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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김씨의 유래
선안동김씨(先安東金氏)와 후안동김씨(後安東金氏)의 구분
보통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말할때 안동김씨(安東金氏)라하면 한 종중(宗中)이 있는 것으로 아는데 안동김씨에는 시조(始祖)가 다른 두 종중(宗中)이있다. 안동김씨는 모든 신라김씨(新羅金氏)의 시조인 대보공 김알지(金閼智)의 후손으로써 본관명은 같으나 시조가 다른 선(구)안동김씨와 후(신)안동김씨가 있으며, 성과 본이 같은 동성동본(同姓同本) 이지만 엄연히 시조가 다르므로 한 종중(宗中)은 아니다. 따라서 옛부터 선.후안동김씨는 두 종중(宗中)간에 혼인(婚姻)을 하여 왔으며 지금도 혼인하는데 법적으로 아무 문제가없다. 선안동김씨의 시조는 신라 경순왕(敬順王)의 손자이며 대안군 김은열의 둘재아들인 평장사공 김숙승(金叔承)이며, 후안동김씨의 시조는 신라말 고창군 성주이며 고려개국공신인 태사공 김선평(金宣平)이다. 명문인 선안동김씨는 누대(累代)로 안동(安東)에 세거(世居)해 왔으며 김숙승(金叔承)의 7세손 김방경(金方慶)이 해동(海東)의 명장으로 고려사(高麗史)를 수(繡)놓았다. 고려말에서부터 조선중기에 이르기까지 명문(名門)으로 지위를 굳혀온 안동김씨(安東金氏)는 상락군(上洛君) 김방경(金方慶)의 아들과 손자대에서 크게 융성하여 훌륭한 명신(名臣)을 많이 배출시켰다. 중시조 충렬공(김방경)의 5세손대에서 21개파로 분파되어 현재 15파가 존재하며,15파에는 밀직사사공파, 개성윤공파, 군사공파, 전서공파, 부사공파, 문온공파, 안정공파, 도평의공파, 대호군공파, 제학공파, 판삼사공파, 안렴사공파, 익원공파, 서운관정공파, 정의공파가 있다. 선안동김씨의 인구는 1985년 경제기획원 통계국의 조사시 95,736 가구에 398,245명으로 조사되었으며, 2000년 통계청 조사시 132,645가구에 425,264명으로 조사되어 본관별 성씨 순위로는 18위이며, 1985년 이후 15년동안 36,909가구 27,019명이 늘어나 선안동김씨의 인구는 6.8% 증가하였다. 후안동김씨는 김습돈(金習敦)을 1세조로 하여 세계를 이어오면서 원손(遠孫) 김계행(金係行)이 조선 성종 때 대사간에 오른 것을 기점으로 명문의 기틀을 다지고 왕실의 외척이 되어 세도가문의 지위를 굳혔다. 파에는 판관공파, 감찰공파, 삼당공파, 서윤공파, 진사공파, 정헌공파, 어담공파, 계공랑공파, 등암공파, 참봉공파, 현감공파, 호장공파, 사헌공파, 사과공파, 선군공파 등의 파가있다. 후안동김씨의 인구는 1985년 경제기획원 통계국의 조사시 5,047가구에 21,554명으로 조사되었으며, 2000년 통계청 조사시 15,068 가구에 47,702명으로 조사되어,15년동안 10,021가구 26,148명이 늘어나 121%의 증가율을 보였다.(이번 조사시 인구 증가율이 121%로 조사돼 1985년 조사시 문제가 있었던 것으로 보임)
선(구)안동 김씨(安東金氏)의 시조 김숙승金叔承 : (고려 때 공부 시량과 평장사를 역임)은 신라 경순왕(敬順王)의 손자이며 대안군(大安君) 김은열(金殷說)의 둘째 아들이다.
