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어렸을 때 용을 보았다. 그것은 비늘과 뿔이 있는 교룡(蛟龍)이었다. 안개와 구름 사이로 나타난 용은 온몸을 꿈틀거리며 하늘로 치솟았다.
이따금 떨어지는 차가운 빗방울을 맞으며 조금은 두렵고, 조금은 놀라운 마음으로 용을 바라보며 소리쳤다. 내 목소리는 용이 우는 것처럼 크게 울려 메아리치다가 구름 사이로 사라졌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것은 하늘이 아니라 욕실 천장이었고 안개와 구름은 가마솥에서 오르는 수증기였다. 밖에서 장작을 때 데우는 아주 원시적이고 작은 욕실이었지만, 그 벽에는 화가인 큰 형이 만든 용의 부조물(浮彫物)이 생생하게 붙어 있었다.
어른들은 용에 대해 직접 본 것처럼 말하곤 했다. 그들은 용은 봉황, 기린, 거북과 함께 네 영물(四靈)의 하나인데 그 영수(靈獸) 가운데 우두머리는 용이라고 했다. 그리고 용은 제비고기와 구슬을 좋아한다거나, 쇠와 지네를 싫어한다고도 했다. 자기 고향을 자랑할 때마다 으레 꺼내는 것도 이무기가 용이 되어 승천했다는 용담(龍潭)이나 그 못(淵)에 관한 전설 등이었다.
용은 벼농사를 짓는 농민들에게는 실재하는 짐승보다 더 가까웠다. 가뭄이 탈 때 그들은 용에게 비를 내려달라고 빌었다. 그들은 용꿈도 꿨다. “개천에서 용 난다”는 말을 믿으며 한평생 허리가 굽어도 절망하지 않고 살아왔다.
한국·중국과 다른 일본의 龍문화
곤룡포(袞龍袍)를 입고 있는 이성계의 초상화. 한국이나 중국과는 달리 일본에서는 용이 군주의 상징이 아니었다.
나는 일제시대 때 초등학교를 다녔다. 이상하게도 일본 사람들은 일본의 왕을 신으로 떠받들면서도, 천황을 용(龍)이라고 부르는 사람은 없었다. 그래서 황국신민(皇國臣民)의 식민지 교육을 철저하게 배운 나는, 천황은 용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됐다. 일장기가 나붙은 식민지의 교실과는 달리 나의 공부방에는 병풍이 쳐져 있었다. 그 병풍에는 세 마리 잉어가 헤엄치는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왜 하필 세 마리였을까? 나는 그 뜻을 한국문화를 공부하며 알게 됐다.
한자말로 여가를 뜻하는 여(余)와 물고기의 어(魚)는 서로 음이 같다고 한다. 그래서 비 오는 날과 밤 시간 그리고 겨울철의 세 여가시간을 이용해서 책을 읽으면 등용문(登龍門)에 오를 수 있다는 의미였다. 잉어는 서른여섯 개의 비늘을 갖고 있다. 이 평범한 물고기가 등용문의 폭포수를 거슬러 올라가면 용이 된다고 한다.
한국에서는 공부방에서 책을 읽던 아이들도 병풍 속 잉어처럼 용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일본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율령국가가 아니었던 일본의 정치체제 속에서 천황이라고 불리는 왕인데도 그리고 국가의 실질적 통치자인 막부(幕府)의 대장군인데도 그들은 왕의 얼굴을 용안(龍顔)이라 부르지 않는다.
왜 그랬을까. 메이지(明治)의 개화기 때 일본 동전을 보면 알 수 있다. 일본인들은 당시 서양처럼 동전을 만들어 사용했으며, 그 앞면에 용 모양을 새겨넣었다. 하지만 곧 용은 ‘중국사상’에서 나온 것이라고 하여 화폐 조례를 개정하면서(1875년) 용을 뒷면에 집어넣었다. 같은 동아시아 국가임에도 일본은 한국 그리고 중국과 달랐던 것이다. 이뿐 아니다. 에도(江戶) 때의 무가(武家) 사회에서는 과거제도가 없었던 탓에 잉어가 용이 되는 등용문의 꿈도 없었다.
재앙을 물리치고 福을 가져오는 동물
조선시대의 청화백자운룡문호.
