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거대한 공업 단지로 변해 버린 거제도의 장승포와 옥포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곳에 몸을 누이고 있었던 순교복자 윤봉문(尹鳳文, 1852-1888년) 요셉은 초기 한국 교회의 박해가 얼마나 극심하고 광범위하게 일어났었는지를 후손들에게 잘 보여주고 있다.
옥포의 역사 안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겨레의 성웅 이순신 장군의 발자취와 연결된다. 1592년 임진왜란 때 경상 우수사 원균이 그해 4월 왜군과의 교전에서 패전해 73척의 배와 군사를 거의 다 잃고 노량으로 도망을 간 후에 전라 좌수사 이순신이 그 해 5월 7일, 50여 척의 왜선을 포위 공격하여 그 가운데 21척을 불태워 임진왜란 후 처음으로 큰 승리를 거둔 유명한 옥포 해전의 현장이 바로 여기이다.
이곳에 복음이 전래된 시기가 언제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다만 1801년 신유박해의 영향으로 두 명의 신자가 거제도로 귀양 왔다는 사실만이 기록으로 남아 있을 뿐이다. 그 하나는 ‘백서’(帛書)로 유명한 황사영 알렉시오의 모친 이윤혜이다. 기록에 의하면 황사영의 처 정난주(본명 정명련) 마리아는 제주도로, 젖먹이 아들 경한은 추자도로 그리고 모친은 거제도로 귀양을 떠났다. 하지만 이윤혜의 행적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또 한 사람은 1801년 전주 감영에서 순교한 유항검 아우구스티노의 막내아들 유일석이다. 유항검의 부인 신희와 큰아들 유중철 요한, 며느리 이순이 루갈다, 차남 유문석 요한은 순교했고 딸은 흑산도로, 셋째아들 일문은 신지도로, 당시 세 살이던 막내 일석은 거제도로 귀양 갔다고 한다.
신유박해로 맺어진 거제도와 천주교의 인연은 병인박해를 지나면서 선교로 이어졌다. 복음의 씨앗이 처음 거제도에 떨어진 것은 병인박해 직전으로 리델(Ridel, 李福明) 신부와 복사였던 순교복자 구한선(具漢善, 1844-1866년) 타대오가 거제도 전교를 위해 다녀간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 후 병인박해 중인 1868년경 경상북도 영일군 기계면 지촌리가 고향인 윤사우(尹仕佑) 스타니슬라오가 거제도로 들어왔다. 그는 할머니의 입교로 가족 모두와 함께 세례를 받았다. 윤사우의 가족은 양산 대청(현 부산시 기장면)에 숨어살다가 병인박해가 일어나자 신앙생활이 비교적 자유로운 대마도로 피신할 목적으로 거제도에 정착하게 되었다고 한다. 거제도에서 버드내[柳洞內, 현재 柳湖里], 박개[外浦], 덕개[德浦] 등을 거쳐 진목정(榛木亭, 현 거제시 옥포 2동 국산)에 정착한 후 활발한 전교 활동을 펼쳤다.
윤사우는 날품팔이와 필묵 행상을 하며 몰래 신앙생활을 하던 중 옥포에서 동수(洞首)로 있던 진진부(陣進富)를 알게 되어 열심히 권면하여 입교시켰다. 신자가 된 진진부 요한은 윤사우의 둘째 아들인 윤봉문 요셉을 사위로 맞아 자신의 집에 머물게 했다. 윤봉문과 부인 진순악(陳順岳) 아녜스 사이에서 아들 학송(學松) 루카와 딸 송악(松岳) 가타리나가 태어났다.
1852년 경주 인근에서 윤사우와 막달레나의 둘째 아들로 태어난 윤봉문 요셉은 나중에 부친이 함안 지역으로 가서 정착했지만 형 윤경문 베드로와 함께 거제도에 계속 남았다. 그는 ‘거제의 사도’로서 형과 함께 신자들을 모아 교리를 가르치고 전교에 힘쓰는 한편 자신의 수계(守戒)에도 열심이었다. 1887년 겨울 병인박해 후 처음으로 당시 대구 본당 초대주임이었던 로베르(Robert, 金保綠) 신부가 판공성사를 주기 위해 거제도를 방문했을 때 윤봉문은 로베르 신부를 안내하고 교리교육과 공소예절을 도왔다. 로베르 신부는 그를 회장으로 임명했다. 그해 거제도에서는 윤씨 형제가 가르친 15명의 어른이 세례를 받고 입교했다.
그런데 로베르 신부가 거제도를 떠난 지 몇 달 되지 않은 이듬해 봄 거제도에서 박해가 일어났다. 당시는 한불수호조약으로 인해 공적인 박해가 끝났지만 지방 일부에서는 사사로운 탄압이 이어지고 있었다. 이 박해는 통영 포졸들이 천주교 신자를 체포하여 개인적인 탐욕을 채우려고 일으킨 것이었다. 이때 윤봉문은 다른 교우 2명과 함께 체포되었는데, 그 혼자만 통영으로 압송되어 문초와 형벌을 받았다. 하지만 대담하게 신앙을 고백하고 비열하게 자유를 얻느니 감옥이 더 낫다며 배교를 거부했다. 그는 몸값으로 100냥을 내라는 요구를 거절했음에도 다행히 풀려날 수 있었다.
