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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 일본 불교사
4. 가마쿠라[鎌倉: 1185~1333]시대 불교
가마쿠라 시대는 새롭게 등장한 불교, 이른바 가마쿠라 신불교로 인해 일본 불교의 성격을 결정지은 시대이다. 나라나 헤이안 시대에는 한국이나 중국불교를 그대로 받아들였다면, 가마쿠라 시대 불교는 기존의 불교에서 벗어나 본격적으로 특성화가 이루어진 시기이다. 중국이나 한국의 불교를 배우고 익히던 시대에서 벗어나, 일본에 맞는 일본 불교로 탈바꿈한 가마쿠라 신불교는 오늘날 일본 불교의 주류를 형성하게 되었다.
헤이안 시대 말기인 12세기 후반은 호겐의 난[保元の乱], 헤이지의 난[平治の乱]등 전란으로 정치적, 사회적으로 혼란한 시기였다. 이른바 고대왕조가 쇠퇴하고 신흥무사계급이 새로이 등장, 바쿠후[幕府]의 원형이라 할 수 있는 무가 정권을 세웠다. 일본 중세사는 이들 무사정권이라는 독특한 정치체제를 구축되어, 조정朝廷과 막부幕府가 나란히 정치의 중심이 된 시기이다. 한 마디로 기존의 천황과 귀족계급과는 분리된 일종의 봉건封建 정치가 성립된 시대다.
막부幕府는 병사들이 야영하던 텐트를 일컫는데,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원뢰조源頼朝]가 처음으로 가마쿠라에 막부[鎌倉幕府]를 설치해 이원적 통치 체재를 시작하였다. 그러나 1199년 초대 쇼군[將軍]인 요리토모가 사망하자, 실권은 그의 처가인 호조 씨[北条氏]에게 넘어가게 되어 미나모토씨 집안은 3대 만에 끝나고 만다. 북조씨北条氏는 130여 년간 유지되며 가마쿠라 시대를 이끌며 무사계급의 시대를 연 것이다. 이때부터 일본은 무사계급이 통치하게 되었는데, 1180년 가마쿠라[鎌倉]를 시작으로 무로마찌[室町], 에도[江戸] 시대를 거쳐, 1868년 메이지유신[明治維新]에 의해 왕정복고가 이루어질 때까지 계속 된다.
1) 대승불교의 산물, 말법사상末法思想
헤이안 시대 중기는 공령公領에 의해 조정朝廷이나 영주領主 등의 통제 하에 있던 토지의 사령화私領化, 즉 사원寺院이나 신사神社 또는 귀족들의 보호 아래 토지를 사유화私有化하는 장원莊園이 출현하였다. 이 시기는 귀족과 지방 호족 세력이 장원을 확대하면서 성장하였으므로 자연스레 지방호족과 무사계급의 쟁투가 본격화된다.
불교계 승려들은 지원이 끊긴 국가로부터 이동 자연스레 귀족들의 후원에 의존하게 되었다. 또, 불교 사원들은 귀족으로부터 기부 받은 토지를 지키기 위해 승병僧兵을 두게 되었다. 그들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서 젊은 승려들과 경작자들로 이루어진 무사단武士團을 조직하게 된 것이다. 그로 인해 각 종파간의 대립은 소속 승병 조직 간의 피비린내 나는 혈전으로 비화飛火되기도 하였다.
11세기 후반으로 접어들면서 일본의 정치형태는 후지와라가문의 섭관체제가 붕괴되고 이른바 원정(院政)체제가 새롭게 등장한다. 1066년 후지와라 가문의 여인을 어머니로 두지 않는 고산조(後三条)천황이 즉위하고, 천황은 후지와라씨를 견제하기 위해 장원의 정리를 단행하였다. 그 뒤를 이은 시라카와(白河) 천황은 즉위하자마자 어린 황자에게 황위를 넘기고 상황(上皇)으로서 실권을 장악한다. 상황이 살았던 곳을 원(院)이라고 하였기 때문에 당시의 정치를 원정(院政)이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중략)
또한 이 무렵부터 나라(奈良)의 거대사찰 코후쿠지(興福寺)나 히에이잔(比叡山) 엔랴쿠지(延暦寺) 등의 유력사원들은 많은 승병을 보유한다. 이들 승병들은 사원의 요구를 관철시키기 위해 귀족들의 신앙이 두텁다는 것을 방패삼아 신목(神木)이나 신여(神輿)를 메고 수도로 난입하여 난동을 부리기도 하였다. 이에 대해 원은 겐지(源氏) · 헤이시(平氏) 등의 무사들에게 황실의 경비를 맡기게 되고, 이러한 과정에서 점차 무사들이 중앙으로 진출하게 된다.