일본의 용은 물과 관계가 깊다. 그러나 한국의 용은 하늘과 산에 가깝다. 일본에는 없는 호랑이와 어울려 독특한 화이부동(和而不同) 또는 갈등과 조화의 양의적 상상력을 만들어냈다. 용은 산을 지키는 호랑이와 대칭관계를 이루어 좌청룡우백호(左靑龍 右白虎)의 풍수지리의 기본구도를 만들기도 하고, 용호상박(龍虎相搏)으로 영웅들의 치열한 경쟁사회의 모델을 표상하기도 했다. 그리고 “구름은 용을 따르고 바람은 호랑이(虎)를 따른다”는 말처럼 용과 호랑이는 자연현상을 지배하는 우주적인 힘의 상징이 됐다.
한국에서 용과 호랑이는 다 같이 재앙을 물리치고 복을 부르는(招福) 서수(瑞獸)이다. 그래서 입춘방으로 용과 호라는 글자를 크게 써붙였다. 봉황도 마찬가지이다. 용은 단독적인 기호로 사용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짐승들과 어울려 그 의미를 확장해 나갔다. 중국에서는 ‘용봉상정(龍鳳祥呈)’으로 왕권을 상징하기도 했다.
호랑이의 힘이 미치지 못하는 물속에서 용은 단연 최고다. 용궁의 주인은 용왕(龍王)이며 용신(龍神)이다.
지상에서 용의 정치적 코드는 유교와 깊이 관련되어 있지만, 물속으로 들어가면 그 종교적 코드는 불교로 바뀐다. 《심청전》의 용왕 이야기는 공양미 삼백 석을 바치는 불교의 종교 코드 그리고 뱃사람들이 항해하는 대양 문화와 무관하지 않다. 《별주부전》의 이야기도 깊이 따지고 들어가면 바다를 잘 모르는 토끼의 유교·대륙문화를 상징하고, 별주부(자라-거북)는 용왕으로 상징되는 불교적 코드와 관련된다.
용 문화는 수중, 해양, 남방 쪽으로 가면 그 기원부터 다르다. 중국에서 인도로 발상지가 바뀌는 것이다. 용 신앙은 인도의 ‘나가(뱀 신앙)’에서 파생된 것이라고 본다.
동아시아의 용은 대륙의 중국, 해양의 일본, 반도의 한국에서 각각 다른 문화로 발전해 왔다. 일반적으로 용 하면 중국을 상상한다. 현대의 할리우드 문화에서도 여전히 중국은 이소룡의 용으로 통한다. 신흥경제국을 말할 때에도 사람들은 인도의 코끼리, 중국의 용이라 말한다. 하지만 용의 문화적 코드를 조금만 더 살펴보면 용은 중국의 것도, 일본의 것도 아니다. 물론 한국의 전유물도 아니다.
정치코드에서 종교코드로
대학에서 인문학을 전공하면서 내가 배우고 찾은 것은 한국의 용이었다. 죽어서 용이 되어 나라를 지키려 했던 신라 무열왕 김춘추(金春秋)의 호국용에서는 불교코드를, 쌍화점의 용에서는 에로틱한 성(性)의 상징을 찾을 수 있었다. 그리고 동해안 개운포에서 춤을 추었던 처용가의 설화에서는 이국적(異國的)인 해신(海神)의 모습을 보았다. 《삼국유사》나 고려시대의 용을 해석할 때 불교라는 종교적 코드를 모르고는 읽을 수 없듯이, 같은 용이라도 《용비어천가》의 용은 유교의 왕도(王道)를 모르고서는 해독할 수 없다.
용을 알면 알수록 그 정체는 신비한 안개에 둘러싸인다. 신통력을 가지고 끝없이 변화하는 용을 도식적으로 코드화하기는 힘들다. 공자(孔子)가 노자(老子)에게 용에 대해 묻자 노자가 “무섭다”고 말한 것처럼, 나는 그대로의 모습 즉 카오스 상태에서 용을 해독하는 법을 배우기 시작했다. 서구문화에 호기심이 많았던 동양 청년에게 용은, 아시아의 정신과 혼이 무엇인지를 말해주었던 것이다.
