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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 그거 알아요?
여러분 그거 알아요? 진정 가치 있는 건 돈으로 살 수 없다는 거. 그중에서도 시간이 제일 가치 있을 거예요. 누구에게나 공평하니까요. 죽음을 눈앞에 둔 사람은. 순간, 끼익! 앞차가 갑자기 섰다. 깜박깜박, 브레이크를 밟고 비상등을 켠 순간 전화벨이 울렸다. 라디오를 끄고 전화를 받자 노고는 느닷없이 아내가 죽었다고 했다. 거의 십여 년간 연락이 없던 노고는 아내가 죽자마자 어떤 금기 사항이라도 풀린 듯 곧바로 연락했다. 노고는 뭘 묻기도 전에 정신없다며 자세한 건 나중에 말하겠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친구들에게 대신 연락해달라는 부탁은 잊지 않았다. 누군가의 죽음은 모든 이해관계를 벗어나 사람을 겸손하게 하거나 뻔뻔하게 만든다. 이쪽에선 왜 갑자기 연락했냐고 따져 묻지 않아도 됐고 저쪽에선 굳이 변명하지 않아도 됐다. 죽음이야말로 진정한 승리인지 모른다.
저녁밥을 먹다가 아내에게 친구 아내가 죽었다고 하자 나를 빤히 쳐다봤다. 뭔가 의중을 파악하는 눈빛이었으나 달리 말은 없다. 아내는 다시 젓가락질에 집중했다. 그런데 식사가 끝나갈 즈음 아내가 피식 웃더니 돌연 내게 물었다.
“아내가 일찍 죽으면 남편들은 좋겠지?”
이번엔 내가 아내를 빤히 쳐다봤다. 겉으로는 무슨 소리냐는 표정을 지었으나 속으로는 모호한 생각에 빠져들었다. 그런 나를 보고 아내가 또 피식 웃었는데 그냥 웃는 건지 비꼬는 건지 역시 모호했다. 자격지심일지도 모르지만 언젠가부터 아내는 나를 보며 자꾸 저렇게 피식 웃었다. 가끔 칼날에 베이듯 섬뜩했다.
이튿날 일과를 마치고 장례식장을 찾았다. 조문을 끝내자 노고가 별안간 나를 끌어안더니 와줘서 고맙다는 인사를 끝내고도 놓아주지 않았다. 시간이 꽤 길게 느껴져 등을 토닥이자 그제야 나를 놓아주고는 두 딸을 소개했다. 중학교 2학년과 초등학교 4학년이라고 했다. 상대적으로 친구들보다 늦게 결혼한 노고의 아이들은 아직 어렸다. 노고와 아이들의 처지가 안타까웠다. 그런데 왜 그런지 노고도 두 딸도 생각보다 괜찮아 보였다. 다행이라기엔 너무 멀쩡했다.
한쪽 구석에 고향 친구 몇이 자리 잡고 앉아 손짓했다. 내가 빈자리에 앉자마자 홀로가 진행 상황을 보고했다. 먼저 도착한 친구들끼리 어느 정도 정보를 공유한 것 같았다. 아무래도 마흔다섯 살 젊은 주부가 별안간 죽었으니 의문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 오랫동안 많이 아팠는데 무슨 병을 앓았는지는 아직 모르겠으며, 노고는 아픈 아내를 간호하느라 십여 년간 친구들 모임에도 나오지 못했다고 했다. 홀로는 자기 생각을 덧붙였다.
“노고에겐 차라리 잘 됐지, 뭐.”
다른 친구들도 홀로와 같은 생각인지 고개를 끄덕였다. 노고와 두 딸이 왜 괜찮아 보이는지 그 이유를 알 것도 같았다. 그때 의구가 내 옆으로 자리를 옮기더니 술을 따라주고는 노고 아내에게 우울증이 있었다고 속삭였다. 오래 아팠으면 그럴 수도 있었겠다고 하자 의구가 무슨 말인가를 더하려고 했다. 바로 그 순간 노고가 다가와 맞은편에 앉았다. 그러자 의구는 헛기침하더니 소주를 한 모금 마셨다.
노고가 시간 내줘서 고맙다고 인사하자 저쪽에 앉아있던 주관이 어떻게 된 일이냐며 대놓고 물었다. 주관은 모든 것을 자기중심적으로 해석했으며 이름처럼 주관이 뚜렷했다. 장례식장이나 와야 가끔 만날 수 있었다. 친구들이 일시에 노고를 바라봤다. 노고는 태연하게 우리가 이미 공유한 사실들을 이야기했다. 주관이 다시 병명이 뭐냐고 묻자 순간 노고의 얼굴이 일그러지는 것 같더니 곧바로 표정을 수습하고는 대수롭지 않게 병원에서 포기했었다고 했다. 주관이 미간을 찡그리며 우울증에 관해 묻고 싶은 표정이었으나 노고는 조문객이 오자 서둘러 빈소로 갔다.
