랑인가 봅니다.^^
♤ 송장고개(221m)
가음치에서 금정면으로 가는 23번국도에서 송장마을을 지나 영암목장으로 가는 임도가 갈리는 길목을 송장고개라고 하는데, 송장고개라는 지명은 연소저수지 윗쪽으로 금오마을이 있는데, 이 지역이 풍수지리상으로 "금오(金烏)"란 뜻의 금까마귀가 송장을 쪼아 먹는 형국이라 하여 송장고개라 부른다 한다. 가음치도 '덤재'라 하여 활성산 가는 능선이 무덤처럼 생겼다 하여 앞의 '무'자를 빼고 그냥 '덤재'라 한다는데, 송장고개와 송장능선 그리고 덤재 등의 지명 모두가 풍수지리와 관련된 죽음과 관계된 지명이다.
정상으로 가면서 태양열발전단지도 같이 있는게 보입니다.
♤ 영암목장/ 옛 서광목장
서광목장은 섬유산업으로 부를 창출한 서광섬유산업의 소유였으며, 우리나라에서 대관령에 있는 삼양목장 다음으로 큰 목장이었으나, 모기업이 자금 악화로 부도가 나면서 소유권이 다른 기업으로 넘어 갔고, 그 기업에서 골프장을 조성하려 하다가 주민들의 반대로 방치된 상태라고 한다.
- 개천산에서 나주와 헤어져 남진하며 영암읍 금정면을 흐르던 기맥은 국사봉에서 장흥군 유치면에 잠깐 닿고, 방향을 틀어 서진한 땅끝기맥은 가음치를 지나 백룡지맥분기봉에서 영암읍 면계에 닿고 방향을 틀어 잠시 면계를 따르다가 활성산에서 남쪽으로 방향을 틀어 영암읍을 관통합니다. 돈밧재에 이르러 강진군 옴천면에 닿습니다.
물을 공급받으로 금오마을로 우회를 하다보니 백룡지맥분기점을 다녀와야 했습니다만 그냥 통과~
♤ 백룡지맥(白龍枝脈)분기봉(418m)/ 면계(영암읍 금정면 - 영암읍)
땅끝기맥 활성산 북쪽 1.3km지점의 약 418m봉에서 북서쪽으로 분기하여 235.7m봉을 지나 5.4km 떨어진 백룡산(420.8m, 옥룡지맥 분기)에 가서 산줄기는 다시 두 갈래로 갈라진다. 남쪽으로 가는 산줄기는 산장산(121m), 마산(159m), 13번국도, 호산(156m), 천제(天祭)산((58m), 태산봉(83.9m)을 지나며 염암천과 영산강이 만나는 두물머리 구산리에서 영암천의 좌측(북측) 분수령이 되는 도상거리 30.6km의 지맥이고, 북쪽으로 가는 산줄기는 조리봉, 오봉산(162m), 두류산(106m), 옥룡산(133m)을 지나며 영산강과 만나는 두물머리인 삼포천의 좌측(북측) 분수령이 된다. 신산경표는 활성산 북쪽 분기점-백룡산-태산봉으로 가는 31km되는 산줄기를 백룡지맥이라 하고, 백룡산에서 북쪽 옥룡산으로 가는 42km되는 산줄기를 옥룡지맥이라 했다. 활성산에서 백룡산까지의 5.4km를 세력이 더 큰 옥룡지맥으로 보내면 아래쪽 백룡지맥은 30km가 안되어 지맥급에 오르지 못할뻔 했으나 두 산줄기 공히 영산강을 향해 서진하며 중반 이후 영산강에 가까워지면서 영암과 나주의 벌판을 달리게 되고 해발 100m가 채 안되는 그야말로 비산비야로 겨우 이어간다. 마을과 인접한 부분은 대부분 도로와 농로가 마루금이 되고 옛 지도와 비교해 보면 영산강변은 매립으로 새로 생긴 땅으로 옥룡지맥은 옥룡산 아래 몽탄(몽탄진)마을을 끝으로 보는데 이의가 없고, 백룡지맥은 끝부분 원구산 여시머리 이후로 논으로 표시된 부분은 예전엔 강이었다. 그러므로 영암천의 하구가 목표라면 태산봉(봉태산)에서 아래로 내려가 학림마을 딴섬(도야지섬) 앞에서 끝나는게 맞는다 하겠다.
♤ 백룡지맥 개념도
♤ 영암풍력발전단지
영암풍력발전단지(靈巖風力發電 團地)는 영암군 금정면 연소리 산340번지 일대에, ‘영암풍력발전㈜’가 모직과 여성복으로 유명했던 ‘서광’이 운영했던 140만 평의 목장을 인수해 풍력발전기 2mw급 20기를 건설해 가동하고 있는데, 이 전력은 매년 약 2만 세대가 사용 가능한 9만㎿/h의 전력을 생산할 수 있다. 풍력발전은 신재생 청정에너지이지만 국내 발전량 중 신재생에너지 비율은 1%를 겨우 넘고, 이 중 풍력발전은 8.5%에 그치고 있으므로 앞으로도 계속 풍력발전 비중이 더 높아질 것으로 예상된다. 그러나 처음에는 해안가 위주로 건설되던 것이, 발전기 외에 전력을 보내기 위한 송전탑과 변전소 설치를 위해 더 넓은 토지가 필요해지면서 해발 200~600m의 중간 산지로 이동하는 양상을 보이는데, 사업자들은 토지 확보가 수월한 마을 공동목장 등을 노리게 되었다. 때문에 주민들이 사는 곳과 인접한 곳에 세워지다 보니 소음과 지가 하락, 경관 저해 등의 문제가 야기되어 주민들과 새로운 갈등의 불씨가 되고 있다. 풍력발전기의 높이는 날개가 수직을 이룰 경우 120m에 이르고, 날개 1개의 길이가 40m가 넘으며 무게도 5톤이 넘는 거대한 구조물인데, 기종에 따라 다르지만 분당 30회씩 회전하면서 나는 ‘부웅 부웅’하는 굉음은 심각한 소음이다.
정상에 군 통신부대와 kt활성산중계소 기지국이 있습니다. 아 그리고 가시잡목 숲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시멘트길만 따라가면 괜찮겠던데 가시잡목을 헤치고 가야 하네요.
♤ 활성산(活城山, 498m)/ 면계(영암군 금정면 - 영암읍)
전남 영암군 영암읍 장암리와 한대리 그리고 금정면 연소리의 경계에 있는 산으로, 정상에는 고원처럼 너른 구릉이 형성되어 있으며, 옛날에는 산성이 있었고 최근에는 목장이 있었다. 활성산이란 지명은 이곳에 있었던 활성산성(活城山城)에서 유래 되었다고 한다. 임진왜란 때에는 활쏘는 훈련장으로 쓰였으며, 지금도 정상 주위에는 토성의 흔적이 남아 있으며, 예전에는 남활성산이라 불렸다고 한다. 활성산 동쪽의 영암읍 한대리와 금정면 연소리 골짜기는 탐진강 수계의 '유치천'이며, 서쪽의 영암읍 농덕리와 장암리 계곡은 영산강 수계의 영암천이다. 한편 활성산의 세 갈래 능선은 북동쪽은 국사봉을 거쳐 궁성산으로, 북서쪽은 백룡산으로, 남쪽은 월출산으로 이어진다. 정상에는 아무런 표식도 없고 산불감시초소와 예전에 산불감시초소로 썼던 폐철재가 을씨년스럽게 정상을 지키고 있다.
영암읍의 야경입니다. 여기 지나는데 가시잡목 굉장했습니다. 오도가도 못하고 갇혀서 뚫느라고 고생했네요.
♤ 달뜬봉(屯德峙, 384m)/ 면계(영암군 금정면 - 영암읍)
영암군 영암읍 장암리와 한대리, 금정면 연소리 사이에 있는 봉우리로 여암 선생의 山經表에는 둔덕치 영암동남분이기(屯德峙 靈巖東南分二岐)로 표기되어 있다. 이 곳 봉우리로 보름달이 뜬다 해서 붙여진 이름인 듯 하다. 즉 영암 동쪽에서 남쪽으로 두 가지가 뻗어 있다는 뜻으로, 영암군 영암읍에서 장흥군 유치면을 넘나드는 고개이다. 둔덕치는 둔덕마을에서 한대리로 넘어가는 고개로 옛날에 병사들이 활성산을 점령할 때 집결하였던 곳으로 둔덕 위에 있다고 해서 붙여진 지명이란다.
