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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주의 구원론 (안토니 호쿠마
저)
1장 방향설정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성부 하나님에 대한 전적 순종과 고난 그리고 죽음
부활을 통하여 우리들의 죄와 죄의 권세로부터 우리를 구원하셨다. 그리스도의 이런 구원 사역도 성령의 역사를 통하여 우리의 마음과 삶에 적용되어
질 때 비로소 그 효력을 발휘하게 된다. 이 구원 사역이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어떻게 적용되는가를 다루는 것이 구원론이다.
본 책에서
다루는 신학의 입장은 개혁주의 혹은 칼빈주의 전통에 의한 복음주의 노선이다. 개혁주의 구원론은 다음과 같은 몇 가지의 특성을 갖고
있다.
1) 누가 죄로부터 구원을 받게 되는가를 결정하는 요인은 인간의 결정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이다.
2) 구원의 뿌리는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 속에 두고 있으며 인간의 공로를 근거로 한 것이 아니라 전적인 하나님의 뜻에 따라 영생을 주시고자 그의 백성을 택하신 것에
있다.
3) 하나님의 구속의 은혜는 그의 택한 백성(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에 이르도록 택함을 입은 사람들)에게만 부여되어지는 보편적이 아니라
특별한 은혜인 것이다.
4)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는 유효하며 또한 유기될 수 없는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는 그의 택한 자들이 그들의 구원을
상실하도록 허락하시지 않는다는 것이다.
5) 구원이 하나님의 백성에게 적용되기 위하여서는 인간의 의지와 노력이 필요하지만 기본적으로 성령의
역사이다.
1. 역설의 의미
하나님이 우리의 삶에 대한 전적주권을 갖고 계시며 우리의 삶을 그의 뜻에 따라 인도
하신다는 사실과 한편 우리는 우리의 삶을 결정해야하며 그 결정들에 대한 책임을 져야한다. 이러한 하나님의 전적인 주권과 인간의 책임성을 하나로
일치시킨다는 것은 불가능해 보인다. 그러나 성경은 이 두 사실을 모두 가르치고 있다.
하나님의 주권에 대하여서는 “모든 일을 그
마음의 원대로 역사하시는 자의 뜻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 (엡 1:11)에서 볼 수가 있고
인간의 책임성에 대해서는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이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 (요 3:36)에서 가르치고 있다.
한편 다음의 두 구절은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책임이라는 두 성경적 진리를 동시에
나타내고 있다. “인자는 이미 예정된 대로 가거니와 그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눅 22: 22) “그가 하나님의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내어준 바 되었거늘 너희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어 못 박아 죽였으니” (행 2:23)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죽음을 미리
작정하셨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배반하고 그를 죽인 자는 그들의 악행에 대한 응분의 책임이 주어졌던 것이다.
2.
상관관계들
구원론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죄로부터 구속하셨는가를 다루고 있기 때문에 구원론이 신론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하나님에 대한 잘못된 이해는 결국에 가서는 구원론에 대한 잘못된 이해에 이루게 될 것이다.
구원론은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에 관한
교리인 기독론과도 밀접한 관계에 있다. 그리스도의 완전한 신성을 믿는 자만이 성경적인 구원론을 이해할 수 있다.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했던
아리우스에 대항하여 아타나시우스는 “내가 나의 구속주로 믿는 예수는 하나님과 동등한 분이다”라고 강력하게 말한 것은 높이 평가되고
있다.
구원론은 또한 기독교 인간학 혹은 인간론과 관계가 깊다. 인간에 대한 이해는 어떻게 인간이 구원에 이룰 수 있는가에 대한
단서를 제공해 준다.
인간의 본성은 타락으로 인해 전적으로 부패해져 있으며(그래서 인간은 본질상 죄로 죽은 자들이다.) 그러기에 인간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의 역사로 인해 중생되어지며 새 영을 힘입어야 한다고 믿는다면 개력주의 혹은 칼빈주의적인 구원론을 굳게 믿는
자이다.
구원론은 성령론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성령은 우리를 중생케 하시며 거룩하게 하시며 믿음 안에서 인내하게 하신다. 다시
말하면 구원론에서 다루어지는 모든 과정 전체에서 구원을 성령이 우리의 삶에 적용시키신다는 것을 알게 된다.
구원론과 종말론(마지막
이들에 관한 교리)도 밀접한 관계에 있다. 먼저 우리는 시작된 종말론과 미래적 종말론으로 구분지어야 한다.
시작된 종말론이라 함은
신자들이 종말론적인 추복들을 현세적으로 향유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심으로 마지막 날들이 시작되었기에 구원의 축복들을 이미
향유하고 있는 것이다. 오순절 성령강림이 그랬다.
미래적 종말론이란 다가올 종말론적인 사건들에 관한 교리를 말한다. 이생에서 얻고 있는
구원의 축복들은 우리가 다가올 세상에서 얻기를 대망하고 있는 더 큰 축복들의 전조일 뿐이다.
2장 구원의 순서에 관한
문제
구원의 교리를 잘 이해하려면 구원의 축복을 하나님의 백성에게 적용함에 있어 어떤 순서가 있느냐 하는 것이다.
1. 세 가지의 다른 접근 방식들
1) 죤 머레이(John Murray)는 그의 저서 <성취된 그리고 적용된
구속>이라는 책에서 “구원적용의 다양한 과정이 어떤 순서에 따라 진행되고 있으며 그 순서는 하나님의 미리 정하신 계획과 그의 지혜 그리고
은혜에 의해 제정되었다고 믿을 만한 충분하고도 결정적인 이유들이 성경에 나타나 있다”고 했다.
머레이는 로마서 8:23로부터
부르심(calling), 의롭게하심(justification), 영화롭게하심(glorification)이란 구원의 순서를 추출하고 있다. 이
순서를 근간으로 하여 머레이는 다음과 같이 성경적인 구원의 순서를 정리한 것이 특징이다. 즉 부르심, 중생, 믿음과 회개, 칭의, 양자삼으심,
성화, 견인, 그리고 영화라고 정리했다.
2) 루이스 벌코프(Louis Berkhof)는 중간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다. 그는 그의
저서 <조직신학>에서 성경은 이와 같은 형태의 구원의 순서를 뚜렷이 밝히지 않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그 역시 구원에 대한
충분한 근거를 제공하고 있기는 하다고 하며 다음과 같이 정리하고 있다. 즉 부르심, 중생, 돌이킴(회개와 믿음을 포함), 칭의, 성화, 견인,
그리고 영화, 라고 정리했다.
3) 다른 한 극단적인 예가 벌카우어(G.C.Berkouwer)의 경우이다. 그는 구원의 순서를
못마땅하게 생각하며 성경에서 구원의 고정된 순서를 추출할 수 없다고 하며 그는 믿음은 구원의 여정 속에 있는 하나의 구분점이 되어서는 안되고
오히려 그리스도인의 전 생애에 널리 편만해져 있다고 단언하고 있다. 그는 “구원의 순서”라기 보다는 “구원의 길”이란 표현을 더
좋아한다.
2. 어려운 문제들
구원의 순서를 정하려고 할 때 우리가 당면하는 다음과 같은 문제점들이 있다.
1)
구원의 순서를 설정하는 데에 사용되는 용어들이 조직신학에서 사용되는 용어와는 다르게 성경에서 사용되고 있다는 것이다.
2) 구원의 과정
속에 나타나는 다양한 단계들의 순서가 항상 똑같이 않다.
3) 믿음이 구원의 순서에 나타나는 여러 관계 중 하나의 단계라고 생각되어서는
안된다. 믿음은 신자의 일평생 삶을 통해서 수행되어지는 것이다.
4) 칭의와 성화는 성도의 삶 가운데서 나타나는 연속의 과정이 아니라
동시에 나타나는 사건들이다.
5) 구원의 순서는 완전한 것이 아니다.
3. 우리가 구원의 순서에 대해서 말해야
하는가?