노고가 자리를 뜨자마자 의구가 우리 생각이 맞지 않느냐며 동조를 구했다. 하지만 나는 우리 생각이 뭔지 알 수 없어 고개를 갸웃하자 근면이 차차 알게 되지 않겠냐며 기다려보자고 했다. 그때 의구가 친절하게도 내 귀에 대고 자살이라고 속삭였다. 듣기도 민망했지만, 우리 나이를 두고 지천명이라고 했으니 의구의 추리가 맞는지도 몰랐다.
그때 의문 자매라고 늘 놀림당하는 의숙과 문숙이 출입구로 들어서더니 조문도 하지 않고 우리 쪽으로 왔다. 그러자 곧바로 노고가 우리 쪽으로 와 의문 자매에게 인사하고 돌아갔다. 의숙이 다짜고짜 왜 죽었냐고 물었다. 의구가 말하려고 하자 홀로가 의구의 말을 가로챘다. 홀로가 지금까지 공유한 이야기를 전달했으나 우울증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우울증이란 단어를 꺼내 놓았을 때 그 뒤에 줄줄이 이어질 이야기들을 사전에 차단한 거다. 아무래도 여자 친구들이 노고 아내의 죽음을 놓고 자살까지 상상하게 하는 것은 좋지 않았다. 더구나 우리는 노고 아내의 죽음에 관해 정확한 원인과 경위를 몰랐다. 의문 자매에게 여자의 촉을 발휘하게 할 빌미를 제공하는 것 역시 좋지 않았다.
한 여자와 25년을 넘게 살다 보니 그 무엇보다 여자의 촉이 무섭다. 적어도 내 경험에 의하면 여자의 촉이란 것은 반쯤은 정확했지만 반쯤은 너무나 터무니없어 생사람을 잡는 경우가 허다했다. 나의 주관적인 생각이겠으나 여자들은 정확한 것과 터무니없는 것, 이 두 가지 경우를 모두 싸잡아서 여자의 촉이 무섭다고 말한다. 결국, 함께 사는 남자 처지에선 여자의 촉이 너무 정확해도 문제고 너무 터무니없어도 문제다. 그런데 이번엔 왠지 여자의 촉을 믿어보고 싶었다.
대강의 이야기를 듣고 난 의문 자매는 자기들끼리 수군댔다. 또 빈소와 손님들 사이를 오가고 있는 노고를 힐끗힐끗 쳐다봤다. 돌아가는 눈동자의 각도로 보아 여자의 촉이 작동하기 시작한 무서운 순간이었다. 의숙이 돌연 저기 여자아이들이 딸들이냐고 물었다. 의숙도 노고와 두 딸의 멀쩡한 얼굴을 알아본 모양이었는데 노고와 두 딸은 여전히 괜찮아 보였다. 하지만 젊은 주부가 죽었으니 누가 봐도 절대 호상은 아니었다. 의구의 예감처럼 자살이라면 더욱더 호상이 아니었다. 만약 호상이라고 하더라도 아이들에겐 세상 전부와도 같은 엄마가 아닌가!
잠시 후 분위기와 상황을 어느 정도 파악한 의문 자매는 이해가 가지 않는다며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의문 자매의 촉이 발동하자 결국엔 의구가 우울증이란 단어를 공개했다. 자살이란 단어도 곧 공개될 분위기였다. 바로 그때 어떤 아주머니 한 분이 소란스럽게 들어오더니 조문은 하지 않고 노고의 장모를 끌어안은 채 오열했다. 노고의 장모를 언니라고 부르더니 멀쩡한 애가 왜 그랬냐고 따지듯 물었다. 저 애가 그럴 애가 아닌데 도대체 무슨 일이냐며 한탄했다. 노고의 장모는 난처한 얼굴을 하더니 그 아주머니를 데리고 가족 대기실로 황급히 들어갔다. 그때 주관이 우리 생각이 맞는 것 같다며 동조를 구하자 의구가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생각! 자살이라는 것 같기는 한데 그 이유를 짐작했다는 건가? 어쨌든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우리가 서로 합의한 것이 아니었음에도 우리 생각이라는 말은 우리를 모두 자살로 믿게 했다.
노고가 또다시 우리 쪽으로 오더니 자리에 앉자마자 자기 처지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대부분 우리가 공유한 내용이었는데 새로운 이야기가 있었다. 노고가 장례식장에 다녀오기만 하면 아내가 며칠씩이나 아파해서 일가친척 장례식에도 못 다녔다고 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친구들과도 연을 끊고 살아야 했고, 그동안 십 년을 넘게 아내의 병원비로 매년 평균 천오백만 원 이상 지출해서 경제적으로도 힘들었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언젠가는 월급에 압류까지 들어왔었다고 했다. 노고는 이렇게만 말하고는 어떤 질문도 받지 않은 채 빈소로 가더니 다시 조문객을 맞이했다.
우리는 잠시 우리가 심증만으로 공유했던 것과 노고가 남기고 간 말들을 조합해야만 했다. 본인도 아닌 남편이 장례식에 다녀왔는데도 며칠씩이나 아파했었다는 말은 좀 이해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우울증이 있었다는 말과 아내 곁을 지키느라 친구들 모임에 나오지 못했다는 말은 사실로 인정해야 했다. 경제적으로 힘들었다는 부분에선 우리 모두 노고의 처지에 공감하고 동조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때 문숙은 드디어 뭔가 감이 온 눈빛이었다. 의심의 눈초리를 하고는 친구들에게 동조를 구하며 분위기를 한순간에 반전시켰다.
