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군 수송선의 선실은 마치 영화 빠비용에 나오는 죄수 호송선 같았다. 누에가 고치를 치기 위해 시렁 위에 누운 것처럼 병사들은 3층짜리 철 침대 위에 올라가서 잠을 잤다. 코를 찌르는 바다냄새, 병사들의 땀 냄새가 뒤죽박죽이었지만 전쟁터로 가는 길이었기에 불평스런 마음이 전혀 없었다.
수송선에서의 하루는 눈을 뜨자마자 줄을 서서 기다리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끼니때마다 배의 좁은 복도를 따라 식당 앞에서부터 줄줄이 늘어서야 했다. 1,000명이 좁다란 선내 식당에서 식사를 하려니까 밥 한 끼를 먹으려면 두 시간을 서서 기다려야 했다. 아침에 눈을 뜨면 새벽의 서울역 대합실처럼 썰렁한 분위기 속에서 쇳덩이 통로에 줄지어 서는 것을 시작으로 하루 일과를 시작해서 밥을 타 먹느라고 하루에 여섯 시간을 보내는 것이다. 아침 먹고 조금 있다가 줄을 서서 점심, 점심 먹고 조금 있다가 또 줄을 서서 저녁을 먹으면 배 안에서의 하루의 일과가 끝나는 것이다. 줄을 서는 것이 귀찮아서 한 끼쯤 밥 먹는 일을 거를 수도 있는 일이지만 그렇다고 특별히 다른 할 일이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노는 셈치고 줄을 서서 노닥거리는 것이다. 줄을 서는 것은 식사 때만이 아니다. 아침이면 화장실 앞에도 병사들이 줄줄이 늘어서서 그 끝이 어디인지를 알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잠이 덜 깬 상태로 밥 먹는 줄인 줄 알고 서서 무턱대고 아무데나 줄을 서서 한참을 기다리다 보면 화장실 가는 줄이기도 했다.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곳곳에서 5 천만의 오락인 화투판이 벌어졌다. 배 안에서는 한국 돈은 쓸모가 없고 달러는 아직 지급이 되지 않았고 지급된 것은 양담배밖에 없기 때문에 모두들 담배를 걸고 화투를 쳤다. 나는 화투도 할 줄 모르고 담배도 피우지를 않았기 때문에 심심풀이로 나에게 지급된 담배를 가지고 밑천이 필요한 병사들을 대상으로 이자놀이를 했다. 사흘이 지나자 내 더불백에는 다 들어가지 않을 정도로 담배가 많아졌다. 담배를 벌어들이면서 사채시장의 돈놀이꾼들이 돈을 버는 재미도 이런 것이겠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난 막상 나중에 배에서 하선 하자마자 정신없이 배치를 받아 가는 판에는 큰 더불백을 짊어지고 갈 수도 없는 일이어서 닥치는 대로 주변 전우들에게 나누어 주고 말았다.
닷새 동안의 불안한 항해가 다 끝나고 곧 나트랑에 상륙한다는 소문이 들렸다. 모두들 마음이 뒤숭숭해서인지 갑판에 나와 하루 종일 서성거렸지만 어두워질 때까지 육지는 보이지 않았다.
부산항을 떠난 지 엿새가 되는 아침이었다. 남보다 먼저 잠자리에서 일어나 선실의 문을 여는 순간 숨을 쉬기 어려운 뜨거운 바람이 ‘훅-’ 하고 콧속으로 불어왔다. 순간적으로 놀라서 어디서 ‘불이 났나.’ 하고 돌아다보았더니 배가 이미 밤새 나트랑항에 도착하여 부두에 닿아 있었던 것이다. ‘드디어 왔구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 뜨거운 열기 속에서 호흡을 다시 한 번 가다듬었다. 아직 새벽이어서인지 쥐죽은 듯한 부두의 모습이 기분 나쁘게 느껴졌다. 월남 땅을 처음 본 순간 이제까지 한 번도 해보지 않았던 ”내가 살아서 돌아갈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처음으로 스치고 지나갔다.
날이 완전히 밝고 우리들을 환영하는 공식 행사는 없었다. 그 대신에 야전잠바를 입은 부관부 준위가 어깨에 힘을 주고 버티고 선채 우리를 기다렸다. 찌는 듯한 더운 날씨에 더욱이 대낮에 준위가 왜 야전잠바를 입고 왔을까 하는 의문은 곧 밝혀졌다. 현장에서 좋은 곳으로 보내달라는 금반지를 받기 위해서였다는 것을 나중에야 알았다. 소문에 의하면 병력이 한 번씩 도착할 때마다 야전잠바 주머니가 축 늘어질 정도로 금반지를 걷어간다는 것이다. 그러나 준위의 야전잠바는 그 후에 내가 목격한 주월 한국군의 엄청난 부패에 비하면 조족지혈이었다.
