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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태백산맥이 있는 벌교를 찾아서... 우리나라 소설에서 가장 위대한 소설을 꼽는다면 난 주저없이 태백산맥을 꼽는다. 질곡의 역사를 살아온 민초들의 아픈 삶을 가장 진솔하게 그려내고 있기 때문이다. 소설을 읽으면서 그들이 과연 실존인물일까? 그리고 작가가 벌교의 무엇을 보고 그렇게 생생하게 그려냈을까? 그런 의문을 늘 품었다. 이번에 태백산맥 주무대인 벌교를 찾았고 그 살아있는 현장을 직접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행운을 얻었다. 아마 소설 태백산맥을 3년전에 처음 접했던 것 같다. 전라도 사투리에 익숙하지 않아 한줄 한줄 읽어내기가 무척이나 힘들었다. 그러나 책 읽는 동안 나도 모르게 벌교 사람이 되어있었고 함께 아파하고 긴장하면서 소설속의 한사람이 되었던 것이다 .그만큼 소설은 사람을 흡인하는 마력이 있는 것이다. 화장실이나 버스에서도 그 책은 날 떠나지 않았다. 감동의 여운을 확실히 각인 시키고자 임권택 감독의 '태백산맥' 비디오까지 빌려보는 정성까지 발휘했다. 소설 '아리랑'을 읽고 김제와 변산반도를 둘러보게 되었고, 태백산맥을 통해 이 머나먼 벌교까지 왔으니 난 아무래도 조정래 씨의 올가미에 단단히 걸려든 모양이다. 며느리에게 '태백산맥' 10권을 모두 필사하라고 명령을 내릴 만큼 그는 이 소설에 애착을 가지고 있다. 힘겨운 역사를 민초들의 고단한 삶으로 부드럽게 아우르는 재주도 대단하지만 나열된 언어 하나 하나가 꿈틀거리는 생명력을 가지고 있어 필사할 만한 가치가 있을 것이다.
소설 태백산맥의 '벌교' 벌교를 문외한이 설명하는 것보다 차라리 소설 '태백산맥'에 묘사된 글을 통해 벌교를 보는 것이 훨씬 나을 것이다. 벌교는 한마디로 일인들에 의해서 구성, 개발된 읍이었다. 그 전까지만 해도 벌교는 낙안고을을 떠받치고 있는 낙안벌의 끝에 꼬리처럼 매달려 있던 갯가 빈촌에 불과 했다. 그런데 일인들이 전라남도 내륙지방의 수탈을 목적으로 벌교를 집중 개발시킨 것이었다. 벌교 포구의 끝 선수머리에서 배를 띄우면 순천만을 가로질러 여수까지는 반나절이면 족했고, 목포에서 부산에 이르는 긴 뱃길을 반으로 줄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벌교는 고흥 반도의 순천, 보성을 잇는 삼거리 역할을 담당한 교통의 요충이기도 했다. 철교아래 선착장에는 밀물을 타고 들어온 일인들의 통통배가 득시글거렸고, 상주하는 왜인들도 같은 규모의 읍에 비해 훨씬 많았다. 그 만큼 왜색이 짙었고, 읍 단위에 어울리지 않게 주재소 아닌 경찰서가 세워져 있었다. 읍내는 자연스럽게 상업이 터를 잡게 되었고, 돈의 활기를 좇아 유입인구가 늘어났다 모든 교통의 요지가 그러하듯 벌교에도 제법 짱짱한 주먹패가 생겨났다. 그래서 언제부턴가 '벌교에 가서 돈자랑, 주먹자랑 하지 말라'는 말이 '순천 가서 인물 자랑하지 말고, 여수 가서 멋 자랑 하지 말라' 는 말과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되었다..