“노고가 지금 뭔가 변명하는 것 맞지?”
그러니까 말이야! 의숙이 맞장구쳤다. 우리는 아직 해결하지 못한 것이 있었다. 어느 정도 감은 왔으나 왜 죽었는지, 또 어떻게 죽었는지는 알지 못했다. 그때 문숙이 우리가 짐작하고 있던 자살이라는 말을 서슴없이 입 밖으로 내뱉었다. 남편과 아이들이 너무 힘들어하면 엄마 처지에선 그럴 수도 있었을 거라고 했다. 우리가 고개를 끄덕이자 문숙은 우리의 이해력을 돕기 위해 한마디를 더 보탰다. 게다가 본인도 아주 아팠으니까 그랬을 거라고. 문숙이 그렇게 정리하자 아직 확인한 게 아니었음에도 내 머릿속이 한결 가벼워졌다. 다른 친구들 표정도 나와 같았다.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근면이 화장실에 다녀오겠다며 밖으로 나가서는 시간이 꽤 지났는데도 돌아오지 않았다. 복도로 나와 여기저기 두리번거리자 저쪽 대기실에서 근면이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눴다. 노고의 친형, 수고 형이었다. 죽음에 얽힌 진실을 알아보려는 것 같았다. 가까이 다가가 인사하자 수고 형은 다짜고짜 친구들에게 부탁이 있다고 했다. 내일 운구할 사람이 없으니 친구들이 운구를 도와달라고 했다. 순간, 괜히 아는 척했구나 싶었다. 운구까지 하려면 내일 오전까지는 꼼짝할 수가 없을 텐데 출근해야 하니 쉽게 약속할 수도 없고 딱 잘라 거절하기도 민망했다. 내가 머뭇거리자 수고 형은 나와 근면의 손을 덥석 잡더니 꼭 부탁한다고 했다. 근면이 알았다고 하자 수고 형이 자리를 뜨려고 했다. 그러자 이번엔 근면이 수고 형의 손을 고쳐 잡고는 어떻게 된 일인지 알려달라고 했다. 수고 형은 둘레를 두리번거리더니 사람이 없는 구석진 곳으로 우리를 데려갔다. 수고 형은 못마땅한 듯 미간을 찌푸리며 아파트 십일 층에서 그랬다고 말했다.
아! 근면이 탄식을 내뱉었다. 수고 형은 우울증이 심각했었다는 말을 덧붙이고는 자리를 떴다. 결국, 노고 아내는 우울증 때문에 아파트 십일 층에서 스스로 죽음을 선택했다는 얘기였다. 그렇다면 우울증은 왜 생긴 건지, 아이들 엄마가 굳이 왜 자살했어야만 했는지, 오히려 궁금증은 더 커졌다.
근면과 나는 친구들이 모여 있는 자리로 돌아왔다. 근면이 운구 이야기를 꺼내자 홀로가 흔쾌히 하겠다고 했으나 주관과 의구는 서로 눈치를 봤다. 그러다가 주관이 먼저 못 하겠다고 하자 의구도 못 하겠다고 했다. 근면이 이런 일로 힘 빼지 말고 함께 하자고 설득했으나 소용없었다. 의문 자매도 웬만하면 함께 하라며 권유했지만 역시 소용없었다. 주관은 오히려 의문 자매에게 그렇게 하고 싶으면 너희들이나 하라며 째려봤다. 그러자 의문 자매는 쓴 미소를 지으며 스스로 말문을 닫았다. 익히 주관의 성격을 아는 까닭에 더 말해봤자 괜히 기분만 상할 거라고 판단한 거다. 쉰세 살, 어쩌면 우리가 이제 더는 싸울 나이가 아닌지도 몰랐다.
분위기가 어색했던지 의문 자매가 그만 가봐야겠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벌써 열한 시였다. 의구와 주관을 제외한 친구들이 모두 자리에서 일어났다. 홀로가 손짓하자 노고가 다가오더니 함께 배웅하겠다고 했다. 의문 자매는 밖으로 나오자마자 차를 타고 훌쩍 가버렸다. 그때 수고 형이 다가와 운구는 몇 사람이나 할 수 있겠냐고 물었다. 근면이 셋이라고 대답하자 한 명이 부족하다고 했다. 모두 여섯이 필요한데 둘은 동네 후배가 할 거라고 했다. 근면이 의구와 주관에게 다시 말해보겠다며 안으로 들어가자 수고 형과 노고가 따라 들어갔다.
노총각 홀로와 나만 남았다. 아내에게 전화해 내일 가겠다고 하자 알겠다고는 했으나 일체 다른 대꾸가 없었다. 구차하게 변명하지 않아도 되니 마음이 한결 놓였으나 부부라는 것도 세월이 가면 연결고리가 낡아지는가 싶어 섭섭했다. 통화를 빨리 끝내자 홀로는 칭찬인지 빈정거림인지 알 수 없는 말투로 아내가 이해심이 넓은 것 같다며 빙그레 웃었다. 어쩌면 아내도 자기 혼자서 피식 웃었을 거다. 나도 무의미하게 웃었다. 피식, 한 번 더 피식.
