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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양기맥(晉陽岐脈)이란?
진양기맥은 백두대간 남덕유산에서 시작하여 월봉산(1,280m), 금원산(1,353m), 기백산(1,331m), 망덕산, 덕갈산(668m), 갈전산(764.3m), 바랑산, 소룡산(780m), 황매산(1,108m), 철마산(378m), 금곡산(384.5m), 성현산(562m), 산성산(741.4m), 한우산(746m), 자굴산(897m), 망룡산(441.6m), 천황산(327m), 집현산(572.2m)을 거쳐 진주시 진양호의 남강댐까지의 산줄기로 도상거리 약 163km이다.
진양기맥이 지나는 산줄기의 행정구역을 살펴보면 시작은 전북 장수군과 경남 함양군, 거창군의 경계에서 시작하여 88고속국도를 건너면서 산청군에 진입한다. 그 후 황매산을 오르기 전에 합천군을 만나고 한티재에 닿기 전 의령군에 접한다. 대의고개를 지나 망룡산에 이르면서 진주시와 접하는 줄기로 보면 될듯하다.
진양기맥(晉陽岐脈)은 백두대간의 남덕유산에서 갈래를 쳐 남강 유역인 진양호의 남강댐에서 그 맥을 다하는 도상거리 약 159.1km의 산줄기로 남강과 황강을 가르는 분수령이 된다. 진양기맥의 서쪽 또는 남쪽의 물은 남강으로 흐르고 동쪽은 황강과 낙동강 본류로 흐른다. 백두대간에서 남덕유산에서 분기하여 남강과 낙동강의 정확한 분수령이 되는 산줄기로 본다면 의령 한우산에서 응봉산, 우보산, 돌문재쪽으로 이어가는 우봉지맥이 되겠지만 대부분 산세나 거리가 더 멀다는 이유로 자굴산, 집현산, 광제봉, 남강댐으로 이어가고 있다. 그 흐름을 살펴보면 남덕유산에서 경남 함양군과 거창군의 경계를 따라 1360봉 1014봉 남령 1151봉 월봉산 큰목재에서 올라친 무명봉에서 남쪽으로 거망 황석산을 떨구고 기맥은 북동진한다. 함양군 안의면 상계리와 거창군 북상면 월성리를 이어주는 수망령으로 내려섰다. 기백산 군립공원인 금원산으로 오른다. 금원산에서 남진하여 기백산을 지나 기맥은 동진하다 조두산 갈림봉에서 남남동쪽으로 내려가 늘밭고개에 이른다 872봉지나 상비재로 내려선다. 이후 580봉 마리고개인 24번국도 넘어 솔고개 개목고개 681봉(망실봉)에서 동진하던 줄기가 정남쪽으로 급하게 꺾여서 606봉 관술령, 여기서부터 거창군을 떠나 함양군과 산청군의 경계능선으로 간다. 망설봉 669봉 88올림픽도로인 춘전치에 이른다. 덕갈산 매봉산 갈전산 갈밭재 705봉 신애동고개 바랑산 소룡산 밀치 갈밭재 830봉에서 합천군과 산청군의 경계를 따라 남하한다. 떡갈재 황매산에서 남쪽으로 부암산을 흘리고 기맥은 서북진한다. 1035봉 삼봉 668봉 둔내리도로 검암재 월계재 용천골재 철마산 마당재 금곡산 33번국도 아등재 368봉지난 무명봉 삼거리에서 남쪽으로 기수를 돌려 의령군과 합천군의 경계를 따라 한살재 성현산 한티재 656봉 산성산 한우산 자굴산 자골티재 500봉 434봉 20번국도 머리재 망룡산에서 의령군과 진주시 경계를 따라 동남진한다. 천황산에서 기맥은 서쪽으로 머리를 틀어 진주시내를 남북을 양분하며 서쪽으로 흘러간다. 267봉 막고개 서낭재 내리곡 월명암 청현 324봉에서 남진을 한다. 269봉 광제봉 봉화대 덕현치 299봉 3번국도인 용산치 196봉 219봉 널문고개 172봉 팔각정을 지나 진양호반에서 남강이 되는 약 163km 정도의 산줄기가 도도히 흐르고 있다.
진양기맥은 공식명칭은 아니나 진양기맥 산줄기 상에 걸출한 산이 별로 없고 특별나게 어떠한 강을 구분 짓지도 못하므로 강이나 산에서 이름을 따오기가 난감하였으나 "태백산맥은 없다"의 필자인 조석필씨가 산경표를 더욱 유용하게 쓰기 위하여 산경표에서 이름을 얻지 못한 몇몇 산줄기를 기맥으로 부르자고 했으며... 진주의 명소인 진양호가 있어 그 이름을 빌려와 진양기맥이라 부르기로 했다. 남한의 산줄기 중에서는 남한강과 북한강을 가르는 한강기맥, 영산강의 북쪽 벽인 영산북기맥, 영산강의 남쪽 벽을 이루다 땅끝으로 가는 땅끝기맥을 제시하였기에 여기에 맥락을 맞춰 제안 사용한 명칭이다. 남강은 낙동강의 가장 큰 지류로서 유역면적이 영산강과 비슷하고(남강: 3466㎢, 영산기맥: 157.4㎢) 이 진양기맥의 도상거리는 영산(북)기맥의 도상거리(진양기맥: 156.6km, 영산기맥: 157.4km)와 비슷하다. 이 산줄기는 하동을 제외한 서부경남의 전 지역인 함양, 거창, 합천, 산청, 의령, 진주 등 6개 시군을 지나며 서쪽의 남강과 동쪽의 낙동강 사이를 가른다. 경상도 지역의 유일한 기맥인 진양기맥은 합수점을 따른다면 한우산에서 응봉산(597m), 우봉산(372m), 옥녀봉(342m)를 거쳐 낙동강과 남강의 합수점인 기강나루로 향해야 맞겠지만 산줄기가 진양호 쪽으로 도상거리 약 20km 더 이어지기 때문에 대부분의 기맥꾼들은 종주 방향을 남쪽으로 잡고 있다.
진양기맥을 준비하며,,,
지형도를 펴놓고 선답자들의 발길을 따라 선을 긋고, 구간을 자르고, 남강댐에서 마지막 마침표를 찍으려 하니 혼란이 생긴다. 남강댐의 북단, 그 지점은 바다도 아니요 강의 하구도 아닌 것이다. 산자분수령에 의해 산줄기는 물길을 갈라야 하건만 진양기맥은 기맥의 지위임에도 남강의 하구도 아닌 중간부분에서 맥을 다한다. 남강의 하구를 따라 선을 그어보니 그 선은 의령 한우산(836m)에서 남쪽 자굴산이 아닌 동쪽으로 방향을 바꾸어 응봉산 우봉산... 옥녀봉 남재고개 넘어 의령군 지정면 성산리 하동마을 기강(岐江)나루로 떨어지는데 신산경표는 이를 ‘우봉지맥’으로 이름 지었다.(故조은산님 글 발췌)
박성태님의 진양기맥 개요 설명을 보면, 그 연유를 두 가지 면에서 추측해 볼 수 있다.
하나는, 산줄기가 만들어질 때 백두대간이 이 산줄기에 1%만 더 힘을 실어 주었더라면 경전선 유수 터널 위에서 지금의 낙남정맥과 만나 실봉산. 대곡산. 무학산. 불모산 용지봉을 거쳐 낙동강 하구로 갔을 것이나 그것은 어차피 가화강으로 인한 인위적으로 끊어진 낙남정맥의 안타까움으로 인한 가설일 뿐이다. 즉, 낙남정맥의 산줄기가 가화천에 의해 잘린 사실은 주지의 사실이고 위 가설을 토대로 하여 그림을 그려보면, 낙남정맥은 영신봉에서 분기하여 동쪽으로 가화강을 가두며 사천만으로 들어가는 ‘가화지맥’이나 ‘진양지맥’쯤 되고, 남덕유산에서 분기한 진양기맥은 진주에서 남강둑을 넘어 실봉산으로 이어져 마침내 낙동강 하구로 가는 낙남정맥이 된다.
또 다른 하나는,,,
하천법상 진양호에서 사천만에 이르는 국가하천인 가화천(실제로는 유역변경 수로가 가화천과 연결된 것임)이 낙남정맥을 자르고 지나가는 것을 설명할 때 진양호를 둘러싸는 산줄기가 백두대간과 낙남정맥 그리고 진양기맥이라고 간단히 설명하여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남강댐 북단으로 가게 했으며 자굴산으로 가기전에 한우산에서 왼쪽으로 가서 남강의 끝으로 가는 산줄기는 우봉지맥으로 이름 붙였습니다. 진양기맥이 남강댐으로 간다고 해서 ‘산자분수령’을 완전히 무시한 것은 아닙니다. 한우산을 지나면서 부터는 남강의 지류인 의령천(가례천). 상정천. 대방천. 대곡천. 항양천. 지내천. 하촌천. 나불천을 차례로 가르고 있으며 끝으로 판문천이 남강 본류와 합수하는 남강댐 북단에서 끝이 납니다.(故조은산님 글 발췌)
박성태선생은 정맥이 바다로 향해야 하는 산자분수령의 원칙을 정하고도 시대 상황을 따라 합수점을 달리한 경우를 올바로게 바로잡고자 하였습니다. 산경표를 집대성하던 시대의 역량으로는 정맥의 하위개념은 나눌 능력이 되지 못했습니다. 신산경표가 정작 정맥의 하구를 바로 잡은 것을 탐탁치 않게 생각하고 신산경표의 공적을 폄훼하고 인정하고 싶지 않은 강호의 "나도고수"라는 산꾼이 산경표에서는 나누지도 않은 기맥과 지맥에까지 지나치게 임의로 "산자분수령 원칙"을 확장 적용한 잘못된 전제의 오류입니다.
다시말해 신산경표가 정맥이 원칙에 위반하여 합수점을 향하지 않은 오류를 바로잡은 점은 애써 외면하면서 산경표에서 규정하지도 않은 하위 개념인 기맥과 지맥이 정맥과 마찬가지로 합수점을 향하지 않는다며, 산자분수령의 원칙을 기맥과 지맥에까지 끌어당겨 적용하여 이를 신산경표의 오류라고 공격하는 기재로 사용하는 것입니다. 기맥과 지맥도 합수점에 이르러야 한다며 임의로 산자분수령의 원칙을 확장 적용하고 이에 맞추려다보니 눈에 보이는 산줄기의 주맥을 버려두고 합수점을 향해야 하는 불합리가 생겨납니다.
일찌기 태백산맥은 없다의 저자 조석필선생은 우리나라에 신 산경표가 나온 것은 산악계에 큰 획을 그은 역사적인 일이라고 쿨하게 치켜세우고 그 공적을 높이 인정하였습니다. 선배에게 찾아가 자문을 구한 박성태선생이나 후배의 커다란 업적을 물심양면 도와주고 인정해준 조석필 선생이야말로 산악인 정신에 진정한 귀감을 보였다고 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마저도 기맥이란 이름을 처음 사용한 사람은 조석필선생이라는 둥 예의 그 패권주의를 지향하는 "나도고수"라는 분이 박성태선생을 디스하고 산사람들의 마음에 갈등과 분열을 조장하여 얻은게 무언지 씁쓸하기만 합니다.
진양기맥은 결국, 남강을 가화천으로 넘기기 위해 인공적인 댐을 조성했으며, 남강의 끝은 기강나루에서 낙동강과 합수하나 남강기맥은 한우산에서 갈리는 산줄기와 가화천의 의미를 살펴 자굴산에서 남강댐으로 마무리 하는 산줄기를 따르는게 물줄기를 따르는 것보다 더 낫다는 결론을 얻었던 것입니다. 우리 현명한 산꾼들도 여기서 진양기맥의 결론을 얻을 수 있습니다. 진양기맥은 지맥의 과제가 하나 더 주어지는 것으로 남강댐 구경을 한 연후에, ‘우봉지맥’을 따라 남강의 하구 기강나루까지 이어야 제대로 된 남강의 울타리를 다 밟게 되는 셈이 되는 것입니다.
남강과 낙동강 합수점은 낙남정맥에서 갈라져 내려온 화개지맥의 끝부분 용화산과 창녕 남지읍으로 지나오는 화왕지맥의 날머리 도초산 부분, 우봉지맥 날머리 부분 함수점으로 지맥 세개가 서로 만나지는 곳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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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한산경표 남강기맥이란?
백두대간 남덕유산(봉황산)에서 발원한(참샘) 남강은 낙동강 제1의 지류로써 경남 함양군 서상면 상남리 남덕유산 서쪽 계곡에서 발원하여 남쪽으로 흐르며 덕천강 합류하여 다시 진주에서 북동으로 방향을 틀어 함안천과 합류하며 멀리 경남 의령군 성산면과 함안군 대산면 장암리 사이로 흘러 낙동강과 합류하는 유역면적 3467.52km², 강 길이 186.3km이다.
정맥은 합수점에서 끝을 맺는다는 산자분수령 원칙을 지맥까지 확대한다면 남강은 낙동강과 만나는 곳까지 물길 186.3km를 흘러 경남 의령군 지정면 성산리와 경남 함양군 대산면 장암리 사이, 보다 큰 창녕군 남지에서 낙동강과 만나며 남강은 또다른 낙동강이란 이름으로 흐르게 된다.
남강기맥은 기존 진양기맥(156.8km) 남덕유~한우산 107km, 우봉지맥 한우산~기강나루까지 30,6km로 도상거리 137.3km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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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동부 중앙에 위치한 군으로 동쪽은 백두대간을 넘어 경상남도 함양군과 거창군, 서쪽과 서북쪽은 진안군과 임실군, 남쪽은 남원시, 북쪽은 무주군과 접하고 있다. 삼국시대에 백제의 우평현이었으며 신라와의 접경지대에 위치하여 전략적으로 중요한 지역이었다. 신라의 삼국통일 후 757년(경덕왕 16)에 고택현으로 개칭하여 벽계군의 영현이 되었다. 고려초에 장수현으로 이름을 바꾸고, 1018년(현종 9)에 남원의 속현으로 병합되었다가 1391년(공양왕 3)에 장계감무가 이 지역을 함께 다스렸다. 조선 건국 후 1392년(태조 1)에 장수현을 복구하여 장계현을 병합했다. 장수의 별호는 장천이었다. 백두대간과 호남정맥 사이의 산악지대에 위치한 이곳은 금강과 섬진강의 수계가 나뉘는 곳으로 유명하다. 또 군의 동쪽 남덕유산과 백운산 사이에는 예로부터 전라도와 경상도를 이어주는 중요한 길이었던 육십령 고개가 있어 경상남도 함양과 연결되고 있다. 1895년 지방제도 개정에 의해 남원부 장수군이 되었고 1896년에 전라북도 장수군이 되었다. 1906년 월경지 정리로 남원의 두입지인 상번암면·중번암면·하번암면·진전면이 편입되어 면적이 크게 확대되었다. 1914년 군면 폐합 때 천천면·계남면·계북면은 그대로, 수남면·수내면이 장수면으로, 수서면·내진전면·외진전면이 산서면으로, 상번암면·중번암면·하번암면이 번암면으로, 계동면·계서면이 계내면으로 통합되었다. 1979년에 장수면이 읍으로 승격되었고, 1993년 계내면이 장계면으로 개칭되었다. 백두대간을 따라서 군의 동쪽에는 시루봉(1,162m)·남덕유산(1,507m)·깃대봉(1,015m)·백운산(1,279m)·월경산(980m)·봉화산(920m) 등이 솟아 있어 경상남도와의 경계를 이루며, 서부에는 천반산(647m)·성수산(1,059m)·팔공산(1,151m)·묘복산(846m) 등이 솟아 있다. 금강이 장수읍과 천천면의 중앙을 북류하고, 계남면과 장계면의 경계를 지나온 장계천을 합류한다. 또한 군의 남부에는 백운산 계곡에서 발원해 남서류하는 백운천과 장안산 서쪽 계곡에서 발원해 남류하는 용림천이 번암면 노단리에서 합쳐져 요천의 상류를 이룬다. 이 하천연안을 따라 소규모의 평야가 발달하고 있다.