이와 같은 섭관체제의 붕괴와 원정의 부패, 무사계급의 중앙 진출로 인한 귀족독점 체제의 와해 등으로 정치적 불안은 더욱 가중되었다. 거기에 잦은 기근과 전염병의 창궐 등이 더해져 귀족사회 뿐만 아니라 서민들에 이르기까지 극도의 사회불안이 이어진다. ([연재] 김춘호의 <일본 불교문화 강좌> 16. 정토에 대한 동경과 말법사상의 유행.)
헤이안 시대 중기 말기를 지나면서 호겐, 헤이지의 난 등 큰 전란을 겪는다. 혼란한 시대였을 뿐만 아니라 무사계급의 중앙 진출로 인한 귀족독점 체제의 와해와 더불어 왕을 대신하여 섭정摂政 및 관백関白이 주도하던 섭관정치攝關政治 체제의 붕괴, 그리고 원정院政의 부패 등 정치적 불안은 더욱 가중되었다. 더구나 폭풍우와 가뭄 등 유래 없는 흉작이 이어지고, 전염병의 창궐 등 역병이 겹치면서 귀족사회 뿐 아니라 서민들에 이르기까지 극도의 사회불안을 겪는다.
그러나 민중들은 이러한 혼란이 정치체제나 사회기구 때문이 아니고, 다름 아닌 부처님 사후 펼쳐진 삼시三時 중 정법正法, 상법像法에 이은 말법末法 시대가 도래到來했기 때문이라고 믿었다. 불교의 본원적本源的인 가르침은 따르지 않고 말법 시대의 비극을 극복하는 한 방법으로 종교에 매달리게 된다. 그중 아미타불의 이름을 부르기만 하면 정토淨土에 태어난다는 단순한 신앙信仰운동이 민중의 요구에 부응하며 대중적 호응을 얻는다.
末法思想, 選擇思想이라고 하는 점은 法然이나 日蓮이나 공통이지만, 전자가 個人의 救濟를 구하여 內省的이 된데 대하여, 후자는 國家主義的이고 政治와 宗敎와의 一致를 주장하고 또한 天災地變 등을 神들의 재앙이라고 하여 샤머니즘에 시종일관한 것이 對照的이다. 그러나 佛敎의 受容方法이라는 점에서 본다면, 모두다 本源的인 것을 구하려고 하지는 않고, 자기가 당면한 요구에 응하는 것만을 취하였고 佛敎의 發展史 전체에 대하여 看破하려고 하지는 않았다. 더구나 이 念佛(아미타 信仰)과 題目(法華信仰)의 두 신앙은 그 이후의 日本佛敎중에서 커다란 비중을 가지고 日本佛敎의 동향을 결정하는데 있어서 지극히 중대한 것이 되었다. (도변조굉渡辺照宏(와다나베 쇼오꼬오) 저著, 이영자李永子 역譯,『일본불교日本佛敎』 pp. 70~71.)
인도불교가 인도 서북쪽으로 전해지면서 그리스나 페르시아 문화의 영향으로 다신교적 성격을 띠게 된다. 많은 부처와 보살들이 생겨나게 되었는데, 석가모니 부처 외에도 동서남북 상하를 담당하는 부처들이 따로 있었고, 각각의 부처에는 거기에 따른 각각의 불국토가 따로 존재하였다. 그리고 각각의 불국토는 그들 나름의 특색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상국理想國이라하여 ‘정토淨土’라고 통칭하여 부른다.
그중 석가모니에게 소속한 불국토는 우리가 사는 사바세계娑婆世界다. 아미타불이 사는 세상은 극락세계極樂世界인데 반해, 석가모니불이 교화하는 인간세계는 번뇌와 괴로움이 넘쳐나는 사바세계가 된 것이다. 아미타불이 사는 아미타 정토는 즐거움만이 가득한 극락정토인데 반해, 우리가 사는 사바세계는 괴로움만 가득 차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소위 극락정토라는 것은 오로지 대승불교大乘佛敎의 산물인 것이다.