조선 초기의 문신 보백당(寶白堂) 김계행은 거유(巨儒) 퇴계 이황, 학봉 김성일, 서애 유성룡으로 이어지는 조선조 유교사회의 씨앗을 뿌린 인물로 평가된다. 문장과 시에 자신만만했던 하도(下道)의 이모선비가 실력을 겨루고 싶어 상도(上道)의 문향 안동을 찾았다가 실력을 겨루기도 전에 흙투성이 일꾼이 시를 짓는 것을 보고 기가 죽어 돌아갔다는 일화가 있는 안동에서 은거하며 청백한 자세를 고고하게 지키면서 일생을 살았다. 김계행(金係行)은 본관은 안동이며 자(字)는 취사(取斯) 호(號)는 보백당(寶白堂) 시호(諡號:임금이 내린 칭호)는 정헌(定憲)이다. 1431년(세종13년) 안동군 풍산에서 비안(의성)현감이었던 삼근(三近)의 아들로 태어났다. 5세 때 글을 배운 보백당은 11년 뒤 진사가 되고 성균관에 입학, 김종직과 교유하며 학문을 성숙시킨다. 32세가 되던 1462년의 일이다. 보백당은 성주 향교의 교수로 부임했다.
그 때 국사(國師)로 있던 장질(長姪:맏 조카) 학조대사가 성주를 찾아와 보백당을 만나려 했다. 고을 원은 그 뜻을 알고 [국사께서 거동할 필요는 없다]명 [자신이 보백당을 불러 오겠다]며 사람을 보냈다. 이를 듣고도 가지 않은 보백당은 [公務로 오지 않은 이상 어찌 삼촌이 조카를 보러 가겠느냐]며 학조대사의 종아리를 피가 나도록 때렸다. 당시 학조대사가 보백당에게 출세가 늦으니 자신이 힘써 보겠다고 말하자 [내가 어찌 조카의 천거로 출세를 바라겠느냐. 또한 너의 도움으로 출세를 한다한들 무슨 얼굴로 사람을 대하고 일을 처리하겠느냐]며 물리쳤다.
1480년(성종11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했을 당시의 보백당의 나이 50이었다. 고령현감, 홍문관 응교를 거쳐 사간원 정언으로 있으며 직언을 서슴치 않다가 권신들의 미움을 사 파직됬다. 4년 뒤 육조의 관직을 거쳐 삼사(三司)의 여러직을 역임하며 충간(忠諫:바른 조언)으로 일관했다. 1497년 고향인 안동군 길안면 묵계리로 낙향(落鄕)했다.
이후 보백당은 황학산 기슭에 [말년에 쉬어지낸다]는 뜻으로 만휴정(晩休停) 짓고 은거했다. 만휴정 앞쪽에는 높이가 24m가 된느 송앙폭포가 있으며 널따란 바위에는 [寶白堂晩休停泉石]이라고 새겨져 있다. 76세때 보백당은 연산군의 폐위 소식을 전해듣고 [10년이나 섬겼던 신하로서 어찌 슬프지 않겠느냐]며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1521년 보백당은 87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청백을 後孫에게 대대로 전하고 공근(恭謹)을 대대로 지켜가며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끼리 우애를 지켜 화목하라(家傳淸白世守恭謹 孝友敦睦)] 또 [교만하거나 경박한 행동으로 가명을 훼손하거나 실추시키는 일은 하지말려 상제는 오직 정성과 경건을 다하고 낭비나 허례를 말라(勿以驕恣薄行 墜毁家聲 喪祭惟在誠敬 勿務爲豊侈)]고 했다. 보백당은 안동군 길안면 묵계리에 경북도 민속자료 제19호로 지정되어 있는 묵계서원(墨溪書院)에 모tu져 있다.
묵계서원은 1869년(고종 6년) 서원철폐령으로 없어지고 현재는 입교당을 비롯한 읍청루(揖淸樓) 등이 복원 되 있을 뿐이다. 보백당은 조정으로부터 [불천위(不遷位: 영원히 신위에 제사를 모셔라)] 칙령교지를 받았을 정도로 그의 청백함과 대쪽같으 성품은 남달랐다. 보백당과 관련된 유물로는 교지(敎旨)506부등이 전할 뿐 자세한 유품, 자료등은 남아있지 않다. 묵계는 보백당이 송암폭포위에 만휴정을 짓고 정자앞에 흐르는 물을 보고 묵계(默溪)라고 한 것, 보백당의 19대 종손인 김주현(金胄懸 경북도 교육감)씨는 [공은 청렴결백함과 올곧은 기개로 일생을 살다가 간 청백리였다]며 [이 시대의 공직자들이 무엇을 본받아야 할 것인지를 깨닫게 한다]고 말했다.
바로 이 소산리(素山里) 가 우리 안동김씨의 텃밭이다.