경상남도 북서부 내륙 산간지방에 있는 군으로 백두대간과 수도지맥 사이에 위치한 전형적인 산간분지지역으로 예로부터 군사적 요충지와 약용작물의 재배지로 이름난 지역이다.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는 이곳의 지명이 크고 밝은 벌판이란 의미를 담은 거열·거사 등으로 기록되어 있다.진한과 변한, 신라와 가야, 신라와 백제, 신라와 후백제 사이에 위치하여 지리상의 요충지였다. 거창읍 개봉동과 마리면 말흘리 고분군의 규모와 유물들로 보아 가야연맹 중의 한 나라가 위치하고 있었다고 추정된다. 삼국시대에는 신라의 거열군이었다. 757년에 거창군으로 이름을 바꾸어 강주(진주)에 예속되었다. 이때 영현으로 여선현(지금의 위천지방)과 함음현(지금의 가조면 지역)을 두었다. 마리면 지역은 당시 이안현으로 천령군(함양)에 속해 있었다. 940년에 함음현을 가조현으로 고치고, 여선현을 감음현으로 개칭했다. 1018년에 거창현으로 강등되면서 가조현·감음현·이안현과 함께 합주(합천)에 소속되었다. 1172년에 거창에 감무를 두어 독립했다. 1271년 왜구의 침입으로 거제현이 가조현에 옮겨와서 1432년까지 머물렀다. 1414년에는 거제현과 거창현을 합하여 제창현으로 만들었다가 다음해에 거창현으로 환원하여 현감을 두었다. 1495년(연산군 1)에는 왕비의 고향이라 하여 군으로 승격되었으나 중종반정으로 1506년 다시 현으로 강등되었다. 1729년 도호부로 승격되었다. 별호는 아림이었다. 1895년 지방제도 개편으로 군이 되었으며, 1896년에 경상북도에 속했다. 1914년 군면 폐합으로 마리면·위천면·북상면을 안의군에서, 신원면을 삼가군에서 편입시켰다. 1937년 거창면이 읍으로 승격되었고, 1951년 신원면에서 거창양민학살사건이 일어나 거창지역의 현대사에서 잊지 못할 사건으로 남게 되었다. 남부지방의 유일한 고원지대인 진안고원에 이어져 있는 산간침식분지이며, 서쪽에 백두대간과 북쪽에 수도지맥을 경계로 경상북도·전라북도와 접하고 있다. 북쪽에는 남덕유산(1,507m)·삼봉산(1,254m)·수도산(1,317m)·단지봉(1,327m), 서쪽에는 기백산(1,331m)·금원산(1,353m)·월봉산(1,279m), 동쪽에는 두리봉(1,133m)·의상봉(1,046m)·비계산(1,126m)·오도산(1,134m)·숙성산(899m) 등이 둘러 있고, 남쪽은 비교적 낮은 보록산(796m)·월여산(863m)·갈전산(764m) 등으로 둘러싸인 산간분지를 이룬다. 대분지 속에도 호음산(930m)·건흥산(563m)·금귀산(710m)·보해산(912m) 등이 분포되어 웅양·고제·위천·마리 등의 작은 분지들이 발달했다. 군내의 산들은 낙동강 지류인 황강·남강·감천·금강 등의 발원지가 되고 있다. 위천(渭川)이 분계·산수(山水)·소정(蘇井) 등 작은 지류들을 합류하면서 군의 서부를 흘러내려오다가, 황강천·계수천·남산천 등이 합류하여 이룬 황강과 거창읍에서 만나 남서류한다. 군의 동부를 흘러내린 가천도 지산천과 합류하여 남하면에서 황강으로 흘러든다. 거창군은 고대의 유물유적이 많을 뿐만 아니라 동쪽으로 가야산, 서쪽으로 지리산, 북쪽으로 덕유산 등 3대 국립공원과 남쪽에 1988년 완공된 합천 댐 등이 있어 천혜의 관광중심권에 위치해 있다. 위천면 대경리 일대의 위천계곡에 위치한 수승대는 국민관광단지로 정비된 군의 대표적인 관광명소로 이황이 이름지었다고 한다. 형태가 거북 같아서 일명 거북바위라고도 한다. 주위의 노송과 누각이 어울려 절경을 이루며, 건계정·거열성도 함께 알려져 있다.
경상남도 서부에 있는 군으로 88올림픽 고속도로의 개통으로 영남과 호남을 연결하는 주요 교통로가 되었으며, 자연경관이 빼어나고 유물·유적이 많아 도내 유수의 관광지로 손꼽힌다. 삼국시대 중기까지 가야문화권에 속했으며, 백제와 신라의 경계에 위치하고 팔량치와 같은 소백산맥을 넘는 교통로가 있어 7세기초에는 백제와 신라의 세력이 맞부딪쳤던 곳이었다. 신라는 이곳에 속함군(速含郡)을 설치했으며, 통일신라시대의 행정구역 개편으로 757년(경덕왕 16) 천령군(天嶺郡)으로 개칭하고 이안현(利安縣 : 또는 安陰)·운봉현(雲峰縣)을 영현으로 관할했다. 고려초에 허주(許州)로 개칭하고, 995년(성종 14) 도단련사를 두었다가 1012년(현종 3) 함양군으로 강등되었다. 1018년(현종 9) 합천의 속현이 되었다가 1172년(명종 2) 감무가 파견되었다. 조선초인 1395년(태조 4)에 지군사(知郡事)로 승격되고, 1466년(세조 12) 함양군이 되었다. 조선 후기인 1729년(영조 5) 도호부로 승격되었다가 1788년(정조 12) 다시 함양군으로 강등되었다. 함양의 별호는 함성이었다. 지방제도 개정에 의해 1895년 진주부 하동군, 1896년 경상남도 하동군이 되었다. 1914년 군면 폐합으로 석복면·병곡면·마천면·백전면은 그대로, 북천면·원수면·관변면이 위성면으로, 덕곡면·지내면이 지곡면으로, 휴지면·엄천면이 휴천면으로, 유등면·예림면이 유림면으로, 도북면·모간면이 수동면으로 통폐합되었다. 이때 안의군(安義郡)이 폐지됨에 따라 서하면·서상면은 그대로, 현내면·황곡면·초참면이 안의면으로, 대대면·지대면이 대지면으로 통합되어 함양군으로 편입되었다. 1933년 위성면이 함양으로 개칭되고, 1957년에 함양면이 읍으로 승격되면서 석복면이 편입되었다. 또한 대지면도 1933년에 안의면에 편입되었다. 1948년 여수순천10·19사건과 6·25전쟁으로 인해 지리산을 끼고 있는 이곳은 많은 상처를 입었다. 1984년 군의 중앙부를 관통하는 88올림픽 고속도로가 개통되어 전라도와 경상도를 이어주는 동맥이 지나게 되었다. 1998년에 엄천출장소가 폐지되었다. 백두대간의 동사면에 남북으로 길게 자리잡고 있으며, 그 지맥들이 사방을 둘러싸고 있는 전형적인 산간분지를 이룬다. 특히 북쪽에 덕유산국립공원과 남쪽에 지리산국립공원이 있는 한국의 대표적인 산악관광지이다. 북쪽으로 남덕유산(1,507m)·금원산(金猿山 : 1,353m)·기백산(箕白山 : 1,331m)·망설봉(望雪峰:620m), 남쪽으로는 지리산(智異山:1,915m)을 비롯하여 제석봉(1,806m)·촛대봉(1,704m)·칠선봉(七仙峰:1,576m) 등이 연이어 솟아 있으며, 서쪽으로는 깃대봉(1,015m)·백운산(白雲山:1,279m)·삼봉산(三峰山:1,187m) 등 1,000m가 넘는 고산준령이 솟아 있다. 또한 군의 동부로 오면서 마안산(508m)·화장산(586m)·승안산(昇安山:309m) 등 비교적 낮은 산지들이 솟아 있다. 주요 관광자원으로는 지리산 천왕봉으로 오르는 3개의 등산로를 비롯해서 고사목과 원시림, 한신계곡·백무동·용추폭포·용추사지·옥계(玉溪)·서계(西溪) 등 많은 계곡과 소(沼), 폭포 등의 관광명소가 있다. 수려한 자연경관과 함께 농월정·거연정·군자정 등이 조화를 이루고 역사적 유물이 군내 전역에 산재하여 천혜의 관광조건을 갖추고 있다.
경상남도 서북부에 있는 군으로 국립공원, 지리산과 황매산 등 높은 산으로 이루어진 산간지역으로 경작지는 부족하나 관광자원이 풍부하다. 산청군은 조선시대의 산청현과 단성현 지역이 합하여 이루어진 군이다. 옛 산청현은 본래 신라의 지품천현(知品川縣)으로서 757년(경덕왕 16)에 산음현으로 이름이 바뀌어 궐성군(闕城郡:단성)의 영현이 되었다. 고려시대인 1018년(현종 9)에 합주(陜州:합천)의 속현이 되었다가, 1390년(공양왕 2)에 감무를 둠으로써 독립했다. 조선초인 1413년에 산음현이 되었으며, 1767년(영조 43)에 고을 이름을 산청으로 고쳐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별호는 산양이었다. 지방제도 개정으로 1895년 진주부 산청군, 1896년에 경상남도 산청군이 되었다. 1906년 월경지 정리에 의해 진주의 두입지였던 파지산면·백곡면·금만면·사월면·삼장면·시천면이 산청에 편입되어 면적이 크게 넓어졌다. 1914년의 군면 폐합 때 생림면·초곡면·고읍면·모호면을 생초면으로, 서하면·서상면·금석면을 금서면으로, 군내면·월동면을 군월면으로, 지곡면·수곡면을 지수면으로, 차현면·황산면을 차황면으로, 오곡면·부곡면을 오부면으로, 삼장면과 시천면은 그대로 면의 이름을 유지했다. 이때 단성군(丹城郡)을 폐지하여 단성의 현내면·원당면과 산청군의 사월면·파지면·금만면·백곡면을 합하여 단성면으로, 단성의 오동면·도산면을 도산면으로, 신등면·법물면을 신등면으로 통합하고, 단성의 생비량면과 북동면은 그대로 합속함으로써 산청군의 영역이 더욱 확장되었다. 1918년 군월면·지수면을 합하여 산청면으로, 1942년 북동면을 신안면으로 개칭하고, 1979년에는 산청면이 읍으로 승격했다. 군의 서쪽에 솟은 천왕봉(1,915m)을 기점으로 하는 지리산 줄기가 남북으로 뻗어 있으며, 북쪽에는 백운산의 지봉인 황매산(1,108m)·송의산(539m)이 있다. 군의 중앙에는 웅석봉(1,099m)과 둔철산(812m)이 솟아 있다. 이들 산 사이를 남강의 지류가 흐르면서 계곡 양안에 좁은 평야를 이룬다. 경호강이 군의 중앙부를 남북으로 관류하며, 지리산에서 발원하는 덕천강과 황매산에서 발원하는 양천강·사정천이 합류하여 남강으로 흘러든다. 경호강을 끼고 진주-함양을 연결하는 국도와 대전-진주간 고속도로(공사중)가 지나며, 의령에서 시천면 지리산까지 연결되는 국도와 신안면에서 교차한다. 지리산국립공원이 있어 많은 관광객들이 이 지역을 찾고 있다. 시천면 중산리를 경유하는 지리산 등반 코스는 하동군 하동읍·화계면과 함양군 마천면을 각각 경유하는 코스와 함께 지리산 정상 등반의 3대 코스로 알려져 있다. 지리산으로 들어가는 중산리계곡에는 법천폭포·망바위·문창대·법계사 등 많은 명소가 있다.
영각사매표소(靈覺寺賣票所) → (3.4km) → 남덕유산(南德裕山/1,507m) → (3.3km) → 1,014.7봉(H) → (0.3km) → 남령(藍嶺/895m) → (3.7km) → 월봉산(月峯山/1,279m) → (1.2km) → 큰목재(1,050m) → (1.5km) → 수망령(水望嶺/물바라기재/900m) → (2.3km) → 금원산(金猿山/1,353m) → (3.8km) → 기백산(箕白山/1,331m) → (3km) → 늘밭고개 → (3km) → 상비재 → (1.6km) → 바래기재(望峙/망티/성주터널/3번국도/바래기황소한마리식당/320m)
늘밭고개 - (1.75km) - 상비재 - (0.25km) - 580.7 - (1km) - 바래기재, 3번국도 - (2km) - 솔고개 - (2.4km) - 개목고개 - (2.8km) - 681.2 - (3.5km) - 관술령 - (2.6km) - 망설봉/덕운산 - (0.65km) - 숙지령 - (3.75km) - 669.2 - (1.25km) - 골무산갈림길 - (1.95km) - 춘전치, 1084 지방도 - (1.9km) - 덕갈산 - (0.5km) - 1034도로 - (1.05km) - 매봉산분기 - (0.9km) - 갈전산
갈전산 - (0.3km) - 갈밭재 - (4.1km) - 철마산 - (2.7km) - 바랑산 - (2.8km) - 소룡산 - (1.4km) - 밀치, 59번국도 - (0.65km) - 650 - (2.2km) - 작은황매산 - (0.6km) - 떡갈재 - (2.7km) - 황매산 - (0.6km) - 상봉 - (0.4km) - 중봉 - (0.45km) - 하봉 - (1.5km) - 삼봉 - (0.85km) - 668.2 - (1.1km) - 구름재 - (0.2km) - 504 - (1.1km) - 1041도로 - (0.65km) - 갈령 - (1.3km)-1041도로 - (1.1km) - 도로 - (0.4km) - 매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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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거창군 북상면 월성리, 함양군 서상면 상남리, 전북 장수군 계북면 원촌리 사이에 위치한 삼군봉이다. 남덕유산은 덕유산 최고봉 향적봉 남쪽에 위치한 덕유산 제2봉이다. 금강, 남강, 황강이 이 산에서 발원한다. 남덕유산에는 신라 헌강왕 때 심광대사가 창건한 영각사가 있다. 조선시대에는 봉황산(鳳凰山) 혹은 황봉(黃峯)이라고 하였다. 『여지도서(보유)』(안의)에 "황봉은 덕유산에서 남쪽으로 달려 나와 이 산봉우리를 이룬다. 관아의 서북쪽 65리에 있다."라고 하였다. 또한 『대동지지』(안의)에는 "봉황봉(鳳凰峯) 즉 덕유산 동쪽 지맥은 서북쪽 70리에 있다."라고 하였다. 『1872년지방지도』(안의)에 현의 북쪽에 황봉이 묘사되어 있으며 산에 영각사가 함께 표기되어 있다. 이를 통해 고지도에서도 황봉·봉황산·봉황봉으로 지명을 혼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지리산 다음으로 넉넉하고 덕이 있다고 하여 덕유산이라고 하고, 덕유산의 연봉의 남쪽 끝자락에 위치한다고 하여 남덕유산이라고 하였다. 남덕유산은 경남 거창군 북상면 월성리, 함양군 서상면 상남리, 전북 장수군 계북면 원촌리와 경계하며 솟아있는 산으로 덕유산과 맥락을 같이 한다. 즉 덕유산의 최고봉인 향적봉에서 남쪽으로 약 15km 지점에 위치한 덕유산 제2의 고봉인데, 향적봉이 백두대간에서 약간 비켜나 있는 반면 남덕유산은 백두 대간의 분수령을 이루므로 백두대간 종주팀들에게는 오히려 향적봉보다 더 의미있는 산이 된다. 등산길에 놓인 봉우리는 하봉, 중봉, 상봉으로 나뉘며 상봉이 되는 봉우리는 동봉(東峰)과 서봉(西峰) 두 봉우리가 된다. 그 중 동봉이 정상이 되는 봉우리이며 서봉은 장수덕유산으로 불리운다. 남덕유산은 북덕유와 달리 장쾌한 산사나이 기상으로 바위 뼈대로 솟은 개골산이다. 산 경치가 묘향(妙香)과 금강(金剛)을 닮아 황홀할 만큼 아름답다. 등산길은 가파르고 험준하여 7백여 철계단을 만들어 놓았다. 남덕유에서 장수덕유로 불리는 서봉은 동봉과 사이 황새 늦은목이라는 능선을 갖고, 남쪽으로 육십령의 대령을 안고 자수정 산지로 유명하다. 또한 장수 아름다운 토옥동(土沃洞)계곡을 거느리며 그 아래로 장수 온천이 분출되고 있다. 반면에 동봉은 삿갓봉을 거느리고 한말 거창의병사의 빛나는 한쪽을 기록하고 있다. 명소로서 함양쪽에 서상 영각사와 1984년 완공된 덕유교육원이 있으며 거창에는 사선대, 분설담 등을 거느린 월성계곡이 자리한다. 월성계곡 상류에 위치한 황점마을은 옛 이름이 삼천동(三川洞)이다. 조선조 때 쇠가 난 곳이며 지금은 청소년 여름 휴양지와 민박촌으로 개발되어 있다. 산행은 황점에서 폭포골로 들어 영각재를 거쳐 오르는데 3㎞에 3시간 걸린다. 그밖의 코스로 덕유교육원에서 참샘을 거쳐 정상에 오르기도 하고 황점에서 바른골이나 삿갓골재를 거쳐 오르기도 한다. 덕유산은 남부지방에 있으면서도 서해의 습한 대기가 이 산을 넘으면서 뿌리는 많은 눈 때문에 중부 이남의 겨울 눈산행으로 소백산과 쌍벽을 이룬다. 남덕유에서 덕유산 향적봉까지 이어지는 키가 큰 나무가 거의 없는 장쾌한 설원 능선은 겨울 종주산행으로 인기가 있다. 1-2월의 눈산행과 10월의 단풍산행 순으로 인기 있다.