용은 《주역》의 낡은 책갈피 속에서 음양오행(陰陽五行)의 오래 묵은 도형 속에서 꿈틀대며 나에게 다가왔다. 춘분(春分)에는 용이 되어 하늘로 올라갔다가 추분(秋分)에는 땅으로 내려와 깊은 못(淵) 속에 숨기도 했다. 작아지기도 하고 커지기도 하는 능소능대의 신축성을 가지고 다양한 변화를 일으키는 동력(動力)이기도 했다. 마침내 나는, 용은 ‘있는 것’이 아니라 ‘되는 것’이라는 결론을 얻었다.
용을 잘 알고 있는 한국인은 용처럼 융통성이 탁월하다. 삶을 존재(being)가 아니라 생성(becoming)으로 보는 것이다. 잉어나 이무기가 용이 되어 승천하듯, 용은 ‘있는 것’이 아니라 ‘되는 것’이다. 변화하는 모든 것의 상징코드를 만들어낸 것이다.
龍은 融合을 상징
중국인들의 용춤(龍舞). 동양의 용에 내포된 융합코드는 새로운 가치로 부상하고 있다.
용은 시대와 장소에 따라 신통력을 발휘하면서 그때마다 다른 모습으로 등장한다. 21세기의 용도 그렇다. 지식 정보사회에서 승천하는 용은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나는 그것을 융합의 상징으로 본다. 지금은 하이브리드, 크로스오버, 퓨전, 컨버전스, 인터액티브 등 이종교류와 배합 그리고 이종 격투기처럼 섞이고 융합하는 통합의 시대이다.
용은 융합과 통합의 시대에 반드시 필요한 여의주를 던져준다. 최근 세계 문화 조류에는 동서(東西)할 것 없이 인간과 동물 혹은 동물들을 합쳐놓은 ‘합성수(合成獸)’가 적지 않다. 그것들은 이질적인 형상을 서로 합친 것이어서 그 형태가 기괴하고 흉측하기까지 하다. 하지만 용은 다르다. 신성하고 권위를 갖춘 영물(靈物)로서 조화를 이루고 있는 상수(祥獸)다.
중국 고전 《본초강목》(本草綱目)은 용의 형상에 대해 아홉 마리의 동물을 거론하며 “머리는 낙타, 뿔은 사슴, 눈은 귀(鬼), 목덜미는 이무기, 비늘은 잉어, 발톱은 독수리, 발바닥은 호랑이를 닮은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때의 ‘아홉’이라는 수는 양수 가운데 가장 큰 숫자로 다(多)와 무한(無限)을 상징한다.
모든 짐승을 합친 것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문헌에 따라 아홉 동물의 구사(九似) 가운데 몸은 뱀, 귀는 소, 코는 돼지, 눈은 토끼, 머리는 악어 등 달리 나타나 있는 것들이 많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 어느 짐승이었든 관계없이 용은 여러 생물의 융합으로 이루어진 통합체라는 점이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서로 다른 짐승들의 형상들로 구성되어 있으면서도 조금도 어색함이나 위화감 없이 서로 잘 어울린다는 데 있다. 말하자면 용의 힘은 바로 융합의 힘이다. 현대적 표현을 빌리자면, 다문화사회의 이상적(理想的) 모델이라 할 수 있다.
중국은 한족(漢族)을 비롯해 55개의 피와 문화가 다른 다(多)민족으로 구성된 나라다. 그래서 용은 여러 민족의 특성을 나타내는 토템(특정 동물을 숭배)을 하나로 모아 통합된 사회를 만들고자 한 욕망에서 창안된 상징물이라고 풀이하는 사람도 있다.
문명 충돌을 넘어서는 드래곤 파워
《문명의 충돌》을 쓴 새뮤얼 헌팅턴의 주장처럼 오늘날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는 같은 뿌리임에도 불구하고 서로 치열히 싸우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용의 융합코드는 새로운 가치로 부상하고 있다. 아홉 짐승의 각기 다른 부위가 모여 영험하고 조화로운 신통력을 발휘하는 것처럼, 다문화와 문명 간의 충돌을 완화하는 ‘드래곤 파워’가 동아시아의 새로운 축을 형성할 것이다.