급변하는 사회 변화 속에서 아미타불의 명호를 부르기만 하면 정토왕생淨土往生 한다는 단순한 신앙운동이 급속히 퍼져나간다. 이들은 교세를 넓히다가 기성종파의 반감을 사기도 하고 박해를 받기도 하였으나, 난세를 살아야 했던 민중의 마음을 어루만지는 희망적希望的 기대의 도도한 물결을 거스를 수는 없었다. 가마쿠라 시대는 말법사상末法思想을 배경으로 일어난 정토사상淨土思想이 일본 민중 속에 뿌리 내리게 된다.
2) 관승官僧에서 둔세승遁世僧으로
헤이안 시대 말기는 석가모니가 설한 가르침을 추구하기보다는 아미타불阿彌陀佛에 귀의하여 극락왕생極樂往生하려는 아미타신앙이 주류를 이룬다. 이를 배경으로 호넨[法然, 1133~1212], 신란[親鸞, 1173~1262] 그리고 시종時宗의 개조인 잇펜[一遍, 1239~1289] 등이 정토신앙淨土信仰을 설파하여 일본에 정토종淨土宗을 뿌리내리게 한다. 그런데 주목할 것은 이들 신불교의 조사들은 모두 한때 히에이산의 학승이었다는 점이다.
즉, 젊은 시절의 호넨[法然], 신란[親鸞], 묘안 에이사이[明菴榮西, 1141~1215], 기겐 도겐[希玄道元, 1200~1253], 니치렌[日蓮, 1222~1282] 등은 연력사延歷寺에서 사이초의 천태종을 배웠고, 묘에[明惠, 1173~1232]는 교토에 있는 진고지[神護寺]에서, 에이존[예존叡尊, 1201~1290]은 교토의 다이고지[제호사醍醐寺]에서 구카이의 진언종을 공부하였다. 이들은 기존 종파의 가르침에 머무르지 않고 시대 요구에 따라 새로운 불교로의 활로를 모색하였다.
이렇게 해서 탄생한 것이 정토교 계통에서 호넨에 의한 정토종, 그 제자 신란에 의한 정토진종(淨土眞宗) 또는 일향종(一向宗), 잇펜(一遍)에 의한 시종(時宗)이었다. 그리고 선종 계통에서는 에사이가 임제종(臨濟宗)을 도겐이 조동종을 각각 중국에서 수입했다. 또 니치렌(日蓮)은 법화종 또는 일련종을 개종하였다. 이들 여섯 가지의 새 종파가 헤이안시대 말에서 가마쿠라시대에 잇달아 생겨난다. (중략) 보통 이들 종파를 가마쿠라 신불교라고 부르며, 일본에서의 종교개혁이라고 할 수 있다. (천기용지川崎庸之·입원일남笠原一男 지음, 계환스님 옮김,『일본불교사』p. 173.)
헤이안 시대 말기는 국가와 천황가를 위해 일하는 관승官僧 이외에 국가의 통제에서 벗어나 있던 사도승私度僧이나 히지리[聖], 그리고 둔세승遁世僧 등이 나타난다. 국가불교 시스템이 느슨해지면서 나라의 허락 없이 출가한 사도승이나, 고난에 처한 민중들을 위한 사회복지사업을 벌이는 히지리, 소위 성인聖人으로 불리는 숭려들이 활동하고 있었다. 또 불교 본연의 자세인 개인적 수행이나 민간구제활동에 전념하는 둔세승 들이 존재하였다.
둔세승들 중에는 초기에는 관승교단에 몸담았다가 천황의 양재기복에 머무는 관승을 탈피하여 일종의 재출가再出家한 스님들이 다수를 차지했다. 후에는 처음부터 수행과 전법을 위해 관승에 소속되지 않은 승려들도 생기는데, 후기에 등장하는 잇펜[一遍]의 경우에는 아예 처음부터 ‘둔세승 교단’으로 출가한 경우이다. 이들은 관승으로서의 의무와 책임에서 벋어나 있었는데, 관승은 백의白衣를 입었고, 둔세승들은 흑의黑衣를 입었다.
묘에[明惠]나 에이사이[榮西], 도겐[道元] 등은 선종 계통의 둔세승 들이었다. 한때 천태종에 몸담았던 이들은 선종禪宗을 들여와 임제종臨濟宗과 조동종曹洞宗을 열었다. 호넨의 정토종, 신란의 정토진종淨土眞宗, 잇펜의 시종時宗, 그리고 말기에는 니치렌[日蓮]이 니치렌종[日蓮宗]을 세우는 등, 불교교학이 다양화가 이루어진다. 새로운 교단이 만들어지고 새로운 종파가 불교계의 주류를 형성하게 되었다. 이들이 가마쿠라 신불교[鎌倉新佛敎]의 주역들이다.