♤ 둔덕치(屯德峙)/ 둔덕산
둔덕치는 전남 영암군 영암읍 학송리, 농덕리, 한대리 일대에 위치한 산이다. 산 동쪽에서 유치천이 발원해 장흥호로 흘러 들어가며 서쪽에서 발원한 하천이 둔덕제와 선황제 등을 이룬다. 「만기요람(영암) 」에 "둔덕치(屯德峙)는 장흥과의 경계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대동여지도(19첩5면)」에 나주와의 경계인 영원치(嶺院峙)의 남쪽, 화치(火峙) 북쪽에 둔덕치가 묘사된 것을 비롯해 조선 후기 대부분의 지도에 둔덕치 혹은 둔덕산(屯德山)으로 기재되어 있다. 고 하여 '달뜬봉'을 '둔덕치'로 부르기도 한것으로 보인다.
♤ 강진군 옴천면
옴천면은 전라남도 강진군의 북쪽 끝에 위치한 면으로 북으로 땅재를 경계로 영암군과, 서남쪽으로는 주봉(302m)을 사이에 두고 강진군 작천면에 접한다. 남으로는 깃대봉과 옥녀봉을 사이에 두고 병영면과, 동으로는 장흥군과 접한다. 면의 북단인 월곡리 일원에서 발원한 옴천천이 북서쪽에서 남동쪽으로 흐르면서 영산천, 황곡천, 신덕천 등을 합류한 후 장흥군으로 흘러간다. 옴천면은 본래 연천(燕川)이라 하였으나, 주민들이 각종 질병을 앓게 되자, 불경에 나오는 옴자(唵字)를 써서 옴천(唵川)이라 하였다고 전한다. 이 하천에서 면 지명이 유래하였다. 강진군 옴천면은 “시간이 흐르지 않는 초 미니 면”으로 얼마나 실리가 없었으면 “옴천면장 할래~ 마을이장 할래” 라는 말이 나왔을까 싶다. ‘옴내’로 불리는 “옴천(唵川) 이라는 지명은 이 면의 들녘을 적시며 흐르는 맑은시내를 가르킨다. 월출산의 지맥인 활성산에서 발원한 제비내(燕川)와 깃대봉에서 발원한 세류천이 오추에서 합류하여 장흥 유치의 탐진강으로 흐른다. 우리나라에서 이 옴(唵)자가 들어간 지명은 옴천이 유일하다. 원래 이 옴(唵)은 범어 'AUM' 음역자로 불교의 법회때 꼭 암송하는 그래서 반야심경의 첫 소리는 옴(AUM)으로 시작해서 사바하(SVAHA)로 끝나며, 진리의 형성을 뜻하는 창조.유지.파괴로 해석된다. 이는 옴천이 신성한 지역으로 조용하고 맑은 물이 있어, 고승들이 불경을 외우고 참선할수 있는 최적지라는데서 비롯된것으로 보인다.
엄밀히 도로가 넘어가는 돈밧재는 영암읍이고, 약 300m 올라서야 옴천면과 경계입니다.
♤ 돈밧재(錢田峙, 280m)/ 전전치/ 835번지방도/ 군계(영암군 영암읍 - 강진군 옴천면)
영암군 영암읍과 강진군 옴천면의 경계에 있는 봉우리로, 835번 지방도가 지나며 한적하고 높은 고개여서 산적들이 재를 넘을 때 돈을 받았다고 하여 돈받재로 불렀다는 설이 있으며, 이곳에서 온천이 나와 언젠가는 돈밭(錢田)이 될거라 하여 불렀다는 설이 있다. 또 다른 설은 어느 부자가 가파른 고개를 넘기위해 닷냥의 돈을 주고 업혀서 넘었다고 하여 닷돈재라고 불렀다는 설이 있다. 마을사람들에 의하면 옛날 도둑들이 숨겨논 돈이 돈밧재 어디에 묻혀 있다고 한다. 예전에는 돈밧재에 약 20여 가구가 살았던 월송정(月松亭) 마을이 있었지만 현재는 아무도 살지않아 폐촌이 되어버렸고, 현재는 835번지방도(장강로)가 건설되어 있어서 영암에서 장흥으로 갈 때 이용되고 있다.
강진군 작천면이 보유한 두개의 삼면봉 332m봉과 307m봉의 거리는 단지 320m뿐이 되지 않습니다.
♤ 332m봉/ 삼면봉(영암읍 학송리, 옴천면 영산리 → 작천면 갈동리)/ 수인분맥분기점
영암읍 학송리와의 경계이자 강진군 옴천면의 극서점이 되는, 영산리 영산제(永山堤) 서쪽에 있는 332m봉이 작천면 갈동리 학동제 상단에서 작천면 갈동리로 바뀌는 삼면봉입니다. 산과계곡님의 수인분맥 산행기에서 확인하니 청풍454, 4등삼각점이 있고 옴천면과 작천면의 면계를 따라 병영면으로 향합니다.
아무런 표식이 없이 표지기 몇 개만 나풀거립니다. 월출산을 한두 시간이면 오를 수 있는지 알고, 일출을 보기위해 시간을 좀 벌려고 바람이 없는 곳에서 추위에 떨며 노박을 했습니다만 결과적으로 월출산은 누릿재에서 4시간이 걸리고 여기서 쉬지않고 그냥 진행했어야 했습니다.
♤ 307m봉/ 삼면봉(영암읍 학송리, 작천면 갈동리 → 성전면 월남리), 송전탑
불티재로 내려서는 봉입니다. 영암읍과 경계를 이루는 강진군 작천면의 최상단부 갈동리 학동제 위에 있는 307m봉이 월출산 아래 성전면 월남리 하치마을과 임무교대를 하는 즉 작천면에서 성전면으로 바뀌는 삼면봉입니다.
들머리에 출입금지 표지판이 세워져 있고, 누릿재까지 1.3km 구간은 출입통제구역이고 사자봉(구름다리)갈림길까지 비탐구간입니다.
풀치재 직전에 가건물로 내려서는데 공사 인부들 함바식당이 있어서 밥도 사먹고 물도 보충할 수 있었습니다. 일찍 알았더라면 물을 무겁게 지고 오지 않았을텐데.... ㅠ 무지원장거리 꾼들에게는 유익한 정거장이 되겠더군요.
♤ 불치재(풀치재)/ 불티재/ 829번지방도
영암군 영암읍에서 강진군 성전면을 잇는 고개로, 13번국도와 829번지방도가 지나는 곳이다. 지도상에는 불티재라고 표기가 되어 있으며, 일제시대에 개통된 이 도로는 한때 교통의 요충지였으나, 지난 2000년도에 이 고개 아래로 터널이 뚫리는 바람에 땅끝기맥 산꾼이나 지나는 잊혀진 고개가 되어 버렸다. 지도상이나 산꾼들에게 불티재로 알려져 있는 이 고개는 불티재, 풀치재, 풋치재 등 여러개의 지명을 가지고 있어서 상당히 혼란스러웠으나, 국토관리청이 이 고개 아래에 개통된 터널 이름을 짓기 위해서 관련 지자체인 영암군, 강진군과 협의한 결과 풀치재로 최종 결정했다고 한다. 조선시대 사료에는 화현(火峴) 혹은 화치(火峙)로 기재되어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영암)에 "화현은 영암군의 남쪽 28리에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후 『대동지지』(영암)에도 화현이 강진 경계에 있는 고개로 나타난다.『호남지도』, 『광여도』, 『대동여지도』 등의 조선 후기 고지도에는 영암군의 남쪽, 율치(栗峙)와 동치(東峙) 사이로 '화치(火峙)'가 기재되어 있다. 이칭인 풀칫재(초치)에 대해 서쪽의 노루재(누릿재)가 소가 누워 있는 형상이므로 풀치[草峙]라고 하였다는 설도 있다.
누릿재가 두 군데 있습니다. 처음 만나는 곳이 옛날 넘어다니던 재같습니다만....
여기 누릿재 표지판부터는 본격적으로 월출산에 오르는 곳입니다.
