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자마을의 하룻밤
여흘 전쯤 한국학중앙연구원 정보세터의 자료실장인 안승준박사로부터 7월 9일 안동의 한국국학진흥원에서 개최하는 한국학자료정보화의 워크샆에 강연을 해달라는 부탁을 받고 “한국의 紀錄(기록)文化(문화)”에 대해 말하겠다고 言約(언약)을 했다. 나는 발표할 글을 세 번이나 고쳐 쓰면서 어떤 내용을 담을 것인 가를 생각하느냐고 苦心(고심)을 했다. 초고를 작성한 다음 철학과 정신이 부족한 것 같아 다시 고쳐 썼다.(올사모카페 창작소품란에 올렸음)
내가 8일 종주에 내려갈 일정이 바뀌어 8일 아침 한국학중앙연구원에 가서 버스로 함께 가기로 했다. 8시 40분까지 가기로 했다. 나는 8일 아침 6시에 일어나 준비를 하고 한 시간 전에 집을 나섰다. 원래 가던 방식과 달리 집식구가 일어주는 집 앞에서 타는 안양가는 시내버스 303번을 탔다. 어쩐지 가다가 늦을 것 같은 예감이 머리를 스쳐갔다. 그러나 40분이나 남았으니 충분히 시간 안에 도착할 것 같았다. 그런데 빙빙 돌아가는 코스여서 KT 앞에서 220번으로 換(환)乘(승)할가 하다가 그냥 가기로 했다. 판교에 들어서서는 시간이 조여오기 시작했다. 내려서 택시를 타야할 것 같았으나 택시를 잡다가는 더 늦을 것 같았다. 신호등에 걸리고 뒤에 출발한 차가 앞서는 상황이 벌여졌다. 10분 늦게 도착하여 손전화로 사택 앞에서 기다리니 여기서 타자고 했다. 나 때문에 15분을 늦게 출발을 했다. 참으로 미안했다. 내가 가던 방식으로 차를 탔으면 예정시간보다 15분전에 도착할 일이었는데!
차 안에는 10여명이 타고 있었는데 원고관계로 연락을 했던 이주혜씨, 심재우교수, 김봉자씨, 유지영씨, 권오정씨, 이현주씨 등 반가운 얼굴들이었다.
버스는 원주로 중앙고속도로를 달려 안동에 15분 늦게 도착을 했다. 국학진흥원에 있는 최연숙박사를 만나니 반가웠다. 점심식사로 도시락을 준비시켰는데 8일의 점심약속을 9일로 착각하여 식사준비를 못했다는 일이 벌어져 갑자기 식당을 찾아가 식사를 했다. 식사를 하고 진흥원에 가서 나는 유교박물관을 혼자 들러보았다. 잘 꾸며져 있었다. 일반 사람들에게 유교의 진수를 알리려 노력한 흔적을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 박물관이 관람객을 위해서 얼마나 노력하느냐에 따라 전해주는 메시지가 다를 수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정보센터 김현소장의 첫 발표가 있어 이 정보화 사업의 전체적 윤곽이 무엇인가를 알 수 있었다. 요지는 각 기관에서 올리는 내용을 연결시키어 네트워크를 원활하게 하려는 연결임을 알 수 있었다. 이는 정보화에 최고 전문지식을 가진 김현 소장의 아이디어임을 직감할 수 있었다.
둘째 번의 발표는 규장각의 박권수박사의 의궤류, 장서각 심재우 교수의 장서각 선원보, 영남권의 자료의 정보화사업에 대한 이욱박사의 소개, 호남권자료의 정보화에 대한 한문종교수의 설명, 고려대학의 해외 자료의 정보화사업에 대한 정우봉 교수의 발표가 있었다.
전체적으로 열심히 일을 하였으며 한국학 자료의 정보화에 공동보조를 취하고 있으며 상호 문제점 보완을 위해 노력하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나는 전체의 발표를 들으면서 정보화사업으로 자료를 화상으로 올려 놓아도 언젠가는 이를 책으로 출판해야할 것이라는 생각을 가졌다. 이미 책으로 발간된 자료도 있지만 새로이 발굴한 자료의 경우도 있었다. 이는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종래 자료의 수집 정리를 목적으로 수행되던 국학진흥연구비가 정보센터로 이관되면서 생긴 갭의 문제가 있었다. 연구자가 현재 디지털화한 자료를 근거로 논문을 쓸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인용한 자료가 디지털에서 삭제되거나 변경될 수 있는 자료의 가변성이 크기 때문이다.
8일 오후 5시 40분에 우리는 국학진흥원 강당에서 숙소인 군자마을로 차로 이동을 했다.
거기서 김준식 원장(전 안동시문화원장)을 만났다. 김원장님과는 오래전부터 면식이 있었다. 김원장의 선친인 김택진옹의 안부를 물었더니 3년전에 돌아가셨다는 말에 나는 啞然失色(아연실색)하지 않을 수 없다. 제가 그동안 안동을 와보지 못한 것이 7년이나 되었다. 나는 7년전 박씨의 문서를 조사 차 안동을 지나면서 金(김)澤(택)鎭(진) 옹과 전화통화를 한 것이 마지막이었던가 하는 생각을 떠 올렸다.