3) 호넨[法然]의 정토종淨土宗
둔세승의 선구가 된 인물은 호넨[法然, 1133~1212]이었다. 호넨은 9세 때 지방관이었던 아버지가 죽자,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불도로 귀의, 승려였던 외삼촌 밑에서 자란다. 15세(1147)에 천태종의 총본산 연력사로 들어가 좌주 교겐[行玄]을 계사로 연력사 소속 관승이 된다. 18세 때에는 둔세승들의 수행중심지였던 히에이산 서탑西塔의 북쪽 골짜기 구로타니[黒谷]로 들어가 수행한다. 이곳은 연력사의 별소別所인 청룡사青竜寺로 그는 학습과 수행, 염불에 전념하며 6년을 보낸다.
24세(1156) 호넨은 연력사를 떠나 교토와 나라 등을 전전하며 여러 고승들을 만나 수학한다. 당시 일본 천태종은 중국 천태종에다 밀교密敎, 선禪, 계戒 등이 혼합된 종합불교 성격의 천태밀교였다. 후대에는 정토신앙을 포함, 거의 모든 불교를 종합하고자 하였는데, 호넨은 이러한 사이초의 천태종에 만족하지 못하고, 불교계 석학들을 찾아다니며 구도행각을 벌였던 것이다.
그러던 그는 1175년(43세)에 《관무량수경소(觀無量壽經疏)》에 있는 “일심으로 오롯이 마타의 명호를 염불한다”는 문장을 읽고 커다란 감명과 종교적 회심을 경험한다. 절대적 존재인 아미타불에 귀의하고, 오로지 염불만이 아마타불에 의해 선택된 극락왕생의 길이라는 확신에 이른 것이다. 즉 ‘전수염불(專修念佛)’을 통한 극락왕생의 가르침이야 말로, 자신과 같은 범부에게 가장 적합한 것임을 자각한 것이다.
수행과 깨달음이 사라진 암흑의 시대인 말세, 그 시대를 살아가는 자신과 같은 범부에게 염불은 극락왕생을 위한 유일한 길이라고 확신한 그는 교토의 히가시야마 요시미즈(東山吉水)로 이주하여 중생구제에 힘쓴다. ([연재] 김춘호의 <일본 불교문화 강좌> 17. 가마쿠라 신불교(鎌倉新佛敎) ① 염불의 성자 호넨(法然)의 생애와 사상.)
당시 자신과 민중에게 적합한 염불 하나 만을 선택해 집중적으로 전수專修하고자 하였다. 오직 ‘나무아미타불’을 부르는 전수염불專修念佛이 그것으로, 말세를 사는 범부들에게 가장 쉬운 길은 바로 염불법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이로써 그는 중세 신불교의 선구자로 우뚝 섰을 뿐만 아니라 정토종의 개조가 된다. 그러나 오직 ‘나무아미타불’의 칭명염불稱名念佛만을 가르치는 호넨의 가르침은 다른 종파들에 의해 탄압을 받게 된다.
1200년 5월에는 막부의 전수염불 금지령이 발포되었고, 1204년 10월에는 엔랴쿠지(延暦寺) 승도들의 전수염불 비난이 격해지자, 제자들의 행실을 바로잡겠다는 일종의 서약서인 칠개조제계(七箇条制誡)을 작성하여 엔랴쿠지로 보내기도 한다. 또한 1206년 2월에는 코후쿠지(興福寺) 승도들의 소로 염불종의 활동이 금지되고, 호넨문하의 교쿠우(行空), 준사이(遵西) 등이 체포되기도 하였으며, 이듬해 3월에는 75세의 호넨이 토사(土佐, 지금의 코치겐)로 유배되었다가 같은 해 12월에 풀려나기도 한다. ([연재] 김춘호의 <일본 불교문화 강좌> 17. 가마쿠라 신불교(鎌倉新佛敎) ① 염불의 성자 호넨(法然)의 생애와 사상.)
이러한 역경 속에서도 호넨의 가르침은 대중적 인기를 얻으며 급속히 전파되었고, 교토의 유력귀족 쿠조가네자네[九条兼実, 1149~1207]의 귀의를 계기로 상류 귀족사회에도 급속도로 퍼져나간다. 이로써 그는 중세 신불교의 선구자로 우뚝 섰을 뿐만 아니라 정토종의 개조가 된다. 세력이 커지면서 전국시대에는 자치조직인 잇코 잇키[一向一揆]를 조직,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 1634~1682]와 싸우기도 하였다.