♤ 누릿재/ 노루재/ 황칫재/ 군계(영암군 영암읍 - 강진군 성전면
전남 영암군의 영암읍 개신리와 강진군 성전면 월남리 사이에 위치한 고개이다. 월출산국립공원 동쪽의 고개로 월출산 천황봉에서 동쪽으로 뻗은 산줄기가 사자봉을 거쳐 노루재로 이어진다. 노루재는 노릿재, 누룻재, 황치(黃峙), 황칫재라고도 한다. 조선시대 지리지에서 노루재를 찾아보기는 어려우나 『호남지도』에 월출산과 화치(지금의 불티재) 사이에 황치(黃峙)가 묘사되어 있는 것을 비롯해 『지승』, 『여지도』, 『광여도』 등에 황치(黃峙) 혹은 황현(黃峴)으로 기재되어 있다. 지명은 고개가 '황사출림(黃蛇出林: 누런 뱀이 숲속에서 나오는 형상)'형 명당이라는 것에서 유래되었다는 설과 풀밭이 많아 가을에는 누런색을 띤다고 해서 누릿재라고 불렸다는 설이 있다. 노루재는 예로부터 강진, 해남 등 남쪽 선비들이 한양으로 과거 등 시험을 보러 가기 위해 이 고개를 넘었고, 많은 정치적 탄압을 받은 선비들이 이 고개를 넘어 남도나 제주도 등으로 귀양가는 길목으로, 추사 김정희, 다산 정약용 선생 등이 이 고개를 넘어가며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지금도 군데군데 옛 사람들의 주막터가 남아 세월의 무상함을 느끼게 한다. 또 삼남의 교통 요충지로 강진, 해남 사람들이 영암군으로 장을 보러 다녔고, 특히, 남해안의 풍부한 해산물과 영암과 나주 등의 쌀과 보리로 바꾸러 밤새 이 누릿재를 넘어가곤 했다. 일제시대에 풀치재에 신작로가 개통된 이후 1960년대 후반까지도 강진 작천이나 성전면 사람들은 모두 누릿재를 이용해 영암장을 보러 다녔는데, 지리적으로는 강진군에 속하지만 강진장보다 영암장이 훨씬 가까웠기 때문이다. 특히 소장수들은 성전장과 영암 신북의 바람장, 영암장, 강진장 등 우시장이 있는 장들을 돌기 위해 누릿재를 주요 통로로 사용했으며, 보부상으로 연명하던 사람들도 무거운 짐을 이고 지고 누릿재를 넘었다. 그러나 영암군 영암읍과 강진군 사이를 잇는 불티재에 길이 생기면서 잠시 없어졌다가 문화 체육 관광부가 주관하는 ‘스토리가 있는 문화 생태 탐방로 프로젝트’에서 다산 정약용이 강진으로 유배를 갈 때 사용하였던 길로 알려지면서 문화 탐방로로 개발되고 있다.
☆정약용 - 탐진 풍속 노래[耽津村謠]
누리령 잿마루에 바위가 우뚝한데 / 樓犁嶺上石漸漸
길손이 눈물 뿌려 사시사철 젖어 있다 / 長得行人淚灑沾
월남을 향하여 월출산을 보지 마소 / 莫向月南瞻月出
봉마다 모두가 도봉산 모양이라네 / 峯峯都似道峯尖
동백나무 잎들은 얼어도 무성하고 / 山茶接葉泠童童
눈 속에 꽃이 피면 붉기가 학 이마 같아 / 雪裏花開鶴頂紅
갑인년 어느 날에 소금비가 내린 후로 / 一自甲寅鹽雨後
유하나무 감귤나무도 모두 말라 없어졌다네 / 朱欒黃柚盡枯叢
바닷가 왕대나무 키가 커서 백 자러니 / 海岸篔簹百尺高
무덤이 없는 비석입니다. 여기 아래에 양면석불이 있데서 100m이상 내려갔다 왔지만,,, 괜히 알바만 하고,,,
내가 못 찾은 모양이다 하고 서운한 마음으로 조금 더 진행하니 왼쪽으로 표지판과 길이 보입니다. ㅋ
♤ 누릿재 양면석불 사자봉삼층석탑
누릿재 양면석불이 위치한 곳은 사자봉의 동쪽 8부 능선상에 있고 강진과 영암의 경계지역에 해당한다. 월남리 신월마을에서 등산로를 따라 사자봉을 향하여 계속해서 오르면 약간 평지가 나오는데 여기에 ‘금강거사해주최공현지묘(錦江居士海州崔公現之墓)’란 묘비가 있는 민묘가 있고, 바로 남쪽 아래의 사지(寺址)에 이 양면석불이 있다. 해주최씨 묘 주변에는 석탑재가 여기저기에서 보이며, 여천 흥국사 석등처럼 석등의 하대석으로 사용되었던 귀부가 있고, 석불 주변에는 와편들과 축대 등이 있어 이곳이 폐사지였다고 추측할 수 있다. 이석불은 길쭉한 삼각형에 가까운 판석형 석재의 양면에 좌상으로 양각되어 있는 특이한 형식의 불상이다. 앞면의 좌상은 그 형상이 비교적 뚜렷하지만 부분적으로 마멸되었고 뒷면은 전면불보다 윤곽이 뚜렷하며, 목에 삼도의 흔적, 법의의 주름 표현, 수인을 확인 할 수 있다.
활성산 팔랑개비도 보이고 중앙 맨 뒤에 높은 산이 무등산으로 짐작되었습니다.
달구봉 암릉 우측으로 좁은 등로를 따라 우회로를 지나는데, 등로 우측으로는 천길 낭떠러지입니다.
그래서 이 길을 개방하지 않고 비탐으로 묶어둔게 아닌가 싶었습니다.
중앙의 바위가 사자봉인데 사자처럼 보이나요?
♤ 사자봉(獅子峰, 해발 408m)
천황봉의 동남쪽에 있는 봉우리로 기봉(旗峰)과 함께 기괴한 모양의 돌봉우리가 어울어져 월출산의 한 이름인 ‘소금강산(小金剛山)’이란 이름이 이곳에서 생겼다. 기봉(旗峰)은 월출산 동남쪽에 사자봉과 함께 있으며, 소금강산이란 이름이 이곳의 기암괴석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 경포대능선삼거리(675m)
이곳 금릉경포대는 여름철 피서지로 유명한 계곡으로 이름나 있는 곳이기도 하다. 월출산 금릉경포대계곡은 천황봉과 구정봉에서 발원하여 남쪽으로 흘러내리는 골짜기로 길이 2km에 이르고 크고 작은 바위들 사이를 맑은 물이 굽이치며 곡류와 폭포수를 빚어내고 있는 곳으로 그 뜻은 다음과 같다. 금릉경포대는 금릉과 경포대로 나누어 말할 수 있는데 금릉이란 1172년 고려시대 때부터 부르던 명칭으로 그 뜻의 유래가 들판에 위치한 성벽이라는 뜻과 중국 초나라 위왕이 왕의 기운이 있다하여 땅속에다 금덩이를 묻어놓고서 금릉이라 불렀다는 두가지 유래가 있다. 경포대란 동해안 강릉의 경포대와 이름이 같지만 가운데 한자의 강포(강이나 항구가 드나드는 곳)가 아닌 베포(천을 넓게 펴다)를 써서 월출산에서 흐르는 물줄기의 모습이 무명베를 길레 늘어놓은 것처럼 보인다하여 경포대라 불렀고 비가 자주와서 풍년이 들기를 바라는 소망이 깃들어 있다.
통천문을 통과하니 엊그제 걸은 기맥과 영산강도 보이고,,
여기서 백룡지맥을 찾아보는데... 들판을 가로지르나 봅니다.
♤ 월출산 통천문(月出山 通天門)
월출산 통천문은 전라남도 영암군과 강진군의 경계를 이루는 월출산에 있는 바위굴로, 천황봉에서 동북쪽으로 약 100m 아래에 있다. 한 사람이 겨우 지나갈 만한 바위굴로 천황사 방면에서 천황봉으로 가는 유일한 통로이다. 통천문이라는 명칭은 월출산 최고봉을 지나 하늘로 통한다[通天]는 데서 유래하였다. 바위굴에 들어서면 월출산 북서쪽 능선과 영암 고을, 영산강 물줄기가 한눈에 들어온다.
저기 만덕산도 보이고 그 옆으로 도암만(=강진만)도 보입니다.
우측으로는 월각산 봉우리도 보이고, 별뫼산, 흑석산도 보입니다. 맨 뒤쪽으로는 덕룡산 공룡이 보이고요.
다시한번 활성산과 그 뒤에 국사봉을 바라봅니다. 왼쪽이 무등산으로 짐작되고요.
