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 핼버스탬 44년간 집필 ’콜디스트 윈터’ 출간
미군의 베트남 주둔에 의문을 제기한 보도로 1964년 퓰리처상을 받은 미국의 저널리스트 데이비드 핼버스탬은 1963년 한국전에 참전했던 군인들로부터 당시 이야기를 전해듣고는 이 ’잊힌 전쟁’을 책으로 엮어내기로 했다.그는 이후 시중에 나와있는 관련 서적을 탐독하고 한국전쟁에서 살아남은 보병 수백 명을 인터뷰한 끝에 2007년 봄 책을 완성했다. 그러나 퇴고 후 닷새 만에 그는 또 다른 취재를 위해 캘리포니아로 가던 중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핼버스탬의 유작 ’콜디스트 윈터’(원제 The Coldest Winter)는 73세의 나이에도 취재를 나서다 숨진 한 저널리스트의 44년간 집념이 담긴 책이다.
책은 1950년 10월 20일 미군 제1기병사단의 평양 입성과 5일 후 벌어졌던 중공군과의 첫 교전, 그리고 연이은 패배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저자는 이와 함께 1950년 8월 낙동강방어선전투와 1950년 9월 인천상륙작전, 1950년 11월 장진호 전투, 1951년 2월 지평리 전투 등 상황을 생생하게 묘사하며 전쟁의 비극적인 순간을 전한다.
무엇보다 참전 용사 수백 명과의 인터뷰는 전투 속 병사 개개인의 모습을 선명하게 드러낸다. 거대한 역사에 가려 눈에 띄지 않았던 병사들은 저자의 저널리즘적 서술 속에서 생생하게 되살아난다.
저자는 한국전쟁이 오판에서 벌어진 전쟁이라고 설명한다.
첫 번째 오판자는 소련이었고 원인제공자는 미국이었다. 1950년 1월12일 워싱턴에서 국무장관 딘 애치슨은 미국의 아시아 방어선에서 한국을 제외한다는 일명 ’애치슨 선언’을 발표했고 소련은 이를 한반도에서 어떤 무력도발이 있더라도 미국은 가만히 있을 것이라는 뜻으로 받아들였다.
두 번째 오판자는 김일성이었다. 1950년 4월 소련의 전쟁 허가를 요청하기 위해 김일성은 박헌영과 함께 모스크바를 방문했다. 박헌영은 이때 ’북조선에서 첫 신호’를 보내면 남조선 인민들이 집단적으로 봉기할 것이라고 장담했다.
저자는 이를 두고 “결국 그(김일성)는 자신의 인기가 얼마나 높은지, 그에 반해 이승만은 얼마나 형편없는지, 그리고 남조선 인민들이 얼마나 그의 침공을 손꼽아 기다리는지를 터무니없이 부풀리며 남침을 부채질한 측근들에게 둘러싸여 있던 셈”이라고 비판한다.
미국도 오판했다. 그들은 한국전쟁 초반 미 육군의 전투력을 과대평가했다. 그 결과 인민군이 38선을 넘어왔을 때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을 비롯한 주요 군 사령부 요원들과 정부 고위 관료들, 미군들 대부분은 현재 육군의 상태가 아무리 형편없어도 그들을 막아내는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을 것으로 확신했다.
저자는 거듭된 오판들의 배경을 살피고자 주요 인물들의 성격 분석에도 공을 들였다.
특히 맥아더를 ’마마보이’로 평가하는 점이 눈에 띈다. 1918년 별을 단 이후 수십 년을 장군으로 지내온 그는 오만과 독선으로 가득한 인물이었다. 맥아더 본부에서는 맥아더가 일방적으로 말하고 상대방은 듣기만 하는 것이 비공식적인 규칙이었을 정도로 그는 ’듣는 법’을 모르는 사람이었고 자기 과신에 찬 인물이었다.
이런 성격은 한국전 판세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가장 심각했던 것은 중국을 지나치게 얕잡아봤다는 점이었다. 그는 자신이 중국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중국에 한 번도 가보지 않았으며 머릿속에 있는 중국의 모습은 마오쩌둥 이전의 19세기 중국의 모습이었다. 심지어 그는 1950년 12월 말 중공군의 본격적 공격을 앞둔 시점에서도 중공군의 총지휘관이 누구인지도 정확히 몰랐다.
이런 그의 뒤에는 어머니 펑키 맥아더가 있었다. 자신의 야망과 기대에 미치지 못했던 남편이 세상을 떠나자 그녀는 아들의 경력관리에 몰두했다. 심지어 아들이 육군사관학교에 다녔던 4년 동안 근처 호텔에서 머물면서 아들을 지켜볼 정도였다. 저자는 이를 두고 맥아더가 “역사상 그 어떤 인물보다도 마마보이였다”고 평가한다.
맥아더의 오판에는 그의 눈과 귀를 막은 참모들도 한몫했다. 참모들은 맥아더가 원하는 일이라면 뭐든지 저질렀고 그의 예상에 의문을 제기하는 요소들은 최소화하기에 바빴다. 특히 정보 참모였던 찰스 윌로비는 의도적으로 미리 손을 본 정보들만 맥아더에게 전달했다. 1950년 10월 말이 되자 한반도 최북단에 중공군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는 보고가 이어졌지만, 그는 중공군이 아니라고 부정하거나 소규모 지원군일 뿐이라고 무시했으며 그 결과는 압록강 근처에서 처절한 패배로 이어졌다.
방대한 자료를 바탕으로 전투는 물론, 당시 주변국들의 정세와 주요 인물들까지 치밀하게 퍼즐을 짜맞추던 이야기는 한국전쟁에 참전한 폴 맥기라는 퇴역군인과의 인터뷰를 통해 한국전쟁의 의미를 되새기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한국전쟁에 참전한 것은 누가 뭐라 해도 옳은 일이었다고 확신했다. 본인 스스로 내린 결정이었고 지평리 전투처럼 최악의 상황까지 겪긴 했지만 한 번도 참전 자체를 후회한 적은 없었다. 그 후 50년이라는 긴 세월이 흘렀지만, 그의 생각에는 조금도 변함이 없었다. (중략) 다들 그곳에서 모진 고생을 하고 수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지만 그럴 만한 가치가 있었다고 생각했다. 인민군이 두 번 다시 남한을 넘보지 않았다는 사실만 보더라도 미국이 한국전쟁에 참전한 것은 정당한 결정이었다고 생각했다 (중략) 맥기는 한국전쟁에 참전한 것이 꽤 잘한 일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어차피 누군가가 나서서 해야 할 일이었다. 지금 와서 다시 생각해봐도 참전하는 것 말고는 달리 뾰족한 수가 없었던 것 같았다”(1천13-1천15쪽)
정윤미ㆍ이은진 옮김. 1천84쪽. 4만8천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