4) 신란[親鸞]의 정토진종淨土眞宗과 잇펜[一遍]의 시종時宗
신란[親鸞, 1173~1262]은 헤이안 시대 말기인 승안承安 3년인 1173년 태어난다. 당시는 겐지[源氏]와 헤이시[平氏] 집안 간의 패권 전쟁 등 전란이 한창이던 때로, 신란은 4세 때 아버지를 잃고, 8세 때는 어머니마저 세상을 떠나자, 대 기근[養和の飢饉]이 발생한 1181년 오로지 살아남기 위해 출가를 하게 된다. 지엔[慈圓]이 검교[検校, 신사와 절의 총무를 감독하는 역]로 있던 히에이이산 요코가와[横川]의 상행당常行堂에서 사무나 염불수행을 하며 20여년을 보낸다.
그러나 20여년의 히에이잔 수행에도 불구하고 자력수행의 한계를 느낀 신란은 드디어 하산을 결심하고, 그의 일생을 바꾼 중대 사건을 경험한다. 1201년 29세의 나이로 히에이잔(比叡山)에서 하산한 그는 교토 시내의 록카쿠도(六角堂)를 찾아 후세의 구제를 구하며 100일 기도에 들어간다. 95일째 되던 날 밤, 쇼토쿠(聖徳)태자로 화현한 구세관음으로부터 “수행자가 전생의 인연으로 만약에 여인을 범하게 된다면, 내 그대의 여인이 되어 드리리오. 그리고 편안한 일생을 보내게 하고, 죽음에 이르러서는 극락에서 태어나게 하리다(行者宿報設女犯. 我成玉女身被犯. 一生之間能荘厳. 臨終引導生極楽.)”라는 계시를 받는다. 그리고 그 계시의 깊은 뜻을 알기 위해 히가시야마(東山) 요시미즈(吉水)의 호넨(法然)을 찾아가게 되고, 전수염불에 대한 호넨의 가르침에 매료되어 문하로 들어가게 된 것이다. ([연재] 김춘호의 <일본 불교문화 강좌> 18. 가마쿠라신불교(鎌倉新佛教) ② 비승비속의 행자 신란.)
그러나 칭명염불稱名念佛만을 가르치는 호넨의 가르침은 다른 종파들에 의해 탄압을 받게 되고, 염불승들의 풍기문제 등으로 전수염불專修念佛 금지령이 내려지면서 신란 또한 체포되어 에치고[越後, 지금의 니가타현]로 유배를 당하게 된다. 유배시절 신란은 호족의 딸 에신니[惠善尼]와 결혼을 하게 되는데, 승적을 박탈당한 속인의 신분이었지만, 당시 대처帶妻는 가히 혁명적인 일이었다. 신란은 룻카쿠도[육각당六角堂]에서의 꿈, ‘유메오츠게[夢告]’를 근거로, 이때부터 승려가 결혼해도 좋다는 주장을 폈다. 지금 일본에서는 익숙하지만 승려의 결혼은 그로부터 비롯되었다고 하겠다.
신란의 생애와 사상의 특징이라 할 수 있는 것이 계율 경시라는 부분이다. 신란 스스로 에신니와 결혼하여 4남 3녀를 두기도 하였는데, 이는 물론 록카쿠도의 계시를 근거로 한다. 그러나 엄연히 출가시에 계단에서 불음계(不淫戒)의 호지를 맹세한 승려로서 대처는 파계행위임이 분명하다. 그런데 신란은 ‘비승비속(非僧非俗, 승려도 아니고 속인도 아님)’을 주장하며 결혼생활을 하면서도 승려로서의 삶을 살았다.
현재 일본불교의 가장 큰 특징의 하나가 승려들의 결혼이다. 즉 신란과 같이 결혼한 승려들이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메이지유신 이후 다른 종파들에서도 신란의 입장을 수용한 결과인데, 어떻든 육식대처로 대표되는 일본불교의 계율 경시적 경향은 신란으로 부터 비롯된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연재] 김춘호의 <일본 불교문화 강좌> 18. 가마쿠라신불교(鎌倉新佛教) ② 비승비속의 행자 신란.)
신란의 사상은 이른바 ‘악인정기설惡人正機說’로 대표된다. 선인善人도 극락왕생하는데 하물며 악인惡人이 왕생 할 수 없겠는가? 라는 언뜻 모순된 주장을 폈는데, 말인즉슨 선인은 스스로 복을 짓고 수행할 수 있기 때문에 스스로의 힘으로 성불할 수 있지만, 악인은 불법의 힘이 아니고서는 깨달음을 얻을 수 없고 번뇌를 떨쳐내지도 못하기 때문에 아미타불에게 구제를 받아야 한다는 뜻이다.
