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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광주대교구 꾸르실리스따 원문보기 글쓴이: 이선정스테파노
2024년 6월 23일 주일
[(녹) 연중 제12주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말씀의 초대
욥기의 마지막 부분에서 주님께서는 욥에게 당신 자신을 드러내신다. 욥은 자신의 한계를 깊이 체험한 뒤에 비로소 주님을 만난다(제1독서). 바오로 사도는 믿음 안에서 사는 삶에 대하여 말한다. 주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돌아가시고 부활하셨음을 믿는 이들은 새로운 피조물이 된다(제2독서). 기적의 의미는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고백하도록 이끄는 데 있다. 믿음이 있다면 거친 풍랑 속에서도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다(복음)
제1독서
<너의 도도한 파도는 여기에서 멈추어야 한다.>
▥ 욥기의 말씀입니다. 38,1.8-11
1 주님께서 욥에게 폭풍 속에서 말씀하셨다.
8 “누가 문을 닫아 바다를 가두었느냐?
그것이 모태에서 솟구쳐 나올 때,
9 내가 구름을 그 옷으로, 먹구름을 그 포대기로 삼을 때,
10 내가 그 위에다 경계를 긋고 빗장과 대문을 세우며
11 ‘여기까지는 와도 되지만 그 이상은 안 된다.
너의 도도한 파도는 여기에서 멈추어야 한다.’ 할 때에 말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제2독서
<보십시오, 새것이 되었습니다.>
▥ 사도 바오로의 코린토 2서 말씀입니다. 5,14-17
형제 여러분, 14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다그칩니다.
한 분께서 모든 사람을 위하여 돌아가셨고
그리하여 결국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고 우리가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15 그분께서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돌아가셨습니다.
살아 있는 이들이 이제는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자기들을 위하여 돌아가셨다가 되살아나신 분을 위하여
살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16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부터 아무도 속된 기준으로 이해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속된 기준으로 이해하였을지라도
이제는 더 이상 그렇게 이해하지 않습니다.
17 그래서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옛것은 지나갔습니다. 보십시오, 새것이 되었습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 음
<도대체 이분이 누구시기에 바람과 호수까지 복종하는가?>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4,35-41
35 그날 저녁이 되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호수 저쪽으로 건너가자.” 하고 말씀하셨다.
36 그래서 그들이 군중을 남겨 둔 채,
배에 타고 계신 예수님을 그대로 모시고 갔는데, 다른 배들도 그분을 뒤따랐다.
37 그때에 거센 돌풍이 일어 물결이 배 안으로 들이쳐서,
물이 배에 거의 가득 차게 되었다.
38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시고 계셨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깨우며,
“스승님, 저희가 죽게 되었는데도 걱정되지 않으십니까?” 하고 말하였다.
39 그러자 예수님께서 깨어나시어 바람을 꾸짖으시고 호수더러,
“잠잠해져라. 조용히 하여라!” 하시니 바람이 멎고 아주 고요해졌다.
40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왜 겁을 내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 하고 말씀하셨다.
41 그들은 큰 두려움에 사로잡혀 서로 말하였다.
“도대체 이분이 누구시기에 바람과 호수까지 복종하는가?”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오늘의 묵상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하느님의 뜻을 찾는 데에는 언제나 불확실함이 있으며, 만일 너무나 확실하게 말하는 사람들은 하느님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위해서 하느님을 이용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매사에 하느님을 찾고 발견하려는 일에는 여전히 불확실성의 영역이 남아 있습니다.
그분은 거기에 계셔야 합니다. 누군가가 하느님을 확실히 만났다고 말하면서도 불확실성의 그림자가 드리우지 않는다면, 뭔가 잘못된 것입니다. …… 어떤 사람이 모든 질문에 답을 가지고 있다면, 그건 하느님께서 그와 함께 계시지 않는다는 표지입니다”(『나의 문은 항상 열려 있습니다』-안토니오 스파다로와의 대담).