중앙으로 저 끝에 하당, 남악의 전남도청과 목포반도 끄트머리 유달산도 보입니다.
사진 잘 안 찍는데 어느 분이 극구 한방 박으라고 해서 못 이기는 척...
♤ 월출산(月出山, 809m)/ 군계(영암군 영암읍 - 강진군 성전면)/ 땅끝기맥 최고봉
월출산은 땅끝기맥의 최고봉이며 천황봉은 지리산(남원), 천관산(장흥), 능가산(부안), 내장산(정읍)과 더불어 호남 5대 명산으로 꼽힌다. 영암군과 강진군의 경계에 있는 월출산 정상은 천황봉(天皇峰)이다.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다른 산에 비해 그리 높지도 넓지도 않은 편이다. 그럼에도 금강산과 설악산에 견줄 만한 경치를 자랑하여 '남도의 작은 금강산', '남도의 설악산'으로도 불린다. 신라시대에는 월나산(月奈山), 고려시대에는 월생산(月生山)이라 불렸다고 하며, 그 후 조선시대를 거쳐 월출산(月出山)이라 명명되었다. 1988년 6월에 20번째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전남의 남단이며 육지와 바다를 구분하는 것처럼 우뚝선 월출산은 서해에 인접해 있고 달을 가장 먼저 맞이하는 곳이라고 하여 월출산이라 한다. 정상인 천황봉을 비롯, 구정봉, 향로봉, 장군봉, 매봉, 시루봉, 주지봉, 죽순봉 등 기기묘묘한 암봉으로 거대한 수석 전시장 같다. 정상에 오르면 동시에 300여명이 앉을 수 있는 평평한 암반이 있다. 지리산, 무등산, 조계산 등 남도의 산들이 대부분 완만한 흙산인데 비해 월출산은 숲을 찾아보기 힘들 정도의 바위산에다 깎아지른 산세가 차라리 설악산과 비슷하다. 매월당 김시습은 월출산을 '호남에 제일가는 그림같은 산'이라고 극찬했고, 이중환은 그의 저서 <택리지>에서 '대단히 맑고 뛰어나 이른바 화성조천(火星祖天)의 지세다'라고 평가한 바 있다. 뾰족뾰족 성곽모양 바위능선, 원추형 또는 돔형으로 된 갖가지 바위나 바위표면이 둥그렇게 팬 '나마' 등은 설악산보다도 더 기이해 호남의 소금강이라 한다. 바람폭포 옆의 시루봉과 매봉을 연결하는 구름다리는 지상 120m 높이에 건설된 길이 52m, 폭 0.6m의 한국에서 가장 긴 구름다리로 월출산의 명물이다. 사자봉 왼쪽 산 중턱 계곡에서는 폭포수가 무려 일곱 차례나 연거푸 떨어지는 칠치폭포의 장관을 볼 수 있다. 월출산은 서해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일몰 풍경이 장관이고, 봄에는 진달래와 철쭉꽃, 여름에는 시원한 폭포수와 천황봉에 항상 걸려있는 운해, 가을에는 단풍이 아름답다. 월출산은 동백꽃과 기암괴석이 한창 절묘하게 어우러져 해빙기의 등산로로도 압권이다. 천황사에서 계곡에 이르는 1km 남짓한 초입부부터 동백꽃으로 곱게 단장하고 있다.하산길에서 만나게 되는 도갑사 부근에는 3월 중순 경부터 피기 시작한 동백꽃이 3월말이나 4월초까지 절정을 이룬다. 월출산의 운해는 평야의 들바람과 영산강 강바람이 맞부딪쳐 천황봉 정상에서 만들어내는 구름바다가 볼 만하다. "달이 뜬다 달이 뜬다 월출산 천황봉에 보름달이 뜬다." 영암아리랑 노랫말이 말해주듯 월출산은 산 봉우리와 달 뜨는 광경의 어울림이 빼어난 산이다. 구름을 걸친 채 갑자기 우뚝 솟아 눈앞에 다가서는 천황봉의 신령스러운 모습, 그 위로 떠오른 보름달의 자태는 달맞이 산행의 명산이기도 하다. 월출산 일대인 영암, 강진, 해남은 "남도 문화유산답사의 1번지"로 꼽을 만큼 문화유산이 많이 남아 있는 곳이다. 천황봉을 중심으로 남쪽으로는 단아한 모습의 무위사, 서쪽에는 통일신라 말 도선국사에 의해 창건됐다는 도갑사가, 구정봉 아래 암벽에 조각한 높이 8.5m의 마애여래좌상(국보 144호) 등 많은 문화재가 있다.
저팔계를 닮은 돼지바위입니다.
제가 일부러 누인게 아니라 사진이 저절로 누웠어요. ㅠㅠ 어?? 다시 섰네!!! ㅋ~
♤ 바람재
전남 영암군 영암읍 회문리 위치하며 금릉 경포대에서 올라오는 월출산 등산로가 종주 주릉과 맞닿는 곳으로 경포대 등산로에서 올라오면 시원한 산바람이 불어와 누구나 쉬어가는 곳이다. 남쪽에 경포대(←2.5m)로 내려가는 길이 잘 나있고, 각종 안내판과 이정표(←경포대 2.5m, ↓천황봉 1.1km, ↑구정봉 0.5m, ↑도갑사 4.5m), 현위치 표시목(월출 01-11, 해발 590m), 탐방로 안내판이 설치되어 있다.
♤ 향로봉(香爐峰, 743m)
전남 영암군과 강진군의 경계를 이루는 월출산에서 천황봉에 이어 두 번째로 높은 제2 봉우리로써 남성적인 천황봉과 구정봉을 지나면 보이는 향로봉은 그 모양이 향로를 닮아 붙여진 이름이다. 행정구역상으로는 영암군 영암읍 회문리에 속한다. 봉우리 남동쪽에 2개가 나란히 붙어 있는 입석상이 있다.
기맥에서 약간(500m) 벗어나 있어요. 월출산의 랜드마크라 할 수 있는 베틀굴과 구정봉을 구경합니다.
♤ 구정봉(九井峰, 738m) & 신령암(神靈巖)
『고려사(高麗史)』 지리지에 “월출산에 구정봉(九井峯)이 있다.”라고 처음으로 등장한다.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 전라도 월출산에 “가장 높은 봉우리 곁 겨우 한 사람이 들어갈 만한 구멍을 따라 올라가면 20명이 앉을 만한 꼭대기가 있으며, 꼭대기 평평한 곳에 오목하게 패여 물이 담기기를 동이같이 된 것이 아홉이므로 구정봉이라 하며, 아무리 가물어도 마르지 아니하므로 속설에 아홉 용(龍)이 살고 있다고 전한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봉우리 명칭은 꼭대기에 '9개의 웅덩이(九井)'가 파인 데서 유래하였고 그 속에 9마리 용이 살았다고 한다. 이 웅덩이들은 오랜 세월의 풍화작용으로 형성된 풍화혈(風化穴)로 가장 큰 것은 지름이 3m, 깊이가 50㎝이다. 북쪽 능선 암벽에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국보인 '영암월출산마애여래좌상(靈岩月出山磨崖如來坐像, 국보144호)'이 0.5km 거리에 있는데 국보임에도 노천에 방치되어 있다. 통일신라 후기에서 고려초기에 만들어진 작품으로 짐작된다고 한다. 구정봉 나마는 봉우리 주변 지형을 반영한 구정봉이라는 봉우리 명칭과 해당 지형을 학문적으로 표현한 나마(gnamma)[화학적 풍화 작용에 의해 기반암 표면에 형성된 접시 모양의 풍화혈]가 합해진 명칭이다. 중생대 백악기 말에 형성된 화강암이 차별적인 심층 풍화와 풍화층의 삭박 작용으로 형성된 박리 돔(exfoliation dome)이다. 암체에 절리의 발달이 미약한 동쪽 사면은 괴상의 암벽을 연상시킨다. 구정봉 꼭대기에는 다양한 크기와 모양의 구덩이[웅덩이]가 있으며, 지형학 용어로는 나마라고 칭한다. 나마는 타포니(tafoni)[화학적 풍화 작용과 관련한 미지형으로서 암벽에 벌집처럼 생긴 구멍 형태의 지형]의 일종으로 주로 화학적 풍화에 의하여 평탄면에 생긴 요(凹) 지형을 말하며, ‘가마솥 바위’라고도 칭한다.