남부군도 덕유산에서 활동한 전력이 있고, 6.25에 지리산과 덕유산 일대는 빨치산의 가열찬? 활동영역이었습니다. 영각사도 빨치산의 소굴이 되다보니 국군의 화공작전으로 전소된 전력이 있다지요.
♤ 영각사(靈覺寺)/ 경상남도 함양군 서상면 상남리 덕유산에 있는 절
대한불교조계종 제12교구 본사인 해인사(海印寺)의 말사이다. 876년(헌강왕 2)심광대사(深光大師)가 창건하였는데, 심광대사는 신라 구산선문(九山禪門) 중 선주산문(聖住山門)의 개산조인 무염(無染, 801∼888)의 제자로 신라 최치원(崔致遠)이 지은 「성주사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聖住寺朗慧和尙白月葆光塔碑)」에는 ‘心光(심광)’이라고 되어 있다. 창건 뒤의 역사는 거의 전래되지 않고 있다. 조선 세조 31년(1449) 원경(圓境)대사가 중건, 중종 18년(1523) 성묵(性默)대사가 중창하였고, 1770년(영조 46)에 상언(尙彦)이 『화엄경』 판목(板木)을 새겨서 이 절에 장경각(藏經閣)을 짓고 봉안하였다. 또한, 상언은 이 절에 머물면서 절을 옮기지 않으면 수재(水災)에 의하여 무너지게 되리라고 예언하였는데, 얼마 뒤 홍수가 나서 절이 무너졌다고 한다. 1907년 화재로 소실된 것을 강용월(姜龍月)이 중창하였고, 한때 많은 불제자들의 수행처로 이용되었다. 6.25때 소실되면서 설파(雪坡)대사가 감수하여 만들어 법당내에 보존하여 오던 화엄경판까지 불타 버렸다. 그 뒤 1959년에 국고 보조를 얻어 해운이 법당을 중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대웅전과 산신각·요사채 등이 있다.
진양기맥을 시작하며 동강의 발원지 참샘을 그냥 지나칠 수 없어 달달한 물맛을 보고 갑니다.
♤ 남강 발원지 참샘 입구 [남덕유산0.8 영각매표소2.6 /1,440m]
남덕유산 정상에는 맑은 참샘이 있어 겨울에는 김이 무럭무럭 나는 온수이고, 여름에는 손을 담글 수 없는 찬물이 솟아 오르는데 천지 자연의 신비한 이치는 사람으로서 말하기 어렵고 그저 그렇게 되려니 하고 인정하기란 너무 오묘한 자연의 신비감이 있다. 남덕유산은 3대강의 발원샘을 갖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임진왜란 당시 나라를 구하기 위해 왜구들과 싸웠던 덕유산 의병들이 넘나들었던 육십령은 금강(錦江)의 발원샘이며, 정상 남쪽 기슭 참샘은 거룩한 논개의 충정을 담고 있는 진주 남강(南江)의 첫 물길이 되며, 북쪽 바른골과 삿갓골샘은 낙동강(洛東江)의 지류 황강(黃江)의 첫 물길이다. 즉 경남의 젖줄 남강이 여기서 발원한다.
함양군 안의면 소재지를 흐르는 정비된 남강 옛 금천(비단내)의 모습입니다. 옛 읍치자리인 청풍루에서 바라보았습니다.
♤ 남강(南江)
남강의 발원지가 어딘지 궁금해진다.
남강은 개인적인 생각은 높이와 상징성으로 본다면 지리산 천왕샘이겠지만, 강 유역면적이나 길이로 본다면 남덕유산(봉황산) 은재골 참샘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그리고 고문헌에도 남강의 발원지를 김정호의 대동여지도에는 봉황산( 현,남덕유)이라 표기하고 있고 동시대의 필사본 지도 "동여도"에도 봉황산이라 표기되어 있다. 언제쯤부터 지리산 천왕샘과 남덕유의 참샘이 남강의 발원지라 불리웠는지 알 수 없지만 지리산과 덕유산에서 흐르는 물은 모두 경남의 식수원이며 한국에서 세번째로 긴 강 낙동강(525km)을 제외하고 경남 제1지류로서 유역면적 3467㎢, 길이 186.3km에 달하며 서쪽 끝자락 함양군 서상면에서 시작해 동부 창녕지역까지 내륙을 가로질러 그 끝 모두 경남에 두고 있다.
남강 상류부 명칭이 경호강(鏡湖江)으로 지금의 경호강은 산청군 생초면 어서리 강정에서 진주의 진양호까지 80여리(약 32km)의 물길을 이르는 말이며, 함양군 남덕유산[1,507m]에서 발원하여 남류하면서 지류인 덕천강(德川江)을 합하여 진양호를 이룬다. 진주 지역에서는 북동으로 유로를 바꾸어 함안군 대산면에서 낙동강과 합류한다. 경호강 유역은 북쪽에 백두대간 지리산이 있어 여름에 남서쪽에서 오는 저기압이 이 산맥에 부딪혀 지형성강우(地形性降雨)가 많은 편이다. 이 지역에는 산청읍과 생초면과 같은 남강 상류 지역의 분지가 발달해 있는데, 이들 분지 주변에는 일찍부터 하성 충적지가 발달하여 도시가 성장하기에 유리한 조건을 제공해 주었다. 경호강은 진주~대전간 고속도로를 이용하거나 국도를 이용하면 쉽게 접근할 수 있다. 3호선 국도 및 진주~함양간 고속도로와 나란히 하기 때문에 차를 이용하면서도 쉽게 아름다운 경호강을 볼 수 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남강과 진주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조선시대 임진왜란과 논개의 충절이 한몫 하며 역사적으로 남강 유역에서 경제적, 문화적으로 가장 많은 혜택을 받은 도시가 진주이다. 진주 남강의 유등축제는 인진왜란(1592년 10월) 진주성 싸움에서 김시민 장군이 3천 8백의 군사로 왜군 2만을 크게 무찌른 진주대첩 때 성밖의 의병과 지원군과 남강을 건너려는 왜군을 저지하려는 군사 전술로 쓰였다. 통신수단으로 쓰이던 유등은 1593년 6월 12만 왜군에 의해 진주성이 함락되던 통한의 계사순의(癸巳殉義)가 있고 난 뒤 나라위해 목숨바쳐 의롭게 순절한 7만 병사와 死民의 얼과 넋을 기리는 행사로 해마다 유등축제로 이어져 내려온다. 진주를 흐르는 남강은 전체 186.3km중 40km이지만 진주 사람들에게 남강은 떼놓을 수 없을 것이며 남덕유에서 발원한 남강은 거창의 백운산에서 발원한 위천을 만나고, 지리산 천왕샘에서 발원한 엄청강을 만나고, 지리산에서 발원한 물길 덕천강과 만나 진주시 진양호로 들어가지만 결국은 모두가 남강의 물줄기인 셈이다. (배방장님 글 발췌)
♤ 안의현(安義縣)/ 안의면
안의현(安義縣)은 경남 함양군 안의면과 주변지역에 설치되었던 조선시대 지방행정 조직이다. 본래 서상, 서하, 북상, 위천, 마리를 포함하여 함양보다 큰 고을이었을 정도로 유래가 깊으나 지금은 면단위에 머문다 그 유래가 사연이 깊다. 이 지역은 덕유산 남쪽의 여러 갈래 산줄기로 둘러싸인 분지에 자리잡고 있는데, 덕유산에서 발원한 남강의 금천(비단내)을 중심으로 마을이나 농경지 등이 자리잡고 있다. 백두대간 주요 교통로인 육십령을 통해 전북 무안, 장수와 연결되는 교통의 요지이기도 하다. 안의면 소재지가 옛 안의현 읍치로 다른 면에 비해서 도심의 규모가 큰 편이다. 화림동 계곡을 비롯하여 경치가 빼어난 명소가 많은 편이다.
*안의현의 피맺힌 역사 : ☞ https://weekly.donga.com/List/Series/3/all/11/75860/1
거창군 거창읍 읍내를 흐르는 잘 정비된 황강의 모습입니다. 거창고속터미널과 시흥여객 시외버스터미널이 바로 붙어있는데, 중앙교 다리를 넘어 100m쯤 가면 시골 마을을 다니는 농어촌버스를 타는 간이 정류소가 따로 있습니다. 여기서 춘전치로 들어가는데 20여 분 걸리더군요.
♤ 황강(黃江)
황강은 경남에서 남강에 이어 낙동강 지류중 두 번째로 길며 전북 무주군, 경북 김천시와 경남 거창군 경계에 있는 거창군 궁항리에서 발원하며 길이는 지방하천 구간과 국가하천 구간을 합쳐 111km이다. 거창군 거창읍에서 거창 위천과 합류하면서 국가하천으로 바뀐다. 합천군에 들어서면 합천호가 있으며 합천댐이 생기면서 만들어진 호수다. 합천군 회양리에서 합천읍을 향해 동류하며 합천읍에 들어서면 일해공원(옛 새천년 생명의숲)이 있는데 일해공원을 지나 낙동강으로 동류하며 합천군과 창녕군의 경계인 합천군 청덕면 적포 부근에서 낙동강과 합류한다.(수도지맥과 미타분맥의 합수점)
계단 위 영각재에 배낭을 놓아두고 남덕유를 다녀옵니다. 진양기맥을 따르는 기맥길이지 일반 탐방로가 아니라는 친절한 안내표시가 서있네요.^^
♤ 영각재 (1,355m)
남덕유에서 영각사를 넘어다니는 주능선상 고개로 영각공원지킴터에서 2.5km 올라선 능선이자 남덕유까지 0.9km를 왕복하고, 친절하게 탐방로가 아니라고 쓰여있는 기맥길로 접어들어 하봉(1,363m)으로 향하는 갈림목이다. 영각재에서 남령까지 2.5km는 진양기맥으로 탐방로가 아니다.
하봉에서 남령까지의 길도 걷기에 좋습니다. 남령에서 월봉산까지 3.6km도 바위도 넘어서고 재미있는 길입니다. 삿갓재산장의 불빛이 계속 바라다 보이더군요. 낮에 지나면 양쪽으로 전망도 최고일듯 합니다.
남령에 내려서다가 에나멜 철망에 미끄러져 하마터면 다칠뻔 했네요. 사전 조심해야 한다고 염두에 두던 곳인데도... 남령에 깨끗한 물이 콸콸 넘쳐납니다. 간단하게 간식을 마치고 다시 출발~~
♤ 남령(藍嶺, 928m)
남령은 경남 함양군 서상면과 거창군 북상면을 연결하는 해발 928m의 2차선 도로로 37번국도가 지나가는 고개이다. 이곳은 경남의 서북부 지역이고 덕유산의 동부지역으로 지대가 높고 험하여 예전에는 오지 중의 상오지였지만 대전~사천간 고속도로가 개통되면서 접근성이 많이 개선되었다. 덕유산이 인근에 있는 청정지역으로 옛날부터 수목이 울창해 짙은 색깔이 쪽(藍)과 같다하여 남령이라 부른다.
♤ 월성리
월성리(月星里)는 북상면의 남서쪽 끝에 자리하여 전라북도와 함양군 서상면에 맞닿는데 월성, 내계, 심동, 답동, 황점 다섯 마을이 있다. 그 중 황점(黃店) 마을은 봉황산(鳳凰山) 밑에서 쇠를 만드는 점(店)이 있으므로 황점이라 했다고 한다. 월성계곡의 ‘월성’이라는 이름은 월성리 마을 남쪽 월봉산의 옛 이름인 월성산에 유래했다. 이태의 자전소설 '남부군’에서 월성리전투와 북상지서 습격사건이 나온다.
비록 어둡지만 수리덤을 왜 칼날봉이라고 하는지 정상에 감추어둔 칼날을 확인하고 가야겠죠.^^
♤ 수리덤(칼날봉, 1,167m)
우람한 바위로 이루어져 있는 뾰족하고 거대한 암봉으로 수리덤이라 불리는 이유는 월봉산쪽에서 보면 수리가 날갯짓을 하는 형상이기 때문입니다.
월봉산 직전에 잠깐 힘든 오르막이 있네요.
♤ 월봉산 (月峰山 1279.2m)/ 경상남도 거창군 북상면과 함양군 서상면에 걸쳐 있는 산
덕유산국립공원 남쪽에 있는 산으로 북쪽능선을 따라 남령(藍嶺)을 지나 덕유산(1,614m)에 이르고, 남쪽으로는 큰목재·은신치(隱身峙)를 지나 거망산(擧網山, 1,184m)에 이른다.
동쪽사면은 함양으로 흐르는 남강(南江)의 상류인 지우천(智雨川)의 수원이 되며, 수망령을 지나 동쪽의 금원산(1,353m), 기백산(箕白山, 1,331m)과의 사이에 좁은 계곡을 이룬다. 서쪽사면은 완만하며 남강의 상류 하곡을 이루고, 이를 지나 서쪽의 장수군 계내면과의 사이에는 육십령(六十嶺)이 있어 영남·호남지방의 주요한 교통로로 이용된다. 월봉산은 서상면의 남강 하곡분지(河谷盆地)를 둘러싸고 있는 동북산지의 하나로, 덕유산에 가깝고 그와 연속되는 산으로 자연경관이 아름답다. 나한당(羅漢堂)이라는 당집이 있었다고 한다. 서쪽 산록으로 국도가 나 있다.
동쪽 하늘에 코발트색 여명이 밝아옵니다.
♤ 큰목재 (살목재/ 1,050m)
월봉산에서 직진하면 노상마을로 하산하는 공터와 사거리 안부를 만나게 된다. 사거리안부 우측의 산길은 노상마을(2.6km)로 등하행 산길이고, 좌측으로 보이는 산길은 월성리로 이어지는 산길이다.
거망산갈림길인 여기 삼면봉에서 기맥은 수먕령으로 가야하지만 잠시 반대편 거망산-황석산을 다녀올까요.^^
♤ 거망산갈림봉(1,150m)/ 삼면봉(북상면, 서상면→안의면)
함양군 서상면과 안의면, 거창군 북상면이 만나는 삼면봉이다. 남덕유산에서 동남쪽으로 금원산-기백산과 거망산-황석산의 갈림길인 삼거리봉이다. 삼거리봉에서 수망령은 1.32km, 거망산은 4.85km이다. 거망산(1,184m)은 경남 함양 서하면에 위치한 산으로 덕유산에서 남으로 뻗은 백두대간 줄기가 둘로 나뉘어져 하나는 지리산으로 향하고 또 다른 능선을 월봉산을 거쳐 거망산을 지나 황석산에서 그 흐름을 멈추게 된다. 거망산은 함양군 내에 있는 해발 1,000m급 이상 11개 고봉 중 막내 산이다.
사진은 금원산 오름에 바라본 거망산 가는 줄기입니다. 거망산 하면 흑진주, 거망샘의 달달한 물맛을 그냥 지나칠수 없습니다.
♤ 거망산(擧網山, 1184m)
경남 함양군 서상면 도천리에 있는 거망산은 여름산이다. 이 산에 가려면 태장골과 지장골을 오르내려야하고 그사이 진입로엔 천혜의 용추계곡이 있어 산행 중 땀을 씻어 더위를 잊을 수 있기 때문이다. 서쪽으로 기백산·금원산이 위치하고 남쪽으로 황석산의 스카이라인이 유장하게 흐른다. 장거리나 거친 산행을 즐기는 등산객은 30㎞가 넘는 황석산 거망산 수망령 금원산 기백산을 하루 만에 돌기도 한다. 네 개의 산에서 흐르는 청류는 지우천, 용추계곡, 용추폭포를 형성한다. 거망(擧網)은 글자 그대로 ‘그물을 던진다’는 뜻이다. 일설에 따르면 중생들에게 불법의 그물을 던져 제도하겠다는 무학대사의 의지를 반영한 이름이라고 한다. 그물을 던져놓은 것 같은 산세라 해서 유래됐다는 설도 있다. 산 곳곳에 무학대사가 머물렀다는 은신암(隱身庵)을 비롯해 지리산 빨치산의 마지막 생존자 ‘남도부’ 하준수, 여자 빨치산 정순덕의 이야기가 숨어 있다. 하준수는 거망산 은신골에서 일제의 징병을 피한 바 있으며, 정순덕은 1963년 체포될 때까지 남장 빨치산으로 불리며 거망산을 거점으로 군경을 괴롭혔다. 거망산의 산세가 워낙 깊다 보니 몸을 숨기는 장소로 애용된 것 같다. 6·25전쟁 때 빨치산이 된 남편의 겨울옷을 전하려 산에 들었다가 같은 길을 가게된 정순덕의 활동무대가 거망산이기도 하다. 폭풍과도 같은 질곡의 한국현대사를 산 비운의 여성 정순덕(1933년 6월~2004년 4월). 이홍이와 함께 1963년까지 지리산에서 최후까지 버텼으나 11월 12일 새벽 생가 근처인 지리산 삼장면 상내원리에서 국군과 교전 끝에 부상을 입고 체포됐다. 그로부터 41년이 지난 2004년, 그는 72세의 파란만장한 삶을 마감했다. 이곳 거망산에서 국군 1개 소대를 잡아 억류한 뒤 무장해제 시켜서 돌려보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기백산 가다가 전망대에서 바라본 거망산-황석산 줄기입니다. 좌측 끝으로 황석산 남봉, 정상, 북봉.... 솟아오른 암봉이 연이어 보입니다.