인간은 하느님의 신비를 완전히 알 수 없기에, 너무 쉽게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그분의 뜻을 알고자 노력할 뿐이고, 그 노력으로 숨겨진 의미를 아주 조금씩 깨달을 수 있을 뿐입니다. 세상의 모순과 고통, 예기하지 못한 사고, 소중한 이와 헤어짐 등 어떻게 이 모든 것을 분명하게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그럴듯한 이유를 붙일 수야 있겠지만, 사실 그것이 하느님의 뜻인지 자신의 생각인지 확신할 수 없습니다. 유한한 인간은 믿음을 가지고 겸손하게 그분의 뜻을 찾는 여정을 걸어갈 뿐입니다.
제1독서의 욥은 하느님의 뜻을 찾아 모험에 나섰습니다. 그의 눈으로는 무고한 의인의 고통, 아무 이유를 찾을 수 없는 불행을 설명할 수 없습니다. 그는 그저 하느님을 만나 자신의 고통을 토로하고, 이 고통의 이유와 의미를 묻고자 합니다. 이에 대하여 결국 하느님께서 응답하십니다. 하느님의 답변은 인간의 기준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그분의 크심입니다.
세상을 창조하시고 다스리시는 그분의 크심은 우리가 온전히 이해할 수 없는 신비입니다. 고통에 대한 하느님의 뜻을 인간 사고의 틀 안에 가두기보다, 인간의 이해를 넘어서는 그분의 크심을 인정하고, 불확실성 안에서 확실한 믿음을 가지고 담대하게 나아가는 것이 우리 신앙인의 올바른 태도일 것입니다. 그럴 때 알 수 없는 고통의 신비를 아주 조금이나마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최정훈 바오로 신부)
그리스도와 동행하면 벌어지는 일
전삼용 요셉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가장 중요한 말씀은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겠지만, “호수 저쪽으로 건너가자.”입니다. 이건 예수님의 말씀이고 명령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평생 호수 저쪽으로 건너가는 일을 해 왔습니다. 너무 쉽게 본 것입니다. 그러나 막상 거센 폭풍이 닥치자 겁을 먹습니다. 그제야 겸손해져서 “스승님, 저희가 죽게 되었는데도 걱정되지 않으십니까?”라고 청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람과 파도를 가라앉히시고 “왜 겁을 내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라고 하십니다. 다시 말해 “내가 가자고 했지, 너희가 가려고 한 것이니?”라고 물으시는 것입니다. 내 일인데 왜 너희 일처럼 걱정하고 두려워하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호수 저쪽으로 가자고 하신 말씀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동행하면 이러한 일을 계속 겪습니다. 주님은 이러한 일을 통해 우리를 새로 태어나게 하시기를 바라십니다. 오늘 독서에서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옛것은 지나갔습니다. 보십시오, 새것이 되었습니다.”(2코린 5,17)라고 하는 말씀과 같습니다.
저도 『하.사.시.』를 읽고 사제가 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호수 저쪽으로 건너가자.”라는 말을 들은 것입니다. 그런데 저의 상황은 제자들과 같았습니다. 나의 일이 되지 않았을 때는 사제가 되는 것을 너무 쉽게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저는 사제가 되기 전에는 어떤 사제도 존경하지 않았습니다. 내가 하면 더 잘 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막상 내가 되려다 보니 걱정과 두려움이 일었습니다. 풍랑을 만나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서 ‘아, 내 힘으로는 안 되는 거였구나!’를 알게 됩니다.
그래서 내 안의 주님을 깨웁니다. 그러자 주님께서 도와주십니다. 결혼하고 싶은 마음에 대해서는 매일매일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알려주셨습니다. 그리고 성체를 통해서는 내가 하느님의 모든 것을 받았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결국 사제가 되어 느끼는 것은 내가 사제가 되는 과정에서 주님께서 일하셨다는 것입니다. 그 이전에는 내가 할 수 있다고 믿었지만, 주님의 뜻을 따를 때는 주님께서 “내 일인데 네가 왜 걱정하니? 그렇게도 믿음이 없니?”라고 말씀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일이 한 번만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계속 일어납니다. 한 번에 새로운 사람이 되는 일은 없습니다. 유학하러 갈 때도 그랬고 교구청이나 본당에 올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께서 시키는 일은 그 이전에는 쉽게 보이지만, 막상 하려면 어렵습니다. 이런 과정이 자주 반복될수록 이젠 갈등하는 시간이 줄어듭니다. 그만큼 조금씩 겸손해지고 주님께 모든 것을 맡기게 됩니다. 점점 예수님의 “너희는 나 없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라는 말씀이 이해되기 시작합니다.