아미타불이 구제하고자하는 중생은 선업조차도 지을 수 없는 그야말로 찐 악인이라는 것이다. 그야말로 아미타불의 자비에 의해서만 왕생이 이루어진다는 아미타불의 본원에 집중한 것이다. 악인이라도 구원받을 수 있다는 악인정기설은 원래 호넨의 가르침이었지만, 신란이 이를 계승 설파說破하고 심화深化시켰다고 해야 할 것이다. 신란은 비승비속非僧非俗의 행자로 정토종으로부터 독립하여 새로운 종파를 세우는데, 이것이 오늘날 일본 최대의 종파가 된 정토진종淨土眞宗이다.
현재 호넨을 종조로 모시는 정토종은 일본 전역에 8천여 개의 사찰과 600만 명의 신자를 자랑하고 있으며, 호넨의 제자 신란을 종조로 모시는 정토진종의 경우 약 2만개의 사찰과 약 1333만 6천의 신자수를 자랑한다. 정토진종의 규모가 우리나라의 모든 불교종파와 종단을 합한 교세와 맞먹을 정도인 셈이다. 아울러 이들 양종을 합하면, 전체 일본불교의 약 60%정도를 차지한다. ( [연재] 김춘호의 <일본 불교문화 강좌> 17. 가마쿠라 신불교(鎌倉新佛敎) ① 염불의 성자 호넨(法然)의 생애와 사상.)
그 외 시종時宗은 잇펜[一遍, 1239~1289]을 개조로 하는 정토계宗土系 종파로 춤추면서 염불하기[오도리넨부쓰おどりねんぶつ, 踊り念仏]가 특징이다. 시종時宗이라는 종파 이름은 나중에 붙여지는 것이고, 잇펜 당시에는 시중時衆이라고 불렸다. 가마쿠라 신불교의 조사들 중에서 가장 나중에 등장한다. 한편 히에이산에서 배운 료닌[良忍, 1072~1132]은 융통염불종融通念仏宗을 세워 개조가 되는데, 정토교와 밀교의 특징을 한데 섞어 놓은 것 같은 교리가 특징이다.
5) 니치렌[日蓮]의 니치렌종[日蓮宗]
가마쿠라 불교의 최후를 장식한 것은 니치렌종[日蓮宗]이었다. 니치렌[日蓮: 1222~1282]은 1222년 아와노쿠니 나가사군[安房国長狭郡, 현 치바켄 카모가와시]에서 어부의 아들로 태어나, 12세 무렵에 인근 기요미즈야마[清水山] 세이쵸지[淸澄寺]로 출가하였다. 당시 청징사淸澄寺는 천태종 사찰로 법화경 신앙을 비롯한 정토, 밀교 등을 겸수하는 도량이었다고 한다.
그는 청징사 도젠[道善]에게서 불법을 배우고, 4년 후에 정식 승려가 되어 렌쵸[蓮長]라는 법명을 얻었다. 니치렌은 1242년 청징사를 떠나 교토의 히에이산으로 들어가는데, 처음에는 진언밀교眞言密敎를 공부하고 이어 천태天台를 배운다. 매우 열정적이고 투쟁적인 그는 가마쿠라, 교토, 히에이산 등에서 밀교, 천태종, 선종, 염불종 등 다양한 종파를 공부하는데, 깨달음을 통해 분파된 불교 종파들을 하나로 통합할 수 있는 궁극적인 가르침을 얻고자 연구 노력하였다.
당시는 내란과 더불어 가마쿠라 시대 후기는 몽고 내습, 기아와 역병 등 다양한 위협으로 인해 민중들은 도탄에 빠져 있었다. 이에 승려 니치렌은 이를 극복하는 일환一環으로『입정안국론立正安国論』을 짓게 되는데, 이를 막부의 실권자인 호조 도키요리[北条時頼, 1227~1263]에게 보낸다. 그는 여기서 다른 종파들을 모조리 없애고, 자신의 교리를 국교로 받아들일 것을 천명闡明하였다. 이는 한편으로는 막부의 정책에 반기反旗를 드는 행위였고, 무엇보다도 기성 불교계를 자극하는 일방적인 주장이자 도발挑發이었다. 이를 기화로 그는 유배를 가게 된다.
