폰 분실 악몽 3종 세트
사라예보에서 폰을 잃어버린 후, 스마트폰 없음의 불편함을 통렬하게 일깨우는 새벽이다.
전날 사라예보에서 3시간 버스를 타고 Mostar로 왔다. 다리 하나를 사이에 두고 이슬람과 기독교 세력이 싸우면서 그 다리가 처참하게 파괴된 게 1993년. 묘지에 있는 비석 대부분의 사망일이 1993년이다. 청년도 적지 않다. 그곳에서 몬테니그로의 Kotor 가는 차편이 있었다. 코소보를 가고 싶었지만 그쪽은 교통편이 더욱 열악해서 코소보는 결국 포기했다. 국제사회로부터는 독립을 인정받았지만 세르비아로부터 독립을 인정받지 못해서 아직도 갈등의 소지가 남은 나라, 클린턴이 독립을 인정하는데 앞장 서준 때문에 클린턴 동상이 있다는 나라, 코소보. 마링코는 코소보에 가려는 나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곳은 가난하고 볼 거라고는 없는 나라인데 왜 가려고 하느냐? 북한에 가는 기분으로 가고 싶은 거냐? 등등.... 그런데 몬테니그로의 Kotor가는 표가 있다고 해서 그걸 샀다. 아침 7시 출발. 호텔에서 모닝콜을 부탁하니 그렇게 일찍 프론트에 사람이 없기 때문에 안 된다고, 대신 조식을 못 먹고 떠난다는 말에, 샌드위치와 요구르트, 치즈, 버터와 삶은 달걀, 물까지 알뜰살뜰 쇼핑백 가득 챙겨줬다. 이건 나중에 온 몬테니그로를 다 돌아다니는 버스 안에서 나를 살려준 구호품이 된다.
알람이 없으니 한 시간 두 시간마다 잠이 깼다. 그러다가 결국 제 시간이 되면 피곤에 지쳐서 그냥 잠에 골아 떨어지게 마련이란 생각까지 하면서.... 다행히 6시 전에 벌떡 일어났고, 세수도 하지 않고 곧바로 호텔을 나섰다. 이건 새벽도 아니고 그냥 밤이었다. 스마트폰의 후레쉬 앱이 간절하다. 밤길을 후드를 뒤집어쓰고 씩씩하게 걸어서 터미널로 갔는데 아무도 없다. 삼십분쯤 지나자 커피숍의 문을 열고 어제 내게 표를 팔았던 티켓 오피스의 아줌마도 출근을 하고 사라예보 가는 버스도 들어왔다. 그런데 출발 5분전인데 코토르 가는 버스가 들어오지 않는다. 티켓 오피스로 가서 무슨 일이냐고 물었더니, 엷은 미소를 띠며 벽의 시계를 가리킨다. 6시 5분 전. 순간 직감했다. 시차? 이럴 수가. 오 마이 갓~~~, 텅 빈 대합실에 앉아 공책을 꺼냈다. 같은 나라에서 시차라니, 뭐 이런 경우가 다 있나?
그런데 어처구니 없으면서도 어쩐지 통쾌하고 신선한, 그리고 이상야릇한 향수를 자극하는 이 기분은 뭐지? 그랬다. 예전에는 국경을 넘을 때마다 시차에 맞춰 시계를 고치곤 했는데, 스마트폰이 그것까지 다 알아서 해주니 신경 쓸 필요가 없이 살았던 것이다. 그러나 나중에 마링코에게 듣고서야 알게 된 사실은, 섬머타임이 끝나는 날이었던 것. 3월 마지막 일요일부터 10월 마지막 일요일까지. 하필이면 그날이 10월 마지막 일요일 새벽이었던 것. 일이 안 되려고 하면 몰아서 닥치는데, 그날이 그런 날이었다. 불운의 삼종 세트!