♤ 황석산(黃石山, 1,192.5m)
황석산은 산봉우리 주변에 노르스름한 바위가 많아 붙여진 이름으로 함양의 마터호른이라 한다. 안의면(安義面)의 주산인 황석산은 범상치 않은 바위산으로 풍수에서 말하는 화산(火山)이다. 이는 산봉우리가 뾰족하고 멀리서 보면 마치 활활 타는 불꽃을 닮았기 때문이다. 정유재란 당시 왜군에 맞서 마지막까지 항거하던 안의 고을 사람들의 불같은 열정이 서려 있는 역사의 현장이기도 하다. 부녀자들은 천길 절벽에서 몸을 날려 지금껏 황석산 북쪽 바위 벼랑이 핏빛이라는 전설이 있는 황석산성이 있다. 황석산에서 능선 따라 북으로 거망산을 지나 수망령 너머 덕유산이 조망되고 금원산, 기백산이 눈앞에 펼쳐진다. 그 오른쪽 시계방향으로 수도산에서 가야산까지, 가깝게는 거창의 보해산, 의상봉, 오도산, 합천의 황매산, 의령의 자굴산, 한우산 등등이 층층겹겹을 이룬다. 남쪽에는 지리산의 웅석봉을 비롯해 천왕봉에서 노고단까지 주능선의 영봉(靈峰)들이 하늘금을 긋는다. 백두대간의 마루금 따라 오른쪽으로 백운산, 깃대봉이 아스라하고 대봉산, 도숭산은 손을 내밀면 잡아 줄 것 같다. 온 사방에 널린 높고 낮은 첩첩산중 고봉준령들을 모두 헤아리기도 벅차다.
♤ 황석산성/ 사적 제322호
자연 암릉을 이용한 요새 황석산성은 함양땅의 "안의" 사람들의 지조와 절개를 상징하는 중요한 유적이다. 소백산맥을 가로지르는 육십령으로 통하는 관방의 요새지에 축조된 삼국시대부터의 고성이다. 사적 제322호인 황석산성은 정유재란 당시 정규군이 아닌 의병과 일반 백성들이 왜군 7만5,000여 명에 맞서 치열한 전투를 벌인 곳이다. 결국 성은 함락되고 함양 군수 조종도와 안음 현감 곽준이 전사했다. 성 안의 남자들이 모두 왜군에게 죽임을 당하자 부녀자들은 바위 절벽에 몸을 던져 죽음을 택했다. 그 흘린 피가 내를 이루었다고 하여 지금도 피바위라 이름 붙은 바위가 전해 내려온다.
♤ 거연정
예로부터 ‘좌안동 우함양’이라 했다. 함양은 안동에 버금가는 선비의 고장이다. 일찍이 묵향의 꽃이 핀 함양에는 사대부들의 학문과 문화가 만발했고, 동천 중의 동천이라 할 수 있는 안의삼동(安義三洞)이 위치하고 있다. 그중에서도 정자가 즐비하게 들어서 있는 화림동은 함양 유림의 선비문화를 고스란히 간직한 동천이다. 화림동은 안의에서 장수 방향으로 난 육십령 고개를 거슬러 올라가는 계곡을 일컫는다. 화림동계곡은 골이 넓고 물의 흐름이 완만하다. 청량하고 풍부한 물줄기는 계곡의 만을 감아 돌면서 이곳저곳에 작은 못을 만든다. 더러는 너럭바위를 유연하게 타고 넘기도 하고, 하얀 포말을 일으키며 못으로 떨어지기도 한다. 화림동계곡은 정말 아름답다. 맑은 물과 너른 암반, 기암괴석과 늙은 소나무 숲이 어우러져 있고, 아름다운 승경이 절정을 이루는 곳마다 정자들이 연이어 자리하고 있다. 자연과 더불어 요산요수하며 음풍농월을 즐기던 함양의 선비들이 맑은 계곡과 수정 같은 옥수를 놓칠세라 건립한 정자다. 이러한 정자들은 주위의 자연과 조화를 이뤄 마치 수채화 같은 풍경의 연계 경관을 형성한다. 거연정은 중추부사를 지낸 전시서(全時敍)가 지은 정자다. 1640년(인조 18)경 그는 서산서원을 짓고 거연정의 위치에 억새로 만든 초정을 처음 지었다. 화림교 앞에 세워져 있는 ‘화림재전공유허비’에는 “옛 안의현 서쪽 화림동에 새들마을이 있으니 임천이 그윽하고 깊으며 산수가 맑고 아름답다. 화림재 전공이 세상이 어지러워 이곳에 은거했다”라고 쓰여 있다. 1868년(고종 5)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따라 서산서원은 훼철되었다. 이후 1872년 전시서의 7대 손인 전재학이 억새로 된 초정을 철거하고, 서산서원의 재목으로 거연정을 중수해 오늘에 이르렀다.
♤ 농월정
수망령의 잘생긴 정자입니다. 여름에 바람골이라 시원할거 같은데 바람이 없으면 모기가 많게도 보이네요. 딱 2인용입니다.^^
시원하게 머리도 감고 세수도 하고 물을 준비하여 금원산으로 다시 기맥길을 향합니다.
♤ 수망령(水望嶺, 915m)/ 물바라기재/ 경남 함양군 안의면 상원리-거창군 북상면 월성리
우리말로 물바라기재라고 일컫는 수망령(水望嶺)이다. 옛날부터 가뭄이 들 때 이곳에서 먼저 비가오기 시작하면 그때부터 많은 비가 온다해서 부근의 주민들이 이곳에 비가 오기를 기다린다는 의미로 수망령 또는 물바라기재로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경남 거창군 북상면과 함양군 안의면의 경계를 이루는 해발 915미터의 이 고개는 동으로 금원산과 기백산, 서쪽으로 월봉산과 거망산 등 1,200~1,300미터급 준봉들을 거느리며 남북으로 길게 뻗어 이어진다. 물을 바라본다는 뜻 그대로 수망령은 고갯마루 양쪽으로 수량 풍부한 계류들을 굽어보고 있을 뿐 아니라 정상 바로 옆에서는 맑고 시원한 샘물이 솟아나온다. 수망령에서 발원하여 북쪽으로 흘러내리는 내계천(월성천)은 위천과 황강을 거쳐 합천군 청덕면에서 낙동강으로 흘러들고, 수망령 남쪽으로 흐르는 용추계곡은 지우천-남강을 지나 함안군 대산면에 이르러 낙동강 본줄기로 합류한다. 수망령 남북으로 서로 다르게 발원한 물줄기가 낙동강이라는 한 어머니의 품에 안기는 셈이다. 거창 월성리와 함양 용추사를 잇는 수망령 고갯길은 한여름의 열기가 가신 가을철 산책 코스로 그만이며 경사도 완만하다. 10㎞ 남짓한 이 길은 월성리를 기점으로 잡아야 오르막이 짧아 힘이 덜 든다. 거창에서 황점으로 가는 버스를 타고 월성리에서 내린다. 내계대교 앞 삼거리에서 다리를 건너 내계마을로 들어서면 본격적인 수망령 트레킹이 막을 올린다. 내계(內桂)는 월봉산 자락에 안긴 지형이 달 속의 계수나무 같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길가에는 붉게 익어가는 사과들이 탐스럽게 매달려 있어 거창이 사과의 명산지라는 사실을 일깨워준다.
금원산 오름길에 비가 떨어지기 시작합니다.
수망령에서 올라오는 임도끝 정자에서 우의를 꺼내입고 여장을 다시 꾸립니다.
금원산에서 기백산까지 3.6km라는데 거리가 들쭉날쭉 정확하지가 않아요. 동봉에 있는 이정표에는 거리가 다르게 표기되어 있네요. 금원-기백 능선을 지나며 서쪽은 거망산-황석산 라인이고, 동쪽으로 거창군 위천면을 사이에 두고 금원산 뒷산 현성산과 기백산 뒷산 오두산을 감상할 일입니다. 그 뒤로 더 멀리 수도지맥의 수도산, 단지봉, 가야산을 확인한다면 더더욱 조쿠~..
♤ 금원산 (金猿山 △1352.5m)/ 삼면봉(안의면, 북상면→위천면)
경남 거창군 위천면과 북상면, 함양군 안의면에 걸쳐 있는 거창의 진산이다. 정상석 뒷면에 지재미골, 서문가, 유안청(儒案廳 : 지재미골에 이 고장 선비들이 공부하던 곳), 금원숭이, 금은산... 등의 내력이 상세히 적혀있다. 금원산의 모산은 남덕유산(1,508m)이며, 남덕유산에서 남동쪽으로 가지를 쳐내린 월봉산(1,279m) 능선은 두 가닥으로 갈라지는데 오른편의 수망령(900m)쪽 능선 최고봉이 금원산이다. 금원산 정상에서 남동으로 뻗어 내린 능선을 타면 기백산과 만난다. 금원산의 이름은 옛날 이 산에 살고 있던 금빛나는 원숭이가 날뛰므로 한 도사가 이를 산 중턱의 원암(猿岩)이라는 바위에 잡아 가두었다는 전설에서 유래됐다. 금원산의 함양군쪽에는 용추자연휴양림과 거창군쪽에는 금원산자연휴양림이 조성되어있다. 금원산은 용추폭포에서 기백산 정상으로 오른 다음 능선 산행으로 주변 조망을 만끽하면서 금원산으로 가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 이 능선에서는 주변의 덕유산, 거망산, 황석산, 가야산, 지리산, 노고단까지 조망이 된다. 하산하는 코스로는 수망령으로 내려가서 용추자연휴양림 계곡을 구경하면서 내려오거나 아니면 거창의 금원산 자연휴양림쪽으로 내려서도 된다. 금원산(金猿山/1,353m) 남으로 기백산(1,331m)과 남령을 거쳐 남덕유산(1,507m)과 이어진다. 단지봉(丹芝峰/ 1,258m), 삼봉산(三峰山/1,234m), 덕유산(德裕山/1,594m) 등과 호남·영남 양지방의 경계를 이룬다.
금원산의 자연환경은 금원산에서 남동 방향으로 뻗은 능선을 따라 4㎞ 거리에는 기백산이 위치하고 있다. 이 능선은 다양한 형태의 바위능선으로 이루어져 있다. 금원산에는 성인골 유안청계곡과 지재미골이 있는데, 이곳에서 흘러내리는 물이 상천리에서 합수하여 상천(上川)이 되어 위천면을 가로질러 흐르고 있다. 유안청계곡은 조선 중기 이 고장 선비들이 공부하던 유안청이 자리한 골짜기로 유안청폭포를 비롯한 자운폭포와 소담이 주변 숲과 어우러져 산악 경관이 빼어나다.
금원산자연휴양림은 경상남도 거창군 위천면에 소재하고 있으며 도유림에 조성된 자연휴양림으로서, 1993년에 개장된 곳이다. 휴양림 면적은 130ha로 하루 수용인원은 최적 600명(최대 1300명)으로 2000년 1월부터 민간위탁경영에 들어간 자연휴양림이다. 휴양림 내 임상은 낙엽송 조림지와 천연림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연간 이용객은 약 70,000명이다. 주요 시설로는 숙박동 25실, 삼림욕장, 숲속수련장 등이 있다. 주변의 관광지로는 휴양림 내에 있는 가섭사지 마애삼존불상(보물 530호)과 수승대 국민관광지, 농월정, 용추사 등이 있다. 금원산(1,353m)과 기백산은 거창군 상천리와 함양군 상원리의 경계로 이 두산은 능선으로 연결되어 있어 한번 산행으로 두 산을 함께 오를 수 있다. 금원산에는 유안청폭포, 자운폭포, 한수동계곡을 비롯하여 크고 작은 소와 담이 있으며, 마애불 등의 문화 유적이 많다. 이태의 자전소설 <남부군>에 "5백여 명의 남부군이 남녀 모두 부끄럼도 잊고 옥같은 물 속에 몸을 담그고 알몸으로 목욕을 했다"는 곳이 여기다. 금원산의 유안청폭포 인근에 자연휴양림이 조성돼 있고, 산행코스가 험하지 않고 산길이 완만해 가족단위 산행지로도 적격이다.
기백산의 명품바위죠. 전망도 우수합니다.
♤ 누룩덤(1,279m)
여러 장의 바위를 겹쳐 눌러놓은 누룩덤이다. 술을 빚는 누룩을 쌓아놓은 형상이라 누룩덤이란 말도 있다. 책바위도 지나고....
5년전 그린에서 구룡소대장님과 "기-금-월-거-황"을 하고 다시 찾았습니다.
일주문은 용추사 일주문을 말하고요. 매바위마을쪽으로 가야합니다.
♤ 기백산 (箕白山 1,330.8m)/ 경남 함양 안의-거창 위천면에 걸쳐 있는 산
경남 거창, 함양군의 경계를 가르며 북서에서 남동쪽으로 흐르는 기백산(해발 1,351m)은 긴 세월의 연륜을 말해주듯 침식 퇴적의 작용으로 노출된 암반을 따라 한수동 계곡의 맑은 물이 흐르고 있으며, 수많은 웅덩이와 폭포가 어우러져 계곡의 아름다움을 한층 더해주고 있다. 이 일대는 백두대간이 서남으로 뻗으면서 덕유산(1,568m)을 이루고, 또 덕유산에서 동남으로도 산줄기가 뻗었는데, 여기에는 월봉산(月峯山/1,272m)·금원산(金猿山/1,335m)·기백산으로 이어져 함양군과 거창군의 경계를 이룬다. 경남 함양군 안의면 상원리·하원리와 거창군 위천면 상천리 일대에 걸쳐있는 덕유산의 가지 산이다. 덕유산 주봉인 향적봉에서 'C' 자 모양으로 휘어진 산줄기가 남덕유산·월봉산·금원산을 거쳐 기백산에 이르고 남동쪽으로 황석산으로 나아간다. 금원산과 기백산의 능선을 분수계로 동편의 산상천과 서편의 지우천으로 나뉘었다. 기백산 남동쪽으로 자연마을의 취락이 형성되었다.
조선시대에는 지우산(智雨山)이라 불렸으며 김정호(金正 浩)의 《청구도 靑丘圖》에는 ‘旗泊山(기박산)’으로 기록되어 있다. 『대동지지』(안의)에 "기박산(旗泊山)은 일명 지우산(智雨山)으로 북쪽 20리에 있다. 장수사(長水寺)가 있고 절 옆에는 폭포가 있으며 그 아래에는 용추(龍湫)가 있다."고 기록하였다. 『세종실록지리지』(안음)에 "지우산은 현 북쪽에 있다."고 기재되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안음)에 "지우산은 현 북쪽 20리 지점에 있다."고 위치 표기가 더해 졌으며, 『여지도서(보유)』(안의)와 『화림지』에는 "월봉에서 남쪽으로 달린 것이 이 산이다. 현 서쪽 30리에 있다."라고 내맥(來脈) 정보도 추가되었다. 『함양군지』에는 "일명 기백산이라고도 한다. 산 높이는 1,351m이다."라고 높이가 서술되었다. 『동여도』에 지우산이 표기되었고, 『대동여지도』에는 지우산과 장수사가 표기되었다. 기백산이라는 지명의 유래에 관하여 산봉우리의 괴암이 키와 같다하여 일컬었다고 전한다. 기백산을 중심으로 북서쪽으로 4㎞ 간격을 두고 같은 능선을 따라 금원산이 이어지는데, 이 능선은 다양한 형태의 바위능선으로 이루어져 있다. 암릉은 금원산 쪽으로 내려가면 나오는데 거대한 판석형 암석을 차곡차곡 포개어 놓은 듯한 경관을 보인다. 마치 술을 빚는 누룩더미 같이 생긴 바위들이 여러 층 탑을 쌓아 올리듯 쌓아진 봉우리를 갖고 있어 누룩덤이라고도 부르는 산이다. 기백산의 동남쪽에는 남강이 발원하며, 북쪽 사면으로 황강(黃江) 상류의 위천(渭川)이 흐른다. 기백산 일대는 덕유산록과 더불어 월성계곡을 형성하고, 월봉산을 지나 큰목재에서 거망산·황석산으로 뻗은 산맥 사이에서는 지우천이 흐른다. 지우천이 흐르는 장수동은 옛 안의 삼동 가운데 하나인 심진동으로 지금은 용추사 계곡으로 더 알려져 있고, 장수사 조계문, 용추폭포, 용추사들의 명소가 널려 있다. 기백산 안봉에서 솟기 시작한 물줄기는 고학천 용폭을 이루고 쌀다리와 용원정 명소를 간직하고 있다. 산 고스락 남쪽에 원추리와 싸리나무군락으로 이루는 기백평전이 펼쳐져 있다. 동북쪽의 거창과 서북쪽의 위천 지역에는 비교적 넓은 산간분지가 발달해 있다. 산의 서쪽에 487년 장수사의 부속 암자로 세워진 용추사(龍湫寺)가 있는데, 문화재로 가섭암지마애삼존불상(보물 제530호)이 있다. 1983년 11월에 기백산군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 장수사 조계문(용추사 일주문)
장수사는 지금으로부터 1500여 년 전인 신라 소지왕 9년(서기 487년)에 각연조사에 의해 창건된 고찰로서 지리산과 덕유산에 산재한 많은 사찰을 말사로 거느렸으며 이 곳 심진동계곡에만에도 열개가 넘는 암자를 둔 대찰로서 계곡 어디에서나 낭랑한 염불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한다. 그러나 아쉽게도 6 · 25 전란때 장수사는 물론 계곡마다 즐비했던 암자들은 소실 되었고 일주문만이 현존되고 있다. 용추사는 원래 장수사에 딸린 작은 암자였다. 장수사가 일주문만 남기고 타버리자 1959년에 중건하면서 이름을 용추암에서 용추사로 바꾸었다. 일주문은 직경 1m되는 기둥 위에 화려한 팔각지붕을 한 건물이다. 한쪽 기둥이 싸리나무이며 다른 한쪽은 칡넝쿨이라 한다. 절앞에 용추폭포가 있다.