연속적인 단계로 나눠질 수 없는 하나님의 단일 사역에 대해서 어떠한 연대적인 순서를 정하려는 시도인 구원의 순서란 개념은
생각하지 않는 것이 좋다. 우리가 그것들을 하나씩 다루더라도 그것들은 결코 분리되어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함께 일어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예를 들어 우리는 소위 칭의와 성화를 구분해서 토의하지만 이 둘이 언제나 항상 함께 일어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우리는 연속적인
단계를 갖는다는 구원의 순서에 대해서 생각하기 보다는 하나님의 은혜의 놀라운 사역 즉 다양한 국면을 구별해 볼 수 있는 구원의 길에 혹은 구원의
방법에 대하여 생각해야 한다.
4. 함축된 의미들
구원의 과정에 대한 이해가 우리의 신학에 대하여 갖는 함축성은
무엇인가?
1) 중생이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처음에 일어나지만 그것이 주는 여파는 신자가 거듭난 삶을 살아가는 동안 계속되어 진다. 또한
믿음과 회개가 시초에 일어나지만 그리스도인의 삶의 전역에 걸쳐 지속적으로 수행되어져야 한다. 또한 칭의가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영접하자마자
일어나지만 칭의가 수반하는 혜택들의 소유를 위한 일평생의 노력이 뒤따라야 한다. 성화는 신자의 일평생에 걸처 지속되며 죽기 전까지 완료되지는
않는다. 믿음 가운데서 인내 역시 일평생의 행위이다.
2) 구원의 과정에서 나타나는 이러한 국면들은 동시적일 뿐만 아니라 또한
상호적이다. 중생은 반드시 믿음과 회개로 나타나게 마련이며 또한 성화의 시작이기도 하다.
3) 성화가 영화롭게 되는 것은 종말론에 속한
것이기에 현재의 삶 가운데 종결되어 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믿는 자는 그가 이 생애 있는 한 이미(already)와 아직(not yet) 사이의
긴장 가운데 있는 자들이다. 즉 이미 그들은 그리스도 안에 있기는 하나 아직은 온전한 자가 아니다.
정리를 하면, 그리스도인의
삶에 나타나는 영적인 성장은 하나의 사치품이 아니라 필수품이다. 이러한 성장이 반드시 위기 혹은 절정의 경험의 형태를 이룰 필요는 없지만 성장
자체는 있어야 한다. 성경은 이를 분명하게 가르치고 있다.
베드로는 갓 개종한 자들에게 “갓난아이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것을 사모하라.
이는 이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밷전 2:2)
바울도 똑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다. “오직 사랑 안에서
진리를 말함으로 범사에 머리되신 그리스도에게까지 자랄찌라”(엡 4:15)
그렇다면 구원 과정의 다양한 국면들이 연속되는 단계들이
아니라 동시적인 사건들임을 인식함과 동시에 우리는 우리의 구원에 대한 더 풍성한 이해와 구원의 희열을 갖게 될 때까지 계속적으로 자라나야 할
필요성이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3장 성령의 역사
1. 구원의 과정 속에 나타나는 성령의 역할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 의하면 성령은 구원의 적용을 이루시는 유일한 동인이다. 바을은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성령의 새롭게 하심을 통해서라고 가르치고 있다.(딛 3:5)
예수님 자신도 제자들에게 성령께서
영생을 주신다고 말씀하셨다.(요 6:63)
구원의 과정 속에서 성령의 주된 역할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하나 되게 하는 것이다. 바을은
우리가 다 한 영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느니라.(고전 12:13)고 했다.
구원의 과정 속에서 나타나는 모든 주요 요소들이
성령에 의해서 발생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중생 혹은 신생은 성령의 사역이다. “예수께서 니고데모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 갈 수 없느니라” (요 3:5)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사람은 다름
아닌 우리 신자들인데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은 성령을 통해서 이다. 바울은 “너희는 양자됨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롬
8:15)고 했다.
2. 성령의 은사들
성령의 은사와 성령의 열매에 관한 성경의 가르침을 생각할 때 이 둘은 서로
분리되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성령의 은사를 구분 짓는 일반적인 방법은 기적적인 은사와 비기적적인 은사와의 구분이다. 비기적적인
은사에는 가르침의 은사 다스림의 은사 구제와 긍휼을 베푸는 은사들이 있으며(롬 12:6-8) 기적적인 은사에는 병고치는 은사(고전 12:9)
기적을 행하는 은사(고전 12:10) 각종 방언을 말하는 은사(고전 12:10)가 있다.
바울은 교회의 지속적인 성장과
복리에 필요한 것은 가르침과 다스림의 능력과 같은 비기적직인 은사들을 강조하고 있다. 바울은 예언의 은사가 방언의 은사보다 결정적인 우위에
있다고 했다.(고전 14:1-5, 12, 18-19) 바울은 목회서신 어디에도 교회 직분자들이 갖추어야 할 자격에 대하여 방언이나 병 고치는
은사에 대하여 말 한 마디 언급하지 않고 있다. 그가 두드러지게 언급하고 있는 것은 가르침과 다스림의 은사들이다.
3. 교회의
치료사역
이상 바울의 가르침에 따라 병 고침의 은사를 포함한 성령의 기적적인 은사들이 오늘날 교회 속에서 더 이상 기대되어서는
안될 듯하다. 이 논리는 신약성경의 저자들에 의한 주장도 아니요 오직 신약성경의 여러 자료들로부터 추론된 결론이다. 그러나 지금도 때를 따라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의 기도를 기적적인 방법으로 응답하신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는 없다.
교회의 치료사역에 대하여 다음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첫째, 치료는 교회의 정상적인 사역의 일부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치료라 함은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나타나는 치료를
말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기도가 중요하긴 하지만 그 기도가 반드시 병고침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들째, 이러한 치료사역은 의학적인
전문가들의 도움을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이를 수용하는 것이다.
셋째, 그리스도인 공동체가 기도해야 할 병고침은 단순히 육체적인 병고침 그
이상이어야 한다. 그들의 치유는 영적이며 정서적인 치유와 근심의 제거 및 파기된 가족관계의 회복등이 포함 되어야 한다.
4. 성령의
열매
갈라디어서 5장에서 바울은 성령의 열매에 관하여 얘기하고 있다. 그리스도인이 새롭게 발견한 자유의 열쇠는 성령임을 분명히
지적하고 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율법을 따라 사는 것이 아니요 성령의 능력으로 살아가야 한다,.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쫓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갈 5:16)
갈라디어서 5:22에서 열매를 가르치는 단어를 단수로 쓰고 있다. 여기서
대조되는 것은 육체의 일들과의 대조이다. 육체의 일들이 많음에 비교하여 성령의 열매는 하나이다. 여기서 바울은 육신적인 탐욕은 단일성이 결여된
반면에 성령 안에 거하는 삶은 조화와 통일성이 있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성령의 열매를 과실이라 부름은 열매가 자라난다라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성령의 열매가 성숙하여 익게 될 때까지 시간이 필요하고 영적인 성장의 지속적인 과정으로 생각해야 한다. 그리고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을 향한 복합적인 열매이다.
5. 성령세례와 성령충만
성령으로 세례를 받았다고 함은 중생과 동일한
것으로 기술하고 있다.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너희는 중생 이후의 경험으로서 성령세례를 추구할 필요가 없다. 너희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성령으로 세례를 받은 자들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성령 충만에 대한 신약성경의 가르침은 신자들은 언제라도 특별한 임무를 감당키
위하여 성령 충만을 언제라도 요구할 수 있고 그리고 우리는 성령이 충만한 사람이라고 느낄 수 있도록 계속 노력하여야 한다.
성령
충만의 결과는 예배와 교제에서 나타나야 한다. 성령으로 살고 성령으로 행한다는 뜻은 성령으로 인도하심을 따라 사는 것이고 성령의 힘 안에서
사는 것이다. 이렇게 하기 위하여 우리는 메일 성경을 연구해야 한다.
4장 그리스도와 연합
오직 성령을
통해서만이 우리가 그리스도와 하나가 될 수 있으며 그리스도께서 우리 마음 속에 내주하실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하나 될 때 비로소
구원에 이르는 것이며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있을 때만이 우리가 구원 받은 자로 살아 갈 수 있는 것이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1.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뿌리들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하나님께서 만세전에 그의 백성을 그리스도 안에서 그로 말미암아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셨을 때 이미
시작되었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뿌리를 하나님의 택정하심에 두고 있다.