한 가지 사례를 들어보자. 영어의 엘리베이터(Elevator), 한자어로는 승강기(昇降機)이다. 엘리베이터는 올라가기도 하고 내려가기도 한다. 그런데 영어에는 “위로 올라가는 것”이라는 의미밖에 없다. 이는 한쪽만 선택하는 이항대립(Binary Opposition)이라는 서구적 문화전통의 산물이다. 불어(佛語)의 Ascenceur, 독일어(獨逸語)의 Fahrstuhl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우리는 엘리베이터를 승기(昇機)라 하지 않고 승강기(昇降機)라고 한다. 중국에서는 전기사다리를 뜻하는 전제(電梯)라고 한다. 사다리의 오르락내리락하는 움직임을 일부 내포하고 있을 뿐이다.
우리는 중국의 대륙문화와 일본의 해양문화를 동시에 아우르고 있다. 상반되는 두 요소를 하나로 융합하는 특이한 능력을 갖고 있다. 즉 ‘either-or’가 아니라 ‘both and’의 매개(Intermediation) 문화(Culture)를 갖고 있는 것이다.
‘서랍’이라는 말에서도 우리 문화의 경쟁력을 알 수 있다. 영어의 드로어(drawer)는 ‘풀 아웃(full out)’이라는 뜻으로 ‘밖으로 빼낸다’는 뜻을 갖고 있다. 일어(日語)의 히키다시(ひきたし)나 중국어의 추체(抽) 역시 밖으로 빼낸다는 일방적 의미밖에 없다. 하지만 우리말의 ‘빼닫이’는 빼고 닫는 두 개의 작용을 동시에 나타낸다. 외출(外出)이라는 말까지 한국에서는 나들이라고 한다. ‘나가다’와 ‘들어오다’를 하나로 합친 것이다.
西의 키마이라, 東의 용
사자와 산양, 뱀으로 구성된 서양의 괴수 키마이라. 불화와 분쟁의 상징이다.
융합의 기술은 인류에 해(害)를 가져오는 흉측한 키마이라를 낳는가, 아니면 반대로 상서로운 용을 창조하는가로 요약된다.
키마이라가 사자, 뱀, 산양으로 구성된 가상(假想)의 합성 동물인 것처럼 용 역시 여러 동물의 한 부분을 따 만든 것이다. 용만이 아니라 봉황이나 주작(朱雀), 현무(玄武)와 같은 신수(神獸)들도 이질적인 생물들을 융합시킨 합성수이며 양성구유(兩性具有)적 특성을 지니고 있다.
키마이라는 말할 수 없이 추하고 사납고 공포감을 일으키는 괴물로서 불화와 분쟁의 상징으로, 14세기 때 존 위클리프가 “이교도의 몽상”이라고 말한 것처럼 헛된 환상에 지나지 않은 존재의 상징이다. 키마이라야말로 오늘날 우리가 목격하고 있는 끔찍한 테러리즘의 문명충돌 그리고 유전자 조작으로 생긴 기괴한 생명체이다. 하지만 용은 키마이라보다 더 많은 짐승을 융합시킨 합성수이면서도 추악한 괴물이 아니라 만물을 생성하고 어울리게 하는 다양성과 변화를 포용하는 덕(德)의 상징이다.
올해는 흑룡의 해이다. 흑룡은 겨울, 북쪽, 물을 상징한다. 참고로 청룡은 봄(동쪽), 홍룡은 여름(남쪽), 백룡은 가을(서쪽)을 의미한다. 혹자는 흑룡의 해에는 나라에 나쁜 일이 일어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는 용의 의미를 잘 몰라서 하는 말이다.
흑룡의 해에는 더 이상 나쁜 일이 일어날 게 없다. 혼란과 변화가 있겠지만 최악으로는 가지 않는다. 올라갈 일만 남은 것이다. 올해는 한국을 비롯해 미국, 러시아, 중국, 북한 등에서 변화가 있을 것이다. 특히 남북 관계는 많은 갈등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 우리는 북한이 오판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남북한 긴장 관계를 창조적으로 극복해야 할 것이다.⊙
李御寧 ⊙ 78세. 서울대 문리대·同 대학원 졸업. 문학박사. ⊙《서울신문》·《한국일보》·《중앙일보》·《조선일보》 논설위원, 초대 문화부 장관 역임. ⊙ 現 대한민국 예술원 회원, 문화평론가, 이화여대 석좌교수, 《중앙일보》 상임고문, 한중일비교문화연구소 이사장.