1994년 영암 문화원에서 발행한 『영암의 전설집』에 수록되어 있는 이야기다. 월출산의 구정봉과 신령암은 어릴 때부터 뛰어난 재주를 보이던 동차진이 자신의 교만함을 버리지 못하고 날뛰다가 하늘의 벌을 받는다는 이야기이다. 월출산의 최고봉 천황봉 아래 서북쪽에 있는 봉우리가 구정봉이다. 구정봉은 30m 이상의 암반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 암반을 신령암이라고 한다. 장정 50명이 앉을 만큼 넓은 신령암 위에는 직경 2~3m 안팎의 큰 웅덩이들이 있다. 이 웅덩이는 동차진 때문에 생긴 것이다. 동차진은 구림(鳩林)에 유배된 한 장군의 유복자로 태어났다. 태어날 때 동차진은 겨드랑이에 깃털을 달고 있었는데 백일이 되자 이가 나고 세 살이 되자 맷돌을 번쩍 들어 올렸다. 일곱 살에는 어른처럼 나뭇짐을 지고 다녀 ‘구림에서 장사 났다’는 소문이 났다. 동차진의 어머니는 동차진이 비뚤어질까 봐 걱정하다가 집에 들른 노인에게 아들을 맡겼다. 그리하여 동차진은 노인을 따라 금강산에 들어가 10년 동안 무술을 익히고 집으로 돌아왔다. 어머니는 동차진을 시험하기 위해 밥을 지을 동안 산봉우리에 올라가 석성(石城)을 쌓으라고 하였다. 이 시합에서 어머니가 이기자 동차진은 화를 내며 돌을 내던졌다. 때마침 오랑캐가 쳐들어오자 어머니는 동차진을 타이르며 오랑캐가 쳐들어왔으니 나가서 싸우라고 하였다. 동차진이 구정봉에 올라 도술을 부리자 노략질을 일삼던 오랑캐들의 머리 위로 돌멩이들이 떨어져 단번에 몰살되고 말았다. 옥황상제는 그릇된 공명심이나 만용으로 오만방자하게 도술을 쓰는 동차진 때문에 화가 나서 벼락을 아홉 번 내려 동차진을 죽였다. 이렇게 죽은 동차진은 구정봉에 사람들이 올라오면 자신과 같은 실수를 하지 않도록 신령암을 세 번 움직여 경계를 시켰다. 바위가 세 번 움직인다 하여 삼동석(三動石)이라 부르기도 한다.
♤ 영암군 유래
월출산에는 예로부터 신령스러운 동석(움직이는 돌)이 세 개가 있다고 전해 오는데 그 하나는 운무봉(雲霧奉)에 나머지는 도갑과 용암 아래에 있었다 한다. 현재 기록된 것으로는 구정봉 아래에 있는 바위에 새김글이 유일하다. 글을 새긴 시기는 정확하게 알 수 없다. 월출산 동석과 관련된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월출산에는 세 개의 신령스러운 움직이는 바위가 있었다. 그 바위는 천명을 동원해도 절벽에서 떨어뜨릴 수는 없지만, 단 한 사람이 흔들어도 곧 떨어질 것같이 흔들거렸다. 높이는 1m 정도이고 둘레는 열 아름 쯤 되는 큰 바위인데 서쪽은 돌뼈(石骨)뿐인 산머리에 있고 동쪽은 끝없는 절벽에 걸려 있었다고 한다. 이 동석은 그 무게로 보아 수 백인을 동원해도 움직이지 못할 것 같으나 한 사람이 흔들거나 열 사람이 흔들어 보거나 마찬가지로 움직인다. 이 3개의 동석 때문에 영암에 큰 인물이 난다해서 이를 시기한 중국 사람이 바위 세 개를 모두 떨어뜨렸는데, 그 중 하나가 다시 옛 자리에 올라와 있어 이 바위를 신령(神鈴)한 바위라고 전하고 있다. 이 동석 전설로 인해 영암(靈巖: 신령한 바위)이라는 지명이 유래하였다.
도갑사로 내려가는 도갑재가 미왕재입니다. 여기서부터 목책을 넘어 비탐으로 가야 합니다.
♤ 미왕재(540m)/ 삼면봉(성전면, 영암읍 → 군서면)
전남 영암군 군서면 도갑리에서 군서면 월곡리로 넘어가는 고개이다. 미왕재는 월출산 국립 공원의 주능선에 위치한 고개로 해발 540m이다. 월출산 국립 공원의 주봉인 천황봉을 지나 구정봉, 향로봉을 거쳐 도갑산으로 가는 길목에 있으며 억새밭으로 유명하다.
강진군 성전면 월하리 무위사 안쪽에 있는 성전저수지입니다. 강진에서 버스를 타고 13번국도를 타고 광주로 나오는 길에 무위사 입구를 지나더군요.
♤ 무위사(無爲寺)
대한불교조계종 제22교구 본사인 대흥사(大興寺)의 말사이다. 신라 때 원효(元曉)가 창건하여 관음사(觀音寺)라 하였고, 875년(헌강왕 1)도선(道詵)이 중건하여 갈옥사(葛屋寺)라고 개칭한 뒤, 많은 승려들이 주석하였다. 905년(효공왕 9)선각(禪覺)이 3창하였다. 1555년(명종 10) 태감(太甘)이 4창하면서 무위사라 하였다. 이때의 당우는 본절이 23동, 암자가 35개로 모두 58동에 이르는 대찰이었으나, 그 뒤 화재 등으로 규모가 크게 축소되었다
신라 진평왕 39년(617)에 원효대사가 창건하여 절 이름을 관음사라고 했고, 그후 헌강왕 원년(875)에 도선국사가 중창하고 갈옥사(葛屋寺)로 바꿨으며, 고려 정종 원년(946)에 선각(先覺)대사가 3창하고 모옥사(茅屋寺)로 개명, 조선 명종 10년(1555)에 태감(太甘)선사가 4창하고 비로소 절 이름을 무위사로 고쳤다는 내용이 『무위사 사적기』에 나온다. 이 사적기는 영조 15년(1739)에 당시 주지였던 극잠이 절을 보수하면서 쓴 것인데, 당시까지 전해 오던 이야기를 그대로 받아 적은 듯, 믿기 어려운 점이 많다.
우선 진평왕 39년에는 이 부근이 백제의 영토였고 또 원효는 바로 그해에 겨우 태어났을 뿐이었다. 도선국사가 중창한 후 얼마 지나지 않은 효공왕 9년(905)부터 선각대사가 주석했다는 것으로 보아 도선의 중창설도 의문시되고 있다. 도선국사는 동리산문에 속하며 선각대사는 가지산문에 속하는데, 사찰의 소속이 그렇게 짧은 기간에 바뀌는 일은 드물기 때문이다. 또 정종 원년은 선각대사 부도비가 세워진 해이고 선각대사가 죽은 지 이미 28년이 지난 때이므로 그 해에 그가 절을 중창했다는 것은 맞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절 이름에 대해서도, 지금 절 안에 있는 선각대사 부도비의 제목에 ‘무위갑사’(無爲岬寺)라고 적혀 있고 비문 속에도 신라 효공왕 9년(905)에 왕건이 선각대사를 무위갑사에 머물도록 청했다는 내용이 있으므로, 그 이전부터 계속 무위사로 불려 왔음을 알 수 있다.
어쨌든 무위사는 무위갑사라는 이름으로 10세기 초 이전에 창건되었고 신라 말에 왕건과 가까웠던 선각대사가 머물던 기간에 사세를 키웠다. 조선 시대 들어와 태종 7년(1407)에는 각지의 명찰을 골라 여러 고을의 자복(資福) 사찰로 지정하는 가운데 천태종 자복사의 하나로 꼽혔다. 이전에 선종 사찰이었던 무위사가 어느 때부터인가 천태종 절이 된 데는 고려 후기에 백련사에서 천태종 백련결사가 활발히 활동했던 것이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 한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도 화를 입지 않아서 그 웅장함과 화려함이 한 도에서 으뜸이었다던 무위사는 그후 점차 퇴락하여, 앞의 사적기가 씌어진 영조 15년(1739)에 이르면 미타전(지금의 극락보전)·천불전·시왕전만이 남았다. 일제시대에 극락전이 국보로 지정되었고, 1974년에 극락전을 보수하면서 벽면의 벽화들을 통째로 뜯어 내어 벽화보존각에 따로 모신 것이 지금 우리가 볼 수 있는 모습이다.