그런데 뒤에서 희미하게 무슨 소리가 들린다. 미스~~, 돌아보니 티켓 오피스의 아주머니가 커피 한잔을, 찻잔에 받쳐서 건네준다. “this coffee is for you” 아, 그 새벽, 텅빈 대합실에서 마신 커피의 맛은 결코 잊을 수 없을 것이다. 철저히 혼자 고립된 곳에서 푸근한 미소를 띠며 건네주는 커피 한잔. 여행에 지쳐 그만 끝내고 싶어지는 순간, 그 한잔의 커피는 나를 다시 떠나게 했다. 진정한 여행은 이제부터 시작되는 것이라고.....
그런데 이곳 발칸반도 버스터미널 어디에도 시각표가 없다. 뭐든 물어봐야 한다. 아주 오래전, 내가 이십대 때에는 월간 “시각표”라는 책이 있었다. 전국의 기차시간과 버스 시간, 하다 못해 시골 완행버스 시각까지 친절하게, 제법 두툼하게 (샘터 크기의 책자인데 두께는 두배쯤 된다) 매월 발행되었다. (그 책 만드는 사람들은 지금 다들 뭘하고 있을까? 별게 다 궁금하네.)그러고 보면 아찔한 속도감을 느낄만한 세월을 내가 살아온 것이다. 그리고 매표를 할 때 국경을 넘게 되지만 여권을 보자고 하지도 않는다.
마침내 버스가 들어왔고 탔다. 코토르까지 가는 여정이 버스 앞 차창에 적혀있다. 오, 포드고리차를 경유한다. 몬테니그로의 수도이다. 그곳에서는 코소보의 국경도시 프리즈렌으로 가는 버스가 있을 것 같다. 이때만해도 내가 지치지 않았던 것이다. 잠도 못 잤으면서... 커피 한잔의 악마적인 마력이었는지도... nothing, definitely nothing, 이라는 곳에 나는 왜 그리도 가려고 하는 걸까? 모르겠다. 코토르는 왜 가는가? 누가 가라고 등 떠민 것도 아닌데... 왜 이리 고행 같은 길을 가는 것인가? 모르겠다. 마치 컨베이어벨트에 올라탄 것처럼 내가 알지 못하는 뭔가가 내 등을 떠밀고 있는 것이다. 그게 무엇일까.
몬테니그로는 마운틴과 블랙이 합쳐진 이름이다. 이름에 걸맞게 버스는 가파른 산길을 달린다. 나무가 별로 없는 돌산의 산악도로, 옆으로는 낭떠러지이고 저 멀리로 조그맣게 사람들의 마을이 옹지종기 모여있는 게 내려다보인다. 산 위에서 내려다본 분지에는 엷은 보자기를 덮어놓은 것처럼 아침 이내가 신비하게 드리워있다. 마치 사막처럼 지루하고 심심한 길이다. 하늘은 푸르고 산길은 끝없이 이어진다. 그런 가운데 드물게 돌담 같은 인간의 흔적이 보이는 게 신기할 지경이다. 그런 길을 운전기사 둘과 나 혼자 타고 넘어간다.
한 시간쯤 달려 작은 마을의 터미널에 도착했다.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가 이곳 정식 국가 명칭인데, 이곳은 헤르체고비나 지역이다. 일가족의 이별장면을 목격한다. 노인 둘과 총각 셋, 처녀 둘이 둘러서 있는데 그 중 젊은 남녀가 버스가 탄다. 여자의 눈가가 빨갛다. 그렇게 몇 번의 정류장을 들린다. 발칸은 교통사정이 좋지 않아서 고속버스란 개념이 없이, 버스가 가면서 거의 완행버스처럼 곳곳에서 내려주고 태워주는 식이다. 대부분 장거리이기 때문에 기사가 둘이 타서 안내원을 겸하다가 교대로 운전을 하기도 한다. 작은 도시에 들릴 때를 제외하고는 버스는 곧 다시 산간도로를 탄다. 마치 정령치 같은 길을 줄곧 달린다고 생각하면 된다.
