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종은 풍열(風熱)로 인한 부기와 간지럼증 증상을 앓았다. 고종 26년 4월 3일의 ‘왕조실록’ 기록을 보면 판중추부사 김병시가 아뢰기를 “신이 지금 전하를 뵈니 귀에 약을 붙인 데가 있는데, 혹시 풍열의 징후가 있어 그런 것이 아닙니까?”하니, 하교하기를 “며칠 전에는 과연 괴로웠으나 지금은 나아간다”라고 말하는 부분이 나온다. 비록 고종이 다 나아간다고 얘기했으나, 신하들은 귀가 편안치 않다는 고종의 말을 들으니 걱정을 금할 수 없다면서 치료를 받기를 권한다. 특히 판중추부사 김홍집이 아뢰기를 “귀의 테두리에 아직 붉은 윤기가 있습니다”라고 해 귀에 풍열 증상이 아직 남아 있음을 알 수 있다.
고종 31년에는 11월 29일부터 12월 7일까지 얼굴과 눈, 그리고 몸에 나타나는 풍열 증상에 대해 더욱 자세히 언급하고 있다. 먼저 11월 29일에는 고종 스스로 “얼굴의 증상은 점점 나아가지만 두 눈과 몸의 풍열증으로 여전히 괴롭고 매우 가렵다”고 호소하는 구절이 나온다. 이어 30일에는 “얼굴이 붓고 붉어지던 기운은 빨리 나아가지만 두 눈의 풍열증과 온몸이 가려운 고통은 어제와 마찬가지인 데다 체증(滯症)도 겸해 나타났다”고 말해 체증까지 합병해서 나타남을 호소했다.
12월 1일에는 어의들이 “여러 가지 증상이 계속 번갈아 괴롭히는 것은 원기(元氣)가 빠져서 약해지고 체증으로 허한 틈을 타서 나타나는 것입니다”라고 하니, “밤새 온몸이 가려웠고 눈의 풍열증도 아직 차도가 없다”고 말했다. 고종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어의 진료까지는 굳이 할 필요가 없다면서 진료를 거부했다. 하지만 드디어 12월 2일에 약원도제거(藥院都提擧) 의화군 이강이 “입진(入診)한 의관의 말을 듣건대 맥박은 비록 차도를 보이고 있지만 풍열증이 아직 심하고 그에 따른 가려움증도 빨리 낫지 않고 있다고 합니다. 탕약은 가미소풍산(加味消風散)으로 의논해 정하고 한 첩을 이제 달여서 들이겠으며, 겉에 바를 것으로는 파초즙에 우황을 섞어서 지어 들이겠습니다”라고 말하면서 강제로 치료를 받게 했다. 고종이 필요 없다고 계속 말했지만, 정작 치료를 받으니 좋았던가 보다. 고종은 5일에 “풍열증은 더하였다 덜하였다 하는 것이 일정하지 않고 오늘 저녁 이후로는 얼굴이 또 가려운데 이것이 괴롭다. 가미소풍산을 이전 처방대로 한 첩 지어 들여 오라”고 명을 내린다.
12월 7일에는 마침내 “얼굴의 풍열증과 몸의 가려운 증상이 끝내 시원하게 낫지 않으니, 탕약은 이전 처방대로 하되 승마(升麻)와 갈근(葛根·칡)을 각각 한 돈쭝씩 더 넣어서 지어 들이라”는 명령을 내린다. 그렇게 어의 진단을 받지 않겠다고 고집을 부리던 고종은 한약 한 첩으로 효과를 보자, 이어 계속 복용할 뿐만 아니라 직접 처방의 가감까지 지시를 내린 것이다.
얼굴의 풍열증과 몸의 가려움증을 치료하기 위해 승마와 갈근을 처방에 추가로 넣는 것은 참으로 오묘한 이치가 있다. 승마는 약의 기운을 위로 끌어올려 얼굴로 가게 해주며, 갈근은 엉켜 있는 습열의 기운을 편안하게 풀어 주는 작용을 하기 때문이다.
피부질환은 임상적으로 크게 둘로 나눌 수 있다. 외부에서 나쁜 세균이나 곰팡이가 침입한 감염성 질환이 있고, 인체 내부의 음양기혈 조화가 깨져서 내부로부터 피부로 밀려 나오는 경우가 있다. 외부 감염성 피부질환은 서양의학적인 방법론으로도 치료가 잘되지만, 내부 균형이 깨졌을 경우에는 항생제 소염제 치료가 잘 듣지 않는다. 이럴 때는 오히려 한의원으로 바로 오는 것이 치료가 더 잘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