법화경 신앙자 니치렌의 눈에는 그러한 천재지변의 근본적인 원인은 당시 일본이 정토신앙이라는 사법(邪法)에 물들어 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그는 《입정안국론(立正安國論)》을 저술하여 정토신앙을 버리고 법화경에 귀의하여 현실세계를 불국토로 만들어야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더 나아가 만약 위정자들이 법화경에 귀의하지 않는다면 국내에서는 내란이 일어나고 외국의 침략이 있을 것이라고 예언한다. 즉, 니치렌은 정토교에 대한 강한 배척은 물론 위정자들의 종교적 책임을 함께 묻는 것이었다. (연재] 김춘호의 <일본 불교문화 강좌> 21. 가마쿠라신불교(鎌倉新仏教) ⑤ 법화경의 전도사 니치렌(日蓮).)
1272년 9월에는 니치렌을 체포하여, 사형 선고를 내리고, 참수하기 위해 가마쿠라 타츠노구치[龍ノ口]로 끌고 간다. 일설에 의하면 니치렌을 감옥에서 끌고 나와 참수하려고 하는 순간, 에노시마[江の島]에서 보름달 같은 빛이 날아와 망나니의 눈을 멀게 하였을 뿐 아니라, 공포에 질려 쓰러지게 되면서, 참수형이 중단되었다고 한다. 기록에는 1271년 니치렌은 체포되어 사형 선고를 받았으나, 마지막 순간 감형되어 사도 섬(현 니이가타켄 사도[新潟県佐渡])에 유배된 걸로 되어 있다.
믿기 어려운 부분도 있지만 어쨌든 그 형장刑場 터에 세워진 절이 바로 가마쿠라 류코지[용구사龍口寺]다. 절에는 니치렌이 잡혀와 갇혀 있었다는 지하 감옥이 아직 도 남아있다. (문명기행, 가마쿠라 에노시마 [江の島] & 류코지 [용구사龍口寺] 편 참조)
니치렌의 독특한 주장과 타협할 줄 모르는 성격으로 한때 막부幕府의 박해를 받기도 하였지만, 일본의 신神들을 불교의 수호신으로 존중하는 등, 민족주의적인 색채로 인해 가장 일본적인 불교종파로 발전하였다. 신자 조직인 소카갓카이[創價學會]나 정치조직인 공명당公明黨 등 전후 일본에 출현한 신흥 종교들은 대부분 일련종 내지는 법화신앙 계통에서 파생한 것들이다.
6) 선종禪宗의 출현과 신불교 교단의 성립
이 시기에 가장 주목할 것은 선불교가 중국으로부터 유입되어 새로운 바람을 일으킨다는 것이다. 일본 중세에는 선불교와 함께 다도茶道, 서도書道, 하이쿠[배구俳句] 등이 유행하였는데, 선불교는 일본 문화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며 가마쿠라와 무로마치 시대를 통하여 급성장하였다. 정토교의 성행과 더불어 선종 또한 번창하여 일본 불교의 주류를 차지하는데, 오늘날 천태종과 진언종을 누르고 일본 불교의 대종을 이루고 있다.
일본의 임제선은 이입된 당초부터, 송의 간화선의 계통을 이었기 때문에, 그 문화성이 대단히 높아, 가마쿠라나 무로마치의 무사계급에 크게 환영받았다. 그와 동시에, 원구(元寇)의 일본 침략이라는 국난에 직면해있던 가마쿠라막부의 쇼군들은, 엄격한 좌선수행에 의해 담력을 단련하고, 깨달음에 의해 망상을 불식하며, 무심(無心)하며 자유로운 삶의 방식을 취함으로써 ‘임제 쇼군’이라고 평가되는 강한 임제선을 스스로 실천했던 것이다. (니시무라 에신(西村惠信), 일본 하나조노대학 명예교수, 선문화연구소소장「일본 간화선의 전통과 변용(日本看話禪伝統と変容)」)
혼란에 빠진 민중을 구하고자 선택한 것이 정토종은 염불수행이고, 선종禪宗 또한 선 하나만을 선택하고 전수하였다. 문제는 염불 하나만을 선택하면 다른 모든 수행법은 배제되어 버린다는 점이다. 수행자의 입장에서는 염불 수행이 참선을 도울 수도 있고, 참선이 염불을 도울 수도 있는데, 그 선택권이 사라져 버린다는 것이다. 이는 필연적으로 종합불교에서 종파불교의 방향으로 나아가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중세만 하더라도 종파와 종파는 서로 넘나들며 하나의 불교적 회통성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본말사제도는 일차적으로 종파성을 분명하게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구조다. 