주님을 만나고 체험하고 싶거든 이 원리를 역이용하면 됩니다. 먼저 나에게 주님께서 원하시는 일이 무엇인지 찾고 그 길을 선택해서 갑니다. 그러며 주님께서 맡겨주셨으니 책임을 지라는 식으로 기도합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나서주십니다. 이때 내 안에 그저 주무시는 주님이 아닌 능력자로서의 주님을 만나게 됩니다.
로라 윌킨슨의 경우가 그렇습니다. 올림픽 다이빙 10m 플랫폼 여자부에서 미국에 36년 만에 금메달을 안겨준 주인공입니다. 그녀는 올림픽 출전 3개월 전에 오른쪽 발뼈 부상으로 7주간 병원에 누워있어야만 했습니다. 코치는 올림픽 출전 불가를 선언했지만, 그녀는 시드니 올림픽에 출전하였습니다. 중국이 16년 동안 강세가 이어지는 여자 다이빙 종목이었습니다. 총 5차전에서 2차까지 5위였습니다. 선두와 60점 이상 차이가 났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미소를 잃지 않았습니다. 3차전에 최고 점수를 얻어 순식간에 선두와 격차를 줄인 대반전이 일어났습니다.
드디어 카메라는 그녀에게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다이빙대에서 서서 도약 직전까지 계속 무언가 중얼거렸습니다. 그녀가 중얼거린 것은 “나에게 힘을 주시는 분 안에서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필리4,13)”였습니다. 금메달이 확정된 순간 대역전의 비결을 묻는 취재진의 질문에 그녀는 울먹이며 “저에게 능력 주시는 분이 이 일을 하셨습니다.”라고 했습니다.
『하.사.시.』 7권 228장에서 예수님은 “착한 소원은 하느님께서 일으켜 주시는 것이다. 하느님께서 그런 소원들을 일으키시는 것은 그 소원들이 실현되기를 원하신다는 표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우리에게 “호수 저쪽으로 건너가자.”라고 하시며 당신을 드러내려 하십니다. 도전하지 않는 자에게 참 주님의 모습을 볼 수 있는 기회는 주어지지 않습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이 또한 지나가리라.’는 말이 있습니다. 5월에는 많은 행사가 있었습니다. ‘성모의 밤, 첫 영성체, 청소년 음악회, 구역미사, 성령강림 찬양의 밤, 사제 서품식, 중남부 남성 제17차 꾸르실료, 견진성사, 주일학교 여름 캠프, 포트워스 성당 주일미사’가 있었습니다. 포트워스 성당 신부님이 비자 연장을 위해 1달 동안 한국으로 가셨고, 포트워스 성당 미사를 도와 드려야 했습니다. 행사가 겹친 날도 있었습니다. 첫 영성체와 청소년 음악회가 같은 날 있었고, 꾸르실료와 견진성사도 같은 날 있었습니다. 어찌 지나갔는지 모를 정도로 바쁘게 지나갔습니다. 여러 행사 중에 특히 기억에 남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는 사제서품식입니다. 한국의 사제서품식이 질서정연하다면 미국의 사제서품식은 자연스러웠습니다. 서품식 중에 교구의 모든 사제들이 새 사제들과 친교의 포옹을 하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선배 사제들은 축하의 인사를 건네며 포옹하였고, 새 사제들은 활짝 웃으며 인사하였습니다. 다른 하나는 성령강림 찬양의 밤입니다. 짧은 시간에 음악 봉사자들이 연주와 노래를 준비하였고, 성령께서 함께하시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밭에 묻혀 있는 보물을 찾는 것과 같다고 하셨는데, 본당에는 재능을 가진 분들이 있었습니다. ‘라우다떼’ 찬양 팀이 음악피정도 준비하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오늘 복음은 ‘풍랑을 잠재우는 예수님’의 이야기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과 함께 호수를 건널 때입니다. 심한 풍랑에 배가 몹시 흔들렸습니다. 제자들은 그러다가 배가 뒤집어 질지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누워서 편안하게 주무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깨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풍랑을 잠 재우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왜 겁을 내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 저는 풍랑을 잠재우시는 예수님의 이야기를 들으면 예전의 기억이 떠오릅니다. 