내가 가지고 있는 소설책에 밑줄이 쳐 있었고. 여백에 다음과 같은 글귀가 적혀 있었다. '언젠가는 벌교에 꼭 갈 것이다. 그리고 느낄 것이야'
김범우의 집 국회의원 최익승의 계략에 의해 빨갱이로 몰린 김범우가 경찰서 유치장에 갇혀 있다가 순천경찰서에 이첩된 뒤 그에 대한 대책을 세우기 위해 김범우의 아버지 김사용이 황급히 문중회의를 열었던 곳으로 묘사된 곳이기도 하다. 김사용은 대쪽같은 지조를 지진 유학자지만 큰아들 김범준을 독립군으로 내보내면서 작은아들 범우를 학병으로 보낼 수밖에 없었다.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전답을 팔아 독립군 자금으로 지원했고 또 한편으로는 일본을 위해 거액을 희사할 수밖에 없었던 시대적 삶을 살아온 것이다. 아무런 댓가도 바라지 않은 채 선뜻 땅을 내주며 도왔던 자식과도 같은 염상진에 의해 인민재판에까지 끌려나가야만 했던 수모와 배신감을 눈을 감고 침묵으로 삭혀야 했던 김사용 노인의 회한이 어린 곳이 바로 이 집이다. 소설속에 나온 김범우나 김사용은 실존인물이 아니다. 다만 작가와 이 집 아들이 초등학교 동기였고, 이 집에 자주 놀러왔다고 한다. 당시에 먹기 힘든 쌀밥누룽지에다가 사카린을 뿌려먹는 것이 아니라 귀한 설탕을 뿌려 먹은 기억이 강렬했다고 한다. 어린 시절 지조와 부의 상징으로 여겨졌고 이 집을 소설 속의 배경으로 선택한 것이다.
지주의 집답지 않게 마당도 작고 소박하여 의아스럽다. 지주의 집은 쌀을 넣는 곳간만 크면됐지 마당이 넒을 필요가 없기 때문이란다. 대신 집 옆에 엄청 넓은 곳간터가 자리 잡고 있다. 들녁이 보인다. 소작농들이 일을 잘 할 수 있나 감시하는 곳이기도 하다. 그 너머에 조계산이 보인다. 그 곳에 율어마을이 있다고 한다. 낮에는 경찰이, 밤에는 산사람이 나타나는 곳이다. 소설속의 지명이 하나하나 나타날수록 흥분하게 된다.
벌교 홍교 (보물 304호)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홍교 가운데 규모가 가장 큰 것이 바로 벌교 홍교다. 이 다리는 선암사 승려가 만들었다고 하는데 아름다운 승선교의 비밀을 이곳 홍교에 적용했을 것이다. 원래 벌교 (筏橋) 의미는 '뗏목다리'란다. 홍교 이전에는 뗏목으로 된 다리가 있음을 알 수 있다. 홍교는 한눈에 봐도 튼튼하게 짜여 있음을 알 수 있다. 아치 가운데 놓여 있는 용두석이 이채롭다. 소화다리 다리에는 '부용교'라고 쓰여있는데 소설 때문인지 아니면 예쁜 어감 때문인지 사람들은 소화다리라고 부르는 것을 좋아한다. 실은 일왕 히로히또 때 (昭和 6년) 만들어져서 소화다리라고 부른 것이다. 친일의 상징인데도 말이다. 예쁜 이름과는 달리 이 다리에서 참 많은 사람들이 죽어간 곳으로 유명하다. 여순사건때는 100여명의 우익인사를 처단했고, 다시 반란군이 진압되었을때는 반대로 반란가담자를 처단했던 곳이다. 지긋한 전쟁이 끝나면 다리 위엔 또 한번의 붉은 피로 얼룩진다. 빨치산에 가담했던 자들을 색출하여 총살을 했던 것이다. 여순 반란사건으로 이름났었던 14연대 반란 사건의 회오리로부터 6·25로 이어진 우리 민족의 비극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피비린내로 범벅되었던 아픈 과거를 안으로 삭힌 채 차디찬 주검을 말없이 받아들였던 그 때와 다름없이 지금도 침묵으로 살아가고 있다. 다만 늙고 쇠약해진 모습으로.... 이젠 차도 지나가지 않는다. 부용교란 이름표만 간신히 달고 있다. 다리 옆에는 중도방죽이 이어진다. 나까시마로 대표되는 동양척식주식회사의 창고가 있던 곳이다 이 곳에서 쌀을 수탈해 가는 전진기지인 셈이다.