도갑산 정상은 비교적 평평하지만 잡목들이 우거져 있고 비탐구간이라선지 아무런 표식이 없습니다.
우리 홴님들 표지기가 대셉니다. 바닥에 세르파님 표지기가 떨어져 있어 잘 걸어두었구요.
♤ 도갑봉(도갑산, 해발 400.9m)
영암군 군서면 도갑리와 강진국 성전면 월하리 경계에 있는 산으로 아래는 도갑사가 있고, 이 산의 산체(山體)는 단순소박하지만 뛰어난 경치가 많고 산봉우리에서는 영산강의 굽이치는 물줄기와 목포 유달산과 다도해상이 내다보인다. 영암(靈巖)이란 이름을 붙게 했다는 동석((動石) 세개 가운데 하나가 있었던 곳으로 전하고 있다.
♤ 도갑사
도갑사(전남 문화재자료 제 79호)는 전남 영암군 군서면 월출산에 있는 사찰로 대한불교조계종 제22교구 본사인 대흥사의 말사이다. 통일 신라 말에 도선국사(道詵國師, 826~898)가 헌강왕 6년(880년)에 창건하였다고 하는데, 1999년 대웅전 뒤편 건물지 발굴조사에서 백제시대 기와편이 출토되어 통일신라시대 이전에 이미 사찰이 있었음을 추정하고 있다. 도갑사가 크게 번창한 때는 조선시대 초기이다. 이 곳 영암 출신인 수미왕사(守眉王師)가 1457년(세조 3년)부터 1464년(세조 10년)까지 대대적으로 중창했는데, 당시 건물 규모가 966간에 달하는 대가람을 이루었고 소속된 암자가 12곳, 도갑사에 머무르며 수행하는 승려가 780명에 이를 정도로 번창해 오다가, 1597년 정유재란으로 많은 문화재가 소실되는 피해를 입었으나 전란 이후 다시 부흥하기 시작하여 17세기 후반까지 계속되었다. 그 뒤 영조 52년(1776년)과 헌종 원년(1835년)에도 일부 중창이 있었다. 근래에 한국전쟁(1950년)과 화재 등으로 많은 가람이 소실되었으나 1995년부터 1999년까지 실시한 네차례 발굴조사에서 옛 가람 배치를 확인하고 복원불사을 추진하고 있다. 현재 경내에는 도갑사 해탈문(국보 제50호) 등 국가지정 문화재 5점과 도갑사 석조(유형문화재 제150호) 등 전라남도 지정 문화재 5점이 있다.
오른쪽으로 주지봉으로 가는 길이고 기맥길은 좌틀입니다.
♤ 주지봉갈림길(329m봉)/ 삼면봉(강진군 성전면, 영암군 군서면 → 학산면)
T자 갈림길에서 우측 방향이 주지봉 방향이고, 좌측이 땅끝기맥 월각산 방향이다.
줄곧 나뭇가지에 가려 제대로 된 사진을 건질 수 없었고요. 깨끗한 사진을 월각산에 가서야 찍었습니다.
오른쪽이 주지봉갈림봉이고 앞쪽에 능선이 지나온 기맥길입니다.
♤ 주지봉(朱芝峰, 490.7m), 문필봉(文筆峰, 450m)
좌측의 주지봉(朱芝峰)과 문필봉(文筆峰)은 영암군 군서면 도갑리, 동구림리와 학산면 용산리의 경계에 걸쳐있는 봉우리로, 관봉(冠峰), 성제봉으로도 부르며, 봉우리 모양이 붓끝처럼 뾰족하고, 크고 작은 두 봉우리가 성제(형제)처럼 나란히 솟아 있다. 문필봉과 주지봉은 쌍봉(雙峰)의 형세를 갖추고 있어, 두 봉우리를 주지봉이라 통칭하기도 한다. 봉우리 모양이 붓끝 처럼 뾰쪽하여 주지봉(朱芝峰)이라 했으며, 주지봉 우측의 문필봉은 왕인 박사와 도선국사가 관련하여 ‘문필봉(文筆峰)’이라는 별명이 있다. 풍수에서는 화산(火山)인 첨봉을 학자와 연결하면 붓[筆]으로 보고, 무인으로 풀면 칼[劍]로 본다. 『한국 지명 총람』에는 관봉, 필봉, 성제봉으로도 부른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주지봉의 정기를 받고 백제 때의 학자 왕인이 태어났다고 전하며 성제봉을 ‘성재’로 보기도 하며, 문필봉(文筆峰) 또는 필봉(筆峰)을 포함해서 주지봉이라고 부른다.
♤ 도선국사(道先國師)
문필봉(文筆峰) 아래의 구림(鳩林)마을(영암군 군서면 소재)은 도선국사의 탄생 설화가 서려있는 마을이다. 구림마을의 처녀가 성기동 통샘에서 빨래를 하는 중 참외 하나가 떠내려오자 이것을 먹었는데 잉태하여 애기를 낳았단다. 처녀의 집안에서는 이것을 부끄럽게 여겨 마을 숲속의 바위에다 애를 갖다 버렸는데, 며칠이 지난 후 그곳을 가보니 비둘기들이 애기를 감싸고 있어서 다시 집으로 데려와 키웠는데, 그 애기가 후에 도선국사(道先國師)였다고 한다.
오래된 선배님들의 띠지가 지키고 있는 뫼봉갈림길에서 좌틀합니다.
♤ 뫼봉갈림길
넓은 안부의 헬기장이 있는 봉을 지나고 곧이어 ‘뫼봉 갈림길’에 이르러는 좌틀하며 진행한다. 우측길은 뫼봉으로 가는 길이다. 서쪽 뫼봉(매봉산) 방향으로 묵동골 묵동마을이 있다.
4차선 도로처럼 꽤 넓은 재입니다.
♤ 묵동재(墨洞峙)
강진군 성전면 월하리 죽동마을과, 영암군 학산면 묵동리를 잇는 재로, 고개의 지명은 우측 아래에 있는 묵동리에서 따온듯 하다. 영암군 학산면 묵동리(墨洞里)는 옛부터 먹을 만드는 곳이라 하여 묵동 혹은 먹뱅이라고 하였다. 혹은 마을 북쪽에 병풍처럼 산(매봉산)이 펼쳐져 있어서 옥녀가 글을 쓰려는데 붓과 벼루는 있는데 먹이 없어서 마을 이름을 먹뱅이라 하였다는 설도 있다. 1940년 경에 먹뱅이라는 명칭의 어감이 좋지 않아 명동(明洞)이라 개칭하였다가, 1950년 6.25전쟁 때 마을이 모두 전소되자, 마을 이름을 바꿔서 재앙이 닥쳤다고 생각한 주민들은, 묵동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고쳐 부르게 되었다.
♤ 월각산 갈림길
310m봉을 지나 다시 급경사 오름길을 10여분 치고 오르면 월각산 갈림길 이정표가 나온다. 월각산은 기맥길에서 300m 정도 좌측으로 벗어나 있어서, 배낭을 벗어 두고 다녀와야 한다.
월각산 정상석입니다. 선답자 사진에 깨어진 정상석이 있던데 교체가 된 모양입니다.
월출봉의 전망이 좋게 나옵니다.
♤ 월각산(月角山, 456m)
강진군 성전면과 영암군 학산면의 경계에 있는 산으로, 월출산에서 뻗은 능선 남쪽 끝에 솟아 있다. 월출산국립공원 구역의 경계에 자리한 이 봉우리는 빼어난 산새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접근이 쉽지 않고 월악산의 그늘에 가려 큰 주목을 끌지 못하고 땅끝 기맥꾼들만 들리곤 했다. 하지만 몇 해 전부터 목포와 광주 등 인근지역 등산인들이 이곳을 찾기 시작하며 제법 알려지기 시작했다. 월각산은 그 나름대로의 매력을 갖춘 산이다. 특히 암릉 위에서 바라보는 월출산의 조망은 다른 어느 곳에서 보는 것에 비할 수 없는 특별함이 있다. 천황봉부터 구정봉, 도갑산, 문필봉, 주지봉으로 이어진 긴 능선을 한눈에 담을 수 있다. 아름다운 월출산의 진경을 이곳에서 감상할 수 있다.
98년 개통한 2번국도 4차선 넓은 도로이지만 2012년에 새로난 남해고속도로 탓인지 차량이 많지 않아 무단횡단을 하는 경우가 많은 곳입니다. 우회할려면 위로 300m위로 올라가야 하는지라....