홀로와 내가 자리로 돌아와 친구들 눈치를 보니 의구가 남아 있기로 한 모양이었다. 얼마 후 주관이 느닷없이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자정이 넘었으니 자기는 그만 가야겠다고 했다. 시계를 보니 신기하게도 바늘 세 개가 12에서 만나더니 막 헤어지기 시작했다. 그래 삶은 찰나였다. 주관이 그것을 알고는 처음부터 자정을 기다린 거다. 역시 자기 주관이 매력적일 만큼 확실한 친구다. 한편으로는 부러웠다. 그런데 친구들이 아까와 달리 아무도 일어나지 않았다. 주관은 그냥 가기가 멋쩍었던지 갑자기 내 이름을 부르며 한마디 툭 내뱉었다.
“순응아! 우리가 이 나이에 운구라는 것을 해야 하는 거냐?”
“너 죽으면 절대 안 할 거니까, 걱정하지 마.”
내가 입을 열기도 전에 홀로가 먼저 가시 돋친 말투로 대꾸했다. 주관은 당황했는지 얼굴을 붉히더니 못 들은 척 나가버렸다. 차라리 그냥 조용히 가는 것이 좋았다. 굳이 할 말이 있었다면 먼저 가서 미안하다고 했어야 옳았다. 죽음 앞에서 나이는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주관이 깜박했던 거다. 순간 욱해서 그랬다며 홀로가 친구들에게 미안하다고 했다. 주관에게도 아내가 있고 자식들이 있고 운영하는 일터가 있으니 시간적인 여유가 없었을 거다. 그냥 조용히 갔으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이었다. 결과적으로 주관이 괜히 긁어 부스럼을 만든 셈이었다. 물론 홀로가 화낸 것도 이해됐다. 주관이 우리 모두를 싸잡아서 할 일이 없어 이러고 있는 것처럼 말했으니 화낼 만도 했다.
의구와 근면은 어느새 고향 선후배들이 펼친 화투판에 끼어 자리 잡고 앉았다. 일어날 생각이 없어 보였지만 내일 일정을 생각하면 날밤을 새울 수는 없었다. 운구를 끝내면 곧바로 회사에 복귀해야 했다. 제정신으로 운전하려면 어떻게든 눈을 붙여야 했다. 홀로에게 사정을 말하자 홀로가 화투판에 끼어있는 근면과 의구를 잡아끌고 무작정 밖으로 나왔다. 근면은 택시에 타자마자 곯아떨어졌다.
모텔로 들어가 근면을 침대 위에 눕히자 곧바로 홀로가 캔 맥주를 사 들고 뒤따라 들어왔다. 새벽 한 시 반, 맥주를 앞에 놓고 둘러앉았다. 홀로와 의구에게 노고 아내가 아파트 십일 층에서 비행했다고 하자 의구는 곧바로 그런 것 같았다며 아쉬워했고 홀로는 한숨을 내쉬며 안타까워했다. 자살한 이유는 모르겠다고 하자 의구는 실망스러운지 자기가 먼저 씻겠다며 욕실로 들어갔다.
홀로가 돌연 우리 부부는 어떠냐고 물었다. 이따금 듣는 질문인데도 불구하고 나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피식 웃으며 사실대로 말했다.
“그냥저냥, 뭐, 큰 재미는 없어.”
홀로가 빙그레 웃으며 자기가 그래서 결혼하지 않았다고 하더니 잠시 후 뜬금없이 자기에게 큰 병이 있다고 했다. 내가 무슨 소리냐고 묻자 한숨을 푹 내쉬더니 내 눈을 바라보며 물었다.
“난 평생 사랑을 모를 것 같으니까 말이여. 이거 큰 병 맞지?”
사랑 따윈 필요 없다고 늘 자신하던 홀로도 사랑이 필요했나 보다. 하기는 사랑 없이 누가 살 수 있을까? 사람은 아무리 잘났다고 해도 결국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존재 아닌가! 빙그레 웃기는 했으나 말문이 막혔다. 과연 나는 사랑을 아는지? 아내와 나는 서로 사랑해서 아이를 둘이나 낳고 25년을 넘게 함께 살고 있는지. 나도 사랑은 잘 모르겠다고 하자 홀로는 그런 거냐며 싱겁게 씽긋 웃더니 맥주를 마셨다. 어느새 의구는 근면이 옆에서 코를 골았다. 홀로와 나는 몇 모금 더 마시다가 잠자리에 누웠다. 그러나 잠은 쉽게 오지 않았다. 하지만 또 언제 잠들었는지 모르게 잠들었다. 나이 탓인지 얼마 전부터 이런 식으로 잠들었다.
이튿날 서둘러 장례식장으로 갔으나 벌써 많은 순서가 진행됐다. 근면이 담배 연기 사이로 한마디 내뱉었다.
“누군가는 가고 누군가는 남는 거지 뭐. 남았다고 괜찮은 건 아니지만.”