회정리 교회 1935년에 지어진 교회다. 소설에서는 야학을 하는 곳으로 묘사된다. 이지숙은 부상당한 안창민을 자애병원에서 간호하고 피신하도록 도운 죄목으로 징역 1년에 집행유예 선고를 받고 석방된 뒤 학교에는 사표를 낸다. 이틀동안이나 자리에 누워만 있던 이지숙은 사흘째 되는 날 외출을 해 서민영을 찾아가 야학에서 일하게 해 달라고 부탁을 했고, 서민영은 이지숙을 받아들인다. 아이들에게 사회주의의 이념을 가르친다. 그 곳에 올라서면 벌교 일대가 훤히 보인다.
현부자집 벌교터미널에서 산길로 올라가면 현부자네 집이 나온다. 길 양편으로는 친일의 상징으로 심었다는 벚나무들이 서있다. 작가는 소설 속에서 이 벚나무에 대해 ‘스스로 기구함을 감내 할 수밖에 없는 사꾸라’로 표현하고 있다. 현부자집을 소설은
이렇게 쓰고 있다. 죽어가는 목숨을 구해 올리는 터이니 부귀와 영화는 더 말해 무엇하며 정남향에 좌청룡 우백호 거느리고 앞에 물길까지 트였으니 이에 더 할 명당이 또 어디 있느냐는 것이었다. …그 터는 눈여겨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신묘함을 느끼게 했다 중도들녘이 훤하게 내려다보이는 제석산 자락에 세워진 이 제각은 본래 박씨 문중의 소유이지만 소설에서는 현 부자네 집으로 꾸며졌고, 정하섭이 무당의 딸 소화의 도움을 받아 그 현부자네 제각에 몸을 숨기는 것으로 전개되고 있다. 현부자네 집은 지금은 안채도 쇠락하고 문간채는 비스듬히 기울어져 수리가 한창이다. 누마루가 있는 문간채며, 박석을 쌓은 기단이며, 문간채 앞에 배치한 연못 등이 배치되어 있다. 이 집의 안채를 보면 한옥을 기본 틀로 삼았지만 곳곳에 일본식을 가미한 색다른 양식이 눈에 띈다.
마루는 조선식, 천장은 일본식이고 사방으로 둔 퇴를 따라 돌아가면 안채에 설치된 화장실에 이를 수 있도록 했는데 우리 한옥에는 안채에 화장실을 배치하는 경우가 없었을 뿐 아니라 당시에는 일반 사람들이 구경조차도 하기 힘든 양변기가 놓여있고 목욕탕도 보인다. 지붕 아래 처마의 서까래에는 벚꽃무늬를 단청한 것 등이다. 일본식 누각에 올라 일꾼들이 일하는 것을 감독하게 된다.
소화의 집 저녁 어스름과 함께 갑자기 쏟아지는 빗줄기를 피해 무당 월녀의 집에 들어선 정참봉이 처마 밑에 서서 젖은 옷을 털며 비가 개이기를 기다리지만 좀체 비가 그칠 것 같지 않은데다 월녀의 권유도 있고 해서 못이긴 채 양반의 체통을 접고 무당 집 방에 들게 된다. 비를 맞아 추웠던 탓인지 저녁 먹은 게 탈이 난 정참봉은 한밤중에 월녀가 풀어준 된장 물을 먹게되고, 월녀가 등을 두드려준 때문인지 트림을 하게 되어 속이 편해지자마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그 밤에 월녀와 몸을 섞게 된다. 그리고는 소원대로 임신을 하게 된 월녀는 주변의 소문을 피해 멀리 남원까지 가서 몸을 풀어 딸 소화를 얻게 된 것이다. 중풍으로 말도 못한 채 반신불수로 누워서만 사는 월녀가 정참봉의 손자 정하섭과 딸 소화와의 사랑을 눈치채지만 끝내 「술도가 집 아들과 딸 소화의 관계」를 밝히지 못한 채 ‘안 돼야…’를 속으로 무수히 되뇌이며 눈을 부릅뜨고 죽어간 안타까운 곳이기도 하다. 개인의 감정이 이념과 봉건사고를 뛰어 넘는 모습을 그려내고 있던 것이다. 소화의 아픔처럼...집도 온데 간데 없고, 무너진 담벼락만 힘겹게 남아 있다.