헤드랜턴을 켜지않고 가까스로 도착했습니다. 더 이상의 진전은 어려웠습니다. 사람도 밧데리가 다 되었지만 보조밧데리도 다 되어 주유소에 택시를 불러달라고 했답니다.
♤ 밤재(栗峙 100m), 레미콘공장/ 면계(영암군 학산면 - 강진군 성전면), 300m 위쪽에 횡단보도 있음.
영암군 학산면 묵동리와 강진군 성전면 월평리의 경계에 있는 고개로, 남해고속도로(영암-순천), 목포와 부산을 잇는 2번국도가 지나는 곳이며, 고개 정상에는 주유소와 장승 2기가 고개를 지키고 있고 밤재농장이 있다.
밤재와 관련된 옛 기록을 살펴보면 율치(栗峙), 율현(栗峴)으로 기재되어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율현은 군의 서남쪽 25리에 있다.”라고 기재되어 있다. 『대동지지(大東地志)』에는 율치로 기록되어 있고,『호남지도(湖南地圖』에는 가학치(駕鶴峙) 동쪽의 고개로서 율치가 기록되어 있다. 또한 『1872년 지방지도』에는 율치,『해동지도(海東地圖』와 『해동 여지도(海東輿地圖)』에는 율현으로 기록되어 있다.
별뫼산 이마에 성봉입니다. 별뫼산 정상은 육산인데 비해 커다란 바위봉우리 입니다.
♤ 별뫼산(星山, 465m)/ 삼군봉(강진군, 영암군 → 해남군)
영암군 학산면 묵동리, 강진군 성전면 월평리, 해남군 계곡면 당산리의 경계에 있는 산으로 ‘성산’ 또는 별산’이라고 부르는데, 아마도 조금 전에 지나온 전위봉(암봉)을 보고 지어진 이름같다. 별뫼산은 성산봉을 머리, 별뫼산 정상을 왼쪽 다리부분으로 여신이 머리를 느러뜨리고 누워서 왼발을 오그리고 치부를 가리며 밤하늘의 별을 바라보는 여인의 형상이라고 한다.
♤ 흑석산 (黑石山, 652.8m)/ 군계, 면계
비오는 날 흑석산의 모습은 검정색으로 변한다. 산의 색깔이 검다하여 유래된 듯하다. 흑선산에서 가학산(577m)-별뫼산(465m)으로 이어진 능선은 영암 원출산의 여세가 남서로 뻗으며 솟구쳐놓은 산줄기다. 주능선은 영암군 학산면과 해남군 계곡면 의 경계를 이룬다. 설악산 공룡릉을 뺨치는 암릉 풍치와 지리산의 일맥처럼 길게 뻗은 능선줄기는 누구든 감탄사를 연발하게 하지만 아직 그리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 이는 물론 영암 원출산의 유명세에 밀려서다. 하지만 이 산줄기의 주인이자 배경으로 버티고 선 월출산의 후광을 걷어내고 이 산이 가진 고유의 멋에 주의를 돌린다면 내륙지방의 어지간한 산은 모두 부끄러이 몸을 숙이고 이 산의 뒤로 물러서야 할 것이다. 이 산은 기암들이 서로 업치고 덮친 모양새가 멀리서 볼때 마치 밤하늘의 별처럼 아름답다고 하여 별매산이라 부른다. 단단한 화강암 덩어리가 줄지어 얹힌 능선 곳곳에는 소나무들이 억세게 뿌리를 박고 있다. 한겨울에도 눈이 쌓이는 일이 별로 없어 등행을 즐기기엔 문제가 없다. 또한 이 산은 기품 높은 난의 자생지로도 유명하다.
♤ 흑석지맥이란
흑석지맥은 벌매산에서 오른쪽(서쪽)으로 영암과 해남의 경계를 가르며 확실한 암릉을 이루고 있는 산줄기를 따라 질재(350m)-은적산갈림봉(470m)-가학산(加鶴山, 574.7m)-가래재(510m)-흑석산(黑石山, 652.8m)-가리재(350m)-두억봉(斗億峰, 527.8m)을 거쳐 영암군 미암면을 동서로 나누며 5번군도 미촌마을 향양고개(50m)로 내려선다. 웅장한 골격미의 산줄기는 이로서 끝이 나고 여기부터는 도로, 비산비야, 마을 수로, 논밭, 공장 창고 등을 지나는 미미한 산줄기가 계속되며 801번지방도로(30m)-선황산(仙皇山, 181.8m)어깨 130m봉을 지나 819번지방도로 에미재(오미령, 30m)에서 801번지방도로(30m)에 이른다. 외지마을-내지마을-서창저수지-한정마을 사거리(30m)-47m봉-오복고개-원망산마을을 지나 2번국도(30m)에 이르러 2번국도를 따라 배수갑문을 지난다. 대불대학교가 있는 호등산(虎嶝山, 126.8m)-2번국도(30m)-앞산-솔대목산(송매봉)-두리봉(120.6m)-대불국가산업단지 3호배수로 대불공원예정지구-2호배수로-삼불산(三佛山, 81m)을 올라 도로로 내려와 언개마을을 지나 810번지방도로 가내항마을에 이른다.
바랑산(70.5m)-시른동산(109.6m)에서 북쪽으로 소아산(小牙山, 171.3m) 대아산(大牙산, 183m)을 지나 원용당마을로 내려와 77m봉을 지나 목포등대 앞 바닷가에서 영산기맥의 끝점과 마주보고 끝나는 산줄기이거나,
임도-갈마산(渴馬山, 113.3m)-2번군도로 내려와 가지도가 육지가 된 현대삼호중공업이 차지한 새터산(86m)을 거쳐 큰산(131.5m)을 지나 영산강 하구 신항교에서 끝이나는 약42.03km의 산줄기를 말하지만 끝부분 2개의 산줄기가 우연찮게 그 길이가 같으며, 소아산은 군부대가 차지하고 있어 접근이 불가하다.
♤ 흑석지맥 개념도
별뫼산 내림길에 맥꾼들의 띠지가 오른쪽으로 걸려 있습니다. 이상하다 하며 지도를 보니 조그마한 288.9m봉에 다녀오신듯 싶었습니다. 그 봉에 뭐가 있길래~
♤ 사스레피나무
사스레피나무는 바닷가의 산기슭에서 자라는 나무로, 높이는 1∼3m이다. 나무껍질은 잿빛을 띤 갈색이고, 잎은 어긋나고 혁질(革質:가죽 같은 질감)이며 긴 타원형 모양의 넓은 바소꼴로 길이 3∼8cm, 나비 1∼3cm이다. 위를 향한 둔한 톱니가 있으며 겉면은 윤이 나고 뒷면은 노란빛을 띤 녹색이며, 잎자루는 길이 1∼5mm이다. 관상용으로 심으며, 재목은 세공재(細工材), 가지와 잎을 태운 잿물은 염색재료로 쓴다. 한국(남부지방)·일본·중국·인도 등지에 분포한다.
별뫼산 다 내려와서 여기가 제안고개인가 했더니 해남으로 가는 13번국도입니다. 아치를 타고 여기를 직접 넘어가면 얼마나 좋을까요. 저 아래 굴다리까지 다녀와야 합니다. ㅠㅠ
여기가 지방도가 지나는 제안고개입니다. 여기서 마무리 하기로 하고 도로를 따라 성전면으로 걸어 나갑니다.
♤ 제안고개(85m)/ 군계
강진군 성전면 월평리 제안마을과 해남군 계곡면을 잇는 고개로 814번 지방도가 지난다. 고개의 지명은 성전면 월하리 제안마을에서 따온듯 하며 해남군 계곡면 사람들은 선진고개라고 부른다 한다.
고개 좌측에는 조그만 공원이 조성되어 있고 JC에서 설치한 愛鄕탑에는 JC의 모토인 ‘祖國의 未來는 靑年의 責任’이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제안고개에서 성전면으로 걸어나오며,, 밤재 좌우에 있는 월각산과 별뫼산의 모습입니다. 철탑 뒤쪽이 밤재에요.
요게 별뫼산의 성봉입니다. 우람하죠?
월각산과 그 뒤로 보이는 월출산입니다. 여기서 보는 월각산은 바위산인데 다녀온 월각산 정상은 여기서 보이는 정상이 아닙니다.
성전면에 있는 청자산(동네 분들은 코끼리산)입니다.