1998년 26년 전의 일입니다. 동생 수녀님이 백령도 성당에 있었고, 백령도 성당의 신부님이 동창이었습니다. 저는 동생 수녀님도 보고 동창 신부님도 보기 위해 연안부두에서 백령도 가는 배를 탔습니다. ‘임당수’라고 중간 쯤 갔을 때입니다. 선장의 안내 방송이 있었습니다. 풍랑이 심해졌는데 돌아가는 것보다는 그냥 백령도로 가겠다고 했습니다. 풍랑이 거세지면서 사람들은 배 멀미를 시작했습니다. 건장한 해병들도 멀미하였고, 저도 태어나서 처음으로 심한 멀미를 했습니다. 화장실을 왔다 갔다 하면서 고생하고 있을 때입니다. 백령도 주민들은 대부분 별 이상 없이 멀쩡하였습니다. 풍랑이 거세지면서 백령도 주민들은 바닥에 누웠습니다. 저도 따라서 바닥에 누워보니 신기하게도 속이 편해졌습니다. ‘불난 곳에 부채질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에도 욕심, 시기, 질투, 미움, 욕망의 풍랑이 불곤 합니다. 그럴 때면 모든 것을 내려놓고 예수님처럼 누워보는 것도 좋습니다. 그러면 풍랑이 사라지고, 평온한 마음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침묵 속에 하느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오늘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옛것은 지나갔습니다. 보십시오, 새것이 되었습니다.” 2024년 5월은 지나갔습니다. 일정표의 31칸이 거의 채워졌습니다. 31칸을 그리스도와 함께 했다면 하느님의 나라에 그 날들이 업그레이드 될 것입니다. 31칸을 나의 욕심과 나의 뜻으로 채웠다면 옛것으로 지나가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옛것은 시간이 기준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새것 또한 시간이 기준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시간은 언제나 새것입니다. 나의 욕망과 욕심을 채우는 시간은 언제나 옛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선한 사람에게나, 악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비를 내리시고, 똑같이 햇빛을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30칸이 비워있는 6월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신학교에서 사제에게 필요한 덕목이 3가지 있다고 하였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하기 위해서는 시대의 표징을 읽고, 식별할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건강한 몸에 건강한 정신이 함께한다는 말처럼 규칙적인 식사와 꾸준한 운동이 필요합니다. 세상의 것이 아닌 하느님의 의로움과 하느님의 뜻을 찾는 기도가 필요합니다. 기도하는 사제, 공부하는 사제, 건강한 사제는 30칸의 날에 늘 새것을 채울 것입니다. 2024년도 어느덧 절반이 지나갑니다. 지난날들에 옛것을 채웠다면 남은 날들은 그리스도와 함께 새것을 채우면 좋겠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다그칩니다. 한 분께서 모든 사람을 위하여 돌아가셨고 그리하여 결국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고 우리가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옛것은 지나갔습니다. 보십시오, 새것이 되었습니다.”
<길벗이 있으니>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왜 겁을 내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마르 4,40)
길을
걷다가
가파른
험한 길
와락
덮쳐올 때
이내
주눅 들어
가쁜 숨
뱉기에 앞서
바로 옆을
둘러보는 거야
잠시
잊고 있던
길벗이 늘
거기 있어
길게
숨 고르고
함께
또 한걸음
늘 그렇게
주저하지 않고
내딛을 수
있을 테니까
오늘의 성인
성 요셉 카파소(Joseph Cafasso)
신분 : 신부
활동지역 :
활동연 도: 1811-1860년
성 요셉 카파쏘가 살레시오회 의 성인이라고 하는 것은, 그가 성 요한 보스코와 절친한 친구이자 영적 지도자였기 때문인 듯 하다. 그러나 그는 교구사제였다.