2.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근거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그 근거를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에 두고 있다. 우리는 예수께서 탄생하기 전에 천사가 나타나 요셉에게 전한 바를 기억하고 있다. “그를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그의 백성을 죄에서 구원할 것임이니라.”(마 1:21)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택정함을 입은 자들이 있으니
그의 양이라 일컬음을 받는 그들을 위해 그리스도께서 그의 목숨을 내어 놓으셨다.(엡 1:4)
3. 그리스도와의 실제적인
연합
1) 우리는 제일 먼저 중생을 통해 그리스도와 연합되어진다. 거듭남이라고 불려지는 중생의 의미는 성영께서 먼저 우리를
그리스도와 산 연합에 이르게 하시고 그럼으로 한 때는 죽었던 우리를 이제 영적으로 새롭게 살리셨다.
2) 우리는 믿음을 통해서 이
연합을 소유케 되며 이 연합을 통하여 계속적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3) 우리는 그리스도와 연합으로 의롭다 여김을 받는다. 칭의가
의미하는 바는 하나님께서 그의 능력으로 믿는 자들에게 그리스도의 온전한 속죄와 의를 부여하심으로 그들의 모든 죄가 용서함 받으며 하나님 앞에서
그들이 온전히 의롭다 칭함을 받는 것을 말한다.
4) 우리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하여 거룩하게 된다. 점진적 의미의 성화는 성령께서
믿는 자의 삶을 점진적으로 새롭게 하는 것이다.
5) 우리는 그리스도와의 결합을 통해 믿음의 삶을 견디어 낸다. 성경은 참다운 신자들은
하나님께서 보존하시되 그들로 하여금 끝까지 믿음의 삶을 견디어 낼 수 있도록 보존하신다. 이것을 견인의 축복이라고 한다.
6)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다. 롬 14:8 절에서 우리는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다.”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7)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남을 받을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믿는 자들은 이미
그리스도와 살아남을 받은 자들이다.
8)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영원토록 영화롭게 되어 질 것이다. 골 3:4절에서 바울은 “우리의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고 말하고 있다.
4. 그리스도와 연합의
중요성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단순히 개인적인 의미로만 이해되어서는 안된다. 물론 개개인의 갱신을 가져오긴 하나 그보다 훨씬
포괄적이다. 궁국적으로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전 우주의 새롭게 됨과 새로운 창조를 포함한다.
그리스도와의 연합교리는 그리스도
사역의 두 개의 중요한 측면 사이에서 균형을 잡아준다. 아마 법적인 측면과 역동적인 측면일 것이다.
터틀리안이나 안셈과 같은 신학자들로
대표되는 서방측 기독교회는 그리스도 사역의 법적 근거를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 그들은 죄책을 강조한다. 이 죄책은 그리스도께서 그의 속죄를
통하여 제거하셨으며 이렇게 함으로써 그리스도께서 죄책에 대하여 만족을 성취하였다.
한편 이레니우스와 아타나시우스와 같은 신학자로 대변되는
동방교회는 그리스도 사역의 생동적 혹은 삶을 같이하는 측면을 강조했다. 이들이 강조하는 죄의 측면은 오염인데 이 오몀은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통하여 우리와 연합함으로 제거하였다.
서방교회에 있어서 그리스도인의 생활의 중심적 혜택은 죄를 용서 받는 것이며 동방교회에서는 영원한
생명이었다.
5장 복음의 초청
복음의 초청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원을 사람들에게 제의하는 일 회개와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초청하여 그들로 하여금 죄의 용서와 영생을 받도록 하는 것이다.
1. 복음초청은 듣는 사람 모두를
초대한다.
복음 초청의 특성들은 무엇인가? 첫째는 복음 초청이란 일반적이며 보편적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듣는 자 모두에게
전달된 초대라는 것이다. 이 점은 혼인 잔치 비유(마 22:1-14)와 대 잔치 비유(눅 14:16-24)에 명백히 나타나 있다. 이 두 비유는
각각 복음 초청을 설명하는 비유이다. 처음 초청을 받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옛 언약 백성인 유대인을 의미하는데 이들은 선지자들 제사장들 그리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왕들을 통해 일찍이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이었으나 이제 와서 그리스도의 제자들에 의해 다시 한 번 부르심을 받고 있으나 두
비유에서 먼저 초대된 이들 모두가 오기를 거절하였다. 그럼 나중에 초청받은 사람들은 누구일까? 이들은 유대인은 유대인이로되 첫 번쩨 그룹에 끼지
않은 사람들 _ 세리들, 죄인들 - 을 가르키는 것 같았다. 이 둘째 그룹의 사람들은 기꺼이 잔치에 나온다. 단지 누가복음서에만 언급되고 있는
세 번 째 그룹의 사람들(길과 산을가에 있는 사람들)은 후일에 교회가 그리스도의 지상 명령을 완수하게 될 즈음에 복음을 듣게 될 이방인들을
상징한다고 할 수 있다.
비록 자신들의 죄된 상태를 인정하는 자만이 그리스도께 나아올 수 있지만 복음초청은 자신들의 상태를 깨닫든지
못 깨닫든지 상관없이 모든 자들에게 전달되고 있다.
2. 복음 초청은 진지하게 의도되었다.
훅스마에 의하면 복음이
진지하게 사람들에게 제의되었다(듣는 사람은 누구든지 구원에 이르도록) 는 주장은 제한 속죄 교리와 상충되고 있다고 한다. 정말 구원에 이르게
되는 복음의 진지한 제의를 받아들인 사람들은 속죄가 제한되어 있다는 것을 고백하며 그리스도께서 오직 택정함을 받은 자들만을 위해 죽으셨다는
사실을 고백한다. 그러나 반면에 그들은 또한 하나님께서 진실된 마음으로 그리고 좋은 의도로 구원을 모든 사람들에게 제의하신다는 것도
주장한다.
하나님은 결코 참회치 않는 죄인들이 죽는 것을 기뻐하는 하나님이 아니시다. 오히려 그들이 악한 길에서 떠나 살기를
원하시는 분이시다.
3. 좋은 의미로 의도된 복음제시와 돌트신경
이상과 같은 문제들에 대해 개혁주의 신조들은
무엇이라고 말하고 있는가?
돌트신경에는 이 문제에 관해 두 가지 조항이 관련되어 있는데 첫 번째 조항은 제 2장 5조이다.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누구든지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을 것이라는 것이 복음의 약속이다. 이 약속은 회개하고
믿으라는 명령과 함께 모든 백성들과 나라들에게 아무런 차별과 차이없이 선언되고 선포되어야만 한다. 바로 이들에게 하나님께서 자기의 선한 기쁨
안에서 복음을 보낸다.
4. 합리적 해결을 위하여
1) 하나님은 복음을 들은 모든 사람들이 구원받기를 원하신다.
따라서 사람들이 진심으로 원하기만 한다면 하나님께서 복음을 듣는 모든 사람들에게 구원받기에 충분한 은혜를 주실 것이다.
2) 훅스마와
초칼빈주의자들의 견해에 의하면 셩경이 분명히 선택과 유기에 대해 말씀하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복음이 전달된 모든 사람이 구원얻기를
바라신다고 말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복음을 들은 자들 중 오직 선택된 자들만을 구원에 이르게 하시기를 원하셨다고 말해야 한다는
것이다.
제 6 장 효력있는 부르심
복음 초청에 대한 응답에 대하여 알아보기로 한다.
어거스틴(354-430)과 그의 신학적 전통을 따르는 사람들이 복음 초청을 받아들이는 이유를 궁국적으로 인간의 의지가 아닌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총 속에서 발견되어야 한다고 명백히 하였다. 이 어거스틴의 전통은 칼빈주의 혹은 개혁주의 신학자들에 의해 이어졌다. 여기서 사람은
본성상 복음의 초청에 대해 회개와 믿음으로 반응할 수 없다 사람은 모두 원죄라 불리우는 죄된 상태와 조건 아래서 태어나기 때문이다. 이 원죄는
철저한 부패성과 영적 무능력으로 구성되어 있다. 영적 무능력 때문에 중생치 못한 사람은 성령의 특별한 사역 없이는 자기 삶의 근본적 방향을 죄된
자기사랑으로부터 하나님의 사랑으로 바꿀 수 없다. 하나님께서 그의 성령으로 듣는 자의 마음을 여시어 믿게 하시지 않는 이상 사람은 결코 복음의
부르심에 응답할 수 없을 것이다. 마음을 여시는 일을 가리켜 신학자들은 내면적 부르심 혹은 효력있는 부르심이라 불러왔다. 전에 공부한 복음
초청을 외적 소명이라 하면 이런 종류의 부르심은 내적 소명이라 부르기도 한다.