나는 어렸을 때 용을 보았다. 그것은 비늘과 뿔이 있는 교룡(蛟龍)이었다. 안개와 구름 사이로 나타난 용은 온몸을 꿈틀거리며 하늘로 치솟았다.
이따금 떨어지는 차가운 빗방울을 맞으며 조금은 두렵고, 조금은 놀라운 마음으로 용을 바라보며 소리쳤다. 내 목소리는 용이 우는 것처럼 크게 울려 메아리치다가 구름 사이로 사라졌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것은 하늘이 아니라 욕실 천장이었고 안개와 구름은 가마솥에서 오르는 수증기였다. 밖에서 장작을 때 데우는 아주 원시적이고 작은 욕실이었지만, 그 벽에는 화가인 큰 형이 만든 용의 부조물(浮彫物)이 생생하게 붙어 있었다.
어른들은 용에 대해 직접 본 것처럼 말하곤 했다. 그들은 용은 봉황, 기린, 거북과 함께 네 영물(四靈)의 하나인데 그 영수(靈獸) 가운데 우두머리는 용이라고 했다. 그리고 용은 제비고기와 구슬을 좋아한다거나, 쇠와 지네를 싫어한다고도 했다. 자기 고향을 자랑할 때마다 으레 꺼내는 것도 이무기가 용이 되어 승천했다는 용담(龍潭)이나 그 못(淵)에 관한 전설 등이었다.
용은 벼농사를 짓는 농민들에게는 실재하는 짐승보다 더 가까웠다. 가뭄이 탈 때 그들은 용에게 비를 내려달라고 빌었다. 그들은 용꿈도 꿨다. “개천에서 용 난다”는 말을 믿으며 한평생 허리가 굽어도 절망하지 않고 살아왔다.
한국·중국과 다른 일본의 龍문화
곤룡포(袞龍袍)를 입고 있는 이성계의 초상화. 한국이나 중국과는 달리 일본에서는 용이 군주의 상징이 아니었다.
나는 일제시대 때 초등학교를 다녔다. 이상하게도 일본 사람들은 일본의 왕을 신으로 떠받들면서도, 천황을 용(龍)이라고 부르는 사람은 없었다. 그래서 황국신민(皇國臣民)의 식민지 교육을 철저하게 배운 나는, 천황은 용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됐다. 일장기가 나붙은 식민지의 교실과는 달리 나의 공부방에는 병풍이 쳐져 있었다. 그 병풍에는 세 마리 잉어가 헤엄치는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왜 하필 세 마리였을까? 나는 그 뜻을 한국문화를 공부하며 알게 됐다.
한자말로 여가를 뜻하는 여(余)와 물고기의 어(魚)는 서로 음이 같다고 한다. 그래서 비 오는 날과 밤 시간 그리고 겨울철의 세 여가시간을 이용해서 책을 읽으면 등용문(登龍門)에 오를 수 있다는 의미였다. 잉어는 서른여섯 개의 비늘을 갖고 있다. 이 평범한 물고기가 등용문의 폭포수를 거슬러 올라가면 용이 된다고 한다.
한국에서는 공부방에서 책을 읽던 아이들도 병풍 속 잉어처럼 용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일본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율령국가가 아니었던 일본의 정치체제 속에서 천황이라고 불리는 왕인데도 그리고 국가의 실질적 통치자인 막부(幕府)의 대장군인데도 그들은 왕의 얼굴을 용안(龍顔)이라 부르지 않는다.
왜 그랬을까. 메이지(明治)의 개화기 때 일본 동전을 보면 알 수 있다. 일본인들은 당시 서양처럼 동전을 만들어 사용했으며, 그 앞면에 용 모양을 새겨넣었다. 하지만 곧 용은 ‘중국사상’에서 나온 것이라고 하여 화폐 조례를 개정하면서(1875년) 용을 뒷면에 집어넣었다. 같은 동아시아 국가임에도 일본은 한국 그리고 중국과 달랐던 것이다. 이뿐 아니다. 에도(江戶) 때의 무가(武家) 사회에서는 과거제도가 없었던 탓에 잉어가 용이 되는 등용문의 꿈도 없었다.
재앙을 물리치고 福을 가져오는 동물
조선시대의 청화백자운룡문호.