누대(累代)로 안동(安東)에 세거(世居)해 오던 안동 김씨는 숙승(叔承)의 7세손 방경(方慶)이 해동(海東)의 명장으로 고려사(高麗史)를 수(繡)놓았다. 그는 병부 상서(兵部尙書)와 한림학사를 지내고 중서령(中書令)에 추봉된 효인(孝印)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16세에 음보(蔭補)로 양온서 동정을 시작으로 벼슬길에 나가 여러 관직을 역임한 후 1247년(고종 34) 서북면 병마판관(西北面兵馬判官)이 되었다. 이때 몽고병(蒙古兵)의 침공으로 주민들과 함께 위도(韋島 : 지금의 정주)에 들어가 저수지를 만들고 쓸모없는 땅을 개간하여 농사를 짓게하고 효율적인 물관리로 섬 사람들의 식수관리에 눈부신 업적을 남겼으며, 원종조(元宗朝)에 일어난 삼별초의 난을 평정한 후 1273년(원종 14) 문하시중(門下侍中)이 되어 원세조(元世祖)의 부름을 받고 원나라에 들어가 금안장(金鞍)·채복(彩服)·금은촛대(金銀錠) 등을 하사받고, 돌아올 때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에 배명되었다. 충렬왕이 즉위하자 도원수(都元帥) 홀독(忽篤)이 이끌고 온 원나라 군대와 합세하여 대마도를 정벌하고 일본 본토를 공략하려다가 태풍으로 돌아왔다. 특히 그는 충직(忠直)하고 근검했으며 일찍이 그의 어머니가 임신할 때 구름과 안개를 먹는 꿈을 꾸었다고 하며 입과 코에서는 항상 운기(雲氣)가 맴돌았다고 한다. 평생 임금의 실책을 말하지 않았으며 나라에 큰일이 생기면 퇴직 후에도 언제나 걱정했다. 고려말에서부터 조선중기에 이르기까지 명문(名門) 세도가문(勢道家門)으로 지위를 굳혀온 안동김씨(安東金氏)는 상락군(上洛君) 방경(方慶)의 아들과 손자대에서 크게 융성하여 훌륭한 명신(名臣)을 많이 배출시켰다. 방경(方慶)의 아들 5형제 중 맏아들 선은 전법판서상장군(典法判書上將軍)을 지냈고, 슬하의 아들 승용(承用 : 보문각 대제학)·승택(承澤 : 중서시랑 평장사를 지내고 영창군에 봉해짐)·승우(承祐 : 상서)가 현달했다. 삼중대광(三重大匡)으로 상락군(上洛君)에 봉해진 흔(炘 : 방경의 둘째 아들)과 판삼사사(判三司事)에 올라 상락공(上洛公)에 봉해진 순(恂 : 방경의 셋째 아들)도 크게 명성을 떨쳐 가문을 빛냈으며, 순(恂)의 아들 영돈(永暾)과 영후(永煦) 형제가 조 적의 난에 공을 세워 상락부원군(上洛府院君)과 상락후(上洛候)에 각각 봉인되었다. 중시조(中始祖) 방경(方慶)의 넷째 아들인 논은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와 천우위 대장군(千牛衛大將軍)에 이르렀다. 한편 대제학(大提學) 승용(承用)의 손자 칠양(七陽)은 가정(稼亭) 이 곡(李 穀)의 문하에서 학문을 연마하고 정몽주(鄭夢周)·이 색(李 穡) 등과 성리학을 의논했으며,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개국하자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절로 강진(康津)에 은거한 후 학문으로 생을 마쳤다. 고려말 정주학(程朱學)의 거두(巨頭)이며 학식과 덕망으로 세인(世人)의 추앙을 받았던 구용(九容)과 공민왕(恭愍王) 때 내사사인(內史舍人)으로 역신 신 돈(辛 旽)을 탄핵하다가 죽음을 당한 제안(齊顔)은 상락군(上洛君) 묘(昴)의 아들로 지돈령부사(知敦寧府事)를 지낸 아우 구덕(九德)과 함께 명문의 대를 이었다. 가문의 의맥(義脈)을 드높인 사렴(士廉)과 사형(士衡) 형제는 상락백(上洛伯) 영후(永煦)의 손자이자 영삼사사(領三司事)로 상락군(上洛君)에 추봉된 천의 아들로서 고려의 멸망과 조선의 개국으로 이어지는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서로가 반대의 길을 걸어갔다. 세(世)와 대(代)의 비교표