강진이 청자를 굽는 도요의 고장이라고 소재지가 있는 산에다 청자를 그려놓았습니다. 강진여객터미널에서 고속버스를 타면 여기 성전터미널을 걸쳐 광주나 목포로 나갑니다. 고로 광주로 나갈려면 굳이 강진여객터미널까지 들어갔다 다시 나올 필요가 없으며, 광주에서는 강진까지 갈 필요없이 성전에서 내리면 됩니다.
♤ 성전면(城田面)
성전면은 조선시대에 북부는 안주면(安住面), 남부는 고읍면(古邑面)으로 분할 존치하다 1914년 양면을 병합하여 성전면으로 개칭하였고, 과거 교통 통신의 허브역할을 하였던 역원인 석제원이 있었던 교통의 중심지로 현재 국도 2호선, 13호선이 교차하여 강진, 장흥, 영암, 해남, 완도 등 5개 군의 관문으로 자리잡고 있다.
영광의 상처인가요? 한밤중에 가시잡목을 쓸고 지나가니... ㅠㅠ
원래 계획은 계라리고개까지 잡았는데 제안고개까지 진행했습니다. 고로 2구간이 아니라 3구간이 될것 같습니다.
국사봉-활성산-월출산의 봉우리가 돋보입니다. 마지막이 별뫼산...
시작점 어프로치 약 1.2km, 제안고개에서 성전면까지 약 1.88km를 제하고 65.4km 진행했습니다. 감사합니다.^^
첫댓글 다시보는 리뷰에 감동입니다
산행후 생채기가 말해주듯 옹골찬 산줄기와 가시잡목길에서의 풍광과 역사에 대하여 섬세하게 기록하셨으니 그 노고 치하드립니다
땅끝기맥길 힘들게 지났기에 아우님의 리뷰가 생생한 기억으로 다가왔구요 눈으로 봤지만 스쳐 지나왔기에 공부하는 마음으로 리뷰 감상했습니다 밤재 주유소는 비를 쫄딱 맞고 내려서 주인의 허락하에 화장실에서 옷을 갈아입고 저체온증을 추스린 기억이고요, 별뫼산은 두번 올랐는데 땅끝에서는 밤재 된비알, 흑석지맥에서는 땅끝탑 마을쪽으로 성봉을 기어올라 흑석길로 접어들었답니다 리뷰 감사드리며 월출산 제가 지난 흔적 살짝 보여주심도 감사했답니다 ^^
밤재 주유소 젊은 사장 몹시 불친절하더군요.
전국의 모든 기맥꾼들이 걸치는 곳이기에 한편으로 이해하고 말았습니다.
흑석지맥도 끝내셨군요.^^
성봉 아래가 제전마을이라는데 닥나무가 많아 닥나무저자를 쓰는거니 저전마을인데 전라도라 저전이 제전으로 불린다네요.
길이 낭떠러지라 들었습니다. 그래서 별뫼산 이름이 벼랑산 > 벼랑뫼 > 벼리뫼 라고 주장하는 분도 계시네요.^^ 감사합니다.^^
기맥한구간 했다고 주유소 젊은이가 절대 친절하지 않습니다...기름넣어야 친절 합니다...
기맥종주꾼하고는 아무런 상관이 없기에 무관심 했을 겁니다...ㅈ지나가는 정상석에서 찍은 생존샷은 필수 입니다.(없으면 무효)..허벅지 생채기샷은 안올려셔도 정상석 생존샷은 꼭 올리시기 바랍니다..
ㅎㅎ 진양으로 땅끝으로 기동력이 좋으십니다...
내실로 좀 들어가면 안되느냐고 했더니 차갑고 단호하게 "안돼욧~" 하던데요. ㅋ~
기맥꾼들이 호감을 주진 못했구나 하고 이해했습니다.^^
내실은 넘 무리한 부탁~
마당쇠도 거절합니다 하산길
비 쫄딱하여 화장실 부탁하였더니 흔쾌히 승낙하여 저체온 수습한걸로도 감사했답니다
담에 그 앞 지나면서도 지금까지 기름한번 넣지못해 미안한 맘이랍니다 ㅎ
우리는 밤재 주유소 귀퉁이에서 차박을 했는데요
천왕봉이가 귀신을 밧다구 합니다.
그날 밤새 비가 부슬부슬 내렸거든요.
나는것도 모르고 잠을아주 잘잣습니다.
난중에 집에와서 애길하데요.
그험한 땅끝길을 한방에 절반을 넘기셨습니다.
까시덤블에 고생하셨습니다.
부뜰이운영자님!
밤재 내려서는 막바지에 무덤이 꽤 많더군요.
아마도 맥꾼들이 뭐하는 사람들인지 궁금했던 모양입니다.^^
물을 보충할 장소가 부족해 금오마을회관에서 물보충 하느라 송장고개 전후로 우회를 한게 조금 아쉽습니다.^^
호남의 명산 월출산을 넘으셨네요 전 월출산의 명성에 가려있는 월각산 주지봉 문필봉이 마터호른 같아서 가보고 싶은 곳이네요 밤재 주유소 생각도 나고요 별뫼산이 인상이 깊었던 생각이 납니다 산행기가 장난이 아닙니다 여행작가 하셔도 될 것 같습니다 항상 응원합니다 화이팅입니다 ~~~
감사합니다.^^
매번 말씀드리지만 여러 선배님들의 산행기를 모은다고는 했는데 다 취합하지는 못했습니다.^^
이제 땅끝기맥 2구간 38.3km(제안고개~오소재 ),
3구간 35.4km(오소재~땅끝마을)을 남겨 두었습니다.
계획대로 계라리고개까지 갔더라면 2구간으로 마쳤을 수도 있었겠지만,,,
물을 얻을 수 있는 정보가 부족했고,
보조밧데리도 부족했고, (귀경 길에 유스퀘어에서 샤오미 매장을 발견, 두개 구입했습니다.^^)
밤재에서 제안고개까지 얼마나 걸리는지 공부가 부족했습니다.
두번에 갈려니 너무 심심하고, 한번에 갈려니 조금 부담스럽게 애매하게 남았습니다.^^
이 구간 월출산, 별뫼산을 지나 제안고개로 내려서셨네요.
간간히 보이는 구간구간 모습이 지난 추억을 떠올리게 합니다.
긴 여정 힘들게 지나시느라 수고많으셨습니다.
산행후의 상흔을 보니 고생했던 모습도 상상이 되네요.
이어지는 땅끝 특유의 멋진 진수를 맘껏 누려보세요.~
멋진 만남길이 기대됩니다.^^
수고많으셨습니다.
네 방장님!
외투도 찢어먹고, 바지도 찢어먹고.... 가져간 롱스패츠도 어디서 떨어뜨렸습니다. ㅠㅠ
산행도 힘들었지만 후기 올리는게 더 힘들었습니다.
우선 사진을 50장씩 한꺼번에 올리기 기능이 없어져 20장씩 따로따로 올리느라 시간이 걸렸구요.
그것도 한꺼번에 올리기가 안 되고 한장씩 한장씩 업로드가 되더군요.
사진을 올리니 부피가 엄청 커서 사진 한장마다 댓번씩 손질을 해서 크기를 줄여야 했습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올라간 사진이 앞 대가리가 맞질않고 들쑥날쑥 제멋대로 입니다.
좀 더 사진 업로드 기능에 대해 공부해야 할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못이기는척 월출산에서 한방 박는 모습 좋습니다.
허벅지의 생채기 지맥을 하시는 분들이라면 누구라도
할것 없이 공감 할만한 부분이죠..
하지만 목욕탕 가서 일반인들이 그 모습을 보면 자꾸
힐끗 거리며 이상한 사람 보듯이 합니다. ㅎㅎ
북파공작원인지?
이종격투기 선수인지?
아리송한 모습으로 ㅋㅋ
제안고개 까지의 여정 수고 많으셨습니다. 퐁라라님 ^^
다류대장님! 감사합니다.^^
이번 땅끝기맥 1구간을 진행하며 나주시와 인연을 쌓을 수 있어 즐거웠습니다.
비록 덕룡재에서 개천산까지 짧은 구간이지만, 영산 하면서도 바라만 본지라 유익하게 생각 되더군요.
강진에서 고속버스로 광주로 나가면서 영산포 영산교와 나주교를 지나던데 촌놈처럼 창문너머 풍경에 심취했습니다. 오래된 고도를 지난다는 느낌이 들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