일본의 용은 물과 관계가 깊다. 그러나 한국의 용은 하늘과 산에 가깝다. 일본에는 없는 호랑이와 어울려 독특한 화이부동(和而不同) 또는 갈등과 조화의 양의적 상상력을 만들어냈다. 용은 산을 지키는 호랑이와 대칭관계를 이루어 좌청룡우백호(左靑龍 右白虎)의 풍수지리의 기본구도를 만들기도 하고, 용호상박(龍虎相搏)으로 영웅들의 치열한 경쟁사회의 모델을 표상하기도 했다. 그리고 “구름은 용을 따르고 바람은 호랑이(虎)를 따른다”는 말처럼 용과 호랑이는 자연현상을 지배하는 우주적인 힘의 상징이 됐다.
한국에서 용과 호랑이는 다 같이 재앙을 물리치고 복을 부르는(招福) 서수(瑞獸)이다. 그래서 입춘방으로 용과 호라는 글자를 크게 써붙였다. 봉황도 마찬가지이다. 용은 단독적인 기호로 사용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짐승들과 어울려 그 의미를 확장해 나갔다. 중국에서는 ‘용봉상정(龍鳳祥呈)’으로 왕권을 상징하기도 했다.
호랑이의 힘이 미치지 못하는 물속에서 용은 단연 최고다. 용궁의 주인은 용왕(龍王)이며 용신(龍神)이다.
지상에서 용의 정치적 코드는 유교와 깊이 관련되어 있지만, 물속으로 들어가면 그 종교적 코드는 불교로 바뀐다. 《심청전》의 용왕 이야기는 공양미 삼백 석을 바치는 불교의 종교 코드 그리고 뱃사람들이 항해하는 대양 문화와 무관하지 않다. 《별주부전》의 이야기도 깊이 따지고 들어가면 바다를 잘 모르는 토끼의 유교·대륙문화를 상징하고, 별주부(자라-거북)는 용왕으로 상징되는 불교적 코드와 관련된다.
용 문화는 수중, 해양, 남방 쪽으로 가면 그 기원부터 다르다. 중국에서 인도로 발상지가 바뀌는 것이다. 용 신앙은 인도의 ‘나가(뱀 신앙)’에서 파생된 것이라고 본다.
동아시아의 용은 대륙의 중국, 해양의 일본, 반도의 한국에서 각각 다른 문화로 발전해 왔다. 일반적으로 용 하면 중국을 상상한다. 현대의 할리우드 문화에서도 여전히 중국은 이소룡의 용으로 통한다. 신흥경제국을 말할 때에도 사람들은 인도의 코끼리, 중국의 용이라 말한다. 하지만 용의 문화적 코드를 조금만 더 살펴보면 용은 중국의 것도, 일본의 것도 아니다. 물론 한국의 전유물도 아니다.
정치코드에서 종교코드로
대학에서 인문학을 전공하면서 내가 배우고 찾은 것은 한국의 용이었다. 죽어서 용이 되어 나라를 지키려 했던 신라 무열왕 김춘추(金春秋)의 호국용에서는 불교코드를, 쌍화점의 용에서는 에로틱한 성(性)의 상징을 찾을 수 있었다. 그리고 동해안 개운포에서 춤을 추었던 처용가의 설화에서는 이국적(異國的)인 해신(海神)의 모습을 보았다. 《삼국유사》나 고려시대의 용을 해석할 때 불교라는 종교적 코드를 모르고는 읽을 수 없듯이, 같은 용이라도 《용비어천가》의 용은 유교의 왕도(王道)를 모르고서는 해독할 수 없다.
용을 알면 알수록 그 정체는 신비한 안개에 둘러싸인다. 신통력을 가지고 끝없이 변화하는 용을 도식적으로 코드화하기는 힘들다. 공자(孔子)가 노자(老子)에게 용에 대해 묻자 노자가 “무섭다”고 말한 것처럼, 나는 그대로의 모습 즉 카오스 상태에서 용을 해독하는 법을 배우기 시작했다. 서구문화에 호기심이 많았던 동양 청년에게 용은, 아시아의 정신과 혼이 무엇인지를 말해주었던 것이다.