버스에 흔들리며 새벽의 긴장이 살짝 풀어진 나는 다시 한번 음모를 꾸민다. 코토르까지만 가면 그 다음부터는 크로아티아 여정이다. 드브로브니크로 해서 스플리트, 자다르로 아드리아해안을 끼고 올라갈 것이다. 자그레브 마링코의 집에서 한 이주일 머물렀다고 크로아티아만 들어가면 마치 고향에 돌아간 기분일 듯 하다. 그러므로 코토르 가기 전에 코소보의 프리즈렌에 들린다면? 프리즈렌에서는 코토르 가는 차가 있을 것이다. 이렇게 전라도에서 경상도, 충청도 가는 줄 살짝 착각을 하고서 말이다. 전라도 경상도 가는 차도 잘 없는 데 말이다. 국경 넘기를 도 경계 넘듯이 하다보면 이런 착각을 하게 된다.
나는 공책에 지도를 그렸다. 그러니까 나는 이곳을 다니면서 지도 한 장도 없이 다닌 것이다. 그리고 버스 기사에게 물었다. 포드고르차에서 코소보의 수도 프리슈티나나 프리즈렌 가는 버스가 있는지? 그 전에 우선 포드고리차에 몇시에 도착하느냐고 물었다. 기사가 공책에 써준다. 포드고리차 14:00, 코토르 16:00. 이게 뭐지? 나는 잠시 멍했다. 내 예상대로라면 오후 2시에 코토르에 도착해야 했다.
알고보니 이 차는 온 몬테니그로를 다 훑고 다니는 버스였다. 내 머릿속의 루트대로 코토르로 직선코스로 가는 게 아니었다. 버스는 줄곧 황량한 정령치 같은 길을 달려서 구례 같은 시골 버스 정류장에 선다. 고작 한 두 사람이 타고 내린다. 도로에는 소 떼들이 다니고, 산은 가파르고 강물은 짙은 녹색이다. 강이 나타나니 그나마 풍경이라고 할만 한 게 생긴다. 그렇게 황량한 산길에 전기 철탑이 가로지르고 있다는 것이 경이로울 뿐이다. 그리고 사람이 살고 있다. 작별하는 사람, 떠나는 사람, 도착하는 사람, 그리고 화장실에서 돈 받는 사람,
11시 30분, 4시간 반 만에 마침내 국경 검문소에 도착했다. 산꼭대기에 있는 검문소이다. 대체로 나갈 때는 대충 지나간다. 입국할 때는 여권을 회수해서 도장을 찍는다. 뚱뚱하고 너그러운 미소를 가진 기사 아저씨가 사람들의 여권을 걷어서 검문소 창구로 가져간다. 발칸반도의 인접국 사람들은 신분증으로 대신하기도 한다. 자동차들은 트렁크까지 열고 짐을 샅샅이 뒤지지만 버스 승객들은 기사가 도장을 받아온다. 경찰 앞에 서면 꼭 저런 자세가 되는 걸까? 기사의 자세가 꼭 숙제 검사를 받는 학생처럼 보인다.
그런데 기사가 몸을 돌리더니 나와 눈이 마주치자 손짓을 한다. 내리라는 말. 엥? 왜? 지금껏 이런 일은 한 번도 없었다. 오늘 날 잡았구나. 육로로 국경을 넘으면서부터는 영사관에서도 나를 포기했는지 아무 문자도 오지 않더니, (아니면 영사관이 없어서인지도 모르겠지만) 그나마 성실한 것은 비즈니스 업자들이라서 KT만큼은 열심히 문자를 보냈는데 그나마도 받을 수 있는 폰도 없는 지금 여권검사에서 호출이라..., 나도 숙제검사 받는 학생처럼, 그러나 꿀릴 것은 없으니 당당하게 갔더니, 캔 유 스피크 잉글리시? 예스. 유, 코리아, 평양 오아 세울? 세울! 오케이, 땡큐..... 끝!