덕분에 근세에 각 종단은 종학을 구현하는 데에 힘을 얻게 되었다. 그러나 이 이면에는 본사 중심의 운영을 통한 정치경제적 차원의 규제 기능이 숨어 있었다. 1632년 막부에 의한 본말장(本末帳)이 작성되었으며, 이에 기반한 막부 차원의 종무행정을 위해 1635년에는 종교행정을 위한 기관인 사사부교(寺社奉行)를 설치했다. 이로써 종교에 대한 국가의 관리 가 일차적으로 확립되었다. 국가는 결국 종교를 자신의 계급 아래 둠으로써 민심을 통제, 이용하는 데에 효과를 거두기도 한다. 동서고금에서 이러한 예는 수없이 발견된다. 종교법인을 통해 국가가 종교를 승인하는 현대사회에서도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다. 결국 국가의 전횡에 대한 비판적 시각은 거세된다. (원영상, 일본불교, 토착화로 민중 속에 뿌리내리다 / 불교평론 입력 2023.10.31 05:16)
본의 아니게 통불교로 불리는 한국불교처럼 필요에 따른 다이내믹한 융합적融合的 겸수兼修 수행이 어려워진다는 것이다. 더욱이 각기 종파들은 자기종파 절대주의에 빠져, 새로운 미래를 개척해 나가기 위해 필요한 융합, 퓨전을 할 수 없게 되었다. 종파의 순수성을 지킬 수는 있었지만, 관습에 젖어 새로운 길을 찾는데 소홀할 수밖에 없는 구조로 고착화 된다. 어쨌든 일본 불교의 특징은 모두 가마쿠라 시대 이후 출현한 신불교 교단에서 유래되었다는 것이다. 선종에 대해서는 다음 <일본 선종사>에서 좀 더 자세히 다루겠다.
중세 신불교를 흔히 불법승 삼보의 분화라고 본다. 실제로 종교 의 구성 원리이기도 한 삼보는 어느 한쪽 면만을 강조할 수는 없다. 그렇지만 핵심 되는 입장에서 보면, 신불교의 분화에 대한 설명이 가능하다. 불보는 정토종을 비롯한 신란(親鸞, 1173~1262)의 정토 진종(淨土眞宗), 잇펜(一遍, 1239~1289)의 시종(時宗)이다. 정토계 경전에 의거한 아미타불을 신앙의 대상으로 모시는 종파다. 법보는 니치렌(日蓮, 1222~1282)의 일련종으로 볼 수 있다. 니치렌은 ‘나무 묘법연화경’을 외는 제목(題目), 《법화경》의 적문(迹門)과 본문(本門) 가운데 후자에 기반한 본문 만다라, 그리고 계단(戒壇)을 3대 비법으로 삼았다. 승보는 에사이(榮西, 1141~1215)의 임제종, 도겐 (道元, 1200~1253)의 조동종이다. 이들은 수행 본위의 선종을 확립 함으로써 말법 시대를 극복하고자 했다. 특히 도겐의 지관타좌(只 管打坐)는 오매일여의 수행으로써 목전의 불성 현현을 목표로 삼은 것이다. 철두철미한 본각에 의거한 수행론이다. (원영상, 일본불교, 토착화로 민중 속에 뿌리내리다 / 불교평론 입력 2023.10.31 05:16)
7) 불국토 가마쿠라鎌倉
가마쿠라는 일본 혼슈[本州] 가나가와 현[神奈川縣]에 있는 도시다. 원래 한적하고 조그만 어촌 마을이었으나, 1180년 미나모토 씨[源氏]의 근거지가 되면서 발전하기 시작하였다. 가마쿠라 막부가 설치 후 300여 년 동안 일본 제2의 수도라는 정치적 지위를 누렸다. 끊임없는 내전, 해일, 화재 등으로 인해 쇠퇴하기도 하였으나, 에도 막부시대 궁궐과 절, 귀족저택들이 건설되면서 관광 중심지가 되었다.
유적으로는 청동제의 국보인 가마쿠라 대불[鎌倉大佛]을 비롯해 겐초지[建長寺], 엔가쿠지[円覺寺], 등 수많은 절이 있다. 가마쿠라 쓰루가오카하치만궁은 11세기에 건립된 신사이며, 1828년에 전통적인 에도 건축 양식으로 재건되었다. 유이가하마와 시치리가하마 해변도 관광지로 알려져 있다. (문명文明 기행, 일본 日本 기행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