진트재 멀리로 바라보이는 벌교읍은 절로 감탄이 흘러나올 만큼 아름다운 경치를 이루고 있었다. 서북쪽으로 반원을 그리며 이어져 나간 산들과 동남쪽으로 긴 자취를 끌며 펼쳐진 들판과 포구, 그 가운데 감싸이듯 시가지는 아스라하게 멀었다. 그 아늑하고 포근한 느낌의 경치… 벌교지구 계엄 사령관으로 부임하던 국군장교 심재모는 구룡쪽에서 진트재를 걸어올라 마루에 서서 벌교를 처음 바라보았을 때의 느낌을 저렇게 표현하고 있다. 소설에서는 진트재 터널 입구에서 안창민과 하대치가 순천행 군용열차를 기습하고 군수품과 무기를 탈취해 조계산으로 옮기는 내용이 묘사되고, 마동리 터널은 염상진이 조성면을 기습함에 따라 심재모가 조성을 긴급 지원하기 위해 철길을 따라 병력을 지휘, 구보 행군하던 곳으로 각각 그려지고 있다.
벌교역 새로운 권력이 가장 먼저 밟는 곳이 바로 벌교역이다. 국회의원, 계엄사령관, 경찰서장이 부임 할 때마다 권력의 추종자들은 그들에게 아부을 해야만 했고, 어떤때는 민초들 앞에서 수모도 당하는 장면도 나온다. 형 염상진을 미워 했기 때문에 빨갱이를 미워할 수밖에 없었던 깡패 염상구. 그러나 형이 죽고 시신이 경찰서에 걸렸을 때 죽음을 각오하고 시신을 끌어내린다. 형의 시신을 거두면서 피줄이 이념보다 진하다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그려, 그려, 니가 사람이다. 하먼, 느그 성인디." 그제서야 마음을 놓고 서러운 눈물을 쏟아내는 호산댁과 ‘워메, 워메, 아즘찮은거.’시동생에 대한 고마움과 서러움으로 흘렸던 죽산댁의 눈물이 젖어있는 곳으로 그려지고 있다. 형제는 달리는 기관차처럼 다른 이념을 가지고 총부리를 겨누면서 미워했지만 결국 형의 죽음으로 형제는 화해하게 된다. 이토록 남과 북의 이념적 비극을 형제의 극단적인 양태를 통해 전달했으며 핏줄이 이념을 뛰어 넘는다는 것을 작가는 자연스레 어필하고 있다. 소화다리근처에 철교가 놓여 있다. 이 철교에서 벌교의 주먹세계를 장악하기 위해 쌍칼과 오래 버티기 시합을 한다. 기차가 굉음을 내며 미친 듯이 달려오지만 결국 염상구는 쌍칼보다 조금 늦게 떨어지는 바람에 벌교주먹의 패권을 장악한다. 오늘날 깍두기 아저씨들의 뿌리는 염상구가 아닐까?
남원장 당시 벌교에서 유일했던 요정 남원장은 이 샛길의 중간쯤 왼편에 위치해 있었다고 한다. 남원장은 유지들의 대소모임이나 기관장들의 연회가 자주 열렸던 장소였다. 소설에서는 구석진 방에서 정현동이 고흥의 서운상과 마주 앉아 양조장과 논을 은밀하게 흥정하기도 한 곳이며, 계엄사령관 심재모의 환심을 사기 위해 유지들이 큰방에다 걸직한 술판을 벌이지만, 예정된 공무를 이유로 들어 심재모가 불참해 버리자 자기네들끼리만 서울 말씨를 쓰는 나긋나긋한 아가씨들과 함께, 찝찝하기는 했지만 그런 대로 흔쾌한 술자리를 갖기도 한 곳이다.