1. 효력있는 부르심에 관한 성경적
기반
타락한 인간이 본성상 어떠한 가에 대하여 성경의 가르침을 잠시 생각해 보자. 성령의 특별한 사역 없이도 복음 초청에 대해
믿음과 회개로 반응할 수 있는 존재들인가? 성경은 분명히 그렇지 못하다고 가르치고 있다. (고전 2:14, 롬 8:7, 엡 2:1-2, 요
3:3, 5, )
따라서 성경에서 효력있는 부르심은 하나님께서 능히 우리로 하여금 복음 초청에 대해 “네”라고 응답할 수 있도록 하시는
것이라고 가르치고 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정리하면 유효적 부르심이란 성령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복음의 초청을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회개와
믿음과 순종의 마음으로 그 분의 부르심에 응답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적 행위다.
2. 효력적 부르심의
목표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의 교제로 부르심을 입었다. (고전 1:9) 우리는 영원한 생명으로 (딤전 6:12) 하나님 나라의
영광에로 (살전 2:12) 그리고 거룩한 삶에로 (살전 4:7, 딤후 1:9) 부르심을 받았다. 우리는 경건한 고난의 모범이 되신 그리스도를
따르도록 부르심을 받았다. (벧전 2:21)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자유(갈 5:13) 와 화평(골 3:15)을 위하여 부르심을
받았다.
그러므로 효력있는 부르심은 우리로 하여금 특별한 삶 즉 지금의 악한 세상과는 도덕적으로 영적으로 분리하도록 하는 다른 종류의
삶을 살도록 촉구한다. 이러한 삶을 산다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매우 부지런한 참여를 요구한다. 효력있는 부르심은 하나님의 주권적 은총의 열매이긴
하지만 우리의 전적인 책임성을 요구한다.
3. 개혁주의 신학에 있어서 유효적 소명
어거스틴의 교리에 의하면
“그러므로 복음이 선포될 때 어떤 이는 믿고 또 다른 이는 믿지 않는다. 믿는 자는 외부로부터 들려오는 설교자의 목소리를 듣은 것이 아니라
실상은 내부로부터 들려오는 아버지의 음성을 듣고 배우는 것이다. 반면에 믿지 않는 자들은 귀로는 듣되 내적으로는 듣지도 배우지도 못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여 전자에게는 믿을 수 있는 것이 주어졌으나 후자에게는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그 분께서 친히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도다“ (요 6:44)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칼빈도 효력있는 부르심을 가르쳤는데 그는
그것을 “내면으로 향하는 부르심”이라 불렀다.
그러면 복음의 부르심과 유효적 부르심과는 무슨 관련이 있는가? 이 둘은 동일한
것이 아니다. 복음의 부르심을 받은 모든 사람이 회개와 믿음으로 응답하는 것은 아니다. 한편 효력적으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은 무두 믿음과 회개를
통하여 하나님께러 돌아온다.
헤르만 바빙크는 이 점을 다음과 같이 잘 표현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외적(혹은 복음의) 부르심을 통하여
전파되게끔 하시는 말씀이나 내적(혹은 효력있는 ) 부르심을 통하여 성경에 의해 듣는 자들의 마음 속에 기록하시는 말씀이나 동일한 한
말씀이다.”
4. 반대 의견들에 대한 고찰
1) 이 교리는 복음 전도열과 선교열을 식게 만든다는
주장이다.
2) 믿지 않는 자들이 이 교리를 도구로 삼아 그들이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이유를 변명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들의
불신앙을 하나님 탓으로 돌릴 수도 있다.
3) 유효적 부르심에 관한 교리는 앞서 논의한 바 있는 하나님의 주권성과 인간의 책임성 간의
역설을 무시하는 결과를 빗고 있다고 말한다.
우리의 본성의 상태는 어떤가?
우리는 잃어버린 바 된 죄인들이다. 우리는 죄
가운데 죽은 자들이다. 죄 안에서 죽었기 때문에 우리 스스로가 살아 날 수 없다. 죄 가운데 죽은 우리들이기 때문에 우리의 귀들은 복음의
부르심에 귀가 먹었고 우리의 눈들은 복음의 빛에 대해 멀어 있다. 우리에게는 기적이 필요하다. 이 기적은 하나님께서 자기의 놀라운 은총 속에서
성령을 통하여 우리를 영적 죽음에서 영적 생명으로 영적 암흑에서 그 분의 기이한 빛 가운데로 효력적으로 부르실 때에만 일어날 수
있다.
7장 중생
중생(거듭남) 혹은 신생이라고도 한다. 이 생명은 하나님이 하사하신 선물이다. 중생은 구원의
과정 중 첫 출발을 장식하기에 더욱 중요한 주제이다.
1. 세 가지 의미에서의 중생
1) 중생이란 새로운 영적
생명의 시작을 의미하는데 이것은 성령에 의해 우리 안에 심기워 지며 우리로 하여금 회개하고 믿음에 이르도록 하는 의밍에서의 중생이다. (요
3:3,5)
2) 심겨진 새 생명이 처음으로 나타날 때를 가리켜 중생이라 하기도 한다. (약 1:18, 벧전 1:23)
3)
하나님의 창조세계가 최종적인 완성의 상태에 이르는 것을 중생이라 하기도 한다. (마 19:28)
좁은 의미의 중생의 의미가
중요하다. 즉 성령께서 사람들을 그리스도와 연합하게 하시며 그들의 마음을 돌이키사 그들로 하여금 전에는 영적으로 죽었으나 이제는 영적으로
살아나게 하여 죄를 기꺼이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며 주님을 섬기게 하신다.
2. 인간 부패성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
중생에 대한 올바른 이해는 인간의 부패성에 관한 이해에 거의 매달려 있다. 타락한 인간의 본성이 철저하게 부패하였다는
사실은 신약 성경에서 잘 가르처 주고 있다. “너희의 허물과 죄로 너희는 죽었다.-----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도다. (엡 2:1, 4-5)
3. 중생에 관한 성경의
가르침
오직 하나님만이 사람의 마음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으며 비로서 그때에야 타락한 인간이 하나님 보시기에 선한 일들을
다시 시작할 수 있다. 신 30:6에서는 우리의 영적인 갱신을 마음의 할례라고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성경은 우리가 진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기 전에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의 안들을 깨끗하게 하셔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다.
신약 성경에는 중생에 대하여 더 많은 가르침을
준다. 요한복음 3장에 니고대모의 가르침은 중생에 대한 핵심을 보여주고 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다시 태어나지 않고는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요 3:3) 다시 태어나야 하는데 이 새로운 출생은 위로부터의 출생이라는 것이다. 그들의 믿음 뒤에는 그들을
영적으로 다시 태어나게 하시는 하나님의 기적적인 행위가 있다.
중생을 요약하면 중생은 영적인 죽음에서 영적 생명으로의 전적인 변화이며
성령에 의해 역사되며 우리는 전적으로 수동적이다. 이는 우리 본성의 내면적 새로워짐을 맗라는데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의 열매이며 그리스도와 연합을
통하여 일어난다.
4. 중생의 본질
1) 중생은 갑작스런 변화이다.
2) 중생은 초자연적인
변화이다.
3) 중생은 근본적인 변화이다.
a) 중생은 새로운 영적 생명의 이식을 의미한다.
b) 중생은
한 인격 전체에게 영향을 미치는 변화이다.
c) 중생은 의식 밑에서 일어나는 변화이다.
5 저항할 수 없는
은혜
칼빈주의자들은 소위 “불가항력적 은혜”를 믿는다. 이 문구는 소위 “칼빈주의 5대 교리”를 지칭하는 TULIP(튜립)의 네 번째
약어이다. 이 의미는 중생은 일방적이지 상호협력적 사역이 아니다. 하나님과 인간이 함께 협력하여 이루어 나가는 일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
혼자만의 사역이다. 우리를 거듭나게 하는 은혜는 참으로 거절할 수 없는 불가항력적 은혜라는 것이다.