김옹은 30여년 전 고문서를 연구원에 빌려줘 {광산김씨오천고문서}를 한국정신문화연구원에서 출간하는 계기를 만들었고, 이후 연구원의 고문서팀과는 오랜 관계를 맺어왔다.
나와 김옹과의 관계는 특히 金(김)武(무)의 分財記(분재기)를 연구할 때 안동을 들러 김옹으로부터 2-3일 간의 현지의 설명을 들었다. 고려시대 12세기 국가의 간성이었던 충렬공 김방경은 안동김씨이지만 그는 김무의 외할머니 가계로 연결됨을 그 묘소와 선조 묘소가 옆에 있음을 통해서 알 수 있었다. 김무는 259명의 노비를 소유했고, 그를 자손들에게 물려 준 분재기는 너무나 유명한 것이다. 나는 이 분재기에 대한 논문을 쓴 바 있다. 조선 전기에 양반들의 재산의 제일 항목이 토지가 아니라 노비였다는 사실을 밝혔다. 후기에 오면 토지가 재산의 중심이 되었다. 이는 토지의 생산성이 높아졌기도 하고, 노비는 유동적이어서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도망노비가 속출했다. 도망노비는 실제로 도망간 노비도 있었지만 실제로 노비의 거주지를 주인이 파악하지 못하는 노비를 총칭하고 이를 분재기나 호구단자에 逃亡(도망)奴婢(노비)秩(질)로 기록하였다.
김택진 옹의 영령에게 편히 잠드시라고 하는 인사를 내 마음 속으로 올렸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이정섭씨를 만났다. 이정섭씨와는 40년 지기이다. 한문을 잘하는 학자로서 국학진흥원에 3일간 한문강의를 위해서 내려오곤 한다는 것이다. 얼마 전 중풍을 앓아 걷기가 불편스러운 것을 보니 안타까웠다. 그리고 김준식 원장의 말씀 중 광산김씨고문서 진열관을 문공부의 지원을 받아 만들어 놓았는데 그 유지비 중 전기료가 월 100만원이 나와서 유지가 어렵다는 말을 들었다. 실제 개인 기념관을 유지하기 위하여 월 100만원의 돈을 지출하기란 대단히 어려운 일로 이를 해결하기 위한 방책을 국가가 강구해야 할 것이다.
저녁식사는 야외 뷔페식사를 했다. 식사가 끝나고 안동대학의 정진영 교수의 고문서 강의가 있었는데 나는 그 시간에 군자마을의 건물을 돌아보는 시간을 최연숙 박사와 함께 가졌다. 최박사는 한국정신문화연구원 고문헌관리학과 1회 졸업생으로 한문과 고문서 초서에 능하며, 성실한 학자이다. 현재 국학진흥원에서 자료조사업에 종사하고 있다. 박사학위 취득후 국립중앙도서관 고서전문위원으로 일하다가 영농을 하겠다고 함양으로 내려왔다. 그런데 이곳으로 이사를 한 것이다. 최박사는 입학 때부터 나와 知面(지면)을 하게된 사이이다. 정숙한 인품이 사람에게 호감을 주어 한 시간 동안 군자마을의 고택을 돌아보면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는 후조당(김부필-1516-1577)의 작은 방이 숙소로 정해졌다. 군자마을의 명칭을 얻게 된 것은 김효로(1454-1534)의 아들 손자 7명이 모두 군자다운 인품과 행실을 보였음으로 안동부사로 왔던 寒(한)岡(강) 鄭逑(정구)가 이 마을의 모든 사람이 군자가 아닌 사람이 없다고 칭찬한데서 유래한 것이다. 우리나라의 군자리로 알려진 마을이 7곳이 검색되는데 실제로 군자다운 마을의 이름을 가지고 있는 곳은 이곳 뿐이다. 조선시대 君子(군자)라 함은 선비의 표준형이며 이상형이라고 할 수 있다. 君子(군자)와 대칭되는 말이 小人(소인)이다. 공자가 일생동안 제자교육을 한 {論語(논어)}에는 군자의 특성을 여러 가지로 설명하고 있다. 조선시대의 君子(군자) 相(상)은 천리를 배워 실천하고 進退(진퇴)出處(출처)에 분명한 명분이 있어야 하며, 인의의 실천에 앞장서고 부단히 학문을 연수하여 유교윤리에 충실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자기 이익을 앞세우는 일은 소인의 행위이다. 남을 헐 뜯는 것도 소인이 행태이다. 김택진 옹은 가위 군자의 표상이었고, 그 아들 김준식씨, 둘째아들 김방식 관장(체험관 君子(군자)古(고)窩(와)관장)도 군자의 생활을 실천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후조당은 퇴계의 제자인 김부필(1516-1577)의 당호이다. 그 간판은 퇴계의 친필이다. 국학진흥원에서는 영남지방의 木版(목판) 4만여점을 보아 장판각에 진열하고 있으며 또한 이 지방의 현판을 많이 수집하여 {뜻이 담긴 현판 扁(편)額(액)}이란 현판도록 1집을 출간하였다. 이 귀중한 책을 선사받았다. 감사드린다. 이에는 선현들의 우아한 글씨와 깊은 철학이 담긴 내용이 도판과 함께 상세히 설명되고 있다.