학문이 깊은 선비의 고장이라 마을 이름 하나하나에도 철학과 스토리가 있습니다.
♤ 원학동(猿鶴洞)
지금의 마리면과 위천면을 말한다. 금원산이 감싸는 위천면과 기백산이 감싸는 마리면을 합하여 일컫는 말이다. 음양의 조화를 이룬 금원산과 기백산을 여성과, 남성, 또는 흑과 백으로 본 옛사람들의 지혜를 엿볼 수 있다. 즉, 기백산 이름은 이십팔술 별자리의 하나인 箕와 인연을 갖고 있다. 음양 가운데 陽인 남성적인 산으로 보아 흰 것을 상징한 학(鶴)을 불러 산 아래 마을 이름으로 고학을 갖고 산은 백(白)자를 써 기백(箕白)이다. 반면에 같은 줄기 위에 솟은 금원산(金猿山)은 음(陰)인 여성적인 산으로 보아「검다」는 것을 비유한 동물 원숭이를 산 이름으로 써 금원(金猿)이다. 따라서 옛 안의 삼동 중의 하나인 원학동(猿鶴洞)이 금원산의 원(猿)자와 기백산의 백(白)자를 상징한 학(鶴)자를 써 이름한 마을명이다.
현성산...
금원산-기백산 라인을 걷다가 책바위 전 전망대에서 본 현성산과 오두산 모습입니다.
♤ 오두산갈림길(1,067m)/ 삼면봉(안의면, 위천면→마리면)
오두산(942m)은 거창군 위천면 남산리 마리면 월계리, 말흘리에 위치하고 있으며 오제봉이라고도 부른다. 군립공원 금원산과 기백산에 딸린 부속된 산이라 이름을 알릴 기회가 없었다. 정상을 빚고 있는 크고 작은 바위들이 앙증스럽게 옹기종기 모여 앉아 뾰족뾰족한 모습을 하고 있다. 정상을 이루는 바위들은 검은 빛깔을 띠면서 덩이져 흡사 까마귀 발톱처럼 엉켜있다. 그 중 가운데 돌출된 바위는 까마귀 부리 같기도 하다. 산 아래 마을 사람들은 “가막달” 또는 “가막다리”라고 부르는데 “달”은 산이란 뜻이고 “가막”은 “검”에서 파생된 말로 성스런 산이란 뜻을 지닌다. 마을 사람들이 “가막달”이라 부르는 산 이름을 검을 오(烏)자로 쓴 한문식 표기이름이 오두산이다. 정상 서쪽 기백산으로 오르는 능선에는 마당재가 있고 동쪽 월형산 사이에 다름재가 있다.
넓은 헬기장과 같은 공터입니다. 잘 보이는 길을 놓아두고 고학마을 이정표를 따라가야 합니다.
♤ 늘밭고개
거창군 마리면에 위치한 고개이다. 서북쪽으로는 기백산과 금원산이 위치하고 동남 방향으로는 바래기재를 거쳐 망덕산을 가는 진양기맥의 산줄기이다.
물에 젖은 생쥐꼴을 하고 서둘러 내리는데 좀체 거리가 줄지 않다가 상비재에 도착하니 이제 다 왔구나~~^^
♤ 상비재 (505m)/ 함양-거창 경계
거창군 마리면 고학리 고신마을과 함양군 안의면 하원리 상비마을을 잇는 고개이다. 예전에 민초(民草)들이 넘던 고개는 이제 그 영화를 잊어 버리고 겨우 촌락을 잇는 고개로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화장실에서 간단하게 씻고 식사를 하고 김치와 섞어 주먹밥을 준비합니다. 어떻게든 공전고개는 넘어가야 한다는 마음으로... 밥을 먹는데 함양에서 확진자가 발생했다고 메시지가 오고, 손님들도 웅성웅성, 주인도 민감하다고 마스크를 꼭 써달라고 당부를 합니다. 밥먹다 마스크 쓰냐고요~~ ㅜㅜ
영각사 매표소에서 15시간이 넘게 걸렸습니다. 기백산에서부터 비가 제법 쏟아지더군요.
♤ 바래기재(望峙, 350m)/ 국도3호선/ 함양군 안의면-거창군 마리면 경계
바래기재는 함양군 안의면과 거창군 마리면의 경계로 서로 손님을 배웅하던 곳으로 배웅하다는 뜻의 '바래주다'에서 바래기재의 유래가 되었다고 한다. 옛날 한양에서 고위 관료들이 진주 관아를 왔다가 갈 때에 진주목사(晋州牧使)가 이곳까지 바래다 주었다고 하여 ‘바래기재‘라고 불렸다.
현재는 거창 금원산(1353m)이 남동쪽으로 흘러내리는 자락에 있는 바래기재는 경남 함양군(안의면)과 거창군(마리면)의 경계를 이루는 바, 넘는 방식이 새 국도와 옛 국도가 서로 다르다. 옛 국도 3호선은 이 재를 넘는 옛길을 덮어썼지만 새 국도 3호선은 이와 무관하게 그 오른쪽에 남에서 북으로 향하는 길이다. 이 고개에서 남쪽으로 흘러가는 신안천은 안의 면소재지에서 지우천과 안의천을 끌어들여 세를 잔뜩 불려 남강으로 스며들고, 북쪽으로 흐르는 마리천은 거창읍에서 위천을 끌어들여 황강으로 합류를 하게 된다. 이렇게 지경에 분수령이기도 한 고개이다.
바래기재 바로 아래에 함양 안의면 대대리 삼산마을이 있다. ‘삼산’은 마을을 에워싼 청태·월암·아미산이다. 바래기재의 바래기는 이 삼산을 마주 바라본다는 데서 유래됐다고 한다. 삼산마을은 조용하다. 그럴 듯한 솔숲이 마을 앞에 있고 쉴 수 있는 공간도 있으나 사람이 없다.
바래기재에 옛날에는 장승도 있었고 사람들 머무는 반락원(反樂院)도 있었지만 지금은 그나마 썰렁한 밥집이 있다. ‘반락’은 중국 이태백의 한시 “삼산은 푸른 하늘 밖으로 반쯤 걸려 있고(三山半落靑天外)”라는 대목에 따왔다는데, 이와는 다른 이야기도 있다. 옛날 선비들이 서울 가서 치른 과거에서 낙방을 하고는 귀향길에 들러 여기서 먹고 잤기 때문에 떨어졌다고 우기며 탐탁찮다는 뜻으로 반락(反樂)이라 했다 한다.
그 뒤 안의 현감으로 부임하는 이들조차 이곳을 피해 거창 남상면의 관술령 고개를 넘었다고 한다. 바래기재를 넘어 700m 정도 내려가면 왼쪽에 폐업한 주유소가 나타난다. 새 국도 3호선이 뚫리면서 이런 변화가 생겼다. 여기서 200m 가량 나아가면 왼편으로 전형적인 옛길이 있다. 이곳은 조선시대에는 삼남대로로 연결하는 교통의 요지였다고 한다.
다행히 비도 그치고,,, 마리면 엄지손가락이 지시하는 우측을 따라 396.7m봉은 우회하고 시멘트 임도를 따릅니다. 여기 이정표에서 처음 올라서며 잠깐 가시밭길이고 이후 개목고개까지는 갈만 합니다.
목책교가 있는 솔고개....
솔고개 목책교에 독도님의 오래된 솔고개 코팅지가 외롭게 지키고 있습니다.
솔고개를 지나며 날씨를 살피니 야간에 비가 들어있네요. 개목고개에서 안의로 나가는 교통편을 얻기가 수월하여 오늘은 산행을 마치고 안의로 나가 숙박을 하고 내일 다시 시작하기로 마음을 정합니다.
♤ 솔고개(松峴)/ 함양-거창 경계
진양지맥의 맥길인 솔고개(松峴)는 함양군 안의면 귀곡리 귀곡마을과 거창군 마리면 대동리 엄대마을, 서편마을 사이에 있는 고개로 소나무가 빽빽하게 들어서 있던 데서 비롯된 이름이다. 그러나 지금은 칡넝쿨과 잡초들이 뒤엉켜 있다.
개목고개 내려서기 직전 마주한 담배밭입니다. 저 오른쪽 끝으로 밭을 가로질러 건너가야 합니다. 갈까말까 하다가 양회임도(시멘트 도로)를 따라 박동마을로 내려서서 다음날 다시 이곳으로 올라와야 했습니다. 담배밭 지나 개목고개 내려설 때에는 자꾸 왼쪽 방향으로 틀어줘야 합니다. 길이 희미해서 갈팡질팡 힘들게 내려섰네요.
안의에서 저녁으로 맛없는 치맥을 반도 못 먹고 나오는데 비가 쏟아집니다. 잠결에 깼는데 역시 밖에 비가 내리네요. 결정을 잘했다 싶었습니다. 그런데 이튿날 흐리다는 날씨가 버스를 타고 개목고개로 들어가니 또 비가 내리기 시작합니다. 첩첩수심이네요. ㅠㅠ
고개에는 동물 이름의 지명이 많죠, 자라목 구티재, 말목재, 황새치, 돼지령, 조령, 새목재, 새재, 노루목...,, 과 같은 의미에서 개목재가 아닌가 싶습니다. 한문으로는 구항치(狗項峙) 이겠죠.
개목고개에서 컨테이너건물 뒤쪽으로 들머리가 있는것 같았고요. 임도로 문을 열고 들어선다면 바로 좌측 산으로 달라붙어야 합니다. 저는 임도따라 조금 더 가다가 다시 뒤돌아서 등로를 찾느라 밭에다 쳐놓은 울타리를 넘느라 하지 않아도 될 고생을 잠시 했습니다.
♤ 개목고개/ 함양-거창 경계/ 10번 차도
함양군 안의면 초동리와 거창군 마리면 대동리의 경계로 이곳은 개암나무가 많이 자라는 곳으로 개목고개라 한다. 개목고개는 밤나무의 사촌 개암나무가 많이 자생하는 곳으로 개목이 많이 있는 곳의 고개라 개목고개라고 한다. 야생 견과(堅果)다. 딱딱한 씨껍질로 둘러싸인 열매 안에는 전분덩어리 알갱이가 들어 있다. 비록 도토리나 밤은 참나무과이고 개암나무는 자작나무과로 거리가 있지만, 씨앗의 모양새나 쓰임은 비슷하다. 개암은 오늘날 우리가 잘 알지 못하는 과실이지만, 역사책은 물론 옛 선비들의 문집이나 시가에 널리 등장한다. 고려 때는 제사를 지낼 때 앞줄에 놓았다는 기록이 있으며, 《조선왕조실록》에도 제사과일로 등장한다. 그러나 임진왜란 전후로 개암은 제사상에서 퇴출된다. 아마 개암보다 더 맛있는 과일이 많이 들어온 탓이 아닌가 짐작해본다. 개암의 한자 이름은 산반율이나 진율처럼 흔히 밤(栗)이 들어간다. 달콤하고 고소하므로 간식거리로 그만이며 흉년에는 밤, 도토리와 함께 대용식으로 이용되었다. 개암이란 이름도 밤보다 조금 못하다는 뜻으로 ‘개밤’이라고 불리다가 ‘개암’이 되었다고 한다. 개암나무는 전국 어디에서나 자라는 작은 나무로 높이 자라도 키가 3~4미터밖에 안 된다. 잎은 거의 둥글고 손바닥만 하며 불규칙한 톱니가 있다. 암수 한 나무이고 작은 잎처럼 생긴 받침잎(총포)으로 과실의 밑부분을 둘러싼다. 개암은 단백질과 당분이 풍부하여 맛이 고소하며, 지방이 많아 기름을 짜서 식용유로 이용하기도 한다. 우리나라 산에서 흔히 만날 수 있는 개암나무는 앞에서 설명한 진짜 개암나무보다 참개암나무가 더 많다. 참개암나무는 개암나무와 잎 크기는 비슷하나 잎 끝이 뾰족해지는 것이 차이점이다. 열매 모양도 전혀 다르다. 개암은 서양에서도 예부터 널리 쓰였다. 우리와 마찬가지로 식용유 원료에서부터 마법의 지팡이 만드는 데까지 사용한 것으로 보아 친근한 나무였음을 알 수 있다. 최근에는 개암 향을 넣은 헤이즐넛 커피로 우리 곁에 있고, 제과점에서는 고소한 맛을 더 높이기 위하여 개암을 사용한다.
좌측은 거창군 마리면 대동리, 우측은 함양군 안의면 초동리로 개목고개~구슬재 구간이 아카시아나무와 잡목, 칡넝쿨이 뒤엉켜 있어 진양 전 구간 중 제일 악명이 높다는데 말대로 산초나무, 초피나무, 아카시나무, 찔레꽃 등 장미목 식물, 인가목, 청미래덩굴, 산딸기(줄딸기, 곰딸기 등)나무 등등 가시나무는 모두 모여 있네요. 앗 밤까시도 있네요. ㅋ 길에서 옆으로 한발자욱만 벗어나도 가시밭이라 밤에 통과하기 어렵겠습니다. 여기를 편하게 통과하는 요령은 선답자 분들의 길 흔적을 찾아 쫒는 것입니다. 어렵사리 구슬재에 도착하니 고생길이 끝났다는 안도의 기분이 듭니다. 마음이 놓이네요.^^
♤ 구슬재(공전고개)
경남 거창군 마리면 하교리, 대동리 동편마을과 함양군 안의면 초동리 공전마을을 잇는 경계 능선의 고개로 공전고개라고도 부르며 경운기나 트랙터가 다닐 정도로 넓은 콘크리트 포장도로로 기맥꾼을 배려한 듯 나무계단이 설치되어 있다.
공전고개에서 망실봉에 이르는 길도 잡목으로 진행하기 만만하지 않습니다. 망실봉으로 나가니 정상에 한분 계시던데 깜짝 놀랍니다. 평소 주차장에서 산책하듯 망실봉을 왕래한다는데 "거기에도 길이 있습니까?" 하고 되묻는군요. 후줄그레한 얼굴이지만 비맞고 진행한 인증샷 하나 올려봅니다. 망실봉 이후부터 꽃길이랄 수 있는 길다운 등로가 이어집니다.
황강이 돌아나가는 거창시내 전망이 좋습니다. 그 뒤로 수도지맥의 라인이 보인다는데 오늘은 기대난망이네요.
활공장을 지나며 거창읍을 배경으로 화첩처럼 수많은 산군들의 전경이 화려하다는데 이 선에서 만족해야 했습니다.