6. 중생과 다른 교리와의
관계
1) 중생과 효력적 부르심과의 관계 : 협의의 중생을 효력적 부르심과 동일한 것으로 취급하려 한다. 이미 17세기 신학이
이 두 가지를 동일하게 취급하였다. 효력있는 부르심은 하나님의 주권적 사역으로 회개외 믿음을 통하여 부르심에 응답하는 것이기에 중생과 별다름이
없다.
2) 중생과 돌이킴과의 관계 : 좁은 의미에서의 중생은 돌이킴(회심, 개종)과 동일시될 수 없고 구별되어야 한다. 중생은
돌이킴에 이르게 된다.(회개와 믿음을 통하여) 다시 말하면 돌이킴은 중생이 일어났다는 외형적 증거라 할 수 있다. 즉 중생이 돌이킴보다
앞선다. 루디아성 자주 장사의 돌이킴이 그 예이다.
3) 중생과 성화의 관계 : 일반적으로 성화는 평생 과정이라 할 수 있다. 이러면
중생은 성화의 출발점이라 말할 수 있다. 중생은 사회적 측면을 갖고 있다. 즉 “거듭난다”는 말은 개인주의적 의미로 “개인 구원”을 가르치는
경향이 있다.
4) 중생과 세례와의 관계 : 세례는 죄의 용서를 부여하는 방법이다. 세례는 믿음을 강하게 하고 세례는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시는 사역이다. (딤 3:5)
그러나 세례를 통해 받은 중생도 다시 상실될 수 있다고 로마 카토릭교와 루터교들은 말한다.
그러나 개혁주의 입장은 세례는 우리의 중생에 대한 증표와 인이라고 생각한다. 신약은 세례를 통해 세례 받은 자에게 은혜의 언약 또 그가
그리스도께 접붙임바 되었다는 사실, 중생했고 죄를 용서받았고 하나님께 자신을 드렸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새 생명 가운데 걷게 된다는 증표와
도장으로 주어진다.
8장 돌이킴(Conversion)
1. 돌이킴이란 무엇인가?
돌이킴이란 거듭난
사람이 의식적인 행동을 통하여 회개와 믿음 안에서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이라 정의한다. 돌이킴은 두 가지의 돌아섬을 의미한다. 하나는
죄로부터의 돌아섬이며 또다른 하나는 하나님을 향한 섬김에로의 돌아섬이다.
2. 돌이킴 : 하나님과 사람의
일
돌이킴은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사역이다. 비록 돌이킴이 거듭남의 외형적 증거이긴 하지만 거듭남을 통하여 심겨진 새로운
생명은 오직 하나님께 의존함으로만 계속적으로 존재하게 된다.
예수님께서는 거듭남을 통하여 얻게된 새 생명은 우리가 그 분과 계속적으로
연합하여 있는 한 나타나게 된다고 가르치셨다.
좁은 의미에 있어서 돌이킴을 거듭남(중생)으로부터 구별짓는다면 돌이킴은 사람의
사역이라 할 수 있다. 사실상 신구약을 통하여 돌이킴은 하나님의 사역이라기보다는 사람의 사역으로 종종 묘사되곤 한다.
사례를 찾아보면
구약에서는 사 45:22, 겔 33:11을 생각하고 신약에서는 행 2:38, 행 16:31,롬 10“9에서 찾아 볼 수있다.
3.
여러 가지 형태의 돌이킴
진정한 돌이킴은 단회적 사건이다. 그 예는 성경에 많이 있다. 나아만(왕하 5;15) 므낫세(대하
33:12-13) 삭개오(눅 19:8-9), 오순절의 삼천명(행 2:1), 사울(행 9:1-19), 고넬료(행 10:44-48), 루디아(행
16:14), 빌립보 감옥의 옥사장(행16:29-34)
성경은 가끔 소위 민족적 개종에 대하여 언급한다. 즉 전체 국가가
주님께로 돌아오는 때를 가르킨다. 그 예로 여호수아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만을 섬기고 그에게 복종하기로 한 경우(수 24:14-27)
히스기야 시대(대하 29:10-36), 요시야 당시 (왕하 23:1-3) 또한 요나의 설교에 따라 니느웨 사람들의 개종(욘 3;1-10)을 들
수 있다.
일시적 개종도 있다. 진정한 회심이 아니라 잠정적으로 그렇게 보이는 경우이다. 씨뿌리는 자의 비유에서 바위틈에 떨어진
씨를 받은 사람이라 할 수 있다.
또 다른 개종으로 제 2의 회심을 말할 수 있다. 다윗의 회심이 이렇다. 시 51편은 그의
제 2의 회심을 기록하고 있다. 요한 계시록에는 소아시아 7교회에게 편지를 보내는데 에베소 교회에 대하여 “회개하고 처음 행위를 가지라”(계
2:5)고 말씀하신다.
4. 돌이킴 형태의 다양한 변형들
돌이킴이 한 사람의 전 인격이 관영되는 일이긴 하여도 주로
지 정 의에 관계하고 있다.
주로 지성적인 개종의 좋은 예가 루이스(C. S. Lewis)의 경우이다. 그는 지적인 문제들과 회의들과
씨름하였으나 결국 하나님께 항복하고 말았다.
의지적인 개종의 예로는 어거스틴(Augustine)을 들 수 있다. 그는 자기의 죄에
대하여 고민하고 갈등하였으나 아무런 열매를 맺지 못하던 그가 로마서 13:14을 읽고 그리스도 안에서 극복할 힘을 얻게 된다.
감성적인 개종의 예로는 존 번연(John Bunyan)을 둘 수 있다. 그는 자기가 용서받을 수 없는 죄를 지었다는 심한 내면적
정서적 갈등과 고통의 세월을 보낸 후 최종적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안식함으로 영혼의 평안을 가졌다.
9장
회개
마태복음에는 자기들의 죄에 대하여 슬퍼한 두 사람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한 사람은 자기의 주님을 부끄럽게도 부인했던
베드로이고 다른 한 사람은 은 삼십 냥에 자기의 주인을 배반한 유다이다. 이 두 사람 사이에는 하늘과 땅의 차이가 있었다. 죄의 용서함과
회복이라는 선물을 받게 된 베드로의 회개는 참된 것이었지만 유다의 회개는 그렇지 못하였다.
1. 회개의 중요성
한
마디로 바울 사역의 목표는 사람들을 회개에 이르게 하는 것이었다. 예수님 회개의 선포는 예수의 고난과 부활의 목적이라고 할 수 있다.
요한
계시록에서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하여 말씀하시는 주님의 음성은 회개를 촉구하는 엄한 음성이었다.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계 3:19)
2. 회개와 믿음의 관계
회개가 먼저인가? 믿음이 먼저인가?
신학자들 사이에 논쟁이 있다. 어떤 이는 회개가 믿음에 앞선다고 하고 어떤 이는 반대로 이야기 한다. 칼빈은 분명히 이야기 한다. “회개는 끈임
없이 믿음을 뒤따라야 할 뿐 아니라 믿음으로부터 나와야 한다.” 고 했다.
이 두 가지는 모두 중생(거듭남)으로부터 나오며
돌이킴(회심, 개종)의 두 가지 측면이 있다고 했다.
3. 단어 연구
회개의 구약 히브리어는 “니함”과 “수브“가
있다. ”니함“은 유감스럽게 여기다. 불쌍히 여기다. 잘못에 대하여 회개하다 라는 뜻이 있다. ”수브“는 돌이킨다. 반대 방향으로 가다 하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오순절에 베드로가 외쳤던 회개는 예수를 향한 유대인들의 판단을 뒤집으라는 외침이었다. 아덴 사람들을 향한
바울의 회개는 하나님에 관한 그들의 관념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와 그 분 안에서 삶을 가지라는 호소이었다.
4. 회개의
개념
회개란 중생한 사람이 온전한 삶의 변화를 통해서 새로운 사고와 감정과 의지를 반영하면서 죄로부터 돌아서서 나님을 향하는
의식적인 돌아섬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회개는 단일적인 경험이다. 즉 회개는 여러 부분들로 나뉘어지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회개는 다음과 같은 측면들로 구별될 수 있다.