까스뗄누오보 다스띠 태생인 그는 농사를 짓는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나, 케이리 학교를 다녔다. 그는 1833년에 연령 미달에 대한 관면을 받고 사제로 서품되었다.
사제 서품 후, 그는 토리노에서 신학 공부를 계속하였으나, 항상 미흡하다고 생각하던 중에, 성 프란치스꼬 성당에 소속된 학교에서 영적인 고향을 발견하였다.
이탈리아 피에몬테(Piemonte) 카스텔누오보 다스티(Castelnuovo d'Asti) 태생인 그는 농사를 짓는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나 토리노(Torino) 신학교를 다녔다.
그는 성 필리푸스 네리우스(Philippus Nerius), 성 프란치스코 드 살(Francis de Sales) 그리고 성 요한 보스코와 떼어놓을 수 없을 정도로 가까워졌고 서로 영향을 끼쳤다.
그들 중에서 요셉은 가장 탁월한 설교자였다.
또한 그의 설교는 북이탈리아에 퍼지기 시작하던 얀세니즘(Jansenism)을 퇴치토록 하였다.
또 그는 돈 보스코를 설득하여 소년들의 신앙교육에 헌신토록 한 사람이기도 하다.
1860년 봄 그는 자신의 죽음을 예고하고 그해 6월 23일 토리노에서 운명하였다.
그의 장례식에서 요한 보스코 성인이 강론하며 그의 성덕을 추모하였다.
그는 1947년 교황 비오 12세(Pius XII)에 의해 시성되었다.
성 토마스 가넷(Thomas Garnet)
신분 : 신부, 순교자
활동지역 : 영국(UK)
활동연도: 1575?-1608년
같은이름 : 가네트, 도마, 토머스
1575년경 영국의 서더크(Southwark)에서 태어난 성 토마스 가넷은 유명한 예수회원인 헨리 가넷(Henry Garnet) 신부의 조카로서 16세 때에 프랑스의 생토메르(Saint Omer) 대학에 들어갔다. 1595년 그는 몇몇 학생들과 더불어 에스파냐로 건너가서 바야돌리드(Valladolid)의 영국계 예수회 대학에 들어가는데 성공하였다. 그는 여기서 신학공부를 마치고 사제가 된 후 마르코 바크워스(Mark Barkworth)와 더불어 영국 선교 길에 올랐다. 그의 영국 선교는 다음의 몇 마디로 요약 될 수 있다. “나는 오류를 벗어나 가톨릭 교회 지식을 배우려는 영혼들을 찾아서 이리저리 방황하기만 하였다.”
그는 워릭(Warwick)에서 체포되어 9개월 후에 플랑드르(Flandre)로 추방되었으나 재차 입국하였다. 이때 그는 예수회원이 되고자 벨기에 루뱅(Louvain)으로 가서 서원한 뒤 또 재입국하였으나, 어느 배교자의 제보에 따라 체포되어 1608년 6월 23일 런던의 타이번(Tyburn)에서 장렬하게 순교하였다. 그는 1929년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70년 10월 25일 교황 바오로 6세(Paulus VI)에 의해 잉글랜드와 웨일스(Wales)의 40명의 순교자 중 한 명으로 시성되었다. 그래서 10월 25일에 함께 축일을 기념하기도 한다.
성녀 아그리피나(Agrippina)
신분 : 동정 순교자
활동지역 : 로마(Roma)
활동연도 : +262년?