그때 수고 형이 우리를 부르더니 흰 장갑을 나눠줬다. 장례 절차를 많이 생략했는지 모든 것이 빠르게 진행됐다. 우리는 안치실에서 영구차까지 고인을 옮겼다. 막상 옮기는 시간은 채 일 분도 안 됐다. 우리는 각자 자기 차를 몰고 영구차를 쫓아갔다. 안개가 자욱한가 싶더니 금세 차 앞 유리에 달라붙어 와이퍼를 작동해야만 했다. 고인이 어떤 사연을 가지고 가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배웅하는 길이 순조롭지만은 않았다. 화장터는 산속에 있었다. 화장터에서도 운구는 채 일 분이 안 걸렸다. 죽음을 배웅하는 데는 겨우 2분! 참 허무했다. 다소 놀라운 것은 장모와 처제가 통곡하는데도 노고는 물론 두 딸도 크게 동요하지 않았다.
우리가 할 일은 다 했다. 수고 형이 자양 강장 음료를 가지고 와 나눠주자 노고가 우리에게 다가오더니 안정되면 연락하겠다며 고맙다고 했다. 내가 갈 길이 멀다며 서두르자 친구들도 서둘러 각자 갈 곳으로 갔다. 도로엔 여전히 안개가 자욱했다. 올 땐 미처 알아보지 못했는데 도로와 나란히 강물이 흘렀다. 안개 속에 묻힌 채 흘러가는 강물을 상상하자 왠지 먹먹했다. 저렇게 강물이 흐르듯 사람도 흘러서 어딘가로 가나 보다. 마주 오는 차들이 안개등을 켠 채로 비상등을 깜박였다. 나도 비상등을 켜고 속도를 줄였다. 비상등 깜빡이는 소리를 듣고 있자니 묘하게도 바빴던 마음이 안정됐다. 불현듯 내 인생에도 비상등을 켜고 속도를 줄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노고 아내도 어느 순간 뿌연 안개를 맞이했을 거다. 그래서 비상등을 켰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모두가 그냥 지나쳤을 거다. 세상은 언제나 무심하기 일쑤이니까.
한참을 달리자 큰길이 나타나더니 안개도 강물도 한순간 꿈처럼 사라졌다. 그렇게 회사를 향해 달리다 보니 한 번쯤은 멈춰도 좋겠다 싶었으나 괜히 멈추면 완전히 멈추게 될까 봐 겁났다. 잠시 서성이다가 쉬지 않고 끝까지 달려 내 자리로 복귀했다. 그런데 이런 일상을 아무렇지도 않게 순응하며 살아가는 내 모습은 과연 온전한가? 누구에게 묻고 누구에게 답을 구해야 할지!
어리석게도 시간을 들여 돈을 사는 것이 인생인 건지! 시간은 빨리 지나갔다. 노고 아내를 배웅한 이후 한 달째 나는 나 자신에게 과연 온전하냐고 날마다 물었으나 답은 구하지 못했다. 토요일 오후, 말끔하게 단장한 노고가 환한 얼굴로 찾아왔다. 우리는 오이도 바닷가로 가 조용한 횟집을 찾아 들어갔다.
노고는 소주를 한 잔 마시자마자 서러움을 토로했다. 우체국 집배원인 노고는 사계절 오토바이를 타고 다니느라 바람에 그을려 얼굴이 검붉었다. 재작년 가을에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집배원 과로 자살을 예를 들어가며 이야기했다. 그 집배원이 유서에 남긴 것처럼 관리자들은 집배원을 사람 취급 안 한다며 열을 올렸다. 마치 로봇 부리듯 하는데 집배원 수가 터무니없이 부족해서 아파도 쉴 수조차 없다고 했다. 우편물은 많고 집배원은 없는데 어떻게 52시간 근무를 할 수 있겠냐고 했다. 52시간 근무제를 맞추려면 우편물 하나를 3초에 배달해야 한다며 연이어 투덜댔다. 새벽 네 시 반에 기상해서 일과를 시작한다고 했고, 아이들은 자기들이 알아서 학교에 간다고 했다. 그러더니 금세 표정을 바꿔 자기는 자기 일을 사명으로 여긴다고 강조했다. 바쁜 와중에도 때때로 독거노인들을 둘러보는데 한 번은 다 죽어가는 독거노인을 살렸다고 했다. 그때 상까지 받았었다며 자랑했다.
집배원 이야기는 오래도록 이어졌는데 같은 말을 여러 번 반복했다. 누군가 알아주기를 바라는 하소연이라는 것이 느껴지자 마음이 짠하면서도 정작 나는 노고 아내 이야기가 궁금했다. 하지만 노고의 말을 끊을 수는 없었다. 이럴 때만이라도 노고 이야기를 들어줘야 할 것 같았다. 그런데 아홉 시쯤 손님이 우리밖에 없자 가게 주인이 영업을 마무리하려는 눈치를 보였다. 우리는 횟집에서 나와 방파제 위를 걸었다. 십일월의 바닷바람은 붉게 달아오른 술기운을 차갑게 식히며 온몸을 싸늘하게 파고들었다. 노고는 차가운 바람 따윈 아랑곳하지 않고 이번엔 아이들 이야기를 꺼냈다. 노고는 저수지 수문이 터지기라도 한 듯 말이 많았다.