용은 《주역》의 낡은 책갈피 속에서 음양오행(陰陽五行)의 오래 묵은 도형 속에서 꿈틀대며 나에게 다가왔다. 춘분(春分)에는 용이 되어 하늘로 올라갔다가 추분(秋分)에는 땅으로 내려와 깊은 못(淵) 속에 숨기도 했다. 작아지기도 하고 커지기도 하는 능소능대의 신축성을 가지고 다양한 변화를 일으키는 동력(動力)이기도 했다. 마침내 나는, 용은 ‘있는 것’이 아니라 ‘되는 것’이라는 결론을 얻었다.
용을 잘 알고 있는 한국인은 용처럼 융통성이 탁월하다. 삶을 존재(being)가 아니라 생성(becoming)으로 보는 것이다. 잉어나 이무기가 용이 되어 승천하듯, 용은 ‘있는 것’이 아니라 ‘되는 것’이다. 변화하는 모든 것의 상징코드를 만들어낸 것이다.
龍은 融合을 상징
중국인들의 용춤(龍舞). 동양의 용에 내포된 융합코드는 새로운 가치로 부상하고 있다.
용은 시대와 장소에 따라 신통력을 발휘하면서 그때마다 다른 모습으로 등장한다. 21세기의 용도 그렇다. 지식 정보사회에서 승천하는 용은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나는 그것을 융합의 상징으로 본다. 지금은 하이브리드, 크로스오버, 퓨전, 컨버전스, 인터액티브 등 이종교류와 배합 그리고 이종 격투기처럼 섞이고 융합하는 통합의 시대이다.
용은 융합과 통합의 시대에 반드시 필요한 여의주를 던져준다. 최근 세계 문화 조류에는 동서(東西)할 것 없이 인간과 동물 혹은 동물들을 합쳐놓은 ‘합성수(合成獸)’가 적지 않다. 그것들은 이질적인 형상을 서로 합친 것이어서 그 형태가 기괴하고 흉측하기까지 하다. 하지만 용은 다르다. 신성하고 권위를 갖춘 영물(靈物)로서 조화를 이루고 있는 상수(祥獸)다.
중국 고전 《본초강목》(本草綱目)은 용의 형상에 대해 아홉 마리의 동물을 거론하며 “머리는 낙타, 뿔은 사슴, 눈은 귀(鬼), 목덜미는 이무기, 비늘은 잉어, 발톱은 독수리, 발바닥은 호랑이를 닮은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때의 ‘아홉’이라는 수는 양수 가운데 가장 큰 숫자로 다(多)와 무한(無限)을 상징한다.
모든 짐승을 합친 것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문헌에 따라 아홉 동물의 구사(九似) 가운데 몸은 뱀, 귀는 소, 코는 돼지, 눈은 토끼, 머리는 악어 등 달리 나타나 있는 것들이 많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 어느 짐승이었든 관계없이 용은 여러 생물의 융합으로 이루어진 통합체라는 점이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서로 다른 짐승들의 형상들로 구성되어 있으면서도 조금도 어색함이나 위화감 없이 서로 잘 어울린다는 데 있다. 말하자면 용의 힘은 바로 융합의 힘이다. 현대적 표현을 빌리자면, 다문화사회의 이상적(理想的) 모델이라 할 수 있다.
중국은 한족(漢族)을 비롯해 55개의 피와 문화가 다른 다(多)민족으로 구성된 나라다. 그래서 용은 여러 민족의 특성을 나타내는 토템(특정 동물을 숭배)을 하나로 모아 통합된 사회를 만들고자 한 욕망에서 창안된 상징물이라고 풀이하는 사람도 있다.
문명 충돌을 넘어서는 드래곤 파워
《문명의 충돌》을 쓴 새뮤얼 헌팅턴의 주장처럼 오늘날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는 같은 뿌리임에도 불구하고 서로 치열히 싸우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용의 융합코드는 새로운 가치로 부상하고 있다. 아홉 짐승의 각기 다른 부위가 모여 영험하고 조화로운 신통력을 발휘하는 것처럼, 다문화와 문명 간의 충돌을 완화하는 ‘드래곤 파워’가 동아시아의 새로운 축을 형성할 것이다.