같은이름 : 아그리삐나, 아그립삐나, 아그립피나
시칠리아(Sicilia)에서 동정 순교자로 큰 공경을 받고 있는 성녀 아그리피나는 상류층의 딸로서 발레리아누스 황제의 그리스도교 박해 때에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바사, 바울라 그리고 아가토니카 등 3명의 여인이 그녀의 유해를 시칠리아의 미네오로 옮겼는데, 그리스인들은 그녀의 유해를 시칠리아에서 콘스탄티노플로 이장했다고 주장한다. 성녀 아그리피나는 악령을 쫓는 수호성인이며, 나환자와 폭풍우의 수호성인으로 공경을 받고 있다.
성녀 에텔드레다(Etheldreda)
신분 : 왕비, 수녀원장
활동지역 : 엘리(Ely)
활동연도 : +679년
같은이름: 에딜트루데, 에딜트루디스, 에뗄드레다, 오드리
그녀는 이스트 앵글의 국왕 안나의 딸로서, 잉글랜드 슈포트의 엑스닝에서 태어났으며, 어린 나이로 그리비이의 왕자 콘버트에게 시집갔으나, 이 결혼은 남편이 불과 3년만에 죽었을 뿐만 아니라, 너무 어렸으므로 동정을 잃지 않았다고 한다.
남편이 죽은 후, 그녀는 엘리 섬에서 5년을 살다가, 노스움브리아의 오스위 왕의 아들인 에그프리드와 결혼하였다.
결혼생활 12년 후에, 남편이 그녀에게 남편의 권리를 요구하였을 때, 그녀는 자신을 이미 하느님께 봉헌한 지 오래되었다는 이유로 거부하였다고 한다.
그 후 남편의 동의를 얻어서 그녀는 엘리 섬에 돌아갔으며, 672년경에 수도원을 세운 뒤 원장으로 지내면서 일생을 봉헌된 생활로 살았다고 한다.
자기 절제
성녀 오드리로 더 잘 알려진 에텔드레다는 결혼을 두 번이나 하고도 동정을 간직했다.
3년 간 계속된 첫 번째 결혼에서는 남편과 친남매처럼 살았고 두 번째 결혼은 가족의 강요에 의해 북움브리아국의 어린 왕 에그프리드와 하였다.
12년이 지난 후 에그프리드는 좀더 많은 것을 원했으나 에텔드레다는 수녀가 되기를 원하였다.
결국 두 사람 모두 원하는 대로 하도록 허락을 받아서 에텔드레다는 수녀가 되었고 에그프리드는 다른 여자와 결혼했다.
현대적 관점에서 볼 때 에텔드레다와 두 남편은 정말 특이한 경우가 아닐 수 없다.
우리 교회사에서도 루갈다 동정 부부가 있었던 것처럼 과거에는 자기 절제를 흔히 영적 성장의 한 방법으로 사용하였다.
자기가 일상적으로 누릴 수 있는 즐거움을 고의적으로 배제한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러나 성인들은 진정한 가치가 무엇인지 알기 위해서는 가끔 참아 보는 것도 필요하다고 말한다.
열심히 일했을 때 휴일이 더욱 달콤하게 느껴지는 것처럼. 오늘날에는 절제를 영적 성장이나 공덕의 대상으로 보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사실 자기 절제는 영원히 가치 있는 일임에 틀림없다.
절제하지 않고 자신의 욕망을 끝없이 추구하다 보면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욕망의 노예가 되어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기 때문이다.
오랫동안 기다렸기에 기쁨이 더 컸던 일을 체험한 적은 없는가?
적당한 자기 절제로 스스로를 훈련하겠다
복자 토마스 코르시니(Thomas Corsini)
활동년도 : +1345년
신분 : 수사
지역
같은 이름 : 도마, 코르시니, 토머스
토마스 코르시니는 이탈리아 오르비에토(Orvieto) 사람이며, 훌륭한 교육을 받은 후 환시를 봄으로써 마리아의 종 수도회에 입회하였다. 그 환시는 천주의 성모 마리아께서 당신의 보호 아래 싸우라는 내용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성모의 종 수도회의 평수사가 되었는데 사제직을 권했지만 자신은 자격이 부족하다면서 이를 거부했다. 그는 주로 걸식을 하며 지냈다. 그렇지만 그에게는 초자연적 은혜와 선물이 풍부하여 수많은 기적이 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