남원장에 있는 아가씨들 가운데 제일 예쁘고 또한 소리 잘 하기로 이름난 경월이를 끌어안고 흐물거리며 즐기던 경찰 토벌대장 임만수가 훗날 다른 지역으로 전근 발령을 받고 벌교를 떠나게 되어 송별연을 갖던 날, 경월이가 임만수의 아기를 가졌다고 떼를 쓰는 바람에, 갑자기 난처해진 임만수는 자기편이 되어줄 것으로 믿고 염상구에게 구원의 눈길을 보내지만 염상구는 의외로 경월이 편이 되어 ‘자기가 외서댁에게 했던 전례(?)에 따라 쌀 열 가마 값을 배상하든지 경월이와 살림을 차리든지 선택하라’고 차갑게 내쏘는 바람에 결국 유지들에게 쌀 열 가마 값을 급전으로 빌어 해결하고 나서야 벌교를 떠날 수 있게 되는 그런 창피를 당한 곳이기도 하다. 남원장이 있었던 그 자리에 지금도 술집이 놓여 있다. 그래서 더욱 반갑다. 술도가 소설에서 묘사하고 있는 술도가집 주인 정현동을 보자. 정현동은 일본인에게 금덩이를 주고 그 술도가를 손에 넣었던 전력 때문에 도둑이 제발 저리더라고, 해방의 들뜬 분위기 속에서 친일파의 이름이 줄줄이 엮어지고 또한 그 이름들은 욕과 함께 뒤범벅이 되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게 되자 고민 끝에 정현동은 ‘치안대의 이름으로 친일파를 가차없이 처벌해야 한다’면서 기세를 올리는 청년단장 염상구에게 은밀하게 돈 뭉치를 내밀어 매수하는 기지를 발휘하였고, 상상할 수 없는 거액을 손에 쥐게 된 염상구는 「공일날 남국민학교 운동장에서 잔치를 벌여 여론을 잠재우자」는 제안으로 명분과 실익을 서로 나누기도 한다. 또한 소설에서 벌교를 장악하고있던 반란군들이 지주들을 반동으로 몰아 처단할 때 정현동은 악덕 지주로 몰렸음에도 아들 정하섭의 덕택에 수월하게 죽음을 면하지만, 반란사건이 진압된 후 결국 빨갱이로 몰려 경찰서 유치장에 갇히게되고, 부패한 국회의원 최익승의 힘을 빌어 풀려 나오면서 얼떨결에 술도가의 반을 넘기기로 했다가 욕심을 부려 고흥의 지주에게 몰래 팔아 넘기려 하기도 한다. 정현동은 중도방죽 안에 이 백 말뚝이나 되는 많은 농지를 사들이고 농지개혁에서 자기 논을 제외시키기 위해서는 논을 염전으로 만들면 된다는 얄팍한 요량으로 바닷물을 퍼 올리다가 결국 흥분한 소작인들의 손에 죽임을 당한다. 정현동의 주검은 그가 꿈꾸던 염전이 아니라 바닷물이 담긴 논바닥에 눕게 된 것이다. 논고랑에 쳐 박혀 틀틀 대다가 발동이 꺼져가던 그의 양수기와 함께 허망하게…. 그 정현동이 집밖에서 참혹하게 죽은 까닭에 혼을 달래기 위한 굿을 하게되고 그 씻김굿을 주관하는 소화는 이지숙의 부탁을 받아 죽은 정현동의 혼(魂)의 소리를 빌어 중도방죽 소작인들에게 계속해서 소작을 부칠 수 있도록 해주기도 한 곳이다.
전혀 상관이 없는 술도가 사장이 소설에서 그렇게 그려지는 바람에 조정래씨에게 아주 좋지 않는 감정을 가지고 있다고 전해진다. 하긴 그럴만 하다. 소설속에서 가장 치사한 인간이 정현동이었으니까... 소설은 그저 소설일텐데.... 지금 양조상은 없어지고 농기계상으로 바뀌었다.