우리는 다시 술집을 찾아 들어가 노가리 안주와 생맥주를 주문했다. 이번엔 내가 기회를 노리다가 아내가 없으니 힘들지 않으냐고 물었다. 노고는 잠시 주춤하더니 솔직히 말해 홀가분하다고 했다. 그러고는 내가 빨리 공감해 주기를 바라는 눈치였다. 내 눈을 똑바로 바라봤는데 표정과 어투에서 정말 홀가분하다는 것이 느껴졌다. 지난 세월의 고단함과 수고가 고스란히 느껴지기도 했다. 그동안 참 많이 힘들었겠다며 정말 수고했다고 하자 노고가 그제야 아내 이야기를 시작했다. 자기 스스로 쌓아 올렸던 경계의 벽, 그 한구석을 한순간 허물어 버렸다.
“내가 장례식장에 다녀오기만 하면, 아내가 며칠씩 입원하는데 갑갑하더라고.”
“무슨 종교적인 문제가 있었나?”
노고도 종교적인 문제를 의심했었으나 그건 아니었으며, 원래가 몸이 약한데 두 딸을 낳은 이후에 몸이 더 안 좋아졌고, 감기라도 앓게 되면 합병증이 발생해서 자주 입원했고, 그러다가 간과 신장에 문제가 생겨서 약을 먹었고, 또 그때부터 우울증이 왔다고 했다. 그런데 3년 전쯤 의사가 진지하게 운동을 권하자 아내는 마음먹고 운동을 시작했다고 했다. 아내가 함께 운동하자고 했지만, 노고는 진심 시간이 없었다고 했다. 그래도 아내는 혼자서 열심히 운동했고 때때로 건강하게 웃는 얼굴을 볼 수 있었다고 했다. 그러다가 올봄부터 갑자기 안 좋아지더니 결국엔 십일 층에서 그랬다고 했다. 또 유서엔 미안하다는 말만 남겼다며 아쉬워했다. 노고는 진심 처를 이해할 수 없다며 이야기를 마무리하듯 맥주를 단숨에 들이켰다.
노고는 진심이란 말을 여러 번 사용했는데 왠지 자꾸만 자기 처지를 변명하는 것만 같았다. 조심스럽게 제수씨가 왜 그런 선택을 했겠냐고 묻자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더니 아내가 죽기 전에 아이들에게 짐이 되는 게 싫다며 미안해했었다고 했다. 엄마가 날마다 누워있자 아이들이 밥도 하고 청소도 하고 빨래도 했었단다. 장례식장에서 문숙이 말했던 것처럼 엄마라면 그럴 수도 있었을 것 같았으나 여전히 의문은 가시지 않았다. 단도직입적으로 정말 병 때문에 우울증이 생긴 거냐고 묻자 노고는 인상을 찡그리며 맥주를 마시더니 오랫동안 아파서 그러지 않았겠냐고 내게 반문했다. 그러고도 뭔가 할 말이 있어 보였으나 속 시원하게 털어놓지 않았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노고의 눈빛이 심하게 흔들렸다. 그 눈빛을 보자 더는 다그칠 수 없었다.
우리는 술집에서 나와 다시 바닷바람을 맞으며 방파제를 따라 걸었다. 이번엔 노고가 침묵했다. 술기운이 올라오는지 걷는 자세도 조금 흐트러졌다. 아내가 친정에 다니러 가고 없으니 집에 가서 한잔하자고 하자 좋다고 했다. 우리는 집으로 와 다시 술상을 차렸다. 아내가 끓여놓고 간 참게 매운탕과 소주를 상에 올렸다. 참게 매운탕은 내가 제일 좋아하는 안주였다. 잔을 채우고 건배하자 노고가 연거푸 두 잔을 한입에 들이켰다. 다시 술을 따르자 이번엔 말없이 술잔을 바라만 봤다. 넌지시 아내가 보고 싶지 않으냐고 물었으나 내 말을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한동안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섬뜩한 눈빛을 하고는 느닷없이 처가 지난봄에 임신했었다고 말했다. 이야기 전개가 참으로 엉뚱했다. 노고는 술잔을 들었다가 탁 내려놓으며 말했다.
“처가 이혼해 달라고 했어!”
내가 빤히 쳐다보자 남의 이야기를 하듯 다른 놈의 애였다고 말했다. 아! 한순간 말문이 막혔으나 노고는 대수롭지 않게 말을 이어갔다. 모든 것을 다 털어놓고 정말 홀가분해지려고 하는 것 같았다. 아내가 헬스클럽에서 운동하다가 만난 놈이라고 했다. 노고는 함께 운동하지 않았던 것을 후회하듯 또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노고는 얼굴을 찡그린 채 이젠 그놈 이야기를 시작했다. 술에 취해서인지 흥분한 목소리였다.
“처와 함께 그놈을 찾아갔었지. 그런데 그놈이 처도 아이도 책임질 수 없다며 등을 돌리더라. 그러더니 아이가 자기 아이라는 것을 어떻게 증명하겠냐며 따지지 뭐냐!”