나는 병사들이 하도 잘 죽는다고 해서 “병력을 보내나마나” 라는 소문이 붙었다는 일명 도깨비부대로 떨어졌다. 도깨비부대 병력은 닌호아에 있는 사단 사령부로 가는 병력과는 달리 투이호아로 가기 위해서 더블백을 들고 대열을 지어섰다. 더블백을 어깨에 메고 뜨거운 바람을 일으키며 기다리고 있는 쌍발 프로펠러 수송기의 활짝 열려 있는 뱃속으로 뛰어 들어갔다. 미군이 대부분 철수한 퀴논 비행장은 그야말로 황량하기 그지없었다. 프로펠러에서 나오는 뜨거운 열기를 헤치고 들어간 원래 화물을 나르는 수송기는 안에서 밖이 훤히 내다보여서 “이 비행기가 날라 갈 수는 있는가?”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폭음과 한증막 같은 뜨거운 바람 속에서, 비행기 바닥에 더블백을 깔고 쭈그려 앉은 우리들은, 한참 동안 비행기가 날기를 기다려야 했다. 갑자기 부서지는 소리가 나는가 싶더니 우리들의 염려를 무시하는 듯이 300명을 태운 고철덩어리는 신기하게도 활주로를 힘겹게 벗어나면서 날기를 시작했다. 30 분쯤 지나서 우리는 어딘지 알 수 없는 사막에 도착했다. 그곳은 활주로만 있는 야전비행장이었는데, 우리를 기다리는 것은 앞뒤에서 기관단총을 들고 경계를 서고 있는 수십 대의 무장트럭이었다. 마치 소떼를 몰듯 정신없이 몰아치는 인솔 하사관들의 고함소리에 쫓겨 트럭에 올라타자마자 전속력으로 사막을 가로질러 달렸다.
얼마를 달려서 마치 영화에서 보는 사막 한가운데 있는 외인부대의 기지처럼 겹겹이 두른 철조망 담을 몇 개를 지나서 부대 안에 있는 교육대에 도착했다. 그런데 이게 웬 일인가? 트럭에서 내리자마자 머나먼 월남 땅까지 오느라고 얼마나 고생이 많았느냐는 따뜻한 위로나 격려의 말 한마디는 고사하고 “이 새끼들 좆 빨려고 월남 왔나?” 며 조교들이 정신을 못 차리도록 기압을 주고 숨이 턱에 닿도록 더블백을 짊어진 채 뺑뺑이를 돌리는 것이 아닌가?
한국에서부터 들고 온 관물들이 가득한 40 Kg 더블백을 둘러메고 뜨거운 모래밭인 연병장에서 선착순을 돌면서 월남에 도착하는 첫 순간부터 기합으로 일관하는 한국 군대는 참으로 ‘구제 불능의 집단’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나중에 알고 보니 그것은 신입병들이 다른 생각을 하지 못하도록 초장부터 군기를 잡겠다는 일종의 일본식 군대의 운영방법이었다.
다시 연대 교육대에서 2 주간 현지 적응 훈련을 받았다. 교육대의 소대 막사는 적의 공격에 대비하여 땅을 파고 들어가 반지하 연립마냥 벙커로 만들어졌다. 마치 움막같이 생겨서 한국에서는 구경도 하지 못하던 것이었다. 벽에는 모래를 넣은 마대가 차곡차곡 쌓여 있고 지붕위에도 마대를 몇 겹씩 얹어놓았다. 날씨가 더우니까 문이나 창은 없고 밤에 잠을 잘 때는 모기장을 치고 잤다. 밤에도 등화관제를 해야 했기 때문에 불을 킬 수가 없어 막사 안은 항상 어두웠다.
부대가 모래뿐인 사막에 있기 때문에 날마다 땀으로 목욕을 하며 며칠을 지냈더니 온 몸에서 소금기가 버석버석 거렸다. 군복에는 소금기가 허옇게 베어 나왔고 내무반에 들어서면 소금기에 찌든 냄새가 진동했다. 급수트럭으로 물을 하루에 한 번씩 보급해주는 사정이라 샤워는 고사하고 세수할 물도 부족했다. 어쩌다 운 좋게 수통 3개에 물을 채울 수 있으면 손수건에 물을 적셔서 대강 씻어낼 수 있을 정도였다. 이런 조건이었지만 우리들 300여명의 교육생들은 훈련이 끝나면 곧 바로 전투현장으로 투입이 될 처지였기 때문에 보름 동안 한눈 팔 사이가 전혀 없을 정도로 맹훈련을 받았다.
보통 군대에서는 어디서나 훈련받을 때 적당히 요령을 피우려는 것이 피교육자의 사명(?)이다. 그러나 월남에서의 훈련은 그런 사명감이 전혀 적용이 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훈련이 끝나면 곧 전투에 투입될 판이기 때문에 제 목숨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농땡이를 피울 수가 없는 것이다. 교육생들의 알아서 훈련을 잘 받으니까 흔히 군대의 다른 교육에서처럼 기압을 받는다든가 하는 일은 전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