한때는 이 사람들, 평양하고 더 친한 나라가 아니었던가? 하여간, 한국인은 내가 처음인가? 아마도 여행자들이 잘 다니지 않는 괴상한 루트라서 그럴지도 모른다. 승객들은 모두 로컬피플인데다, 기사 아저씨는 그나마 다행스럽게 숫자는 영어가 가능하다. 그래서 텐 미니츠! 이러면 십분 정류장에 쉰다는 것이고 원 어클락, 하면 한 시에 출발한다는 것이다. 아저씨는 정류장에 설 때마다 나를 특별 대우해서 이렇게 알려주었다. 이제 내가 여권 검사를 받고 버스에 오르니 씩 웃으면서 어깨를 툭툭 쳐준다. 숙제를 잘 했다는 건가? 헤헤헤~~~
돌아보니 몬테니그로 시골 아저씨 아줌마들도 다 스마트폰으로, 그것도 삼성 폰으로 휘리릭 문자를 주고받고 검색을 한다. 나는 없다.
앞으로도 네 시간을 더 가야한다. 다시 바다의 굽이치는 파도 같은 산길을 달린다. 진정한 여행은 길을 잃어버린 순간 시작된다고, 한동안 내가 잘도 나불거렸던 걸 통렬히 반성한다. 진정한 여행은커녕 몸만 고단해진다. 2시, 배불뚝이 기사 아저씨 말대로 포드고리차에 도착했다. 한 나라의 수도인데, 그동안 탓던 사람들 내리고 나자 손님은 아줌마 혼자다. 누군지도 모르는 아줌마까지 고맙다. 호텔에서 싸준 조식을 점심으로 먹는다. 먹고 힘내자. 이제 차는 방향을 서쪽으로 틀었다. 아드리아해를 향해서 달린다. 정령치 같은 길을 아홉 시간을 달린다. 아무리 아름다워도 지친다. 코소보고 뭐고 얼른 쉬고 싶다. 이럴 즈음 푸르른 바다가 나타난다. 오, 이 물빛이라니.....
4시 반, 드디어 코토르에 도착했다. 버스에서 내리는데 마치 기사 아저씨와 긴 여행을 한 기분이었다. 내내 챙겨준 아저씨가 고마워서 사진을 한 장 찍자고 했더니 흔쾌히 응해준다.
이후로 아름다운 드브로브니크, 스플리트를 가지만, 내 머리 속에는 몬테니그로의 황량하던 산길이 더욱 기억에 남아있다. 새벽에 커피를 건네던 아주머니와 기사 아저씨를 잊지 못한다. 진정한 여행은 길을 잃어버린 순간 시작된다는 말을, 아무래도 아직은 더 나불거려야 되려나보다.
첫댓글 내가 뭐랬어? 폰 목에 걸고 다니라니깐!!!
사람이 사는 곳은 어디든 아름다운 곳일거야~
힘내서 남은여정도 씩씩하게---
기사 아저씨 고르바초프준 알았네 ㅎㅎ
보스니안 커피를 마시고 기분이 살짝 좋아져서 보스니아 사람들 참 좋으네~~ 이러면서 헤롱헤롱 걸어다니다가
메고 있던 색에서 꺼내간 듯. 세상 구성요소 중에서 절대로 빠지지 않는 게 소매치기, 친절한 사람, 도둑, 선량한 사람, 악한 사람, 사기꾼, 커피대접하는 여자, 피해자, 그리고 학살자 ㅎㅎㅎ, 그거 확인하려고 이렇게 싸돌아댕기는 중인갑소
그리고 싸돌아다니는 사람~ㅎㅎ
악;;; 글씨 작아서 겨우 읽었네요;;;;조금 키워주센;;;;ㅠㅠ
눈 아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