공민왕초에 문과에 급제한 사렴(士廉)은 벼슬이 문하시랑(門下侍郞)을 거쳐 안렴사(按廉使)에 이르렀고, 청렴결백(淸廉潔白)하고 강직한 성품으로 바른 말 잘하기로 유명했으며 문장(文章)과 덕행(德行)으로 명망이 높았으나 고려가 망하자 절의(節義)를 지켜 충청도 청원군(淸原郡) 오창면(梧倉面) 모정리(慕亭里) 도산(陶山)에 은거하여 두문불출하고 학문으로 일생을 마쳤다. 그는 평소에 한양을 향하여 앉지도 않았으며 수차에 걸쳐 이성계(李成桂)가 좌사간(左司諫)의 벼슬을 주며 불렀으나 불응하며 "고려 신하로서 사직을 보존치 못한 천하의 죄인이 무슨 면목으로 지하에 돌아가서 선왕과 조상을 뵈이랴"고 탄식하였으며 임종때 자손들에게 "내가 죽거든 심산(深山)에 묻어주고 묘(墓)도 쓰지말고 비석(碑石)도 세우지 말며 후일에 누구의 묘라고 세상 사람들이 알지 못하도록 하여 달라"고 간곡히 부탁했다. 후일 숙종(肅宗)은 그의 충절을 백이(伯夷)와 숙제(叔齊)가 수양산(首陽山)에 들어가 고사리를 캐 먹으며 살다 죽었다는 충절(忠節)에 비유하여 <일편도산 만고수양(一片陶山萬古首陽)>이라고 극찬했다고 한다. 옛 친구로 이성계(李成桂)를 도와 조선창업에 공을 세운 사형(士衡)은 개국정사일등공신(開國定社一等功臣)으로 상락백부원군(上洛伯府院君)에 봉해지고 벼슬이 좌의정(左議政)으로 치사(致仕)할 때까지 한 번도 탄핵을 받은 일이 없었다. 학당공(學堂公) 휴(休)의 아들 익정(益精)과 익렴(益廉)의 형제는 학행으로 이름을 떨쳤고 효행이 뛰어나 부모상(父母喪)을 당하자 3년 동안이나 여막(廬幕)에서 시묘(侍墓)하여 나라에서 사액정려(賜額旌閭)를 하였으며, 익정의 손자 수녕(壽寧)은 성종(成宗)이 13세의 어린 나이로 왕위를 이어 받으니 대사간(大司諫)으로 글을 올려 아뢰기를 "학문을 한다는 것은 배가 물 위에 뜬것과 같으니 날마다 앞으로 나아가지 않으면 날마다 뒤로 물러가게 됩니다"하며 매일 경연(經筵)에 나와 시기를 놓치지 않고 공부에 열중하라고 자성(自省)을 촉구하였다. 세조(世祖)때 호조 좌랑(戶曹佐郞)으로 [경국대전(經國大典)]의 <이전(吏典)>을 수교한 뉴(紐)는 벼슬이 이조 참판(吏曹參判)에 이르렀고, 지평(持平)을 지내고 좌찬성(左 贊成)에 추증된 충갑(忠甲)은 윤 임(尹 任)과 같은 마을에 살았다는 이유로 을사사화(乙巳士禍) 때 유배(流配) 당했으며, 제갑(悌甲)은 임진왜란 때 원주 목사(原州牧使)로 싸움에서 전사하자 아들 시백(時伯)과 부인 이씨도 따라 순절하여 충절로 가문을 빛냈다. 연산군의 폭정 때 뛰어난 재치로 많은 문신들의 화를 면하게 했던 수동(壽童)은 상락부원군 사형(士衡)의 현손(玄孫)이며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적의 아들이다. 그는 일곱 살 때 시(詩)를 지어 사람들을 놀라게 했고 글씨에도 뛰어나 특히 예서(隸書)에 능했으며 무게가 있고 지혜가 많아 벼슬이 영의정(領議政)에 이르기까지 아무도 그를 시비하지 못했다. 수동의 아우가 중종반정(中宗反正)에 공을 세워 정국삼등공신(靖國三等功臣)으로 영안군(永安君)에 봉해진 수경(壽卿)이며, 명종조(明宗朝)의 명신 충갑(忠甲)의 아들 시민(時敏)은 심하(深河)의 전투에서 공을 세운 명장(名將) 응하(應河)와 함께 구국(救國)의 충절로 가문의 기백을 살린 인물이다. 1578년(선조 11) 무과에 급제한 시민은 훈련원 판관(訓鍊院判官)이 되었을 때 군사에 관한 일을 병조 판서(兵曹判書)에 건의한 것이 채택되지 않자 그 면전에서 군모를 벗어 땅에 짓밟고 벼슬을 사임한 기백으로 유명하다.