탱자나무는 중국 양쯔강 상류가 원산지라고 알려져 있다. 보통 키 2~4미터 정도로 자라는 자그마한 나무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가시나무는 가시가 촘촘히 달린 나무를 가리키는 보통명사지만, 실물로 형상화 한다면 탱자나무가 대표 가시나무다. 길이 손가락 두 세 마디 남짓한 날카로운 가시가 가지마다 빈틈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달린다.
장수 황씨 탱자나무 스케치에 여념이 없는 어느 노화가
탱자나무는 자기 집이나 땅에 경계를 정하고 함부로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울타리가 기본 쓰임이다. 그 외 옛 사람들은 죄인을 멀리 귀양 보내 집안에만 가두어 두는 위리안치(圍籬安置)란 형벌에 탱자나무를 이용했다. 집 주위에 탱자나무를 빙 둘러 심어 외부세계와 단절을 시킨 것이다. 또 옛날에는 성을 쌓고 주변에는 해자(垓字)라 하여 못을 파고 성벽 바로 밑에 탱자나무를 심어 적군이 기어오르는 것을 막았다. 이런 성을 지성(枳城)이라 하며 해미읍성이 대표적이다. 강화도 갑곶돈대와 사기리의 천연기념물 탱자나무도 옛 강화성 밖에 심었던 나무가 살아남은 흔적이다.
탱자나무는 험상궂은 겉모습과는 달리 동전크기의 새하얀 꽃과 그윽한 향기, 탁구공만한 샛노란 열매는 맛깔스럽고 정겹기까지 하다. 그래서 몇 명문가의 옛 선비들은 집안에다 정원수로 심고 가꾼 흔적을 찾을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크고 오래된 정원수 탱자나무는 경북 문경 대하리의 장수황씨 종택(宗宅) 안에 자란다. 느티나무나 은행나무처럼 크게 자라는 나무에 비하면 크다고는 할 수 없으나 탱자나무로서는 보기 드문 크기다. 키 7.1미터이며 두 그루가 거의 붙어서 나란히 자라고, 뿌리목에서 전체 둘레를 재어보면 두 아름에 이른다. 동쪽 편 탱자나무에서는 발목 굵기의 가지 3개, 서쪽 편 탱자나무는 4개의 가지가 비스듬하게 각 방향으로 뻗어 나와 마치 한 그루인 것처럼 반원형의 아름다운 나무갓을 이루고 있다.
종택은 조선 세종 때의 청빈한 관리로 유명한 황희 정승의 고손자 황시간 선생이 35세 때인 1593년에 살았다는 기록이 있다. 또 임진왜란 당시 영의정을 지낸 류성룡 선생도 이 집에서 공부했다고 한다. 이런 기록 등으로 미루어 종택은 임진왜란 전후에 지어진 것으로 보이며 탱자나무는 당시에 심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따라서 나이는 약 400년에 이르며 오랫동안 주인의 부침을 바라본 역사 현장의 나무다. 이 탱자나무 이외에 전북기념물 112호 이병기 생가, 부여 석성동헌 등에서도 탱자나무를 만날 수 있다.
새하얀 꽃이 활짝 핀 익산 이병기 선생 생가 탱자나무
옛 선비들이 특별히 탱자나무를 정원에다 심은 것은 꽃과 열매를 감상하기 위한 목적만이 아니라 중국의 고사와 관련이 있다고 생각된다. 중국 춘추시대 말기 제(齊)나라의 명재상 안영(?∼BC 500)의 언행을 기록한《안자춘추(晏子春秋)》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안영이 초나라의 왕을 만나러 갔을 때 안영의 기를 꺾기 위해 제나라의 도둑을 잡아놓고‘당신 나라 사람들은 도둑질하는 버릇이 있는 모양이다’하고 비아냥거렸다. 이에 안영은‘귤나무는 회수(淮水-양자강의 한 지류) 남쪽에 심으면 귤이 열리지만 회수 북쪽에 심으면 탱자가 열린다고 합니다(橘化爲枳). 저 사람도 초나라에 살았기 때문에 도둑이 됐을 것입니다’하고 응수했다. 사람은 주변 환경에 크게 영향을 받는다는 고사다. 조선의 선비들은 정원의 탱자나무를 보면서 안영의 말을 되새기고 자신의 처신을 가다듬는 계기로 삼았다.
이곳 종택이 문화재로 지정되어 전체적인 관리 상태는 좋은 편이다. 그러나 이 탱자나무 고목은 90년대 말에 시행한 불필요한 폴리우레탄 인공수지 충전처리의 후유증으로 자람이 신통치 않아 안타까움을 더한다.