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생애와 통치
세조의 둘째 아들인 그는 형 의경세자가 죽사하자 여덟 살에 세자에 책봉되었다. 11년 후인 1468년 9월 세조로부터 왕위를 이어받아 19세에 수강궁에서 즉위하였다. 그러나 그는 아직 미성년이었고, 건강도 이상이 있어 즉위 후 어머니의 섭정과 재상들의 간섭을 받는 형식적인 왕이었다. 어머니 정희왕후의 수렴청정에 의한 명령은 대부분 한명회등 원상의 뜻을 그녀의 입으로 빌린 것이었으니 그가 한 일이라고는 세조가 어설프게 후계자인 자신을 위해 추천한 젊은 일꾼들을 죽이고 원로대신들이 다시 득세하데 만든 일 뿐이다. 1468년의 남이 역모사건은 신흥세력이 일어나는 것을 용납하지 않은 한명회, 신숙주등 원상들이 뒤에서 후원한 대비를 조종한 결과였다 이 사건으로 그들은 큰 권력을 죽을 때 까지 누릴 수 있었다.
실록에 보이는 예종시대의 중요 기록으로는 삼포에서 왜와의 개별무역을 금지하고 중앙에서 지시한 규정된 량과 종류로만 한정한 것과 각도에 있는 둔전을 일반 농민이 경작할 수 있도록 허락한 일이다. 세조 초기부터 서두른 경국대전이 완성되었으나 반포하지도 못하고 죽었다. 예종의 능(창릉)은 현재 고양 서오능 묘역 안에 있다. 세자시절 권신 한명회의 딸(장순왕후로 추존) 혼인하여 아들을 낳았으나 함께 일찍 죽었다. 이후 형수인 인수대비의 6촌 동생인 안순왕후와 사이에서 남매를 낳았으나 그 자손은 없다.
* 예종의 가계도
장순왕후 한씨,
장남 인성대군(분) - 일찍 죽음
안순왕후 한씨
차남 제안대군(견) - 오래 살았으나 자식 없음
적 장녀 현숙공주 (임광재)- 자식 없음
2. 남이의 역모 사건
세조는 한명회등 공신들의 세력이 날로 커가자 자신의 후계자는 그들에게 밀려날 수도 있다는 위기를 느끼고 대항 세력으로 집권말기 이시애의 난에 공이 큰 20대의 조카 귀성군(준), 남이, 유자광등 젊은이들을 적개공신으로 포상하고 차세대 지도자로 육성하려 총애한다. 이들이 이시애의 난에서 큰 공을 세우자 벼슬을 더하여 죽기 직전 28세의 이준을 영의정, 26세의 남이를 병조판서로 올려놓기까지 한다. 그러나 세조가 죽자 한명회등 원로 세력은 남이, 강순의 역모사건을 만들어 이들을 제거하는 옥사를 일으킨다. 이 사건으로 약 30명이 죽고 그 가족들은 노비로 전락한다.
사건의 주모자로 알려진 남이는 태종의 넷째 딸 정선공주의 부마 남휘의 아들(공주가 죽은 후 낳음)이며 정란 1등 공신 권람의 사위이다.(남이의 부인 권씨는 한명회가 특별 사면시켜 노비를 면함) 남이는 무과에 급제한 후 이시애의 난을 평정한 공으로 적개공신 1등에 책록 되었으며 이어서 건주야인을 토벌한 전공으로 세조의 총애를 받아 공조판서로 오위도총부 도총관을 겸임하다 26세에 병권의 수장인 병조판서에 올랐다. 그러나 세조가 죽자 이들은 한명회, 신숙주 등의 노골적인 견제를 받기 시작했고 남이가 병조판서를 수행할 능력이 없다고 비판하자 예종은 그를 병조판서에서 해임 좌천시켰다. 무예가 뛰어나고 성격이강한 야심가 남이를 병약한 예종은 평소 두려워하였고 아버지가 그를 총애하자 시기 질투하고 있었다.
남이가 병조판서에서 물러날 때 하늘에 혜성이 나타나자 그는 "혜성이 나타남은 묵은 것을 몰아내고 새로운 것을 받아들일 징조"라고 말했다. 한때 그의 동지였던 유자광은 이 말을 엿듣고 예종에게 남이가 역모를 꾀한다고 고변, 그를 역적으로 몰아버린다. 이미 대세가 구세력에 기울었다고 판단한 유자광은 이시애의 난 때 자신과 비슷한 공을 세운 남이가 세조의 사랑을 더 많이 받는 것을 시기하고 있다가 남이가 병조에서 밀려나자 그를 완전히 제거해버린 것이다. 졸지에 역모자로 전락한 남이는 즉시 의금부로 잡혀가 문초를 받았으나 역모사실과는 관계없이 예종은 그의 제거를 필요로 하고 있었다. 예종과 신숙주등 기성 훈구세력은 남이의 역모를 평정한 공로로 익대공신에 책록된다.
