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안개
안개는 기온이 이슬점 이하일 때와 흡습성의 작은 입자인 응결핵이 있으면 쉽게 형성되지만 지역의 특성에 따라 하층운이 지표면까지 하강하여 생기기도 한다. 보는 이의 시각에 따라 달라져 높은 산 위의 것은 지상에서 관측하면 구름일 수 있고, 산이나 빌딩 높이에서 내려 보면 안개로 보인다. 세계에서 안개가 가장 많이 자주 발생하는 곳은 캐나다 뉴펀들랜드 섬이다. 연 중 200일 이상은 안개가 내린다 하니 언제든지 가면 쉽게 볼 수 있는 곳이라는 생각에 내 버킷리스트 중 하나다. 그 곳의 안개는 어떤 색채일까? 안개의 색을 한마디로 정의하기엔 애매한 부분이 없지 않지만 분명 색깔이 있다. 여의도에서 근무할 때 한강변이나 도심공원에서 늘 안개를 볼 수 있었다. 근무 중에도 가끔 사무실을 나와 목적 없이 걸을 때가 잦았다. 일에 대한 중압감과 스트레스를 어쩌지 못할 때, 밖에 나오면 어김없이 안개가 내리고 있었다. 브루니아 꽃잎들이 촘촘하게 커튼으로 드리워져 윤중로에 실루엣으로 있는가 하면 이내 푸른빛으로 변화하는 그 신비를 본 적이 있다. 하염없이 걷다 고개를 들면 한강 물 빛과 어우러진 하늘 그 푸른빛을 보고 다시 사무실로 들어가 몇 번이고 마음을 다잡은 적이 많았다. 안개는 페르소나의 영혼들을 감싸주고 위로하기엔 더 없이 고마운 존재였다.
2001년 푸른안개라는 드라마가 큰 반향을 일으키며 기혼남자들을 TV앞에 모이게 했다. IMF의 고통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던 시기에 방영된 진부한 주제의 이야기는 40대 기혼남과 20대 여자의 멜로였다. 그동안 드라마는 물론 영화에서도 흔히 다뤘던 소재였고 그렇고 그런 유부남과 처녀의 불륜을 그린 작품으로 치부할 수도 있다. 국가부도의 여파를 아직 벗어나지 못하고 고통 받던 시기에 시청자들의 상반된 의견은 팽팽히 맞섰다. 사랑은 절대화 그 자체이어야 한다는 그룹과 가정을 파괴하는 불륜을 미화의 선정성으로 규정하는 시각으로 나눠져 사회적 이슈가 되었다. 당시엔 읽고, 일방적으로 제작된 영상만을 보는 시대에서 영상을 직접 만들고 참여하는 지금 이 드라마가 방영되었다면 어떤 반응을 보일지 사뭇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시나리오 전체적인 구성은 기혼남성들의 흔들리는 정체성울 사랑이라는 측면으로 조명하려 했다는 작가의 말처럼 마지막 방영분은 사랑으로 남지 않는다. 가정과 사회적 지위를 버리고 주인공 신우를 떠나보내고 가정을 잃은 주인공은 혼자남아 작은 서점을 꾸려가며 홀로서기로 끝을 맺는다.
평소 드라마와 영화를 보지 않는 필자는 대본을 읽으며 주인공들의 모습과 스크린에 펼쳐지는 푸른안개의 잔영을 그려보며 진지하게 읽었던 기억이 새롭다. “사랑이라는 것이 결혼으로 완결되는 것만은 아니다. 인생에 있어서 진정한 사랑을 깨닫는 것 자체가 의미가 있는 것이기에 두 사람을 결합시키지 않았다.”라고 말하는 작가의 의도가 대본을 몇 번 읽을 후 크게 와 닿았다.
“요즘은 유부남이 경쟁력이 있어 살아볼 맛이 있다”라는 어느 조기 은퇴자의 얘기가 농담으로 듣기에는 긴 여운이 남는다. 젊은이들은 결혼을 하지 않고 연애도 귀찮아하는 분위기가 갈수록 깊어진다고 한다. 여성 일부는 어떤 목적을 둔 사귐보다는 남자와 여자의 단순한 관계에서 유부남 같은 것을 따지지 않고 그냥 남자로 보고 만난다는 부류들이 점점 늘어난다는 얘기도 들을 수 있다. 유부남들이 경쟁력이 있다고 말한 조기은퇴자는 오갈 데 없는 현실을 자조적인 볼멘소리라 할 수 있어 씁쓸한 인상을 지울 수가 없다.
사실, 필자가 푸른안개에 대해 큰 관심을 가진 것은 카페에서 우연히 듣게 된 선율 때문이었다. 익숙하면서도 낮선 멜로디는 언뜻 들으면 키타로의 곡으로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음악이었다. 키타로의 곡은 독특한 동양적인 정서, 우주와 인간의 영혼을 각색한 독창적인 악식포맷과 아날로그 신시사이저의 독보적인 음색이어서 그만의 색깔을 지니고 있다. 카페 주인에게 곡명을 묻자 “신우테마”라고만 답해 주었다. 어렵사리 알아낸 그 곡이 바로 ‘푸른안개’스크린 배경음악이었다. 수없이 이 백 뮤직을 들으며 감탄한 것은 어쩜 이렇게도 절묘한 음색이 드라마 제목과 잘 맞게 선곡했느냐 하는 공감대였다. 이 선율이 주는 의미는 드라마 전체구성의 스토리를 함축하였고 당시 시대적 환경에서 고뇌한 삶의 모습이 녹아 있었던 것이다.
이 곡은 캐나다 출신 3인조 밴드로 만들어진 젤렘(Djelem)밴드가 연주한 Dorogi라는 곡이다. 젤렘은 동유럽을 떠돌던 집시출신으로 바이올린, 기타, 더블 베이스 구성으로 집시들의 애환 어린 삶의 아픔과 그리움의 정서가 깊게 침잠되어 있다. 이 곡을 들을 때마다 갈수록 설자리가 없어지고 있는 중년들의 이야기가 묻어나는 것 같아 대본을 읽었을 때의 긴 여운이 오버랩 되어 온다. 초록바다 세상이 점점 퇴색되어가는 절기다. 푸른안개 선율이 더 깊게 흡입되어지는 계절에 이 곡을 들어보자.
...
갑자기 밀려드는 자유가 나를 구속하고
도시는 감옥이 된다.
나만 홀로 갈 곳이 없어 탈출한 수형자의 자세로
서 있다가
가슴을 파고드는 공허와 만난다.
공중전화 앞에서 잊혀져간 이름을 생각하다가
육교 위나 지하도에서 서성이며
헤매는 나를 본다.
끝내 혼자일 수밖에 없는 나의 시야는 어느 곳으로 향하고 있는가
도시의 목마름을 느끼면서 누군가를 부르고 있다.
김미숙의 시낭송
중략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