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진주판관(晋州判官)으로, 죽은 목사(牧使)를 대신하여 성(城)을 구축하고 사천(泗川)·고성(固城)·진해(鎭海)·금산(金山) 등지의 싸움에 크게 이겼다. 임진왜란의 마지막 혈전인 진주성(晋州城)의 싸움에서 불과 3천 8백의 병력으로 7일간의 공방전을 별여 3만의 사상자를 내게 하 고 적을 격퇴했으나 소탕한 적병을 순찰하던 중 시체 속에 숨었던 적의 저격으로 이마에 총탄을 맞고 쓰러졌다. 시민은 적탄을 맞은 뒤에도 몸을 돌보지 않고 북쪽을 향해 눈물을 흘리다가 이 달에 마침내 숨을 거두자 진중에서는 적이 알까 해서 발상(發喪)을 하지 못하였다. 응하(應河)는 8척 장사로 소의 뒷다리 하나를 먹었다고 하며 활솜씨와 승마술이 뛰어났다. 1604년(선조 37) 무과에 급제하고 광해군(光海君) 때 도원수(都元帥) 강홍립(姜弘立)을 따라 좌영장(左營將)이 되어 만주 요동의 청(淸)의 세력을 제압하여 압록강을 건너 심하(深河)의 전투에서 3천 군사를 이끌고 적과 대전하다가 중영(中營)의 고지에 있던 강홍립이 적에게 투항하므로 작전이 무너져 혈전 끝에 패하자 응하는 말을 잃고 걸어서 큰 버드나무를 방패로 활을 쏘아 적병을 무더기로 죽였다. 화살이 다 떨어지자 칼로 적을 베며 적진을 향해 투항한 강홍립을 크게 꾸짖었다. 칼 한 자루로 사방에서 달려드는 오랑캐를 혼자 감당하다가 칼 마저 부러지자 빈주먹으로 육박하며 버티다가 뒤로 숨어들어 적병의 창에 맞아 쓰러졌다. 명(明)나라 신종(神宗)은 조서(詔書)로 응하를 요동백(遼東伯)에 봉하고 처자에게는 백금(白金)을 내리는 한편 차관(差官)을 보내어 제사를 지내게 했으며 나라에서는 용만(龍灣)에다 사당(祠堂)을 세우고 응하의 화상을 그려 충절을 기렸고 그의 행적과 만사(挽詞)를 기록하여 [충열록(忠烈錄)]을 간행하였다. 문신(文臣) 박정길(朴鼎吉)은 시(詩)를 짓기를 <백길의 심하(深河)와 만길의 산에는 지금까지 모래밭에 피 흔적이 얼룩졌네. 강 위에서 초혼(招魂)하지 말아라. 오랑캐 멸하지 않고는 돌아오지 않으리> 응하의 아우 응해(應海)도 희천 군수(熙川郡守)로 심하(深河)에 형과 함께 나설 것을 청했으나 응하의 만류로 가지못한 것을 애통해 하다가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정방산성(正方山城)에서 고군분투하다가 전세가 불리해지자 스스로 목을 찌르고 쓰러졌다가 비장의 도움으로 다시 소생하자 왕은 크게 기뻐하며 "그의 충절은 곧 그의 형 응하에 못지않다"고 칭찬하였다. 시양(時讓)은 현감(縣監) 인갑(仁甲)의 아들로 1605년(선조 38) 정시문과(庭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여러 벼슬을 거쳐 광해군(光海君) 때 전라도 도사(全羅道都事)에 올라 향시(鄕試)를 주관하며 시제(詩題)에 왕의 실정(失政)을 풍자한 문제를 출제했다고 하여 종성(鍾城)에 유배되었다. 좌의정(左議政) 질의 현손 청백리(淸白吏) 자점(自點) 은 광해군(光海君) 말년에 병조 좌랑(兵曹佐郞)으로 대북파(大北派)의 탄핵을 받아 삭직되었다가 인조반정(仁祖反正)에 공을 세워 정사일등공신(靖社一等功臣)으로 낙흥부원군(洛興府院君)에 봉해지고 영의정(領議政)에 올라 사은사(謝恩使)로 청(淸)나라를 다녀왔다. 그밖에 조선조에서 가문을 빛낸 인물로는 관찰사 자행(自行)의 손자 희수(希壽)가 김종직(金宗直)의 신원(伸寃)을 상소하고 그림과 글씨에 능했으며 특히 해서(楷書)에 일가(一家)를 이루었다. 