이 사건으로 남이를 비롯 영의정 강순, 조경치, 변영수, 변자의, 문효량, 고복로, 오치권, 등 관련자는 모두 처형됐다. 남이의 역모사건이 완전 조작된 것은 아닌 것 같다. 세조의 총애를 받다 병조판서에서 밀려나자 울분이 컸을 것이다. 그는 큰 역량을 발휘한 일도 없고 오만방자하고 건방진, 별로 바람직한 인물도 아닌데, 젊은 나이로 출세하여 당시 미움 받던 한명회등 수구세력, 연산군 때 많은 사화에 관련된 간신 유자광에 의해 억울한 죽음을 당했다는 루머가 퍼지면서 그를 측은히 여기는 생각이 무속과 결합하여 주술적인 민간과 무속에서는 남이를 신으로 받드는 신앙이 형성돼있다. 남이는 순조 때 후손 남공철의 상소에 의해 복권되었다.
적개공신
1등 귀성군 준(浚), 조석문(曺錫文), 강순(康純), 남이(南怡) 등 10명,
2등 김국광(金國光)·정말손(鄭末孫) 유자광등 23명,
3등 최유림(崔有臨)·정준(鄭俊) 등 12명에게
익대공신
1등 유자광·신숙주·한명회·신운(申雲)·한계순(韓繼純) 등 5명,
2등 밀성군 침(琛), 귀성군 준(浚), 덕원군 서(曙) 등 10명,
3등 정인지·정창손 등 22명
3. 정희왕후 시대 (1418-1483)
세조의 비 정희왕후는 파평윤씨로 판중추부사 윤번의 딸이다.
그녀는 본래 조정에서 언니를 수양의 부인으로 간택하러 왔을 때 그 방을 기웃거리다 언니대신 간택된다. 계유정난 당시 정보 누설로 수양대군이 거사를 망설이자 손수 갑옷을 입혀 그에게 쿠데타를 결행하게 할 만큼 결단력과 정치욕망이 강한 여자였다. 예종이 19세의 나이로 왕위에 오르자 조선 최초로 수렴청정 하였으며, 예종이 1년 2개월 만에 죽자 요절한 의경세자의 둘째 아들 자을산군(성종)을 그 날로 즉위시켜 조선 최초로 7년간 섭정을 한다. 따라서 예종부터 성종 초반 그녀의 섭정 시기는 8년 이상이며 그 당시의 여러 업적은 그녀에 의한 것이다.
예종때 부터 섭정을 시작한 정희왕후에게는 왕권 보존이 가장 문제였다. 그녀는 원상들에 의지하여 남이, 구성군등을 몰아낸다. 예종이 죽자 4세의 아들 제안대군이 있었으나, 나이가 너무 어리다는 이유로, 의경세자의 큰아들인 월산대군을 넘어, 12세의 둘째인 자을산군을 왕위에 앉힌다. 당시 최고 권력자인 한명회의 장인 인지라 정희왕후는 한명회와 결탁하여 자을산군 에게 왕위를 넘겨 그에 의지하려 한 것이다. 원상제도란 세조가 죽기 전에 미성년의 예종이 원만한 정사를 운영하기 위해 마련한 원로신하들에 의한 단종 때 황표 정사와 비슷한 제도였다. 세조가 죽기 전에 원상으로 지목한 세 중신은 한명회, 신숙주, 구치관 이었는데 핵심인 두 사람에 공신 중에서는 가장 청렴하다고 소문난 구치관을 끼워 넣었다. 이들은 성종 중엽 죽을 때까지 이 제도를 이용하여 정희왕후의 입을 빌려 실세를 행사한다.
그 후 성종 초기 그녀의 섭정 7년 기간 중 서민에 부담이 되던 호패법을 폐지, 경국대전의 교정 완료등 정치역량이 세조 때보다 높다. 세조 때 융성하던 불교를 다시 억눌러 숭유억불정책을 강화, 승려들의 도성 출입을 금하고 사대부 집안의 부녀자가 비구니가 되는 것을 금지했고, 본가는 동성동본 혼인을 금지시켰으나 외가로는 구분을 두지 않던 것을 외6촌 이내에는 결혼을 금했다. 이는 중국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농업 정책으로는 각도에 잠실을 하나씩 설치하여 잠업을 융성시켜 경상, 전라도에 뽕나무를 재배 켰으며, 평안, 평안, 황해도에는 대대적인 목화밭을 조성하게 하여 의류업의 발달을 촉진시키기로 했다. 고려말기 들어온 목화는 당시에 이르러 8도 전역에서 재배되고 우리 의생활에 기본을 이루게 되었다.
그녀는 성종의 나이 19세에 섭정에서 물러나 더 이상 권력에 관여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