그 후 이웃에 살던 잔반(殘班) 하나가 돈을 갈취하려고 그를 잡아 돈을 요구했지만 이를 거부하고 포졸들에 의해 읍의 진영으로 이송되었다. 80냥을 주면 풀어주고 새 신자들이 평온히 살도록 해주겠다는 말로 유혹해 할 수 없이 돈을 주고 풀려났다. 그러나 얼마 후 부사의 체포령을 갖고 포졸들이 다시 왔고, 이에 형 경문이 관아로 끌려가 곤장을 맞고 이틀 후 읍 밖으로 쫓겨났다.
그러자 처음에 윤봉문을 체포하고도 돈을 빼앗지 못한 통영 관리가 영장을 찾아가 윤씨 형제에 대한 체포령을 받아냈다. 결국 윤봉문은 다른 두 명의 신자와 외교인 몇 명과 함께 체포되었고, 가옥은 약탈당하고 소 22마리도 빼앗겼다. 영장 앞에 끌려간 그는 천주교인임을 고백하며 외교인은 풀어주도록 요청했다. 수차례 고문을 받으면서도 끝내 배교하지 않자 영장은 대구 관찰사로부터 “천주교인은 모두 도둑들이니 진주로 보내어 처형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진주로 끌려가는 동안 굵은 칡으로 발뒤꿈치를 꿰어 살이 뭉개지는 고통을 받았지만, 오히려 그는 큰 소리로 천주십계와 성교사규(聖敎四規)를 외웠다. 결국 1888년 4월 1일(음력 2월 20일) 진주 감옥에서 교수형으로 순교했다. 이때 그의 나이는 37세였다.
순교자의 시신은 진주 비라실[長在里] 공소회장이 거두어 공소 뒷산에 안장했다. 이 소식을 들은 로베르 신부는 교구장에게 이렇게 보고하였습니다. “저는 운 좋게도 이 거룩한 순교자를 친밀하게 알았습니다. 그러므로 그가 열심한 교우였으며, 비신자들의 회개를 위한 열성이 가득하였다는 것을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습니다. 저는 벌써 그에게 눈길을 주어 여러 섬에 신앙을 전파하는 일에서 저를 돕게 하려고 했었습니다. 하느님께서 그를 제게서 빼앗아 가셨지만, 그것은 당신의 충실한 벗들에게만 주시는 영광을 그에게 주시려 하신 것입니다.”
1898년 옥포 교우이며 부산 본당 우도(Oudot, 吳保綠) 신부의 복사로 있던 성낙진 바오로는 유족들과 함께 순교자의 유해를 거제도로 모셔와 진목정 족박골(足泊谷)의 선산에 안장했다. 그 후 진목정의 외교인들은 천주학쟁이가 죽은 동네 이름이라 해서 ‘진목정’을 ‘국산’(菊山)으로 고쳤고, 후에는 지금의 옥포(玉浦)로 다시 변경되었다.
거제도의 신자들은 1978년 9월 24일 거제의 사도 윤봉문 요셉 순교 90주년을 맞이하여 순교자의 무덤에 순교 기념비를 세웠다. 이렇듯 그는 자신의 피와 땀으로 거제도에 믿음의 씨앗을 뿌렸고 오늘의 신앙인들이 그 열매를 거두게 되었다. 거제ㆍ통영 지역의 본당들은 윤봉문 순교자에 대한 현양 사업과 함께 묘지 성역화 사업을 추진하였다.
그런데 윤봉문 순교자의 유해가 모셔진 곳이 접근성이 떨어지는 협소한 산중인 관계로 순례자들이 찾기 어렵고, 후손들의 선산이 다른 사람의 소유로 넘어가 묘소를 이장할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이에 마산교구 거제도의 성당들은 2000년 9월 순교자의 묘소를 이장하기 위한 추진위원회를 구성하고 이장을 위한 준비를 시작했다. 여러 후보지를 검토하고 또 여러 이유로 유보되는 과정을 반복하다가 일운면 지세포리가 선정되었다. 이 부지는 본래 서울대교구가 신협 연수원으로 사용하던 곳으로 마산교구에 기증한 곳이었다.
마산교구는 순교자 유해 이장에 관한 거제지구 사제단과 신자들의 청원을 받아들여 교구장 교령과 훈령을 발표하고 2013년 4월 20일 순교자 유해를 옥포에서 지세포리로 이장하였다. 이장을 위한 발굴 작업을 통해 온전히 보존된 순교자의 유골을 확인하고, 의학전문가로부터 오른쪽 골반에 장독(杖毒)에 의한 골절로 추정되는 상처가 있음을 확인하였다.
앞으로 마산교구는 지세포리의 순교자 윤봉문 요셉 성지에 순교자 기념성당과 교육관, 사제관과 수녀원, 피정의 집과 식당 등을 건립하여 누구나 쉽게 찾아와 순교자의 영성을 본받을 수 있는 곳으로 개발해 나갈 계획이다. 윤봉문 요셉은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시복되었다. [출처 : 주평국, 하늘에서 땅 끝까지 - 향내나는 그분들의 발자국을 따라서, 가톨릭출판사, 1996, 내용 일부 수정 및 추가(최종수정 2016년 1월 2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