중종조(中宗朝)에 저작(著作)으로 권신 김안로(金安老)의 비리를 논핵하다가 문의(文義)로 귀양갔던 노(魯)는 조광조(趙光祖)의 구제를 상소하여 더욱 명성을 떨쳤으며, 명종(明宗) 때 별시문과(別試文科)에 장원했던 홍도(弘度)는 호당(湖堂)에 뽑혀 사가독서(賜暇讀書) 중에서도 정치의 폐단을 강력히 간(諫)했고, 김일손(金馹孫)·박 은(朴 誾)과 함게 <삼대문장>으로 일컬어졌다. 한편 홍도(弘度)의 아들 첨(瞻 : 호당에 뽑히고 도승지를 역임)과 수(粹 : 호조 판서를 거쳐 영중추부사에 오름)도 가문의 문맥(文脈)을 이었고, 첨(瞻)의 아들 성립(誠立)은 유명한 허난설헌(許蘭雪軒)의 남편으로 임진왜란 때 31세의 젊은 나이로 장렬하게 순절하였다. 그외 고려가 망하자 경북 의성군(義城郡) 점곡면(點谷面) 사촌동(沙村洞)에 은거(隱居)했던 자첨(子瞻)의 증손 광수(光粹)가 연산군(燕山君)의 폭정을 개탄하여 벼슬의 뜻을 버리고 낙향하여 청빈한 학자로 여생을 마쳤으며, 한말에 와서는 병인양요(丙寅洋擾) 때 수도방위를 담당했던 선필(善弼)이 유명했다.
자주독립(自主獨立)을 평생의 소원으로 삼고 민권투쟁(民權鬪爭)의 선봉장이었던 백범(白凡) 구(九)는 안동 김씨(安東金氏)가 자랑하는 인물이다. 황해도 해주(海州)에서 순영(淳永)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15세에 학자 정문재(鄭文哉)에게 한학(漢學)을 배우고 1893년(고종 30) 동학(東學)에 입교하여 동학혁명(東學革命)을 지휘했으며 명성황후(明星皇后)의 원수를 갚기위해 일본군 중위(中尉)를 때려 죽인 죄로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고종(高宗)의 특사령으로 감형되어 복역중 탈옥하여 마곡사(麻谷寺)의 중이 되기도 하였다. 그후 임시정부 주석(主席)에 선임되어 민족분단의 평화통일을 위해 앞장서서 남북협상(南北協商)을 제창했고 한독당(韓獨黨) 당수로 있다가 경교장(京橋葬)에서 안두희(安斗熙)의 흉탄에 쓰러져 1949년 6월 74세의 생애를 마침으로 충효의열(忠孝義烈)의 가맥(家脈)을 이어온 명문 안동 김씨의 전통을 빛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안동 김씨(安東金氏)는 남한에 총 95,735가구, 398,240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안동(安東)은 경상북도 북동부에 위치한 지명으로 고대의 창녕국(昌寧國)이었는데 신라시대에는 고타야국(古陀倻國)·고창군(古昌郡)으로 불리웠고, 고려 태조(太祖)가 견 훤(甄 萱)과 싸워 전공을 세움으로써 안동부로 승격되었다. 그후 영가군(永嘉郡) 또는 복주(福州)로 개칭되었다가 1361년(공민왕 10) 안동대도호부(安東大都護府)로 승격되었다.
2008. 10.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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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안동 출신이라면 굳이 안동 3태사 문중이 아니드라도 그 지역을 대표하는 성씨의 유래를 대충 알고 있어야 하고, 세와 대의 존칭 정도는 알고 있어야 안동 출신으로 대접 받을 것 같습니다. 좋은 자료 올려주신 김종태님께 거듭 거듭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