군자마을은 광산김씨가 이곳에 정착을 한 것은 김효로대부터 26대 600여년을 世居(세거)해온 마을이었다. 1974년 안동땜의 건설로 이곳으로 이전되었다. 현재 안동시 와룡면 오천동 산28-1번지로 주요 건물을 옮겨 놓은 곳이고 일반인들이 생활체험을 하도록 활용되고 있는 고택이다.
후조당에 정해진 방에 짐을 풀고 잠자리를 준비하고 있는데 안승준 실장이 술을 한잔 드시겠냐는 전화가 왔다. 그리고 정진영교수가 강의를 마치고 찾아와 안승준실장, 심재우 교수, 허태구박사, 어강석박사와 후조당 대청에서 술을 마시면서 환담을 나눴다. 허태구 박사는 나와 육군사관에서 깊은 은혜를 받았던 고 허선도 교수님의 막내아들이다. 40년전 허교수님의 막내아들이 유아였는데 어젓이 자라서 서울대학교에서 이태진 교수의 지도를 받았다고 소개함에 40년 지기를 만난 것 같았다. 나는 술을 마시면서 역사연구가 과거에 머물러서는 안되고 앞으로의 역사창조에 도움을 주기 위한 학문이 되어야 한다는 점을 이야기하고 한 시간의 술자리를 파했다.
어강석 박사는 문학을 전공하는 장서각 연구원인데 후조당 옆 방에 자는 기회로 술자리를 파한 후 내방에 와서 고려시대 쌍화점의 가사연구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요지는 쌍화점을 지금까지는 만두집으로 해석해왔다는 것이다. 그런데 자기는 이를 달리 해석한다는 것이다. 쌍화점의 가사는 한 여자가 쌍화점을 들렸는데 회회야비가 손목을 잡았는데 이 소문이 세상이 퍼지면 이는 광대의 소행일 것으로 판단한다는 내용이다. 상품으로 만들어 파는 만두집이 있을 수 없다는 생각은 나도 마찬가지이었다. 쌍화를 광대라는 점에 착안하여 백정인 양수척이이라는 역사를 그런대로 정밀하게 해석하여 雙(쌍)花(화)는 '짝골'로 읽었고, 이는 버드나무로 만든 그릇이라는 것이 그의 견해였다. 밤 1시반까지 우리는 의견을 주고 받았다. 아마 어강석박사는 내가 온다는 사실을 듣고 토론의 시간을 미리 계획하였던 같다.
후조당 입구쪽에 있는 작은 방에서 혼자 잠을 자고 있는데 밤중에 천둥이 요란스럽게 쳤다. 천둥은 조금 후에 멈췄다. 아마 이는 김택진 옹의 영혼이 밤에 우리들을 찾아와 자신의 묘소를 찾지 나의 못한 무례함을 혼내주는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9일 아침 6시에 눈이 떴으나 6시 반에 일어나 세수를 하고 7시30분에 강당에 가서 차를 마셨다. 김병일 국학진흥원 원장님이 오셔서 차를 함께 마셨고 아침 식사를 했다. 김원장님이 마라톤 코스를 9번이나 완주했다는 말씀이 잊혀지지 않을 自己紹介(자기소개)였다. 그리고 63킬로미터의 1.5배의 코스를 두 번 주파했다고 했다. 鐵人(철인)이 지금 哲人(철인)이 되고 있는 과정인 듯하다.
우리는 9시에 진흥원 강당으로 옮겨 한 시간 앞당겨 일정을 진행했다. 내 강연은 10시부터 한 시간 동안이었다. 내가 강의에서 전하려 한 정신은 고문서 자료를 연구하되 이를 모두 버리고 30년 후에 여러분이 실천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생각하라는 것이었다. 전주와 광주에서 온 사람들을 배웅하면서 광주에도 전주에도 국학진흥원과 같은 기관을 설립하도록 노력하라는 말을 당부했고, 필요하면 내가 도와주겠다는 이야기를 최윤진박사와 유호석박사에게 했다.
그렇다! 우리나라의 지방에서 연구해야할 일은 대단히 많다. 자기 지방의 역사와 문화를 줏대 있게 담고 앞으로 후대에 연결시켜줄 학문연구를 수행하는 기관으로 이런 국학진흥원과 같은 기구가 각도에 하나씩 만들어져야할 것이다. 이런 뜻을 실현하기에 여러분은 다함께 힘을 합칩시다! 그래서 나는 강연에서 올사모가 역사정신과 역사의식을 실천하는 단체임을 천명했던 것이다. 몇분이나 올사모에 가입을 할 것인지 앞으로 눈여겨 보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