1) 지적인 측면 : 참된 회개는 무엇보다도 먼저 하나님의
거룩함과 존엄성을 아는 지식을 포함한다.
2) 감정적인 측면 : 단지 죄의 결과들에 대해서만 아니라 죄 그 자체에 대한 가슴저리는
슬픔이 있어야 한다. 이것을 바울은 “경건한 슬픔”이라고 불렀다.
3) 의지적인 측면 : 죄로부터의 내면적인 돌아섬과 용서를 추구함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목적과 동기의 변화도 있어야 한다. 내면적인 변화는 반드시 외형적으로 나타나야 한다. 우리는 감사한 순종을 통하여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한다.
5. 회개 : 하나님과 사람의 일
성경은 회개룰 가리켜 하나님의 사역인 동시에 인간의
사역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이미 회개를 사람의 일로 묘사하고 있는 구절들을 보아왔다. 회개를 촉구하며 하나님께로 돌아오라고 요청하고 있는
것이다.(사 55:7 겔 33:11 마 4:17 행 3:19) 그러나 행 11:18에서는 히개가 하나님의 사역으로 분명히 기술하고
있다.
6. 회개는 한평생 계속 지속되어야 한다.
우리 자신을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자기를 따르라고
요구하신 그리스도의 요청은 우리가 마땅히 평생토록 해야할 일이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바울도 그의 독자들에게 이 세상을 본받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으라고(롬 12:2) 말한 적이 있다. 이 말은 우리가 한 평생 이루어 나가야 할 사명이며 도전을
말한다.
회개가 평생의 작업이라는 사실은 다음과 같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다.
1) 그리스도인 생활의 초반부에
있는 처음 회개와 그의 평생토록 이어지는 회개 사이에는 구별이 있어야 함을 암시하고 있다.
2) 평생에 이르는 의미에서의 회개가
근본적으로 성화와 다르지 않다는 것을 관찰할 필요가 있다.
3) 회개는 결코 우리에 의해서 완전하게 이루어질 수 없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10장 믿음
1. 믿음의 중요성
신약에서 믿음으로 사용된 명사와
동사는 약 240번 나온다. 믿음은 회개와 함께 돌이킴의 본질적 측면에서 구원의 필수 요건이다. 믿음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신 유별난
행위로(요 6:29)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행하도록 명하신 일이다.(요일 13:23)
2. 여러 성경 저자들에
의해 묘사되고 있는 믿음
믿음은 신약시대 뿐만 아니라 구약에서도 하나님의 백성의 삶에서 중심이었다. 일명 “어머니의 약속”으로
불리는 창 3:15에서 최초의 은혜언약의 계시는 하나님의 백성을 향하여 믿음의 응답을 촉구하고 있다. 히브리서에서 언급하고 있는 것처럼 아벨을
하나님께 믿음으로 보다 나은 제사를 드렸고(히 11:4) 믿음으로 에녹은 하나님과 동행했으며 (5절) 그리고 믿음으로 노아는 의의 상속자가
되었다.(7절)
족장 시대를 보면 아브라함이 구약에서 뛰어난 믿음의 본으로 나타나기에 “믿는 자들의 조상”이 되었고 바울은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의롭게 되었으며 (롬 4:1-3) 모든 믿는 자는 아브라함의 자녀라고 (갈 3:7) 가르친다. 사라 이삭 야곱 이런 모든
자들도 믿음으로 살았다.
요한복음에서 믿음은 거의 백번 정도 나온다. 여기서 강조점은 이적적인 신앙이 아니라 구원하는 신앙이다.
요 3:16에서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라고
했다.
3. 신약의 다른 부분에서 언급된 믿음
히 11:1에서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한 것들의
증거다”라고 표현했다.
믿음은 신약에서 수많은 현저한 특징들로 묘사되어 있다. 그것은 그리스도께로 나아가는 것으로 묘사되고 또한 믿음은
그리스도를 먹는 일로 묘사된다. 한편 믿음은 그리tm도 안에 있음을 말하기도 한다.
4. 칼빈의 견해
참된 믿음이란
하나님을 아는 지식 특히 그 분의 자비를 아는 지식으로 구성된다고 한다. 칼빈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자비하심에 대한 확고하고 분명한 지식은
그리스도 안에서 겂없이 주어진 진리에 기초한 것으로 성령을 통하여 우리의 생각에 계시되었고 우리의 마음에 인쳐진 것이다.”라도
표현했다.
칼빈은 믿음을
1) 하나님과 그리스도와의 인격적 관계
2) 전혀 알지 못하거나 반쯤 아는 진리들에
대한 단순한 찬동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를 확실하게 앎이며
3) 의심에 반대하는 견고한 확신이나 신뢰가
그것이다.
4) 믿음에 대한 어떠한 공로도 모두 반대한다.
5. 믿음의 개념
믿음은 여러 측면에서 다음과
같이 구분될 수 있다.
1) 지식이다. 우리가 알지 못한 자나 잘못알고 있는 자를 우리는 믿을 수 없다고 하는 것은 분명하다. 성경은
지식이 없이는 참된 믿음이 있을 수 없다고 분명히 가르친다.
2) 찬동이다. 찬동이란 하나님 말씀의 가르침들을 참되다고 확고히
받앙들이는 행위를 뜻한다.
3) 신뢰이다. 믿음은 자신을 보지 아니하고 구원하시는 그리스도를 전적으로 의지하는 것이다. 신뢰에는
순종이 포함된다는 것을 첨가시켜야 한다.
6. 믿음의 중심적 신비
믿음의 중심적 신비라는 의미는 믿음이 하나님의
선물이면서도 동시에 인간의 일이라는 사실이다. 여기에 또다시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책임이라는 역설이 있다.
1) 하나님의
선물로서의 믿음
믿음은 하나님의 선택의 열매이다.
믿음은 중생의 결과이다.
믿음은 성령의 역사의
결과이다.
예수님은 믿음의 창시자이다.
하나님은 믿음을 주시는 분이시다.
2) 인간의 행위로서의
믿음
가장 평범한 믿음은 인간이 복음에 대한 반응으로 무엇인가를 해야한다는 것을 살피는 것이다.
7. 구원의
확신
구원의 확신에 대한 로마교회의 부정적 태도는 결국 복음의 핵심을 건드리는 문제였기 때문에 개혁자들은 이 문제에 있어서
로마교회의 가르침을 신랄하게 공격했다. 여기에 포함된 근본 문제는 인간이 은혜로만 구원을 얻느냐 아니면 부분적으로 자신의 구원이 공적이 되는
선행에 좌우되느냐 하는 것이다. 후자가 사실이라면 누구도 구원을 확신할 수가 없다. 그러나 개혁주의자들의 가르침처럼 전자가 사실이라면 누구도
구원을 확신할 수가 있다.
11장 칭의
마틴 루터가 종교개혁을 일으킬 당시 일화 하나를 소개한다. 그가 갖고 있던
죄의식을 벗어버리기 위하여 딱딱한 마루 바닥에서 잠을 자기도 하고 손과 무릎으로 계단을 오르내리면서 갖은 고생을 했지만 죄의 고을은 깊어만
가더란 것이다.
그가 시편을 공부하면서 “하나님의 의”가 자주 언급되면서 이것이 하나님의 형벌적인 의로 죄인들을 멸하시는 것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 루터는 자신이 죄인임을 실감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로마서를 읽으며 1장 16-17절에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에서 사도 바울이 여기에서 생각한 ”하나님의 의로우심“이란 죄인들을 벌하기 위한 하나님의 형벌적인
의가 아니라 오히려 필요한 죄인에게 하나님께서 주시는 의로움으로 죄인이 믿음으로 받는 것이다. 이는 흠없는 완전한 의로 그리스도께서 획득하셨고
하나님께서 모든 믿는 자들에게 은혜로 주시는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루터는 더 이상 자신의 선행으로 평안의 기준을 찾을 필요가 없었다. 그제서야
자신을 떠나서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볼 수 있었고 두려움 없이 믿음으로 살아가게 되었다고 한다. 이것이 종교개혁의 불씨가 되었다고
한다.
칼빈도 이와 비슷하게 칭의의 교리를 종교의 중요한 전환점으로 받아드렸다.