♤ 망실봉(望實峰, 682.8m)/ 망덕산/ 삼면봉(안의면, 마리면→거창읍)
경남 거창군 거창읍과 함양군 안의면의 경계 능선에 위치한 봉우리로 위천을 품은 거창 시가지를 비롯해 하늘금을 긋고 있는 수도지맥의 수려한 파노라마와 사방을 한 눈에 볼 수 있는 조망이 뛰어난 곳이다. 망실봉의 유래는 예전에 이곳을 봉수대로, 망을 보던 곳이라 망실(望實)이라고 한다. 또한 덕유산이 조망되는 산이라 망덕산(望德山)이라고도 한다. 망실봉은 예전 가야의 땅으로 신라가 차지했다가 다시 백제가 차지하는 등 전투가 잦은 곳으로 땅을 잃어버린 곳이란 뜻으로 망실봉이라 불리워졌다고도 한다. 정상에는 묘 1기가 있으며 진양기맥은 둔동 방향이다. 산지가 전체적으로 주변 산지에 비해 고도가 낮으며, 서쪽 사면은 대체로 완만하나 동쪽 사면은 급경사가 심한 편이다. 산지가 낮아 등산객들에게는 야산을 오르내리는 수준의 등산 경로이지만 곳곳에 가시넝쿨과 칡덩쿨이 있고 샛길도 많다. 특히 망실봉은 산지가 낮음에도 시야가 확 트여 있어 무덤이 있는 정상의 100m 아래에 패러글라이딩 활공장이 들어서 있다. 활공장에 두개의 정상석이 있으며 활공장에서의 조망도 망설봉을 대표하는 경치 중의 하나이다.
산의 정상인데 관술봉(607.2m)이라고 해야 맞지않을까요? 마침 故한현우님의 관술봉이라 적어놓은 표지가 눈에 띄는군요.
가시밭길을 지나며 만나는 또 하나의 복병이 거미줄입니다. 뿌리쳐도 잘 떨어지지 않는 끈적끈적한 거미줄이 조망을 살피느라 잠시 한눈을 팔면 얼굴에 착 앵겨붙습니다.
♤ 관술령(官述嶺, 606.1m)/ 삼면봉(함양 안의면, 거창 거창읍→남상면)
관술령은 경남 함양군 안의면 도림리에서 거창읍 장팔리, 남상면 오계리로 연결되는 고개이다. 안의와 거창을 잇는 주요 교통로였다. 산에서 대산천, 웅곡천 등이 발원한다. 전설에는, 옛날 안의현감이 부임할 때 이 재를 넘어서 안의에 관행차(官行次)를 했기에 고개 이름을 관술령(官述嶺)이라고 불렀다고 전해진다. 관술령 고개 밑에는 관술령마을(혹은 관동, 왕암)이 있고 관동마을에는 성황단이 있다.『여지도서(보유)』(안의)에 "관술령(官述嶺)은 초점(草岾)에서 남쪽으로 뻗어나와 이 고개가 되었다. 관아의 동쪽 20리에 있고 거창의 경계이다."라고 기록하였다. 『화림지』에도 "안의면에 있다. 남령(嵐嶺)의 북쪽에 있다."라고 하였다.『조선지지자료』(거창)의 고천면에는 안의와의 경계에 있는 산으로 관술령이 수록되어 있다.『해동여지도』(거창)에 부의 서쪽 안의와의 경계에 관술현으로 기재되어 있으며, 북쪽으로 조령, 남쪽으로 골산현도 묘사되어 있다. 그 밖에『영남지도』(거창),『대동여지도』(17첩 3면) 등 조선 후기 고지도에 관술치, 관술산 등으로 표기되어 있다. 조선시대 주요 군현지도에는 관술령이 표기되지 않았다.
관술봉으로 오르는데 지나온 덕유산쪽에서는 우루릉 쿵쿵~ 천둥소리가 요란합니다. 적게 내리는 비는 스틱으로 물을 털고도 가보는데 임계치를 넘어서 포기를 하면 등산이 아니라 물을 끼얹는 수영을 하게 됩니다. 관동고개 좌측으로 과수원이 있는지 멧돼지를 쫒는 대포 소리가 펑!펑! 터지네요. 춘전치 외춘마을에서 거창으로 빠져나오며 보니 둔동마을 입구를 지나더군요.^^
♤ 관동고개 (冠洞峙)
함양군 안의면 도림리 관동(冠洞) 마을과 거창군 거창읍을 지나 남상면 둔동리 둔동마을을 연결하는 고개이다.
기맥길에서 600m 떨어져 있는 관동 마을회관 건물 앞쪽 모퉁이에 수도시설이 있다는데 저는 논 위로 올라가니 산에서 비닐 호스로 물이 내려와 예비로 500cc 그걸 받았답니다. 안의에서 박동마을로 가는 거창행 버스가 관동마을을 둘러서 가더군요. 동네를 유심히 살펴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기맥길은 안의면 경계를 빙 둘러서 빠져나가기에 말이죠.
♤ 관동(冠洞) 마을
읍소재지에서 약 4킬로미터 거리에 위치하고 있는 갓거리로 불리우는 관동(冠洞)마을은 천령봉 아래 자리잡은 마을인데 신라 지증왕(서기500)때 중국에서 귀화한 오첨을 천령백(天嶺伯)으로 임명하여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한다. 기록상으로는 함양에서 가장 오래된 마을이다. 마을 터를 잡을 때에 나무에다 갓을 걸었다는 전설이 있는 마을 이름이다. 그리고 옛날에 천령의 관청이 이곳에 있었다는 전설이 있고 천령봉에는 봉화대가 있다. 천령문화제 때는 이 천령봉에서 채화한다. 옛날의 옥터가 있고 사형터도 있었다 한다. 여러가지 전설을 간직한 이 마을은 마을 앞 좌측에 와룡대가 아름다운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마을 뒤에는 옥녀봉이 있고 마을의 우측 골짜기는 서계천이 흐르고 있다. 바위가 많은 마을로 가매바우, 구신바우, 배바우, 복덕바우, 쌀바우 등이 있다. 불땅터, 비석거리, 신당터, 옥터거리, 조산거리, 창터 등의 옛 이름들이 남아있다. 밀양 박씨가 들어와서 마을을 개척했다고 하나 그 연대는 알 수 없고 다음은 전주 최씨가 들어와 살았다고 한다. 경주 최씨, 함양 박씨 등 여러 성씨가 모여 살고 있는 마을이다.
삼각점은 300m 더 올라서서 정상에 있던데, 정상석은 지고가다 무거워서 묻은건지... 다른 측량점이라도 되는건지 알 수가 없네요.
♤ 망설봉(望雪峰, 620.6m)/ 덕우산/ 경남 거창군 거창읍 둔동리에 있는 산
경남 거창군 거창읍 둔동리와 함양군 안의면 도림리 사이의 군 경계를 이루고 있는 산이다. 경계부에서는 망덕산이라고도 한다. 망설봉은 서북 방향으로 자리잡은 덕유산 산자락을 이어받아 남쪽으로 줄기를 뻗고 있다. 망설봉을 중심으로 서북쪽으로 기백산, 남덕유산, 무룡산을 지나 덕유산으로 산맥이 이어지고 있다. 망설봉 산속 깊은 곳에서 발원하는 물줄기는 박동 저수지를 이루고 이 물줄기가 흘러 남강을 이룬다. 동남쪽으로는 거창읍 중심가를 가로지르는 넓은 황강이 합천댐을 향하여 흐르고, 멀리 수도산으로 연결되는 귀봉, 보해산이 보인다. 그 왼쪽으로는 양산처럼 생긴 일산봉, 그리고 비계산, 두무산, 오도산과 숙성산이 뒤를 받치고 있다.
여기 숙지령에서 636m봉-무명봉-괸돌바위-661m봉-654m봉을 넘어 기선봉까지 4.4km가 힘든 구간이라고 알고 갔는데 공부를 많이해서 그런가 기복이 예상보다 어렵지 않았습니다.
♤ 숙지령
거창군 남상면 둔동리 신기마을과 함양군 안의면 불당골 숙림마을을 잇는 고개로 숙지령 주위에는 범강장달의 덩치를 닮은 커다란 소나무가 많이 자라고 있다. 신기마을은 100여년 전 둔동마을에서 떨어져 나와 새로 생긴 마을이라 새터라고도 부른다.
감악산 팔랑개비가 보입니다. 수영덤이에서 오르는 길도 있고, 밀재에서 거창으로 빠져나오며 거창양민학살사건추모공원을 지나서도 오르는 입구가 있었습니다.
♤ 감악산(紺岳山, 952.6m)
기선봉을 향하는 등로 우측으로 88고속도로가 보이고 그 뒤쪽으로 거창의 진산인 감악산의 풍력발전기가 조망된다. 감악산이 능선은 북동과 남서 방향으로 길게 늘어서 있으며 남쪽 청룡마을에서 시작하는 등산로가 능선을 따라 이어져 있다. 감악산은 신라시대 애장왕 때 감악조사 창건하였다는 감악사(紺岳寺)가 있었는데 빈대가 많아 폐찰되고 연수사(演水寺)가 새로 창건되었다. 연수사에는 수령 600년의 은행나무가 있으며 일대에 물이 맑고, 약수로도 유명하다. 동쪽에 합천호가 있어 안개가 잦은 편이며 정상에서 합천호 운해를 보는 장관이 빼어나다. 6.25전쟁 때에는 감악산 일대에서 국군이 신원면 일대 청년들을 무차별 학살하는 "거창양민학살사건(居昌良民虐殺事件)"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2012년 '거창 감악산 물맞이길'이 조성되었으며 풍력발전소가 건설되어 있다.
기선봉에서 사별산은 1.3km, 비가오니 전망도 기대할게 없고 오로지 거리를 줄이는게 목표입니다.
♤ 기선봉(670.4m)
기선봉은 함양군 안의면과 거창군 남상면의 경계능선에 있는 봉우리로 정상은 잡목이 우거진 폐헬기장이다. 숙지령과 춘전치의 중간지점에 위치한 봉(峰)이다. 기선봉을 중심으로 북쪽으로 숙지령이 있고, 남쪽으로 춘전치가 위치하고 있다.
여기가 남재로구나 짐작은 할 수 있습니다만 별다른 특징이 없습니다.
♤ 남재(嵐嶺)
거창군 남상면 진목리 남재마을과 함양군 안의면 황곡리(黃谷里) 당산마을을 잇는 고개로 지금은 희미하게 옛길이 남아있다.
사별산에서 춘전치까지는 2.4km 부담없는 내리막입니다. 기선봉은 넓은 공터인데 비해 사별산 정상은 아주 좁습니다. 그만큼 봉우리가 뾰족하다는 말이겠죠.
♤ 사별산(705m)/ 삼면봉(남상면, 안의면→수동면)
사별산은 함양 안의면과 거창 남상면 경계에 있는 산이다. 함양군은 안의면을 벗어나 수동면으로 접어든다. 아랫마을 황곡리(黃谷里)에 '새벌'이라는 지명이 나오는 걸로 보아 새벌에서 유래된 이름으로 보이지만 정확히 알 길이 없다. 주위 봉우리들 중에 제일 높은 봉우리여서 이 구간을 사별산 구간이라 부른다. 거창군에서 세운 이정표에 산명이 기록되어 있다.
길 건너편으로 다음 구간 올라야 할 절개지 사다리가 보입니다.
사별산에서 하산하며 18:30분 거창읍으로 나가는 막차시간에 맞추려고 신경을 많이 기울였습니다. 18:35분에 도착했는데 손님이 없으니 버스가 바로 나갔는지 30분 대기하게 되어있던데 코비드때문인지 버스는 보지 못하고 요행스럽게 거창으로 나가는 노부부의 승용차를 얻어탈 수 있었습니다.
예보상으로는 오늘 하루종일 흐림으로 나오던데 아침에 춘전치로 들어가니 또 비가 내리네요. 아 어쩌라고~~~
기맥상의 춘전치를 뭉떵 들어내고 들어선 대구와 광주를 잇는 88고속도로, 끊어진 진양기맥은 춘전치육교로 고속도로를 건너 이어집니다. 여기 사과밭 커브길에서 절개지 계단을 통해 오르는게 편합니다.
♤ 춘전치(春田峙, 390m)
거창군 남상면 춘전리가 있어 춘전치(春田峙)라 한다. 춘전재는 경남 거창군 남상면과 함양군 수동면으로 갈리는 군 경계점이고 1084번 지방도와 88올림픽고속국도가 나란히 지나는 곳이다. 진양기맥은 북쪽에서 기선봉을 거쳐 남쪽 식기봉(食器峰/670m)으로 진행한다. 춘전리(春田里)는 임진왜란 때 엄능(嚴陵)이라 하다가 뒤에 지금의 내춘을 중심으로 엄전(嚴田)이라 하여 "음지이"라고 불렀으며 안의현 황곡리(黃谷里)에 속해 있다가 안의면에 편입되었다. 밭이 많은 곳이라 춘전이라 불리웠으며 1973년 함양군 안의면에서 거창군 남상면에 편입되었다고 한다.
주걱봉, 바래봉, 주발봉, 시루봉에 이어 이제 식기봉까지 등장합니다.^^
♤ 식기봉(食器峰, 670m)/ 삼군봉(함양군, 거창군→산청군)
경남 거창군 남상면 춘전리에 위치한 봉우리이다. 식기봉은 삼군봉으로, 좌측은 그대로 거창군 남상면이지만 우측이 함양군 수동면에서 산청군 생초면(生草面)으로 바뀌는 봉우리이다. 식기봉(食器峰)의 유래는 밥그릇이 거꾸로 엎어져 있는 산의 형상이라 하여 식기봉이라 한다. 함양군(수동면)을 지나 이제부터 거창군(남상면)과 산청군(생초면)의 경계를 지난다.
정상석이 예술작품이네요. 아래로 차소리가 들리고 수영덤이 도로도 보이는 거리입니다.
♤ 덕갈산(德葛山, 669.2m)/ 감악단맥갈림길
덕갈산은 거창군 남상면 춘전리에 위치하며 산청군 생초면 향양리의 경계능선에 있다. 덕갈산은 처음에는 떡갈나무가 많아 떡갈산이라 불리다가 지금은 덕갈산으로 부르는데, 이 산에 칡이 많아 '갈(葛)'자를 써서 덕갈산으로 불리워졌다고도 한다. 감악단맥을 이루는 감악산까지 지능선 약 10km 직진길이 뚜렷하다. 수영덤재를 지나 철마산-바랑산으로, 춘전재를 지나 사별산-기선봉으로 갈 수 있다.
수영덤이에서 산청으로 통하는 도로입니다. 산행기에서 약 2년전에 도로를 깔았다는 기록이 확인되네요. 산청 생초면 아래 금서면 수철리, 방곡리에 위령탑이 높게 솟아있는데, 지리산 동쪽 깊은 산중이었던 거창과 함양, 산청 일대에 통비분자란 미명아래 백야전사에서 견벽청야 작전이 대대적으로 전개되었나 봅니다. ㅠ
♤ 수영덤이(1034도로/ 550m)/ 덕갈재/ 삼면 경계면(산청 생초면, 거창 남상면→신원면)
수영덤이는 덕갈산(德葛山)에서 약 600m 서쪽에서 동남방향으로 진양기맥을 진행하면 만나는 위치로 1034도로와 접한다. 어은동 북쪽 거창 신원면 덕산리와 남상면 진목리, 산청 생초면의 삼면 경계에 있는 고개로 매우 가파르고 험하며 행인들이 자주 쉬면서 넘어갔다고 한다.
1951년 2월 빨치산을 일망타진한다는 명분으로 당시 국군 11사단 병력이 무고한 양민 791명을 학살하고 신원면 일원에 계엄령을 내려 공비와의 전투를 벌여 희생자가 발생한 것으로 왜곡하였고, 이를 수상히 여긴 정부가 합동조사단을 파견하였으나 이 조사단의 안내를 맡은 군 당국은 이곳에 군인을 공비로 위장 매복시켜 사건 현장의 길목인 이곳 수영덤이에서 일제히 사격을 가해 조사를 못하고 되돌아가게 하는 만행을 저지른 슨픈 역사를 간직한 곳이다. 우여곡절 끝에 1954년 신원면 주민들은 박산골에 방치되어 있던 학살현장의 누구인지도 모르는 유골을 수습해 어른남자(109구), 어른여자(183구), 아이(235구)로만 구분해 뒷산에 묻었다. 이에 사건 발생 5개월여 만에 군법회의는 관련자에게 실형언도를 했지만 일년도 못가 풀려나고, 그 책임은 국가임에도 희생자와 유족에 대해 기회만 생기면 탄압을 가했는데 실례로, 1961년 5.16군사정부는 유족회 간부 17명을 반국가단체로 몰아 투옥 시키고 같은 해 희생자를 합장한 박산합동묘소에 개장명령을 내린다. 천신만고 끝에 만들어진 묘역을 파헤쳐 유족들에겐 뼈가루 묻은 흙 한줌으로 유골을 대신하여 거주지 공동묘지에 개인별로 이장하라 하였고, 애초 박산합동묘소에 세워졌던 위령비는 글자를 모두 지워 땅속에 파묻음으로써, 제2의 학살인 부관참시를 자행한 사건이 "거창양민학살사건"이다. 1987년 민주화의 열풍이 불자 유족회는 땅속에 묻혀있던 위령비를 꺼내 비석 받침대 위에 걸쳐 놓았다. 박산골 합동묘소 건너편에서 바라보면 거대한 추모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거창사건 추모공원은 추모문, 천유문, 위패봉안각, 위령탑, 부조벽, 묘역, 조각, 역사교육관 등이 있다.