남도여관 판자 벽에 함석지붕을 한, 전형적인 일본식집이다. 현재도 보성여관이란 간판을 달고 있지만 거의 손님이 없다고 한다. "아줌마..손님 많게 할려면..이 곳에 '태백산맥 남도여관' 이라고 써붙이세요. 그럼..사람이 많이 몰려들 겁니다." 그렇게 얘기했더니 수줍음을 감추지 못하는 보성여관 할머니가 왠지 정겹게 보인다. 하긴 사람이 몰려드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예전의 모습을 변함없이 지키는 것이 더욱 중요하리라. "어렸을때부터 조정래씨가 이곳에 자주 놀러왔어요. 소설을 쓰면서도 자주 들락거렸는데...어휴..그렇게 유명한 소설가가 될 줄은 몰랐어요." 남도여관은 소설 속에서 경찰토벌대장 임만수와 그 대원들의 숙소로 이용되어오다가 계엄사령관으로 부임한 심재모에 의해 민폐를 없애고 경찰토벌대의 기강을 세워야한다는 이유로 선창 옆 창고로 내몰리게 된다. 또 이런 대목도 있다. 억지로 경찰토벌대의 후원회장을 떠맡은 정현동이 임만수와 그 휘하의 경찰토벌대가 묵었던 비용을 도맡다시피 했었고, 이 때문에 정현동은 더 이상 벌교에서 미적거려 보아야 축나는 것은 그의 재산뿐이라는 생각을 하게되어 결국 광주로 떠나 안전을 도모하는 것이 현명한 일이라고 결정하게 만드는 것이다
남초등학교 벌교남국민학교는 손승호와 이지숙이 교사로 근무했던 학교일 뿐 아니라, 6·25남침으로 벌교를 장악한 빨치산, 소위 야산대 사람들이 인민재판이라는 미명으로 무고한 양민에게 총살결정을 내렸던 곳이며, 또한 심재모-백남식-양효석으로 계엄사령관이 바뀔 때마다 열병식을 갖던 곳이기도 하다. 특히 심재모의 계엄군이 처음 벌교에 진주했을 때 일정시대부터 그때까지 읍내사람들은 무장을 갖춘 이 백 여명의 대오를 이룬 병력을 본적이 없었기에 계엄군의 행군 그 자체가 구경거리였고 교문에서 제지당한 읍내 아이들이 발맞추어 행군하는 그 신기한 모습을 보기 위해 닫혀진 교문의 창살사이로 크게 뜬 눈알을 굴렸던 것이 묘사되고 있기에 천진난만하고 맑은 그 때 그 아이들의 모습과 휘 둥그레 뜬 눈알을 상상하면 재미있을 것이다. 안창민을 숨기고 치료하도록 도와주고 피신하도록 연락했던 죄로 징역 1년에 집행유예를 선고받은 이지숙이 사표를 내기 위해 학교에 나갔다가 마지막으로 아이들이라도 한 번 만나보고 싶었지만 '정작 만나서 무엇을 할 것인가, 만나보고 싶은 마음만 간직하면 되었지.'하는 생각으로 마음을 추스려 책상서랍을 정리하고, 뒤돌아보지 말자고 자신에게 거듭 약속하면서 고개를 숙인 채 운동장을 가로질러 나오던 그런 모습도 한번 상상해 보자.
보성군 지역경제과장 위승환씨 성경을 달달 외는 사람은 여럿 봤지만 태백산맥을 달달 외고 통달하는 사람은 처음 본다. 이번에 함께 문학기행 안내를 맡아주신 위승환씨다. 소설속의 숨겨진 이야기와 작가의 숨은 뜻까지...걸쭉한 남도사투리를 사용하면서 막힘없이 풀어낸다. 소설을 너무나 잘 알았기에 한 때 안기부와 경찰서에도 불려다녔다고 할 정도다. 오죽했으면 우리 일행중에 한사람이 다음과 같이 물어볼 정도다. "원래 태백산맥은 위승환씨 소설인데...조정래씨가 대필 한 것 아닙니까?"라는 얘기가 나올정도다. 과거는 흘렀어도 역사와 문학은 살아 움직이고 있다. 아마 이렇게 향토와 문학을 사랑하는 사람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 조정래 대하소설 태백산맥 문학기행 홈페이지 .....누르세요.
벌교를 떠나며 염상진이니 이태식이니 수많은 영웅들은 결국은 죽어갔지만 외서댁이니 하대치같은 민초들은 죽지 않고 민중들의 가슴속에 오랫동안 남아있는 것으로 소설은 결말을 맺고 있다. 아쉽게도 벌교를 떠나지만 그 혼돈과 아픔을 소설속의 현장에서나마 느낄수 있었다. 그 고통을 이겨내고 오늘날까지 굳굳하게 살아준 벌교 사람들에게 그저 머리를 조아릴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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