한 가지 사례를 들어보자. 영어의 엘리베이터(Elevator), 한자어로는 승강기(昇降機)이다. 엘리베이터는 올라가기도 하고 내려가기도 한다. 그런데 영어에는 “위로 올라가는 것”이라는 의미밖에 없다. 이는 한쪽만 선택하는 이항대립(Binary Opposition)이라는 서구적 문화전통의 산물이다. 불어(佛語)의 Ascenceur, 독일어(獨逸語)의 Fahrstuhl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우리는 엘리베이터를 승기(昇機)라 하지 않고 승강기(昇降機)라고 한다. 중국에서는 전기사다리를 뜻하는 전제(電梯)라고 한다. 사다리의 오르락내리락하는 움직임을 일부 내포하고 있을 뿐이다.
우리는 중국의 대륙문화와 일본의 해양문화를 동시에 아우르고 있다. 상반되는 두 요소를 하나로 융합하는 특이한 능력을 갖고 있다. 즉 ‘either-or’가 아니라 ‘both and’의 매개(Intermediation) 문화(Culture)를 갖고 있는 것이다.
‘서랍’이라는 말에서도 우리 문화의 경쟁력을 알 수 있다. 영어의 드로어(drawer)는 ‘풀 아웃(full out)’이라는 뜻으로 ‘밖으로 빼낸다’는 뜻을 갖고 있다. 일어(日語)의 히키다시(ひきたし)나 중국어의 추체(抽) 역시 밖으로 빼낸다는 일방적 의미밖에 없다. 하지만 우리말의 ‘빼닫이’는 빼고 닫는 두 개의 작용을 동시에 나타낸다. 외출(外出)이라는 말까지 한국에서는 나들이라고 한다. ‘나가다’와 ‘들어오다’를 하나로 합친 것이다.
西의 키마이라, 東의 용
사자와 산양, 뱀으로 구성된 서양의 괴수 키마이라. 불화와 분쟁의 상징이다.
융합의 기술은 인류에 해(害)를 가져오는 흉측한 키마이라를 낳는가, 아니면 반대로 상서로운 용을 창조하는가로 요약된다.
키마이라가 사자, 뱀, 산양으로 구성된 가상(假想)의 합성 동물인 것처럼 용 역시 여러 동물의 한 부분을 따 만든 것이다. 용만이 아니라 봉황이나 주작(朱雀), 현무(玄武)와 같은 신수(神獸)들도 이질적인 생물들을 융합시킨 합성수이며 양성구유(兩性具有)적 특성을 지니고 있다.
키마이라는 말할 수 없이 추하고 사납고 공포감을 일으키는 괴물로서 불화와 분쟁의 상징으로, 14세기 때 존 위클리프가 “이교도의 몽상”이라고 말한 것처럼 헛된 환상에 지나지 않은 존재의 상징이다. 키마이라야말로 오늘날 우리가 목격하고 있는 끔찍한 테러리즘의 문명충돌 그리고 유전자 조작으로 생긴 기괴한 생명체이다. 하지만 용은 키마이라보다 더 많은 짐승을 융합시킨 합성수이면서도 추악한 괴물이 아니라 만물을 생성하고 어울리게 하는 다양성과 변화를 포용하는 덕(德)의 상징이다.
올해는 흑룡의 해이다. 흑룡은 겨울, 북쪽, 물을 상징한다. 참고로 청룡은 봄(동쪽), 홍룡은 여름(남쪽), 백룡은 가을(서쪽)을 의미한다. 혹자는 흑룡의 해에는 나라에 나쁜 일이 일어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는 용의 의미를 잘 몰라서 하는 말이다.
흑룡의 해에는 더 이상 나쁜 일이 일어날 게 없다. 혼란과 변화가 있겠지만 최악으로는 가지 않는다. 올라갈 일만 남은 것이다. 올해는 한국을 비롯해 미국, 러시아, 중국, 북한 등에서 변화가 있을 것이다. 특히 남북 관계는 많은 갈등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 우리는 북한이 오판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남북한 긴장 관계를 창조적으로 극복해야 할 것이다.⊙
李御寧 ⊙ 78세. 서울대 문리대·同 대학원 졸업. 문학박사. ⊙《서울신문》·《한국일보》·《중앙일보》·《조선일보》 논설위원, 초대 문화부 장관 역임. ⊙ 現 대한민국 예술원 회원, 문화평론가, 이화여대 석좌교수, 《중앙일보》 상임고문, 한중일비교문화연구소 이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