“저런, 나쁜 놈!”
노고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웃기는 게 뭔지 아냐? 그 순간 처가 그놈 앞에서 쓰러지더라. 기분이 정말 더럽고 이상했지. 화가 바닥을 치고 치밀어 올라왔어.”
노고는 놈을 죽이고 싶었다고 했다. 하지만 어느새 자기도 모르게 처를 업고 병원으로 달려갔다고 했다. 그렇게 병실에 누워있는 처를 보며 그놈을 꼭 죽이겠다고 다짐했다고도 했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이렇게 말했다.
“칼을 품고 두 번 찾아갔었지. 하지만 두 딸이 눈에 밟혀 차마 그럴 수가 없더라. 어찌 알았는지 처가 그 사실을 알고는 아무것도 하지 말라더라. 그놈에게도 나에게도 원하는 게 아무것도 없다며 울면서 애원하지 뭐냐.”
노고는 그놈 앞에서 쓰러지는 처가 미웠지만 어쨌거나 아이들 엄마와 헤어질 수 없었다며, 처를 수렁에서 건져내듯 애를 지웠다고 했다.
여기까지 이야기한 노고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가 뜨고는 느닷없이 그때 자기 처가 어땠는지 알겠냐고 질문을 던졌다. 내가 머뭇거리자 다시 말을 이어갔다.
“처가 내 앞에서 대놓고 울더니, 그 후로 말을 하지 않더라.”
“응?”
내가 왜 ‘응?’이라고 되물었는지는 나도 모르겠다. 어쨌거나 노고의 말투 속엔 아내를 원망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나는 노고 아내의 심정도 노고의 심정도 뭐라 단정하여 짐작하기 어려웠다. 노고가 별안간 그놈을 욕했다. 그놈도 식구가 있었다며 정말 나쁜 놈이라고 했다. 노고가 잠시 나를 쳐다봤는데 이번엔 눈빛 속에 살기가 가득했다. 노고는 장례를 마치고 놈의 처가와 회사에 등기우편을 보냈다고 했다. 놈은 물론 놈의 주변 사람들도 자기 처의 죽음을 알아야 할 것 같아 그랬다고 했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노고가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나는 처를 사랑했어.”
노고는 그렇게 사랑을 고백하고는 곧바로 곯아떨어졌다. 잠든 노고의 눈에선 여전히 눈물이 새어 나왔다. 취중 진담이라고 노고는 여전히 아내를 사랑하는 모양이었다. 한참 동안 노고의 눈물을 바라보다가 나도 누웠다. 그러나 쉽게 잠을 이룰 수 없었다. 하지만 또 어느새 잠들었다.
이튿날 새벽 네 시 반쯤 노고가 나를 깨웠다. 습관이 무섭다고 네 시 반만 넘으면 저절로 눈이 떠진다며 푸념했다. 나는 눈을 비비며 간신히 물을 끓이고 알 커피를 타 노고에게 건넸다. 내가 소파에 쓰러지듯 앉자 노고가 돌연 아내에게 잘해주라고 말하고는 욕실로 들어가더니 대강 씻고 나왔다. 일찍 가야겠다고 했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라면이라도 먹고 가라며 노고를 주저앉히고 다시 주방으로 갔다. 물이 보글거리며 끓어오르는 것을 보고 있자니, 노고가 지난밤에 자기 입으로 말한 것들을 기억하고 있는지 궁금했다. 라면을 먹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지난밤 잠들기 직전에 들었던 의문이었다.
“제수씨가 외롭지 않았을까?”
노고가 입속에 있는 것을 천천히 목구멍으로 넘기며 나를 똑바로 노려봤다. 마치 나를 원망하듯 그 눈빛은 서서히 일그러졌다. 내가 실수한 것 같다고 말하자 노고는 아무 말 없이 라면을 먹었다. 우리는 라면을 먹고 집에서 나와 승강기 안에 들어섰다. 노고의 얼굴은 검붉었는데 눈빛이 유독 빨겠다. 그 빨간 눈빛은 금세 슬퍼지더니 이내 공허한 듯 멍했다. 곧바로 그 빨간 눈동자를 뒤덮으며 눈물이 고였다. 노고가 입술을 사르르 떨며 입을 열었다. 마치 고해성사라도 하는 것 같았다. 아내가 죽기 전날 아주 오랜만에 밥상을 차렸다고 했다.
“그날 내가 좋아하는 보신탕을 끓여놓고는, 외롭다고 했었어.”
내가 외롭다는 말에 동조하듯 고개를 끄덕이자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다소 큰소리 말했다.
“난 진심 힘들었어! 진심 일만 했다고!”
딱히 할 말이 없어 어떤 대꾸도 하지 않자 노고도 더는 말하지 않았다. 노고의 자동차는 아파트 입구 길가에 있었다. 차에 올라타려던 노고가 잠시 멈칫하더니 그대로 차 문을 쾅 닫고는 돌아섰다. 돌연 내게 따지듯 물었다.
“외롭다고? 도대체 그게 뭔데?”