1. 칭의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
창 15:6에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셨다.”고 한다. 수많은 씨의 약속이 그로 인해
땅의 모든 백성이 복을 얻을 것이라고 한 자의 출생의 약속이 포함되었음이 틀림이 없기에 (창 12:3) 여기에 아브람의 믿음은 오실자인 메시야를
믿었을 것이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이 믿음이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의롭다 여기셨는데 즉 믿음으로 아브람은 의롭게 되었다.
롬 4:3,
갈 3:6에서 믿는 자들의 조상 아브라함이 행위가 아닌 믿음으로 의롭게 된 것을 제시하고 있고 야고보도 약 2:23에서 창 15:6을 인용하고
있다.
믿음에 의한 칭의의 교리는 다음의 것을 알 수가 있다.
1) 이 교리는 구약에 기원하고 있다. (롬
3:21)
2) 이 칭의는 믿음에 의한 것이다. (롬 3:22)
3) 칭의의 근거는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이다. (롬
3:24)
2. 칭의에 대한 로마교회(카토릭)의 견해
16세기 로마교회는 루터와 칼빈에 의한 개신교회의 칭의에 대한
가르침에 날카롭게 반대했다. 이를 반대한 내둉이 트랜트 종교회의 6회기애서 나온 규범과 칙령들 속에 포함되었다. 이 6회기는 1546년 6월
21일부터 1547년 1월 13일 까지였다. 1547년 후기에 칼빈은 이 의사롤 논평을 책으로 출판하였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트렌트 신조에 의거한 로마교회 신학에서 칭의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의를 신자에게 전가시킨 선포적 행위로써 보다는
인간의 영적이며 도덕적인 본질에 변화를 주는 은혜의 주입으로 생각한다는 것이다. 로마교회는 오직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만을 통해서 인간이 의롭게
된다는 것을 명백하게 부인한다.
2) 그러므로 믿음은 칭의에 있어서 중심적 의미가 아니라 부차적이다. 성경은 롬 3:23에서 믿음에
의해서 의롭게 된다고 가르친다. 반면 트렌트 신조는 믿음에 의해 의롭게 된다는 의미는 있으나 그 강조가 아주 약하다고 했다.
3)
칭의의 은혜는 한 번 받으면 다시 잃지 않는다. 롬 8:30에서 하나님께서 의롭게 한 자를 또한 영화롭게 하실 것이라고 가르친다. 그러나 트렌트
신조는 이것에 반대하여 칭의를 잃어버릴 수 있다고 한다.
4) 칭의로 받은 의 또는 의로움은 향상될 수 있다고 한다. 트렌트 신조는
신자가 칭의로 받은 의를 그리스도의 완전한 의의 전가로 보지않고 신자의 신행을 통해 증감될 수 있는 우리 속의 주관적 자질로 보는 것이
분명하다.
5) 칭의는 신자들로 하여금 영생을 받을 수 있게 해주는 공로가 된다고 한다. 그러나 바울의 가장 강력한 주장은 어느 누구도
그 자신의 공로에 의해서 영생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상과 같은 이유로 종교개혁자들이 칭의에 대한 로마 카토릭의 개념을 왜
그렇게 맹렬하게 반대했는지를 명백히 알 수가 있다.
3. 개혁주의 고백서들에 나타난 칭의
16, 17세기의 개혁주의
고백서들은 종교개혁 개신고의 칼빈주의파의 사고를 반영하고 있다. 특히 하이델베르그 교리문답과 벨직 고백서 그리고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서
표현하고 있는데 그 내용을 다음 주제 칭의의 개념에서 정리하고자 한다.
4. 칭의의 개념
칭의는 하나님의 은혜이며
법적인 하나님의 행위이다. 이로써 하나님은 믿는 죄인들을 의롭다고 선언하시며 그것은 그리스도의 의에 근거하여 그렇게 하시는 것이다. 곧
그리스도의 의가 그들에게 양도되고 그들의 모든 죄를 다 용서하시며 그들을 자기의 자녀로 입적시키며 또한 그들에게 영생을 누릴 권리를 주는
것이다.
칭의의 교리를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1) “하나님의 진노의 실상”에 대한 인식을 전제로 한다. 우리가
관계하고 있는 그 하나님은 바로 거룩하신 하나님이기에 우리의 죄에 대하여 진노하실 수밖에 없다.
2) 칭의는 하나님의 “선언적” 혹은
“법적인” 행위이지 어떤 과정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의롭다고 선언 혹은 선고하시는데 우리 자신들이 사실 어떤 존재냐는 것에 의거하지
않고 우리의 착한 행실 때문이 아니며 오직 그리스도의 의에 근거해서 하신다. 이 복은 전적으로 무조건적이다. 이 선언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진노에서 구원을 받으며 하나님과 화목되는 것이다.(골 1:22)
3) 칭의는 “오직 믿음으로만” 받을 수 있다. 우리 자신들의 선한
행위로는 어떤 방법으로도 그것을 받기에 합당하지 않다.(롬 3:28)
4) 칭의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에게 전가되어서 우리의 소유가 될 수 있기에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가 되었기 때문이다.
5) 칭의는 우리를 위한 “그리스도의
대속적 사역”에 기초를 두고 있다. 이사야 53장에서 가르치고 있듯이 이 장을 우리는 “구약의 복음”이라고 부른다. 그 장에서 주께서
그(고난받는 종으로서 행 8:35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이다)에게 우리 모두의 죄악을 담당시키셨다.(6절)는 것과 이 종이 많은 사람의 죄를
떠맡았다.(12절) 고 했다. 베드로는 이 선지자의 말씀을 자기의 말처럼 그대로 되플이 하여 그리스도께서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다고 증언했다. (벧전 2:24)
6) 칭의는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에게 전가되는 것을 포함한다.
7) 칭의에서는
하나님의 자비와 공의가 함께 나타난다.
8) 칭의는 소극적인 면과 적극적인 면을 다 가지고 있다. 소극적인 면에서 칭의는 우리의 죄에
대한 용서를 의미한다. 적극적인 면에서 칭의는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들로서 입적되는 것과 우리가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권리를 받게 되는 것을
포함한다.
9) 칭의는 종말론적인 것을 내포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마지막 날 심판의 날 우리에게 선고하실 판결을 현재로 옮겨온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심판 날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데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는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기어졌기 때문이다.(요
5:24)
10) 칭의가 성화로부터 절대 분리되어서는 안 되지만 이 두 복은 서로 구별된다. 고전 1:30에서 하나님은 자신이 의롭다고
하신 사람을 반드시 성화도 시킨다. 그리고 칭의와 성화는 함께 발생하지만 그것들은 서로 주의 깊게 구별되어져야 한다. 즉 칭의는 죄에 대한
책임을 제거하는 반면 성화는 죄로 인한 오염을 방지한다. 칭의는 신자의 밖에서 일어나며 성화는 신자의 안에서 일어난다. 칭의는 평생에 단 한 번
일어나며 성화는 생애에 걸쳐서 계속되는 과정이며 현생이 끝나기 까지 완성되지 않는다.
12장 성화
하나님은 그
자신이 거룩하시기 때문에 그의 형상대로 창조한 우리들에게도 역시 거룩해지기를 바라신다. 우리 성도들을 거룩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사역을 성화라고
한다.
레 19:2 “너희는 거룩하라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
벧전 1:15-16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자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서 거룩한 자가 되라 기록하였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찌어다”
1. 정의
하나님의
형상에 따라서 죄의 오염으로부터 우리를 건지시며 우리의 본성 전체를 새롭게 하시어서 우리가 주님을 즐겁게 하는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하시는
,성령의 은혜로운 역사를 성화라고 정의한다. 성화의 주체가 되시는 하나님은 전에 우리가 소유했던 것과 전적으로 다른 어떤 능력과 재능을 우리에게
부여하시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주신 은사들을 죄된 방법대신 올바른 방면으로 사용하도록 역사하신다.
2. 거룩의 성경적
의미
거룩이라는 단어의 근본적인 의미는 다른 것으로부터 분리 즉 어떤 영역이나 범주 속에 있는 일반적이고 세석적인 사물이나
사람으로부터의 구별이다.