수영덤이에 내려선 곳에서 신원면쪽으로 도로를 따라가다 태양열발전소 정문입구 직전에 갈전산 등산로 이정표가 있습니다.
♤ 신원면
거창군의 남쪽 끝에 자리하며 동쪽은 합천군과, 서쪽과 남쪽은 산청군에 맞닿아 있다. 1914년까지는 삼가군(三嘉郡)이었으며, 동쪽은 율원면(栗院面)으로 수원리, 양지리, 구시리가, 서쪽에 신지면(神旨面)은 과정리, 와룡리, 대현리, 중유리, 덕산리, 청수리 6개 리가 있다. 1914년 삼가군이 합천군과 합하면서 신지, 율원 두 면을 묶어 신원면으로 고쳐서 거창군에 편입시켰다. 지금은 9개 리로 나뉜다. 감악산을 비롯하여, 월여산, 매봉산, 바랑산들의 준봉으로 둘러싸인 신원면은 덕유산 남령 넘어 북상만큼이나, 아니 북상면보다 오히려 더 진한 오지로 쳐준다.
매봉산삼거리입니다. 다녀오기를 권장합니다. 거리도 얼마되지 않고 등로도 힘들지 않고 편안합니다.
거창군에서 정상석에 예산을 많이 들였습니다. 함양에 있는 정상석은 빨간글씨로 부적처럼 글씨를 새겨놓은게 특징인데 거창군은 예술성을 가미했네요.
♤ 매봉산(810m)
경남 거창 신원면 청수리에 소재한 산으로 진양기맥 서쪽은 덕갈산, 남쪽은 갈전산과 이어져 있으며 기맥길에서 동쪽으로 0.4km 비켜나 있다. 산세가 매와 같다하여 매봉산이라 부른다.
정상석은 없고 전망도 없고 거리 표시만을 참고합니다. 갈전산에서 다음 여정인 철마산까지 3.1km로 길이 좋으면 1시간까지도 예상을 해봅니다.
♤ 갈전산(葛田山, 765.1m)/ 경남 산청군 생초면
갈전산은 경남 거창군 신원면 청수리와 산청군 생초면 향양리의 경계 능선에 있는 산으로 산청군 관내에서 제일 북쪽에 위치해 있다. 칡이 많아 갈전산이라고 부른다. 동남방향으로 갈전(葛田)마을이 위치하고 있다. 갈전산 정상의 이정표는 수영덤이 2.3km, 철마산 3.1km 이다. 정상에 서면 덕갈산, 매봉산, 보록산, 바랑산 등 산청 북쪽의 거창 지역 산들이 전부 조망된다.
평지를 다지고 건축물을 올렸던 흔적이랄까요. 화전민 집터처럼 생겼던데요.
♤ 갈전재
거창군 신원면 청수리 갈밭마을과 산청군 생초면 향양리 고촌마을을 이어주던 옛고개이다.
♤ 산청군 생초면
산청이 배출한 인재로는 유학의 거두인 남명 조식(南冥 曺植)선생, 그 분의 고향은 인근 합천군 삼가출신이지만 산청으로 분류될 정도로 산청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분이다. 목화를 중국에서 가져와 민초들의 의생활에 변화를 준 문익점, 민안부, 오건, 곽종석과 한국 불교의 획기적인 한 획을 그은 가야산 호랑이로 통하셨던 퇴옹당(退翁堂) 성철(性徹) 대종사가 이곳 산청 출신이다. 산청군 생초면은 동의보감의 저자이자 명의로 소문난 허준의 스승인 유의태公의 고향으로, 약초의 고장으로 표방하는 곳이다.
♤ 산청 민씨의 시조 농은(農隱) 민안부(閔安富, ? ~ ?)장군
농은 민안부 선생은 본관이 여흥(驪興)으로 도첨의사인(都僉議舍人) 유(孺)의 아들이고, 고려말 송경(지금의 개성)에서 살면서 예의판서(禮儀判書)를 지냈다. 이때 1375~1388년(고려 32대 우왕)에는 고려의 국운이 기울어지던 시기로 1388년 우왕은 최영을 팔도 도통사로 임명하고 우군 도통사에는 이성계, 좌군 도통사에는 조민수를 임명하여 명나라의 랴오둥을 정복하여 사기를 꺾어 놓고자 출정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이성계는 압록강 가운데 있는 위화도에 이르렸을 때, 조민수를 구슬려 마침내 군대를 돌이키고 말았다.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위화도 회군'이다. 이성계장군은 군대를 돌이켜 돌아와 실권을 잡아 1392년에 조선을 세웠다. 고려가 이렇게 망하고 보니, 많은 충신들이 이성계에 불복하므로 정몽주, 이색, 조민수, 권근 등이 귀양을 가거나 죽임을 당하였다. 이에 다른 충신들도 관복을 벗고 두문동으로 들어갔다. 두문동이란 조선이 세워지자 이에 반대하던 고려의 신하들72명이 경기도 개풍군 광덕산 기슭에 들어가, 고려에 충성을 다하고 끝까지 지조를 지키면서 조선에 벼슬하지 않고 싸우다가 이성계로부터 죽임을 당한곳이다. 이러한 두문동에 민안부 선생도 들어갔다가 이성계에게 죽임을 당하기 전에 물러났다. 그리하여 민안부 선생은 멀리 남쪽을 향해 이 고장 산청군(산음현, 山陰縣) 생초면 대포리 한계에까지 내려와 숨어 지내며, 산과 강을 벗삼아 농사를 짓고 스스로 위안하며 살았다. 또한, 그의 아들 민유도 아버지의 뜻을 받들어 벼슬하지 않았다. 그후 후손이 번영하였는데, 조선 500년간 산청 민씨의 시조가 되었다. 농은 민안부 선생의 절의와 지견은 특기할 만한 일이다. 민안부 선생은 이 고장에 운둔하면서 고려의 왕실을 그리워하며, 생초면 대포리와 금서면 화계리에 걸쳐있는 왕산 중턱의 큰 바위까지 올라가 항상 고려의 옛 서울인 송경을 향하여 절을 하였다. 그 뒤, 큰 바위를 망경대라 부르게 되었으며, 후손들이 보호하고 있다. 그리고 후손들이 '대포향사' 를 생초면 대포리에 세워 봄, 가을에 향사로서 그의 유업을 추모하고 있다.
다행히 날씨가 점점 개이고 전망도 나오기 시작합니다.
왼쪽이 월여산이고 오른쪽 높은 곳이 황매산같은데 산 전체가 드러나지는 않네요.
서쪽으로 백두대간 라인이 보여야 하는데 역시나 구름에 쌓여 있습니다.
망실봉 아래에선가 남계서원 가는 이정표를 본 기억이 있는데요. 여기서 보이는 동네가 일두 정여창선생을 추모하는 남계서원이 있는 수동면이 아닌가 싶었습니다. 멀리로는 빌딩과 아파트가 보이는게 함양시내로 짐작되었고요.
여기는 멀리 지리산이 보여야 하는 산청군 생초면 소재지 쪽인듯 했습니다.
철마산 직전 헬기장이 있고 그 아래에 통시바위가 있다. 남덕유산과 아련하게 지리산도 보이고, 그 사이 백운산과 영취산의 백두대간 능선을 감상할 수 있는 곳이다. 백운산과 영취산 앞에 괘관산도 가늠된다. 철마산에서 0.4km지나 예동마을분기점에서 예동마을로 좌틀해 흰머리재로 내려서야 고생을 조금 면한다.
♤ 철마산(鐵馬山, 744m)
철마산은 경남 산청군 생초면 구평리와 거창군 신원면 중유리에 걸쳐 있는 산으로 사방팔방 조망이 좋다. 소가야의 철마산성 흔적이 남아있는 산이다. 산꼭대기 바위 밑에 쇠로 만든 말이 있었다는 데서 유래했다. 한국전쟁 당시에는 철마산 정상을 사이에 두고 국군토벌대인 107연대와 지리산 빨치산 부대가 대치한 장소이기도 하며 맞은편 신원면 대현리는 빨치산과 내통했다 하여 인근주민 700여 명이 학살된 비극의 장소이기도 하다. (대현리 거창양민학살사건 추모공원)
* 620m 삼면봉(거창 신원면, 산청 생초면→오부면) 우회
여기서 내려서라는데 100m만 더 진행하면 삼각점이 있는 봉우리입니다. 거기서 기상관측장비가 있는 콘크리트 임도(흰머리재)로 내려서심 편안합니다. 계속 마루금을 타고 진행하면 신예동마을과 예동마을을 빙 둘러서 삼면봉도 하나 지나 바랑산에 이르는 정통 기맥길이지만 동네를 관통하면 거리 줄이기가 아주 쉽습니다. 동네에서 물도 구할 수 있고요.
신예동마을을 지나 바랑산 들머리를 찾아가다 되돌아본 예동마을 모습입니다. 저 왼쪽이 내려온 철마산 기맥 능선입니다.
신예동마을과 예동마을....
잡목만 무성한 의미없는 기맥길을 우측 옆으로 바라보며 마을길을 우회, 물을 보충할 수 있습니다.
임도삼거리에서 능선으로 합류하라는데 파란 물탱크가 있는 곳에서 과수원까지도 쉽지 않아 양회임도(시멘트 도로)를 따라 바랑산입구인 과수원까지 가면 이 이정표가 반깁니다.
♤ 흰머리재(595m)/ 콘크리트 임도로 내려서서 좌틀
산청군 생초면 노은리에서 거창군 신원면 중유리로 넘어가는 흰머리재는 철마산에서 내려오면 만나는 콘크리트 포장도로이다. 아래 마을이 신촌마을로 등장하는데 지도상에는 신예동마을로 표기되어 있다. 아마 예동마을에서 떨어져 새로 형성된 마을인 모양이다.
바랑은 탁발 스님들이 매고다니는 보리 자루같은 배낭을 말하는데 산세가 볼품 없을때 바랑산이라고 보통 이름 짓더군요. 들마루가 있고요. 쉬어가기 좋은 장소입니다.
다음 구간 지나야 할 황매산이 구름속에 살짝 모습을 나타냅니다.
앞쪽에 보이는 바위가 넘어야할 세이덤입니다. 정상부에 바늘처럼 생긴 송곳바위도 보이시죠?
계단이 끝날 무렵에 있는 세이덤전망대에서 지나온 바랑산을 바라보았습니다.
바랑산 정상에서 소룡산까지 큰재-통나무계단-세이덤 전망대를 지나 2.8~3.3km라는데 세이덤 계단 오르기가 여간 힘든게 아니네요.^^
♤ 바랑산(796.4m)/ 경남 거창군 신원면 중유리/ 바람산
바랑산은 경남 거창군 신원면 중유리와 산청군 오부면 왕촌리의 경계능선에 있는 산으로 새이덤 쪽이 조망된다. 산청군 오부면 중촌리의 오지에 위치한 왕촌, 신촌, 오휴마을 등을 에워싸고 있는 산이다. 바랑산, 소룡산은 글자 지명으로 보면 바랑산의 "바랑" 뜻이 둥지이고 소룡산의 소자도 둥지나 집이다. 바랑산은 모든 새의 둥지며 소룡산은 용의 둥지산인데 아무튼 용과 새의 보금자리인 것은 분명하다. 산청군 오부면의 오지마을인 오휴마을과 거창군 신원면 경계지점에 있는 산이다. 산청의 산 순례 코스이며 자연스러운 숲과 기암괴석이 잘 어울리는 산청 관내 북부지역 오지 산이다.
이곳 일대에 관련된 지리산 마고할미는 천왕봉 산신인데 지리산에서 불도를 닦던 반야를 만나 여덟명의 딸을 낳고 살았다. 반야는 더 많은 깨달음을 얻으려 반야봉으로 떠나고 마고할미는 나무껍질을 벗겨 남편이 입을 옷을 만들며 기다렸으나 남편은 끝내 돌아오지 않고 기다림에 지친 마고할미는 남편을 위해 만들었던 옷을 발기발기 찢어버리고 죽었으며 찢겨진 옷은 반야봉으로 날아가 풍란이 되었다고 한다. 산청의 바랑산은 원래 마고할미의 주머니였다고 한다. 인근 소룡산의 새이덤은 마고할미가 바랑에 넣고가다 흘린 돌무더기이고 옆에 있는 월여산은 마고할미의 딸, 보록산은 아들이라고 한다. 새이덤 송곳바위는 마고할매가 가죽옷을 꿰맬 때 쓰던 바늘이라고 하며 새이덤으로 오르는 계단 좌측에는 마고할미가 바랑에 넣어 정상에 가다 흘린 돌들이 1km가 넘게 깔려 있는 용두암과 괭이바위에 관한 전설이 전해 내려온다.
곰실마을을 가리키는 이정표가 있습니다.
♤ 큰재
바랑산과 소룡산의 중간지점인 큰재는 거창군 신원면의 대현리와 산청군 오부면 중촌리를 잇는 옛길로 서낭당 돌무덤이 있다.
좌측 바위가 세이덤의 송곳바위입니다.
마고할미가 옷을 깁을 때 사용한 바늘이라는군요. 멀리서 보면 뾰족한게 바늘귀처럼 생겼긴 합니다.
좌측으로는 조금 전에 지나온 바랑산(796.4m)이고, 정면으로 신원면 대현리와 그 뒤로 감악산(945m)입니다. 그리고 우측으로는 월여산(862m)이 차례로 조망되네요.
마고할미의 딸이라는 월여산입니다.
세이덤 전망대 바위를 가는 곳에도 무덤이 있고, 조금 오르니 정상에도 석축위에 무덤이 자리하네요.
♤ 세이덤/ 전망대
소룡산 오름의 급경사지 옆에 바위群을 세이덤이라 한다. 맷부리 주변으로는 석성의 흔적같은 석축이 빙둘러 쌓여져 있다. '덤' 또는 '덤바꾸'는 경상도 사투리로 바위라는 뜻이다. 진양기맥을 하며 수리덤, 누룩덤, 수영덤이, 치마덤, 허굴산의 장군덤을 만나고 인근 합천 가야산엔 상아덤이 있다. 바위가 눌려져 겹쳐서 쌓여있거나 뭉쳐있는 형상을 나타낸 덩어리(=더미)란 뜻이 아닐까도 싶다. 세이덤의 송곳바위가 마고할미가 남편을 위해 나무껍질로 옷을 꿰매 만들 때 사용한 바늘이라고 전해온다.
이제 밀재까지 거은 다 왔습니다. 내려가기만 하면 됩니다.
어느새 파란 가을하늘이 펼쳐져 있네요. 정자(소룡정, 육각정)도 깨끗하고 기품이 있어 보입니다.
건너편으로 다음 구간 올라야 할 강섭산, 소황매산, 황매산을 바라봅니다.
지리산인데 딱 이만큼만 보여주네요. 구름이 빠른 속도로 걷이던데 기다려줄 시간이 없습니다.
♤ 소룡산(巢龍山, 760.9m)/ 우봉산(牛峰山)
경남 산청군 오부면(梧釜面) 중촌리와 거창군 신원면 와룡리 일대에 경계를 이루는 산으로 정상에 서면 조망이 넓게 트인다. 산세는 비교적 거칠고 기암괴석이 많다. 산 이름에 들어간 소(巢)라는 글자는 새둥지를 의미한다. 옛 명칭은 우봉산(牛峰山)이라고 했고, 지역의 마을주민들은 우용산이라고도 불렀다. 우봉산 산줄기의 내맥은 덕유산의 지맥(支脈)이 동남쪽으로 금원산을 거쳐 망덕산에 이르고, 망덕산을 기점으로 하여 남쪽으로 뻗는 맥이 망실봉, 덕갈산, 철마산을 거쳐 소룡산에 이른다. 소룡산을 분수계로 하여 동쪽의 신원천과 서쪽의 생초천이 나뉜다. 소룡산 8부능선에 천지사란 절이 있고 기슭으로 여러 자연마을의 취락들이 형성되었다. 조선시대의 주요 관찬지리지와 군현지도에는 우봉산이 표기되지 않았지만, 『산청군지』에는 "우봉산이 현 북쪽 30리에 있다. 덕유산에서 맥이 와서 오촌(梧村)의 주맥(主脈)이 되었다. 중촌리에는 삼현(三賢)의 형제가 은거하면서 학문을 연마하던 자리에 세워진 용산서당(龍山書堂)이 있다. 오촌 홍성해(梧村 洪成海), 둔암 홍대해(遯菴 洪大海), 우봉 홍기범(牛峯 洪箕範)의 유적지이다."라고 기록하였다. 홍성해(1578~1646)는 임진왜란 때 향병(鄕兵) 수백 명을 이끌고 고을을 지킨 의병장이다.