그때 해가 내 등 뒤에서 떠오르더니 밝은 햇살이 노고의 검붉은 얼굴을 따사롭게 감싸 안았다. 노고는 결국 고였던 눈물을 뚝뚝 쏟아냈다. 왜일까? 그 순간 노고의 얼굴이 아름다웠다. 내가 빙그레 웃자 노고도 활짝 웃었으나 그 눈에선 눈물이 연이어 쏟아졌다. 자기도 외롭다고 고백하듯이 뚝뚝. 노고는 그렇게 울고 웃다가 돌아갔다. 다행히 그 뒷모습이 한결 가벼워 보였다. 덩달아 내 발걸음도 가벼웠다.
노고를 보내고 집으로 들어와 소파에 앉자 맞은편 벽에 붙어 있는 가족사진이 눈에 들어왔다. 가까이 다가가 날짜를 보니 십삼 년 전 아이들이 어렸을 때 찍은 사진이었다. 아이들은 물론 나와 아내도 활짝 웃고 있었다. 지금은 아내도 나도 어쩌다가 피식 웃을 뿐 저렇게 환하게 웃지 않는다. 그러고 보니 삼 개월 전, 아들이 군에 입대하기 전에 아내가 가족사진을 찍자고 했었다. 나는 아들이 제대하면 그때 찍자며 그냥 넘겨 버렸다. 아내는 실망한 낯빛이 역력했으나 더는 조르지 않았다.
그런데 아내는 언제부터 피식피식 웃게 된 걸까? 어쩌면 십 년 전쯤 그 일이 있고 난 뒤부터인 것 같았다. 아내는 우리 회사 거래처에서 근무했었다. 그런데 나와 동료 후배의 추문 사건이 터졌다. 별일이 있을 뻔했던 순간에 사건이 터져서 결국엔 별일 없었지만, 아내에겐 별일이 생겼다. 거래처에 소문이 돌자 아내가 회사를 그만뒀다.
사진을 계속 바라보고 있자니 아내가 걱정됐다. 아내는 어쩌면 저렇게 환하게 웃는 자기 모습과 내 모습을 보고 싶었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내의 실망한 낯빛을 떠올리자 문득 겁이 났다. 노고 아내가 죽기 전날 노고가 좋아하는 보신탕을 끓였다는 말이 생각났다. 게다가 하필 우리 집도 십일 층이었다. 허겁지겁 옷을 갈아입고 밖으로 나와 차를 몰고 처가로 달렸다. 아내는 특별한 이유 없이, 그것도 혼자서 왜 처가에 갔을까? 또 왜 내가 좋아하는 참게 매운탕을 끓여놓고 집을 비웠을까? 가슴이 철렁했다. 혹시 길이 어긋날까 싶어 장모에게 전화를 걸었다. 지금 가고 있으니 아내를 붙잡아 두라고 부탁했다. 또한, 아내에게는 비밀로 해달라고 부탁했다. 깜짝 이벤트를 통해서라도 활짝 웃는 아내의 얼굴이 보고 싶었다. 당장은 아이들이 없으니 둘이서라도 사진을 찍고 싶었다. 산책도 하고 맛있는 것도 먹을 생각이었다. 오늘 꼭 이 모든 것을 하고 싶었다. 반드시 오늘 해야만 지금의 이 삶을 꾸준히 이어갈 수 있을 것 같았다. 또 웃는 아내의 얼굴을 오늘 꼭 봐야만 나머지 인생을 잘 살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까닭 없이 왠지 자꾸만 마음이 급했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장모가 대답하지 않고 있었다. 왜 그런지 머뭇거리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내가 조심스럽게 무슨 일이 있냐고 묻자 장모도 조심스럽게 대꾸했다.
“그게 그러니까…….”
반사적으로 무슨 일이냐고 묻고는 초조하게 기다렸다. 장모는 뭘 숨기거나 거짓말을 못 했다. 저쪽에서 들려오는 숨소리가 사르르 떨렸다. 나도 덩달아 심장이 쿵쾅쿵쾅 떨렸다.
“이보게, 이 애가 대체 어딜 간 거지?”
아! 내가 대체 뭘 잘못한 거지? 난 그냥 진심 열심히 산 것밖에 없는데! 내게 왜 이런 일이 생긴 거지? 추문 사건! 그건 그냥 미수였는데. 그것도 벌써 십 년이나 지났는데. 난 이제 어찌 살지? 이건 아니야, 뭔가 잘못됐다고! 내가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건가? 그 순간 저쪽에서 아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보! 괜찮아? 미안해. 자기가 너무 재미없이 사는 거 같아서 내가 장난 좀 쳤어. 괜찮은 거지?”
휴~, 안도의 한숨이 저절로 흘러나왔다. 그런데 순간 뒤에서 빵빵! 끼~익! 내 차가 황색 선을 넘었다. 쿵! 깜박깜박! 갑자기 라디오가 작동했다. 여러분 그거 알아요? 진정 가치 있는 건 돈으로 살 수 없다는 거. 그중에서도 시간이 제일 가치 있을 거예요. 누구에게나 공평하니까요. 물론 그 시간을 누구와 함께하느냐가 더 중요하죠. 하지만 우리에겐 다음 시간이란 없을지도 몰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