바울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안에서 그와 함께 연합되었기 때문에 거룩하게 되어졌다고 가르친다.
그리스도와 연합한 가운데 우리의 성화는 진보한다. (고전 1:30)
종교개혁 속에서 선언된 가장 중요한 진리는 이신칭의였다.
고로 우리는 믿음에 의하여 성화된다고 하는 점도 역시 동등한 진리이다.
신앙 속에서 성화의 방편은 무엇인가?
1)
우리는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우리의 연합을 계속 유지한다.
2) 우리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죄는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더 이상 지배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인다.
3)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죄를 극복하게 하시고 하나님을 위하여 살 수 있도록 역사하시는 성령의 능력을
움켜 잡는다.
4) 믿음은 수용하는 기능일 뿐만 아니라 작동하는 능력이다. 그 자체의 본성 때문에 믿음은 영적인 열매를
산출한다.
3. 성화의 모형
성화의 모형은 하나님을 닮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완전한 형상이시다.(요
14:8-9, 고후 4:4, 골 1:15, 히 1:3) 그래서 우리는 성화의 모형이 그리스도와 같다고 말할 수 있다.
성화는 우리들이
하나님의 형상에 일치되도록 회복되는 것을 의미한다. 즉 우리는 점점 더 하나님과 같이 또는 하나님의 완전한 형상인 그리스도와 같이 되는 과정
중에 있다. 이 과정을 우리는 하나님의 역사와 우리의 능동적인 노력이라는 두 가지 관점에서 생각해 보아야 한다.
1) 하나님의 역사 :
성경은 성화시키는 하나님 자신이 우리를 그리스도와 같이 변화시켜 자지의 형상대로 회복시킨다고 가르친다.
2) 우리의 능동적인 능력 :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의 회복을 위해서 노력해야 할 책임이 있다. 즉 우리는 그리스도의 모본에 따라서 더욱더 그리스도와 같이 되기 위해서 분투해야
한다. 하나님 형상의 회복은 직설법인 동시에 명령법이다.
4. 성화에 있어서 하나님과 그의 백성
성화는 하나님의
사역이며 또한 그의 백성의 책임이라는 것이다. 성경은 성화의 사역은 성부 성자 성령 삼위가 공히 담당하신다고 묘사한다.
예수님은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요 17:17)라고 성부께 기도하셨다. 이 구절은 성부가 성화의 주체임을 드러내고 있다.
그리스도는
“물로 씻어 말씀으로” 교회를 깨끗하게 하시는 성화의 주체자로 계시되었다.
베드로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입은 자들 --- (벧전 1:2)
5. 즉각적이고
점진적인 성화
개혁주의 신학에서는 하나님의 즉각적인 행위인 동시에 단번에 완성되는 칭의와 구별하여 성화를 신자의 전 생애를 거쳐
계속되는 것으로 구별하였다.
성화는 즉각적인 동시에 점진적인 과정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즉각적인 의미는 성화는 우리를 죄에서 죽게
하시고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시키며 새로운 피조물이 되게 하시는 성령의 사역을 의미한다. 점진적인 의미는 성화는 계속 시롭게 하시며 우리를
그리스도의 형상에로 변화시키며 우리를 계속 은총가운데 성장하도록 하시며 우리의 거룩이 완전하게 하시는 성령의 역사로 인식되어져야
한다.
6. 성화의 사회성
가끔 성화는 개인적인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이것은 심각한 착오이다. 성화는 중요한
사회적 공동체적 측면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개체적으로 성화되는 것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지체의 일원으로 성화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롬 12:4-5) 성화는 다른 사람으로부터 분리된 개인에게 관계할 뿐만 아니라 사회적인 요구를 포함한다고 가르친다.
결론적으로 사회적
관심없이 성화는 완성되지 않는다. 성화는 우리가 법률 정치적 행위 그리고 매개체의 사용을 통하여 전 분야에 정의가 시행되도록 노력해야 함을
의미한다.
7. 성화의 목적
성화의 최종 목적은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데 있다. 우리가 영광스런 신적 사역에
대하여 이야기 함으로 우리는 우리 자신의 미래 행복이 아니라 단지 위대하신 우리 하나님의 영광에 대하여 근본적으로 생각해야
한다.
성화의 가장 가까운 목적은 하나님 백성의 완전이다. 이 완전은 하나님 형상의 역사에 있어서 최종 단계가 될 것이다. 이를 위하여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롬 8:17) 우리의 성화가 완전해졌을 때 우리는 전적으로 영화로우신
그리스도와 같이 될 것이다. 그 때 우리는 그리스도를 대면하여 볼 수 있을 뿐 아리라 영원한 세상에서 하나님의 은총의 영광을 찬양하며 살게 될
것이다.
제 13장 참 신자들의 견인
요 10:28은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고 말씀하신다. 이는 우리를 끝까지 안전하게 지키신다는 것은 결국 우리가 예수님을 붙드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우리를 붙들어 주신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은 결단코 우리에게서 떠나지 않습니다.는 의미라고 설명할 수가 있다.
1.
견인의 개념
참된 신앙을 소유한 성도들은 믿음을 전적으로 잃어버릴 수가 없다. 참 신앙을 가진 성도가 그 신앙을 언젠가 잃어버릴
수 있는가? 이 질문에 대하여 개혁 신학에서는 “아니다”라고 대답한다. 왜냐하면 참 신자는 그들의 능력 때문에 인내하는 것이 아니라 변함없는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인내하기 때문이다.
참 신자들은 그들의 구원을 잃을 수 없으며 구원받지 않는 상태에서 사망할 수도 없다. 더욱 이
고백은 성도들의 은혜의 상태 속에서 꾸준히 견인할 것이기 때문이다.
2. 이 교리의 성경적 근거
1) 복음서에 있는
구절들
눅 22:31-32, 요 5:24, 요 6:39, 요 10:27-28,
2) 서신에 있는 구절들
롬
8:29-30, 고전 1:8-9, 엡 4:30, 빌 1:4-6, 딤후 4:18, 히 7:23-24, 밷전 1:3-5
3. 견인교리에
대한 이의
1) 견인교리는 나태와 방종으로 인도한다.
성경은 이런 방종에 대하여 경고한다.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고전 10:12)
2) 견인교리는 성경과 상충한다.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3 가지의 성구들을
묶어서 예증으로 제시한다.
① 믿음을 지속하라는 권면
② 배교에 대한 경고
③ 실제적인 배교의 경우들
4. 견인에
관한 돌트 신조
참 신자의 견인교리를 설명하는 개신교 신조에 있어서 돌트 신조(1618-19)보다 더 훌륭하고 완전한 진술은
없다. 중요한 50개의 교리의 요점을 보여주고 있는 이들 진술들은 명백하고 짜임새가 있다.
처음 두 조항은 연약하기 때문에 매일
범죄하는 신자의 성향에 대하여 설명한다.
3조는 신자 자신의 능력에 방임해 둔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 속에 더 이상 머물러 있을
수가 없음을 진술한다.
4조는 만일 참 신자가 깨어있거나 기도하지 않는다면 진실로 심각한 죄 속에 빠질 수 있음을
지시한다.
7조는 하나님께서 그의 말씀과 성령을 통해서 심각한 죄에 빠진 그의 백성들을 회개시켜 확실하고도 효과있게 새롭게 하신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8조는 하나님의 백성의 견인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달려있음을 논증한다.
그러나 돌트 신조는 한
번 구원을 받으면 어떻게 살든지 관계없이 항상 구원을 받는다는 생각에는 반대하고 있다. 12조와 13조는 다음의 사실을 분명히 확정한다. 즉
하나님에 의한 성도 견인의 보증은 생활의 부주의함이나 도덕적인 방종을 야기시키기는 커녕 실제로 경건을 위한 자극이 된다.
5.결론적
고찰
하나님은 그의 능력으로 자기의 백성들이 자기에게서 떠나 타락하지 않도록 지키시며 그리스도는 누가 자기의 손에서 자기의 양을
빼앗아 가도록 허락하지 않으시며 그리고 성령은 구속의 날까지 그들에게 인치셨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는 그의 손으로 우리를 붙들어 주심으로
두리를 안전하게 지키신다. 결론으로 우리가 하나님을 붙드는데 의존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붙들어 주심에
의존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