♤ 소룡고개
소룡산에서 20분 정도 내려오면 나타나는 소룡마을로 내려가는 넓은 공터이다. 소룡산버섯연구소 건물이 있다.
야트막한 찐빵을 올랐다가 밀치로 내려서야 하는데 서울 올라가는 막차 시간이 빠듯해 도로를 따라 내려섭니다. 신원택시는 벌초를 가셨는지 전화를 받지않고, 마음이 조금씩 조급해 집니다.
♤ 정수지맥(淨水枝脈)분기점
정수지맥은 백두대간 남덕유산에서 동남쪽으로 분기하여 뻗어 내려오던 진양기맥의 산줄기가 소룡산(760.9m) 남쪽 밀치로 내려서기 전 약 0.8km, 밀치(59번도로) 서쪽 0.6km 지점인 627.6m봉에서
남쪽으로 분기하여 서로는 경호강, 동으로는 양천을 가르며 송의산(538.9m, -0.9), 매봉(599m), 구인산(587m), 비득재, 정수산(841m), 둔철산(823.4m), 마제봉(198.7m), 적벽산(166.3m)을 거처 양천이 경호강에 합류하는 산청군 신안면 하정리(원지)에서 맥을 다하는 도상거리 34.7km되는 산줄기로 진양기맥 금곡산에서 발원하는 양천의 좌측 분수령이 된다.
♤ 정수지맥 개념도
소야마을까지 걸어가서 다행히 거창 나가는 용달을 히치했습니다. 거창고속터미널에 내려 주시네요. 고마워서 담배 태우시라고 비에 젖은 비상금 2만원 드렸습니다. 고속터미널 화장실에서 수건으로 몸을 닦아낼 시간도 없어 윗도리 갈아입고, 발 닦고, 고양이 세수 하고 차에 올랐는데... 너도 마스크, 나도 마스크 아니었더라면 어쨌을까... 차라리 코비드가 고맙더라는... ㅠ^^ㅠ
♤ 밀치(밀치, 502.6m)/ 밀짐재/ 59번 국도/ BS/ 삼면 경계면(거창 신원면, 산청 오부면→차황면)
밀치는 경상남도 거창군 신원면 와룡리와 산청군 오부면 장박리를 잇는 59번 국도가 지나는 곳이다. 밀치는 산청군 차황면 장박리와 거창군 신원면 와룡리 소룡마을의 경계에 있는 고개로 예로부터 밤나무가 많아 양봉을 많이 했던 곳으로 꿀밀(蜜)자를 빌려 밀치라 부르고 있으며 지금도 양봉 생산지라고 한다. 산청군쪽은 마을이 없고 거창군의 소룡마을이 밀치를 지킨다. 거창행 버스가 한 정거장 전인 소야마을에서 유턴하는 경우도 있으니 참고해야 한다.
거창군의 최상단 삼군봉인 남덕유산에서 출발하여 최하단 산청군과의 경계인 신원면까지 신나게 걸었습니다.
아기자기 오밀조밀한 만두와 찐빵의 연속입니다. 아주 잠깐 트랭글이 꺼진 곳이 있었는데....
4일에 걸쳐 이룬 성과입니다. 저로서는 최선을 다했다고 보여집니다. 감사합니다.^^
첫댓글 엄청납니다.
아직 다는 못 읽었습니다만... 아픈것을 딛고 극복하는 것을 보면서 진한 동질감을 느낍니다.
다 그렇네요.
극복의 과정, , 즉, 극복하기 위해 더 열심히 달린다 이말씀입니다.
저는 이곳에 계신 분들이 다 보통사람 같지 않아 보였습니다(솔직한 마음입니다)
그럼에도 동경의 마음으로 슬며시 지켜는 보지만...
넘을수 없는 벽이지요.
그래도 간접 경험이라도 하면 얼마나 힘이 나는지 모릅니다.
특히나, 목디스크같이 저리고 고통스러운 것은 평생 안아야할 질병이고
더더군다나 무릎 십자인대도 다른이들은 잘만 극복해내더이다만 저는 아직 통증이 있고 걷기가 힘드는게
오늘의 제주소입니다.
그렇기에 극복하려고 애써 발버둥 치고는 있지만 ... 노력이 부족해서 아직까지 효과는 없네요
다만 여기서 제가 드리고픈 말씀은 고맙다는 말씀입니다.
많은 분들의 글을 보면서 정신적 힘을 얻습니다. 참 고맙습니다.
제 볼품없는 답글이 퐁라라님의 걸음에 힘이 되는 응원글이 되는지는 모르겠으나 .아무튼 그렇습니다 힘내세요~
부케님!
어제는 근무라 시간이 없었고 오늘 병원 가서 주사 치료받고, 도수, 물리치료 받았습니다.
장거리 워킹은 아주 좋지 않다고 그냥 오래 걷는 것도 삼가라고 하네요. ㅋ
낫긴 낫겠지만 고생 스럽네요. 45살 넘어가면 회복력이 예전 같지가 않답니다.
보름 정도는 치료에 전념하고 쉬어줘야 할랑가 봅니다. 아무튼 감사~~^^
바래기재까지 2구간으로 낑낑댔는데 밀재까지 73km여의 빗속을 뚫으셨네요 몸도 정상이 아닌데두요 젊다고 되는것도아니고 정신력의 승리라 생각합니다 병사들도 아마 우중에 걸으신길 훈련한다면 몇이나 성공할까 고개가 갸웃입니다 그리고 산행보다도 더 산행기 기록에 기력이 소진됐을듯싶네요 대충 훑는데도 한참을 보냈네요 고생많으셨고요 몸 잘 추스리기바랍니다~
네 해피마당쇠형님!
고생좀 한건 사실입니다.^^
처음부터 예보가 비였더라면 첫날 상경했을 것인데 예보가 흐림으로 나와 다시 또 기대를 한게 화근이라면 화근이었습니다.
마지막 날은 약간 오기도 생기더군요.
밀재까지는 가야 3구간으로 끝내고 다음 구간 진행하기가 수월하겠단 심산도 들었고요. 감사합니다.^^
퐁라라님 결국 출발하셨네요..
진양기맥길 나흘간의 긴 여정 마무리하시느라 수고많으셨습니다.
우중에 악전고투하시는 추억길이 눈에 선합니다.
산하와 동요하면서 즐기시는 산행 여전하시구요.~
다행히 마지막날 맑게 개인 하늘이 먼 장도를 축복해 주는 것 같네요.
멋진 산행후기담을 즐감합니다.^^
감사합니다. 방장님!
그나마 하루종일 진창 내리는 비는 아니었기에 갈 수 있지않았나 싶고요.
거창 터미널식당에서 두루치길 시켜 쏘맥을 5잔 말았는데 서비스로 내온 상추에 이상이 있었던지 배가 부글부글 끓어서 혼나기도 했습니다.^^ ㅋㅋ
된장이 하도 맛이 없고 써금써금 해서...
게나 건새우 한주먹 집어넣으면 맛이 확 달라진다고 했더니 아줌니 조금 있다가,,,
소심하게 복수를 하네요. "아저씨 식성 까다롭지예?" ㅋㅋㅋㅋㅋ
몸상태도 그렇고 날씨 상태도 좋지 않은 상황에서
진양기맥을 진행 하셨네요..
목디스크 참 고통스럽죠..
풀어 낼수는 있지만 시간이 조금 걸리기는 하죠...
그런 상태에서 장거리 진행하시기가 죽을 맛이 였을텐데
그런 상황에도 불구하고 대단하시다는 말밖에는 할말이
없을듯 합니다..
병원가서 주사맞고 약먹어 봐야 그때 뿐이고 별 효과는
없으실 겁니다..
그저 몸을 쉬어주시는게 가장 좋은 약이 되실듯 합니다.
조금은 시나브로 산행에 임하시는것도 좋으실듯 합니다..^^
다류대장님도 목디스크탈출증 걸려보셨나요?
근육이 경직되고 뒤틀려 몸을 비비 꼬면서 가기도 했습니다.^^
클났네요. 추석 전에 한번 더 다녀와야 할텐데... ㅋㅋㅋ
5번, 6번 경추가 신경을 눌르고 있어서 2주 주사치룔 받아보고 수술까지 고려하자고 하던데,
수술은 죽어도 안한다고 했습니다. 주변분 말들은 6개월 정도 걸린다고 하더군요.
똑바로 누워 자지를 못하니 그게 제일 고통스럽네요.
오른쪽은 멀쩡한데 왼쪽이 그럽니다.
견갑근이 딱딱하게 경직되는 느낌이고, 팔이 저리고 삼각근 아래 상박근육이 뒤틀리고, 가슴아래도 저립니다.
근육이완제+소염진통제+위장운동촉진제+소화성궤양용제로 2주분 약 지어다 열심히 먹고 있습니다.^^
어차피 목디스크나 디스크탈출증이나 이름만 다를뿐이지
목에 오는 통증 일뿐이라 생각합니다.
저도 물론 목디스크증상이 심해서 좌측 손가락 두개가 기분
나쁘게 절임증상이 있었고 견갑하부에 통증을 수반 하기도
했었죠...
지금은 다 잡아서 말짱 해진 상태구요.
발바닥에 족저근막염.지간신경종,무릎에 퇴행성관절염,연골연화증
허리디스크(수술),목디스크 등 제가 스스로 지은 병명이 아닌 병원
다니면서 받은 제 몸에 병들 입니다.
허리디스크는 수술을 했고 수술후 더 안좋아 졌구요..
결국은 병원 다니다 포기 하고 스스로 자연치유 공부해서 지금은
말짱하게 산행 잘하고 있는중입니다.
목디스크 수술 하지 않으시는게 현명한 판단 입니다.
주사 맞는것은 아마도 스테로이드제로 그 부위의 신경을 약2주정도
잠재워서 휴식을 취하게 하려는 조치 일거구요.
약은 먹어봤자 그 당시에만 조금 완화 되지 장기적으로는 아무소용이
없을 겁니다.
명치 주위 뼈 부위를 손바닥으로 문질러 보시면 아프실겁니다.
겨드랑이 쪽도 문지르면 아프실거구요.
본인이 하시는 것보다 주위사람에게 시켜서 문질러 보라고 하시면
통증이 확 나타나지 않을까 생각되네요.
넵! 참고할께요.
목디스크탈출증을 줄여서 보통 목디스크라고 말하더군요.
주사는 DNA와 프롤로 주사를 번갈아서 주2회 맞고요.
물리치료로 도수치료+감압치료+전기치료 받습니다.
견갑근과 승모근의 경직된 근육을 펼치는지 도수치료 받으면 입이 벌어지게 아픈데 받고나면 좀 풀립니다.^^ ㅋ
답십리 하늘병원인데 병원인접 주민이라고 30% 할인혜택을 받고요.
종합보험에서 80% 보전받을 수 있으니 금전적 부담이 덜해서 다행입니다.
집에서 세라밴드 가지고 재활 흉내내서 가볍게 웨이트 해줄려고 합니다. 감사합니당~^^
국내최고 권위 있는 진양기맥 종주 백서 입니다..
이런 실전 산행자료는 국립도서관및 각 시도 교육청 산하 도서관에 책으로 만들어서 비치하고
각 학교 교재ㄹ도 이용해야 합니다...
주사 맞는것은 아마도 스테로이드제로 그 부위의 신경을 약2주정도
잠재워서 휴식을 취하게 하려는 조치 일거구요.
약은 먹어봤자 그 당시에만 조금 완화 되지 장기적으로는 아무소용이
없을 겁니다.
그런데 이 처방대로 하지말고 어떤 처방을 해야 왼쾌 또는 도움이 될까요?
도깨비선배님 반갑습니다.^^
대간하며 띠지를 많이 보았는데 그 도깨비님이실까요? 도깨비 그림이 그려져 있는 띠지 말입니다..
과찬을 해주시니 몸들 바를 모르겠네요.
항상 말씀 드리지만 제 후기는 홀로 이 길을 걷는 후답자님들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여러 선답자님들의 후기를 모아모아 정리한 정도입니다.
아픈 곳은 치료를 받아서인지 조금 진정이 되었습니다.
어제그제가 제일 대단했던거 같습니다. 근육이 경직되고 되틀리는 느낌이었으니깐요.
근무하며 누구에게 말도 하지 못하고 혼자 끙끙 앓았습니다.^^
내일 정오에 또 주사 예약 되어 있습니다. 부지런히 나아서 추석 전에 한번 더 다녀오도록 해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아~~~~~~~~~~~~~그도깨비 아닙니다...대간에 도깨비가 3종류가 살고 있었습니다..
1산도깨비
2밤도깨비
3도깨비....
위의 두 종류의 도깨비는 표시를 하고 다녔지만 마지막 세번째 도깨비는 아무 흔적도 없이 어디든지 불쑥 나타나서
많은 사람들을 괴롭히고 다녔던 악명놓은 도깨비랍니다...ㅎㅎ
요즘은 산행 정보들이 흔하니 대충 하세요...
실제 산행 한 시간보다 산행기 작성하는 시간이 더 걸렸겠네요...
이것도 즐김이라면 할수 없지만 너무 꼼꼼하게 정리해도 스트레스 입니다....ㅎㅎ
네 빨간 도깨비, 검은 도깨비, 노란 도깨비, ... 도깨비 종류가 많았습니다.^^
마지막 도깨비는 저와 많이 닮았습니다. 저도 모토가 흔적을 남기지 않고 다닙니다. ㅎㅎ~
혹시 개암나무가 많다는 개목고개에서 도깨비를 만나면 방망이나 하나 얻을까 했는데요. ㅋ~
띠지는 취향에 따라 남길 수도 있고, 사라지는 거지만 선답자님들이 지나간 산길의 흔적은 지울래야 지울 수가 없겠더군요.
띠지로 도움을 많이 받기도 하지만 저는 띠지보다 이름 모를 땀의 흔적인 그 산길을 더 사랑합니다.^^
산행기는 여러 선답자님들의 산행기를 숙독하고 가기 전에 미리 7~80% 작성을 해놓습니다.
다녀와서 미진한 부분, 새로운 부분 보충하는 식이라 빨리 올릴 수 있답니다.^^
기억에 오래 남기기 위한 나름의 방법입니다.^^
벼르고 벼르던 진양기맥 비 때문에 미루고 미루다가 결국에는 비를 피할 수는 없었군요.
복장을 보니 노력은 많이 하셨는데 ㅋㅋ. 아무소용 없습니다.
우중에도 조망은 괜찮은거 같고요. 우리는 안개비가 내리는 정도였는데 안개가 잔뜩 끼여서 한치 앞을 볼수 없는 구름속을 거닐엇던 기역이 생생합니다.
우리는 세번으로 걸엇던 구간을 단숨에 걸어 내셨습니다.
다음구간은 화창한 가을 하늘아래 멋진 풍경 담아오시길 기원드림니다.
대단히 수고 많으셨습니다.
네 부뜰이운영자님!^^
비를 피한다고 미루고 미루고 노력을 했는데도 허사가 되었습니다.
박동마을에 초점정이라는 정자를 보는 순간 어디서 보았는데 하는 생각이....,,
부뜰이운영자님이 올려주신 후기에서 본듯했습니다.
냉장고가 있던데 작동이 되더군요. 거기서 잘까도 생각했지만 비를 맞아서 구질구질 했습니다.
그리고 지나며 방금 나간듯한 흙탕물의 멧돼지목욕탕을 여러번(5~6번 정도) 보았습니다.
나무에 대고 얼마나 문질렀는지 껍데기가 다 닳은 상태였구요.
아마 그 사진도 부뜰이운영자님이 올려주시지 않았나 싶더군요. 맞죠?^^
풍라라님 진양기맥 입문을 축하드립니다 비오는
날 이렇게 먼거리를 엄두가 안납니다 이제 덕유산 대표주자 남덕유와 월봉산 수망령 함원산 기백산 망덕산
매봉산 철마산 바랑산 소룡산 밀재 기억이 새록새록 납니다
무사완주를 기원합니다 응원합니다 화이팅입니다 ~~~~
감사합니다. 세르파선배님!^^
목욕탕도 자주 만났지만 식기봉에서 갈전산 주위로 등로 따라 멧돼지가 땅을 다 헤쳐 밭을 만들었습니다.
다져진 땅에 지렁이와 굼벵이가 더 많이 사는 건지, 아니면 다른 냄새가 나는 건지 모를 일이네요.
저는 수류탄처럼 양쪽 가슴에 말방울을 달고 진행해선지 멧선생을 한번도 만나지 않아 여간 다행이 아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